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골매는 1979년 배철수, 지덕엽, 이응수, 이봉환의 결성으로 활동을 시작한 대한민국의 하드 록 밴드이다.
당대 최고의 대학교 캠퍼스 밴드였던 활주로 출신의 배철수를 중심으로 1979년 결성되었고 1978년 제 2회 MBC 대학가요제에 출전했던 배철수(활주로 6기), 지덕엽(활주로 9기)와 베이시스트 이응수(활주로 8기)와 키보드의 이봉환을 영입하여 시작되었다. 송골매라는 이름은 한국항공대학교의 교조에서 따왔다.
대표곡으로, '모두 다 사랑하리', '세상만사','하늘나라 우리 님', '모여라' 등이 유명하다.
1970년대 말~1980년대 초반 한국의 청년문화는 1975년 대마초 파동 이후 가요 대탄압으로 인해 전부 싹이 잘려 나갔다.
그래서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팝송을 들으며 음악적인 갈증을 해갈했고, 아마추어리즘에 입각한 그룹사운드가 성하기 시작했는데, 이 시기에 산울림, 송골매 같은 밴드들은 한국식 록음악을 본격적으로 선보였고, 이들은 당대 최고의 스타 가수 대접을 받았다. 즉, 한국 록 음악의 암흑기 때를 대표하는 인기 밴드였다.
1979년에 발매한 송골매 1집은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얻지 못했고, 1981년에 지덕엽의 군입대와 이응수의 학업 문제로 탈퇴하여, 활동이 중단되었다.
이에 배철수는 평소에 알고 지내던 블랙테트라 2기 보컬 구창모와 기타리스트 김정선에게 전화를 하고 그 두 사람이 휴식을 취하고 있던 오색약수터라는 암자로 이봉환과 같이 찾아 가서 팀을 같이 하자고 제의하였다.
이 제의에 합의가 되어 배철수(보컬, 드럼), 이봉환(키보드), 구창모(보컬, 베이스), 김정선(기타) 이렇게 4인의 멤버로 클럽 등을 돌며 라이브 공연 위주로 활동하면서 2집 녹음을 진행하게 되었다.
하지만 배철수의 생각에는 뭔가 모자란 부분이 있어 당시 군복무를 하던 오승동을 섭외했고, 오승동의 친구였던 김상복(베이스)까지 영입하였다.
그 결과 기타와 보컬의 배철수, 리드보컬 구창모, 기타의 김정선, 베이스의 김상복, 드럼의 오승동, 키보드의 이봉환이라는 라인업으로 1981년에 발표한 송골매 2집은 송골매의 침체기를 한번에 뒤집어 버린다.
어쩌다 마주친 그대, 이 곡은 전체적으로 1970년대 미국에서 인기 있었던 디스코에 Funk rock적인 부분을 결합한 음악이다.
처음의 기타 리프는 1971년 빌보드 1위를 차지했던 Isaac Hayes의 "Theme from Shaft"를 연상시킨다. 이때 한국에서 흑인 음악을 하는 이들이 극히 적었음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Funk를 기반으로 한 디스코-락 넘버를 히트한다는 것은 대단하다.
1982년 당시 한국에서 흑인 음악을 소개하고 히트시키던 아티스트는 송골매와 조용필 밖에 없다. 사랑과 평화는 1979년의 잠깐 히트로 끝났고, 조용필은 4집에서 자존심, 못찾겠다 꾀꼬리 등의 흑인 음악 스타일의 곡들을 히트시킨 바 있다.
1983년에 발표한 송골매 3집은 전작에서의 인기를 또 한번 실감하듯 '처음 본 순간'과 '아가에게', '빗물', '한줄기 빛' 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여담으로, 1983년 젊음의 행진에서 무대를 펼칠 때 배철수 인생의 마지막 무대가 될 뻔했던 위험한 방송사고가 있었다.
그러나 그런 위험을 격고 동경가요제의 참가하고 싶었던 배철수는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3일 만의 퇴원하여 일본으로 가 맴버들과 만나서 동경가요제의 참가하였다.
세간에는 그의 행적을 보며 "진정한 뮤지션은 열정 하나 만으로 아픔을 뒤로하고 가요제의 참석하였다. 우리도 배철수라는 뮤지션의 대한 열정을 인정하고 본받아야된다." 라고 배철수의 대한 이슈와 찬사가 이어졌다.
1980년대 초반 송골매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냐면, 당시 송골매를 주연으로 한 영화가 줄줄이 개봉되었을 정도였다. 1982년작 "갈채", 송골매의 모두 다 사랑하리(1983)
그러나 1984년 당시 기획자로부터 솔로 가수 제의를 받은 구창모가 탈퇴하면서 4집 활동에 적신호가 켜진다.
이후 송골매의 리드보컬은 배철수가 맡게 된다.
4집에서 히트곡이었던 "난 정말 모르겠네"는 당시 영미권에서 유행하던 뉴웨이브 사운드의 곡이다. 듀란 듀란이나 컬처 클럽 등의 뉴웨이브/신스팝 사운드가 아니라, Go Go's나 Men At Work와 같은 뉴웨이브/Pop rock 계열의 스타일이다.
1982~1983년에 영미권에서 인기가 많았던 시운드이다. 그 당시만 해도 신스팝 계열과 Pop rock 계열의 뉴웨이브가 공존하던 과도기적 시대였다.
실제로 기타 리프와 곡 분위기가 초기 뉴웨이브를 대표하는 호주 뉴웨이브 밴드 "Men At Work"와 흡사하며, Go Go's의 밝은 뉴웨이브 분위기도 든다.
1980년대 미국을 대표하는 락 밴드 "Huey Lewis & The News"의 분위기도 느낄 수 있다. 1984년 당시 기준으로 꽤 트렌디한 뉴웨이브 곡이다.
1985년에 발표한 송골매 5집은 라원주, 이응수의 지원을 받아 한국적 가락의 시조 창법의 "하늘나라 우리님 2" 를 받았지만, 무언가 대중들이 좋아할 만한 음악은 아닌거 같다는 배철수 의 생각의 의해 "배철수가 편곡하여" 비교적 메탈도 아닌 그렇다고 말랑말랑한 가요적 락이 아닌 비교적 강력한 락사운드의 하늘나라 우리님 1을 발표하여 '하늘나라 우리님'이 「가요톱10」에서 1위를 차지하면서 그 당시 떠오르던 락의 시초라고 불리던 "들국화 밴드"를 대적하여 서로의 위치에서 양분하여 락장르의 인기를 책임지고 지탱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가 송골매의 사실상 마지막 전성기에 깃발을 꽂았다.
1986년에 발표한 송골매 6집은 특별한 히트곡이 없었는데, 1986년은 백두산, 시나위, 부활이 데뷔를 한 해이고 헤비메탈의 르네상스였던 시기이기에 큰 빛을 보지 못한다.
무엇보다 기존의 댄스음악이 서서히 인기장르로 떠오르게되고, 같은 출신의 밴드인 "다섯손가락" 서럼 서정적이면서 조금더 풋풋한 약간 감성적인 8비트 그룹, 밴드지만 춤을 주면서 노래도 하고 악기도 비교적 이질적이지만 단순한 연주와 외모도 말끔한 이미지의 그룹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송골매에게 도전하는 신그룹들이 송골매의 입지와 트렌드를 위협하던 시절이었다.
결국 이러한 부진과 음악적 갈등으로, 2집 때 영입했던 김상복(베이스)과 오승동(드럼)이 팀을 떠나게 되었고, 그러자 배철수는 노래라면 몰라도 연주에서 만큼은 최고의 밴드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종욱(키보드), 이태윤(베이스), 이건태(드럼)을 영입하게 된다.
멤버 재편 후 발표한 7집에서는 다소 강했던 사운드를 뒤로하고 보컬의 "락"적인 음역과 "세련"해진 연주력을 과시하기 위해 키보드, 신디사이저 리프를 적극 활용한 "웅장한 사운드를" 추구하여 '새가 되어 날으리'가 어느 정도 인기를 끌었다.
1988년 5월에 8집 앨범을 발매하였다. 그러나 이미 송골매가 더 이상 대중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끌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태윤이 부른 '외로운 들꽃'이 조금 히트되어 송골매의 체면을 살려줄 수 있었지만, 송골매 스타일의 음악 추구와 보컬면의 잔잔함은 이태윤이 아닌 원년 맴버들의 빈자리를 추구하였고 다소 어울리지 않는 발라드곡은 불후의 명곡이 되어버린다.
1989년부터 1990년까지 1년 동안 KBS에서 방영했던 '자니 윤 쇼'에서 하우스 밴드를 맡았다.
이는 88올림픽 메인광장에서 개최된 외국 선수들을 위한 이벤트에 송골매가 출연하여 연주를 할 때 쟈니윤과의 첫 만남에서 나중에 쟈니 윤이 토크쇼를 하게되면 음악을 맡아달라는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 자니윤쇼의 1년간 고정출연으로 인해 대중들에게 송골매가 나름대로 아직까지 그들의 인기가 건재하다는 것을 다시한번 일깨워 주기도 한다.(배철수 효과가 나름 멱혔기 때문....)
그 1년후 자니윤쇼가 폐지되며 자연스럽게 9집앨범 발표와 배철수가 라디오 DJ의 길로 어쩌면 계기가 되는 발판이 되기도 한다. '자니윤쇼 첫회 라이브', '자니윤쇼 마지막회 라이브'
물론 이 시기때 쯤에 구창모와 다시 뭉쳐 새로 앨범 제작을 논의 중이라고 소리가 들렸다. 방송에서도 몇번 같이하고, 클럽에서도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같이 무대의 설 때도 있었으니.
무엇보다 다시한번 대중들이 그 둘이서 같이 무대의 서는 걸 보고 싶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저물어가는 송골매와 구창모의 바쁜 일정과 훗날 그가 가요계를 떠나게 된 계기가 되는 사건으로 인해 그 둘은 기약없는 약속만 남긴 채 각자의 활동을 마무리하는 단계로 간 걸로 예상되어 다소 아쉬운 부분으로 남았었다.
1990년에 발표한 마지막 앨범 9집에서는 '모여라'라는 히트곡을 냈다. Huey Lewis & The News 풍의 블루스 록과 뉴웨이브를 기반으로 한 팝 록 사운드이다. 중간의 기타 솔로는 1980년대 중후반의 글램 메탈을 연상시킨다.
이후 송골매의 프론트맨이었던 배철수가 본격적으로 라디오 DJ를 맡게되고, 뮤지션으로서의 행보를 접으면서 밴드는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게 된다.
배철수의 언급에 따르면 당시 생활과 창작이 양립이 되지않는 아이러니에 직면해 있었다고 한다. 방송 무대를 나가야 홍보가 되고 몸값이 올라가고, 또 그 홍보와 몸값을 바탕으로 밤무대를 뛰어야 밴드 생활이 유지되고... 그런데 그렇게 365일 밤무대를 뛰다 보면 연구를 할 시간도 적고 새로운 영감과 창작력 역시 솟지 않는다고 한다.
무엇보다 90년대 이후부터는 가요계의 트렌드가 밴드가 아닌 댄스음악의 흐름으로 서서히 변해가고 있었기 때문에 DJ이나 댄스음악 그룹은 '메이저'가 됐지만 밴드는 '마이너'스러운 흐름으로 바꿔었기 때문에 라이브보단 전자음악을 선호하는 추세로 바뀌게 되었다고...
밴드들이 먹고 살기 위해선 가요나 락음악보단 댄스음악이나 유로댄스 음악을 연주해야만 했다. 솔로로 나가기엔 턱없이 부족하고 시대의 흐름은 너무나도 가혹하게 바뀌어 가기 때문에 어쩔수없는 선택이 었다는것이다.
쉽게말해 박수칠때 잘 떠난 케이스.
2022 재결성
2022년 하반기(9월 11일~12일) 양일 간 서울 콘서트를 시작으로 '열망'이라는 타이틀의 전국 투어를 예고하였다. 38년 만에 구창모가 재합류했으며, 베이시스트 이태윤이 음악감독을 맡는다.
송골매의 오랜 팬들은 물론이요, 한국 대중 음악에 관심이 지대한 이들에게까지 큰 화제를 모았다.
70세를 목전에 둔 노령화는 어쩔 수 없지만, 연륜으로 기량을 커버하며 2시간 30분을 꽉 채우는 배철수, 구창모, 이태윤의 스킬에, 양일 총합 2만 관객이 뜨겁게 열광했다. 서울콘의 흥행 덕에 11월까지 진행되는 전국 투어도 예매 문의가 증가했다.
음반과 멤버
1집 (1979) : 배철수 (보컬, 드럼), 지덕엽 (기타), 이응수 (베이스), 이봉환 (키보드)
타이틀곡 : 산꼭대기 올라가, 세상만사,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2집 (1981) : 배철수 (보컬, 기타), 구창모 (보컬), 김정선 (기타), 김상복(베이스), 오승동 (드럼), 이봉환 (키보드)
타이틀곡 : 어쩌다 마주친 그대, 모두 다 사랑하리
이 멤버로 구성되기 이전에 잠시 동안 다음과 같은 체제로 운영되었다.(배철수 (보컬, 드럼), 김정선 (기타), 구창모 (보컬, 베이스), 이봉환 (키보드))
3집 (1983) : 배철수 (보컬, 기타), 구창모 (보컬), 김정선 (기타), 김상복 (베이스), 오승동 (드럼), 이봉환 (키보드)
타이틀곡 : 처음 본 순간, 빗물
4집 (1984) : 배철수 (보컬, 기타), 구창모 (보컬), 김정선 (기타), 김상복(베이스), 오승동 (드럼), 이봉환 (키보드)
타이틀곡 : 난 정말 모르겠네
5집 (1985) : 배철수 (보컬, 기타), 김정선 (기타), 김상복 (베이스), 오승동 (드럼), 이봉환 (키보드)
타이틀곡 : 하늘나라 우리님
6집 (1986) : 배철수 (보컬, 기타), 김정선 (기타), 김상복 (베이스), 오승동 (드럼), 이봉환 (키보드)
7집 (1987) : 배철수 (보컬, 기타), 김정선 (기타), 이태윤 (베이스), 이건태 (드럼), 이봉환 (키보드), 이종욱 (키보드)
타이틀곡 : 새가 되어 날으리
8집 (1988) : 배철수 (보컬, 기타), 김정선 (기타), 이태윤 (베이스), 이건태 (드럼), 이봉환 (키보드), 이종욱 (키보드)
타이틀곡 : 외로운 들꽃
9집 (1990) : 배철수 (보컬, 기타), 김정선 (기타), 이태윤 (베이스), 이건태 (드럼), 이봉환 (키보드), 이종욱 (키보드)
타이틀곡 : 모여라
10집 (2010) : 이봉환 (리더, 보컬, 키보드), 김정선 (기타), 최승찬 (키보드, 보컬), 정준교 (베이스) 고중원 (드럼)
https://youtu.be/esQ_9rvGc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