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메타포라 7차시 과제: 뚜벅이로 숨 고르기 in Jeju>
백리향
3월 1일, 2박 3일의 일정으로 제주에 다녀왔다. 작년 12월 중순에 숙소만 덜컥 예약하고 여행 열흘 전에야 비행기 표를 구하려니 대부분 매진된 상태였다. 거의 포기할 뻔하다가 큰언니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항공권을 구했다.
항공권을 구한 후 숙소의 호스트에게 근처 조용한 카페 추천을 부탁했다. 몇 군데 장소를 알려주며 ‘많이 움직이지 않고 조용한 시간을 보낼 예정이라면 대중교통도 고려해 보라.’고 했다. 결과적으로 이전과는 조금 다른 제주 여행을 하기로 했다. 렌트카를 이용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더구나 이번 제주행은 내게 ‘숨 고르기’ 정도면 충분했기에 여기저기 이동할 이유가 없었다.
작년 12월 20일부터, 지금 다니는 인천의 병원에 단기 계약(장거리에 대한 부담으로)을 하고 근무하기 시작했고 1월 중순부터 매주 한 번 있는 글쓰기 수업에 참여했다. 주 6일 새벽 5시 전에 일어나 일하고 운동하고, 한 주에 한 번씩 한편의 글을 쓰고 수업까지 참여하려니 몸도 마음도 바쁘고 수면도 턱없이 부족했다.
애초에 약속했던 계약 기간인 2월 말을 대략 한 달 앞둔 1월 말, 병원의 센터장이 나를 불렀다. 추후 연장 계약시 주유 및 통행료에 상당하는 일정 금액을 추가로 지원하고 출근 시간을 8시에서 7시 20분으로 당기는 건에 관한 내용이었다. 당겨진 출근 시간에 당혹스러워 추가 지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일주일 정도의 시간을 가지며 냉정하게 고민했다. 연초에 다짐했던 새해 목표 중 ‘묵묵히 하기’를 떠올렸다. 일에 관한 다짐이기도 했기에 결국 계속 일하기로 결정했다. 그러고 나니 4월 초까지 남은 글쓰기 수업과 3월부터 적어도 1년은 7시 20분까지 출근해야 한다는 생각에 잠시라도 숨통을 트고 싶었다.
출발 당일 강풍 탓에 2시간가량 지연되어 오후 2시경 제주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101번 버스를 타고 대략 한 시간 만에 숙소 근처인 김녕 초등학교에서 내렸다. 정상적으로는 10분 걸려야 할 거리를 헤매고 두른 탓에, 30분만에 숙소 근처 작은 책방 ‘일희일비’에 도착했다. 호스트에게 전화했고 금세 대각선 맞은편 나지막한 네이비색 철문에서 나온 호스트를 따라 들어갔다.
호스트 가족이 지내는 본채 맞은편, 내가 머물 방의 현관문에 해당하는 새시로 된 미닫이문을 여니 좁은 툇마루가 나타났다. 이어서 , 50년 넘은 구옥답게 자주 ‘덜거덕’하고 문턱에 걸려 한 번씩 발로 쳐주어야 열리는 나무로 된 미닫이문을 열었다.
검정색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아날로그 감성의 음악과 바로 옆 앙증맞은 스탠드에서 새어나오는 은은한 주황빛 조명이 따뜻한 온돌 바닥과 더불어 방안의 온기를 더했다. 숙소 이름처럼 위로가 될 만한 공간이었다.
방안 곳곳에 결코 세련되진 않지만 촌스럽다고 할 수 없는, 따뜻한 감성이 묻어나는 호스트의 손길이 느껴졌다. 급격히 긴장이 풀리면서 침대로 쓰러졌고 눈을 뜨니 저녁 9시가 넘어 있었다.
다음 날 아침 8시 갓 구운 포카치아 그리고 사과와 방울토마토가 들어간 샐러드를 조식으로 먹은 후 주변 바다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지도 앱을 켜고 ‘청굴물’을 검색했다. 내가 도착했을 때가 간조였던지 삼분의 일가량 찬 에메랄드 빛깔의 용천수를 볼 수 있었다. 이어서 검색한 ‘세기알 해변’을 향해 걷다가 ‘도대불’이라는 김녕의 옛 등대를 발견했다. 괜히 한 번 등대 계단에 올라 뭔가 다른 경치가 펼쳐질까 기대해보기도 했다.
조금 더 걸으니 하늘색 바탕에 알록달록 다양한 색깔의 물고기와 돌고래 거북이 말미잘 조개 산호초 왕오징어는 물론이고 스노클링하는 어린이까지 그려진 담장이 바다를 둘러싼 채 한동안 이어졌다. 멀리 바다 가운데 빨간 등대가 눈에 띄었고 걸어가 보았더니 몇 명의 사람들이 등대 계단에 앉아 낚시를 하고 있었다.
잠시 구경하다 고개를 드니 저 멀리 하얀 모래사장과 천천히 돌아가는 풍력 발전계를 배경으로 에메랄드 빛의 또 다른 바다가 넘실대고 있었다. 한 폭의 풍경화 같은 장면 속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직접 쥐어 본 하얀 모래는 보드라웠고 그래선지 걸을 때도 꽤 폭신하게 느껴졌다. 50 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다섯 살쯤 돼 보이는 꼬마는 모래성을 쌓는가 싶더니 금세 발로 뭉개고 있었고 아이 대신 조그만 애견을 바다를 배경으로 앉히고 사진 찍는 풍경은 이색적이었다.
점심을 먹을 겸 향한 월정리에서도 뚜벅이 여행은 이어졌다. 장갑도 끼지 않은 채 파도를 타고 있는 월정리 해변의 서퍼들을 보니 반갑고도 설렜다. 부러운 만큼 분발해야 할 것 같은 조급함이 걷는 내내 여운으로 남았다. 또 기와지붕과 낮은 돌담으로 둘러싼 작은 정원까지 있는 공간이 ‘달믄곳’이라는 이름의 사진관(달이 머무는 사진관)이라는 사실을 몇 번을 기웃거린 끝에 알아냈다.
파란 문과 입구의 바겟뜨빵을 들고 있는 돌하루방 장식이 독특해서 멈춰 선 곳이 ‘르 바겟뜨’라는 빵집이었고 그곳을 지키던 고양이가 나를 보자마자 내 다리 사이로 달려와 옴쭉달싹 못하던 순간도 마주했다. ‘책방 오후’라는 이름의 책방도 걷다가 문득 발견하고 들렀었다.
성실한 뚜벅이 여행자로 보낸 하루이자 제주에서의 마지막 밤을 ‘김녕식당’의 ‘제주담은 편백찜’과 무알콜 맥주로 자축했음에도 떠나는 마지막 날은 아쉬웠다. 아침 8시 바구니에 정성까지 담은 조식을 서둘러 먹고 한 번 더 김녕해수욕장을 들르기로 했다.
아침 일찍 찾은 성세기 해변은 더없이 고요했고 하얀 모래사장은 유난히 하얬다. 아득한 수평선 근처의 짙푸른 빛깔에서 차츰 에메랄드 빛의 물결을 이루고 마침내 거품파도가 되어 모래사장으로 밀려오기까지, 미세한 차이로 그라데이션되는 에메랄드 빛의 바다는 볼수록 빨려들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까지 가슴에 담으려는 듯 큰 숨을 들이셨다.
다시 숙소로 돌아가던 중에도 골목 어느 담벼락에 그려진 해녀 그림과 그 옆에 적힌 글귀가 나를 멈춰 세웠다. ‘바당서랑 욕심내지말곡 숨 참을만큼만 하라.’ 비단 바다에서만이 아닌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꼭 필요하지만 간과하기 쉬운 말인 것 같았다
.
처음 뚜벅이로 하게 된 제주 여행에서 나는, 걷지 않았다면 놓쳤을 다양한 장소와 풍경 앞에서 멈춰 섰고 그로 인해 유심히 관찰했다. 그러면서 예상치 못한 호기심이나 작은 감동 혹은 미소를 건질 수 있었다.
‘삶’ 역시 여행이라지만 무심히 지나쳐도 흘러가고 말 시간이다. 그러나 일상에서 내가 마주하는 감정이나 생각에 잠시 머물면 의문을 가지거나 사유하게 된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글로 풀어내면 혼란스럽던 마음이 일 단락 되거나 직전에 느꼈던 겹겹의 감정이 생각보다 단출해진다. 그 과정에서 소소한 지혜를 얻기도 하고 대단하진 않지만 내 삶을 이어나가는 나만의 내공이 생기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뚜벅이 여행은 삶 속에서 글쓰기와 비슷한 결을 가진 것 같았다. 별다를 게 없어 보이지만 가끔은 멈춰서 관찰하고 살피는 일. 그만큼 육체적 혹은 정신적인 에너지를 필요로하지만, 그럼에도 여행하듯 사는 삶 혹은 삶을 살듯 여행하기위해서 앞으로도 결이 닮은 두 친구랑 좀 더 친해져볼 작정이다.
덧붙임) 이런 저런 이유로 글이 많이 늦어졌습니다.ㅠ 게다가 이번에는 원래 제시한 주제랑은 전혀 상관없는 글을 올리게 되었네요..떠올리기 쉽지 않은 주제였고 지난번 수업 후 얼핏 들은 (주제가 너무 어려우면 쓰고 싶은 다른 주제도 괜찮다는?) 은유 작가의 말을 핑계로 늦었지만 올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