용인 향토사의 대부
(사)용인전승문화연구원 이인영 이사장
박숙현(작가)
“요즘 노인의 이삭 줍는 맛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어요. 노인이라서 포기하는 게 아니라 여생을 잘 활용하면 자기 계발이 됩니다. 하루는 저녁이 여유로워야 하고, 1년은 겨울이 여유가 있어야 하고, 일생은 노년이 여유로워야 합니다. 이를 3여라고 합니다. 저녁이 있는 삶도 여기에서 나온 말이죠. 저녁은 하루의 나머지, 겨울은 1년의 나머지, 노년은 일생의 나머지. 이를 여생이라고 하죠. 젊은 시절의 나머지인 여생이 행복해질 수 있도록 방법을 연구하고 실천해 나가고 있습니다.”
세월이 야속하다는 말은 이인영 (사)용인전승문화연구원 이사장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용인의 산과 들을 종횡무진 누비며 용인 향토사학계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던 젊은 청년 이인영 이사장이 벌써 80세가 됐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 그는 여전히 꺼지지 않는 청년의 열정으로 세월을 비껴가고 있다. 세월이 무색하게 젊은 시절 그랬듯 쇠당나귀(오토바이)에 올라타고 여전히 들판을 누비며 문화재를 찾아 나서고 있다.
용인 향토사의 대부 이인영 이사장. 역시 그는 영원한 청년이고 영원한 현역 향토사학자다.
그는 요새 처인구노인회장직을 맡아 평생 일궈온 문화예술에 대한 열정을 4만여 처인구 노인들의 문화예술 향유와 활동 지원에 쏟아부으며 젊을 때보다 더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기도 하다.
“나이 80에 노인을 위해 평소 생각해왔던 모든 것을 쏟아 실행할 기회가 생겨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인생 70~80세가 가장 완숙한 시기라고 여유롭게 말하는 이인영 이사장.
그는 한때 용인 문화의 거인, 움직이는 용인의 백과사전, 용인학 박사, 살아있는 용인 문화사로 불리며 각종 언론매체의 조명을 한 몸에 받았던 인물이다.
언론의 화려한 찬사는 이인영 이사장이 용인 향토사에 끼친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게 한다. 그가 발굴한 문화재 기사가 연일 지방지, 중앙지에 특종을 제공했으며 대서특필 됐다. 잠자던 문화재가 이인영 이사장에 의해 깨어나면서 용인이 다른 어느 시군에 비교할 수 없는 문화재의 보고임이 속속 밝혀졌다.
그는 이처럼 선사시대부터 시대별, 장르별로 켜켜이 쌓여있는 용인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최초로 드러내고 알리기 시작한 인물이다. 그가 있었기에 오늘날 용인의 역사와 문화유산이 체계적으로 정리될 수 있었다. 또 그로 인해 오늘날 용인시민이 자긍심과 함께 문화유산을 향유하는 호사를 누리며 살고 있다. 비단 향토사뿐만 아니라 그는 한·중·일 동양 3국의 역사를 비롯해 고고학, 도자사, 미술사, 초상화, 민속학에 이르는 해박한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가 문화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공직에 몸담고 있던 20대 청년 시절부터였다. 오늘날까지 50여 년 오랜 세월을 문화재와 책을 끼고 살았다.
“나에게 본병과 객병이 있었어요. 내 직업은 공무원이었지만 본병(공직)보다 객병인 향토문화연구 쪽에 더 열의를 가지고 살았으니 기실은 본병이 객병이고, 객병이 본병이었던 셈이죠.”
1960년대 중반부터 용인군청 공보실에서 근무하게 된 이인영 이사장은 그때부터 문화재에 대한 사랑에 빠졌다. 용인약사라는 책을 기반으로 공보지에 문화재를 소개하는 난을 채워나가면서 현장에 나가 사진 찍고 실물을 대하는 게 흥미로웠다.
기흥면에 발령받은 후 공세리 5층 석탑을 최초 발견하면서 진짜 문화재 사랑에 빠졌다. 한국의 석탑이라는 책을 뒤지니 국내
에 5, 6개 정도 남아 있는 고려 후기 석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한 탑이 바로 눈앞에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고 신기하기만 했다.
게다가 68년 즈음, 문교부 소관이던 문화재 업무가 공보부로 이관될 때 용인교육청에 가서 업무 서류 인수를 받아온 게 그였고 실무자가 됐다. 업무가 이관되니 지시가 떨어졌다.
“정몽주 선생 묘에 가서 뭘 조사해 와라. 문화재 업무를 취급하니까 상당히 공부를 하게 됐죠. 옥편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한문 공부도 했죠.”
취미도 있고 지시도 있었기에 그는 포은 묘소나 심곡서원 등의 자료를 수집하고 사진도 찍으면서 업무를 봤다. 경기도에서 최초로 지방문화재를 지정할 때 그동안 축적해놨던 자료로 1착으로 가서 신청했다.
“정몽주 선생 묘소가 그때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됐어요. 심대장군 묘가 3호, 심곡서원 7호, 충렬서원 9호 등 10호 이내로 내가 낸 게 다 지정됐어요. 조광조 묘, 이재 묘 등 유명한 묘들도 그 당시 지정됐죠.”
당시 공보실에 지프차가 배정되던 시절이었지만 그는 직접 오토바이를 사서 문화재를 찾아다녔다.
“쇠당나귀(오토바이)를 타고 안 다닌 데 없어요. 산도 다 올라갔고 엄청나게 탁본도 했죠. 문수산 마애보살, 까막딱따구리도 내가 찾았어요. 오토바이가 안 가는 데가 있어요. 지나가다가 멀리 눈에 띄는 것이 있어 가보면 다 문화재였죠. 고기리 이종무 장군묘, 창리 선돌도 그렇게 지정됐어요.”
문화재 정리가 안 돼 있던 시절, 그는 최선을 다했다.
“지금 돌아보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내 역량대로 산 거예요.”
이 같은 활동으로 후배 향토사가들의 연구 기반이 마련됐다. 용인 의병사, 독립항쟁사 정리도 그로부터 시작됐다.
용인시청 공무원 시절 그는 ‘채제공 어제뇌문비’ 현장 설명으로 김용래 전 경기도지사에게 발탁돼 야전침대를 놓고 밤을 새워가며 경기도향토사료관을 개관시켰다. 또 경기도박물관 기본계획 입안 및 용인 유치를 이끌어 낸 것은 물론, 용인시향토사료관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최초 발견해 지정한 보물, 문화재만도 46점에 이르며, 저서도 내고장용인(용인지역 전란사-몽골침입, 임진왜란, 병자호란 최초 발굴), 용인 의병항쟁 및 독립항쟁사, 용인문화유산총람, 지지총람, 인물총람, 금석문총람 등 30여 권에 이른다.
다수의 논고 논문 중 특히 ‘몽골 제2차 침입과 처인성 대첩 소고’는 전국향토문화연구논문공모 우수상에 선정돼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상을 수상했으며, 이는 경기도문화상 학술부문상 수상과 함께 그의 자부심이다.
향토사와 관련된 활동만 해도 시군읍면지 집필, 각종위원회 등 다양하며, 용인문화원장, 용인문인협회장 등 문화단체장 역임, 수상 경력 등 이루 언급할 수 없을 정도로 많고 화려하다. 그가 평생을 천착해온 향토사와 관련한 업적과 일화는 일일이 나열하기도 벅찰 정도다. 용인향토문화진흥협의회, 용인향토사학회 등 민간 향토사연구단체를 창립시키기도 했다. 훗날 용인문화제, 처인성문화제 등으로 명칭이 바뀐 용구문화제(1986년 1회)를 창안하기도 했다.
용인 향토사의 대부 이인영 이사장은 향토사 외에 문화 예술적 능력까지 겸비했다. 태성고등학교 시절부터 문예반, 취주악단 콘닥터, 트럼펫 연주, 피아노 연주, 미술 활동 등 넘치는 예술적 끼를 주체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당시 시립도서관이 없던 때라 유일한 용인문화원 도서관을 드나들며 책을 많이 읽어 문화원장의 눈에 든 촉망받는 학생이기도 했다.
공직에 들어간 후부터 용인군청합창단, 교회 성가대 등의 지휘와 반주를 했고, 용인 최초의 합창단인 용인문화원 인성합창단 창단 주역이기도 했다. 황근숙 전 용인시여성단체협의회장의 웨딩마치도 그가 쳤다. 그는 용인 문화예술의 태동기를 풍요롭게 이끈 주인공이었다.
고교 시절, 국어 과목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음악, 미술 등 다방면에 걸쳐 우수한 실력과 타고난 재능을 겸비했던 그는 연세대에서 오라고 했지만, 돈이 없어 대학을 포기하고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배운 게 없고 아는 게 없어요.”
율곡 이이 같은 대학자들도 모두가 스스로 터득해서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지 않았는가. 이인영 원장도 스스로 터득해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지 않았는가.
문화재를 보는 천부적인 제2의 눈이 있지 않고서야 어찌 이토록 수많은 업적을 쌓을 수 있었겠는가.
우리나라 최고 석학이었던 고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의 동생이기도 한 그는 “용인에서 죽을 때까지 즐겁게 일할 평생의 일거리가 향토사 아니겠냐”며 요즘도 집필에 속도를 가하고 있다.
박숙현|작가. 저서로 『태교는 인문학이다』 등이 있음. 현재 이사주당과 태교신기, 처인성, 김윤후 등 지역학을 연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