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회 사하모래톱문학상 산문부문 당선작] 지*선 노*옥
■대상
큰고니의 귀향 / 지*선
수 십 마리의 큰고니 떼는 날개 끝을 약간 틀어 하강기류를 따라 지상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 큰고니 떼들은 오천년 전부터 시베리아 몽골 오논강의 혹독한 겨울을 피해 한반도의 낙동강 하류로 기나긴 피난길을 떠나왔다. 각각이 이역만리를 날아오는 동안 낙오되지 않고 생존에 성공한 선택받은 개체들인 것이다. 이번 마지막 착륙에만 성공한다면 당분간 고된 장거리 비행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들의 목적지는 낙동강 하류에 새로 생겨난 작은 하중도(河中島)였다. 섬 주변은 물이 맑아 갈대와 세섬매자기의 군락지가 형성되었고, 먹이를 찾기 위해 물고기들과 갑각류, 곤충과 파충류, 그리고 각종 조류와 설치류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그렇게 모여든 그들은 서로가 서로의 먹잇감이 되어주며 작지만 멋진 생태계를 이루었다. 큰고니는 그 생태계의 겨울철 객원이 될 터였다.
큰고니 떼는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어 속도를 높였다. 지상이 점점 가까워졌다. 다른 무리들보다 먼저 도착하여 양질의 서식지를 차지해야 했다. 마침내 지친 날개를 접고 작은 하중도 근처에 발을 디딘 큰고니 떼가 본 것은 커다란 포유류, 인간이었다. 이것은 큰고니 떼만이 목격했을,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 몇몇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때는 1914년, 큰고니 떼가 상공을 비행하던 그 날 오전, 하단포구 근방에 수상쩍은 일본인이 나타났다. 바로 야마모토였다. 거대하고 낯선 건물들이 들어선 바닷가의 항구들과 달리 하단포구에는 아직까지 조선의 모습이 조금 남아 있었다. 오래도록 내륙과 부산의 왕래를 담당하던 낙동강 무역의 중심지답게 상인들과 배꾼들의 목소리로 시끌시끌했다.
강가에는 황포돛배 여러 척이 정박해 있었고, 그 위에서는 어른들과 아이들이 함께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 낙동강과 남해연안을 오고가며 어류뿐 아니라 재첩, 갈미조개, 칠게 따위 등을 잡아 자급자족하며 살아가는 어민들이었다. 야마모토는 어민들을 향해 다가가 말없이 그들을 슥 둘러보았다. 어민들은 하던 작업을 멈춘 채 그를 힐끔 쳐다보며 불안한 듯 아이들을 등 뒤로 숨겼다. 또 뭔 지랄을 하려고 왔나 구시렁거리며.
요새 들어 이 근방에 못 보던 일제 관리들이 통역관들을 대동한 채 돌아다닌다는 풍문이 들려왔는데, 풍문 속의 사람들과 행색이 일치했다. 그들은 커다란 가방을 맨 채로 망원경, 철자 따위 등을 들고 이곳저곳을 쏘다녔는데, 특히 눈에 띠는 것은 기다란 쇠말뚝이었다. 그것에는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그들이 물어보는 것은 대개 이쪽부터 저쪽까지 땅의 주인은 누구인가, 저 땅은 무어라 부르나 따위였다.
야마모토의 이질적인 생김새는 어민들을 더욱 불안하게 했다. 평소에 봐왔던 일본인들과는 다르게 생겼던 것이다. 북방 민족처럼 피부가 좀 더 하얬을 뿐 아니라 눈썹이 진하고 수염과 구레나룻이 덥수룩했다. 광대가 툭 튀어나와 있고 콧대가 넓었는데 그 때문에 눈이 움푹 들어가 깊어보였다. 머리카락의 색이 검지 않았다면 노국인(露國人)이라고 생각했을 지도 몰랐다. 수상한 점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입동이 머지않았음에도 (더위를 타는지, 무거운 짐을 들고 있어서인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고, 여름에나 입을 법한 얇은 옷을 입고 있었다.
야마모토는 무언가를 결정한 듯, 가장 작은 황포돛배에 앉아 있는 노인에게 다가갔다. 하고많은 어민들 중에 그 노인에게 다가간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야마모토에게 가장 작은 배 정도면 충분했던 것이 이유라면 이유였다. 그러나 그 선택이 세대를 걸쳐 몇 사람의 운명을 완전히 바꾸었다. 노인의 등 뒤로 몸을 숨긴 채 야마모토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사내아이, 만수의 운명을 비롯해서.
야마모토가 물었다. 저기 보이는 섬의 이름이 뭡니까? 느릿하고 어눌했지만 노인은 그의 말을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분명 조선말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노인을 놀라게 한 것은 그가 무척 공손한 태도를 취하며 경어를 사용했다는 점이었다. 노인에게 일본인이란 별다른 이유 없이 자신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낄낄 웃어도 되는,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긴장된 얼굴로 야마모토를 노려보던 노인은 한결 누그러진 표정으로 자신의 입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등 뒤에 있던 만수가 말했다. 할배가 벙어리입니다. 우리는 그냥 을숙도라고 불러요. 그러자 야마모토가 그것이 무슨 뜻인지 되물었고 만수는 다시 대답해주었다. 새가 많고 물이 맑다는 뜻이죠. 갈대가 많은 곳은 원래 물이 맑은 법이니.
그러나 이 지점에서 이견이 갈리는데, 한 지역 신문사의 사설위원은 “수십억 후원금에 왜곡된 을숙도의 진실”이라는 다소 자극적인 제목의 사설을 발표하며 1914년 당시 을숙도가 무명의 섬이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른 근거로 을숙도라는 이름을 얻기 전, 하단포구 바로 옆에 위치했기에 그저 하단도라는 명칭으로 불렸으며, 을숙도라는 지명이 기록으로 남겨진 것은 1961년 지명 정비 이후였다는 점을 제시했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이 허구의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사설의 결론이었다.
이러한 지적을 (『큰고니의 월동지 변화와 텃새화 가능성』이라는 논문으로 저명한 재미동포 조류학자 김웅(Woong Kim, 1944~2019)의 외동딸이자 부산광역시 사하구 하단동 을숙도를 주소지로 지닌 유일한 명예시민인) 안나는 한 마디로 일축한다. “본래 기록이라는 것은 구전보다 훨씬 늦고 또 편협하기 마련이죠. 역사 또한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요컨대, 과거에도 을숙도라는 명칭이 구전으로서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었다.
여기에 더해 안나는 의혹을 제기한 지역 신문사에 “제 조부님과 아버지, 본인까지 3대를 모두 모욕한 것”이라고 일갈하며 법적 조치까지 고려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밝혔다. 선친의 사후 유품을 정리하며 발견한 야마모토의 회고록 『아이누, 표류하다』을 세간에 알린 장본인이었으니, 그녀의 민감한 반응은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는 일면도 있었다. (‘낙동강 하구 에코센터’의 발전기금으로 수십억을 기부한 안나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던 관계자가 신문사에 입김을 넣었다는 의혹이 있지만) 결국 지역 신문사 측에서 사과문을 게시하며 논란은 일단락되었다.
여하튼 당시 야마모토는 작은 필첩을 꺼내어 만수가 들려준 섬의 이름을 받아 적고는 말했다. 혹시 저 섬에 갈 배를 얻어 탈 수 있겠습니까? 뱃삯은 넉넉히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벙어리 노인은 말없이 자신의 타고 있던 황포돛배 안으로 들어오라는 듯 손짓했다.
섬까지는 한 식경 정도가 걸렸다. 섬에 발을 디딘 야마모토는 기다란 측량용 삼각대를 땅에 푹 박고 섬의 면적을 측량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곳에 사람이 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기다란 삼각대와 쇠말뚝을 박아대며 측량을 할 때마다, 이 조선인들도 고향땅을 잃어가겠지, 하는 생각에 죄책감이 들었던 것이다. 조선인들에게 자신은 그저 일제의 녹을 먹고 사는 야차 같은 존재겠지만, 그는 사실 일본인도 조선인도 아니었다. 가끔은 일본인보다 조선인에게 일종의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다.
사실 그가 을숙도 같은 섬이나 두메산골 등의 불모지의 측량을 주로 맡게 된 것은 일종의 민족 차별 때문이었다. 토지조사국의 소속의 한 상관은 야마모토를 위로한답시고 이렇게 말했다. “이누(아이누 족을 비하하는 말. ‘이누(いぬ)’는 일본어로 개를 뜻한다)면 여기저기 잘 쏘다닐 거 아냐?”
그러니까, 야마모토는 훗카이도 네무로시의 후렌호 근방의 호수마을 출신이었다. 즉, 그는 훗카이도의 원주민, 아이누 족이었다. 다만 어머니가 아이누 족이었고, 아버지는 일본 본토에서 온 개척사(開拓社)의 하급관리인 혼혈아였는데, 그에게 아이누 족의 피를 물려준 어머니는 매일같이 당부했다. 어디 가서 아이누 족인 것을 밝히지 말거라. 그만큼 아이누 족에 대한 차별은 뿌리 깊은 것이었다. 일본 본토인들은 자신들이 전근대적인 훗카이도를 ‘개척’했고 미개한 아이누 족을 ‘계몽’시켰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본토인의 피를 물려준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아이누 족인 것에 당당해라. 야마모토는 본토인의 아이들이 그를 아이누 족이라고 할 때마다 어머니를 원망했고, 아이누 족의 아이들이 그를 본토인이라고 할 때마다 아버지를 원망했다. 아버지는 자신이 본토인이라는 것을 종종 부끄러워했고, 어머니는 자신이 아이누 족이라는 것에 종종 미안해했다.
결국 그의 가족은 아버지의 결정에 따라 훗카이도를 떠나 조선으로 망명했다. 일본 본토에서는 아이누 족이 살아갈 수 없을 만큼 차별이 심했고, 훗카이도에서는 아버지 쪽이 아이누 족의 일원으로서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 정부는 조선으로의 이주를 적극 지원했기에 조선에서의 대우는 훨씬 더 나았다. 일본에서는 탄압받는 원주민이었지만, 조선에서는 엄연히 일본인이었던 것이다.
관리 출신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야마모토는 조선에서 토지조사국의 관리도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만약 그가 순혈 아이누 족이었다면, 조선에서조차 관리가 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떠올릴 때마다 “네 아버지는 본토인이잖아”라고 말하던 아이들의 말이 들려오는 듯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부끄러워졌다.
본래 측량이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작업이지만, 을숙도의 측량은 평소보다 훨씬 수월했다. 측량하기 민망할 정도로 작은 섬이었기 때문이다. 을숙도는 근방의 ‘맥도’나 ‘대저’와 비교했을 때, ‘도’라는 명칭이 붙기에 아직 너무나도 작은 섬이었다. 그러나 그 작은 땅조차도 조사하고, 측량하여 기록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그것이 문서화 되고 나면 토지는 조선총독부의 소유가 되었다. 이제는 나라의 땅을 빼앗으려하는 것이다. 아마도 다음에는 무형의 것, 예컨대 언어, 문화, 예술, 관습, 이름(강제로 개명당하기 전, 야마모토의 어머니의 이름은 ‘루스츠’였다.) 등을 빼앗을 것이다. 그 누구보다 야마모토는 잘 알고 있었다. 그의 고향땅 또한 그렇게 ‘개척 당하고’ 사라졌기 때문이다.
별안간 갈대밭 쪽에서 거칠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필시 바람이 건드리는 소리는 아니었다. 야마모토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갈대가 흔들리더니 거적때기를 걸친 사내가 서슬파란 눈으로 작살을 든 채 나타났다. 바로 김씨였다.
야마모토는 들고 있던 측량도구들을 모두 땅에 내려놓은 채, 헤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로 손을 높이 들고 말했다. 자, 그것부터 내려놓게. 그럼에도 김씨는 작살을 꼭 쥔 채 야마모토를 노려보며 말했다. 난 안 가! 여기서 썩 꺼져. 야마모토는 갈대삿갓에 가려진 김씨의 얼굴을 언뜻 보았다. 뺨에 부스럼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야마모토는 그가 문둥병에 걸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김씨는 을숙도에 자리 잡은 최초의 사람이었다. (물론 이 지점 또한 사설위원이 의혹을 제기하였다. 당시 을숙도는 섬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만큼 작은 모래섬이거나, 밀물 때에는 완전히 잠겨버리고 썰물 때에나 모습을 드러내는 갯벌에 불과했으므로 거주지로서의 기능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안나는 이에 대해서도 “1평 남짓한 공간에서도 살아가는 현대인은 뭡니까?”라거나 “뗏목을 겸하는 수상가옥에서 살았을 가능성도 있죠.”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김씨의 출신지는 밝혀진 바가 없다. 경남 방언을 쓰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아 여러 지역을 전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문둥병에 걸린 사람에겐 고향은커녕 편히 등을 뉘일 곳조차 없었다. 문둥이들이 쥐 죽은 듯이 외곽에서 살아도 어느새 근처 마을의 꼬마들이 찾아와 돌을 던지며 욕지거리를 해댔고, 그들이 화를 내며 꼬마들을 쫓아가는 시늉이라도 한다면 얼마 후 그 아이의 부모들이 횃불을 들고 집을 불태우러 왔다. 그것은 문둥병을 쫓아내기 위한 일종의 정화 작업이었다. 문둥이들은 철새처럼 매번 거처를 옮겨야만 했다. 사람들에게 살해당하지 않는 것도 감지덕지인 인생이었다. 그러한 일생을 살아온 그가 낯선 이국인을 보고 작살을 앞세운 채 경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김씨가 작살을 꽉 쥔 채로 야마모토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자, 야마모토는 천천히 뒷걸음질 치며 언제든지 반격할 자세를 취했다. 그의 허리춤에는 호신용 단도(短刀)가 메어져 있었다.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긴장 속에서 벙어리 노인과 만수는 숨죽인 채로 배 위에서 두 사내를 지켜보았다.
그 순간 날개가 퍼덕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두 사내의 눈앞이 새하얘졌다. 수 십 마리의 큰고니 떼가 긴 여정을 마치고 을숙도에 무사히 착륙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상한 일이었다. 좀처럼 사람에게 곁을 주지 않는 야생의 큰고니가 아무런 경계심도 없이 그들 사이로 내려앉고, 또 날아다녔다. 두 사람은 큰고니들의 군무를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안나는 야마모토의 회고록 『아이누, 표류하다』의 문장 중 그가 이 순간을 기억하며 써내려간 구절을 가장 좋아한다고 여러 번 밝힌다. 김웅의 유산을 ‘낙동강 하구 에코센터’에 기부한 공로로 을숙도 명예시민으로 인정받던 날에도, 모두의 앞에서 이 구절을 읊었다. “…희고 고운 큰고니들은 좀처럼 눈이 내리지 않는 낙동강 끝자락에 흰 눈처럼 내려앉았다. 백색의 세계가 내려앉은 순간, 그것은 조선인과 일본인, 문둥이와 아이누 족, 텃새와 철새, 그 모든 경계들이 희미해지는 순간이었다…”
그 때의 정적을 깨뜨린 것은 만수의 외마디 감탄이었다. “와!” 김씨와 야마모토는 그 소리를 듣고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을숙도는 이후 1916년 발간된 지적도에 최초로 새겨지며 역사에 등장하게 된다. 야마모토가 을숙도를 측량한 지 2년만의 일이었다. 그 2년 동안에도 을숙도는 몸집이 꽤 불어났고, 이후 지적도가 갱신될 때마다 그 면적이 수정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집단 주거지나 농지로 쓰기에는 적합하지 못했고, 때문에 그 누구도 을숙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 무관심이 김씨를 십여 년간 그곳에 머물 수 있도록 했다.
이들의 기묘한 인연은 만수가 어엿한 청년이 되어 가정을 꾸린 1925년까지 지속되었다. 김씨와 야마모토, 그 둘은 마음을 터놓은 친구가 되었다. 사실 둘이 아닌 셋이었는데, 야마모토가 종종 섬을 건너올 때마다 벙어리 노인의 배를 이용했고 만수 또한 매번 동승했기 때문이다. 만수는 야마모토의 이야기를 무척 좋아했는데, 특히 그의 고향 후렌호 근방의 호수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좋아했다. 그것은 만수가 조류, 특히 큰고니 떼에게 매료되었기 때문이었는데, 후렌호 또한 큰고니가 찾아오는 대표적인 월동지였다. (현재 후렌호가 위치한 네무로시의 시조(市鳥)는 고니이며, 을숙도가 위치한 부산광역시 사하구의 상징 또한 고니이다) “…그곳은 무척 춥단다. 바다 위에 떠 있는 얼음을 본 적 있니? 부산의 겨울은 나에게 굉장히 따뜻한 편이야. 하지만 이곳처럼 새들이 참 많이 찾아오지…”
야마모토는 그를 위해 글을 가르치고, 조류에 관련된 서적을 사주기도 했다. 만수의 눈썰미는 무척 뛰어났는데 (단번에 큰고니와 고니의 미묘한 생물학적 차이를 알아차렸다) 야마모토는 그 재능을 한 눈에 알아보았기에, 오히려 본인이 신이 나서 이것저것 가르쳐주었다. 영특한 학생을 본 교육자의 마음이 아마 그러할 것이다.
김씨는 (항상 멀찍이 떨어진 채) 만수에게 무뚝뚝한 태도로 일관했지만, 만수가 새에 대해 질문할 때면 책에 나와 있지 않은 지식들까지 알려주었다. 사실 그 자신은 평생토록 깨닫지 못했지만, 당시 김씨는 팔도 안에서 손꼽힐만한 새 박사였다. 매일을 수십 종의 새들과 함께 지냈으니, 자연스럽게 그들의 삶을 그 누구보다 밀접하게 관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이와 국적과 민족을 뛰어넘은 이 세 명의 우정에 대한 숨겨진 이야기가 전해진다. 사실 김씨가 만수의 친부, 즉 안나의 증조부였다는 놀라운 이야기인데, (안나는 이 이야기를 부인한다) 그 자초지종은 이러하다.
사실 김씨에게는 생사고락을 함께 한 문둥이 아내가 있었다. 그 둘은 사람들에게 내몰려 결국 부산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그들은 비루한 자신들의 처지에 지칠 대로 지쳐있었고, 생의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하단포구 근방의 동매산에 움막집을 짓고 화전(火田)을 치며 근근이 살아갔다.
김씨가 인근 마을 사람과 처음 마주쳤을 때만 하더라도, 또 다시 쫓겨날 것만 같아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김씨가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들은 김씨 내외가 문둥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도 조심스레 인사를 건네고 (물론 거리를 둔 채) 먹을 것들을 갖다 주기도 하며 이웃으로 대해주었다. 때문에 김씨는 어쩌면 이곳에 오래도록 정착할 수도 있겠다, 하는 작은 기대를 품었다.
그러나 꿈같은 나날은 오래가지 않았다. 김씨의 아내가 임신을 한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김씨의 아내를 거의 보지 못하기 시작한 것은 그 때 즈음이었다. 김씨는 아내가 산달이 가까워졌을 때에도 산파(産婆)를 맡아줄 사람을 찾기는커녕 철저하게 임신을 숨겼다. 마을 사람들이 자신들을 밀고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 시절 한센병 환자들이 임신을 하면 강제로 낙태를 시키는 것이 예삿일이었다.)
김씨의 아이가 태어났던 그 날, 김씨는 인생의 모든 것을 얻은 동시에 잃게 되었다. 아이는 건강했지만 김씨의 아내가 탈진해버리고 의식을 잃어버리고만 것이다. 김씨는 막 태어난 갓난쟁이를 포대에 싸 몸 앞으로 둘러메는 동시에 아내를 등에 엎은 채로 마을을 향해 쏜살같이 뛰어갔다. 그는 마을 어귀에서부터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내 아내 좀 살려주시오. 제발 살려주시오. 그러나 그가 가까이 다가오려 할 때마다 사람들은 몽둥이나 갈퀴 등을 들고 위협하며 소리쳤다. 기껏 살게 해줬더니 고마운 줄 모르고 이게 무슨 행패고 이 문디 새끼야! 소란 속에서 김씨의 아내는 마지막 단말마의 숨만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김씨는 아내를 땅에 뉘이고는 핏발서린 눈으로 마을 사람들을 쏘아봤다. 제 몸 하나 뉘일 곳 없었던 세상에서 유일하게 체온을 나누었던 아내였다. 죽고 싶을 만큼 슬펐지만,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만큼 분했다. 그 때 만수의 울음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면, 김씨는 그 날 누군가를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이다. 그 핏덩이의 세찬 울음소리가 김씨에게 실낱같이 남아 있던 생에 대한 욕망을 다시 일깨워주었다. 무고한 한 생명에 대한 책임감, 만수는 그 무거운 짐을 느끼며 두 무릎을 꿇었다. 만수는 자신의 자식이 아니어야 했다. 만수만큼은 낙인 없이 살아가야만 했다.
그는 살기어린 눈을 거둔 채, 넙죽 절을 하며 말했다. “아이만이라도 거둬주시오. 이렇게 부탁합니다. 이 아이는 문둥병에 걸리지 않았소. 참말이오.” 그러자 소란스러웠던 사람들 사이에 정적이 찾아왔다. 그렇게 한참동안 어찌하지 못한 채 그와 갓난쟁이를 바라만 보고 있던 사람들 속에서 벙어리 노인이 걸어 나왔다. 벙어리 노인은 문둥이의 품 안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울고 있는 만수를 건네받았다. 김씨는 얼어붙은 땅에 머리를 찧으며 그를 향해 몇 번이고 절을 올렸다. 고맙소. 정말 고맙소. 벙어리 노인은 말없이 문둥이에게 이곳에서 떠나라고 손짓했다. 그 이후로 마을 사람들은 김씨를 본 적이 없었고, 벙어리 노인과 만수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을 떠났다. 그로부터 몇 년 후, 하단포구 근처에서 그들을 봤다는 뜬소문이 들려왔다.
수수께끼의 인물 김씨의 행적은 1925년 이후 더욱 묘연해지는데, 이에 대해서는 만수가 어엿한 성인이 되어 가정을 이룬 것을 본 후 모든 짐을 내려놓고 아무도 모를 남해의 무인도로 떠났다는 둥, 오랜 떠돌이 생활로 인한 건강 악화로 사망했다는 둥, 기적적으로 한센병이 완치되어 정체를 숨기고 살아갔다는 둥 여러 가지 추측이 전해진다.
야마모토의 회고록 『아이누, 표류하다』에서 또한 김씨의 행적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는다. 다만 그 즈음 김씨가 한센병을 치료하고 싶다는 열망을 내비쳤다는 언급이 있으며, 야마모토는 한센병 치료소들을 수소문했다고 한다. 의아한 것은 당시 부산에는 대영나환자구료회(大英癩患者救療會)에서 설립한 조선 최초의 나병원인 ‘부산 나병원’이 있었는데, 굳이 다른 치료소들을 수소문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정황들을 토대로 한,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바로 이러하다.
을숙도는 점점 김씨가 살아가기에 충분히 넓고 비옥한 땅이 되었다. 앞으로 십년, 이십년만 더 지나면 작은 마을을 이룰 수 있을 정도로 넓어질 지도 몰랐다. (실제로 1930년대에 일제가 김해평야를 개발하기 위해 대저제방을 축조하며 낙동강이 동쪽, 을숙도를 향해 흐르게 된 이후 면적이 급속도로 넓어졌다.) 그러자 김씨는 을숙도에서 마을을 이루어 사람들과 살아가고 싶다는 작은 소망을 품게 되었다. 그 마을의 초대 주민은 벙어리 노인과 만수, 그리고 야마모토가 될 것이다.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문둥병부터 고쳐야 했다.
그러나 당시 문둥이들이 발각되면 어딘가로 끌려가 격리된다는 것을 김씨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풍문으로 들려오는, 격리소 안에서 치료라는 이름아래 자행되는 믿지 못할 잔혹한 짓들은 도저히 인두겁을 쓰고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김씨는 이러한 속내들을 야마모토에게 털어놓았고, 야마모토는 그를 위하여 전국의 모든 나환자병원을 수소문했다.
마침내 그가 김씨를 보낸 곳은 바로 소록도였다. (당시 원장이었던 하나이 젠키치(花井善吉)는 환자들에게 면회를 보장했고 신앙의 자유를 인정해주었으며 최소한의 교육을 위하여 3년제 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현재 소록도에는 그를 위해 당시 환자들이 세웠던 공덕비가 남아 있다.) 김씨는 꼭 다시 돌아오겠다는 다짐을 하며, 마지막 인사도 하지 않고 떠났다. 마치 내일 당장 돌아올 사람처럼. 그가 떠난 을숙도는 다시 무인도가 되었지만, 벙어리 노인과 만수, 야마모토는 종종 그곳을 찾으며 김씨를 기다렸다.
그러나 얼마 후, 벙어리 노인은 김씨의 귀환을 보지 못한 채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무언가를 부탁하듯 야마모토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야마모토는 고목처럼 거칠고 앙상한 노인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맞잡은 손에서 그는 노인이 하고 싶은 말을 똑똑히 들었다. 만수를 부탁하네, 필시 그런 말이었으리라. 야마모토가 만수를 한 번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이자, 노인은 편안한 얼굴로 죽음을 맞이하였다. 고아였던 만수에게는 할아버지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묵묵히 세 명의 우정을 한 발자국 떨어져서 바라보던 그의 평온한 얼굴을 다시는 못 본다는 생각이 들자 만수는 눈물이 왈칵 났다. 그 날 만수는 야마모토의 품 안에서 한동안 통곡했다.
을숙도를 오가던 작은 황포돛배는 이제 만수의 것이 되었고, 이제 만수가 돛을 펴고 노를 저었다. 야마모토와 만수는 여전히 김씨를 기다리며 종종 을숙도를 찾았다. 그가 돌아왔을 때를 위하여 김씨의 집을 고치고 텃밭을 가꾸었다. 만수는 야마모토가 가져다주는 조류학 서적에 이따금씩 밑줄을 긋거나 표시를 해놓았다. 김씨가 돌아왔을 때 물어볼 것들이었다.
김씨는 히나이 젠키치 원장의 인간적인 대우와 적극적인 지원 속에서 충만한 나날들을 보냈다. 그의 인생에서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던 충만한 소속감을 느꼈다. 그곳에서 사람과 사람의 유대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 깨달았다. 그리고 그 감정들을 통해 야마모토와 만수가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절절하게 알게 되었다.
그러나 1928년, 원장이 세상을 떠나고 후임 원장들이 부임한 후로부터 김씨는 깨달았다. 풍문으로만 듣던 그 잔혹한 짓보다 더한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것을. 그들의 악행은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졌는데, ‘검사실’에 들어간 환자들 중 일부는 그 문으로 살아서 나올 수 없었다. 무차별적으로 휘두르는 채찍과 발길질 아래에서 노역에 시달리다 혀를 깨물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환자도 있었다. 그러나 김씨는 섬에 날아드는 새들의 지저귐을 들을 때마다 을숙도의 큰고니, 야마모토와 만수의 얼굴을 떠올리고 악착같이 버텼다. 나는 반드시 돌아갈 것이다, 다짐하며.
어느새 부터 아무리 야마모토가 김씨의 소식을 수소문해보아도, 김씨의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다시는 김씨를 보지 못했다. 야마모토는 자신이 김씨를 사지로 내몰았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어엿한 성인이 되어 가정을 이룬 만수가 틈틈이 위로해주고 보듬어주지 않았다면, 야마모토는 죄책감에 빠져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서 살았을 지도 모른다.
한편 김씨의 행적에 대하여 이와 유사하지만 다른 이야기도 전해진다. 김씨의 자발적인 의지가 아니라 강제로 끌려갔다는 것이다. 1935년 조선 총독부가 조선나예방령을 제정한 후, 다른 한센병 환자들과 마찬가지로 소록도에 강제로 격리 수용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안나의 말대로 이 모든 이야기가 근거 없는 풍문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나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날, 소록도를 방문한 그녀를 보았다는 목격담이 전해진다. 이 목격담이 사실일 지라도, 그것이 김씨가 그녀의 증조부라는 증거가 되진 않는다. (김씨가 그녀의 증조부이든 아니든) 김씨는 만수를 비롯해 그녀의 가족사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으며, (여러 설이 있지만) 그가 소록도에서 최후를 맞이했을 가능성을 그녀도 내심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야마모토의 회고록 『아이누, 표류하다』는 1944년의 기록을 끝으로 미완의 완결이 난다. 회고록에 의하면 만수는 훗카이도의 유바리 탄광에 강제 징용되었다. 야마모토에게는 그것을 막을 명분도 힘도 없었다. 만수는 야마모토를 만난 마지막 자리에서 손을 꼭 잡고 부탁했다. 내 처만큼은 별 일 없도록 부탁드립니다. 마치 야마모토에게 만수를 맡기고 세상을 떠난 벙어리노인처럼. 만수가 부산을 떠나고 아홉 달 후, 만수의 아이가 태어났다는 서술을 마지막으로 회고록은 마침표 없는 끝을 고한다.
다소 의아한 점은, 본디 유려한 문장을 통해 그 상황과 감정까지 세심하게 표현한 전반부와 달리 후반부에는 짧고 간단한 문장만으로 사실관계만 전달한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안나는 “김씨의 행방불명 이후, 자신의 정신적 버팀목이던 만수가 강제로 끌려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기에 무력감과 자기혐오에 빠졌을 것이며, 이 시기를 다시 기술한다는 것이 고통스러운 작업이었을 것.” 이라고 견해를 밝힌다. 한편 임종이 머지않았다는 것을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기에, 최대한 빠르게 기록하기 위하여 단문으로 서술했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야마모토는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한 조선인들의 인파 속에서 고향으로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일제에 부역한 일본인 관리가 더 이상 조선에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향에 돌아간 그는 아이누 족들의 문화와 전통을 지키기 위해 작은 박물관을 세웠다. 현재까지 후렌호 근처에 거주하는 한 아이누인의 제보에 따르면, 그는 평생을 가족을 꾸리지 않고 살았는데, 누군가 그 이유에 대해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바다 건너에 나의 가족들이 있었습니다.
안나는 야마모토의 회고록, 『아이누, 표류하다』를 ‘낙동강 하구 에코센터’에 기증하며 이러한 소감을 밝힌다. “나의 삶이 그렇게나 많은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녀는 야마모토의 회고록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담담히 그들의 유지를 물려받은 김웅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버지는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습니다. 학자들의 운명이죠. 심지어 조류학자라니. 매번 집을 떠나 새들만 쫓아다니고, 집에 와서도 어두컴컴한 서재에 박혀 연구를 해야 되는 직업입니다. 게다가 아버지처럼 그 분야에서 정상을 차지한 위인들은 뭐랄까, 강박에 가까운 집념이 존재하기 마련이죠. 저한테는 그 유전자가 물려지지 않아서 참 다행입니다. 하루는 제가 아버지의 고국, 그러니까 한국에 대해 물어봤어요. 그 때가 아버지가 새에 대한 이야기를 제외하고 저에게 가장 많은 말을 해준 날이죠…”
그녀는 워낙 오래 전의 일이라 어렴풋이만 기억이 난다고 밝히며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그녀가 전하는 김웅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당시 김웅은 워낙 어렸기 때문에 어쩌다 어머니를 잃게 되었는지 (혹은 어머니가 그를 잃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그의 첫 기억은 다섯 살 즈음부터 시작되는데, 어머니와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이별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을숙도에서 마을 사람들의 집을 전전하며 살았다. 그들은 각자만의 이유로 을숙도에 정착하게 된 가난한 어부들이었지만 내 새끼, 네 새끼 구분 없이 그를 돌봐주었다. (당시 을숙도는 작은 마을을 이루고 살 수 있을 만큼 넓어진 상태였으며, 주민들은 대파 따위의 농작물을 경작하기도 했다.)
피는 속이지 못했는지, 어릴 적부터 그는 을숙도에 찾아오는 새들에 매료되었다. 그는 만수의 예리한 눈까지 물려받았는데, 큰고니들이 예년에 비해 을숙도의 상단에도 많이 분포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 부근을 확인해보았더니, 얕은 물에 묻혀 있는 신생 모래섬이 있었다. (유년시절 김웅이 봤던 이 섬은 바로 ‘일웅도(一雄島)’로 추정된다. 1960년대 지도에 처음으로 그 명칭이 기록된 섬으로,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바가 없다. 을숙도와 일웅도 사이에는 폭 10m 정도가 되는 샛강이 흘렀는데, 1987년 낙동강 하구둑이 건설되며 두 섬 사이의 샛강이 매립되어 일웅도는 을숙도에 편입된다.)
한국전쟁이 발발했지만 다른 지역과 달리 부산은 전쟁의 직격탄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의 상처를 모두 끌어안은 ‘아카이브’가 되었다. 부산으로 피난을 온 많은 사람들이 그대로 정착했기 때문이다. 가족과 고향을 잃었기에 돌아갈 곳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부산으로 내려온 사람 중에는 전방에서 부상을 입고 내려온‘미군’도 상당수 있었다.
김웅은 근처 마을의 아이들과 함께 하단포구에서 구두를 닦아주며 돈을 벌었는데, 특유의 눈썰미로 구두의 미세한 흠집을 모두 메우고 멋들어지게 광을 냈기에 금방 입소문을 타게 되었다. 그 많은 손님들 중 그의 인생을 뒤바꾼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콜린 스티븐스’대위였다. 콜린은 김웅과 함께 만담 나누기를 즐겼는데, 김웅이 주로 떠드는 것은 역시나 새에 관련한 것이었다. 둘은 금방 친해졌고, 콜린 또한 김웅의 영특함에 매료되었다. 얼마 후 콜린이 한국을 떠날 때가 되자, 김웅은 그에게 일생일대의 제안을 받게 되었다. 웅, 나와 함께 미국에 가자. 김웅은 그렇게 미국행을 택한다. 그가 어떤 연유로 미국행을 선택했는지는 밝혀진 바가 없다.
안나는 그 날 이후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사실 한국에 대해 물어봤던 그 날은, 제가 동양인 혼혈 여자 아이라는 이유만으로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돌아온 날이었습니다. 나의 머리카락은 왜 검은색인지, 왜 아버지의 피를 더 진하게 받은 것인지, 그럼에도 왜 어머니의 피가 섞여 이도저도 아닌 혼혈이 되었는지, 그리고 아버지는 어떻게 견디어 냈는지, 저는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근데 아버지의 이야기가 도저히 끝나지 않는 겁니다. 그래도 그렇게 들뜬 목소리로 오래도록 저와 이야기하는 것이 처음이었기에 제 차례를 묵묵히 기다렸죠. 깜빡 잠에 들 때까지. 웃기는 건 다음날 아침 일어나보니 아버지가 집에 없다는 거예요. 시베리아로 탐조여행을 떠나 몇 달 동안이나 돌아오지 않았죠. 그 사이 저는 괴롭히는 아이를 때려 눕혔고, 더 이상 괴롭힘을 당하지 않게 되었어요. 제가 아버지의 삶에 대해 물어볼 이유가 없어진 것이죠. 그래서 부끄럽지만, 아버지가 이민 후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잘 알지 못합니다.”
결국 김웅은 딸이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안나는 아버지가 늙어가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안나는 어엿한 성인이 되어 독립하고 나서도 아버지와 거의 교류하지 않았다. 사실 가끔씩 아버지의 미국행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서 듣고 싶었지만, 이미 너무 많은 세월이 지난 후였다.
언젠가 한 번은 용기를 내어 “아버지는 왜 한국에 가보지 않는 거죠?”하고 물어본 적이 있지만, 김웅은 그저 쓴웃음만 지었다고 한다. 아마 을숙도를 더 이상 자신의 고향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 (동양 최대 철새 도래지라는 수식어까지 붙으며 천연기념물로 지정될 정도로 철새들의 낙원이었던 그곳은 산업화라는 명목 하에 점점 인간만을 위한 공간으로 바뀌었다. 결국 1987년 낙동강 하굿둑이 건설되며 을숙도와 일웅도에 살고 있던 주민들은 모두 쫓겨나게 되고, 철새 도래지로서의 명성에도 마지막 종언을 고한다. 이후 을숙도는 공원화가 진행되고 쓰레기매립장, 분뇨처리장의 역할까지 담당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 다시금 철새 도래지로서의 복원이 추진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녀가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 것은 김웅의 사후에 유품을 정리하면서부터였다. 김웅의 서재 구석에는 아주 낡은 상자가 보관되어 있었다. 상자에는 빛이 바랜 운송장이 붙어 있었는데 발신지는 일본이었고 발신자에는 ‘루스츠(야마모토 오니헤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안에는 케케묵은 고서 몇 십 권이 들어 있었다. 만수가 자신의 세심한 관찰결과들을 새까맣게 적어 놓은 조류학 서적들과 야마모토의 회고록이었다.
안나는 꼬박 한 달 동안 회고록을 읽으며 비로소 김웅을 이해하게 되었다. 김웅은 언젠가 낯선 소포를 받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소포 안의 책들은 그의 세계를 뒤흔들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새에 대한 병적인 집착은 어쩌면 만수의 유지를 이어받는 결연한 태도이자 고향에 대한, 한 번도 보지 못한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이었을 것이라고. 그리고 안나는 자신에게 무심했던 아버지를 조금은 용서하게 되었다.
안나의 연설은 이렇게 마무리된다.“아버지가 남긴 이 유산들이 이곳을 지키는 데에 쓰이길 바랍니다. 아버지도 그것을 바랄 겁니다.”안나는 많은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며 자리를 이동했다. 이 날 행사의 피날레는 그녀가 을숙도의 큰고니를 망원경으로 관찰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망원경에 눈을 갖다 댄 채 옆으로 조금씩 움직이며 철새들을 지켜보았다. 큰고니 떼들이 세섬매자기의 뿌리를 쪼아 먹는 것이 선명히 보였다. 영역싸움을 하느라 서로 목을 부딪치며 한 치도 물러나지 않는 수컷들도 보였다. 강가에 유유히 뜬 채로 꽁지깃의 기름샘에 부리를 부비고 있는 우아한 한 쌍도 보였다. 모두가 겨울을 날 준비를 마친 듯 했다.
저들이 이곳에서 편안히 겨울을 잘 나기를, 그리고 다시 고향 땅 오논강에 무사히 도착하기를, 내년에 다시 이곳에 찾아오기를 안나는 진심으로 바랐다.
■최우수
배 타러 가요 / 노*옥
을숙도는 낙동강이 낳고 품은 알이었다.
일천삼백 리 물길의 갈피마다 탄생과 소멸을 거듭하던 생명들이 기나긴 여정을 마무리하며 숨 고르는 장소. 오래 전부터 낙동강 하구는 뭇 생명들을 품고 기른 거대한 둥지였다. 을숙도는 그 둥지가 품고 있는 알 중에서도 가장 크고 아름다운 알이었다.
우곤 씨는 더듬더듬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차장 건너편 강기슭에 낙동강 생태탐방선 매표소가 보였다. 나무와 꽃들에 가려져 숨은 듯 앉은 매표소 뒤에 배가 들고나는 선착장이 있을 터였다. 현대식으로 말끔하게 단장한 선착장에서 예전의 나루터 같은 분위기를 찾을 수는 없었으나 그래도 우곤 씨는 그 선착장에 서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우곤 씨에게 낙동강이 고향 그 자체라면 배를 타고 물길을 거슬러 오르는 것은 고향에서 번져 나오는 그리운 냄새를 따라 간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일정 기간 하굿둑 수문을 개방한 뒤 연어나 웅어가 산란 장소를 찾아 강의 습지로 돌아오는 것처럼.
쉼터 근처에 서서 우곤 씨는 강을 굽어보았다. 햇빛과 어우러진 강물이 일렁이고 있었다. 수면에 되비쳐 튀어 오르는 햇살, 숨바꼭질 하듯 몸을 솟구치는 물고기의 비늘이 허공에서 번쩍거렸다. 일 년에 두세 번 을숙도를 찾는 가장 큰 이유는 생태탐방선을 타는 것이었으나 지금 이렇게 강과 마주 뒤척이고 수런거리는 혼자만의 시간도 우곤 씨에겐 너무 소중했다. 그 시간엔 현재와 과거, 미래가 뒤섞여 있었다. 물결 따라 하염없이 흘러 다니던 우곤 씨의 기억은 종종 과거로 향했다. 까치발로 뜨거운 백사장을 질주하던 시절로도 돌아가고 숨 쉬던 모래펄에서 게를 잡고 조개를 캐던 순간으로도 돌아갔다. 옛 시절을 추억하는 것만으로도 흐뭇해진 우곤 씨는 구부정하게 수그러진 등을 곧게 펴려고 애썼다. 숨을 길게 들이쉬었다. 낡고 삐걱대는 가슴을 열어젖히듯 심호흡을 하자 비좁은 가슴 가득 강물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제 안에서 출렁이는 고향의 샛강. 부드럽게 살갗을 어루만지는 강물의 촉감과 미지근한 온도, 옅은 비린내가 섞인 달콤한 냄새까지, 우곤 씨는 그것들을 가슴에 품은 채 사방을 돌아보고 또 돌아보았다.
강둑은 온통 자줏빛과 노랑으로 물들어 있었다. 등갈퀴나물과 벌노랑이가 한창인 계절이었다. 우곤 씨는 식물들의 왕성한 번식력이 부러웠다. 혈육이라곤 천지간에 달랑 기수 하나뿐인 자신의 처지가 새삼스러울 것 없는데도 그랬다. 우곤 씨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잠시 부럽다가 이내 삐딱해지는 마음. 저것들이 사람 아닌 게 어딘가 싶었다. 사람이 저리 바글바글 피어있으면 어여쁘기는커녕 얼마나 끔찍할까, 공연히 그런 상상을 하며 우곤 씨는 쓴웃음을 지었다. 우곤 씨와 멀찌감치 떨어져서 한참 통화를 하던 기수가 핸드폰을 손가방에 넣으며 다가왔다.
배 출발 시간이 10시30분인데 우리 너무 일찍 왔어요. 할아버진 아침 드셨어요?
잘게 부순 누룽지 서너 숟가락을 맹물에 끓여서 먹었다는 말은 기수에게 하기 싫었다. 여느 날과 다름없는 생일 아침이기도 하려니와 뭘 먹었든 딱히 관심도 없을 터였다. 그런 녀석에게 곧이곧대로 대답했다간 서로 울적해질 것이 틀림없었다. 우곤 씨가 짐짓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가자미 미역국 끓여서 거하게 먹었다만 너는 배고프겠다, 요즘도 아침 안 먹고 다니지?
말을 마친 우곤 씨는 키가 껑충한 기수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기수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좀 있다 맛있는 거 먹으러 갈 거니까 괜찮아요. 저 해경 되고 나서 처음 챙기는 외할아버지 생신이니까 오늘은 할아버지 드시고 싶은 거 전부 다 사드릴게요.
아따 이놈아, 공무원 월급 얼마나 된다고. 너 결혼해서 애 낳고 사는 걸 봐야지 한 달 벌어 하루에 작살내는 꼴을 보고 싶을까 내가.
우곤 씨는 휘휘 팔을 내저으며 기수를 앞세웠다. 잘 차려입은 모양새가 번듯해서 좋으면서도 걱정이 되었다. 좋은 차 타고 비싼 옷 입고 돈은 언제 모을 거냐고 다잡고 싶었지만 하면 할수록 잔소리가 될 게 뻔해서 참았다. 기수가 매표소로 들어갔다. 예약을 해둔 터라 본인 확인 및 승선신고서를 작성해야 했다. 매표소 직원이 기수의 신분증을 확인한 뒤 물었다.
세 분 예약한 거 맞으시죠?
그게, 한 사람은 사정이 생겨서 못 오고, 둘입니다.
대답을 하면서 기수는 바깥을 흘낏거렸다. 근처 쉼터에서 기다리고 있을 우곤 씨가 그 말을 들었을 리 없는데도 공연히 켕겨서 마음이 불편했다.
승선 대기자용 쉼터는 매표소 근처에 있었다. 가족이나 연인끼리 배를 타러 온 대기자들이 더러 보였다. 그들은 마루 끝에 엉덩이를 붙인 채 담소를 나누었다. 우곤 씨는 그 쉼터가 마음에 들었다. 널따란 마루를 깔고 지붕을 덮은 것이 강가에 지어놓은 정자 같았다. 사방이 툭 트인 마루에 앉아 강을 바라보고 있으니 살랑거리는 바람이 다정했다. 그대로 드러누워 한숨 자고 싶었다. 강촌에서 살 때의 여름 원두막 생각이 나서였다. 그러나 마음뿐, 옹기종기 모여 앉은 대기자들 사이에서 네 활개를 펼칠 만큼의 배짱이 있지도 않았고 기수가 창피해 할 짓이나 꼴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기수가 쉼터로 왔다. 둘은 마루 끝에 나란히 엉덩이를 걸쳤다. 그렇게 나란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우곤 씨는 좋았다. 오랜만에 보는 기수는 인물도 훤하고 듬직했다. 미간에 바늘을 찌른 것처럼 찡그리고 다니던 어릴 때의 기수, 시험에 몇 번 떨어지고 다시 준비하는 과정에서 불안감을 호소하던 기수가 아니었다. 어쨌거나 해양 경찰이 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우곤 씨는 기수가 해양대학에 진학해서 오대양을 누비는 선장이 되기를 바랐다.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았어도 기수가 자랑스러운 건 여전했다. 우곤 씨는 기수 쪽으로 바짝 다가앉으며 주변 사람들을 휘둘러보았다. 봐라, 이 청년이 내 새끼다, 내 새끼 키도 크고 잘 생기고 공무원이다. 우곤 씨의 두 눈이 그렇게 소리치는 듯했다.
기수는 우곤 씨의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핸드폰만 들여다보았다. 두 엄지손가락도 바쁘게 움직였다. 그토록 열심히 교신을 하는 사람이 제 여자 친구인 나루일 것 같아서 우곤 씨가 넌지시 물었다.
나루랑 같이 온다고 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너희들 무슨 일 있었냐?
기수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무슨 일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서 할 말이 없었다. 같이 배를 타기로 한 나루는 오늘 아침에야 못 온다고 연락이 왔다. 멀미를 할 것 같다는 게 그 이유였다. 기분이 확 상했다. 외할아버지 생신날이니까 외할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걸 해드리자고 의논해서 일정을 맞춘 건데 갑자기 약속을 취소하다니. 대수롭잖게 넘어가려고 해도 거부당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이런저런 변명이 덧붙은 미안하단 메시지, 하트 이모티콘이 연달아 날아와도 젊고 늙은 두 남자가 거부당한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기수는 자꾸 옹졸해지려는 감정을 누르며 우곤 씨를 향해 그저 웃기만 했다.
대답을 듣지 못해서 우곤 씨는 더 궁금했다.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싸운 거냐며 재차 묻기도 전에 기수가 벌떡 일어났다. 또 어디서 전화가 온 모양이었다. 서둘러 멀어지는 기수의 뒷모습이 익숙했다. 잊었는가 하면 불쑥 떠오르고 붙잡으려 하면 낯설게 멀어지던 딸의 얼굴이 기수의 뒷모습에 겹쳐졌다. 우곤 씨의 눈길은 기수를 지나쳐 더 멀리 강의 위쪽으로 나아갔다.
우곤 씨는 강촌에서 태어났다. 을숙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낙동강 물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김해 대동과 상동으로 이어지는데 상동의 강변 어디쯤 감노마을이 있었다. 기수 상류인 감노 강변엔 조개며 물고기도 많았지만 무엇보다 너른 백사장이 아름다웠다. 한적한 강촌이긴 해도 백사장으로 놀러오는 외지인들이 많았다. 여름 백사장은 청춘들의 고성방가가 끊이지 않았다. 밤만 되면 더했다. 웃통을 벗어젖힌 청년들이 동네를 어슬렁거리면 부모들은 딸을 단속했다. 단속할 게 딸뿐만 아니었다. 농작물 서리가 만연하던 시절이었다. 우곤 씨의 아버지도 강가 밭에 수박을 심었다. 적당히 모래가 섞인 기름진 토질이라 작황은 늘 좋았다. 수확기의 수박밭은 도저히 그냥 지나칠 없을 만큼 충만하고 싱그러웠다. 시퍼렇게 약이 오른 둥근 껍질 속에 단맛으로 붉어진 속살이 꽉 차 있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백사장에 놀러온 사람들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주인 몰래 수박을 훔치느라 수박밭을 함부로 휘젓고 다녔다. 우곤 씨의 아버지는 다 지어놓은 농사를 망치게 생겼다며 그들을 원망했다.
익다 않은 수박을 따서 깨놓고 줄까지 밟고 간 놈들, 이넘으 손들, 어디 한 놈이라도 걸리기만 해봐라, 내가 고마 대가리를 확 깨부숴놓고 말거다.
그렇게 벼르고 별렀지만 서리하다가 우곤 씨 아버지에게 들키거나 잡힌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곤 씨도 아버지를 따라 원두막에서 망을 봤으나 헛짓이었다. 힘 센 강바람이 원두막을 요람처럼 흔들어 저절로 눈이 감기고 저절로 고꾸라질 뿐이었다. 그건 우곤 씨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종일 들일에 시달렸으니 눈에다 지렛대를 꽂는다 해도 버틸 재간이 없을 터였다. 새벽마다 수박밭을 돌며 깨진 수박을 골라내고 훼손된 넝쿨을 바로잡으며 우곤 씨의 아버지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럴 일이 아니었다. 정작 수박 농사를 제대로 망친 건 수박 서리가 아니라 홍수였음을 강변의 농사꾼들은 너나없이 다 알고 있었다.
강촌의 여름은 홍수와의 전쟁이었다. 전쟁이라기보다 일방적인 습격이고 침략이었다. 도적처럼 들이닥친 물길은 농작물을 쓸어가고 가재도구도 쓸어가고 사람마저 쓸어갈 지경이었다. 속수무책이었다. 뒤집히고 소용돌이치며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황토색 물길은 그저 장엄해서 동동 떠내려가는 수박과 참외는 오히려 하찮을 지경이었다. 돼지와 소가 떠내려가고 오두막이 둥둥 떠내려가는데, 오두막 지붕에 앉아 살려달라고 외치는 사람을 보고 있으면 오금이 저린다기보다 신기했다. 그 사람이 죽을지 살지 묻는 아이들에게 어른들은 무심하게 대꾸했다. 구포다리까지 가면 건져주는 사람이 있다고. 아이들은 지나간 건 금방 잊었다. 우곤 씨도 그랬다. 온갖 것들이 밀려와 넘실거리는 강가에 서서 장대에 낫을 묶어 떠내려가는 것들을 건졌다. 바람 빠진 공이든 헝겊 인형이든 오로지 건지는 데만 열중했다. 무릎이 잠기고 허벅지까지 잠기는 줄도 모르고 점점 물속으로 들어가는 우곤 씨의 뒷덜미를 아버지는 단단히 움켜잡았다.
물귀신 될라 카나 그만해라.
그럴 때의 아버지는 우곤 씨의 등짝을 후려갈기지도 않았고 화를 내지도 않았다. 다 지어서 망쳐버린 수박 농사조차 그리 아깝지 않은 듯 덤덤했다. 소가 떠내려간 것도 아니고 밭이 다 떠내려간 것도 아니고 식구들 건사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며 아버지는 물이 빠진 뻘밭을 갈아엎었다.
세월이 흐르고 흐른 만큼 우곤 씨가 고향을 떠난 지도 참 오래 되었다. 이제 그 강변의 기름진 농토는 공원이 되어 고라니가 숨기 좋은 곳으로 바뀌었지만 우곤 씨의 마음은 언제나 그 시절 그 언저리에 머무는 것 또한 어쩔 수 없었다.
여러분, 낙동강 오리알이란 말, 들어본 적 있죠? 우리나라는 여름이 되면 장마가 지잖아요. 지금은 낙동강에도 하굿둑이 생겨서 홍수를 조절하지만 예전에는 비가 좀 많이 온다 싶으면 어김없이 홍수가 났다고 그래요. 한 해에 몇 번씩 강이 범람하니 강가에 사는 새들도 피해가 컸겠지요? 강물이 불거나 홍수가 나면 갈대숲에 둥지를 튼 오리들은 다 피신을 하고 어미 잃은 오리알만 둥둥 떠내려가서 그런 말이 생겼다고 합니다. 어떤 집단에서 외톨이가 되었다든지 부모를 여의었다든지 그런 경우를 두고 우리는 아이고 불쌍해라, 고마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버렸네, 하잖아요. 듣고 보니 유래가 좀 슬프기도 하죠?
슬프기는커녕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듯 탐방선 생태해설사의 목소리가 우렁찼다. 낙동강의 발원지를 설명할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우곤 씨는 객실을 나와 선미 중간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식은땀이 나면서 어지러워 강바람을 쐬면 좀 나을 듯해서였다. 배의 꽁무니에서 스크루가 힘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맹렬하게 물보라가 일었다. 숨을 헐떡이며 강기슭으로 내닫는 물살을 보고 있으니 우곤 씨도 덩달아 숨이 가빠왔다. 우곤 씨는 뒤로 점점 멀어지는 하굿둑에 눈길을 고정하고 숨을 골랐다. 그럼에도 묘한 메슥거림은 계속되었다. 그 즐겨 보던 강기슭의 풍경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모든 게 너무 빠르게 느껴졌다. 강을 거슬러 오르는 배의 속도는 작년 다르고 올해 달랐다. 평속 10노트로 운항하는 탐방선의 속도와는 무관한, 우곤 씨가 원하는 체감 속도는 삐걱삐걱 노를 저어 강을 건너던 나룻배의 속도였는지도 몰랐다.
어디 불편하세요 할아버지?
언제 나왔는지 기수가 우곤 씨의 팔을 잡고 물었다. 우곤 씨는 고개를 저었다. 불거지게 아픈 데도 없으면서 어지럽다고 엄살을 떨기도 뭣했다. 낙동강 강변의 생태 공원을 설명하는 해설사의 우렁찬 목소리는 밖에서도 잘 들렸다. 스크루 돌아가는 소리까지 겹치니 귀가 다 먹먹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우곤 씨가 앞장섰다. 기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뒤따랐다. 을숙도 선착장에서 출발해 대동 선착장에 정박, 한 시간을 머물다 오는 코스였기 때문에 대동에 도착하면 쉴 시간은 충분했다.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은 우곤 씨와 기수 뿐, 나머지 승객들은 죄다 배의 유리창에 얼굴을 붙이고 감탄을 연발했다. 오른쪽에 보이는 도시의 풍경과 왼쪽에 보이는 강가의 모습은 다르면서도 비슷했다. 이쪽저쪽을 번갈아 보느라 아이들이 뛰어다녔다. 간간이 수면을 박차며 새들이 날아올랐고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수상오토바이를 타고 배의 꽁무니를 쫓는 사람들은 과자를 얻어먹으려고 뱃전으로 달려드는 갈매기마냥 극성스러웠다. 기수는 그 모든 풍경들이 우곤 씨를 압도하길 바랐다. 나이가 들수록 향수가 짙어가는 그를 위해 기수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배를 같이 타는 정도이지만 고향의 품에 안겨 고향의 냄새에 취한 우곤 씨의 표정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우곤 씨는 토할 듯 울 듯 표정이 애매했다. 웬 멀미인가 싶어서 기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멀미 때문에 못 온다는 나루를 대신해서 하는 멀미인지. 기수는 계속 우곤 씨의 팔을 주무르고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할아버지, 옛날처럼 얘기 해주세요. 엄마 어렸을 때 얘기도 해주고, 기수 낙동강 오리알 된 얘기도 해주세요.
우곤 씨는 기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나이가 들수록 얼굴은 제 어미를 쏙 빼닮고 훤칠한 키며 체격은 아비를 닮아간다 싶었다. 기수의 엄마, 그러니까 우곤 씨의 외동딸이 남자를 데려온 것은 스무 살 때였다.
아버지, 저 이 사람과 결혼시켜 주세요……
딸은 제 옆에 앉은 낯빛이 검고 비쩍 마른 사내를 가리켰다. 얼핏 봐도 서른은 넘은 듯한, 닳고 닳은 야비한 표정의 사내가 우곤 씨를 향해 넙죽 엎드렸다.
아버님, 따님을 제게 주십시오. 제가 데려가서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도록 호강……
들을 필요도 듣고 싶지도 않았다. 우곤 씨는 사내의 엎드린 등짝을 밟고 올라섰다. 그 자리에서 맞아 죽을지 딸을 포기할지 선택하라고 고함을 질렀다. 사내도 만만찮았다. 뱀처럼 대가리를 이리저리 휘두르며 우곤 씨의 공격을 피할 뿐, 절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딸이 우곤 씨의 허리를 붙잡고 매달렸다. 아버지가 아무리 반대해도 이미 늦었다고, 이미 늦었으니 그만 받아주시라고 울며불며 애원했다. 울고 싶은 사람은 외려 우곤 씨였다. 강촌에 혼자 살면서 애면글면 키워 도시의 고등학교에 보내놨더니 졸업하고 직장 구하자마자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싶어서 우곤 씨는 그야말로 눈앞이 캄캄했다. 날벼락이 무심한지 하늘이 무심한지, 왜 하필 나에게 이러냐고 종주먹을 들이밀 데라곤 사내밖에 없었다. 흠씬 두들겨 패고서도 우곤 씨의 분노는 그대로였다. 눈앞의 사내를 향한 증오와 복수심은 딸까지 거부하게 만들었다.
딸의 직장 상사인 사내가 갓 입사한 딸을 강간한 사실을 우곤 씨는 그 한참 후에 알게 되었다. 딸이 사내를 데리고 결혼 허락을 받으러 왔을 땐 이미 기수를 임신한 상태였다는 것도. 그날 우곤 씨에게 쫓겨난 딸과 사내는 혼인신고만 한 채 하단 어디쯤에서 살았다. 들일을 하다가도 우곤 씨는 우두커니 강을 내려다보았다. 그 강은 흘러흘러 물금과 구포, 하단까지 내려갈 것이고 또 천천히 흘러서 다대포 바다에 이를 것이었다. 흙모래를 한줌 집어 강물에 흩뿌리며 그것들 또한 엉금엉금 기어서라도 하단 강변의 어딘가에 머물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럼에도 우곤 씨와 딸은 그 어떤 소식도 주고받지 않았다. 바람이 전하는 말이 영 없지는 않았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소문에 불과했다. 딸이 아들을 낳았고 사내가 회사를 그만뒀다는 풍문 따위 듣지 않느니만 못했으므로.
딸이 기수를 데리고 감노에 나타난 건 그 몇 년 뒤였다. 푸른색 물방울무늬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올려 묶어서인지 어딘가 앳된 구석이 남아 있는 딸의 모습을 보며 우곤 씨는 울컥 눈물이 치밀었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외면하는 우곤 씨를 갸우뚱 쳐다보던 기수. 제 엄마와 우곤 씨 사이의 위태로운 기류를 파악하려는 듯 불안하게 깜빡이던 기수의 눈빛. 지금도 생각나는 건 그게 다였다.
그날 이후로 딸은 가끔 기수를 데리고 우곤 씨를 보러 왔다. 사내는 오지 않았다. 안 와도 그뿐이었다. 사내에 대해선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딸의 얼굴만 봐도 알았다. 분칠을 해도 감춰지지 않는 시커먼 와잠이 딸의 모든 걸 보여줬다. 우곤 씨는 기수를 업고 강변에 나가 오래 서성였다. 태어난 곳에 몸을 뉘고 죽은 듯 잠든 딸의 사생활이 얼마나 신산할지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기 때문이었다.
돌이켜 보면 그때 바로잡아야 했었다. 제집으로 돌아가는 딸의 가방에 얼마간의 목돈을 넣어주는 대신, 애비랑 같이 살자, 우리 셋이 여기서 같이 살자며 딸을 붙잡아야 했던 것이다.
후회는 늘 뒤늦게 찾아오는 법이다. 우곤 씨는 종종 딸과 기수의 이별이 자신의 잘못처럼 느껴져 괴로웠다. 망가진 딸의 몰골을 보며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릴 때마다 우곤 씨는 몹시 수치스러웠다. 자신의 인생은 이미 실패했고 딸의 불행이 그 실패의 결과인 것만 같아서였다. 딸이 홀로 강으로 걸어 들어갈 때, 차라리 더 깊숙이 들어가서 돌아오지 말라고 등을 민 것 같은 죄책감. 붙잡을 수 있었는데 붙잡지 않았다는 죄책감에 떠밀릴 때마다 우곤 씨는 이를 악물었다. 두 번 다시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마음, 그 죄책감으로 기수를 키웠으나 그렇다고 후회가 상쇄되는 건 아니었다.
기수는 그새 또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부지런히 엄지를 놀리고 있었다. 듣고 싶어서 청한 얘기가 아니라 금방 잊어버린 걸 우곤 씨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대견했다. 어릴 땐 누가 낙동강 오리알 말만 꺼내도 본능적으로 피하더니. 이젠 그 얘기를 해달라며 능청을 떠는 기수가 뿌듯하면서도 애처로웠다. 흉터로 남은 제 상처를 아무렇지 않은 척 내보일 만큼 어른이 되었으니 제몫을 하며 잘 살아가리라 믿으면서도 조바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기수는 절대로 우곤 씨처럼 혹은 제 부모처럼 살아선 안 되었기 때문에.
이놈아, 내 소원은 말이다.
우곤 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수가 되받았다.
강기수와 홍나루가 결혼해서 아이 낳고 사는 거요.
아따 이놈이, 그걸 알면서도 혼자 왔냐? 너희들 정말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기수가 우곤 씨를 빤히 들여다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할아버진 나루가 그렇게 좋아요? 나보다 더?
이놈 보게, 질투하나?
질투 안 나게 생겼어요? 할아버지랑 나루랑 뭔가 통한다니까요? 사실은 나루가 속이 좀 안 좋아서, 배멀미가 날 것 같아서 못 온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멀미라곤 생전 안 하던 할아버지가 이러고 있으니 뭐가 좀 이상하잖아요.
기수의 말을 듣고 있던 우곤 씨의 표정이 갑자기 밝아졌다. 주름진 뺨이 움푹 패도록 활짝 웃는 우곤 씨를 보며 기수는 어리둥절했다.
왜 그러세요? 괜찮으세요 할아버지?
괜찮다마다. 내 오늘 입덧 한번 오지게 하는구나.
기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우곤 씨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걱정스럽게 팔을 붙잡았다. 기분은 좋아 보이는데 여전히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휘청거리는 우곤 씨가 불안했다. 멀미 때문이라곤 해도 몸이 쇠약해서 더 그런 것 같았다. 안 본 사이에 더 굽고 쪼그라든 몸피는 작고 가벼워서 기수의 어깨에도 미치지 못했다. 저렇게나 작은 등에 업혀 다녔다니. 기수는 우곤 씨의 좁다란 등을 자꾸 쓸어내렸다.
기수가 초등학교 입학하던 해에 엄마가 죽었다. 보름달이 환하던 봄밤, 강으로 들어간 엄마가 돌아오지 않자 외할아버지는 고향을 떠났다. 할아버지는 바닷가 파래 작업장에서 일했다. 초등학교 이학년 무렵, 기수와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일하는 곳으로 찾아갔다. 아버지는 기수의 옷과 책이 든 가방을 담에 기대놓고 할아버지를 기다렸다. 아버지를 보자마자 할아버지는 가라고 손짓을 하며 외면했다. 아버지가 가고 나자 할아버지는 기수의 손을 잡고 근처 가게로 들어갔다. 할아버지가 주인아주머니에게 말했다.
앞으로 우리 애기가 와서 기웃거리거든 뭐라도 주소. 돈은 내가 나중에 드릴 테니.
할아버지의 부탁에 아주머니는 그럼요, 하면서 기수를 요모조모 뜯어보았다.
한창 엄마 손이 필요할 땐데 낙동강 오리알이 됐네. 우리 애기 불쌍해서 어쩌누.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게 부모 없는 애들……
어허, 거 참. 애들 앞일수록 말조심을 해야지 부모가 없기는 왜 없어.
그러게요. 걱정이 되어서 그만…… 저기 경로당 뒷집 영천 할매도 이혼한 아들이 데려다놓고 간 손자 때문에 아주 죽겠다고, 다 늙어 무슨 고생이냐며 울어쌓던데.
울 일도 어지간히 없다, 그만 일에.
할아버지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던 건지 기수 때문에 눈치가 보인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과자와 음료수가 든 비닐봉지는 기수 손에 쥐어주고 가방은 당신이 든 채 기수를 앞세우고 걸었다.
자, 우리 기수 어서 집에 가자. 할애비가 맛난 거 만들어줄 테니 먹고, 공부도 하고.
그날 할아버지가 만들어준 맛난 음식이란 게 파래전이었다. 파래, 두부, 계란, 김치를 버무려 넓적하게 지져낸 건데 기수 입맛엔 영 별로였다. 파래는 질깃질깃 씹히고 김치는 원래 안 좋아하니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어서 가만히 있었다.
와? 맛이 없나?
할아버지가 물었고 기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우리 기수는 뭐가 맛있을꼬?
참치랑 햄요.
할아버지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한참동안 기수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일어났다. 얼마 뒤에 할아버지는 커다란 비닐봉지를 들고 와서 기수 앞에다 풀어놓았다.
자, 내 새끼 마음대로 골라 먹어라.
할아버지가 그날 사온 참치와 햄의 가격이 할아버지의 두 달 생활비와 맞먹는다는 걸 기수는 한참 뒤에야 알게 되었다. 그것도 가게 아주머니의 입을 통해서. 아주머니는 할아버지가 돈을 얼마나 아끼는 사람인지에 대해서 시시콜콜 말해줬다. 두부를 사더라도 반 모, 라면도 한 개, 김치며 나물 종류는 누가 주면 먹고 없으면 그만이지 절대로 돈 주고 사서 먹지 않았다는, 기수가 알 필요도 없는 사실까지 다 말해줬다. 결론은 그거였다. 기수 때문에 할아버지의 생활비가 몇 배 늘었다는 거. 그래서 어쩌라는 건지 기분 나빴지만 아주머니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는 충분히 알아들을 만큼의 눈치는 있었다.
사실 그즈음의 기수는 돈 한 푼 없이도 매일 가게를 들락거렸다. 전학 간 학교는 낯설고 동네엔 친구 하나 없는 데다 할아버지는 저녁이나 되어야 오니 갈 데라곤 가게 밖에. 야금야금 사다먹는 아이스크림이며 탄산음료며 과자 값이 점점 늘어났다. 할아버지는 그 외상값에 대해 한 번도 추궁하지 않았지만 외려 기수는 심술궂게 변해갔다. 할아버지가 시키는 것들은 무조건 거부했다. 이를테면 인사 잘 하기, 숙제한 뒤 일기 쓰기, 이부자리 정리 같은 걸 하나도 하지 않았다. 청개구리가 따로 없었다.
청개구리 짓은 안에서나 밖에서나 표시가 날 것이었다. 그랬으니 가게 아주머니가 그리 긴 설교를 했을 테고. 기나긴 설교 끝에 아주머니가 기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할아버지 말씀 잘 들어.
그 말을 듣는데 왈칵 울음이 터졌다. 제 부모 아닌 다른 사람에게 얹혀 살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음에도, 그럼에도 할아버지가 기수를 귀찮은 존재로 여기는 게 아닌지 사랑하는 척하는 게 아닌지 너무너무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언젠가는 할아버지도 아버지처럼, 기수를 당신 눈앞에서 사라지라고 다그칠 거라는 두려움이 앞서서였다. 그날 기수는 울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할아버지가 영천 할매처럼 울고 다닌다면 기분이 어떨까. 아주 싫을 것 같고, 몹시 부끄러울 것 같고, 그냥 생각조차 하기 싫어서 마구 머리를 흔들어댔다.
그 얼마 후, 할아버지가 평소보다 일찍 퇴근했다. 작업장에서 미끄러져 접질린 다리 때문이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절뚝거리고 다니면서도 늘 똑같은 말을 하는 걸 잊지 않았다.
내 새끼, 숙제 다 했나?
할아버지가 얄미웠다. 일찍 와도 숙제부터 챙기다니. 오늘 뭐하고 놀았냐, 심심하지는 않았냐, 그런 걸 물어봐야지 기수가 싫어하는 것만 들먹이니 정말 지겨웠다. 학교에 가면 숙제 안 했다고 혼나고 집에 와도 공부, 오로지 공부 노래만 들어야 하니 그 심정이 어떻겠냐 말이다. 그런다고 안 하던 공부가 될 리도 없는데. 그때의 기수는 읽고 쓰는 것뿐만이 아니라 세상에 재미있는 게 하나도 없는, 의욕이라곤 별로 없는 아이였다. 숙제를 안 했다고 시무룩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기수에게 할아버지가 또 물어보았다.
일기는?
똑같은 질문과 똑같은 대답이 매일 반복되었다. 뻔히 다 알면서, 기수를 놀리려고 물어보는 것 같아 아예 대답도 하기 싫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할아버지는 불편한 다리를 절룩이면서 밥을 푸고 찌개를 데워 저녁상을 차렸다. 그리곤 참치 캔 하나를 따서 기수 앞에 놓아주며 웃었다.
내 새끼 얼른 커서 해양대학 가야지. 졸업하면 선장도 하고. 저기 먼 바다에 나가서 이런 거, 참치도 잡고 돈도 많이 벌고. 그러니까 공부 열심히……
나 이거 먹기 싫어.
기수는 할아버지의 말을 끊으며 제 앞에 놓인 참치를 가리켰다.
왜? 우리 기수가 제일 좋아하는 건데 갑자기 왜 먹기 싫을까?
그냥. 먹기 싫으니까 이제 참치 그만 사요.
그날 기수는 밥을 거의 먹지 못했다. 참치는 먹기 싫어서 안 먹고 찌개는 냄새나서 못 먹고 파래 무침은 더럽고 무서워서 못 먹으니 맨밥 몇 숟가락 먹은 게 다였다. 파래 무침을 조금씩 먹긴 하지만, 그건 금방 무쳤을 때 말이고 하루만 지나도 쳐다보기가 싫었다. 젓갈 양념에 잔뜩 풀이 죽어, 꼭 젖은 머리카락 뭉쳐놓은 것 같은데 불그죽죽 진물까지 흐르니 보는 것만으로도 입맛이 뚝 떨어졌다. 그런데도 할아버지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밥상에 파래를 올렸다. 할아버지에겐 파래가 텃밭에서 길러 먹는 채소와 똑같았는지도 몰랐다. 가끔 다대포 갯벌을 걷다 보면 밀물에 떠밀려온 파래가 보이기도 했다. 할아버지가 차린 밥상 위의 파래와는 달리 녹색으로 일렁이는, 생명력이 넘치는 그것을 조금 뜯어서 씹어 보면 맛이 달랐다. 향긋하면서도 알싸하고 달콤하면서도 비릿한 냄새가 풍겼다. 숭어들도 그 오묘한 맛을 좋아해서 파래를 즐겨 먹는다던데, 파래를 뜯어먹은 숭어가 그렇게 맛있다고들 하지만 기수는 먹어본 적이 없었다.
기수가 청개구리처럼 할아버지 애를 태운 기간은 이 년 남짓이었다. 공부를 못하고 관심조차 없는데 할아버지가 자꾸 재촉하니 점점 더 공부와 멀어지기만 했다. 그러던 기수가 공부에 관심이 생긴 것 또한 할아버지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자다가 눈을 떴는데 방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이상했다. 할아버지와 기수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기 때문에 밤중에 불이 켜져 있을 이유가 없었다. 기수는 고개만 좌우로 돌려 살펴보았다. 할아버지의 등이 보였다. 할아버지는 방바닥에 펼쳐진 기수의 공책에다 뭘 쓰고 있었다. 그것도 왼손으로, 기수 글씨처럼 삐뚤빼뚤…… 기수 대신 숙제를 하느라 잔뜩 웅크린 할아버지의 등, 낡고 해진 러닝셔츠에서 풍기던 해초 비린내…… 뭉클했다. 아, 저 사람은 내 아버지와는 좀 다르구나. 눈에 띄기만 해도 화를 내며 꺼지라고 하던 내 아버지와는 많이 다르겠구나. 적어도 나를, 쥐새끼마냥 구석으로 몰아대며, 꺼질 데도 없는데 꺼지라고 소리칠 그런 사람은 아니구나 하는 걸 온몸으로 알아챘다.
그때 기수가 할아버지에게 느낀 감정을 정확하게 이해할 순 없지만, 어쩌면 그건 사람이 사람에게 가질 수 있는 최대의 사랑과 신뢰인지도 몰랐다. 사랑받는 자가 사랑하는 자에게 지켜야 할 예의 비슷한 것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이후로 기수는 숙제가 하기 싫거나 학교에 가기 싫을 때, 운동화나 옷이 싸구려라서 너무 싫을 때, 용돈이 뭔지도 모르는 할아버지가 짜증나고 미울 때마다 그날의 할아버지 등을 떠올렸다. 그러면 견딜 만해졌다. 기수는 조금씩 단단하게 변해갔다. 어른이 되어 비록 보잘것없는 삶을 살게 될지라도, 한낱 모래처럼 흩어져버리지는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도 했다. 아무렇게나 살다가 대충 흩어져버려 할아버지를 슬프게 하는 삶은 살지 않겠다는 다짐, 그게 기수를 견디며 붙잡아준 외할아버지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는 거라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곧 대동 선착장에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기수는 대동 맛집을 검색했다. 국수집이 유명했다. 저녁은 다대포에 가서 제대로 먹고 대동에선 간단하게 요기나 하면 되었다. 우곤 씨가 워낙 잔치국수를 좋아하니 물어보나마나 그리로 가자고 할 게 틀림없었다. 배가 서서히 속도를 늦추자 사람들이 일어서서 분주히 움직였다. 좌석에 앉아서 기다리라는 해설사의 말에 약간의 언쟁이 겹쳤다. 늙수그레한 남자 둘이서 해설사를 사이에 두고 서로 주장을 펴고 있었다. 키가 작달막한 남자가 언성을 높였다.
하굿둑 수문 열어서 바닷물 올라와봐라, 농사짓는 사람 다 죽일라 카는 거지. 생태계를 살린다 어민도 살린다 하면서 수문을 꼭 열어야 된다면 농사꾼들한테 염분 피해 보상이나 제대로 해주고 열던가, 그게 맞지 않겠어요 해설사 님?
느닷없는 동조 요구에 해설사는 난감한 표정으로 웃기만 할 뿐 선뜻 동의를 하지 않았다. 질세라 다른 남자가 얼른 나섰다.
하굿둑 없을 때도 농사는 짓고 살았는데 뭘. 강이 죽어버리면 농사고 뭐고 무슨 소용이고. 87년에 저거 들어서고 나서 낙동강 참혹하게 변한 거는 생각도 안 하나? 그 맑고 창창하던 물길을 억지로 막아놓으니 안 썩고 배기나 말이다. 기수에 살던 조개, 게, 물고기도 다 사라지고 먹지도 못할 강준치만 날뛰는 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 이제라도 안 늦었다 아이가. 그나마 더 늦지 않게 수문을 열어주니까 조개도 생기고 연어며 웅어도 올라오고, 놀라온 생태 복원력에 고맙다고 절이라도 해야 할 판이지. 우짜든동 강은 흘러야 하고 흐르는 게 본분이라, 해설사 님요, 어데 내 말이 틀렸습니까?
서로 편들어 달라고 조르는 남자들 틈에서 해설사는 적당히 눙치고 머뭇거렸다. 곤란한 상황이었다. 우곤 씨가 중재에 나섰다.
기수는 여기도 있습니다. 이놈 이름이 기수고 제 외손자인데, 민물과 갱물이 적당히 섞인 유전자를 타고나서인지 제법 늠름하게 잘 생기지 않았나요? 하하, 농담이고요. 두 분 말씀 맞습니다. 다 맞고요. 요즘 웅어가 올라온다 하니 대동에 내리면 웅어나 한 접시 잡숫고들 오시지요.
무르춤하니 등을 돌리고 섰던 두 남자가 우곤 씨와 기수를 번갈아 쳐다봤다. 무안해진 기수가 우곤 씨에게 눈짓을 했다. 그만 입 좀 다무시면 안 되겠냐고. 한 시간 후에 대동선착장에 다시 와서 배를 타면 된다는 해설사의 멘트를 마지막으로 승객은 차례차례 배에서 내렸다. 우곤 씨는 좌석에 널브러진 채 사람들이 내리는 걸 보고 있었다. 기수가 우곤 씨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할아버지, 진짜 멀미 맞아요? 혹시 어디 아픈 거면 병원부터 가야죠.
와, 다 늙은 영감이 멀미한다니 안 믿기나? 멀미는 다 한다, 강도 멀미를 하고, 을숙도도 멀미를 하고, 누군들, 세상 만물 멀미 안 하는 게 어디 있겠노.
에이, 말도 안 된다. 옛날에 할아버지가 그랬잖아요. 을숙도는 낙동강이 낳은 알이라고. 그걸 진짜인 줄 알고 친구들에게 말했다가 놀림 받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또 시작이네 우리 할아버지.
이놈아, 너는 어째 보고도 못 믿어? 을숙도는 진짜 온갖 생명 품고 있는 아름답고 거대한 알이 맞다니까 그러네. 하긴 그 알 속에 또 알이 있고 그 알 속에 또 알이 있고, 낳고 품고 까고, 먹고 먹히고, 그러니 산다는 건 멀미의 연속……
기운 없어서 걷지도 못 하니까 자꾸 딴소리 하시네. 업히세요 얼른.
기수가 우곤 씨의 앞에 등을 대고 무릎을 굽혔다. 우곤 씨가 허허 웃으며 기수의 등에 가슴을 붙였다. 뜨뜻했다. 몸은 둘인데 피는 한통속이었다. 두 사람의 몸을 휘감아 흐르는 핏줄의 들썩임이 느껴졌다. 우곤 씨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기수의 목덜미를 껴안았다. 기수는 우곤 씨를 가볍게 추어올려 깍지를 꼈다.
먼저 내려서 선착장 바깥으로 나가던 사람들이 신기한 풍경을 보듯 멈춰 섰다. 기수는 그들의 시선이 쑥스러워서 더 천천히 걸었다. 멀리 사람들 사이로 누군가가 오고 있었다. 나루였다. 깜짝 이벤트인가 싶어서 어안이 벙벙했다. 멀미 때문에 못 온다고 해서 그런가보다 했는데. 체한 것처럼 속이 울렁거린 지가 며칠 되었다고 해서 병원부터 다녀오라고 했더니. 연분홍 원피스를 입은 나루가 기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반가운 마음에 기수도 마주 손을 흔들 뻔했다. 우곤 씨가 어이쿠 앓는 소리를 냈다. 하마터면 우곤 씨를 떨어뜨릴 뻔했다. 우곤 씨가 몸을 움찔거리며 잔소리를 했다.
이놈아, 업으려면 제대로 좀 업어야지, 팔랑개비 같은 할애비 업고도 이렇게 휘청거리면 앞으로 네 새끼는 어떻게 업고 다닐래?
눈시울이 화끈거렸다. 우곤 씨를 업어주는 것도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생에서의 인연이 끝나기 전에 꼭 한번은 해야 할 말, 한 번도 하지 못했으나 마음으로 늘 하고 있었던 그 말을 하려고 기수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할아버지, 사랑……
아이구 이놈아, 사랑 타령은 나루한테나 실컷 하고, 고마 내려다오.
타박을 하면서도 우곤 씨는 새가 지저귀듯 명랑했다. 온갖 생명을 낳고 품은 강이 우곤 씨 안으로 물길을 내며 흘러가는 듯 파문을 일으키는 목소리였다. 까부라진 몸을 펄쩍 일으켜 땅에 발을 디딘 우곤 씨의 얼굴에도 강이 흘렀다. 낱낱의 주름살이 저마다의 형태로 환하게 물결치는 얼굴, 그토록 함빡 웃으며 우곤 씨가 마중나간 사람은 나루였다. 기수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멀찌감치 밀려났다. 우곤 씨와 나루가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하듯 어찌나 소란스럽게 서로를 반기는지 끼어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별꼴이 따로 없었다. 그런데도 싫지 않았다. 싫기는커녕 가슴 깊은 곳이 묵직하게 아려왔다. 어디선가 물소리가 찰랑거렸다. 돌아보니 강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어쩌면 기수의 눈이 피워내는 아지랑이인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