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당 시집 제2권 1-101 영사詠史 10 애반사哀班師 군사 돌이킨 것을 슬퍼한다
생평부장지生平負壯志 한평생 장한 뜻을 품었으니
려력수감당膂力誰敢當 여력膂力을 누가 감히 당하랴?
독서학병법讀書學兵法 글 읽어 兵法도 배웠으니
흉저손오장胷貯孫吳腸 가슴 속에는 손빈孫臏ㆍ오기吳起 간직했도다.
만노필만강挽弩必挽強 쇠뇌[弩]를 당길 때엔 반드시 강하였고
용전필용장用箭必用長 화살 쏠 때는 반드시 긴 화살 썼네.
사적기사마射敵期射馬 적군을 쏠 때는 말[馬]도 쏘려 했고
금적기금왕擒賊期擒王 도적을 잡을 때는 왕을 잡으려 했네.
이성고조환二聖苦遭患 두 임금 괴롭게도 환난을 만나
몽진추로장蒙塵醜虜場 오랑캐 땅에서 몽진蒙塵하였네.
남조역미녕南朝亦未寧 남송 조정 역시 태평하지 못하여
신차봉애방新次蓬艾防 쑥대 뺑대로 방어를 편성하였네.
위신가인간爲臣可忍看 신하 되어 차마 볼 수 있었던가?
체사횡타방涕泗橫沱滂 눈물 콧물 가로 세로 줄줄 흘렸네.
하이칭제명何以稱帝命 무엇으로 황제의 명에 봉답奉答을 하며
하이보총장何以報寵章 무엇으로 은총의 편지에 보답을 하랴?
조조려사졸朝朝勵士卒 아침이면 아침마다 사졸을 격려하고
일일마부장日日磨斧斨 날이면 날마다 도끼와 큰 칼 갈았네.
기욕소요분期欲掃妖氛 결단코 요망스런 분위기 쓸어버리고
회복아토강恢復我土疆 자기의 옛 강토疆土를 회복하려 했네.
여하범람운如何泛濫雲 어찌하여 둥실둥실 떠도는 구름이
옹차천일광擁此天日光 저 하늘의 햇빛을 가리웠던가?
교조거반사矯詔遽班師 조칙詔勅을 위조하여 급히 회군하라 하니
차의수공상此意誰共詳 이 뜻을 누구와 함께 의논하리.
생당환로역生當還虜域 살아서 마땅히 오랑캐 땅 되찾고서
일소진참창一掃盡攙搶 일소하여 다 쓸어버리려 하였더니
사원위려귀死願爲厲鬼 죽으면 원컨대 여귀厲鬼가 되어서
필작참부창必斫讒夫昌 반드시 참소하던 자들을 찍어 죽이리.
황천우아송皇天佑我宋 황천皇天이 우리 송宋을 보우하시면
필무여차앙必無如此殃 반드시 그런 재앙 없으련마는
인신수교절人臣須郊節 신하 된 자 모름지기 절개 다하여
사생기가망死生其可忘 죽고 삶을 완연히 잊어야 하리.
►애반사哀班師
진회秦檜는 악비岳飛가 성공할 것을 시기하여 환군還軍을 명령했는데
하루에 독촉하는 사람이 12번이나 갔다고 한다.
►손빈孫臏·오기吳起
손빈은 戰國時代 제齊의 兵法家로 손무孫武의 자손이다.
오기는 전국시대 위魏나라 사람으로 병법에 밝았으며 저서로 <오자吳子> 1권이 있다.
●악비岳飛(1103-1142)
►출생과 어린 시절
악비는 원래 귀족들만 자칭할 수 있는 명칭인 한족의 귀족이었으나
이후 노비로 강등되어 가난한 농노 집안에서 자랐다.
고향은 현재의 河南 安阳市 湯陰縣이다.
태어나자마자 황하가 범람해서 태어난 고향이 파괴되고 그의 부친인 악화岳和는 그가 어렸을 때
홍수에 익사溺死하여 악비와 그의 모친인 요부인姚夫人은 허베이성에 정착했다.
야사로는 악비의 아버지는 홍수에서 살아남아서 훨씬 후에[모호한 표현]까지 생존했다고 한다.
8살의 악비는 들판에서 악화와 만나게 되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악비는 1122년 의용군에 입대, 개봉을 방어했다.
의용군에 참가했고 무용이 뛰어나 그 중 금나라와의 전투 등에서
많은 군공을 세워 두각을 나타냈으며 1134년에는 절도사에 임명되었다.
소년시절에 악비는 매일 밤 잠들기 전에 손자병법을 읽는 것으로써 군사전략을 익혔다.
이 지식은 그가 후일 장군으로서 활약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무술 훈련
그의 첫 무술 스승은 그 고장에서 창술과 검술 사범으로 유명한 진광陳廣이었다.
그는 악비가 11세였을 때부터 창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손유孫逌가 저술한 악왕사鄂王事에서는
진광은 악비의 외조부 요대옹姚大翁에 의해 고용되었다고 한다.
성년이 되었을 때 그의 두 번째 무술 스승은 궁술을 가르친 주동周同이었다.
송사宋史 악비전嶽飛傳에서는 악비에 대해서 300척(90m)까지 활을 쏠 수 있고
노弩를 8石까지 감당할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금나라와 전쟁
1122년 개봉을 방어하고 있던 종척을 따라 의용군으로 참가 했다.
그의 뛰어난 무용은 금나라와의 싸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 전공을 세우고
정강의 변으로 남송이 들어서자 우한武漢과 양양襄陽을 거점으로
湖北省 일대를 영유하는 대군벌大軍閥이 되었다.
1126년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군대가 華北 지방을 침입하여 맞서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후퇴했고 금나라가 화북을 점령하고
북송의 수도인 개봉을 점령하자 고종을 따라 남하하였다.
악비가 이끄는 군대는 싸움에서는 반드시 이기고 백성들에게는 결코 폐를 끼치는 일이 없어
마을에 들어설 때마다 백성들이 앞다퉈 술과 고기를 바칠 정도였다고 한다.
이 군단은 '악비가 이끄는 군대'라는 뜻의
'악가군'이라 불리며 남송 제일의 최정예 군단으로 꼽혔다.
악가군은 유광세劉光世·한세충韓世忠·장준張俊 등의 군벌의 병력과 협력하여
금나라 군대의 침공을 淮河, 秦嶺 선상線上에서 저지하는 전공을 올렸다.
당시 악비의 군대는 사기가 충천했고 금나라 군대는 점차 세력이 약화되어 갔다.
그는 구릉지가 많은 강남지역의 지리적인 이점을 잘 이용하여 금의 기마공격을 막았다.
►북방 수복 노력
고종과 함께 남쪽으로 퇴각한 악비는 정원장군靖遠將軍·절도사節度使를 거쳐
무승진武勝鎭·정국진定國鎭의 2개 진의 절도사에 제수되었다.
1136년 선무부사宣撫副使,
1137년 선무사에 임명되어 양쯔강과 화이허강(淮河) 남부 사이에 위치한
中原 지역의 회복에 진력했으며 이로써 금이 점령했던 일부 지역을 수복할 수 있었다.
악비는 조정 내에서도 북벌론을 주장했다.
하지만 북진하여 잃어버렸던 모든 영토를 수복하고자 했던 노력은 主和派의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남송 조정에서는 재상인 진회秦檜가 금나라와 和平論을 주장하였으며
연일 승전보를 알려오는 악비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실상은 초반 대규모 병력으로 밀어붙여 얻어낸 일시적 승전일 뿐 유목민 특유의 고의 후퇴로
병참선 늘이는 전략에 말려들어 동원된 병력을 모두 잃고 패주한 패전이 대부분이라
선전용으로 발표하는 승전보와 달리 결국은 패전이라 송 정부에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함)
主戰派인 군벌들과 理想派의 관료들 사이에 분쟁이 지속되었고
1141년 금나라와 강화를 주장하였던 재상 진회는 군벌끼리의 불화를 틈타서
그들의 군대 지휘권을 박탈하고 소속 병사들을 모두 중앙군으로 개편하였다.
►악비의 최후
1141년 조정의 군제 개편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악비는 무고한 누명을 쓰고
양자 악운과 악가군의 최고 간부인 장헌과 함께 투옥된 뒤 살해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39세, 악운의 나이는 23세였다.
그리고 북방의 영토를 포기하고 금을 섬기며 조공을 바친다는 내용의 和議를 체결하였고
이 화의를 굴욕으로 본 인사들에 의해 당대에 복권 여론이 조성되었다.
1155년 진회가 죽고 난후 혐의가 풀리고 명예가 회복되었으며
1178년 무목武穆의 시호를 받고 救國의 영웅으로 1204년 악왕鄂王으로 추봉되어
항주의 서호 부근의 악왕묘岳王廟에 배향되었다.
이후 효종은 악비의 죽음을 아쉬워했고
그의 묘를 크게 지어주고 악왕이라는 별칭과 충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효종은
"악비가 살아있어 짐에게 있으면 그에게 모든 것을 해주었을 텐데"라고 아쉬워했다.
►명언
노발충관빙란처怒髮衝冠憑欄處 성난 머리칼은 관을 뚫을 지경인데 난간에 기대어 바라보니
소소우헐瀟瀟雨歇 쓸쓸히 내리던 비가 그치네.
태망안앙천장소抬望眼仰天長嘯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크게 소리 지르니
장회격렬壯懷激烈 장사의 감회가 끓어오른다.
삼십공명진여토三十功名塵與土 30년의 공명이 한낮 먼지에 불과하고
팔천리로운화월八千里路雲和月 8천리 내달렸던 길도 그저 구름과 달빛처럼 흔적 없구나.
막등한莫等閒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백료소년두白了少年頭 젊었던 머리칼은 어느새 희어졌으니
공비절空悲切 비감한 마음만 애절할 뿐.
정강치유미설靖康恥猶未雪 정강의 치욕은 아직 설욕하지 못했으니
신자한하시멸臣子恨何時滅 신하로서의 한을 어느 때나 풀 수 있을 것인가.
가장거駕長車 답파하란산결踏破賀蘭山缺
전차를 몰아 하란산을 짓밟아 무너뜨리리라.
장지기찬호로육壯志饑餐胡虜肉 소담갈음흉노혈笑談渴飮匈奴血
배고프면 오랑캐의 살로 배를 채우며 목마르면 흉노의 피를 마시리라.
대종두待從頭 수습구산하收拾舊山河 조천궐朝天闕
옛 산하를 다시 되찾은 후에야 천자를 만나 뵈러 가리라.
/<만강홍滿江紅>
►사면복권
정치적인 이유에서 주살당한 악비는 1178년에 정치적인 이유로 復權되어
1204년 악왕에 추대되게 되어 시후 근처에 악왕묘岳王廟가 건립되었다.
악비의 등에는 그의 어머니에 의해 진충보국盡忠報國이라는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고 하는데
악왕묘에도 진충보국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1914년 이후에는 관우와 함께 무묘武廟에 합사合祀되었다.
►평가
그는 송나라에 대한 절개를 지키다 죽어 간 문천상과 더불어
송나라의 2대 충신이자 제갈량과 함께 충절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명나라에 의해 중원이 수복된 이후
문천상, 악비, 제갈량에 대한 숭배를 국가적 차원에서 장려해 왔다.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악비는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여 투쟁한 구국의 영웅으로 칭송되어왔으며
지금까지 악비는 관우와 함께 민간의 武神으로 대우를 받을 만큼 구국의 영웅으로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한족이 아니라 중국과 역사를 같이하는 모든 민족을 끌어안으려는
중국의 역사 공정에 의해 다시 평가 절하되고 있다.
금나라의 역사도 곧 중국의 역사라는 역사 인식으로 인해
금나라에 대항했던 악비는 민중의 지지와는 달리 국가적으로는 평가가 난처해지고 있다.
한편 악비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많아지는 추세인데
일단 악비의 군공 대부분이 그의 후손이 쓴 편저에 의거한 것이며
대부분 과장되고 부풀려 졌다는 평가가 많다.
전형적인 군벌로서 이미 수복이 어려워진 전쟁을 더욱 질질 끌고
그때 잃은 수많은 병사들로 인한 인구공백으로 생기는 경제적 손실
(2차 대전 패전 후의 독일이 경제부흥을 위해 아시아 이주 노동자들을
대거 받아 들였던 것도 전쟁으로 인한 경제주체가 되어야할 인구의 공백 때문이었음)
남송 조정에 자금과 군량미를 계속 요구했다는 점에서
백성의 생활을 더 피폐해지게 했다는 평가도 있다.
►정치적 재평가
악비는 몽골족이 중원을 지배하던 원나라 시절에는 잊혔으나
한족이 중원을 되찾은 명나라 시절에 대폭 고평가된다.
명나라의 창업자 홍무제 주원장 자신이 여진족과 다를 바 없는 북방 이민족인
몽골족을 물리치고 한족왕조를 재건했기 때문에 악비를 자신들의 선구로 본 것이다.
그리하여 주원장은 악비를 신격화 했고 이렇게 신이기 때문에 "공"이나 "왕" 같은
작위를 추증하는 것도 부적절하다고 말했을 정도로 악비를 높였다.
만력제 시기가 되어서야 아예 황제급으로 높인
三界靖魔大帝忠孝廟法天尊岳聖帝君이라는 시호를 붙여주었다.
한족 왕조였던 명나라 시기에는 호국 영웅으로 존경받았지만 악비와 대립했던
여진족의 후신인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 시절부터 악비 숭배는 퇴색한 면이 있었고
청나라 조정은 악비 대신 이전부터 군신으로 칭송되었던 관우를 더 강조하기 시작했다.
(관우를 높여 성자이자 황제로 칭한 關聖大帝라는 시호를 붙여준 것도 바로 순치제였다)
청나라는 망했지만 악비 숭배는 또 다른 의미에서 다시 퇴색하게 된다.
중국 공산당이 세운 중화인민공화국은 소수민족을 모두 아우르는 중화민족과
다민족국가 개념을 주장했고 악비는 한족중심주의를 상징했기 때문에
이런 중국 정부 방침과 잘 맞지 않아서 정부차원의 기념사업은 퇴색되었다.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많은 봉건왕조의 영웅들과 마찬가지로
전국에 있던 사당이나 목상이 홍위병에 의해 박살났다.
항저우시에 있던 악왕묘도 당연히 홍위병에 의해 훼손되었다.
이는 문화대혁명이 끝난 직후인 1979년 서둘러 복원되었다.
문화대혁명에 대한 한국에서의 오해와는 달리 당시 홍위병들은
중화민족주의나 팽창주의를 봉건주의의 잔재로 보고 맹비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악비는 농민반란 진압에 참여한 일이 있는데
아무래도 민중사관을 표방하는 공산주의 국가의 성향에도 맞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이 악비를 폄훼하기 위해 악비와 대립했던 진회를 높이 평가한다는
이야기는 전혀 근거 없는 주장으로 진회는 한간의 선구로 최근까지도 규탄되고 있다.
즉 악비를 크게 높이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회 같은 반역자까지 높이 평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만주족이 지배층이던 청나라 시절부터 악비 숭배는 퇴색하기 시작했으며
다민족국가를 표방하는 중국 공산당 정부가
소수민족의 정서를 고려하면서 악비에 대한 찬양은 좀 사그러들었다.
이를테면 교과서 등에서 악비를 가리키는 '한족의 영웅' 등의 표현을
'중국의 영웅' 등으로 소수민족들을 고려한 표현으로 바꾸는 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초등학교의 어문 교재에는 악비의 행적이 실리고 있으며
이는 악비가 평가의 강도는 있지만 체제를 뛰어넘어(달리 생각하면 체계의 이념에도 불구하고
중화민족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해석될 수도 있다)
중국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무협소설로 이름난 김용도 아주 세심하게 공을 들여 찬사를 바친 인물이기도 하다.
사조삼부곡은 모두 악비와 연관이 있으며 그의 의지가 이어져
명나라 건국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군사적 재평가
정치적인 문제와 별개로 학계에서는 이전부터 악비의 전공을 재평가하는 중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악비의 전공은 악비 후손들이 쓴 행장을 바탕으로 한다.
정사인 송사 악비전 역시 행장을 바탕으로 저술한 데다 보병 몇 백명으로
기병 몇 만을 몰살시켰다는 식의 황당한 전과가 많아 신뢰하기에 문제가 많다고 지적한다.
金史에는 악비가 패한 기록 역시 여럿 나오거니와 악비의 전공은 다른 기록과 교차검증이
안 되거나 하다못해 공신력 있는 사서에 채택되지 않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사료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악비의 최대 공적이라고 할 수 있는 주선진 전투만 봐도
동시대 남송의 사서 건염이래계년요록建炎以來繫年要錄이나
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會編에는 아예 주선진 전투가 나오지도 않는다.
괜히 송사 악비전의 내용을 신뢰할 수 없다고 학자들이 비판하는 게 아니다.
악비전 기록만 보면 8천으로 조성의 10만 대군을 이기고
불과 5백 명으로 주선진에서 올출의 10만 대군을 털었다는 얘기나
8백 명으로 왕선 등의 도적 50만 명 이상을 남훈문에서 격파했다는 얘기가 줄줄이 나오니‧‧‧
물론 악비 급으로 소수의 군세로 다수의 군대를 턴 명장들이 없지는 않았으니
악비도 그 급이라고 한다면 아예 말이 안 되지는 않지만.
또한 현대에는 그간 악비의 명성에 묻혀 당시 전공을 세운
종택, 충사도, 한세충, 맹공 등 그 동안 악비에 가려
상대적으로 대중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다른 인물들이 다시 재조명받고 있다.
특히 정통 사서를 기준으로도 초인적인 업적을 이루어냈음에도 후배인
악비의 대중적 인기에 묻혀 부각되지 못했던 한세충이 진정한 인간 흉기로서 인정받는 추세이다.
악비의 처세술 또한 좋지 않다고 지적받는다.
그는 평소 우직한 성격답게 송 고종의 어그로를 끄는 치명적인 실수를 했다.
금군에게 함락 직전이었던 임안과 송 고종을 구한 후
악비는 송 고종에게 황태자 책봉을 건의한 것이다.
악비 입장에선 국가의 후계 구도를 든든히 하자는 의도였을지 모르나 송 고종 입장에선
그야말로 위세 등등해진 군벌 세력이 자신의 권위를 위협하는 어그로로 보였을 수도 있다.
이 때문인지 이후 송 고종은 악비를 견제하고자 주화론을 주장한 진회를 지지하였다.
말 그대로 정치에는 까막눈이었던 악비는 재상 이강을 비난하는 실수도 저질렀다.
이강은 금나라가 북송을 침공할 때 일개 문관의 신분으로 개봉 수성전을 지휘하여
격퇴시켰던 구국의 영웅으로 그 능력과 명성 때문에 고종은
그의 정치적 성향을 싫어하면서도 민심 수습 차원에서 재상으로 기용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인물을 황잠선, 왕백언 같은 주화파와 동일하게 취급하며 비난했으니 큰 실수였다.
현대 들어선 많은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악비의 시 <만강홍滿江紅>이
명나라 시대의 위작이라는 판정도 받았으나 지금까지도
진위 여부에 대해 많은 견해가 있으며 위작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악비라는 인물이 보통 장수를 뛰어넘는 명장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악비가 충무의 시호를 받고 왕으로 추숭된 후 대대로 칭송받는 이유는
악비가 생전에 공적이 뛰어난 무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정사 기록이라고 하여 다 믿을 수는 없지만 어떤 장수의 전공을 조작하거나
과장할 수는 있어도 졸장을 명장으로 띄우기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단지 그 공적이 과장됨이 있고 없고 차이이다.
►저서 <악충무왕집岳忠武王集>
►대중문화에서
김용의 무협 소설 중에서 남송 시대를 무대로 하고 있는
<사조영웅전><신조협려>에는 악비가 쓴 병법서인 무목유서가 등장한다.
사조영웅전 본편에서는 주로 무목유서 안에 수록된 무공에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며
곽정이 이것을 익히게 되는데 후일 신조협려에서 중년이 된 곽정이 양양성을
몽고군으로부터 수호할 때는 곽정이 왕년에 무목유서로 병법을 공부했다는 말이 나온다.
일개 무림인이었고 딱히 두뇌형 캐릭터도 아니었던 곽정을 의병 비슷한 신분이긴 하지만
국가수호의 명장으로 키워낸 것이 악비가 남긴 병법서라는 떡밥.
악비를 섬기는 사당은 악왕묘라고 한다.
그런데 악비보다 약간 이전 시대를 다룬 수호전에서 악왕묘가 나온다.
후수호전에서 악비가 특별출연했다.
무협소설에서는 이 악비의 후손들이 세웠다는 무림세가인 산동악가가 나오기도 한다.
민중의 사랑을 받는 악비인 만큼 야사도 몇 가지 전해져 내려오는데
그 중 하나는 악비의 성품을 보여준다.
아직 관직에 오르지 못했던 청년 시절의 악비가 어느 부자집에 하룻밤 신세를 졌는데
그 집은 전염병으로 아리따운 딸과 하인들만 남고 가족들이 모두 죽은 상태였다.
딸이 울며 가족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자신을 아내로 거둬 달라 청했는데 올곧은 악비는
부모의 허락도 없는데 함부로 홀로 남은 여성을 아내로 거둘 수 없다며 거절하고
대신 시신만 수습하여 극진하게 제를 올렸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날 딸이 악비와 작별인사를 하며 말하길
"선비님은 죽은 사람을 불쌍히 여겨 시신을 거두고
제를 올려주셨으니 훗날 그 이름이 빛날 충신이 되실 것입니다.
하지만 산 사람인 저의 청을 거절하시고 거둬주시지 않으니
그 끝이 좋지 못하실 듯합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악비가 떠나자 자결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과연 악비는 남송의 충신으로 길이 남았지만
결국 모함을 받아 죽게 되었다고 전해지는 야사가 있다.
만화 소녀침경(화타위전)에서는 송 고종에게 북벌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진회가 이를 반대하자 황궁에서 퇴청한 후에 진회와 신경전을 벌이는데
진회가 금나라에게 이길 수 없고 금나라에 있는 송 휘종, 송 흠종을 죽일 것이라 하자
분노하고 다음날에 9족과 함께 처형된다.
목만 남은 채로 살아 있다가 엔란(앵란)으로부터 죽은 자를 3일간 살릴 수 있는 금황구침을 맞고
좀비인 상태에서 살아나면서 엔란과 함께 나머지 금황구침 8개를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나며
한세충과 함께 메이의 조부, 메이의 숙조부로부터 의학을 배우지는 않았지만
의술, 명성을 흠모해 속가제자가 되었고 진회와도 동문이라고 한다.
2013년에 청나라 시대 소설 설악전전説岳全傳을 각색하여 만든
드라마 정충 악비가 방영되었다.
소설로는 위에서 언급한 설악전전이 제일 유명하지만 퀼리티는 기대하지 말자.
스토리 라인은 판타지급으로 아주 역사와는 거리가 멀고 파워 밸런스도 엉망이라
전쟁의 승부는 우주급 맹장이 아니면 법술을 쓰는 종교인들이 좌우지한다.
웹소설 나 혼자 소드 마스터에서도 등장한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이순신의 부산포 해전에서 전사하는
부하인 녹도 만호 정운의 검명이 정충보국인 것으로 나온다.
게임 장난바이징투江南百景圖에서는 묘사가 논란되기도 했다.
중국 논란을 보도한 국내 제도권 기사 물론 무덤에 오물 투척도 일어난다지만 논란은 된 듯.
2023년 설날 개봉한 장이머우 감독의 영화
만강홍에서는 악비가 죽은 이후를 다루는데 직접 등장하지는 않는다.
이양천새가 주연을 맡았다.
굉장히 흥행한 영화가 되어서 45억 4,568만 위안의 매출액을 기록하며
중국 역대 박스오피스 6위에 기록되었다.
악비가 나오거나 악비가 주인공인 중국계 드라마에서는 거의 100% 확률로 미남으로 나온다.
드라마 정충악비에서도 황샤오밍이 악비 역할을 맡았고, 남다른 외모를 자랑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