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에 관한 시모음 30)
식구 /임보
청운산장 오르는 중턱쯤에 <샘터>라는 곳이 있는데
우물가에 포장 한 간 치고 물과 바람이나 마시고 사는
한 노파가 있는데
그 집 볕 밝은 뜰엔(뜰도 산이지만)
사람으로 치면 열네댓쯤 먹어 뵈는 토종 황구(黃狗)
한 마리와 또 사람으로 치면 예닐곱쯤 먹어 뵈는 어리디
어린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볕을 쬐며 놀고 있는데
그 괴가 황구 꼬리를 물고 귀찮게 굴어도 그냥 눈만
껌벅이며 날아가는 산새들이나 쳐다보고 있는
전생에 어느 절간 청직이나 해 묵었던 놈 같기도 한
고런 능청스런 개가 한 마리 있는데
주인 노파가 도토리 자루를 지고 숲에서 내려오면
동자놈 제 스승 맞듯 반갑게 달려가는데
글쎄 이 자리가 한 십여 백 년 전엔
이 식구들 서로 얽혀 살던 무슨 절이나 하나 서 있던
그런 데나 아니었는지
내 생각도 이리 달아오른 걸 보면
나도 옛날 그 뜰을 자주 기웃거려 보던
한 그루 물푸레나무나 아니었는지.
행복한 가족 /권오범
강남에서 봄바람 타고 신혼여행 와
서까래 귀퉁이 무상 임대해
내외가 지은 단칸방
어린 것들 성장해 옴나위없자
자진퇴거준비가 한창이다
첫 비행에 성공한 사남매가 막내더러
하나도 안 무서우니 빨리나오라고 조잘조잘
사중창 꽈리를 불어대는 아침
호들갑스런 재촉에도 미지의 세계가 두려워
어미 속을 바작바작 태우더니
강아지에게 한눈파는 사이 막내도
허공 가로지른 이착륙장 밟았다
첨본 햇귀에 날갯짓 목욕하다가도
엄마의 강남이야기가 솔깃해
다소곳이 갸웃대는 열쭝이 다섯
아빠가 잠자리 물고 와 감질나게 유혹하다
살걸음으로 허공을 가르자 신기한 듯
부리로 원을 그리며 따라가는 눈동자들
본격적인 비행연습 앞두고
바지랑대가 긴장하고 있다
한 가족 /조 은
곧 헐릴 집들의
불빛이 흘러나오는 언덕길
한 가족이 올라간다
두 아이가 엄마 손을 나눠 잡았다
공터엔 달맞이꽃을 감은 인동초
문짝 없는 냉장고
터줏대감처럼 앉은 호박
아이들의 책가방을 그러쥔 아빠가 쳐다보는
하늘에서 젖소 무늬 고양이가 뛰어내린다
그 옆 베고니아 꽃대가 휘청거린다
점점 곧추서는 길에다
흐릿한 발자국을
씨앗처럼 넣으며 가는 그들의
그림자의 음영이 다르다
식구 /김용택
태환이 형
우리 집 일 왔네
강 건너 고추밭 거름 내네
거름 한 바작 산같이 짊어지고
저 앞산 오르다 쉬며
저 꽃산 바라보네
거름 한 바작 짊어놓고
낮밥 먹을 때
태환이 형 식구
우리 집에 다 모여 밥 먹네
온몸에 기름투성이
저 남산 꽃투성이
태환이 형 밥 퍼먹는
자기 식구들 바라보다
저 남산 바라보네.
가족 /강인호
가족들이 집을 나간 뒤에도
칫솔들은 컵에 모여 도란도란
아빠 누운 칫솔 엄마 닳은 칫솔
고만고만한 칫솔들 모여 도란도란
가족들이 잠이 다 든 뒤에도
신발들은 신발장에서 두런두런
아빠 흙 묻은 구두 엄마 예쁜 신발
하얀 운동화도 모여 앉아 두런두런
부연이 삼촌 /도경회
거위 등을 타고 온종일 놀던 아재가 보이지 않았다
한국전쟁 때 주워온 탄피를 아궁이에 넣었다가
새끼손가락과 함께 얼이 반쯤 달아난 막내삼촌
유령이 휘휘휘 돌아다니는 나른한 밤
먼저 강기슭 더튼 후 어른들 산으로 올라갔다
횃불 앞서고 초롱 뒤따르며
너럭바위 밑까지 샅샅이 더듬었다
아침 해가 뜨고 나서야
가파른 산중턱 바위병풍 그 좁은 틈에
꾹꾹 쟁여 밀어 넣은 그를 찾을 수 있었다
도깨비의 조화지 사람 솜씨는 아니라고들 수군거렸고
까무룩 눈도 못 뜨는 삼촌이 업혀 왔다
그 밤에 웃담으로 갓 시집온
풍뎅이 다리같이 새까맣고 굵은 속눈썹의 새댁
제삿밥 이고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공동묘지 배롱나무 꽃 환한 샛길마다
나물 메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무심코 /복효근
서먹하니 마주한 식탁
명이나물 한 잎 젓가락으로 집어 드는데
끝이 붙어 있어 또 한 잎 따라온다
아내의 젓가락이 다가와 떼어준다
저도 무심코 그리했겠지
싸운 적도 잊고
나도 무심코 훈훈해져서
밥 먹고 영화나 한 편 볼까 말할 뻔했다
다정한 모자 /유지소
우리는 식탁에 앉았다. 일요일은 아니다.
“부탁이 있어. 내가 죽으면 저 바다에다 뿌려 줘.”
“안 돼요. 바다에 쓰레기를 버렸다고 벌금을 물게 될 거에요.”
한 개의 사과가 한 개의 접시 옆에 있다. 공휴일도 아니다.
“너에게는 밑밥을 잘 던지는 기술이 있잖니? 고객에게나, 고기에게나. 밤안개가 음악처럼 잔잔하
게 깔리는 날, 밤바다에 밤낚시를 하러 가는 거야, 너는 낚시꾼, 나는 밑밥. 오케이?”
한 개의 접시 옆에 두 개의 포크가 있다. 그렇게 늦은 밤도 아니다.
“안 돼요. 내가 병든 물고기를 먹을 수는 없어요.”
“여보세요, 병든 물고기는 먹는 게 아니라 파는 거란다. 그게 이 세상의 진리란다. 나도 비싼 값을
주고 병든 인생을 산 경험이 있어. 나 때문에 부자가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종종 만났어.”
“그래도 안 돼요. 장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고 했어요. 차라리 땅을 파겠어요.”
과도는 내 오른손에 잡혀 있다. 오른손은 사과 옆에 없다.
“안 돼. 지금 나보고 죽어서도 애를 키우라고 하는 거냐? 죽어서도 애벌레가 되라고 하는 거야? 애
호박, 애물단지, 애매모호, 나는 애로 시작하는 것은 다 싫다. 애늙은이도 싫다. 애들은 언제나 애
가 쓰이게 하잖아.”
“나는 다 컸어요. 내 애는 내가 키울 수 있어요. 애인처럼 다정한 모자를 상상해 보세요.”
사과는 붉고 푸르고, 접시는 길고 푸르고, 포크는 뼈만 남아 있다.
“잔인하구나. 나보고 죽어서도 모자를 쓰라고 말하는구나. 죽어서 쓰는 모자는 봉분밖에 더 있니?
모자는 외출할 때 쓰는 물건이란다. 아무리 모자를 좋아하지만, 봉분을 쓰고 외출할 수는 없지 않
겠니?”
우리는 마주 보고 앉아 있다. 포크는 나란히 누워 있다.
“오늘도 미세먼지주의보가 내렸어요. 외출할 때 모자보다는 마스크에 신경을 쓰도록 하세요.”
“이젠 내 얼굴이 부끄러운 모양이구나. 다시 부탁할게. 내가 죽으면 저 산꼭대기에다 뿌려 주거라.
정상에 오르면, 정상에 오른 사람답게, 변함없이 부드럽고, 변함없이 따듯하고, 변함없이 변하는,
마스크를 꼭 쓰도록 하마.”
우리는 식탁에 앉아 있다. 식탁은 네 개의 다리와 네 개의 둥근 모서리를 가지고 있다.
가족의 힘 /류 근
애인에게 버림받고 돌아온 밤에
아내를 부등켜 안고 엉엉 운다 아내는 속 깊은 보호자답게
모든 걸 안다는 듯 등 두들기며 내 울음을 다 들어주고
세상에 좋은 여자가 얼마나 많은지
세월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따뜻한 위로를 잊지 않는다
나는 더 용기를 내서 울고
아내는 술상을 봐 주며 내게 응원의 술잔을 건넨다
이 모처럼 화목한 풍경에 잔뜩 고무된 어린 것들조차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노래와 율동을 아끼지 않고
나는 애인에게 버림 받은 것이 다시 서러워
밤 늦도록 울음에 겨워 술잔을 높이 드는 것이다
다시 새로운 연애에 대한 희망을 갖자고
술병을 세우며 굳게 다짐해보는 것이다
가족 /진은영
밖에서 그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것
집에만 가져가면
꽃들이
화분이
다 죽었다
가족 /정해영
케이크를 둘러싸고
평평하고 둥그렇게
모여 있다
어느 쪽으로 기울어도
뼈아픈 것이 된다
가족은 케이크처럼
모여 있다
노래를 부르며
손뼉을 치며
참았던
눈물을 닦아주며
끈끈하고 부드럽게
중심을 바라보며
모여 있다
고부 /김수열
예순 살짝 넘긴 며느리가 여든 훌쩍 넘긴 시어매한테 어무이, 나, 오도바이 멘허시험 볼라요 허락해주소 하니 그 시어매, 거 무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여, 얼릉 가서 밭일이나 혀!
요번만큼은 뜻대로 허것소 그리 아소, 방바닥에 구부리고 앉아 떠듬떠듬 연필에 침 발라 공부를 허는데, 멀찌감치 앉아 시래기 손질하며 며느리 꼬라지 쏘아보던 시어매 몸뻬 차림으로 버스에 올라 읍내 나가 물어물어 안경집 찾아 만 원짜리 만지작거리다 만오천 원짜리 돋보기 사 들고 며느리 앞에 툭 던지며 허는 말, 거 눈에 뵈도 못 따는 기 멘허라는디 뵈도 않으믄서 워찌 멘헐 딴댜? 아나 멘허!
가족사진 /마경덕
길가 담 밑에 버려진 가족사진
액자 귀퉁이가 허름하다
단란한 가족들, 오가는 발길에 차이며 웃고 있다
앞자리에 앉은 다정한 부부
중년여자의 왼쪽에 매달린 어린 손자들이 강아지처럼 귀엽다
아버지의 오른쪽 무릎에 손을 얹은 어린 처녀
등 뒤에 울타리처럼 서있는 듬직한 젊은 부부
빈틈없이 조화를 이룬 한 장의 사진이
꽃병에 꽂힌 조화造花처럼 화사하다
대낮 길에서 만난 행복한 표정들
그때의 감정을 복사한 칼라사진이 지나치게 솔직하다
어쩌다 이곳에 버려졌을까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한때의 행복을 보관할 곳이 없었을까
누군가 혀를 차며 지나간다
가족이란 한 묶음이라고
불행도 함께하겠다고 여전히 한 자리에 묶여있다
父子.Ⅰ /최진연
아버지가
손을 잡고
아들과
가고 있다.
아들이
손을 잡고
아버지와
가고 있다.
내려다보며
쳐다보며
춤을 추듯
가고 있다.
부자는 가리라.
풀꽃 들판 길
바다 위, 가시밭길이라도
저렇게 함께 가리라.
사촌들 /최영철
큰 조카 결혼식에서 오랜만에 본다
서로 늙어 보여 고소하다가 돌아서서 키득키득 웃는다
사촌이 논 사면 배 아프다
아직 깜장머리 그대로인 동생의 뒤통수나 한 대 갈긴다
오십 넘어 무럭무럭 솟는 용심이라도 있어
빛나게 잘 닦아놓은 차에 발길질을 한다
새로 이사 간 집에 가 고스톱이나 치자고
반질반질 원목마루에 담배구멍이나 내자고
얼추 합의를 보다가
부엌에 올려놓고 온 냄비 생각이 난 듯
달달달달 급히 시동 걸어 내뺀다
번갯불처럼 만나 헤어지고도 서운하지 않게 된
아버지 어머니의 형제들이 사이좋게 낳아주고 간 사촌들
수십 년 전 그 모습도 아슴한 할아버지 할머니 골격이
얼굴 위로 희미하게 떠오르고 있는 사촌들
다시 만나면 또 이름이 아리송해질 사촌들
가족 /신미균
베란다 유리창이 다 닫혀있으면
집에 아무도 없는 거다
편지꽂이에 편지가
그대로 꽂혀 있으면
아직 아무도 안 들어온 거다
현관문에 피자집 광고지가
그대로 붙어 있으면
정말로 없는 거다
그래도 혹시나
벨을 눌러 본다
아무런 기척이 없다
혼자서 현관문을 딸깍, 열면
집안에 있던 냄새들이
와락,
안긴다
냄새만 안고 있어도
따뜻하다
우리네가족 /월암 정병근
즐거운 우리집안 내역 이야기
첫째는 골드향이 물씬,풍기고
둘째는 든든함이 코를 찌르내
엄마는 차분함이 사임당 이고
아부지는 성격이 곰이 세마리
잘만났다 잘만나 아주 잘만나
고추먹고 맴맴 달래먹고 맴맴
즐거운 우리가족 어울려 지면
얼씨구나 좋구나 지화자 좋내
가족 /정다연
엄마가 수탉을 삶는 동안
아빠는 오빠를 만지작거리고
오빠가 내 눈을 가리는 동안
썩은 냄새가 나
페스트 페스트
나는 갈겨쓰네
안마당에
잎사귀에
날갯죽지에
부러진 나뭇가지처럼
책상에 엎드린 채
짐승은 아픔을 어떻게 표현할까
입을 다물고
언제나 언제까지나
우리는 서로의 앞면만 본다
떠 있는 낮달을 보듯
나도 모르는 사이 무릎에 생긴 멍자국 이빨자국
벼룩이 문 것도 아닌데
쥐가 물어뜯은 것도 아닌데
페스트 페스트
전염된다
퍼진다
속수무책으로 우린 맺어졌으니
서로에 관해 아는 바가 없다
우리가 재앙에 대해 아는 바가 없듯
오빠가 엄마의 머리칼을 묶어주고
내가 아빠의 등뼈를 쓰다듬는 사이
깊어지는 뒷면
함몰되는 뒷면
무너진다
삐걱인다
식탁이
침대가
서로의 얼굴이
우리는 뒷면에 얼마나 많은 비밀을 숨겨놓았나
단숨에 서로를 산산조각낼 수 있을 만한
묻어도 덮어도 피어나는 악취
도려낸 썩은 부위를 서로의 성채에 던지며
페스트 페스트
그러니 속수무책
쓰러질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