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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산(平山)은 황해도(黃海道) 南東(남동)쪽에 位置(위치)한 地名(지명)으로 本來(본래) 고구려(高句麗) 때 대곡군(大谷郡) 또는 다화실(多和悉)이었던 것을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영풍(永豊)으로 고쳤으며, 고려(高麗) 初(초)에 평주(平州)로 하였고 1272년(원종(元宗) 13年(년) 부흥군(復興郡)에 합쳤다가 충렬왕(忠烈王) 때 다시 復舊(복구)하였다. 조선(朝鮮) 태종(太宗)13년(1413년)에 평산(平山)으로 바꾸고 도호부(都護府)로 昇格(승격)하였으며, 고종(高宗) 때 군(郡)이 되었다.
평산 신씨(平山申氏)의 시조(始祖)는 고려(高麗)의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벽상공신(壁上功臣) 삼중대광 태사(三重大匡太師)에 오른 신숭겸(申崇謙)이다. 文獻(문헌)에 依(의)하면 그의 초명(初名)은 능산(能山)으로 全南(전남) 谷城(곡성) 出身(출신)인데, 태봉(泰封: 新羅(신라) 52代(대) 孝恭王(효공왕) 때 弓裔(궁예)가 松嶽(송악)에서 세운 나라)의 기장으로 있다가 고려 태조(高麗太祖) 元年(원년)918年(년) 배현경(裵玄慶)·홍 유(洪 儒)·복지겸(卜智謙) 等(등)과 더불어 궁예(弓裔)를 廢(폐)하고 왕 건(王 建)을 推戴(추대)하여 고려(高麗)가 건국(建國)하는데 決定的(결정적)인 役割(역할)을 하여 고려개국원훈(高麗開國元勳)으로 대장군(大將軍)에 올랐다.
<어느날 王建(왕건)이 평주(平州: 平山)로 사냥을 나가 삼탄(三灘)을 지날 때 마침 고공(高空)을 나는 세 마리의 기러기를 보고 수행하는 제장(諸將)에게 「누가 저 기러기를 쏘아 맞히겠는가?」하고 묻자 그가 맞히겠다고 아뢰었다. 王建(왕건)이 그에게 궁시(弓矢)와 안마(鞍馬)를 내리며 쏘라고 하자 그는 「몇 번째 기러기를 쏘리까」하고 물었다. 王建(왕건)이 웃으며 「세번째 기러기 왼쪽 날개를 쏘라」고 하자 과연 세 번째 기러기의 왼쪽 날개를 命中(명중)시켜 떨어뜨리자 王建(왕건)이 歎服(탄복)하고 기러기가 날던 땅 3백결을 下賜(하사)하고 本貫(본관)을 平山(평산)으로 삼게 하였다.>
「누가 저 기러기를 쏘아 맞히겠는가?」하고 묻자 그가 맞히겠다고 아뢰었다. 王建(왕건)이 그에게 궁시(弓矢)와 안마(鞍馬)를 내리며 쏘라고 하자 그는 「몇 번째 기러기를 쏘리까」하고 물었다. 王建(왕건)이 웃으며 「세번째 기러기 왼쪽 날개를 쏘라」고 하자 과연 세 번째 기러기의 왼쪽 날개를 命中(명중)시켜 떨어뜨리자 王建(왕건)이 歎服(탄복)하고 기러기가 날던 땅 3백결을 下賜(하사)하고 本貫(본관)을 平山(평산)으로 삼게 하였다.>
그후 태조(太祖) 10년(927년) 공산동수(公山桐籔)에서 견훤(甄萱) 軍事(군사)와의 싸움에 태조(太祖)와 함께 出征(출정)하여 包圍(포위)로 戰勢(전세)가 危急(위급)해지자 太祖(태조)와 容貌(용모)가 恰似(흡사)한 숭겸(崇謙)이 太祖(태조) 王建(왕건)를 避身(피신)시키고 대신 어거(御車)를 타고 出戰(출전)하여 戰死(전사)하였다. 그의 죽음을 슬퍼한 太祖(태조)는 屍身(시신)을 잘 보살펴 春川(춘천)에 예장(禮裝)하고 벽상호기위태사개국공삼중대광 의경대광위이보지절저정공신(壁上虎騎衛太師開國公三重大匡 毅景戴匡衛怡輔砥節底定功臣)에 追封(추봉)하였으며, 崇謙(숭겸)의 아들 보장(甫藏)을 원윤(元尹)으로 삼고, 지묘사(智妙寺 : 慶北(경북) 達城君(달성군) 공산면 지묘동)를 세워 그의 冥福(명복)을 빌었다. 1120年(년)(예종(睿宗) 15年(년) 王(왕)이 서경(西京: 平壤(평양)에 行次(행차)하여 <八關會(팔관회)>가 열렸을 때 <悼二將歌(도이장가)>를 지어 김 낙(金 樂)과 신숭겸(申崇謙)의 功(공)을 追悼(추도)하였다.
家門(가문)을 빛낸 代表的(대표적)인 人脈(인맥)을 살펴보면 始祖(시조) 崇謙(숭겸)의 11世孫(세손) 연(衍)의 아들 중명(仲明 : 도관(都官:1.新羅(신라) 때, 宮中(궁중) 음악을 맡아보던 官員(관원).2.高麗(고려) 時代(시대), 奴婢(노비)의 文書(문서)와 戶籍(호적) 및 그 訴訟(소송) 事務(사무)를 맡아보던 官衙(관아)을 지내고 兵曹(병조) 參判(참판)에 追贈(추증), 자명(自明: 奉翊大夫(봉익대부)로 春川府使(춘천부사)를 歷任(역임)), 헌주(憲周 : 上護軍(상호군)을 歷任(역임) 3兄弟(형제) 代(대)에서 家勢(가세)가 크게 隆盛(융성)하여 名門(명문)의 기틀을 마련했다.
도관(都官) 중명(仲明)의 아들 집(輯)은 高麗朝(고려조)에서 전리판서(典理判事)와 수문전 대제학(修文殿大提學)을 지냈으며, 그의 아우 군평(君平)은 恭愍王(공민왕) 때 좌대언(左代言)과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올라 當世(당세)에 大學者(대학자)로 推仰(추앙)되었던 막내 현(賢)과 함께 名聲(명성)을 떨쳤다.
한편 大提學(대제학) 집의 셋째 아들인 안(晏)은 高麗(고려) 末(말)에 봉선고 판관(奉先庫判官)을 거쳐 종부시령(宗簿寺令)에 이르렀으나 高麗(고려)가 亡(망)하자 平山(평산)의 黃衣山(황의산)에 들어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忠節(충절)을 지켰으며, 그의 아들 개(槩)가 뛰어났다.
國初(국초)以來(이래) 명간관(名諫官)이라고 太宗(태종)이 極讚(극찬)했던 개(槩)는 太祖(태조) 때 文科(문과)에 及第(급제)하여 검열(檢閱)을 지내고 太宗(태종) 때 이조 정랑(吏曹正郎)·참의(參議)·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 等(등)을 거친 後(후) 世宗(세종) 때는 吏曹(이조) 判書(판서)가 되어 北邊(북변)을 자주 侵入(침입)한 野人(야인) 討伐(토벌)에 貢獻(공헌)했다.
그後(후) 우참찬(右參贊)으로 『高麗史(고려사)』修撰(수찬)에 參與(참여)했으며, 左贊成(좌찬성)과 右議政(우의정)을 거쳐 几杖(궤장)을 下賜(하사) 받고 耆老所(기로소)에 들어갔으며 1447年(년)(世宗(세종) 29年(년) 左議政(좌의정)에 올랐다.
本來(본래) 王朝(왕조)의 記錄(기록)인 實錄(실록)은 그 客觀性(객관성)이 흐려지고 唐(당) 王(왕)의 勢力(세력)에 左右(좌우)되지 않게 하기 위해 王(왕)이 보는 것을 道義的(도의적)으로 금하게끔 되어 있었는데, 어느날 太祖(태조)가 自身(자신)에 關(관)한 記錄(기록)이 宮禁(궁금)하여 實錄(실록)을 보여 줄 것을 下命(하명)하자 이에 개(槩)는 頑强(완강)히 拒否(거부)하여, 그 後(후)에도 자주 實錄(실록) 閱覽(열람)을 願(원)하는 임금(王왕)들에게 간(諫)하는 臣下(신하)들의 좋은 口實(구실)이 되었다. 그는 자준(自準 : 觀察使(관찰사)를 歷任(역임), 자승(自繩 : 大司成(대사성)을 歷任(역임), 자형(自衡 : 집의[執義:1.高麗(고려) 時代(시대), 司憲府(사헌부)의 官職(관직).2.朝鮮(조선) 時代(시대), 司憲府(사헌부)의 從三品(종삼품) 官職(관직)]를 歷任(역임) 세 아들을 불러놓고 代代(대대)로 물려내릴 家訓(가훈)을 다음과 같이 定(정)하여 가르쳤다.
<언충신, 행독경, 소심익익, 대월상제(言忠信, 行篤敬, 小心翼翼, 對越上帝)>의 遺訓(유훈)을 받은 3兄弟(형제)는 모두 벼슬길에 나가 官職(관직)을 지내며 後代(후대)에서 훌륭한 人才(인재)를 많이 輩出(배출)시켜 平山(평산) 辛氏(신씨)의 中樞的(중추적)인 人物(인물)이 되었다.
개(槩)의 아우로 太宗(태종) 때 文科(문과)에 及第(급제)한 효(曉)는 우정언(右正言)을 거쳐 世宗(세종) 때 교수관(敎授官)을 지냈으며, 그의 曾孫子(증손자) 영(瑛)이 김식(金湜)의 門下(문하)에서 글을 배우고 中宗(중종) 때 수원 부사(水原府使)로 나가 善政(선정)을 베풀어 百姓(백성)들의 推仰(추앙)을 받았다.
어사대부(御史大夫) 군평(君平)의 孫子(손자)로 恭讓王(공양왕) 때 지신사(知申事)를 歷任(역임)한 호(浩: 한림 혼의 아들)는 高麗(고려)의 國運(국운)이 기울자 玉璽(옥새)를 부둥켜 안고 李成桂(이성계) 一黨(일당)에 抗拒(항거)했으나 力不足(역부족)으로 失敗(실패)하자 故鄕(고향)인 平山(평산)으로 내려가 隱居(은거)하였고, 전리판사(典理判事)의 벼슬을 내려 數次(수차)에 걸친 太祖(태조)의 부름에 應(응)하지 않았다.
己卯士禍(기묘사화) 때 성균관 유생(成均館儒生) 1千(천) 여 名(명)을 이끌고 大闕(대궐)에 들어가 趙光祖(조광조)의 救命(구명)을 上疏(상소)했던 명인(命仁)은 恒常(항상) 鬱憤(울분)을 품고 <風流(풍류)狂客(광객)>이라 自稱(자칭)하며 全國(전국)을 放浪(방랑)하다가, 居昌(거창)에 隱居(은거)하던 스승 김식(金湜)이 自決(자결)했다는 消息(소식)을 듣고 달려가 屍身(시신)을 거두어 忠州(충주)에 葬事(장사)지냈다.
當時(당시) 김식(金湜)이란 이름만 입에만 담아도 逆賊(역적)시 당했던 때인데, 그 屍體(시체)를 運搬(운반)했던 名人(명인)의 勇氣(용기)에 世上(세상)사람들은 極讚(극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葬送(장송)途中(도중) <조송옥사(弔宋玉辭)>라는 哀悼詩(애도시)를 지어 自己(자기)의 뜻을 밝히고,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시주(詩酒)로 一生(일생)을 마쳤다.
名人(명인)의 아들 익(翌)은 明宗(명종) 때 武科(무과)에 及第(급제)하여 함평 현감(咸平縣監)으로 나가 治績(치적)을 쌓았고, 宣祖(선조) 때 제주 목사(濟州牧使)·전라도 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순천 부사(順天府使) 等(등)을 歷任(역임)하였다.
그는 本來(본래) 南大門(남대문) 밖 靑坡(청파)의 배다리 近處(근처)에 살았다. 하루는 집 近處(근처)에서 길건너 사람과 이야기를 하다가 當時(당시) 兵曹判書(병조판서) 류전(柳琠)의 行次(행차)를 범하여 前導(전도)하는 下人(하인)에게 끌려가 욕을 당했다. 익(翌)은 모르고 범한 것인데 너무 지나치게 욕을 보였다 하여 이 下人(하인)을 번쩍 들어 도랑에 내던져 버렸다.
이 騷亂(소란)을 보고 있던 류전(柳琠)은 익(翌)을 장하게 보고 임금王(왕)에게 大丈夫(대장부) 하나를 發見(발견)했다고 아뢰어 선전관(宣傳官)에 特採(특채)되었으며, 明宗(명종)이 서교(西郊)에 나갔을 때 거센 돌풍에 어막(御幕)의 끈이 끊겼는데 翌(익)은 그 끈을 붙잡고 御幕(어막)이 넘어지지 않도록 혼자 버티고 있었다고 한다.
개(槩)의 曾孫(증손) 상(鏛)은 어려서부터 性理學(성리학)을 硏究(연구)하여 이장곤(李長坤)과 함께 전선(銓選)을 맡아 조광조(趙光祖)·김식(金湜) 等(등) 士林派(사림파) 學者(학자)들의 登用(등용)에 努力(노력)하였고, 남곤(南袞) 等(등) 勳舊(훈구)勢力(세력)과의 對立(대립) 때에는 이를 仲裁(중재)하였다.
일찍이 평안 감사(平安監司)가 되어 평산부(平山府)의 아관(衙官)을 지날 때 本官(본관) 마을이라 하여 수레에서 내려 걸어서 지나갔다고 한다.宣祖(선조) 때 名將(명장)으로 유명했던 입砬:상(鏛)의 孫子(손자)은 1583년(宣祖(선조) 16年(년) 온성부사(穩城府使)가 되어 北面(북면)에 侵入(침입)해 온 니탕개(尼湯介)를 擊退(격퇴)시키고 豆滿江(두만강)을 건너가 野人(야인)들의 巢窟(소굴)을 掃蕩(소탕)하고 凱旋(개선)하자 宣祖(선조) 임금王(왕)은 郊外(교외)에까지 直接(직접) 마중을 나가 戰袍(전포)에 핏자국이 나 있는 것을 보고 御衣(어의)를 벗어주었으며 將軍(장군)에게 婚期(혼기)에 닥친 딸이 있는 것을 알고는 신성군(信城君:宣祖(선조)의 넷째 아들)의 아내로 삼아주는 等(등) 極盡(극진)히 대해주었다.
壬辰倭亂(임진왜란)이 일어나자 宣祖(선조)는 손수 불러 寶劍(보검)을 내리며 倭軍(왜군) 討伐(토벌)을 付託(부탁)했으나 貧弱(빈약)한 兵力(병력)으로 出戰(출전)하여 忠州(충주)의 彈琴臺(탄금대)에 背水陣(배수진)을 치고 敵軍(적군)과 對決(대결)하다 慘敗(참패)하자 部下將(부하장) 김여물(金汝岉)과 함께 강물에 投身(투신) 自決(자결)했다.
입(砬)의 아들 3兄弟(형제) 中(중) 長男(장남) 경진(景禛)은 混濁(혼탁)한 光海君(광해군)의 亂政(난정)을 慨嘆(개탄)하여 仁祖反正(인조반정)의 主謀者(주모자)로 先頭(선두)에서 功(공)을 세우고 정사일등공신(靖社一等功臣)에 책록되어 工曹(공조) 參議(참의)와 兵曹(병조) 參判(참판)을 거쳐 兵曹(병조) 判書(판서)에 올라 훈련(訓鍊)·호위(扈衛)·포도(捕盜)의 3隊長(대장)을 兼(겸)하고 丙子胡亂(병자호란) 때는 南漢山城(남한산성) 守備(수비)를 擔當(담당)했다.
특히 그는 아버지가 投身(투신)해서 죽은 江(강)의 물고기를 어찌 먹을 수 있겠느냐 하며 平生(평생)동안 물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右議政(우의정)·左議政(좌의정)을 거쳐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에 封(봉)해지고 領議政(영의정)에 이르러, 정사이등공신(靖社二等功臣)에 封(봉)해진 아우 경우(景裕), 동성군(東城君) 경인과 함께 의절의 무맥을 이었다.
개성 도사(開城都事) 승서(承緖)의 아들 흠(欽)은 仁祖(인조) 때 領議政(영의정)에 올라 정주학자(程朱學者)로 文名(문명)을 떨쳤으며 장유(張維)·이식(李植)과 더불어 朝鮮(조선) 中期(중기) 漢文學(한문학)의 泰斗(태두)로 일컬어졌고, 글씨에도 一家(일가)를 이루어 아우 감(鑑)과 함께 家門(가문)을 빛냈다. 仁祖(인조)로부터 "臣下(신하)가 모두 이같으면 걱정이 없겠다"고 稱讚(칭찬)을 받았던 감(鑑)은 용양위 부사직(龍 衛副司直) 兼(겸) 춘추관 기주관(春秋官記注官)이 되어 앞서 壬辰倭亂(임진왜란)에 불타 없어진 <왕조실록(王朝實錄)>의 재간(再刊)에 參與(참여)했고, 남원부사(南原府使)와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를 歷任(역임)했다.
欽(흠)의 아들 익성(翊聖)은 宣祖(선조)의 딸 정숙옹주(貞淑翁主)와 婚姻(혼인)하여 동양위(東陽尉)에 封(봉)해지고 光海君(광해군) 때 廢母論(폐모론)을 反對(반대)하다가 전리(田里)에 放逐(방축)되었다가 仁祖反正(인조반정) 後(후)에 再(재)登庸(등용)되어 병자호란(丙子胡亂)에 南漢山城(남한산성)으로 王(왕)을 扈從(호종)하여 청군(靑軍)과 계속 싸울 것을 强力(강력)하게 主張(주장)했고, 和議(화의)가 成立(성립)된 後(후)에도 계속 斥和(척화)를 主張(주장)한 <척화오신(斥和五臣)>中(중)의 한 사람으로 심양(瀋陽)에 붙잡혀 갔다.
領議政(영의정) 欽(흠)의 孫子(손자) 최(最 : 東陽尉(동양위) 익성의 아들)는 효종(孝宗) 때 봉교(奉敎)로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兼(겸)하여 <인조실록(仁祖實錄)>編纂(편찬)에 參與(참여)했으며 文章(문장)에 能(능)해 <해동사부(海東辭賦)>에 시부(詩賦)가 전한다.
參判(참판) 익전(翊全 : 欽(흠)의 아들)의 아들 정(晸)은 현종(顯宗) 때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及第(급제)하여 大司諫(대사간)을 거쳐 大司成(대사성)을 歷任(역임)했고, 肅宗(숙종) 때 좌우참찬(左右參贊)과 예조 판서(禮曹判書)·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等(등)을 지냈으며 시문(詩文)에 能(능)하고 글씨에 뛰어났다.
영의정(領議政) 欽(흠)의 曾孫(증손) 만(曼)은 17歲(세) 때 丙子胡亂(병자호란)을 당하여 父母(부모)와 妻(처)를 데리고 강화(江華)에 避難(피난) 갔다가 그 곳에서 어머니와 妻(처) 홍씨(洪氏)가 害(해)를 입고 죽자 그 鬱憤(울분)과 恥辱(치욕)을 가눌 길 없어 죽으려 하였으나 아버지가 살아있어 못죽고 있다가 亂(난)이 平定(평정)되었다.
그는 그 恥辱(치욕)을 몸에 입고 漢陽(한양)의 城門(성문) 안에 들어 설 수 없다고 하여 회덕(懷德)의 송촌(宋村)에 송시열(宋時烈)을 찾아가 學業(학업)을 닦고 부안(扶安) 백연동(白蓮洞)과 진잠(鎭岑) 구봉산(九峰山)에서 野人(야인)生活(생활)을 持續(지속)하였다.
그後(후) 宋時烈(송시열)이 입조(入朝)하여 나라의 重要(중요)한 企劃(기획)에 만(曼)의 智慧(지혜)를 參酌(참작)하고자 여러 번 불렀으나 성(城) 안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으면서 서신(書信)으로서 政事(정사)에 參與(참여)했고, 全國(전국) 各處(각처)에 흩어진 名學者(명학자)들을 찾아 放浪(방랑)하고 名所(명소)마다 찾아가 놀면서도 國政(국정)에 參與(참여)했으므로 <야인판서(野人判書)>로 불리웠다.
그는 臨終(임종) 때도 倭(왜)놈과 한 하늘에 살다 죽으니 地下(지하)에 가서 先親(선친)에게 告(고)할 말이 없다고 怨痛(원통)해하며 숨져 갔다고 한다.
徹底(철저)한 排淸崇明(배청숭명) 主義者(주의자)인 민일(敏一)의 아들 상(尙)은 丙子胡亂(병자호란) 때 王族(왕족)의 護衛職(호위직)을 맡아
江華島(강화도)에 避難(피난)갔는데 敵(적)이 臨迫(임박)해오자 호의의 臣(신)들이 모두 도망가고 혼자 世子嬪(세자빈)을 지키고 있었다.
이 때 淸兵(청병)이 世子嬪(세자빈)에게 接近(접근)하여 그들의 將臣(장신)에게 拜禮(배례)시킴으로써 屈伏(굴복)의 禮(예)를 갖추도록 强要(강요)하자, 表情(표정)하나 흐트리지 않고 서있던 그는 빈(嬪)의 侍從(시종)에게 火口(화구)를 달구어 오라시키고 그것을 빈(嬪)이 脅迫(협박)받고 있는 연(筵 : 임금王(왕)이 타는 가마의 하나) 속에 넣어주며 自決(자결)을 勸(권)하였다. 그리고 빈(嬪)의 죽음을 確認(확인)한 다음 自己(자기)도 따라 自決(자결)할 作定(작정)이었다. 많은 婦女子(부녀자)들의 自決(자결)을 보아온 淸兵(청병)은 이에 겁을 먹고 그 屈辱(굴욕)拜禮(배례)를 斷念(단념)하고는 그저 身邊(신변)만을 保護(보호)토록 시켰다.
이렇게
世子嬪(세자빈)을 救濟(구제)해낸 상(尙)에게, 世子嬪(세자빈)에게 죽음을 强要(강요)했다는 謀略(모략)까지 곁들여 罪目(죄목)을 씌우려 하자 스스로 流配(유배)길을 택하여 原州(원주)로 내려가 草家(초가) 두 칸을 짓고 사람의 來往(내왕)을 謝絶(사절)했다고 한다. 그는 그 곳에서 『부음록 』3券(권)과『 휘언』두 篇(편)을 著述(저술)하여 後孫(후손)에게 傳(전)했다고 하며, 상의 아들 직간(直諫)으로 當代(당대)에 百姓(백성)들의 속을 후련하게 했던 명규(命圭 : 현종(顯宗) 때 集議(집의)를 歷任(역임)하였다.
當代(당대)의 儒宗(유종)으로 禮學(예학)의 거두였던 석학(碩學) 박세채(朴世采)에게 學問(학문)을 連馬(연마)하여 西人(서인)으로서 肅宗(숙종) 때 대사헌(大司憲)에 올랐던 완(玩 : 여정의 아들)은 吏曹(이조) 判書(판서)를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올라 희빈 장씨(禧嬪 張氏)의 處罰(처벌)을 主張(주장)했고 北漢山城(북한산성)의 築造(축조)를 建議(건의)하여 王(왕)의 承諾(승낙)을 받았으나 一部(일부)의 反對(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領議政(영의정)에 올라 평천군(平川君)에 封(봉)해졌다.
英祖(영조)
英祖(영조) 때 謁聖文科(알성문과)에 及第(급제)했던 만(晩)은 정자를 거쳐 실록청 도청낭청(實錄廳都廳郎廳)이 되었다가 丁未(정미)換局(환국)으로 小論(소론)이 得勢(득세)하자 罷職(파직)당했으나 다시 登用(등용)되어 이조(吏曹)와 호조(戶曹)의 判書(판서)를 歷任(역임)하고 편수당상으로 『闡義昭鑑(천의소감)』을 編纂(편찬)했으며, 左議政(좌의정)을 거쳐 領議政(영의정)을 지내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使)에 이르러, 亦是(역시) 領議政(영의정)을 歷任(역임)한 耆老所(기로소)에 들어간 아우회(晦)와 함께 家門(가문)을 代表(대표)했다.
그밖의 人物(인물)로는 肅宗(숙종) 때 봉상시 첨정(奉常寺僉正)을 지내고 文章(문장)과 詩文(시문)에 卓越(탁월)했던 유한(維翰)과 英祖(영조) 때 大司憲(대사헌)을 歷任(역임)한 위(暐)가 有名(유명)했고, 어영대장(御榮大將)을 거쳐 工曹(공조) 參判(참판)을 지낸 대겸(大謙)과 청안한 文章(문장)과 書藝(서예)로 名望(명망)이 높았던 작(綽)은 詩書畫(시서화)에 能(능)하여 삼절로 이름났던 위(緯 : 參判(참판) 연승의 아들)와 함께 이름을 떨쳤으며, 판관(判官) 광온(光蘊)의 아들 재식(在植)은 헌종(憲宗) 때 大提學(대제학)을 歷任(역임)하여, 高宗(고종) 때 지중추원사(知中樞院使)에 오른 명순(命淳), 左議政(좌의정) 응조(應祖: 同知敦寧府事(동지돈령부사) 상현의 아들), 판삼군부사(判三軍府使) 헌(櫶), 판소리 大家(대가) 재효(在孝), 壬午軍亂(임오군란)의 責任(책임)을 지고 荏子島(임자도)에 圍籬安置(위리안치) 되었던 정희(正熙), 비서원승(秘書院丞)과 동지돈령원사(同知敦零院事)를 지낸 두선(斗善), 대동학회장과 수학원장을 歷任(역임)한 기선(箕善), 嶺南(영남)地方(지방)의 義兵將(의병장)으로 活躍(활약)한 돌석(乭錫), 慶北(경북) 義勇(의용)團長(단장) 태식(泰植) 等(등)과 함께 名門(명문)의 家統(가통)을 지켰다.
韓末(한말)에 와서 특히 家門(가문)을 빛낸 人物(인물)로는 獨立軍(독립군) 養成(양성)에 全力(전력)했던 팔균(八均)이 土匪(토비)의 襲擊(습격)을 받고 殉節(순절)했으며, 3·1節(절) 記念(기념)放送(방송) 事件(사건)과 반동비밀결사의 顧問(고문)으로 推戴(추대)되었다는 嫌疑(혐의)로 逮捕(체포)되어 服役(복역)中(중) 6·25 때 銃殺(총살)당한 석구(錫九)는 谷城(곡성) 出身(출신)의 義兵(의병) 정백(正栢), 內藏寺(내장사)에서 再起(재기)를 圖謀(도모)하다가 死刑(사형)당한 덕균(德均), 光復會(광복회) 初代(초대)會長(회장) 덕영(德永),『심경』이란 雜誌(잡지)를 發刊(발간)하여 獨立運動(독립운동)에 앞장섰던 현구(鉉九), 光復軍(광복군) 참리부 내무사랑 우현(禹鉉)이 代表的(대표적)이며, 制憲國會(제헌국회) 議員(의원)에 當選(당선)되어 初代(초대) 부의장(副議長)을 지내고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 最古(최고)委員(위원)과 民主黨(민주당) 代表(대표)最古(최고)委員(위원)으로 野黨(야당)을 領導(영도)했던 익희(翼熙 : 장례원경 단의 아들)는 自由黨(자유당) 독제치하에 民主黨(민주당) 公薦(공천)으로 대통령(大統領)에 出馬(출마)하여 名門(명문) 平山(평산) 辛氏(신씨)의 가맥을 더욱 빛냈다.
平山申氏(평산신씨)는 全體(전체) 辛氏(신씨)의 70%以上(이상)을 차지하는 것으로 推算(추산)되는 現存(현존)하는 辛氏(신씨) 가운데 大本(대본)이며, 歷史上(역사상) 家門(가문)을 빛낸 人物(인물)들도 平山申氏(평산신씨)의 後孫(후손)들이 大多數(대다수)를 차지한다. 신(申)씨 本貫(본관)은 평산(平山) ·고령(高靈) ·아주(鵝州) ·영해(寧海) ·은풍(殷豊) ·천안(天安) ·이천(利川) ·신천(信川) ·곡성(谷城) ·삭녕(朔寧) ·창주(昌州) 等(등) 50여 本(본)이 傳(전)한다. 그 中(중) 平山申氏(평산신씨)가 약 70 % 以上(이상), 高靈申氏(고령신씨)가 약 20 %를 차지한다. 朝鮮時代(조선시대)에 11名(명)의 上臣(상신)(政丞(정승), 5名(명)의 大提學(대제학), 20名(명)의 判書(판서), 302名(명)의 文科(문과) 及第者(급제자)를 輩出(배출)하였다.
參考(참고)로 같은 한글의 辛氏(신씨)는 영산, 영월 신씨(靈山, 寧越 辛氏), 거창 신씨 (居昌 愼氏) 等(등)이 있다.
辛氏(신씨)는 1985년도 國勢調査(국세조사)에서는 人口(인구) 62萬(만) 950名(명)(平山申氏(평산신씨) 460,238名(명)으로 全國(전국) 人口(인구) 構成(구성)비는 1.5 %로 274姓(성) 中(중)에서 第(제)12位(위)였다.
平安北道(평안북도) 寧邊郡(영변군)
忠淸南道(충청남도) 舒川郡(서천군), 禮山郡(예산군)
全羅北道(전라북도) 任實郡(임실군)
慶尙北道(경상북도) 漆谷郡(칠곡군)
慶尙南道(경상남도) 密陽市(밀양시), 南海郡(남해군)
主要(주요)人物(인물)
신군평(申君平), 申愷(신개), 定妃(정비)辛氏(신씨), 신영(申瑛), 신상(申商), 신명인(申命仁), 申師任堂(신사임당), 신호(申浩), 신립(申砬), 신흠(申欽), 申鑑(신감), 申景珍(신경진), 申命圭(신명규), 申銋(신임), 申琓(신완), 申晩(신만), 申維翰(신유한), 신위(申緯), 신재식(申在植), 신명순(申命淳), 申應朝(신응조), 神憲(신헌), 申箕善(신기선), 신응희(申應熙), 申載永(신재영), 申錫愚(신석우), 신우선(申佑善), 申羽均(신우균), 신광희(申光熙), 신돌석(申乭石), 申泰健(신태건), 申鉉九(신현구), 신태영(申泰泳),
신익희(申翼熙), 晨光(신광)균, 신기석(申基碩), 申鉉碻(신혁확),신응균, 신상철, 신영균(申永均), 신구, 신낙균(申樂均), 신동우, 신상진, 신의진, 신승훈, 신현준(申鉉俊), 신대철(申大澈), 신해철, 신동엽(申東曄), 신하균(申河均), 신명철, 신현탁, 신세경, 신지민, 신혜정, 신아영, 신세휘, 신혜진, 더콰이엇, 신혜선
신익희(申翼熙),
人口(인구)(2000년)~496,874명 (14위)
평산 신씨(平山 申氏)는 黃海道(황해도) 平山郡(평산군)을 本貫(본관)으로 하는 韓國(한국)의 姓氏(성씨)이다. 始祖(시조)는 高麗(고려) 開國功臣(개국공신) 신숭겸(申崇謙)이다.
平山(평산) 申氏(신씨)의 始祖(시조)는 高麗(고려)의 開國(개국)1等(등)臣(신)인 신숭겸(申崇謙)이다. 申崇謙(신숭겸)의 본래 이름은 삼능산(三能山)이며, 全羅道(전라도) 곡성현(谷城縣) 出身(출신)이다. 태조(太祖) 王建(왕건)에게 平山(평산)에서 신(申)씨 性(성)을 사성(賜姓)받았다. 泰封(태봉)의 將軍(장군)으로 있다가 배현경(裵玄慶), 홍유(洪儒), 복지겸(卜智謙) 등과 함께 弓裔(궁예)를 逐出(축출)하고 왕건(王建)을 皇帝(황제)로 推戴(추대)하여 高麗(고려)를 開國(개국)하는 데 決定的(결정적)인 役割(역할)을 하였다. 927년(太祖(태조) 천수(天授) 10年(년) 八公山(팔공산)에서 甄萱(견훤)과의 戰鬪(전투) 中(중) 戰死(전사)하였다. 이에 太祖(태조) 王建(왕건)은 殉節(순절)한 申崇謙(신숭겸)에게 벽상호기위태사개국공삼중대광의경대광위이보지절저정공신(壁上虎騎衛太師開國公三重大匡毅景戴匡衛怡輔砥節底定功臣)을 追封(추봉)하였다. 始祖(시조) 申崇謙(신숭겸)의 墓所(묘소)인 신장절공묘역(申壯節公墓域)은 江原道(강원도) 春川市(춘천시) 서면 방동리에 있고 陰曆(음력) 3월 3일과 9월 9일에 鄕祠(향사)한다.
分派(분파)
군수공파(郡守公派), 참판공파(參判公派), 판윤공파(判尹公派), 감찰공파(監察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판사공파(判事公派), 이상공파(貳相公派), 전서공파(典書公派), 제정공파(齊靖公派), 온수감공파(溫水監公派), 대제학공파(大提學公派), 사간공파(思簡公派), 한성윤공파(漢城尹公派), 정언공파(正言公派), 문희공파(文僖公派), 장령공파(掌令公派), 봉상윤공파(奉常尹公派), 밀직공파(密直公派) 등 17個(개) 分派(분파)가 있다.
人物(인물)
平山(평산) 申氏(신씨)는 朝鮮時代(조선시대) 文科(문과) 及第者(급제자) 178名(명), 武科(무과) 及第者(급제자) 90名(명)을 輩出(배출)하였다.
신영(申瑛, 1499년(연산군 5년) ~ 1559년) : 朝鮮(조선) 明宗(명종) 때 戶曹判書(호조판서), 漢城府右尹(한성부우윤)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년 ∼ 1551년) : 朝鮮(조선) 中期(중기)의 女流(여류)藝術家(예술가)
신립(申砬) 將軍(장군)
신립(申砬, 1546년 ∼ 1592년) : 朝鮮(조선) 中期(중기)의 武臣(무신). 北邊(북변)에 侵入(침입)한 尼湯介(이탕개)를 擊退(격퇴)하고 豆滿江(두만강)을 건너가 野人(야인)의 소굴을 掃蕩(소탕)하고 凱旋(개선)했다. 咸鏡北道(함경북도)兵馬節度使(병마절도사), 우방 御使(어사), 中樞府同知事(중추부동지사), 漢城府(한성부) 判尹(판윤)을 지냈고 壬辰倭亂(임진왜란) 때 忠州(충주) 彈琴臺(탄금대)에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倭軍(왜군)과 對決(대결)했으나 敗(패)했다.
朝鮮(조선) 제일의 文章家(문장가) 中(중 한 분이신 상촌(象村) 신흠(申欽)의 칠언절구 漢詩(한시)
桐千年老恒藏曲 (동천년노항장곡) : 오동나무는 천년을 늙어도 항상 그 곡조를 간직하고,
梅一生寒不賣香 (매일생한불매향) : 매화는 한평생 추운 겨울에 꽃을 피우지만 향기를 팔지 않는다.
月到千虧餘本質 (월도천휴여본질) : 달은 천번을 이지러지더라도 그 본래의 성질이 남아 있으며,
柳經百別又新枝 (유경백별우신지) : 버드나무는 백번 꺾이더라도 또 새로운 가지가 올라온다.
신흠(申欽, 1566년 ~ 1628년) : 朝鮮(조선) 中期(중기)의 文臣(문신). 東人(동인)의 排斥(배척)을 받았으나 宣祖(선조)의 信望(신망)을 받았다. 뛰어난 文章力(문장력)으로 大明(대명)外交文書(외교문서)의 制作(제작), 詩文(시문)의 整理(정리), 各宗(각종) 依例(의례)文書(문서) 製作(제작)에 참여하였다. 程朱(정주)學者(학자)로 이름이 높아, 이정구(李廷龜), 장유(張維), 이식(李湜)과 함께 漢文學(한문학)의 泰斗(태두)로 일컬어진다. 1651년에 仁祖(인조) 廟庭(묘정)에 配享(배향)되었다.
신임(申銋, 1639년 ~ 1725년) : 朝鮮(조선) 中期(중기)의 文臣(문신). 1657년(孝宗(효종) 8年(년) 進士試(진사시)에 合格(합격), 1680년(肅宗(숙종) 6年(년) 義禁府都事(의금부도사)에 除授(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다가 孝宗陵(효종릉)의 事件(사건)으로 귀양간 아버지의 抑鬱(억울)함을 격쟁(擊錚)하여 放還(방환)하게 한 뒤, 1686년 別試文科(별시문과)에 應試(응시)하여 兵科(병과)로 及第(급제)하였다. 전적(典籍)·戶曹佐郎(호조좌랑)·京畿道(경기도)도사·정언(正言) 等(등)을 거쳐 1696年(년) 지평(持平)이 되었다. 이 때 서문중(徐文重)이 政丞(정승)이 되자,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閔氏)가 復位(복위)될 때 희빈 장씨(禧嬪張氏)를 두둔하려 했다고 彈劾(탄핵)했다가 王(왕)의 노여움을 사 鏡城判官(경성판관)으로 左遷(좌천)되었다. 그 뒤 곧 兵曹正郎(병조정랑) 等(등)을 거쳐 延安府使(연안부사), 水原府使(수원부사), 黃海監司(황해감사)·大司諫(대사간)·吏曹參議(이조참의)를 歷任(역임)하고 開城留守(개성유수)로 任命(임명)되었으나 朝廷(조정)과 마찰을 빚어 罷職(파직)되었다. 그 뒤 六曹(육조)의 여러 벼슬과 都承旨(도승지)·大司憲(대사헌) 등을 歷任(역임)하고, 1718年(년) 知中樞府事(지중추부사)가 되면서 耆老所(기로소)에 들어갔으며 參贊(참찬)과 工曹判書(공조판서)를 歷任(역임)하였다. 景宗(경종)이 卽位(즉위)한 뒤 病弱(병약)하자 연잉군(延礽君)을 세제(世弟)로 冊封(책봉)하고 代理聽政(대리청정)하게 하려고 世子(세자)청정의 根據(근거)를 『世宗實錄(세종실록)』에서 抄出(초출)하였다. 1722년(景宗(경종) 2年(년) 辛壬獄死(신임옥사)가 일어나자 小論(소론)을 꾸짖고 東宮(동궁)을 保護(보호)하는 訴(소)를 올려 濟州島(제주도)에 圍籬安置(위리안치)되었다. 英祖(영조) 卽位(즉위) 후 赦免(사면)되어 돌아오는 길에 海南(해남)에서 죽었다. 領議政(영의정)에 追贈(추증) 되었으며, 諡號(시호)는 충경(忠景)이다.
신억[ 申檍 ] 미상 ~ 未詳(미상)
本貫(본관)은 평산(平山). 1864년(高宗(고종) 1年(년) 左議政(좌의정) 이유원(李裕元)이 조대비(趙大妃)에게, 治績(치적)이 뛰어나 守令職(수령직)을 맡을 만한 人才(인재) 3人(인)을 推薦(추천)할 때 전 文川郡守(문천군수) 신억(申檍)도 함께 推薦(추천)되었다.
곧 公忠道觀察使(공충도관찰사)에 任命(임명)되어 淸州(청주) 상당산성(上黨山城)을 大大的(대대적)으로 補修(보수)하였고, 腐敗(부패)한 鄕里(향리)의 肅正(숙정)과 徹底(철저)한 재결(災結) 照査(조사)를 通(통)하여 善政(선정)을 하였다.
그 해 校理(교리) 강장환(姜長煥)이 永同郡守(영동군수)의 不正(부정)을 誣告(무고)한 事件(사건)이 일어나 강장환(姜長煥)은 流配(유배)되었으나, 신억(申檍)은 외신(外臣)으로서 내신(內臣)의 處罰(처벌)을 論(논)하였다고 하여 譴責(견책)당하였다. 뛰어난 治績(치적)으로 左議政(좌의정) 김병학(金炳學)에 의하여 任期(임기) 以後(이후)에도 連任(연임)하였다.
그 뒤 또 官衙(관아)의 財政(재정)을 備蓄(비축)하고 軍器(군기)를 補修(보수)한 功(공)으로 가자(加資)되었다. 1866年(년) 遞任時(체임시) 남연군(南延君) 墓(묘)의 祭祀(제사)를 主管(주관)하고 祭文(제문)을 찬진(撰進)하라는 王命(왕명)을 받았다. 1873年(년) 工曹判書(공조판서)에 除授(제수)되었다. 諡號(시호)는 효정(孝貞)이다.
신재식[ 申在植 ] 1770 ~ ?
本貫(본관) 평산(平山). 字(자) 중립(仲立). 號(호) 취미(翠微). 諡號(시호) 문청(文淸). 판관(判官) 광온(光蘊)의 아들. 1805년(순조 5) 增廣文科(증광문과)에 兵科(병과)로 及第(급제)하여 弘文館(홍문관) 벼슬을 거쳐 1818년 大司諫(대사간)이 되었다. 이어 江原道(강원도)觀察使(관찰사) ·吏曹參判(이조참판)을 거쳐 1826년 동지부사(冬至副使)로 淸(청)나라에 다녀왔다. 1831년 부제학(副提學)으로 咸鏡道(함경도) 마천령(摩天嶺) 以北(이북)에서의 전화(錢貨) 使用(사용)의 禁止(금지)를 上疏(상소)하여 實施(실시)되었다. 1835년(헌종(憲宗) 1年(년)大提學(대제학), 이듬해 冬至使(동지사)로 淸(청)나라에 다녀온 後(후)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 ·지경연사(知經筵事) ·工曹判書(공조판서) ·京畿道觀察使(경기도관찰사) ·大司憲(대사헌) ·吏曹判書(이조판서) 等(등)을 歷任(역임)하였다. 文集(문집)에 《취미집(翠微集)》이 있다.
신회[ 申晦 ] 1706년(肅宗(숙종) 32年(년)~ 未詳(미상)
本貫(본관)은 평산(平山). 字(자)는 여근(汝根). 司諫(사간) 신명규(申命圭)의 曾孫(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단(申鍴)이고, 아버지는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신사철(申思喆)이며, 어머니는 이규일(李揆一)의 딸이다.
1741년(英祖(영조) 17年(년)進士(진사)가 되고, 1743년 謁聖文科(알성문과)에 兵科(병과)로 及第(급제)하였다. 그 해 수찬(修撰)으로 登用(등용)되고 1746년 校理(교리)가 되었다. 1750년 承旨(승지)가 되었으나, 그 해 司馬試(사마시)의 合格者(합격자) 發表(발표)에 관한 節次(절차)를 論議(논의)하는 過程(과정)에서 그의 主張(주장)이 公正性(공정성)을 잃었다 하여 臺諫(대간)의 彈劾(탄핵)을 받아 종성에 流配(유배)되었다.
그 뒤 流配(유배)가 풀려 돌아와서 근신하던 中(중) 1755년 兵曹判書(병조판서)에 復職(복직)되었다. 이듬해 禮曹判書(예조판서)가 되었다. 1762년 英祖(영조)가 사도세자(思悼世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일 때 이에 積極(적극) 동조하였다. 그 뒤 黃海道觀察使(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다시 吏曹判書(이조판서)로 들어왔다. 1772년 左議政(좌의정)이 되고 이어서 領議政(영의정)이 되었다. 그 뒤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776년 英祖(영조)가 죽고 思悼世子(사도세자)의 아들인 正祖(정조)가 卽位(즉위)하자 王(왕)의 죽음을 알리고 諡號(시호)를 請(청)하며 王位(왕위)繼承(계승)을 告(고)하는 고부 겸 청시승습사(告訃兼請諡承襲使)로 任命(임명)되었으나, 그가 일찍이 思悼世子(사도세자)를 죽이는 일에 同調(동조)하였다 하여 正祖(정조)의 노여움을 사서 罷職(파직)되었다. 그 뒤 1784년(正祖(정조) 8年(년)官爵(관작)이 回復(회복)되었다.
신사철 [ 申思喆 ] 1671 ~ 1759
本貫(본관)은 평산(平山)이고 字(자)는 명서(明敍)이다. 工曹佐郎(공조좌랑)으로 在職(재직)하던 中(중)인 1709년(肅宗(숙종) 35年(년)謁聖文科(알성문과)에 兵科(병과)로 及第(급제)하였다. 이듬해에 正言(정언)이 되고 이후 老論(노론)의 후원하라 吏曹佐郎(이조좌랑)·校理(교리)·大司諫(대사간)·咸鏡道觀察使(함경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전라도관찰사) 等(등)을 지냈다.
1721년(景宗(경종) 1年(년)景宗(경종) 卽位(즉위) 後(후)에도 吏曹參議(이조참의)·左參贊(좌참찬)·都承旨(도승지) 等(등)을 지냈으나, 신임사화(辛壬士禍)로 小論(소론)이 執權(집권))하자 장붕익(張鵬翼)·김재로(金在魯) 等(등)과 함께 老論(노론) 김창집(金昌集)의 당(黨)으로 연루되어 咸鏡道(함경도) 종성(鐘城)에 流配(유배)되었다. 英祖(영조) 卽位(즉위) 後(후) 老論(노론)이 執權(집권)하자 大司憲(대사헌)과 戶曹判書(호조판서)·禮曹判書(예조판서) 等(등) 政權(정권)의 核心(핵심)에 起用(기용)되었다.
1727년(英祖(영조) 3年(년)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다시 老論(노론)이 追放(추방)되자 罷職(파직)되었다가 이듬해 登用(등용)되어 강화유수(江華留守)·禮曹判書(예조판서)·刑曹判書(형조판서) 等(등)을 지냈으며, 1745년 判中樞府事(판중추부사)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었다. 만(晩)과 회(晦)의 두 아들이 政丞職(정승직)에 올라 남들의 부러움을 샀다. 國立(국립)中央(중앙)博物館(박물관)에 影幀(영정)이 所藏(소장)되어 있다.
신익성[ 申翊聖 ] 1588년(宣祖(선조) 21年(년) ~ 1644년(仁祖(인조) 22年(년)
丙子胡亂(병자호란) 때의 척화오신(斥和五臣)의 한 사람이다. 本貫(본관)은 평산(平山). 字(자)는 군석(君奭), 號(호)는 낙전당(樂全堂)·동회거사(東淮居士). 右參贊(우참찬) 신영(申瑛)의 曾孫(증손)으로, 할아버지는 開城都事(개성도사) 신승서(申承緖)이고, 아버지는 領議政(영의정) 신흠(申欽)이다. 어머니는 兵馬節度使(병마절도사) 이제신(李濟臣)의 딸이다. 宣祖(선조)의 부마(駙馬)이다. 정숙옹주(貞淑翁主)와 婚姻(혼인)하여 동양위(東陽尉)에 封(봉)해졌다. 壬辰倭亂(임진왜란) 때는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等(등)에 올랐으며 1606년(宣祖(선조) 39年(년)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이 되었다. 光海君(광해군) 때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를 反對(반대)하다가 追放(추방)되어 쫓겨났다. 1623년(仁祖(인조) 1年(년) 仁祖反正(인조반정) 後(후) 再登庸(재등용)되어 이괄(李适)의 亂(난)이 일어나자 王命(왕명)으로 3궁(宮)을 호위(扈衛)하였다. 1627년 丁卯胡亂(정묘호란) 때는 世子(세자)를 모시고 全州(전주)로 避(피)하였다. 1636년 丙子胡亂(병자호란) 때는 仁祖(인조)를 扈從(호종)하여 끝까지 城(성)을 지켜 淸軍(청군)과 싸울 것을 主張(주장)하였다. 주화파(主和派) 大臣(대신)들이 世子(세자)를 淸(청)나라에 볼모로 보내자고 하자 칼을 뽑아 그들을 威脅(위협)하기까지 하였다. 扈從(호종)의 功(공)으로 宰相(재상)과 같은 禮遇(예우)를 받고, 1638년에는 五衛都摠府都摠管(오위도총부도총관)을 除授(제수)했으나 辭退(사퇴)하였다. 和議(화의)가 成立(성립)된 뒤 삼전도비사자관(三田渡碑寫字官)에 任命(임명)되었으나 이를 拒否(거부), 辭退(사퇴)하였다. 1642년 明(명)나라와 密貿易(밀무역)을 하다 淸(청)나라로 잡혀간 宣川府使(선천부사) 이계(李烓)가 朝鮮(조선)이 明(명)나라를 支持(지지)하고 淸(청)나라를 排斥(배척)한다고 告(고)하여, 최명길(崔鳴吉)·김상헌(金尙憲)·이경여(李敬輿) 等(등)과 함께 심양(瀋陽)에 붙잡혀가 抑留(억류)당했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소현세자(昭顯世子)의 周旋(주선)으로 풀려나와 歸國(귀국)한 뒤 詩(시)·書(서)로써 歲月(세월)을 보냈다. 諡號(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신점[ 申點 ] 1530 ~ ?
本貫(본관) 平山(평산). 字(자) 성여(聖與). 1564년(明宗(명종) 19年(년) 生員試(생원시)와 文科(문과)에 及第(급제)하고 예문관(藝文館)과 삼사(三司)의 官職(관직)을 두루 歷任(역임)하였으며, 경연관(經筵官)으로도 活躍(활약)하였다. 義州牧使(의주목사) ·江原監司(강원감사) ·承旨(승지) ·兵曹參議(병조참의) ·戶曹參議(호조참의) ·刑曹參判(형조참판) ·刑曹判書(형조판서) ·江陵府使(강릉부사) ·義禁府判事(의금부판사) 等(등)을 歷任(역임)하였다. 1592년에는 사은사(謝恩使)로 明(명)나라에 派遣(파견)되었다가 壬辰倭亂(임진왜란)이 勃發(발발)하자 兵部尙書(병부상서) 석성(石星)을 움직여 明(명)나라 朝廷(조정)의 反對論(반대론)을 물리치고 요동(遼東)의 軍隊(군대) 3,000名(명)을 派遣(파견)하게 하였으며, 歸國(귀국) 後(후)에도 전란(戰亂)의 打開(타개)에 功(공)을 세워 선무공신(宣武功臣) 2等(등)에 錄勳(녹훈)되었다. 기묘사화(己卯士禍)로 處罰(처벌)된 하정(河挺)과 정여립(鄭汝立)의 옥사(獄事)로 犧牲(희생)된 정언신(鄭彦信)의 誣告(무고)함을 主張(주장)하여 復官(복관)시키는 等(등)의 政治活動(정치활동)을 하였다. 그 밖에 女眞族(여진족)에 對備(대비)하여 國防(국방)을 强化(강화)하고 조운항로(漕運航路)를 開發(개발)하자는 政策(정책)들을 建議(건의)하였으며, 父母(부모)의 喪(상)을 벗은 後(후) 담제(禫 祭) 前(전)까지의 갓에 대한 制度(제도)가 定(정)해지지 않았던 것을 경연에서 백포립(白布笠)으로 하자고 主張(주장)하여 그대로 決定(결정)하게 하였다. 實錄(실록)에서는 財物(재물)을 貪(탐)했다는 批判(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신잡 [ 申磼 ] 1541년(中宗(중종) 36年(년) ~ 1609년(光海君(광해군) 1年(년)
本貫(본관)은 평산(平山). 資(자)는 백준(伯俊), 號(호)는 독송(獨松). 주부(主簿) 신말평(申末平)의 曾孫(증손)으로, 할아버지는 刑曹判書(형조판서) 신상(申鏛)이고, 아버지는 신화국(申華國)이고, 어머니는 윤회정(尹懷貞)의 딸이다. 이산해(李山海)의 門人(문인)이다. 1583년(宣祖(선조) 1年(년) 庭試文科(정시문과)에 兵科(병과)로 及第(급제)하여 정언(正言)·지평(持平)·右副承旨(우부승지)를 거쳐 吏曹參判(이조참판)·刑曹參判(형조참판)을 지냈다. 壬辰倭亂(임진왜란) 때에는 備邊司堂上(비변사당상)으로 活動(활동)하였고, 이듬해에는 兵曹參判(병조참판)을 거쳐 平安道兵馬節度使(평안도병마절도사)로 赴任(부임)하였으나, 管內(관내) 鐵山郡(철산군)에 脫獄(탈옥)事件(사건)이 發生(발생)하여 그 責任(책임)으로 罷職(파직)되었다. 1593년 다시 起用(기용)되어 密陽府使(밀양부사)·刑曹判書(형조판서)를 거쳐 특진관(特進官)·同知中樞府事(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600년에는 戶曹判書(호조판서)를 거쳐 兵曹判書(병조판서) 兼(겸) 世子賓客(세자빈객)이 되었다. 이어 咸鏡道觀察使(함경도관찰사)·빙고제조(氷庫提調) 等(등)을 歷任(역임)하고 호성공신(扈聖功臣) 2等(등)에 책록되고 평천부원군에 封(봉)해졌으며, 1606년 開城留守(개성유수)를 끝으로 官職(관직)에서 물러났다. 죽은 뒤에 진천에 祠堂(사당)이 세워지고 賜額(사액)되었으며, 領議政(영의정)에 追贈(추증)되었다. 諡號(시호)는 충헌(忠獻)이다.
신입 [ 申砬 ] 1546년(明宗(명종) 1年(년) ~ 1592년(宣祖(선조) 25年(년)
本貫(본관)은 평산(平山)이고 諡號(시호)는 충장(忠壯)이다. 1546년 明宗(명종) 1年(년)에 出生(출생)하였는데 아버지는 生員(생원)을 지낸 신화국(申華國)이고 할아버지는 吏曹判書(이조판서)를 지낸 신상(申鏛)이다. 어린시절부터 글공부 보다는 武藝(무예)를 좋아했다고 傳(전)해지며 1567년(宣祖(선조) 卽位年(즉위년) 22歲(세) 때 武科(무과)에 及第(급제)하였다. 宣傳官(선전관)을 거쳐 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 ·경력(經歷)을 지내고 진주판관(晉州判官)이 되었다. 1583年(년) 온성부사(穩城府使)가 되어 北邊(북변)에 侵入(침입)해온 이탕개(尼湯介)를 擊退(격퇴)하고 豆滿江(두만강)을 건너가 야인(野人)의 巢窟(소굴)을 掃蕩(소탕)하고 50여 名(명)의 목을 베고 凱旋(개선)하였다. 以後(이후) 尼湯介(이탕개)가 1萬(만)名(명)의 軍事(군사)를 이끌고 또다시 경원부(慶源府)와 안원보(安原堡)를 쳐들어오자 이를 물리치며 육진(六鎭)을 防禦(방어)하는데 功(공)을 세웠다. 1584년 野人(야인)을 물리친 功勞(공로)로 咸鏡北道兵馬節度使(함경북도병마절도사)에 올랐다. 1587년 흥양(興陽)에 倭寇(왜구)가 侵入(침입)하자 우방어사(右防禦使)가 되어 軍事(군사)를 引率(인솔)하여 討伐(토벌)에 나섰다가 이미 倭寇(왜구)들이 달아나는 바람에 撤收(철수)하고 돌아오던 中(중) 良家(양가)의 처녀를 妾(첩)으로 삼았다는 삼사(三司)의 彈劾(탄핵)으로 罷職(파직)되었다. 하지만 곧 咸鏡南道兵馬節度使(함경남도병마절도사)에 다시 登用(등용)되었으나, 卒兵(졸병)을 慘殺(참살)한 罪(죄)로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의 한직으로 轉任(전임)되었다. 1590년 平安道兵馬節度使(평안도병마절도사)에 補職(보직)되고 이듬해 漢城府(한성부) 判尹(판윤)을 거쳤으며, 1592년 壬辰倭亂(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도순변사(三道都巡邊使)로 任命(임명)되어 忠州(충주)로 내려가 防禦線(방어선)을 구축했다. 倭敵(왜적)의 數(수)가 많고 對敵(대적)하기 힘든 軍事力(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後退(후퇴)하지 않고 충주(忠州) 탄금대(彈琴臺)에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北上(북상)해오는 倭軍(왜군)과 戰鬪(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軍事力(군사력)의 劣勢(열세)로 倭將(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大軍(대군)에 包圍(포위)되어 敗北(패배)하였고 많은 良民(양민)들이 虐殺(학살)되었다. 部下(부하) 將帥(장수)인 김여물(金汝岉)과 함께 강물에 投信(투신) 自決(자결)하였다. 領議政(영의정)에 追贈(추증)되었다.
신경진 [ 申景禛 ] 1575년 ~ 1643년
本貫(본관)은 평산(平山). 字(자)는 군수(君受). 서울(Seoul:漢陽(한양) 出身(출신). 기묘명신(己卯名臣) 상(鏛)의 曾孫(증손)으로, 할아버지는 生員(생원) 화국(華國)이고, 아버지는 도순변사(都巡邊使) 입(砬)이다. 경유(景裕)·경인(景禋)의 兄(형)이다. 壬辰倭亂(임진왜란) 때 전망인(戰亡人 : 戰爭(전쟁)에 參與(참여)하여 죽은 者(자)의 아들이라 하여 宣傳官(선전관)으로 起用(기용)되었고, 五衛都摠府都事(오위도총부도사)로 轉補(전보)되어 武科(무과)에 及第(급제)하였다. 그 뒤 泰安郡守(태안군수)·潭陽府使(담양부사)를 거쳐 釜山僉使(부산첨사)가 되었으나 日本(일본)과의 和議(화의)에 反對(반대)하고, 왜사(倭使)의 接待(접대)를 拒否(거부)하여 遞任(체임)되었다.
이어 甲山府使(갑산부사)를 거쳐 함경남도병마우후(咸鏡南道兵馬虞候)로 轉補(전보)되자, 體察使(체찰사) 이항복(李恒福)의 要請(요청)으로 慶源府使(경원부사)와 碧潼郡守(벽동군수)가 되었다.
光海君(광해군)이 卽位(즉위)하여 대북파(大北派)가 政權(정권)을 掌握(장악)하자 官職(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中(중) 1620년(光海君(광해군) 12年(년) 김류(金瑬)·이귀(李貴)·최명길(崔鳴吉)·구인후(具仁垕) 等(등)과 謀議(모의), 그와 姻戚(인척) 關係(관계)에 있는 능양군(綾陽君 : 仁祖(안조)을 推戴(추대)하기로 하였다.
그 뒤 機會(기회)를 노리다가 1622년 이귀(李貴)가 平山府使(평산부사)가 되자 그 중군(中軍)이 되기를 自願(자원)하여 巨事(거사) 準備(준비)를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事前(사전)에 漏洩(누설)되어 효성령별장(曉星嶺別將)으로 쫓겨나 1623년의 仁祖反正(인조반정)에는 直接(직접) 參與(참여)하지 못하였다.
反正(반정) 直後(직후) 王(왕)의 特命(특명)으로 工曹參議(공조참의)·兵曹參知(병조참지)에 任命(임명)되었고, 곧 兵曹參判(병조참판)이 되어 훈련도감(訓鍊都監)·호위청(扈衛廳)·捕盜廳(포도청)의 隊長(대장)을 兼(겸)하여 王室(왕실) 安全(안전)의 責任(책임)을 맡았다.
反正(반정)에 따른 論功行賞(논공행상) 때 제일 먼저 反正(반정)計劃(계획)을 세웠다 하여 분충찬모입기명륜정사일등공신(奮忠贊模立紀明倫靖社一等功臣)에 錄勳(녹훈)되고, 평성군(平城君)에 封(봉)해졌다.
1624년 (仁祖(인조) 2年(년))이괄(李适)의 亂(난) 때는 訓鍊大將(훈련대장)으로 어가(御駕)를 護衛(호위)하였다. 平定(평정) 후 逆徒(역도)에 依(의)하여 推戴(추대)되었던 흥안군 제(興安君瑅 : 宣祖(선조)의 열째아들)를 處刑(처형)하여 臺諫(대간)의 彈劾(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그 뒤 刑曹判書(형조판서)가 되었으며, 丁卯胡亂(정묘호란) 때 江華島(강화도)로 王(왕)을 호종(扈從)하여 이듬해 부원군(府院君)에 封(봉)해졌다.
그러나 功(공)을 믿고 탐오(貪汚)하여 남의 집터 수천칸을 빼앗아 이 때문에 言官(언관)의 彈劾(탄핵)을 받았다. 1635년에는 목릉(穆陵)·혜릉(惠陵)의 봉심관(奉審官)으로 補修(보수)를 소홀히 하여 罷職(파직)당했다가 곧 復職(복직)되어 刑曹判書(형조판서)에 訓鍊大將(훈련대장)을 兼(겸)하였다. 1636년 兵曹判書(병조판서)를 兼(겸)하도록 했으나 疾病(질병)을 理由(이유)로 辭讓(사양)하였다.
丙子胡亂(병자호란)이 일어나자 手下(수하)의 軍事(군사)를 引率(인솔)하여 敵(적)의 先鋒(선봉)部隊(부대)를 遮斷(차단), 王(왕)이 南漢山城(남한산성)으로 避難(피난)할 餘裕(여유)를 주었으며, 淸(청)나라와의 和議(화의) 成立(성립) 後(후) 다시 兵曹判書(병조판서)에 任命(임명)되었다. 1637년 左議政(좌의정) 崔鳴吉(최명길)의 推薦(추천)으로 右議政(우의정)이 되어 訓鍊都監提調(훈련도감제조)를 兼(겸)했는데, 이 때 亂(난) 後(후)의 民心收拾策(민심수습책)을 論(논)하고 守令(수령)의 任命(임명)에 愼重(신중)을 기할 것을 開陳(개진)하였다.
이듬해 사은사(謝恩使)로 淸(청)나라에 派遣(파견)되었다. 돌아와 左議政(좌의정)으로 昇進(승진)하자 領議政(영의정) 崔鳴吉(최명길)과 議論(의논)하여 僧侶(승려) 독보(獨步)를 은밀히 明(명)나라에 派遣(파견), 淸(청)나라에 降伏(항복)하게 된 그간의 事情(사정)을 辨明(변명)하도록 하였다.
1641년 다시 謝恩使(사은사)로 淸(청)나라에 들어가 拘禁(구금)되어 있던 김상헌(金尙憲) 等(등)을 擁護(옹호)하였다. 1642년 淸(청)나라의 要求(요구)로 崔鳴吉(최명길)이 罷職(파직)되자 그 뒤를 이어 領議政(영의정)에 올랐다. 그러다가 病(병)으로 辭退(사퇴)한 후 이듬해 再次(재차) 領議政(영의정)에 任命(임명)되었으나 열흘도 못 되어 죽었다.
武人(무인)家門(가문) 出身(출신)의 손꼽히는 장재(將材 : 將軍(장군)이 될만한 人物(인물)로서 仁祖反正(인조반정)을 처음부터 計劃(계획), 主導(주도)하여 仁祖(인조)의 絶對的(절대적)인 信任(신임)을 받았다. 恒常(항상) 訓鍊都監(훈련도감)·扈衛廳(호위청) 等(등)의 친병(親兵)을 掌握(장악)했으며 王(왕)의 身邊(신변)을 責任(책임)졌다.
상신(相臣 : 三議政(삼의정) 卽(즉), 領議政(영의정)·左議政(좌의정)·右議政(우의정) 等(등)을 이름.)으로 있으면서 특별히 이루어놓은 施策(시책)은 없으나, 外交(외교) 交涉(교섭)에 能(능)해 淸(청)나라의 過度(과도)한 징색(徵索)과 잦은 內政(내정) 干涉(간섭)을 撤回(철회)하게 하는 成果(성과)를 거두었다.
反正(반정) 後(후) 西人(서인)이 훈서(勳西)·청서(淸西)로 分列(분열)하자 김류(金瑬)·이귀(李貴)·김자점(金自點)·심기원(沈器遠) 等(등)과 함께 훈서(勳西:朝鮮(조선) 時代(시대), 西人(서인) 가운데 仁祖反正(인조반정)에 加擔(가담)한 一派(일파)의 領袖(영수)가 되었으나 武臣(무신)임을 들어 朝廷(조정)의 是非(시비)에 干與(간여)하기를 極力(극력) 回避(회피)하였다. 또한 송시열(宋時烈) 等(등)의 士林(사림)을 薦擧(천거)하고 장용(奬用 : 장려하여 登用(등용)하여 그들의 歡心(환심)을 사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功(공)을 믿고 貪汚(탐오)한 면도 있어 識者層(식자층)의 非難(비난)을 받았다. 武人(무인)이면서도 김류(金瑬)·이귀(李貴)·崔鳴吉(최명길(崔鳴吉) 等(등)의 文人(문인)들과도 널리 交遊(교유)했는데, 특히 金瑬(김류)와는 先代(선대)의 인연(瑬의 아버지 金汝岉은 申景禛의 아버지 砬의 從事官으로 충주에서 같이 전사하였다.)으로 切親(절친)한 사이였다. 諡號(시호)는 충익(忠翼)이다. 1651년(효종 2) 仁祖(인조) 廟庭(묘정)에 配享(배향)되었고 宋時烈(송시열)이 찬한 神道碑文(신도비문)이 傳(전)한다.
신사운 [ 申思運 ] 1721년(景宗(경종) 1년) ~ 1801년(純祖(순조) 1年(년)
本貫(본관)은 평산(平山). 字(자)는 형중(亨仲), 號(호)는 낙운(樂耘). 신상(申상)의 曾孫(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명견(申命堅)이고,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신윤(申鈗)이며, 어머니는 박여필(朴汝弼)의 딸이다. 일곱살 때부터 글을 배워 스승의 指導(지도)를 받지 않고 문리(文理)를 깨쳤으며, 1753년(英祖(영조) 29年(년) 司馬試(사마시)를 거쳐 그해 庭試文科(정시문과)에 兵科(병과)로 及第(급제), 承文院(승문원)에 敍用(서용)되어 주서(注書)를 거쳐 전적(典籍)에 올랐다.
1760년 2월 臺諫(대간)으로 너무 분운하게 固執(고집)한다 하여 濟州牧(제주목)의 정의현(旌義縣)에 流配(유배)되었다가 그해 5월에 풀려 돌아와 벼슬을 斷念(단념)하고 故鄕(고향)으로 돌아갔다가 大臣(대신)의 薦擧(천거)로 敍用(서용)되었다. 그 뒤 副校理(부교리)·헌납(獻納)·전적·지평(持平)·장령(掌令)·司諫(사간)·집의(執義) 等(등)을 歷任(역임)하고, 1776년(正祖(정조) 卽位年(즉위년)에는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淸(청)나라를 다녀왔다.
이어 大司諫(대사간)·承旨(승지)·刑曹參議(형조참의)·戶曹參判(호조참판)·漢城府判尹(한성부판윤) 等(등)을 거쳐 1794년 刑曹判書(형조판서)에 昇進(승진)하고 工曹判書(공조판서)·大司憲(대사헌)·判義禁府事(판의금부사) 等(등)을 지냈다. 1801년(純祖(순조) 1年(년)윤행임(尹行恁)의 여당(與黨)이라는 심한 彈劾(탄핵)을 받아 벼슬이 削奪(삭탈)되려 할 때에 죽어 禍(화)를 面(면)하였다.
平素(평소) 氣像(기상)이 嚴肅(엄숙)하고 禮節(예절)을 崇尙(숭상)하였으며, 父母(부모)를 섬기고 子息(자식)을 가르치는 데 스스로 師表(사표)를 보여 家庭(가정)을 바로잡았으며, 남의 過失(과실)을 탓하는 일이 없었다. 文章(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특히 楷書(해서)를 잘 썼다.
신석우 [ 申錫愚 ] 1805년(純祖(순조) 5年(년)) ~ 1865년(高宗(고종) 2年(년)
本貫(본관)은 평산(平山). 字(자)는 성여(聖如), 號(호)는 해장(海藏). 신소(申韶)의 曾孫(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광손(申光遜)이고, 아버지는 校理(교리) 신재업(申在業)이고, 어머니는 左參贊(좌참찬) 김이탁(金履度)의 딸이다. 判書(판서) 신석희(申錫禧)의 兄(형)이다. 1828년(純祖(순조) 28年(년)進士(진사)가 되고 1834년 式年文科(식년문과)에 兵科(병과)로 及第(급제)하였다. 가주서(假注書)·藝文館檢閱(예문관검열)·司諫院正言(사간원정언)을 거쳐 1838년(헌종(憲宗) 4年(년)용강현령(龍岡縣令)을 지냈으며 그 뒤 副校理(부교리)·兵曹參判(병조참판)·右承旨(우승지)·楊州牧使(양주목사)·大司成(대사성)·吏曹參議(이조참의)·承旨(승지)·吏曹參判(이조참판) 等(등)을 거쳐 1855년(哲宗(철종) 6年(년)慶尙道觀察使(경상도관찰사)를 지냈다.
1857년 大司憲(대사헌)이 되고 이듬해 漢城府判尹(한성부판윤)을 거쳐 1859년 刑曹判書(형조판서)에 이어 禮曹判書(예조판서)가 되었다. 1860년 동지정사(冬至正使)로 淸(청)나라를 다녀왔다.
이 때 淸(청)나라에서는 英國(영국)·프랑스(France)聯合軍(연합군)에게 광둥(廣東)을 占領(점령)당하고 북경(北京)이 陷落(함락)당한 때였으므로 歸國(귀국)하여 이러한 事情(사정)을 보고하니 民心(민심)이 크게 動搖(동요)하였다. 文章(문장)과 글씨에 뛰어나 1863年(년)에는「해주기적비(海州紀蹟碑)」의 서사관(書寫官)으로 特別(특별) 가자(加資)되기도 하였다. 諡號(시호)는 문정(文貞)이다.
行列表(항렬표)~大同(대동)行列(항렬)
32世(세),口균(均),口규(圭),口노(老),곤(坤),
33世(세),현(鉉),언(彦),윤(允),종(鍾),
34世(세),口철(澈),口식(湜),口순(淳),口영(泳),
35世(세),동(東),상(相),영(榮),주(柱),
36世(세),口섭(燮),口용(容),口항(恒),口환(煥),
37世(세),재(載),숙(璹),기(基),배(配),
38世(세),口호(鎬),口진(鎭),口일(鎰),口연(鍊),
39世(세),제(濟),준(濬),원(源),홍(洪),
40世(세),口근(根),口화(和),口병(秉),口집(集),
41世(세),성(性),충(忠),찬(燦),덕(德),
42世(세),口용(用),口익(翼),口중(重),口식(軾),
43世(세),원(元),완(完),극(棘),욱(旭),
44世(세),口필(弼),口우(雨),口남(南),口설(卨),
45世(세),단(段) 승(承),제(劑),영(寧)
46世(세),口무(武),口빈(斌),口성(成),口무(戊),
47世(세),홍(弘),세(世),경(卿),기(起),
48世(세),口염(廉),口용(庸),口경(慶),口강(康),
49世(세),재(宰),화(華),상(常),행(幸),
50世(세),口정(廷),口승(升),口연(延),口성(聖),
51世(세),규(揆),등(登),계(癸),봉(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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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승철~2021년 1월 16일 토요일 오후 5:59~ 항상 좋은 자료 보내 주시어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