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장 살기(殺氣)
회녕현(懷寧縣) 동쪽 일백구십 리(里). 사람들은 그 곳을 일컬어 장풍사
(長風沙)라고 불렀다. 장풍사는 황량한 곳으로, 먼지 바람이 뿌옇게 일어
나고 모든 것이 삭막하게 말라 있다.
하지만 늘 건조한 것만은 아니다. 지금처럼 장마비가 뿌려지는 계절에는
장풍사의 메마른 대지에도 습기가 턱까지 차오르게 되는 것이다.
닷새 내내 비가 뿌려졌다. 그 덕에 장풍사는 수계(水界)로 화하게 되었다.
장마비는 모든 것을 구질구질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걸치고 다니는 의복이 비에 젖어 축축해지게 되기 마련이며, 우장(雨裝)
을 이것저것 갖추다 보면 짐이 많아지고 번거로워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비가 추슬거리게 되면, 그 풍미를 더하게 되는 게 하나 있다. 그
것은 바로 술(酒)이다.
그는 아까부터 장풍사의 주루에 앉아 있었다.
마시는 술이래야 고작 모태주(茅苔酒) 한 주담자, 안주는 낙화생 한 접시
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는 안주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고 깡술만 마셔 대
고 있었다.
파리한 낯색, 힘이라고는 전혀 쓰지 못할 듯 싸늘한 낯색이다.
더욱이 누런 기운이 흐르고 있어 병이 단단히 든 듯하다.
점소이는 그가 깡술을 마셔 대기 때문에 건강을 해쳤을 것이라 나름대로
짐작하고 있었다.
쪼르륵-!
술잔에 술이 가득 채워진다. 그는 힐끗 창 밖을 보다가 술잔을 입에 갖다
대었다.
그의 입매는 단단한 맛을 보여 준다.
평상시 한 일자로 다물려진 입매이되, 술을 마실 때에는 어쩔 수 없이 입
술이 벌어질 수밖에.
하이얀 치열이 단아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가장 이채로운 건 그의 눈썹
이 희다는 것이다.
점소이는 아까부터 그 점에 궁금해하고 있었다.
"들려 오는 소문에 의한다면, 눈썹이 흰 살마(殺魔) 하나가 돌아다닌다는
데… 저 사람은 아닐 거야."
점소이는 머리를 북북 긁어 댔다.
주루에 사람이 많다면 이렇듯 한가로운 기분은 맛보지 못할 것이다. 주루
에 있는 사람이라야 고작 열다섯 정도. 그들은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이
아닌가?
시비를 일으키고 심지어 사람을 때려죽이기까지 하는 강호인이 아니라면,
일단 마음이 안심되는 게 점소이의 특징인 것이다.
창 밖의 거리는 상당히 복잡했다.
무수한 사람들이 대로를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요란한 피리 소리, 날라
리 소리가 들려 온다.
도로 양변의 건물에는 오색 깃발이 매달려 나부끼고 있었다.
장마비만 아니었더라면, 이 날의 행사가 한결 돋보이게 되었을 것이다.
"철혈대영호(鐵血大英豪) 노영웅(老英雄)이 오랜만에 출타하시니, 인근 장
원 사람들이 다 나와 구경할 수밖에."
점소이는 창 밖을 통해 먼 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먼 곳에서 요란한 행렬이 다가서고 있었다.
백여 마리의 말이 지축을 뒤흔드는 굉음을 내며 달려들고 있었으며, 황금
빛 수레 한 대가 기마 행렬에 끼여 있었다.
기마 무사들은 장창을 쳐들고 있었으며, 창에는 화려한 깃발이 묶여 있었
다.
깃발에는 핏빛 사자(獅子)와 검이 십자로 교차되어 있었다.
그것은 철혈마부(鐵血魔府)의 독문기호이다.
회녕지방의 무림인, 아니 넓게 잡아서 안휘성(安徽省)의 무림인 가운데
그 표식을 보고 몸을 떨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철혈대영호(鐵血大英豪) 독고무기(獨孤武奇)!
그는 강호의 이십대 고수 안에 끼인 바 있던 인물로, 봉검(封劍)한 지 오
래 된다고 하나 그는 무림의 쟁쟁한 실력가 가운데 하나로 군림하고 있
는 것이다.
그는 연환마교(連環魔敎)와 관산검맹(關山劍盟) 가운데 곡예하듯 세력을
키워 가고 있으며, 결과 안휘성에서 가장 거대한 세력을 이룩하게 된 것
이다.
황금빛 수레 위, 독고무기는 사 척 거검을 멘 두 청년의 호위를 받으며
느긋한 표정을 지으며 거리 구경을 하고 있었다.
"무림은 난세를 향해 치달아 간다. 백도와 마도가 각축전을 벌이고 변황
세력이 대준동(大蠢動)할 듯 보인다. 하지만 누구도 그를 꺾을 수 없다."
독고무기는 손바닥으로 흰 수염을 쓸어 내렸다.
그는 일방(一幇)에 군림하는 패웅(覇雄)이되, 그가 감히 눈 아래로 보지
못하는 인물이 하나 있다.
오늘 독고무기는 그와 세력을 연합하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상
황이었다.
"함백(涵伯)은 무림의 신과 같은 존재. 그는 이십 년 전 무적대협(無敵大
俠)을 꺾으므로 백도를 완전히 짓밟았다. 백도는 그 후 관산대협 잠풍에
의해 뭉쳐졌는 바, 그는 위선자(僞善者)에 불과한 자이다. 게다가 그는 대
권을 지니고 있지 못하고 풍운십성자(風雲十聖子)의 의결에 좌지우지되고
있다. 백도의 관산검맹은 사상누각이나 마찬가지. 안에서는 대명무문(大
命武門)이 잠풍을 치려 하고, 밖에서는 연환마교가 버티고 있다. 대소사
항을 종합해 볼 때, 향후 이십 년 간은 연환마교의 독보천하(獨步天下)이
다. 그들은 힘을 완전히 길렀다 여길 때, 치고 나올 것이다."
독고무기는 연환마교와의 연합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연환마교의 사자는 그를 장로(長老)로 모신다 하였으되, 독고무기는 수석
장로(首席長老)가 아니면 가지 않겠다고 은근히 고집을 부리는 상황이었
다.
물론 그는 연환마교의 수석장로가 될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장로가 되더라도 서열을 보다 높이겠다는 게 그의 속셈인 것
이다.
함백은 마도를 완전 통합한 인물.
그의 근처에는 기라성 같은 마웅(魔雄)들이 득실거린다.
독고무기를 능가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수석장로 지위에 오르지 못하고
있고, 수석장로의 지위는 형식상 공석이 되어 있는 것이다.
"한 가지 의혹스러운 것은, 며칠 사이 마교 장로가 되기로 한 두 명의 거
마가 척살되었다는 것!"
독고무기는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강호계에는 묘한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그것은 한 명의 잔혹한 살인자에 대한 소문이었다.
냉혈살흔(冷血煞痕)!
그 이름은 일약 강호쌍살(江湖雙煞)로 꼽히게 되었다.
그는 두 명의 전대거마를 참살함으로 이름을 날린 것이다.
그의 수법은 과격하고 무자비한 점에서 고월(孤月)과 쌍벽을 이루고 있었
다.
"감히 마교에 대들다니? 그 녀석은 오래지 않아 죽게 되겠지."
독고무기는 미소를 지었다.
그는 뇌까리는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회갑연을 축하하기 위해 멀리서 온
강호인들에게 형식적으로 인사하는 걸 잊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 때, 점소이는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어디 갔지? 언제 사라졌지?"
점소이는 텅 빈 의자를 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거기 머물러 있던 청년이 돌연 사라져 버린 것이다.
탁자 위에는 은자 한 닢이 뒹굴고 있었다.
"술값은 이미 치뤘는데, 그럼 내게 주는 은자로군."
점소이는 환한 표정을 지으며 냉큼 탁자 쪽으로 다가섰다.
그는 이게 웬 횡재냐 하는 표정을 지으며 은자를 집어 들었다.
그 시각, 독고무기는 야릇한 흥분에 휘어 감기고 있었다.
뭔가 알지 못할 기분.
내공이 절정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였다면 맛보지 못할 미세한 흥분이
다.
'가공한 기세(氣勢)!'
그의 무릎 위에 놓인 검이 야릇한 흐느낌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독고무기와 심령으로 통하는 검이 아니던가?
검이 운다는 것은, 독고무기의 마음 속에 살기가 치솟아 오르는 것을 뜻
한다.
'무엇인가 나를 노리고 있단 말인가?'
독고무기는 순간적으로 천시지청술(天視地聽術)을 써서 주위를 살펴봤다.
환호하는 군중들, 그리고 장마비 가운데 펄럭거리는 깃발들…….
모든 게 독고무기를 위해서 존재하는 듯하다.
'아무도 없거늘, 어이해 내 마음이 이리도 불안해진단 말인가?'
독고무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오백여 회 싸운 경험이 있는 노검사이다.
그는 살기 이전의 살의(殺意)마저 느끼는 경지에 도달해 있는 것이다.
게다가 최근 연환마교와 선이 닿은 두 명의 거마가 암살당한 일로 인해
신경이 곤두설 대로 선 처지.
그는 무릎 위에 검을 놓은 채, 만에 하나의 경우에 대비하고 있는 것이
다.
우두두두두-!
기마 행렬은 요란한 발굽 소리를 내되, 나아가는 속도는 느린 편이었다.
독고무기는 손을 슬쩍 쳐들었고, 그 때부터 말은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
다.
'마음이 불안하다. 이런 일은 이십 년 간 한 번도 없었다. 과거 무적대협
과 겨루어 패할 때 이후, 이런 일은 없었다.'
그는 문득 섬칫하고 치욕스러운 과거를 기억했다.
그는 십이 년 전, 한 명의 백도영웅을 만난 바 있다.
당시 그는 천하를 주유하며 마도거목들을 처단하고 있었으며, 독고무기는
그의 혈명단(血名單)에 끼여 그의 도전을 받게 된 것이다.
독고무기는 그의 삼 검에 꺾였으며,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맹세한
후 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
물론 죄를 짓지 않겠다는 맹세는 지켜지지 않았다.
무적대협이 함백에게 죽는 것으로 인해 백도의 항마세력이 붕괴되었기에,
독고무기는 두려움 없이 효웅(梟雄)으로 대활약을 하여 오늘의 기반을 이
룩하게 되었던 것이다.
빠르게 나아가는 기마 행렬.
거리를 메운 군중은 약간 어리둥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거리의 일각(一角).
그는 조금 전 뜯어 내어 질겅질겅 씹던 풀잎을 툭 뱉어 냈다.
그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리다가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는 조금 전 대장간에 가서 철검 하나를 가슴에 안은 채 기마 행렬의
정면 쪽으로 성큼 걸음을 내딛었다.
'수유(須臾)의 순간을 노려야 한다.'
그는 백여 필의 말이 다가서는 곳을 향해 신형을 비스듬히 틀었다.
"저런!"
"말에 치이겠다. 물러나라!"
"건방지군. 감히 행렬을 가로막다니!"
요란한 호통 소리.
말을 몰고 있던 무사들이 일제히 말고삐를 잡아채며 한바탕 소란이 일어
났다.
말이 울부짖고, 무사들은 말을 진정시키느라 멋진 기마술을 발휘해야만
했다.
청년은 말들이 주춤하는 사이를 이용해 조금 더 접근해 갔다.
이번에는 마상에서 열다섯 명의 무사가 날아올라 그의 앞쪽으로 훌훌 떨
어져 내렸다.
무사들은 허공에서 검을 뽑아 들었으며, 검신을 눕혀 가슴에 댄 채 멋들
어진 자세로 떨어져 내렸다.
철혈십오익(鐵血十五翼)!
독고무기가 칠 년 간 간신히 키운 호위무사들이다. 그들은 독고무기를 노
리는 자객을 열일곱이나 막아 낸 바 있다.
"무기를 버렷!"
"감히!"
철혈십오익이 땅으로 떨어지는 찰나, 청년은 어깨를 으쓱이며 빠르게 날
아갔다.
그는 간발의 차이로 철혈십오익의 인간 장벽을 스치고 지나갔으며, 독고
무기의 사 장 앞으로 다가섰다.
독고무기는 어느 틈엔가 벌써 검을 뽑아 수직으로 세우고 있었다. 그는
저벅저벅 다가서는 청년을 쓸어 보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가 소문이 자자한 냉혈살흔인 모양인데, 소문보다 형편없군."
"……."
청년은 아무 말 없이 그를 향해 세 걸음 더 다가섰다.
그의 걷는 속도는 일정한 박자감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그의 진행 방향
은 남들이 쉽게 추측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노부의 목은 꽤 길지!"
독고무기는 겁없이 다가서는 젊은 도전자가 자신의 검 아래 제거된다는
신념을 가진 상황이었다.
그는 무수한 고수와 싸워 본 바 있다. 그는 상승고수들이 전하는 느낌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 다가서는 자는 상승고수의 느낌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와라. 베어 주마!"
독고무기는 검을 번쩍 쳐들었고, 그의 수하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두 사람
을 빙 둘러 포위했다.
'암살이 실패한 이상, 정면대결뿐. 훗훗, 정면대결에서 질 노부가 아냐!'
독고무기는 상대를 자객 정도로 취급하고 있었다.
상대는 뜻밖에도 느긋하게 다가섰다.
그의 눈빛은 매우 특이했다. 어떤 정서도 담기어 있지 않은 암울한 눈빛.
죽음에 대해 달관한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눈빛이다.
'설마, 무심경(無心境)에? 말도 안 돼. 저 나이에 무심경에 도달할 순 없
어!'
독고무기는 고개를 저으며 검을 비스듬히 쳐 나갔다.
그의 검은 철혈통천결(鐵血通天訣)에 따라 원호를 뿌리면서 청년의 가슴
을 향해 다가갔다. 청년의 흰 눈썹이 꿈틀거린다. 그는 검을 피할 듯 몸
을 움찔거리다가 입술을 질겅 물었다.
'빨리 처단하고자 하면 일 검쯤은…….'
그는 검이 가슴을 향해 다가서는 것을 보면서도 피하지 않고 따라서 검
을 쳐들었다.
그의 검은 수직으로 쳐들렸다가 밑을 향해 떨어져 내렸고, 그 순간 그의
가슴에는 십여 개의 검흔이 그어지며 피가 분출되어 나왔다. 검은 옷자락
이 피에 물드는 찰나, 그리고 독고무기가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는 순간,
그의 검은 무서운 속도로 독고무기의 천령개(天靈蓋)를 향해 덮쳐 내렸
다.
"흐윽, 검세가 죽지 않다니!"
독고무기는 기절초풍 놀라며 뒤로 물러나고자 했다.
그러나 덮쳐 내리는 검세는 섬전처럼 빨랐기에, 그는 검날이 바짝 다가서
는 것을 보면서도 피할 수 없었다.
인간의 몸에는 너무나도 많은 오물이 담기어 있었다.
수직으로 갈라져 버리는 독고무기의 배에서는 창자와 핏물이 뿜어져 나
왔다.
강호를 질타하던 노효웅은 천령개에서 사타구니 사이가 정확히 반으로
갈라져 버린 것이다.
모든 상황은 일순간적으로 진행이 되었다.
청년은 가슴에 검을 맞는 것을 감수하면서 독고무기를 일 검으로 쳐 버
린 것이다.
그는 피보라가 뿜어지는 찰나 신형을 틀었으며, 바로 그 순간 철혈십오익
은 포효성을 토하며 그를 향해 다가섰다.
"죽어라! 감히 노문주를 베다니!"
"저 놈을 능지처참해라. 피빚은 피로 받아 내야 한다!"
미쳐 날뛰는 철혈십오익의 검에 의해 수레가 파괴되었고, 나무 조각이 퉁
기어 올랐다.
네 마리 말이 검풍에 휘말려 분시되어 버렸으며, 피보라가 장마비 속으로
뿜어져 올랐다.
"이유 없는 살인은 싫어."
피투성이가 된 청년은 입술을 질겅 깨물며 몸을 묘하게 회전시켰다. 그는
열다섯 자루 검이 날아오는 걸 뚫어져라 바라보며 퉁기어 올랐고, 검과
검 사이의 공간으로 슬쩍 파고들었다.
요란한 쇳소리가 나며 열다섯 자루의 검이 서로 부딪쳐 불똥을 퉁기어
냈다. 한바탕 소란이 일어나는 가운데, 청년은 주루 꼭대기로 솟구쳐 올
랐다가 폭우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검 사이를 안개처럼 지나쳐 가다니!"
"우우, 무서운 안력(眼力)이다. 열다섯 자루의 검이 날아드는 걸 모조리
파악하고, 그 사이로 빠져 나간 것이다!"
"그 자가 우리를 죽이려 했다면, 우린 모두 죽었다. 한데, 어이해 그냥 떠
난 것인가?"
철혈십오익은 모골이 송연해져서 얼어붙고 말았다.
그들은 냉막한 인상의 청년의 무공이 자신들의 경지를 월등히 능가하면
서도 그냥 떠나갔다는데 전율하고 마는 것이다.
그는 회녕(懷寧)에서 또다시 술을 마셨다.
그는 세 번 살인을 모두 성공한 것이다.
독고무기를 벨 때 상처를 입기는 했으되, 그 정도는 스스로 능히 치료할
수가 있다.
허름한 객잔 구석진 방, 그는 안주 하나 없이 죽엽청(竹葉淸)을 들이켰다.
백무영, 바로 그가 아닌가?
사실 그가 아니고 누가 그렇듯 완벽한 살검을 발휘해 낼 수 있을 것인
가?
'세 명을 죽이고 나면 연락을 해 준다고 했었지!'
백무영은 술잔을 빠르게 비워 나갔다.
독고무기의 내장이 우수수 쏟아지는 광경이 새록새록 기억나며 구역질이
치미는 것이다.
'소와 돼지, 말은 무수히 죽였다. 짐승을 죽일 때에도 처음엔 구역질을
느꼈지. 그러나 나중에는 익숙해졌다. 하지만 사람을 죽이는 건 늘 구역
질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백무영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강한 역감을 느끼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는 이유나 명분도 없이 세 명을 죽인 것이다.
물론 그들은 죽어 마땅한 강호의 마두들이다.
백도인이 그들을 죽이지 못한 이유는, 실력과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난 그들과 원한이 없는데 차례로 죽였다. 빌어먹을! 난 살인 도구에 불
과하다. 내가 어이해 이러한 일을 계속해야 한단 말인가?'
백무영은 고뇌(苦惱)에 사로잡혔다.
무공을 배울 때에는 어떠한 고통이든 참을 수 있었으나, 정작 무공이 일
단계나마 완성된 상태에서 인내해 낸다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다.
'저주받을 짓을 얼마나 더 저질러야 하는가?'
그는 강한 회의감에 사로잡힌 채 술을 계속 마셨다.
그가 주담자 세 개를 비울 때였다. 방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며 점소이 목
소리가 들려 왔다.
"혹, 개봉에서 오신 분이 아니십니까?"
"그렇네만."
"누군가 서찰을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점소이는 방문을 빠끔히 열고 들어왔다.
점소이는 싱글벙글해하고 있었다.
누군가 서찰을 전해 달라고 하면서 은자 두 닢을 쥐어 주었으니, 어찌 기
쁘지 않겠는가?
'이 돈으로 오입이나 해야지. 젠장, 나도 남자가 아닌가. 투숙객들에게 여
자 붙여 주는 일로 먹고 살기는 하나, 나도 여자를 품고 싶어 열병이 날
젊은 놈이란 말야!'
점소이는 백무영에게 서찰을 전하는 직후에 그런 생각에 젖어들었다. 솔
직히 그는 자신이 전한 서찰이 강호계의 운명을 뒤바꾸어 버릴 밀서라는
걸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기다리던 것이다!'
백무영은 숨을 홱 빨아들인 다음에 밀지를 뜯었다.
밀지를 펼 때 묵향(墨香)이 풍겼다.
먹물이 아직 마르지 않은 글이다. 그리고 필적으로 보아, 일사부가 적은
글임에 틀림이 없었다.
<다 봤다. 네 자신의 실력에 대해 맹신하고 있는 게 불만스러웠다. 적을
완전히 안다 하더라도 구태여 정면에서 덤빌 필요는 없다. 네게는 막대한
세월과 노력이 투자되었다. 몸을 함부로 굴리지 마라. 네놈 하나 죽어 봤
자 네놈에겐 별것 아니나, 우리들에겐 막대한 손실이다. 너는 네 자신이
아니라, 우리들을 위해 몸을 아껴야 한다.>
일사부다운 냉막한 글귀가 첫부분에 쓰여 있었다.
그는 인파 가운데 끼여 백무영이 독고무기를 베는 것을 살펴보았음에 틀
림이 없었다.
그는 왜 암살을 하지 않고 정면대결하였느냐 질책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
만 뒷부분의 글은 다분히 만족스럽다는 심정에서 쓰여진 듯했다.
<어찌 되었건 네게 정식으로 밀명을 내리겠다.
지금 즉시 북서(北西)를 향해 가라. 너의 목적지는 대곤륜(大崑崙)이다.>
대곤륜, 일컬어 천산(天山)이 아니던가?
백무영의 눈빛은 점점 싸늘해졌다.
그는 눈도 깜박이지 않으며, 글을 읽어 내려갔다.
<대곤륜에는 관산검맹(關山劍盟)이 세워져 있다.
관산검맹은 백도육백파(白道六百派)를 대표하고 있는 세력이다. 형식상의
맹주는 관산검협(關山劍俠) 잠풍(潛風).>
글씨는 깨알같이 작았다. 특기할 만한 일이라면, 글씨가 꽤나 악필(惡筆)
이라는 것.
'이 글은 오른손으로 쓴 글이 아니다. 이 글씨는 왼손으로 쓴 글씨이다.'
글씨는 왼손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일사부는 자신의 필적을 숨기고자 왼손으로 글씨를 쓰는 습관을 갖고 있
는 것이다.
<잠풍은 허수아비 맹주, 실질적인 권한은 풍운십성자(風雲十聖子)가 장악
하고 있다. 그리고 잠풍을 몰아내기 위한 비밀세력이 있는 바, 일컬어 대
명무문(大命武門). 그 우두머리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본시 백도의 대표자가 될 만한 인물은 무적대협(無敵大俠). 대명무문은
그를 추종하고 있는 집단이다. 그들은 무적대협이 제거된 데에 잠풍이 깊
숙이 개입되어 있다고 여기고 잠풍을 제거하고자 한다. 네가 할 일은 대
명무문에 들어가는 것이다.>
백무영의 이마에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혔다.
편지는 상당히 장문(長文)이었다. 만에 하나 이 편지가 외부에 밝혀진다
면, 흑도백도의 정세에 엄청난 파급효과가 일어난다.
'혈의육존은 무림의 대권(大權)을 노리는 걸까? 그리고 나는 어리석게도
전후사정을 모르고 하수인(下手人) 노릇이나 하는 삼류 인생일까?'
백무영은 글을 읽고 또 읽었다. 그의 눈길은 편지의 말미에 쏠리어졌다.
<다 읽고 소각할 것!
만에 하나 밀명을 위배하거나 비밀을 누설한다면, 너는 소리 없이 제거된
다. 다음 밀명은 내가 직접 내릴 것이다. 그 때까지는 밀지에 적힌 대로
행동해라!>
백무영은 밀지를 완전히 암기한 다음에 둘둘 접었다.
그는 밀지를 작은 조각으로 찢은 다음에 한 장 한 장 입에 넣고 삼켰다.
가슴에 상당한 통증이 전해졌다. 독고무기를 벨 때 다친 부위가 욱신욱신
쑤시는 것이다.
그는 애써 신경을 편안하게 하고자 했다. 이럴 때 제일 필요한 것은 한
가지에 불과하다.
'푹 자 두자. 내일부턴 먼 길을 가야 하니까!'
그는 마음 속을 텅 비우고자 노력했다. 괜한 번뇌는 내가운기에 지장이
된다.
비는 쉬지 않고 내렸다.
장풍사 일대가 홍수(洪水)에 뒤덮여 버릴 때, 백무영은 조용히 그 곳을
벗어났다.
쫓긴다는 건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상대가 실로 집요한 추적
자(追跡者)들일 때에는 더 난처하기 마련이다.
상대의 숫자는 이백에 달했다. 그들은 며칠 전부터 백무영의 뒤를 집요하
게 추적했다.
'능숙한 자들이다!'
백무영은 추적자들과 십 리 정도의 거리를 떼어 놓고 움직였다.
장풍사를 떠난 지 열닷새. 추적자들은 칠 일 전에 처음 눈에 띄었다. 제
일 먼저 이상한 행동을 보인 자는 능운현(凌雲縣) 근처에서 만난 마부(馬
夫).
그는 백무영을 보고 흠칫 놀랐으며, 재빨리 고개를 떨구었던 것이다.
백무영은 그에게서 살기를 느끼었으나, 모르는 듯 지나쳤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자가 분명 추적자들을 불러들인 듯했다.
추적자들은 치밀하게 연락을 하며 백무영을 뒤따르고 있었다.
백무영의 경신술이 조금 늦었더라면, 그들에게 덜미를 잡혔을 것이다.
'사냥개들. 훗훗, 분명 내가 제거한 삼대거마의 호위세력에서 나온 자들
이리라!'
백무영은 손을 들어 흰 눈썹을 매만졌다. 흰 눈썹은 그의 상징이나 마찬
가지였다.
솔직히 파리한 얼굴 한가운데 흰 눈썹이 자라나고 있다는 건 대단한 특
징이다.
최근 들어 냉혈살흔(冷血煞痕)에 대한 소문은 남북강호(南北江湖)를 경동
시켰다.
백미(白眉), 사안(死眼), 그리고 무표정한 암살자(暗殺者).
누가 냉혈살흔의 특징을 알지 못하겠는가?
냉혈살흔은 마도세력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으며, 냉혈살흔을 추적하기
시작한 무사들의 숫자는 일천에 달했다.
지금 백무영의 뒤를 추적하는 자들은 그 가운데 일부분인 것이다.
'일사부의 밀지에는 추적자들이 따라붙으리라는 예측이 있었다. 역시 그
예측은 정확했다. 나를 기른 인물들은 천하정세에 능통한 인물들이다. 그
들은 추적자들마저 계산에 넣고 있는 것이다.'
백무영은 백 리 정도 가다가 한 번씩 쉬었다.
그는 내공이 탈진되지는 않았으되, 꽤나 지친 표정을 했다.
'내공을 칠 성만 써야 한다. 자신의 모든 걸 보여 주는 건 고수답지 못한
행동이다.'
백무영은 쫓기는 자답지 않게 태연자약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는 추적을 당하는 게 아니라, 추적자들을 몰고 다닌다
고 해야 좋을 것이다.
추적자들은 휘파람과 폭죽(爆竹)으로 신호를 하며 포위망을 좁혀 들었다.
추적자들은 대부분 철혈무문(鐵血武門) 출신 무사들이었다.
그들은 철혈무문의 의복에다가 옷가슴에 마두문(魔頭紋)을 수놓고 있었
다.
송곳니를 드러내고 거만히 웃는 마귀의 머리 무늬는 당금강호를 지배하
고 있는 거대세력의 독문기호라 할 수 있었다.
'연환마교(連環魔敎)이다!'
백무영은 마두문을 보고 하나의 거대한 세력을 뇌리에 떠올렸다.
당세를 절반 가량을 장악한 가공한 무림세력.
마도의 절대자로 군림하고 있는 함백(涵伯)이 이룩한 악마의 성전, 연환
마교!
과거 무적대협은 연환마교를 분쇄하고자 하다가 희생당한 바 있다.
그리고 당금 천하의 백도세력은 감히 연환마교와 정면으로 격돌하지 못
하고 있었다.
백무영은 감히 연환마교의 비위를 건드린 것이다.
그들은 마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냉혈살흔에 대해 천리추적령(千里追
跡令)을 내린 것이다.
'추노인이 가르쳐 준 구명은잠술(救命隱潛術)을 쓰는 한, 만 명이 덤벼도
날 잡지 못해. 하지만 너희들이 날 따라다녀야만 내가 쉽게 다른 목표지
에 들어설 수 있다.'
백무영은 팔 일째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눈에는 핏발이 곤두섰으며,
안색은 더욱 파리해졌다. 잠을 자지 못한다는 건, 인간이 겪는 고통 가운
데 상위에 속하는 고통이다.
백무영은 사냥개 떼에 쫓기는 한 마리 늑대의 신세가 되고 있는 것이다.
'사흘 안에 내가 찾는 자들이 나타나야만 한다. 그래야 도박에서 이길 수
가 있다.'
백무영은 어느 새 음산(陰山)지역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의 어깨 위로 팔월의 신월(新月)이 비수처럼 걸리는 어느 술야(戌夜).
그는 너른 지평선 너머로 광활하게 도열해 있는 거산의 행진을 볼 수 있
었다.
산은 구름을 짓밟고 진군하는 백만대군의 기세로 버티어 있었다.
'저 산이다. 바로 저 산이 내가 가고자 했던 바로 그 산이다.'
대곤륜(大崑崙).
무림인들은 곤륜산에 대자를 붙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대곤륜의 혼(魂)이라 불렸던 한 명의 협사를 기념
하기 위함이다.
아직도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혜성(彗星)의 영웅이 있다.
지리멸렬한 백도의 단합을 위해 거검(據劍)했던 대풍운아(大風雲兒). 사람
들은 그에게 무적대협(無敵大俠)이라는 외호를 붙여 주기에 서슴지 않았
다. 그는 난마(亂魔)처럼 비등해 오르는 마도세력과 단신으로 싸웠으며,
싸울 때마다 이겼다.
그는 마도인을 꺾고 나면 늘 이렇게 말했었다.
- 난 곤륜에서 왔소! 빚을 갚고 싶다면 언제든 곤륜으로 오시오.
곤륜은 그로 인해 유명해졌다.
무적대협의 출신방파가 어디인지 모르되, 곤륜은 그의 정신이 머무는 곳
으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곤륜산맥의 길이는 총 칠천 리(里).
솔직히 말하자면, 곤륜산맥이란 중원의 북과 서를 잇는 산맥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곤륜산은 너무나도 광활하기에, 서중동(西中東) 세 지역으로 나누어 구별
되고 있다.
서곤륜(西崑崙)은 머나먼 변황지방에 우람히 솟아오르는 당고라산(唐古喇
山)에서 청해(靑海)까지의 지역을 말한다.
서곤륜은 자고로 천산(天山)이라고도 불리운다.
중곤륜(中崑崙)은 기련(祁連), 하란(賀蘭)에서 음산(陰山)까지의 산을 말
하며… 넓게 포함해 말한다면 장백(長白)도 중곤륜에 끼인다.
그리고 동곤륜(東崑崙)은 일명 북령(北嶺)이라 불리우는 바, 파안합리(巴
顔哈里)에서부터 사천(四川)의 민산(珉山)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를 말하는
것이다.
종남산(終南山), 동백산(動柏山), 대별산(大別山)도 동곤륜에 끼인다고 할
수 있으며… 그 지역을 동곤륜의 남령(南嶺)이라 한다.
곤륜산은 중원(中原)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산악을 통칭해 말하는 것
이기도 하다.
무림인들이 성지(聖地)로 추앙하는 곤륜산은 중곤륜(中崑崙)이며, 중곤륜
의 광활한 지역에서도 음산(陰山) 가에 위치한 극천단(極天壇) 일대를 말
하는 것이다.
곤륜은 중원의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는 산답게 추위가 빨리 다가섰다.
산상(山上)은 이미 단풍에 의해 붉게 물들었는 바, 멀리서 보면 산 위에
서 십만병사(十萬兵士)가 떼주검 당해 피를 흘리고 있는 것 같았다.
산은 인간의 감각을 무디게 한다. 산이 바로 앞에 있어 보여도, 살기슭으
로 다가가는 데에는 며칠이 걸리기 마련이다.
새벽이 타오를 때, 백무영은 연보라색 안개를 헤치며 빠르게 이동하고 있
었다.
허리까지 갈대가 자라고 있었다. 갈대 흰 꽃이 조막손들처럼 펄럭거리고
있다.
"집요한 자들!"
백무영은 초조한 눈빛을 흘리며 미친 듯 질주해 갔다.
뒤쪽에서 호각 소리가 간간이 들려 왔으며, 하늘 위로 폭죽이 터져 오르
기도 했다.
이십여 리에 걸쳐 펼쳐진 갈대의 벌판은 길을 잃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
었다.
백무영은 가쁜 숨을 토하며 가끔 뒤쪽을 힐끔힐끔 바라봤다.
갈대숲 사이로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추적자들은 코앞까지 다가선 것이다.
"몇 놈 더 죽여 봤자 은자(銀子)도 받지 못하는데. 젠장, 그렇다고 쉽게
빠져 나갈 것 같지도 않단 말이야!"
그는 거친 욕설을 토하며 위로 치솟아 올랐다.
그는 갈대숲 사이에 자라고 있는 노송(老松)의 가지 위로 사뿐 올라섰으
며, 철갑을 두른 듯한 소나무 비늘을 박차면서 공중제비를 돌며 떠올랐
다.
그가 또 다른 소나무 위로 떨어져 내릴 때, 사방에서 비전(飛箭)이 날아
들었다.
파팟팟-!
무수한 암기가 날아들며 도처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떠올랐다.
추적자들은 호통 소리도 내지 않고 무작정 달려들었다.
"빌어먹을! 네놈들의 목에는 황금이 걸려 있지 않단 말이야. 그러니까, 꺼
져 버려!"
백무영은 몸을 핑그르르 돌리며 암기 세례를 피하며 무기를 꺼내 비스듬
히 휘둘러 댔다.
검신에 무딘 기운이 전해진다.
검이 흔들릴 때마다 팔과 다리가 잘리어 떨어져 내렸다.
검의 날이 무디어질 때까지 베어 대자, 옷자락이 피로 벌겋게 물들었다.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군. 젠장, 세 명의 노마두를 죽이고 받은 돈이 별
로 없는데… 이 고생을 하다니? 벌써 일곱 번째가 아닌가?"
백무영은 일곱 명의 추적자를 베어 버리면서 갈대숲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장풍사에서 여기까지 오는 가운데, 크고 작은 일곱 번의 격전을 치
루었다. 그 사이 그는 꽤 많은 상처를 입었지만, 상처를 치료할 틈도 없
이 도망쳐야만 했다.
그는 갈대숲에 은잠해 들며 경박하게 뇌까렸다.
"황금만 준다면, 모조리 죽여 버릴 수도 있지. 하지만 네놈들을 죽여 봤
자, 누가 돈을 주겠느냐? 녠녠……!"
그는 추적자들과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다는 걸 느끼며 어느 정도 안심
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운기행공을 하고 가자. 제길, 대체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겠군."
그는 산동(山東)의 발음으로 지껄이며 결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는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다음에 운기조식(運氣彫息)에 들어갔
다.
운기조식이란 남이 방해하지 않는 장소에서 해야 한다.
조식을 하는 가운데에는 적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러하기에, 운기행공을
할 때에는 남의 눈을 피해서 해야 하는 것이다.
내공을 십이주천(十二週天) 운용해 나갈 때였다.
돌연, 목 뒤로 차가운 물체가 닿았다.
섬뜩한 느낌으로 보아, 그것은 분명 예리한 장도(長刀)였다.
"조용히 운기조식을 거두어라. 손발을 멋대로 놀리다간 머리통이 목과 이
별하게 된다."
"누, 누구냐?"
"알 필요 없어."
"빌어먹을, 애송이한테 걸리다니. 젠장, 동영(東瀛)에서 배운 암살수법을
써먹기도 전에 피라미 셋을 베고 죽게 되다니……."
"산동 출신이냐, 냉혈살흔?"
"녠… 그 따위 것을 알아서 무엇 하겠느냐?"
"묻는 대로 대답해라. 네 목숨과 직결되는 것이니까."
도에 힘이 약간 가해졌다.
등줄기가 축축해지기 시작하는 게, 목 뒤가 약간 베어지며 피가 뿜어지기
시작했음에 틀림이 없었다.
"그, 그렇다. 산동 출신이다."
백무영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하기 시작했다.
상대는 그제야 도를 멈추며 더 차갑게 물었다.
"왜 그들을 죽였지?"
"그들이라면?"
"흑야일점홍(黑夜一點紅), 음양인마(陰陽人魔), 그리고 철혈대영호(鐵血大
英豪) 독고무기(獨孤武奇). 왜 그들을 잇달아 암살했느냐?"
"청부를 받았다. 그래서 죽였다."
"누가 살인을 청부했느냐?"
"말할 수 없다."
"죽고 싶은가?"
"죽어도 말할 수 없다."
"미련한 녀석."
"미련해도 할 수 없어. 난 운이 나빴을 뿐이야. 녠녠, 겨우 셋을 죽였을
뿐인데… 수백 명이 떼지어 추적할 줄이야. 젠장, 게다가 내공이 탈진한
상태에서 피라미를 만나 암습을 당하다니."
백무영은 역겹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으며, 순간 상대의 호흡 소리가 침
중해졌다.
"철저한 청부자로군. 동영에서 배운 솜씨인가?"
"그렇다."
"세 명의 거마는 대가를 받고 죽였는가?"
"그렇다."
"만약 거금을 준다면, 또 다른 사람을 죽여 줄 수 있겠는가?"
"물론이지. 돈만 준다면. 녠녠, 천상 백옥경(白玉京)으로 올라가 옥황상제
라도 죽여 줄 수 있어."
"자신만만하군."
"살인에 대해서만은!"
"좋아. 그럼 한 가지 살인을 청부하겠다!"
도는 그 말과 더불어 거두어졌다.
백무영은 바로 그 순간, 뒤돌아서며 상대의 완맥을 움켜쥐었다.
그의 동작이 어찌나 빠르던지, 도를 쥐고 있던 자는 기가 막히다는 듯 입
을 따악 벌렸다.
"빠, 빠르군."
백무영은 찰나지간에 도를 빼앗아 들고 상대의 목에 도를 들이대고 있었
다.
백무영은 하이얀 이빨을 드러내며 상대를 노려봤다.
그는 얼굴을 몽면으로 가리고 있었으며, 체격은 왜소한 편이었다.
"널 죽이겠다!"
"너의 고객이 되어 주기 위해 널 죽이지 않았다. 도를 내려라."
"고객?"
"솔직히 말하자면, 열흘 전부터 은밀히 추적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 사이, 너의 실력을 세밀히 평가한 것이지."
"호오, 그랬던가?"
백무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의아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 속으로 흐르는 말은 전혀 다른 말이었다.
'그래, 넌 나를 열흘 내내 따라다녔지. 후훗, 솔직히 말하자면 네가 날 찾
기를 기다리고 있었지. 낚시에 걸린 쪽은 내가 아니라, 너다.'
백무영은 음산한 표정을 지었으며, 몽면인은 눈을 깜박거리며 말을 이어
나갔다.
"거금(巨金)을 받을 수 있는 일이다."
"날 사는 값은 비싸!"
"세 명의 거마는 얼마를 받고 죽였지?"
"두당(頭當) 일만 냥."
"좋아. 그럼 그것의 십 배를 주지."
"십만 냥을 주겠다고?"
백무영의 입이 딱 벌어졌다.
몽면인은 자신을 믿으라는 눈빛을 던졌다.
그의 눈빛은 정말 아름다웠다. 그리고 어디에선가 본 듯한 눈빛이었다.
'대체 어디서 보았을까?'
백무영은 몽면을 벗기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았다.
그는 가공한 암기력을 갖고 있으며, 특히 잘 기억하는 것은 사람의 얼굴
과 목소리이다.
그는 그 부분에 대해 따로 훈련을 받았을 정도였다.
눈앞에 있는 자는 분명 전에 한 번 본 바 있는 인물이었다.
"십만 냥, 세상에 다시 없을 청부 금액이지. 그리고 그 일을 성사시킨다
면 일약 영웅(英雄)이 될 수 있다, 냉혈살흔!"
"녠녠… 구미가 당기는군."
그는 그제야 도를 천천히 내렸다.
그의 자세는 허술했으나, 상대는 거미줄에 걸린 나방 마냥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전신이 병기(兵器) 같은 자이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되물었다.
"모든 것을 비밀로 해야 한다."
"물론 모든 건 비밀이다."
"그럼 함께 가자."
몽면인은 몸을 틀었고, 그 때 백무영은 그윽한 향기를 맡게 되었다. 그
향기는 향수 내음이 아니었다. 그 내음은 인간의 육체에서 흘러 나오는
체향(體香)이었다.
'여자(女子)다!'
백무영은 몽면인이 여자라는 걸 그제야 알게 되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