物不遷論 제1
자운존자 여는 글
지금 처음은 둘을 나누니, 처음 ‘물이 옮기지 않음을 논함’으로 속제를 세우고, 둘째 ‘참이 아니라 공함을 논함’으로 곧 참됨을 나타낸다.
지금은 처음 이 논을 먼저 둔 까닭은 속제의 사법[俗諦事法]을 밝힘이나, 붓다의 가르침에서 진리를 나타냄[顯理]은 반드시 사법 그대로여야 함[卽事]을 말한다.
만약 사법 밖에 진리를 구하면 속제 밖에서 참됨을 밝힘이라. 비록 치우친 삿됨을 떠난다 해도 또한 방편의 작은 법에 돌아간다. 그러므로 지금 먼저 사법을 밝히고 뒤에 ‘참이 아니라 공하다는[不眞空]’ 논으로 진리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또 범부의 사람은 속제의 성품과 모습을 통달하지 못하고, 나고 사라짐, 있음과 없음을 보아, 변해 바뀜이 그치지 않는다고 말한다. 지금은 모두 이를 그르다 한다. 그러므로 먼저 이 논을 세운 것은 곧 앞의 연이 모임[緣會]의 이름과 뜻을 바로 미룸[正推]이니 이는 화엄교에서 네 법계 연 것과 크게 같다.
먼저 ‘의지하는 바 바탕의 일을 밝힘’이다. 이 가운데 글이 둘이니, 처음은 제목이고 다음은 논함이다.
학담 주; 화엄의 네 법계-화엄교에서 법의 영역을 첫째 인연으로 있는 事法界, 둘째 인연의 사법계가 곧 진여인 理法界, 셋째 사법계와 이법계가 서로 걸림 없는 理事無礙法界, 넷째 사법과 사법이 서로 걸림 없는 법계[事事無碍法界], 이 네 법계를 보이는데 먼저 인연으로 있는 사법계를 세워서 보임과 같다.
제1 物不遷論의 제목 풀이
‘물이 옮기지 않음을 논함[物不遷論]’에서 ‘物’이란 事法이다.
세간은 세 과목[三科 : 蘊 · 處 · 界]를 떠나지 않고 세간 벗어남은 두 과덕[二果]을 지나지 않는다.
- 학담 주: 세 과목; 인연 따라 일어난 세간 법을 가르는 세 가지 법을 말한다. 五蘊; 물질[色], 느낌[受], 모습취함[想], 지어감[行], 앎[識]/ 십이처; 앎을 일으키는 여섯 아는 뿌리[六根] 아는 바 여섯 경계[六境] /十八界; 六根, 六識, 六境
- 出世二果 ; 보디[覺]와 니르바나[涅槃]가 세간 벗어남의 두 과덕이 됨.
다만 이름과 모습[名相]이 있으면 모두 物이라 일컬으니 비록 옛과 지금의 때의 가름[分]을 말하더라도 때에 다른 바탕이 없고, 모습을 의지해 이름을 세움이라 다만 이름과 모습을 알면 거두지[收] 않는 바가 없다.
‘옮기지 않음[不遷]’이라 말한 것에서 옮김[遷]은 움직임이니 곧 변해 바뀜의 뜻이다.
지금 속제의 문 가운데 간략히 세 뜻이 있으므로 만물은 옮겨 바뀔 수 없다.
1. 물의 성품을 밝힘[明物性] ; 학담 주-여기서 성품은 진여의 뜻이 아니라 사물에서 나면서부터 일정한 지속성을 지닌 성질을 말한다.
2. 물의 모습을 밝힘[明物相]
3. 물의 때를 밝힘[明物時]
불이 뜨겁고 바람이 움직이며 물이 젖고 땅이 굳음 등은 연의 성품[緣性]이 바뀔 수 없음[不可易]이다.
하늘이 높고 땅이 낮으며, 산이 높고 물이 맑으며, 성인이 깨끗하고 범부가 물듦 등은 연의 모습[緣相]이 바뀔 수 없음[不可易]이다.
엣과 지금, 아침과 저녁, 찰나의 앞과 뒤는 대개 때[時]가 바뀔 수 없음[不可易]이다.
또 이 성품과 모습과 때[性 · 相 · 時]는 서로 말미암는 뜻[相由義]과 서로 이루는 뜻[相成義]이 있으니 곧 중론에서 ‘인연으로 나는 법’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는 곧바로 대승의 비롯하는 가르침[始敎]에 속한다.
법의 모습 세우는 종[法相宗]에서 펼친 바 ‘백 법의 이름과 수[百法名數]’가 각기 바탕과 성품이 있고, 나아가 진여와 니르바나[眞如涅槃] 또한 진리의 과덕[理果]으로서 중생을 깨끗이 하는 것이다[淨物].
그러므로 속제의 한 문[俗諦一門]이 법을 거둠[攝法] 또한 다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이 옮기지 않는다[物不遷]’고 말하여 움직임 가운데 고요함이 있고[動中有靜] 고요함이 움직임을 거리끼지 않음[靜不妨動]을 바로 밝히니, 잘 뜻을 얻어 참된 항상함[眞常]에 넘치지 않게 하라. 학담 주; 참된 항상함 – 덧없음[無常]과 죽어 있는 항상함[死常]을 넘어서야 참된 항상함을 이루니 옮겨 움직이되 옮기지 않음을 알아서 이 참된 항상함의 뜻에 넘치지 않도록 해야 함.
어떤 이는 말한다.
“범부의 한 생각[一念]이 돌이켜 성인을 이룰 때 어찌 옮기지 않음이라 말하는가?”
답한다.
“다만 옮기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굴릴 수 있으니 왜인가? 물들고 깨끗한 모습을 각기 두기 때문이고, 참됨과 망념됨의 두 성품을 각기 세우기 때문이며, 망념되어 물들 때는 참되어 깨끗한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품과 모습 때의 가름[性相時分]이 각기 본래 지위에 머묾[各住本位]을 말미암아, 범부를 좇아 성인에 들 수 있는 것이다.”
논함[論]이란 말로 미루어 따짐을 말한다.
차례의 맨 먼저에 있으므로 첫째[第一]라 말한 것이다.
物이 곧 옮기지 않음[物卽不遷]이라 함은 업 지님의 풀이[持業釋]이고, 物이 옮기지 않음을 논함[物不遷之論]이라 하면 주인을 의지한 풀이[依主釋]이다.
; 학담 주 - 持業釋, 依主釋- 산스크리트의 복합사를 풀이하는 여섯 풀이 가운데 두 법. 1. 주인 의지한 풀이[依主釋]; 王臣을 왕의 신하라 풀이함 2. 서로 어긋나는 풀이[相違釋]; 왕신을 왕과 신하라 풀이함 3. 업 지님의 풀이[持業釋]; 高山을 높은 산이라 함 4. 수 띔의 풀이[帶數釋]; 十方을 열 방위라 함 5. 재물 있음의 풀이[有財釋]; 長身을 키 큰 사람이라 함. 6. 가까움의 풀이[隣近釋]; 河畔을 물가라 풀이함
[옮기지 않음; 물의 연기적 성취가 이루어지면 그 성취는 그 지위에 머물러 옮기지 않으니 이는 머무는 바 없이 머묾이다. 그러므로 젊은이는 젊은이라 젊은이가 옮겨 늙은이가 되는 것이 아니다.] [범부는 범부가 아니나 범부 아님도 아니니 범부일 때 범부의 물든 모습과 성품을 돌이켜야 범부가 성인을 이룰 수 있다.]
제2 물이 옮기지 않음을 논함[物不遷論]
논하는 글에 둘이니, 처음 뜻을 엶이고 둘째는 바로 논함이다.
뜻을 엶[序意]
[1] 物을 나타내 사람의 뜻을 보임[標物示人情]
[論] 대저 나고 죽음이 엇갈려 사라지고 추위와 더위가 번갈아 옮겨, 어떤 물이 흘러 움직인다고 하는 것[有物流動]은 사람들의 늘 그런 뜻이다.
대저 나고 죽음이 엇갈려 사라지고 夫生死交謝
남[生]이란 일어남[起]이고 죽음[死]이란 그침[止]이다. 이 둘은 또한 나고 사라짐[生滅]이라 말하니 때로 난 뒤 사라지기 전[生後滅前]을 말한다. 이를 열면 나고 머물며 달라지고 사라짐[生住異滅]이라 말한다. 대개 物이 성품과 모습[物之性相]을 말하니, 연이 모이면[緣會] 곧 일어남이고 연이 떠나면[緣離] 곧 그침이다. 그러므로 속제의 나고 죽음이, 만물이 서로 엇갈림[萬物交互]을 모을[總]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물러감[謝]이란 감[往]이다. 남[生]이 반드시 죽음에 엇갈림을 남이라 하고, 죽음[死]이 반드시 남[生]에 엇갈림을 죽음이라 한다. 그러므로 날 때[生時]에 죽음이 있고 죽을 때 바로 남[生]이 있어야 바야흐로 엇갈림이라 말한다. 사람들의 뜻은 이 도리를 알지 못해 남[生]을 볼 때 죽어서 감[死往]이라 하고, 죽음[死]을 볼 때 살아 있다 간다[生往]고 말한다.
추위와 더위가 번갈아 옮겨 寒暑迭遷
여기는 추위와 더위로써 물의 때[物之時]를 말한다. 찬 기운이 지극함을 추위라 하고 따뜻한 기운이 지극함을 더위라 한다. 지금 추위 더위라는 것은 찬 기운 따뜻한 기운이 나서 지극함인데 네 때를 나누기도 하니 봄은 나고[生] 여름은 기르며[長], 가을은 시들고[衰] 겨울은 떨어진다[落].
그러므로 네 때를 말하지 않고 추위 더위를 말하는 것은 대개 네 때가 陰陽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음양의 지극함[陰陽之極]이 추위 더위이므로 추위 더위로써 위의 나고 죽음에 마주하는 구절을 삼은 것이다. 그러므로 『易』은 말한다.
한번 춥고 한번 더움, 이것을 번갈아 옮김[迭遷]이라 말한다.
또 위의 나고 죽음이 이미 네 모습을 머금으니 추위 더위 또한 네 때를 머금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만물의 때는 추위 더위로 모음을 넘지 않는다. 어떤 때 三世 十世로 잡아 보이기도 하고, 어떤 때 마음의 생각으로 찰나를 잡아 보이기도 하여, 느리고 빠름이 정해져 있지 않을 뿐이다. 번갈음이란 서로 바뀜이고 옮김은 움직여감이다.
더위에서 추위로 번갈아 바뀜을 춥다고 하고 추위에서 더위로 번갈아 바뀜을 덥다고 한다. 이미 번갈을 수 있으므로 곧 각기 있음을 아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더울 때는 추위가 옮겼다[寒遷] 말하고, 추울 때는 더위가 갔다[暑去] 말한다.
어떤 물이 有物
곧 위의 나고 죽고 추위 더위로 모으는 바, 만 가지 있는 사물이다.
흘러 움직인다고 하는 것은 流動
물[水]이 움직임을 흐름[流]이라 하니 곧 위의 엇갈려 사라지고 번갈아 옮김이다.
사람들의 늘 그런 뜻이다. 人之常情
사람의 뜻은 움직임을 집착해 늘 스스로 이와 같다고 한다. 이는 위의 다스릴 바 집착을 밝힘이다. 이 아래는 또한 ‘끊어진다는 견해의 바깥 길[斷見外道]’이 ‘인과를 빼내 없앰[撥無因果]’을 깨뜨리기 때문이다.
2. 이치에 의거해 자기 견해를 폄
[論] 나는 곧 이를 그렇지 않다[不然]고 말한다.
왜인가? 放光經에서 말하되, ‘법은 가고 옴이 없고 움직여 구름이 없다’고 한 것이니 대저 ‘움직이지 않는다’고 한 뜻을 찾아보면 어찌 움직임을 풀어서 고요함을 구하겠는가?
반드시 모든 움직임에서 고요함을 구하는 것이다.
반드시 모든 움직임에서 고요함을 구하므로 ‘비록 움직이되 늘 고요한 것[雖動常靜]’이다.
움직임을 풀지 않고 고요함을 구하므로 ‘비록 고요하되 움직임을 떠나지 않는다[雖靜不離動]’
[1] 이치에 의거해 뜻을 미루어 봄[據理推意]
나는 곧 이를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말한다 함은 평가해 논하는 말이다. 논주는 만물의 성품과 모습의 도리가 ‘엇갈리되 사라지지 않고 바뀌되 옮기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인가?
위아래 ‘그렇다’고 말한 뜻을 스스로 불러 따지는 것이 ‘왜인가’이다.
[2] 경을 이끌어 받음을 말함[引經標牒]
방광경에서 말하되
방광은 여덟 가름 반야경의 한 수이다.
법은
법이란 법칙 지님으로 뜻을 삼으니 참됨과 허망함, 물듦과 깨끗함, 물질과 마음, 依報와 正報가 각기 법칙을 갖추어 머물러 지니니 모두 통해 이 이름을 얻는다. 곧 위의 物이다.
가고 옴이 없고 움직여 구름이 없다고 無去來無動轉
곧 옮기지 않음[不遷]이다. 남이 남에 머물므로[生住生故] 옴이 없고[無來], 죽음이 죽음에 머물므로 감이 없음[無去]을 말한다. 가운데 사이 추위와 더위, 어린이와 어른이 각기 머무른다. 그러므로 흘러 움직임[流動]과 굴러 변함[轉變]이 없다. 가고 옴이란 때를 잡아 보임[約時]이고 굴러 움직임은 성품과 모습을 잡아 보임인데[約性相] 연으로 나는[緣生] 성품과 모습이 삼세에 각기 머물므로 옮기지 않음이라 말한다.
학담 주- 삼세가 각기 머묾; 삼세가 각기 머묾이란 실로 머묾이 아니라 머묾 없이 머묾이다. 그러니 과거는 연기적 성취로서 과거의 머무는 모습이 없지 않고 현재는 현재의 머무는 모습이 없지 않다.
만약 반야부의 종지라면 많이 ‘모습을 쓸어 없애고 공을 나타내[蕩相顯空: 破相]’ 물질과 마음, 도의 씨앗인 지혜[道種智]까지라도 다 청정하다 말한다. 지금은 글을 빌어 나타내 믿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저 뜻을 취하지 않으니 아래에서 스스로 미루어 풀이하면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것이니 者
‘한 것’이란 경을 받음이다.
[3] 바른 도리를 미루어 풀이함[推釋正理]
대저 움직이지 않는다고 한 뜻을 찾아보면
미루어 사무침을 ‘찾음’이라 말하고 ‘대저’란 말의 힘을 돕는 말이다.
‘움직이지 않음’이란 경에서 “가고 오며 움직여 구름이 없다”고 말한 것이고, ‘미루어 구함’이란 찾아 살핌이니 경 가운데 모든 법에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미루어 구함이다.
어찌 움직임을 풀어서 고요함을 구하겠는가
먼저 그릇된 이해를 깨뜨려 풀어버림이다.
반드시 모든 움직임에서 고요함을 구하는 것이다
이는 바른 뜻을 나타냄이니 경 가운데서 반드시 고요함을 미루는데 뭇 움직임을 향해야 하므로, 움직임 가운데서 성품과 모습이 각기 머묾을 통달하도록 한 것이다. - 학담 주: 여기 흐르는 물은 여기의 성품과 모습이 있고 저기 흐르는 물은 저기의 성품과 모습이 있으니 여기저기의 모습이 있되 공하다.
움직임을 풀지 않고 고요함을 구하므로 비록 고요하되 움직임을 떠나지 않는다
위의 구절은 앞을 받은 것이고 아래 구절은 경의 뜻을 풀이해 이룬 것이다. ‘비록 고요하지만’이란 법에 가고 오며 움직여 구름 없는 것이, 옮겨 사라짐을 떠나지 않고 나타나므로, 움직임을 떠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곧 보는 바가 움직임 그대로 고요함이므로, 경에서 고요함 그대로 움직인다[卽靜而動]함과 더불어 서로 맞는 것이다.
3. 뜻과 앎이 서로 어긋남을 밝힘[明情解相違]
[論] 그렇다면 움직임과 고요함이 비로소 달라짐이 아닌데 미혹한 자는 같지 않다고 한다. 때문에 참말[眞言]로 하여금 다투어 가림[競辨]에 막히게 한다. 종지의 바른길[宗途]이 다름을 좋아하여 굽음이 되고 이 때문에 ‘고요함과 시끄러움의 지극함[靜躁之極]’은 쉽게 말하지 못한다.
왜인가? 대저 참됨을 말하면 세속을 거스르고 세속을 따르면 참됨을 어긴다. 참됨을 어기므로 성품[性]에 미혹하여 돌이키지 못하고 세속[俗]을 거스르므로 말이 싱거워 맛이 없다.
이런 까닭에 가운데 사람[中人]이 있음과 없음을 가리지 못하게 하고 아래 수행자[下士]는 손바닥을 만지며 돌아보지 않는다. 가깝지만 알 수 없는 것은 오직 物의 성품이로다.
[1] 앎과 미혹을 모아 나타냄[總標解惑]
그렇다면
위의 이어주는 말을 받은 것이니 경의 뜻을 미루기 때문이다.
움직임과 고요함이 비로소 달라짐이 아닌데
경으로 스스로의 뜻을 증명함이다. 곧 연의 법[緣法]으로 나고 사라지는 성품과 모습이 늘 고요함을 같이 가려[辨] 보인다. 그러므로 움직임과 고요함이 다르지 않는 것이다. - 학담 주 ; 나서 머묾을 고요하다 집착하고 죽어서 감을 움직인다고 집착함이다.
미혹한 자는 같지 않다고 한다.
미혹한 자는 날 때 죽음을 보지 못하니, 남이 고요하고 죽음이 움직임 등이라고 집착하므로 움직임과 고요함이 같지 않다고 한다. - 학담 주 : 미혹한 자가 나서 머묾은 고요하다 하고, 살아 있다 죽음으로 가는 것을 움직힌다고 함
때문에 참말[眞言]로 하여금 다투어 가림[競辨]에 막히게 한다.
참말[眞言]이란 질실에 맞는 말이고 다투어 가림[競辨]이란 다투는 말[諍言]이다. 미혹한 자는 다름과 다르지 않음[異與不異]을 집착하여 진실에 맞는 말에 서로 어긋나므로 다툼의 말[諍言]이 있다. 그러니 참말[眞言]로 하여금 막혀 걸림을 이루게 한다.
종지의 바른 길이
길[途]이란 실천의 길[道]이니 움직임과 고요함이 다르지 않은 길로서, 배우는 이들이 마루로 삼는 바[所宗]이기 때문이다.
다름을 좋아하여 굽음이 되고 屈於好異
굽음은 누름[抑]이니 미혹한 자는 다름을 좋아하여 억지로 말하므로 바른 길로 하여금 삿된 앎[邪解]의 구부려 누름이 되게 한다.
[2] 진리는 말하기 어려움을 보임
이 때문에 ‘고요함과 시끄러움의 지극함’은 쉽게 말하지 못한다.
시끄러움[躁]은 움직임이다. 物의 움직임과 고요함의 이치는, 둘 아님[不二]에 지극하게 되는데, 미혹한 자가 둘을 집착해 억지로 다투므로 쉽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3] 그 뜻을 미루어 풀이함
왜인가?
어렵다는 말의 뜻을 미룸이다.
대저 참됨을 말하면 세속을 거스르고 세속을 따르면 참됨을 어긴다.
진실에 맞는 말은 세속을 거스르고, 세속을 따르는 견해는 진실의 도리에 어긋나므로, 쉽게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참됨을 어기므로 성품에 미혹하여 돌이키지 못하고
참됨에 어긋나는 허물을 보임이다. 이 사람의 뜻[情]은 사물의 도리[物理]에 길이 미혹하니 이를 따르면 깨달음에 돌이킬 수 없다.
세속을 거스르므로 말이 싱거워 맛이 없다
세속을 거스르는 허물 보임이다. 싱거움은 맛없음이다. 참됨을 말하여 세속을 거스르면 세속의 견해가 밝지 못하니 가려 캘 뜻[義]과 맛[味]이 없다. 그러므로 말이 싱겁다 한 것이니 『道經』은 말한다.
“음악과 먹을거리에는 지나가는 나그네가 멈추지만, 道가 입을 나오면 싱거워 맛이 없다.”
[4] 앞을 받아 뒤를 일으킴
이런 까닭에
아는 사람[解人]이 움직임과 고요함의 도리가 같음을 말하면, 미혹한 이[惑者]는 움직임과 고요함에 다름이 있다 집착하니 가운데 사람[中人]이 미혹하는 까닭이 된다[惑緣]
가운데 사람이 있음과 없음을 가리지 못하게 하고
가운데 근기는 위를 말할 수도 있고 또한 아래를 말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앎과 미혹의 삿됨과 바름을 가리지 못하여, 있음[存]과 같으면 없음[亡]과 다르게 되며, 다시 있음[存]과 다르면 없음[亡]과 같게 된다. 아래[下]란 바로 이 기틀에 입히는 사람을 논함이다. 위의 수행자[上士]는 이미 움직임과 고요함이 다르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아래 수행자는 손바닥을 만지며 돌아보지 않는다.
곧 앞의 미혹한 사람이다. 굳게 집착해 돌이키지 않고 바른 진리 돌아보지 않음이다. 손바닥 만짐은 크게 웃는 모습이니 『道經』은 말한다. ‘넉넉히 도 됨을 웃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위의 두 구절 말은 『道德經』에 나오니 글을 조금 고쳤을 뿐이다.
가깝지만 알수 없는 것은
物의 이치가 사람에 가깝지만 움직임과 고요함을 집착하는 자가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아래에 말한다.
오직 物의 성품이로다.
오직[唯]은 홀로이다. 홀로 만물에는 緣으로 나는[生] 성품이 있어, 움직임 가운데 늘 고요하고 고요함이 움직임을 거리끼지 않으니 이 도리는 가장 가깝지만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
이것은 곧 앞의 세 뜻 가운데 성품의 한 문[性一門]을 잡아 보임 것이다. 『華嚴大疏』는 옮기자 않음[不遷]에 세 뜻이 있음을 말했다.
의지할 수 있음의 옮기지 않음[能依不遷]
의지함과 의지하는 바의 옮기지 않음[依所依不遷]
오직 의지하는 바의 옮기지 않음[唯所依不遷]
곧 옮기지 않음의 세 뜻은 『열반론』에서 참 성품이 연을 따르되[眞性隨緣] 늘 머물러 변치 않는 뜻[常住不變義]을 밝힘이다.
학담 주 : 의지함과 의지하는 바가 옮기지 않음은 곧 연을 따름[隨緣]과 의지하는 바 眞如의 변치 않음이 둘이 아님을 말한다. 의지함은 物이고 의지하는 바는 진여의 성품이니 성품에서 보면 물은 참 성품이 연을 따르되 변하지 않음[隨緣不變]이고 物을 잡아 보면 물의 옮김은 진여의 성품이 연 따름이니 옮기되 옮기지 않음[遷而不遷]이자, 옮기지 않되 옮김[不遷而遷]이다. 그러므로 물이 옮기지 않음을 ‘물의 모습은 옮기나 성품은 옮기지 않는다’고 보아서는 안 되고, 물이 옮기되 옮기지 않음이 물의 성품인 것이다.
4. 논을 세운 뜻을 나타냄
그러하니 스스로 그만두지 못하여 애오라지 다시 마음을 움직임과 고요함의 끝[動靜之際]에 부친 것이다. 어찌 반드시 그렇다고 말할 것인가, 시험삼아 논해 말한다.
그러하니
위의 일으키는 말을 받은 것이다.
이치는 지극하여 말하기 어려우므로 입을 막고 잠자코 있어야 하나, 가운데 사람[中人]이 物의 성품이 이와 같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아래에 말한다.
스스로 그만두지 못하여 애오라지 다시 마음을 움직임과 고요함의 끝에 부친 것이다.
애오라지[聊]란 줄임이고, 際란 가와 끝이다. 움직임은 고요함으로 끝을 삼으므로 움직임 그대로 고요함을 보고 고요함은 움직임으로 끝을 삼으므로 고요함 그대로 움직임을 본다. 간략히 아는 마음에 붙임이 이와 같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어찌 반드시 그렇다고 말한 것인가. 시험삼아 논해 말한다.
반드시[必]란 결정된 것이다. 시험삼아란 ‘또’이다. 어찌 결정되어 그렇다고 할 것인가? 또 이 아는 마음[解心]으로 평해 논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