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오는 여자 <1>
어딘가 숨어 있던 불안이 고개를 들었다. 이제 어떻게 하지? 버스가 터미널에 도착하자 어님은 가방을 선반에서 내려 옆구리에 끼었다. 세 시간 반 걸렸지만 계속 앉아 있던 끝이라 오금이 저렸다. 앞 사람 등 뒤에 바싹 붙어 나가는 곳으로 갔다. 혹시 누구 아는 사람이라도 있지 않나 하고 두리번거리다 제풀에 시선을 거뒀다. 마중 나올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초행 길이다. 어딘가 숨어 있던 불안이 고개를 들었다. 이제 어떻게 하지?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이 서둘러 택시 잡는 곳으로 갔다. 어님도 무턱대고 그들을 따라 갔으나 생각해 보니 택시를 타고 어디로 가자할 처지가 아니었다. 잠시 어떻게 하나 하고 그 자리에 우두망철 서 있는데 스물 이 쪽 저 쪽으로 보이는 청바지 차림의 사내가 말을 걸어 왔다. “이봐, 초행인가?” “예?” “갈데 없냐구?” 사내가 히죽 웃었다. 이런 땐 뭐라고 해야하지. 대꾸를 않고 멀뚱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알았어. 갈데가 없는 모양인데 걱정 마.” “무슨 말이에요?” “내가 알아서 해준다 이거야.” “뭘 알아서 해줘요?” “내 말 무슨 말인지 몰라?” “몰라요.” “너 일자리 찾으러 시골에서 올라오는 길이지?” “어떻게 아세요?” “척 보면 알지. 내가 일자리 찾아 주는 전문가이거든.” “그런 전문가도 있어요?” “있고 말고. 나 보렴. 이렇게 잘 생기고 착한 사람 있지 않니.” 어님은 피식 웃었다. 이 사람 좀 말은 많아 보이지만 불량배 같지는 않다. 다행이다. 불량배 만났으면 애 좀 먹을 텐데. 사내가 어님이 가슴에 안고 있는 가방을 빼앗아 들며 앞장을 섰다. 가방… 이런 건 조심해야 한다. 그렇게 보이지는 않지만 혹시 가방을 가지고 먼저 가버리면 잃어 버릴 수도 있다. “가방 이리 주세요.” “오 걱정 마. 내가 들어다 줄게.” 사내는 벌써 넓은 길을 건너가고 있었다. 이러다 정말 사내를 놓칠지도 모른다. 어님은 뛰었다. 사내가 횡단보도를 반쯤 가서 뒤를 돌아보며 또 한번 히죽 웃었다. 그 웃음이 어딘지 순박해 보인다. 어님은 사내 뒤로 따라 붙었다. “여기선 말이야, 우물우물 하고 있으면 안 돼. 뭐든 후딱후딱 빨리빨리, 알았니?” “그런데 어디로 가요?” “일할 데로 가야지.” “거기가 어딘데요?” “조금만 가면 돼.” “뭐 하는 곳인데요?” “알고 싶니?” “예.” “곧 알게 돼. 어라 저 자식 봐, 숫제 똥장군을 태웠네!” 사내가 손가락질을 한다. 부르릉, 뚱뚱한 처녀를 등뒤에 태운 사내가 비호처럼 이륜차를 두 사람 옆으로 몰고 스쳐갔다. 사내가 야단을 치는 모양이지만 오토바이의 사내는 벌서 저만치 가버린 뒤였다. “너 저런 거 조심해.” “저런 거라뇨?” “깔치 태우고 다니는 놈들!” “어째서요?” “날치기들이야.” “모두요?”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대개는 그래.” 큰 길에서 골목으로 접어드는 사내의 뒷 모습이 낯설어 보였다. 사내가 골목으로 접어든 후 어님을 돌아보며 물었다. “몇 살이냐?” “나이 같은 거 묻지 마세요.” “아쭈! 너 그런 말 하는 건 어디서 배웠어?” “배우긴요.” “이름은?” “이름도요.” “오, 신상명세는 묻지 마라 이거로군.” 사내가 또 히죽 웃었다. 역시 말 보다는 웃음이 더 순박해 보인다. “좋다. 그런 건 차차 말해도 되는 거구….” 사내가 걸음을 세웠다. 허풍도가 미더워지는 것이었다 골목 안에 있는 회백색의 허름한 2층 앞이었다. 시멘트 벽에 서툰 붓글씨로 ‘달방 있습니다’라고 쓴 판대기 하나가 걸려 있었다. “달방이 뭐래요?” 어님이 묻자 사내가 좁을 입구로 들어가며 대답했다. “방이야, 세놓은….” “근데 왜 달방이래요?” “월세로 받으니까 달방이라는 거다. 헌데 너, 글은 아니?” 기가 막혀 어님은 사내 뒤를 따라 입구로 들어서다 말고 무르츰했다. 지가 뭔데 사람을 너무 깔보는 것 같다. 아무려면 한글로 쓴 저깐 간판 하나 못 읽을까. 사내가 돌아봤다. “글 아냐구?” “아니까 달방이 뭐냐고 묻잖아요.” “흐음, 하긴 그렇지. 그래, 몇 학년까지 다녔니?” “뭐라고요!” “너 중퇴 맞지? 사람을 날마다 접하다 보니깐 난 이래 봬도 철학관 차릴 정도는 돼.” “철학관은 뭐예요?” “이거 갈수록 태산일세. 관상 보는 데 몰라?” “알아요. 우리 마을에도 그런 거 보는 사람 있었어요.” “너희 마을이 어딘데?” 아뿔사. 어님은 괜한 말을 꺼냈다 싶어 입을 다물까 했으나 사내가 2층으로 오르는 나무 층계를 오르다 말고 돌아보고 있었으므로 피할 수가 없었다. 적당히 대기로 했다. “아랫 마을요.” “아랫 마을?” 사내가 씩 웃더니 콧끝으로 바람을 뿜어내듯 크하는 소리를 냈다. 무슨 뜻인지 어님은 알지 못 한다. 하지만 별로 기분 좋은 표현은 아닌 것 같았다. “시골 가면 대개 말이다, 아랫 마을 있고 웃 마을 있게 돼 있어. 그런데 너 아랫 마을이 뭐냐. 날 어케 보고? 임마, 이 허풍도로 말할 것 같으면 음… 그만 두자. 내가 지금 연설할 때가 아니지. 그래 좋다. 아랫 마을 살았다 치고, 본론은 너 정말 중퇴 안 한거니?” “참 이상한 아저씨네! 나, 중퇴했었으면 좋겠어요?” “뭐, 아저씨? 나더러 아저씨라? 우캬캬, 이 자식이 날 아주 즐겁게 해줄 모양이네.” 하더니, 사내는 어님의 정수리에 꿀밤을 먹였다. “아저씨 아님 뭐라 부른대요?” “오빠라 불러.” 어님은 정색을 했다. “왜 싫어?” “방금 만났는데요.” “크, 쑥스럽다 이거지. 좋아, 마음대로 불러. 풍도도 좋고, 허풍도도 좋고, 아찌도 좋고, 까짓거 성님도 좋다.” 허풍도는 그러더니 어님의 가방을 왼손에 바꿔 들고는 나무 층계를 두개씩 겅중겅중 건너 뛰어 2층 복도로 올라갔다. 밖에서 볼 때보다는 2층 건물이 큰 모양이다. 두 사람 비켜가기도 좁은 복도지만 제법 안이 깊어 어둑신했다. 복도를 따라 양 옆으로 작은 방문들이 마주보고 늘어서 있었다. “이런 데 첨 와보니?” “첨이에요.” “너 살던 아랫 마을에는?” “없어요.” “그 아랫 마을이 여기서 멀어?” “조금요.” “그럼 다시 묻겠는데, 너 졸업은 했니?” 이 졸업 문제가 아무래도 취직하고 연관이 있는 모양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어님은 학교 문제를 두번 씩 묻고 있는 허풍도가 오히려 미더워지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거짓말까지는 보탤 수 없지만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기도 했다. 어님이 복도 끝엣 방 앞에 가서 걸음을 세우는 허풍도에게 물었다. “한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뭔데?” “꼭 졸업해야만 되나요?” “졸업? 너 졸업했다고 했잖아.” “중학교는 못 했거든요.” 허풍도는 고개를 한번 꺄우뚱해 보이더니 그대로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손바닥만한 조각창 하나가 달린 방은 대낮인데도 어두웠다. 허풍도가 방구석에다 어님의 가방을 내려놓고 조각창을 가린 때묻은 커튼을 걷자 어님은 주춤거렸다. 음산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들어와!” 허풍도가 창틀에 기대서며 소리쳤다. “여기가 뭐 하는 곳이예요?” “보면 몰라? 잠자는 방이야.” “근데 왜 이런데로 와요?” “잠자야 하니까.” “누가요?” “너.” 무슨 말인지 몰라 어님은 허풍도를 빤히 쳐다보았다. 잠은 자야겠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다. 취직을 시켜준다면서 왜 잠자는 방부터 안내를 하는지 얼른 답이 나오지 않는다. “일자리는 어디에 있어요?” “일자리? 크, 일자리라. 걱정 안해도 된다. 이미 잡은 거나 마찬가지니까. 건 그렇고, 너 거기 그렇게 계속 서 있을 거니?” 어님은 복도를 돌아보았다. 조용하던 복도를 여자 하나가 스리퍼를질질 끌면서 층계 쪽으로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단정한 모습은 아니었다. 방안으로 들어갔다. “앉아!” “괜찮아요.” “괜찮지 않아.” “괜찮다니까요.” “그 자식! 넌 말끝마다 토를 다는데 생긴 것 보단 닳았구나. 안 그래?” “저 생긴 게 어떤데요?” “어떠냐 하면 별로 영리해 보이진 않아.” “바보는 아녜요.” “바보라곤 안 했다.” “그럼 바보 취급만 하지 마세요.” “내가 언제 너 바보 취급했니?” “안 했지만 혹시 앞으로 모르니까요.” 어님은 허풍도 앞에서 조금 떨어진 문 옆으로 두 다리를 모으고 앉았다. 어차피 서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허풍도가 담배를 꺼내 라이터 불을 붙이면서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피우니?” “예?” “주랴?” 기가 막히다. 숫제 담배나 피우는 그런 막된 계집애로 보는 모양이다. 기분이 나빴지만, 차라리 그렇게 툭툭 터놓고 얘기해버리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허풍도가 내밀고 있는 담배 갑을 손으로 제쳐버리고 어님은 이제 더 미루고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정색을 하고 물었다. “저 사실은 여기 무작정 따라 왔지만 궁금한 점이 많아요. 알고 싶거든요.” “알고 싶은 게 뭔데?” “아저씨, 정말 남의 일자리 얻어 주는 분 맞아요?” “허, 또 아저씨랜다! 오빠라고 하랬잖아?” “지금은 아직 입에서 안 나와요. 어디서 들었는데 직업 소개해 주는 보도집이 있다던데요.” “왜 내가 못 미더워 글루 찾아가고 싶어졌니?” “그런데 가면 직업도 자기 마음대로 고를 수 있잖아요.” 허풍도는 뭐가 우스운지 낄낄거리다가 담배 연기가 매웠던지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마음대로 고른다? 크, 내가 본대로 넌 역시 별로 영리한 애는 못 돼.그래 마음대로 고르라면 뭘 고를래?” “사무 보고, 전화도 받고 … .” “비서 말이냐?” “비서만 그런 일 해요?” “그런 일은 대개 비서가 하지. 그런데 내 보기에 너 너무 꿈이 큰 거 아니니?” “그게 꿈이 큰 거예요?” “임마 네 처지엔 큰 거지.” 어님은 허풍도를 노려봤다. 역시 사람을 무시하는데가 있다. 뭐 한가지 정도만이라도 보란듯이 내보이고 싶었으나 사실 어님은 내세울만한 게 없었다. 그렇지만 두고 보라지. 허풍도가 담배를 방구석에다 아무렇게나 비벼 끄고 일어났다. 어님이 따라 일어나자 어깨에 손을 얹더니, “넌 일어날 것 없어. 기다려.” 하고는 복도로 나가 버렸다. 그렇게 거의 1분 가량 지난 후에야 소리도 없이 방문이 열렸다. 허풍도가 어님을 구석방에 남겨 놓고 밖으로 나간지 한 시간 쯤 되어간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아무 연락이 없었다. 기다리라고만말하고 더 설명이 없었기 때문에 가까운 곳에 금방 다녀오려니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 그만큼 시간이 흘렀다. 여전히 허풍도는 연락이 없었고 누가한번 쯤은 들여다 볼듯도 싶은데 그런 사람 조차 없었다. 허풍도라는 사람에 대해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성품은 악해 보이지 않지만 일자리를 찾아 준다는 말이 아무래도 석연치가 않다. 그런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면 돈 달라는 말을 뺄 리가 없는데 그런 얘기가 전혀 나오지 않는 것도 이상하다. 어님은 초조해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일어나 방안을 오락가락하기도 하고 조각창으로 밖을 내다보기도 한다. 그래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이번에는 팔베개를 하고 눈을 감아 보는데 복도에 사람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허풍도가 이제야 돌아오는 모양이다. 과연 발소리는 어님이 있는 구석방 문앞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방문 앞에 오자 별안간 조용해졌다. 문앞에 서있는 모양인데 아무 기척이 없는 것이 방안의 동정을살피고 있는 것 같다. 어님은 일어나 앉은채로 밖의 동정에 신경을 모았다. 여전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렇게 거의 1분 가량지난 후에야 소리도 없이 방문이 열렸다. 그 순간 어님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다. 열린 문 사이로 머리를 삐주름이 들이민 사람은 허풍도가 아니고 왠 낯선 사내였던것이다. 그 뿐이었다. 어님과 눈이 마주치자 사내는 도둑질이라도 하려다 들킨 듯이 얼른머리를 도로 빼더니 이번에는 잽싸게 문을 쾅 닫아 버렸다. 왜 저런다지? 혹 방을 잘못 찾아온 사람인가. 어님이 그런 생각을하며 뭐라고 한 마디 물어 보려는 참인데 밖에서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방문 자물쇠를 밖에서 채우고 있는 것이었다. 처음엔 그걸 무심코 들었으나 다시 사내의 발소리가 멀어져 가는 소리가 들려오자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급히 문을 밀어 보았으나 열리지 않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열리지 않는 문을 손으로 두드리며 복도를 향해 소리쳤다. 그러나 사내는 이미 복도를 빠져나간 후다. 대답은 커녕 부스럭거리는 소리하나 들려오지않았다. 혹시나 하고 문 손잡이를 좌우로 비틀어 보았으나 절그럭거리는 소리만 날 뿐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님은 자신이 함정에 빠진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다리가 풀리면서 방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떠오르지 않았다. 오직 이 작은 방안에 갇히게 되었다는 생각만이 머리 속을 가득히 채웠다. 어님의 눈앞에는 방금 전 문 사이로 삐주름이 고개만 내밀던 그 낯선 사내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가무잡잡한 낯빛에 눈이 동태처럼불거진 사내였다. 이 사내는 누굴까? 왜 방안을 들여다 본 후 황급히밖에서 문을 잠그고 사라져 버렸을까. 허풍도와는 서로 아는 사이일까. 아는 사이라면 혹 허풍도가 보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허풍도가 보냈다면 뭐라고 한 마디 정도는 말을 하고 갈 법 한데 도망치듯가버렸다. 그것도 어님이 밖으로 나가지 못 하게 문을 잠근채. 어님은 벌떡 일어났다. 함정이 틀림 없었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함정에 빠뜨리려 할까? 그리고 정말 함정에 빠진 거라면 겁먹고 떨고 있을 시간조차 없는 것이 어님의 처지였다 어님은 애써 침착해지려고 가슴에 두 손을 얹고 심호흡을 했다. 언젠가는 이런 일이 닥칠 줄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빨리 온 것이다. 그렇다고 아주 절망한 건 아니었다. 마음 속으로 어느 정도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지금은 되도록 빨리 이 방에서 빠져 나갈 방법을 찾아 봐야 한다. 밖으로 걸어논 방문은 특별한 연장이 있으면 모를까 어님의 재주로는 열수가 없다. 방문 말고는 밖으로 통한 데란 조각창 뿐이었다. 조각창은 채광을 위해 붙여놓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크기는 작고 어님의 키보다 높은 곳에 달려 있었다. 우선 이 조각창으로 빠져나갈 궁리부터 해봐야겠는데 너무 높이 달려 있었다. 마땅히 발돋움할 것이 없었기 때문에 가방을 벽에 붙여 세운 후 그 위로 올라갔다. 창밖이 보였다. 창 아래로 납작한 한옥이 보이고 이 한옥 뒷마당에 있는 장독대가 바로 밑에 있었다. 장독대 높이가 한옥 지붕 높이와 비슷해 어님으로서도 충분히 뛰어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창틀까지 어떻게 올라가느냐가 문제였다. 우선 조각창을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해서 열었다. 열린 창틀에 다리 하나만 걸치면 어떻게든 매달릴 수가 있을 터인데 그렇게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서지 않는다. 창틀을 두 손으로 잡고 발 하나를 벽에 붙였다. 미끄러웠다. 다시 발을 벽에 고정시키고 몸을 들어 올리면서 오른 발을 창틀에 걸치자 생각보단 쉽게 몸이 창틀에 걸터지는 것이었다. 이렇게 쉬운 걸. 그러나 정작 창틀 위에 올라앉자 다른 문제가 생겼다. 가방을 들어올릴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가방에는 갈아 입을 옷가지 빼고는귀중품은 들어 있지 않다. 노비로 챙겨온 얼마 되지 않은 돈은 품안에 들어 있다. 어떻게 할까? 다시 내려간다 해도 가방을 들고 창틀을 넘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가름 옷 전부를 가방채 죄다 포기해벌 수도 없다. 힘에 겨워 그대로 창틀에 매달려 있을 수도 없고 양단간에 결단을 내려야 하는데 그때 복도 쪽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 왔다.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금세 방문에 열쇠 끼는 소리가 들리더니 아까 왔던 그 가무잡잡한 얼굴이 들어서면서, “저 간나 보게, 내려오지 못해!” 벽력 같이 소리를 질렀다. 어님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아래 한옥 뒷마당의 장독대 위로 뛰어 내렸다. 몸이 한쪽으로 기우뚱해서 영낙없이 장도가니 위로 떨어지는 줄 알았는데 엉덩방아를 찧고 보니 도가니 옆에 널려 있는 헌 요 위였다. 다리가 좀 삐긋한 느낌이 들었으나 그런 걸 염두에 둘 시간이 없었다. 부리나케 장독대 층계를 내려가면서 쳐다보니 가무잡잡한 얼굴의 사내가 조각창으로 얼굴을 내밀고 주먹을 그르쥐며 소리치고 있었다. “이 간나, 돌아오지 못 해? 넌 뛰어 봤자 벼룩이야. 좋은 말로 할 때 돌아오라구!” “안 돼요, 난 안 돌아가요, 죽어도 안 돌아간단 말예요!” “그렇게는 안 될 걸. 튀어 봤자 손오공이지,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놀아. 포기하고 돌아와. 그래야 너도 살고 나도 산다. 내가 너한 테 쓴 돈이 얼만 줄이나 아느냐?” “거짓말 말아요, 전 돈 한푼 받아본 일 없어요. 댁도 처음 보구요” “저 간나 죽고 싶어 환장한 모양이네!” 사내가 장독대로 뛰어내릴 생각인지 단번에 조각창 창틀 위로 기어올랐다. 꾸물댈 시간이 없었다. 어님은 한옥집 앞마당으로 빠진 후 대문을 열고는 골목으로 달려나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