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키즘 등장하다 1회 ~ 11 회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Ⅵ
아나키스트 단체인 진우연맹 관련 기사를 다룬 당시 동아일보의 지면이다. 일본 아나키스트들이 대구로 함께 호송됐다는 제목이 눈에 띈다
경상북도 경찰부에서 작성한 <고등경찰요사(要史)>는 25년 11월 진우연맹이 방한상(方漢相)을 오사카·나고야·도쿄 등에 몰래 보내 일본의 자아인사(自我人社)·자연아연맹(自然兒聯盟)·기로틴단(團)등과 교섭했다고 전하는데, 기로틴단이 바로 기로틴사를 뜻한다.
기로틴사는 학살자였던 헌병 대위 아마카스 마사히코도 습격하고 후쿠다 자택에도 폭탄을 보내는 등 계속 응징에 나서 일경이 대대적인 수사를 전개하는데 그 와중에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연루된 사실이 드러났다.
함북 명천(明川) 경찰서 고등계는 한인 여성 김선희(金善姬)와 전정화(全鼎花)를 체포하는데 기로틴사의 후루타와 그 동지 타카시마(高島三次)와 접촉한 혐의였다.
25년 12월 청진 지방법원에서 열린 공판에 따르면 후루타와 다카시마는 23년 서울 견지동에서 전정화를 만나 권총과 폭탄을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전정화는 후루타와 다카시마를 김선희에게 소개하는데, 간도 출신의 김선희는 남편 황돈(黃敦)이 제령 위반으로 징역 8년의 중형을 받고 복역 중이었으며, 그 부친은 간도에서 일본군 토벌대에 살해당한 독립운동가였다.
이때 후루타 등이 요구한 것은 의열단의 폭탄 10개와 권총 5정이었다. 결과적으로 무기 구입에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선희와 전정화는 징역 3년을 구형받았다.
일본 아나키스트들도 박열 못지않은 탄압을 받아 24년 9월 체포된 기로틴사의 나카하마 데쓰는 이듬해 5월 사형을 구형받았다가 무기로 감형되었고 후루타 다이지로는 사형을 선고받고 항소를 포기해 26년 4월 교수형을 당했다.
이처럼 일본인 아나키스트도 사형시키는 판국이니 이들과 연결된 국내의 진우연맹이 무사할 리 없었다. 일경은 26년 8월 11명의 진우연맹원들을 검속했다. 이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보통 1년 이상 구속 상태에서 무지막지한 고문을 당하면서 신문받았는데, 이 기간은 판결 때 구속 일수에 포함되지도 않았다.
동아일보 27년 2월 28일자는 “진우연맹원들이 대구형무소 벽을 두드리면서 ‘구속 1년이 넘은 현재까지 예심도 종결하지 않고 가족 면회도 시키지 않는다’면서 22일부터 단식투쟁에 돌입했다”고 전하고 있다.
대일항쟁기 때 독립운동가들의 옥중 단식투쟁은 묻혀 버리기 일쑤였지만 진우연맹원들의 단식투쟁은 세상의 이목을 끌었고 일제는 부랴부랴 재판을 진행해 3월 8일 예심을 종결했다. 방한상·신재모(申宰模) 등 9명의 한인들과 도쿄에서 압송당한 구리하라(栗原一郞) 등 2명의 일본인들이 피고였다.
27년 5월 대구 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에는 수백 명의 방청객이 쇄도했는데 용수가 벗겨지자 연맹원들은 서로 악수하면서 방약무인한 태도를 지었다고 전한다. 야마자와(山澤) 검사의 방청 금지 요청을 가네다(金田) 재판장이 받아들이자 구리하라가 “공개 금지 이유를 말하라”면서 재판장을 크게 꾸짖어 소동이 벌어졌다. 기자도 내쫓고 피고 가족 10여 명만 입석시킨 채 재판이 속개되자 변호사들이 항의 퇴정했다.
일제가 재판을 비공개로 하려고 했던 이유는 진우연맹원들의 혐의 때문이었다. 이들의 혐의는 ‘대구 부내의 관청과 회사·은행·우편국·신문사 등을 폭파하려는 음모’였다.
대구 지방법원장과 대구 경찰서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언도공판에서 김정근(金正根)과 구리하라 등은 징역 10년, 방한상·신재모 등은 징역 5년 등이 구형되었는데 피고들이 재판장에게 노호(怒號)해서 주위가 크게 소란했다고 전하고 있다.
26년 새해 벽두인 1월 4일에 서울 시내 곳곳에 <허무당(虛無黨) 선언>이란 인쇄물이 배포돼 일경에 비상이 걸렸다. 신문은 “시내 각 경찰서에서 비상하게 놀라서 각 서 고등계가 서로 연락하면서 대활동을 시작했다”고 전하고 있는데 동아일보(1926년 1월 8일)는 “<허무당 선언>에 관한 기사는 당국이 일체 게재를 금지했다”고 전하고 있다.
일경은 1월 12일 대구청년동맹 집행위원 윤우열(尹又烈)을 체포하는데 신문은 ‘모 중대사건’이라고만 표현해야 했다. 훗날 밝혀진 <허무당 선언>은 “우리를 박해하는 포악한 적에게 선전을 포고하자!”며 “우리가 부인하는 현세의 이 흉포악독하기가 사갈(蛇蝎·뱀과 전갈) 같은 정치, 법률 및 일체의 권력을 근본으로부터 파괴하자!”라고 덧붙이고 있다.
일제가 <허무당 선언>에 겁을 먹은 것은 “이 전율할 광경을 파괴하는 방법은 직접행동이 있을 뿐인데 혁명은 결코 언어와 문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유혈과 전사의 각오가 없이는 안 된다”라고 직접행동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총과 폭탄으로 일제에 직접 타격을 가하는 ‘직접행동’은 일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혁명 노선이었다.
<허무당 선언>은 “합법적으로 현 질서 내에서 혁명의 가능성을 믿는 자가 있다면 그는 저능아다. 우리는 죽음으로써 맹약하고 폭력으로써 조선혁명의 완수를 기하고자 허무당을 조직한다”고 주장했다. <허무당 선언>은 “우리를 착취하고 학대하고 살육하는 포악한 적에 대해 복수의 투쟁을 개시하자! …포악한 적의 학대에 신음하는 민중들이여, 허무당의 깃발 아래 모이자! …최후의 승리는 우리 것이다. 허무당 만세! 조선 혁명 만세!”로 끝맺고 있다.
이처럼 직접 혁명을 주창하는 아나키스트들의 동향을 일제가 주시하는 와중에서도 27년 평안도 지역에서는 관서흑우회가 만들어지고 29년 11월에는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이 출범했다.
전국의 아나키스트들은 평양의 여성 사회사업가였던 ‘백선행(白善行) 기념관’에서 전조선흑색사회운동자 대회를 개최하고 조선무정부주의자 연맹을 결성하려 했지만 일제가 집회를 불허하자 평남 대동군 기림리 공설운동장 북쪽 송림에 전격적으로 모여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한 것이다.
전국의 아나키스트들이 평양으로 집결하자 일경은 역과 여관 등지를 대대적으로 검문해 타지에서 온 아나키스트들을 체포하거나 평양 밖으로 추방했다.
이처럼 국내에서 일제의 그물 같은 경찰망 때문에 활동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했다. 조선공산당이 결성되자마자 와해되는 것도 일제의 탄압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나키스트들은 국외에 근거지를 둔 채 폭탄을 가지고 국내에 잠입하는 것으로 노선을 변경하는데 그런 대표적인 조직이 19년 11월 10일 길림 파호문(巴虎門) 반씨객점(潘氏客店)에서 결성된 의열단(義烈團)이었다.
동아일보 23년 4월 20일자는 “지난 19일 아침에 경기도 경찰부를 위시해서 시내 각 경찰서에서는 돌연히 긴장한 빛을 띄우고 각 기관 내를 엄중히 경계하는 동시에 모 중대 범인의 자취를 엄중히 추적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의열단원 한 명이 폭탄을 가지고 서울에 잠입했다는 정보 때문이라고 전하고 있듯이 의열단은 일제에 공포 그 자체였다.
의열단, 쌀가마니에 폭탄 숨겨 들어와 거사
독립만세 시위를 총칼로 진압하는 것을 본 청년들은 총에는 총으로 맞서는 직접 행동으로 전환했다. 의열단 소속의 청년들은 무기를 밀반입하고 몰래 입국해 기회를 엿보았다. 수세에 몰린 총독부는 의열단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의열단 대 총독부’의 구도가 만들어졌다.
아나키즘을 표방한 의열단이 만들어졌던 곳이다. 김원봉 등은 1919년 11월 길림성 파호문 밖 반씨 집이었던 이곳에서 의열단을 창건했다. [사진가 권태균]
일제 첩보 보고는 의열단 단장 김원봉이 평소에 “우리 단이 노리는 곳은 동경·경성 두 곳으로서 우선 조선 총독을 계속해서 5, 6명을 죽이면 그 후계자가 되려는 자가 없게 될 것이고, 동경 시민을 놀라게 함이 매년 2회에 달하면 한국 독립 문제는 반드시 그들 사이에서 제창되어 결국은 일본 국민 스스로가 한국 통치를 포기하게 될 것이 명약관화하다”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의열단이 결성 직후 ‘제1차 암살파괴계획’이라고 불리는 커다란 사건을 기획한 것은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제1보였다. 조선 총독을 암살하고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회사·조선은행·매일신보 같은 핵심 식민통치기구를 폭파하려는 계획이었다.
의열단의 이념은 아나키즘이었지만 그 창립 배경에는 민족주의 계열의 무장 항일투쟁 단체인 조선독립군정사(朝鮮獨立軍政司)가 있었다. 1919년 2월 말 길림에서 여준·조소앙·김좌진 등은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이하 의군부)를 결성하는데, 의군부는 <대한독립선언서>에서 “육탄혈전으로 독립을 완성”할 것을 결의한 군부(軍府) 조직이었다.
의군부는 그해 4월 이상룡·유동렬·조성환·이장녕 등과 연합해 조선독립군정사(군정사)로 조직을 확대하는데, 군정사가 의열단 결성에 깊숙이 개입했다.(김영범 <혁명과 의열>)
김원봉이 스물한 살의 나이로 의열단 의백(義伯·단장)으로 추대된 데는 군정사의 회계책임자였던 처삼촌 황상규(黃尙奎)의 역할이 작지 않았다. 의열단은 군정사의 물적 지원이 필요했고 군정사는 일제와 전면전을 벌이기 전까지 단기적 성과를 낼 직접 행동조직이 필요했다.
이런 양자의 필요성이 ‘천하의 정의의 일을 맹렬히 수행’할 의열단을 탄생시킨 것이었다. 군정사 대표로 임정 수립에 참여하러 상해로 갔던 조소앙은 이동녕·이시영 등과 1919년 4월 ‘급증하는 망명 청년들의 예기(銳氣)를 한 곳으로 응집’시킬 목적으로 상해 공동조계 내에 비밀리에 폭탄 제조 학습소 겸 권술(拳術)수련소를 설립했다.
1 김원봉과 처 박차정. 김원봉은 1931년 3월 12세 연하의 박차정과 결혼하는데, 박차정은 훗날 조선의용대에 가입해 1944년 일제와 전투 중 입은 부상으로 숨진다
그해 6월 김원봉을 비롯해 청년들이 길림에서 상해로 와서 폭탄 제조법을 배웠다. 같은 달 상해에서 40여 명의 청년은 “작탄(炸彈·폭탄을 터뜨림)으로 구국의 책임을 부담”하겠다고 구국모험단을 결성하고 폭탄 제조와 사용법을 훈련받았다.
김원봉이 신흥무관학교에 입교한 것은 일본 육사 출신의 지청천(池靑天) 등에게 전문적인 군사교육을 받겠다는 의도도 있었지만 목숨 걸고 싸울 동지를 찾으려는 목적도 강했다. 그래서 결성 당시 의열단원 13명 중 8명이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었다.
신흥무관학교의 김동삼은 중국인 폭탄기술자 주황(周況)을 무관학교로 초빙하는데, 주황을 대동하고 만주로 간 인물이 바로 김원봉이었다. 여러 움직임이 ‘폭탄 제조 및 투척’이란 한 가지 방향으로 집결되는 것이고, 그 실행 계획이 제1차 암살파괴계획이었다.
김원봉·곽재기·이성우는 1919년 12월 하순 길림에서 상해로 가서 이듬해 3월 폭탄 3개와 탄피 제조기 1개를 구해 돌아왔다. 탄피 제조기는 임정 내무총장 안창호(安昌浩)가 대양(大洋) 2000원짜리를 사서 기증한 것이니 안창호도 한 측면에서는 무장투쟁론자였던 것이다.
의열단은 폭탄들을 우편국을 통해 안동현 중국세관에 있는 영국인 유스 포인 앞으로 발송했다. 안동현에서 이 폭탄을 인수받기로 한 곽재기(郭在驥)는 직접 국내로 잠입해 암살파괴계획을 주도할 인물이었다.
곽재기는 안동현에 가서 임정 외교차장 장건상(張建相)의 서한을 포인에게 보이고 무기가 든 소포를 찾았다. 안동현 원보상회의 이병철(李炳喆)이 의열단 연락기관이었는데, 그는 고량미 20가마니 속에 폭탄을 넣어 위장하고 경남 밀양의 미곡상 김병환(金병煥)에게 보냈다
2 대일항쟁기 때 부산경찰서 전경. 박재혁은 의열단원 곽재기 등을 체포한 부산경찰서를 응징하기 위해 폭탄을 투척했다가 일제에 의해 사형당한다
의열단은 폭탄 3개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다시 상해로 가서 프랑스 조계 오흥리(吳興里)에 거주하는 중국인 단익산(段益山)에게 폭탄 13개와 미국제 권총 2정 등을 더 구입했다. 이 무기들은 중국어에 능통한 의열단원 이성우(李成宇)가 중국식 의류상자 속에 넣은 채 상해발 이륭양행 소속 기선 계림환(桂林丸)을 타고 안동현까지 운반했다.
이 폭탄 역시 안동현의 이병철을 통해 마산의 미곡상 배중세, 밀양의 김병환, 그리고 진영의 미곡상 강원석에게 보냈다. 곽재기·이성우·황상규·윤치영 등 의열단원 10여 명은 국내로 잠입했고 김원봉과 강세우 등은 상해와 북경을 오가며 후방 지원 업무를 담당했다. 거사의 총지휘를 맡은 곽재기는 서울 공평동 전동(典東)여관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지방을 순회하면서 계획을 점검했다.
그런데 경기도 경찰부가 밀정의 제보로 5월 8일께 밀양 김병환의 집을 급습해 폭탄 3개를 압수하면서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의열단은 남은 13개의 폭탄으로 거사를 진행하기로 했는데, 거사 때 뿌릴 격문이 마련되지 못했고 일제가 비상 경계망을 펼치면서 폭탄의 서울 반입이 늦어졌다.
폭탄이 압수돼 긴장이 팽팽해진 상황에서 의열단은 1920년 6월 16일 서울 인사동의 한 중국음식점에서 비밀 회합했는데 경기도경 김태석(金泰錫)이 일경을 이끌고 급습했다. 윤세주(尹世胄)·이성우·황상규·이낙준·김기득·김병환 등이 체포되고 전국 각지에서 검거 선풍이 일었는데, 김태석은 1919년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강우규 의사를 체포했던 그 친일 경찰이었다(운동의 시대⑥ 청년노인 강우규 의사).
곽재기가 부산 복성(福成)여관에서 체포된 것을 비롯해 부산에서도 여러 명이 체포되었다. 1년여에 걸친 살인적인 심문 끝에 1921년 6월 곽재기·이성우는 징역 8년, 황상규·윤세주·김기득·이낙준·신철휴 등은 징역 7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스물한 살 청년 윤세주는 검사의 구형에 “체포되지 않은 우리 동지들이 도처에 있으니 반드시 강도 왜적을 섬멸하고 우리의 최후 목적을 도달할 날이 있을 것”이라고 외쳤다.
1920년 8월 1일자 동아일보는 ‘직경 3촌(寸)의 대폭탄’이란 제목으로 “총독부를 파괴하려던 폭탄은 비상히 크고 최신식의 완전한 것”이라고 보도해 이것이 폭파되었을 경우를 상상하게 했다.
신한민보는 7년 후인 1928년 4월 5일자에 이성우의 석방 소식을 전하면서 “3·1 운동 이후 가장 세상의 이목을 놀라게 했던 제1차 의열단, 즉 밀양폭탄사건”이라고 표현하고 있듯이 의열단 사건이 준 충격파는 컸다.
일제가 의열단원 대검거에 광분하던 1920년 9월 부산 출신의 의열단원 박재혁은 중국 고서(古書) 상인으로 위장해 일본 나가사키(長崎)를 거쳐 부산으로 입국했다. 한 달 전 상해에서 박재혁은 김원봉과 곽재기 등 여러 명의 단원을 체포한 부산 경찰서를 타격하기로 결정하고 실행에 나선 길이었다.
박재혁은 배 위에서 김원봉에게 “허다한 수익은 기약할 수 있으나 그대 얼굴은 다시 보지 못하리라(可期許多收益/不可期再見君顔)”라는 편지를 쓰고 보내는 사람을 ‘와담(臥膽) 배(拜)’라고 적었다. 와신상담의 심정으로 결행하겠다는 결의의 표현이었다.
마지막으로 적은 7언절구는 “열락선타지말고(熱落仙他地末古) 대마도로서간다(對馬島路徐看多)”라는 것인데, 자신의 이동 수단이 ‘연락선’이 아니며 ‘대마도’를 경유해 가는 것임을 보고한 것이다. 상해에서 헤어질 때 마지막임을 알았던 김원봉도 이 편지를 받고는 눈물을 흘렸다고 전한다.
박재혁은 1920년 9월 14일 아침 중국 고서적상(古書籍商)으로 위장해 부산 경찰서장 면회를 청했다. 서장 하시모토(橋本秀平)가 나타나자 박재혁은 폭탄을 터뜨려 하시모토를 죽이고 자신도 큰 부상을 입었다. 박재혁은 제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대구복심법원에서 무기형으로 감형되었지만 다시 고등법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박재혁은 ‘어찌 적의 손에 욕보기를 기다리겠는가’라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단식투쟁을 전개했다. 드디어 1921년 5월 10일 아사(餓死)했는데 일제는 폐병으로 병사했다고 달리 발표했다.
5월 14일 박재혁의 시신이 본가가 있는 부산으로 운구되었는데 부산 고관(古館)역에 도착했을 때 당시 신문은 “다수의 경관들이 출장해서 두려운 폭탄 범인의 시체까지 경계를 했다더라”고 전하고 있다.
과부의 몸으로 독자(獨子)를 키웠던 박재혁의 모친은 아들이 시신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에 정신을 잃었다. 12월 27일에는 밀양 출신의 의열단원 최수봉(崔壽鳳)이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는데 불발이어서 인명은 살상되지 않았다.
부산 지방법원의 1심은 무기징역을 선고했으나 검사는 항소했고 대구 복심법원은 1921년 4월 사형을 선고했다. 의열단의 잇따른 공세에 겁먹은 일제는 인명살상이 없는 사건도 사형이란 야만적 수단으로 대응한 것인데, 최수봉은 그해 7월 사형이 집행되었다.
일제가 의열단에 가졌던 공포는 그만큼 큰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최수봉이 사형당한 지 두 달 후인 1921년 9월에는 드디어 총독부에 폭탄이 투척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5, 폭탄과 저격
식민통치 심장부 강타, 유유히 사라진 김익상
의열단(義烈團)이 활약하던 시기의 신문 보도를 보면 의열단을 때로 정의혈단(正義血團)이라고도 기록했다. 그만큼 의열단은 자신들의 희생을 전제로 일제 식민통치에 타격을 가해 조국의 독립을 달성하려 했던 직접행동조직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초개처럼 여겼고 그만큼 일제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상해 황포탄의 현재 모습과 1928년(아래 사진) 모습. 1922년 3월 의열단은 일본 군부의 실세 다나카 대장을 이곳에서 저격했지만 실패했다. [사진가 권태균]
님 웨일스가 쓴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장지락)은 상해에서 의열단원들과 함께 생활했는데 그는 “이 단체(의열단)는 아나키즘(무정부주의) 이데올로기에 지배되었다”라고 회고했다.
김산은 “의열단원들은 마치 특별한 신도처럼 생활했고, 수영·테니스, 그 밖의 다른 운동을 하면서 항상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매일같이 저격 연습도 하였다…언제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므로 생명이 지속되는 한 마음껏 생활했다…또 모든 한국 소녀들은 의열단원들을 동경하였으므로 수많은 연애사건이 있었다(<아리랑>)”고 전하고 있다.
김산의 선배 동지였던 김성숙(金星淑)은 의열단에 대해 “그때 젊은 사람들은 서로 죽으러 국내로 들어가겠다는 자세…그런데 국내로 한 번 나가려면 여비도 있어야 되고 돈이 많이 들어야 되지 않아요? 그러니 나가겠다는 사람을 모두 내보낼 수가 없어서 나중에는 제비를 뽑기도 했어요(<혁명가들의 항일회상>)”라고 회고했다.
김성숙은 또 의열단이 아나키즘으로 기울게 된 이유를 1921년 중국 천진에서 의열단에 가입한 아나키스트 유자명(柳子明)의 영향으로 회상했다. 그래서 “의열단은 유자명의 영향으로 아나키즘을 수용하고 그들의 민족주의적 테러 활동에 아나키즘적 논리를 갖추게 되었다(오장환, <한국 아나키즘 운동사연구>)”고 평가받는다.
의열단의 잇단 공세에 당황한 일제는 1921년 7월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최수봉의 사형을 집행했다. 인명피해가 없는 사건임에도 사형으로 대응함으로써 의열단원의 또 다른 의거를 방지하고자 한 것이었다.
1 김익상.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지고 상해 황포탄에서 다나카 대장을 저격했다. 2 군복 차림의 다나카 기이치. 상해에서 운 좋게 살아남아 총리대신까지 오른다
그러나 그 두 달 후인 1921년 9월 10일. 의열단원 김익상(金益相)이 북경 정양문(正陽門) 부근의 의열단 거처를 떠나 서울로 향했다. 단원들은 김익상에게 “장사는 한번 가면 돌아오지 않으리(壯士一去兮不復還)”라는 시구로 위로했다.
의열단원들이 거사하러 가는 단원들에게 즐겨 인용했던 이 시구는 <사기(史記)> ‘자객열전(刺客列傳)’에 나온다. 전국시대 자객 형가(荊軻)가 약소국 연(燕)의 태자 단(丹)을 위해 진왕(秦王:진시황)을 암살하러 떠날 때 친구인 고점리(高漸離)가 역수(易水)가에서 축(筑)을 타면서 위로하자 형가가 “바람이 쓸쓸하게 부니 역수가 차구나(風蕭蕭兮, 易水寒)”라면서 이 구절을 읊고 역수를 건넜다. 형가는 결국 진왕 암살 목전에서 실패하고 죽고 만다.
그러나 김익상은 “일주일이면 돌아올 것”이라면서 폭탄 두 개를 가지고 북경에서 봉천(奉天:현 심양)으로 가는 경봉선(京奉線)에 올랐다. 심양에서 압록강 대안 안동(安東:현 단동)을 거쳐 서울로 들어갈 계획이었다.
일본어에 능숙했던 김익상은 아이를 데리고 여행 중인 일본 여인에게 자신을 미다카미(三田神)라는 학생이라고 소개하고 일행이 되었다. 열차 내에서 검문하던 일경들은 일본인 부부로 여기고 지나쳤다.
남대문역(서울역)에서 일본 여인과 헤어진 김익상은 이태원에 사는 동생 김준상(金俊相)의 집에서 아내 송씨와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인 9월 12일 아침 김익상은 전기회사 공원으로 가장하고 남산 총독부를 찾아갔다.
이토 히로부미가 쓰던 통감관저가 1910년 이후 총독부로 변했는데 왜성대(倭城臺)라고도 불렀다. 작가 박태원(朴泰遠)이 해방 후 김원봉의 증언을 토대로 쓴 <약산(若山)과 의열단(義烈團:1947년)>에 따르면 김익상은 총독부를 지키는 무장 헌병을 보고는 그대로 지나쳐 일본 찻집에 들어가 맥주를 한 병 청해 마셨다고 전한다. 다시 총독부에 들어가려 하자 무장 헌병이 “누구냐”고 물었고 “전기를 고치러 왔다”는 답변에 통과시켜 주었다. 그렇게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사건이 시작되었다.
당시 신문은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12일 상호 10시20분에 조선총독부에 폭발탄 두 개를 던졌는데 비서관 분실(分室) 인사계실(人事係室)에 던진 한 개는 스즈키(鈴木) 속(屬)의 뺨을 스치고 책상 위에 떨어져 폭발되지 않았으며, 다시 회계과장실에 던진 폭탄 한 개는 유리창에 맞아 즉시 폭발해 유리창은 산산이 부서지고 마루에는 주먹 하나가 들어갈 만한 구멍이 뚫렸는데 범인은 즉시 종적을 감추어서 방금 엄중 탐색 중이요. 폭발하는 소리가 돌연히 일어나자 총독부 안은 물 끓듯해서 일장 수라장을 이루었다더라.(<동아일보>. 1921년 9월 13일)”
불발탄을 두고 사무원이 “폭발탄”이라고 외쳐 큰 소동이 벌어지는 와중에 두 번째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벼락같이 들렸다. 회계과장 기쿠야마(菊山) 등이 자리를 비워서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식민통치의 심장부 총독부에 폭탄이 터진 것이다.
신문들은 미즈노(水野) 정무총감이 경무국장실에서 아오키(靑木) 서무부장, 마루야마(丸山) 사무관, 야마구치(山口) 고등경찰과장 등을 불러 “무슨 일을 머리를 모아 비밀리에 협의했다더라”고 전하고 있다.
박태원의 <약산과 의열단>은 두 번째 폭탄이 터진 후 김익상은 아래층으로 내려가면서 올라오는 헌병·경찰 등에게 일본어로 “위험하다 위험해, 올라가면 안 된다”고 소리치면서 내려왔다고 전하고 있다.
총독부를 빠져나온 김익상은 황금정(을지로)에서 공구를 모두 버리고 일본인 가게에서 일본 목수들 옷을 사 한강에서 갈아입고 평양행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다.
김익상이 평양→신의주→안동(단동)→봉천(심양)을 거쳐 북경에 돌아온 날이 9월 17일이었으니 자신의 말대로 일주일 만이었다. 의열단원 최수봉 사형 집행 두 달 만에 발생한 총독부 폭탄투척 사건에 일제가 경악한 것은 당연했다.
1922년 3월 초 상해로 간 김원봉은 북경의 의열단원들을 불렀다. 프랑스 조계 주가교(朱家橋)의 중국인 이발소 2층에서 김원봉·이종암·오성륜·김익상·서상락·강세우 등 의열단원들이 마주 앉았다.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가 싱가포르, 홍콩을 거쳐 상해에 온다는 정보 때문이었다. 제26대 일본 육군대신(1918년 9월~1921년 6월)을 역임한 군부 실세 다나카를 저격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성륜(吳成崙)·김익상·이종암(李鍾岩)이 앞다퉈 결행을 자청해 순서를 조정해야 했다. 다나카가 배에서 내릴 때 오성륜이 1선을 맡아 저격하고, 이것이 실패하면 김익상이 다나카가 차로 향할 때 저격하는 것이 2선이었다. 이마저 실패하면 다나카가 자동차에 오를 때 이종암이 저격하는 것이 3선이었다.
1922년 3월 29일 기선이 상해 황포탄 공공마두(公共마頭)에 도착하자 다나카가 마중 나온 인사들과 악수를 나눌 때 오성륜이 권총을 꺼내 저격했다. 적중했다고 생각한 오성륜은 “독립만세”를 외쳤지만 실제로 맞은 이는 곁에 있던 영국 여인 스나이더였다.
2선의 김익상이 승용차를 향해 도주하던 다나카에게 권총을 발사했는데 다나카의 모자창만 뚫었다. 김익상이 폭탄을 꺼내 옆의 전신주에 뇌관을 친 다음 다나카를 향해 던졌지만 불발이었다.
3선의 이종암이 군중을 헤치고 나가서 다나카가 탄 차량에 폭탄을 던졌지만 또 불발이었고 미 해병이 발로 차 바다로 빠뜨렸다. 1선, 2선, 3선의 공격이 모두 실패했으니 이 또한 운명이었다.
이종암은 재빨리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던지고 군중 틈으로 몸을 숨겼지만 오성륜·김익상에게는 일본 헌병·경찰은 물론 중국 경찰과 인도 순포(巡捕)까지 달려들었다. 둘은 허공에 권총을 쏘면서 구강로(九江路)를 지나 사천로(四川路)까지 도주하다 결국 막다른 골목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김원봉과 강세우, 서상락은 각각 자전거를 가지고 부두 근처에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오성륜과 김익상은 상해 일본영사관 경찰서로 연행되어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 조사 도중 김익상이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사건의 주인공임이 밝혀지자 일제는 경악했다.
그러나 그해 5월 2일 오성륜이 영사관 감옥을 깨뜨리고 탈출하자 또 한 번 세상이 놀랐다. <고등경찰관계연표> <동아일보> 등에 따르면 오성륜은 일본인 죄수 다나카 쓰우이치(田中忠一)와 함께 탈출했는데, 다나카는 항주(抗州)로 갔다가 다시 상해로 돌아와 체포되었지만 오성륜은 오리무중이었다. 오성륜은 만주로 갔다가 독일을 거쳐 소련으로 가서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면서 공산주의로 노선을 수정한다.
오성륜의 탈출에 놀란 일제는 5월 6일 김익상을 부랴부랴 나가사키(長崎)로 압송해 재판에 회부했다. 1922년 9월 25일 마쓰오카(松岡) 재판장이 무기징역을 선고하자 검사가 항소했고, 항소심에서 미요시(三好) 검사는 ‘피고 뒤에는 조선독립의용군을 위시해서 독립단이 뒤를 이어 일어날 염려가 있으니, 극형에 처해 달라’고 주문했다.
그해 11월 6일 모리(森) 재판장은 사형을 언도했다. 김익상은 상고를 포기해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이른바 은사(恩赦)로 무기로 감형되었다. 1927년에 다시 20년으로 감형되어 1942년에 만기 출소했는데, <약산과 의열단>은 그의 집으로 형사가 찾아와 데리고 나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고 전한다.
6. 독립운동 노선 다툼 격화
臨政 외교독립론에 ‘민중+폭력’ 선언으로 맞선 의열단
독립운동의 노선 다툼은 치열했다. 크게 무장투쟁론자와 외교독립론자들의 노선 다툼이었는데, 의열단의 직접행동 노선에 대해 외교독립론자들이 비판하자 의열단은 단재 신채호에게 자신들의 주의·주장을 담은 선언문 작성을 의뢰했고 그 결과 ‘조선혁명선언’이 탄생했다
상해의 일본조계지. 공동조계라고도 불렸던 일본조계지는 한 발만 들이밀면 바로 체포되는 독립운동가들의 무덤이었다. [사진가 권태균]
1922년 3월 의열단이 상해 황포탄에서 일본의 다나카 대장을 저격한 사건은 상해는 물론 전 중국과 일본, 한국까지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는 상해를 조계지로 나누어 차지하고 있던 서구 열강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일본 총영사관은 자신들이 관할하는 공동조계는 물론 한국 독립운동에 우호적이었던 프랑스 조계에도 압력을 넣어 한국 독립운동을 단속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따라 공동조계와 프랑스 조계의 경찰 당국은 ‘불온행동’ 단속 강화의 방침을 공포했다. 골자는 한인 독립운동가의 총기류 휴대를 억제하겠다는 것이었다. 주중(駐中) 미국공사 샬먼은 상해에서 조선으로 향하면서 “조선인 독립당(獨立黨)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공산주의자의 행함과 같은 잔혹한 수단으로 나오는 데 대해 미국은 물론 세계 어느 나라든지 찬성치 아니하는 바이다”라고 유감의 뜻을 표했다.
미국의 이런 태도는 의열단에 대한 상해의 외국인 여론을 악화시켰는데, 문제는 여기에 임시정부까지 가세한 것이었다.
동아일보(1922. 4. 7)는 상해 임정이 “세관 부두의 폭탄사건(다나카 저격사건)에 대해 가정부(假政府:임시정부)는 하등의 관계가 없으므로 저들의 행동에 절대로 책임을 지지 아니한다”는 성명을 냈다고 보도했다.
또 임정 측 관계자가 “독립정부 측과 저들은 하등의 관계가 없으며 조선독립은 과격주의를 채용하며, 공포수단을 취하여 달할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그러자 의열단은 격분했다. 자신들은 박재혁·최수봉이 사형당하고 김익상·오성륜이 체포돼 혹독한 고문을 받고 있는데 격려는 못할망정 ‘관계 없다’고 선을 긋고 나서는 데 분노한 것이다. 의열단은 자신들이 무차별적 테러단체가 아니라 명확한 이념과 목표를 가진 혁명단체임을 내외에 천명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김원봉과 유자명은 북경의 신채호를 상해로 초빙해 의열단의 주의·주장을 담은 선언문 작성을 요청했다. 신채호 역시 의열단의 직접행동을 지지하고 임정의 외교독립론에 부정적이었으므로 흔쾌히 수락했다.
1 조선혁명선언,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다’라고 주장해 일제를 경악에 빠뜨렸다. 2 아나키스트이자 농학자였던 유자명. 김원봉과 함께 신채호를 찾아가 의열단 선언문 작성을 의뢰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의열단 선언문’이라고도 불리는 유명한 ‘조선혁명선언’이다. 로 시작하는 ‘조선혁명선언’은 ‘식민지 민중이 빼앗긴 나라와 자유를 되찾기 위해서 행하는 모든 수단은 정의롭다’고 선언했다.
‘조선혁명선언’은 모두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國號)를 없이 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 생존조건의 필요성을 다 박탈하였다” 첫 부분에서 “강도 일본이 헌병정치, 경찰정치를 힘써 행하여 우리 민족이 한 발자국의 행동도 임의로 못하고 언론·출판·결사·집회의 일체 자유가 없어 고통과 울분과 원한이 있어도 벙어리의 가슴이나 만질 뿐”이라며 일제 식민통치의 가혹성을 강하게 비판했다.
‘조선혁명선언’은 일제뿐 아니라 “내정독립이나 참정권이나 자치를 운동하는 자가 누구이냐”라면서 국내의 친일파나 개량주의자들의 타협노선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했다. 일제를 완전히 구축하고 독립을 쟁취하자는 게 혁명노선이라면 일제의 지배를 인정하면서 부분적인 정치적 권리를 얻자는 것이 개량주의 노선으로서 내정독립론(內政獨立論), 참정권론, 자치론 등이 있었다.
단군교(檀君敎)의 정훈모(鄭薰謨)는 1922년 3월 9일 일본 왕실의 일원인 귀족원 의원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 공작의 소개로 일본 귀족원에 조선내정독립 청원서를 냈다. 내정독립이란 일본의 통치를 인정하면서 조선 내정은 조선인들이 맡겠다는 주장이었다.
고노에 후미마로는 1933년 일본 귀족원 의장, 군국주의가 한창이던 1941년에는 사법대신을 역임하는 인물이고, 단군교는 나철이 대종교로 개칭하고 만주로 망명해 적극적인 항일운동에 나서자 단군교란 이름을 고수한다면서 적극 친일에 나섰던 단체였다.
참정권은 일본 정우회의 대의사(代議士) 다키 쓰네지(多木常次) 등이 1922년 3월 일본 중의원에 제출한 것으로서 내지연장주의(內地延長主義)의 일환으로 제청된 것이었다. 즉 식민지 조선에도 내지(內地:일본)와 같은 법령과 정책을 시행하자는 것이었다.
자치론 또한 일본의 지배하에서 일부 자치라도 획득하자는 것이었다. 신채호와 의열단은 이런 노선들은 친일파와 개량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야욕을 달성하기 위한 투항노선이라고 보고 있었다.
‘조선혁명선언’은 “일본 강도 정치하에서 문화운동을 부르는 자가 누구이냐?”라면서 “우리는 우리의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과 타협하려는 자나 강도 정치하에서 기생하려는 주의를 가진 자나 다 우리의 적(敵)임을 선언하노라”고 규정하고 있다. 내정독립론자, 참정권론자, 자치론자 모두 자신들의 적이라는 선언이었다.
세 번째 부분에서 ‘조선혁명선언’은 외교독립론과 준비론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난하고 있다. 외교독립론에 대해 “이들(외교독립론자)은 한 자루의 칼, 한 방울의 탄알을… 나라의 원수에게 던지지 못하고, 탄원서나 열국공관(列國公館)에 던지며, 청원서나 일본 정부에 보내어 국세(國勢)의 외롭고 약함을 애소(哀訴)하여 국가존망·민족사활의 대문제를 외국인, 심지어 적국인의 처분으로 결정하기만 기다리었도다”라고 비판했다. 신채호는 준비론에 대해서도 “실로 한바탕의 잠꼬대가 될 뿐”이라고 부인했다. 그러면서 신채호와 의열단은 “이상의 이유에 의하여 우리는 ‘외교’ ‘준비’ 등의 미몽을 버리고 민중 직접혁명의 수단을 취함을 선언하노라”라고 선포했다.
네 번째 부분에서 신채호와 의열단은 “강도 일본을 구축하려면 오직 혁명으로써 할 뿐이니, 혁명이 아니고는 강도 일본을 구축할 방법이 없다”며 혁명이 유일 수단이라고 선언했다. 의열단의 혁명론은 민중혁명론이었다. 다음은 신채호와 의열단의 주장이다. “구시대의 혁명으로 말하면, 인민은 국가의 노예가 되고 그 위에 인민을 지배하는 상전, 곧 특수세력이 있어 그 소위 혁명이란 것은 특수세력의 명칭을 변경함에 불과하였다. 금일 혁명으로 말하면 민중이 곧 민중 자기를 위하여 하는 혁명인 고로 ‘민중혁명’이라 ‘직접혁명’이라 칭한다. 오직 민중이 민중을 위하여 일체 불평·부자연·불합리한 민중 향상의 장애부터 먼저 타파해야 한다.” 같은 민족, 같은 국가 내에 어떠한 차별과 억압이 없어야 한다는 주장인데, 이 부분이 바로 ‘조선혁명선언’이 갖고 있는 아나키즘적 요소다.
신채호는 ‘민중’과 ‘폭력’을 혁명의 2대 요소라면서 폭력(암살·파괴·폭동)의 목적물을 대략 열거했는데, “1 조선총독 및 각 관공리, 2 일본 천황 및 각 관공리, 3 정탐노(偵探奴)·매국적(賣國賊), 4 적의 일체 시설물”이 그 대상이었다. 또한 ‘이민족 통치’ ‘특권계급’ ‘경제약탈제도’ ‘사회적 불균형’ ‘노예적 문화사상’을 파괴 대상으로 규정했다.
‘조선혁명선언’은 “이천만 민중은 일치로 폭력 파괴의 길로 나아갈지니라”면서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大本營)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암살·파괴·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해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하지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라고 끝맺었다.
1923년 1월 ‘조선혁명선언’이 발표되자 일제는 크게 놀랐다. 간도 총영사 스즈키(鈴木安太郞)와 만주 해룡(海龍)현의 영사관 분관 주임 다나카(田中繁三)는 각각 1923년 5월과 7월 외무대신 우치다 고사이(內田康哉)에게 ‘불온인쇄물 조선혁명선언의 반포를 개시한 건’ 등의 보고서에서 “‘조선혁명선언’이 만주 지역에 배포되고 있다”면서 신경을 곤두세웠다.
의열단이 신채호에게 ‘조선혁명선언’의 집필을 맡긴 것은 이유가 있었다. 사실 의열단은 안창호가 탄피 제조기를 구입해 주고 김원봉·이종암 등이 상해에서 임시정부의 별동대로 불리던 구국모험단(救國冒險團) 단장 김성근(金聲根)과 합숙하면서 폭탄제조법과 사용법을 배울 정도로 가까운 관계였다.
그러나 임정 대통령 이승만이 한국의 위임통치안을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요청한 사실이 전해지면서 상해 임정에 반대하는 인사들이 북경에 모이는데 신채호·이회영·박용만·김창숙 등이 그들이다.
이들 북경파의 일부 원로 독립운동가들과 젊은 아나키스트들이 1924년 4월 말 북경에서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는데, 장소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연구자들은 이회영의 숙소로 추정하고 있다.
창립 당시 회원은 이회영·이을규·이정규·정현섭(화암)·백정기·유자명 등 6명이다. 정화암은 ‘신채호는 순치문(順治門) 내 석등암(石燈庵)에 칩거하며 사고전서(四庫全書)를 섭렵하면서 역사 편찬에 몰두하느라, 유림(柳林)은 성도대학(成都大學)에 재학 중이라 참석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이 조직은 이회영의 자금 출자로 순간(旬刊) ‘정의공보(正義公報)’를 발간하다 1924년 10월 자금난으로 사실상 해체되지만 이후에도 이들은 재중국 한인 아나키즘 운동의 중심이 된다.
7. 민족사관 확립
아나키즘과 선비정신에 투철했던 단재 신채호
신채호는 민족주의자이자 아나키스트이다. 피압박 민족의 시각으로 바라본 세상과 민중의 시각으로 바라본 세상이 같았기에 신채호에게는 한국 민족주의와 국제주의인 아나키즘이 서로 모순되지 않았다. 이런 관점에서 쓴 신채호의 저작은 21세기에 되살아나야 할 역사학이다.
중국 여순감옥 정문. 저항적 선비인 단재 신채호는 끝내 10년의 형기를 채우지 못하고 여순감옥에서 옥사했다. [사진가 권태균]
‘의열단선언문’이라고도 불리는 ‘조선혁명선언’에 정치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일제의 식민지 국어, 국사 교육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한 것은 집필자가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이기 때문이었다.
‘조선혁명선언’은 “자녀가 나면 ‘일어(日語)를 국어(國語)라, 일문(日文)을 국문(國文)이라’ 하는 노예양성소학교로 보내고, 조선사람으로 혹 조선사를 읽게 된다 하면 ‘단군을 무(誣:왜곡)하여 소전오존(素<6214>嗚尊·스사노오노미코토: 일본 고대의 삼신(三神) 중 하나)의 형제’라 하며 ‘삼한시대 한강 이남을 일본의 땅’이라 한 일본놈들의 적은 대로 읽게 되며, 신문이나 잡지를 본다 하면 강도 정치를 찬미하는 반(半) 일본화한 노예적 문자뿐이며…”라고 일제의 국어·국사 교육을 강하게 비판했다.
일제는 1912년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諺文綴字法)’을 제정해 훈민정음의 표기법을 크게 왜곡했는데, 현행 ‘한글맞춤법통일안’은 아직도 이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우리는 R과 L, P와 F, B와 V를 구분할 수 없지만 세종이 편찬한 ‘훈민정음해례본(解例本)’은 이를 모두 구분해서 표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아직껏 일제 식민언어학자들이 만든 ‘언문철자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일제는 1916년에는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이후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식민사학을 조직적으로 유포시켰다.
고대사의 경우 단군 조선을 부인하는 한편 한(漢)나라의 식민통치기구였다는 한사군(漢四郡:낙랑·진번·임둔·현도)의 위치를 한강 이북이라고 강변했다. 또 한반도 남부에는 고대 일본의 식민통치기구인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가 있었다고 주장해 남북 모두를 식민지라고 창작했다.
그런데 석주 이상룡(李相龍)이 1911년 2월 만주로 망명하면서 쓴 기행문 ‘서사록(西徙錄)’에는 <수서(隋書)>를 인용해 ‘한사군은 압록강 이서(以西)를 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고 서술했다. <수서> 양제(煬帝) 본기에는 수(隋) 양제가 113만 대군을 24군으로 나누어 현 북경 지역인 탁군(탁郡)에서 평양까지 오가면서 각 군의 진군로를 명령하는데 그 진군로에 낙랑·현도·조선·요동 등의 지명이 있다. 이 지역들이 모두 만주에 있었다는 뜻이다.
이상룡뿐만 아니라 조선의 성호(星湖) 이익(李瀷)도 ‘조선사군(朝鮮四郡)’에서 한사군은 한반도가 아니라 만주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현재 한강 이북 지역에 한사군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중국의 동북공정은 일제 식민사학의 중국판 버전에 불과하며 아직도 이를 추종하는 국내 식민사학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후신에 불과하다.
사학자 신채호가 1928년 5월 아나키즘 사건으로 체포되었을 때 조선일보 신영우(申榮雨) 기자가 “오랫동안 끊어졌던 그의 소식이 의외의 사실로 나타나자 일세(一世)의 경악과 흥미가 크고 많았다”고 말한 대로 국내는 크게 놀랐다.
신채호는 1927년 9월 광동(廣東)의 중국인 아나키스트 진건(秦健)의 발의로 결성된 무정부주의자동방연맹에 한국 대표로 가담했다. 한국·중국·일본·대만·인도·안남(安南:베트남)의 6개국 대표 120여 명이 모여 결성한 이 조직은 A동방연맹이라고 약칭되는데 신채호는 이필현(李弼鉉)과 함께 한국 대표로 참석했다.
1 대만 기륭항, 신채호는 외국위체를 찾으러 갔다가 수상서에 체포되어 대련으로 압송되었다. 2 수인 모습의 신채호. 눈빛이 형형하다.
북경우편관리국 외국위체계(外國爲替係)에 근무하는 대만인 아나키스트 임병문(林炳文)은 외국위체 200장을 위조 인쇄해 북경우편관리국을 통해 일본·대만·조선·만주 등 32개소의 우편국에 유치위체(留置爲替)로 발송했다.
A동방연맹의 활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것인데 총 6만4000원에 달하는 이 거금을 찾기 위해 신채호는 대만, 임병문은 조선과 만주, 이필현은 일본지역으로 향했다.
임병문은 1928년 4월 25일 만주의 대련(大連)은행에서 위체 2000원을 가명으로 찾아서 북경의 이필현에게 부치는 데 성공했다.
고무된 임병문은 일본 후쿠오카(福岡)현 모지(門司)를 거쳐 고베(神戶)의 일본은행에서 2000원을 더 찾으려다 일경에 체포되었다.
유병택(柳炳澤)이란 가명을 사용했던 신채호도 일본 모지(門司)를 거쳐 1928년 5월 대만 기륭항(基隆港)에 도착했으나 수상서원(水上署員)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신채호는 1929년 2월 치안유지법 위반 및 유가증권위조행사, 사기 등의 혐의로 대련지방법원에 서는데, 재판장 아즈미(安住)가 “무엇에 쓰려고 한 짓인가?”라고 묻자 “동방연맹 자금으로 쓰되 우선 주의(主義) 선전잡지를 발간하여 동지를 규합코자 한 것”이라고 답했다. “사기(詐欺)를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나?”라고 묻자 “우리 ○○가 ○○를 ○○하기 위하여 취하는 수단은 모두 정당한 것이니 사기가 아니며…양심에 부끄러움이나 거리낌이 없소(동아일보 1929년 2월 12일)”라고 대답했다.
총독부가 삭제한 부분은 “우리 겨레가 나라를 회복하기 위하여”, 또는 “우리 민중이 해방을 쟁취하기 위하여”라는 등의 말일 것이다.
신채호는 동방연맹에는 ‘이필현의 소개로 가입하였는가’라는 질문에 임병문의 소개로 가입했다고 대답했다. 임병문이 체포된 지 넉 달 만에 옥사(獄死)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임병문은 이때 죽지 않고 석방되어 1931년 5월까지 살았다는 그의 아들인 대만 작가 임해음(林海音)의 연보가 발견되어 의문이 생기고 있다(최옥산, <문학자 단재 신채호론>).
재판장이 “동방연맹에는 대정(大正) 14년(1926)경에 입회하였으며 그때 이필현과 안 일이 있는가?”라고 묻자 “일본 연대를 써보지 못하여 대정 몇 년이란 것은 모르며 어쨌든지 지금부터 3년 전 여름에 입회하였노라”고 답했다.
일제의 모든 정체(政體)를 부정하기 때문에 대정(大正) 운운하는 일본 연호를 모른다고 말한 것이다. 재판장이 동방연맹의 목적에 대해서 묻자 “무정부주의로 동방의 기성 국체를 변혁하여 다 같은 자유로서 잘 살자는 것이요”라고 답했다.
그는 1930년 5월 수감 2년 만에 1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旅順)감옥에서 수형생활을 하게 되었다. 신채호가 미결수 신분이던 1928년 11월 조선일보 기자 이관용(李灌鎔)은 대련경찰서 마키다(牧田) 경무주임의 소개로 신채호를 면회했다.
이때 신채호는 이관용에게 HG 웰스의 일본어판 <세계문화사>와 일문(日文)을 설명한 에스페란토 문전(文典)을 부탁하면서, “그밖에는 윤백호집(尹白湖集)을 육당(六堂)에게 말하였는데 어찌 되었는지…”라고 말했다.
조선 후기 주자학자들에게 이단으로 몰려 사형당한 북벌론자 백호 윤휴의 문집을 육당 최남선에게 부탁했는데 소식이 없다는 뜻이다. 주자학에 반기를 들었던 백호 윤휴 문집을 감옥에서 찾은 신채호는 한국 사상사에 나타나는 저항적 선비정신의 계승자라 할 수 있다.
조선일보 신영우 기자는 1932년 12월에 여순(旅順)감옥에서 신채호를 면회하면서, “옥중에서 다소 책자(冊子)를 보실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했다. 신채호는 “될 수 있는 대로 책을 봅니다. 노역에 종사하여서 시간은 없지만 한 10분씩 쉬는 동안에 될 수 있는 대로 귀중한 시간을 그대로 보내기 아까워서 조금씩이라도 책 보는 데 힘씁니다”라고 답했다.
식민사학자들이 조선사편수회에서 총독부의 자금 지원을 받으면서 자국사 왜곡에 열중할 때 신채호는 감옥에서 노역 도중 틈틈이 자국사를 연구했다. 신채호는 안재홍의 주선으로 1931년 6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조선일보에 <조선사> <조선상고문화사> 등을 연재했다.
당시 국내 신문들은 1면 상단에 대정(大正:1912~25), 소화(昭和:1926~) 등의 일본 연호를 표기했는데 신채호는 일본 연호를 사용하는 신문에는 글을 쓰고 싶지 않다고 중단을 요청하기도 했지만 이 원고료는 부인 박자혜(朴慈惠)와 차남 신두범(申斗凡)의 요긴한 생활비가 되었다.
신영우가 “건강이 앞으로 8년을 계속하겠습니까?”라고 묻자 “이대로만 간다면 8년의 고역(苦役)은 능히 견디어 가겠다고 자신합니다”라고 답했지만 체포 당시(1928) 만 마흔여덟으로 병약했던 신채호에게 살을 에는 만주 추위를 이겨내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신영우에게 “<조선 사색당쟁사(四色黨爭史)>와 <육가야사(六伽倻史)> 만은 조선에서 내가 아니면 능히 정확한 저작을 못하리라고 믿고 있다”면서 출소 후 이런 책을 쓰겠다던 신채호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1936년 2월 21일 뇌일혈로 세상을 떠났다.
국어학자 이윤재는 1936년 4월 <조광(朝光)>지에 ‘북경시대의 단재’라는 회상기를 싣는데 북경에서 신채호가 ‘조선사통론, 문화편, 사상변천편, 강역고(疆域考), 인물고(人物考)’라는 다섯 권짜리 저작을 보여주었다면서 “그 원고가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고 아쉬워하고 있다. 그 원고가 아쉽기는 동북공정이 기승을 부리고, 아직도 식민사학이 건재한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다.
8.재중국 독립운동기지 - 김종진, 김좌진과 함께 북만주에 ‘이상촌’ 추진
재중국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두 가지 방향으로 사업을 전개했다. 하나는 의열단이나 다물단 같은 행동조직을 만들어 일제 식민통치기관을 직접 공격하거나 친일분자들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또 하나는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이상촌을 건설하는 사업이었다.
중국 운남성 곤명의 운남군관학교. 김종진이 졸업한 이 학교는 중국의 주덕과 엽검영, 주보중, 그리고 북한의 최용건도 다녔던 명문 군사학교였다. [사진가 권태균]
1923년 늦가을 북경 모아호동(帽兒胡同) 아문구(衙門區). 모아호동은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의 황후 완용(婉容)의 집이 있는 귀족 거주지이자 정원이 잘 가꿔진 사합원(四合院)이 즐비한 곳이다. 고궁(故宮)에서 불과 3㎞ 떨어진 이곳에 유림(儒林) 김창숙을 비롯해 한인 아나키스트 이을규·이정규 형제와 백정기 등이 잠입했다. 이들은 여기 사는 한인 고명복 모녀 집에 들어가 패물 등 값진 물건을 빼내 돌아왔다. 이튿날 각 신문에 이 사건이 대서특필되었고, 경계가 삼엄한 귀족 거주지가 털렸다는 소식에 모두 깜짝 놀랐다.
이 사건은 재중국 아나키스트들이 구상한 이상촌 건설 사업이었던 영정하(永定河) 개간 사업과 관련이 있었다. 우당(友堂) 이회영과 이을규·이정규 형제, 정화암 등은 북경과 천진 사이를 흐르는 영정하 주위의 하천부지를 개간해 이상촌을 건설하고 여기에서 나오는 자금으로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려고 계획했다.
여기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정화암이 1921년 말 국내로 잠입했다. 정화암은 미곡상 등을 경영하기도 했지만 막대한 자금을 마련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는 약 1년8개월 후 재력가였던 고명복 모녀를 대동해 북경으로 돌아왔다.
고명복의 이모는 1906년 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한 고(故) 이근홍(李根洪)의 첩이었는데 정화암은 자서전 <몸으로 쓴 근세사>에서 “(그 이모는) 사정이 있어서 동행하지 못했다”라고 전하고 있다. 1923년께 국내 신문에는 이근홍의 부인 정씨가 아들 이위룡(李渭龍)을 상대로 상속무효 소송을 전개한 사실을 보도하고 있는데, 아마 이 사건 때문에 함께 못 왔을 것이다.
그 이모는 윤택영(尹澤榮)에게 고명복 모녀를 모아호동 아문구 내로 이주시키고 나서 자신도 북경으로 왔다. 윤택영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의 계비(繼妃) 순정황후 윤씨의 부친으로 일제로부터 후작(侯爵)의 작위를 받은 매국적(賣國賊)이었다.
그는 막대한 가산을 탕진하고 사기행각에 나서 빚을 잔뜩 지고 북경으로 도주했는데 부채왕(負債王)이란 별명도 갖고 있었다. 고명복 모녀는 영정하 개간계획이 독립운동과 관련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연락을 끊고 윤택영에게 재산관리를 맡겼다. 그래서 아나키스트들이 고명복 모녀의 집에 잠입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정도 자금으로 개간사업을 진행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대신 이 자금으로 경찰의 삼엄한 추적이 수그러든 1924년 4월 말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이하 무련)을 결성할 수 있었다.
군관학교 시절의 김종진. 졸업 후 이회영의 감화를 받아 아나키스트가 된 다음 만주로 가서 한족총연합회를 만든다. 2 이을규. 김종진에게 이회영이 아나키스트가 되었음을 알려준 인물이다
1923년 9월에는 중국인 아나키스트 진위기(陳偉器) 등과 이상촌인 양도촌(洋濤村) 건설 사업을 전개했다. 진위기의 친구 주모(周某)가 호남성 동정호(洞庭湖) 서쪽 한수현(漢壽縣) 양도촌에 광대한 농지를 갖고 있었는데, 여기에 한인 인삼 경작자를 이주시키고 이상농촌건설조합을 만들어 공동경작·공동소비·공동소유하는 이상촌을 건설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주씨 마을 내부의 사정으로 수포로 돌아갔다.
이상촌 건설계획이 무산되면서 아나키스트들은 극심한 생활고에 허덕였다. 전 가산을 정리해 약 40여만원(현재 약 600억원)에 달하는 거금을 가지고 만주로 망명했던 우당 이회영(절망을 넘어서⑥일가망명> 참조)도 마찬가지였다.
북경에서 이회영과 친밀하게 지냈던 김창숙은 자서전 <벽옹 73년 회상기(翁七十三年回想記)>에서 “그(이회영)의 얼굴을 살펴보니 자못 초췌한 빛이 역력했다…그의 아들 규학(圭鶴)에게 물었더니, ‘이틀 동안 밥을 짓지 못하였고 의복도 모두 전당포에 잡혔습니다…’”라고 해 김창숙은 주머니를 털어서 식량과 땔감을 사주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회영의 아들 이규창도 자서전 <운명의 여진>에서 북경 천안문 남쪽 영정문(永定門) 내 관음사(觀音寺) 호동(胡同)에 살 때 “일주일에 세 번 밥을 지어 먹으면 재수가 대통한 것”이었다며 제일 하층민이 먹는 ‘짜도미(雜豆米)’로 쑨 죽 한 사발로 때우는 때가 많았다고 회고했다.
정화암도 1927년 7월 복건성 천주(泉州)로 가는 도중 천진(天津)에 들렀는데, “남개(南開: 천진의 한 지명)의 우당 이회영 집을 찾아갔더니 여전히 생활이 어려워 식구들의 참상이 말이 아니었다. 끼니도 못 잇고 굶은 채 누워 있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이렇게 극도의 곤궁에 시달릴 무렵 천진 이회영의 우거(寓居)를 찾은 인물이 김좌진의 친척 동생 김종진(金宗鎭)이었다. 김종진은 고향 홍성에서 3·1만세 시위를 주도한 후 1920년 북경으로 망명해 이회영을 만난 적이 있었다.
김종진은 중국 군관학교에 입학해서 군사 실력을 쌓기 원했는데, 이을규의 <시야(是也) 김종진 선생전>은 이런 구상에 대해 노장년층에서 ‘청년들이 일선(一線)에서 후퇴하면 그동안 누가 운동을 계속하라는 것이냐’ 면서 반대하는 의견이 많았지만 이회영은 김종진에게 상해의 신규식(申圭植)과 이시영(李始榮)을 소개했다고 전한다.
김종진은 이들을 통해 운남성 곤명(昆明)에 있는 운남(雲南)군관학교에 입학했다. 운남성 독군(督軍) 당계요(唐繼堯)가 신규식 등과 친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1921년 4월께 군관학교에 입학한 김종진은 1925년 4월 졸업한 후 광동(廣東)·상해·남경(南京)·무한(武漢) 등지에서 북벌군과 군벌이 충돌하는 중국 내전의 현장을 경험하고 1927년 가을 천진의 이회영을 찾은 것이다. 둘은 빈민가 토방에서 염죽(鹽粥) 한 종기를 앞에 놓고 수일간 토론했다.
이회영은 자신이 ‘각금시이작비(覺今是而昨非: 지금 깨달으니 과거가 잘못되었음)식으로 무정부주의자가 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회영은 구한말에 이미 ‘이서(吏胥)와 노비에 대한 차별적인 언사부터 경어(敬語)로 바꾸려고 노력’했다고 전하는데, 그 배경에 양명학(陽明學)이 있었다.
망국 후 만주로 망명했던 강화도의 양명학자들은 물론 이회영과 이상설도 모두 양명학을 공부했다. 12세기 말 남송(南宋)의 주희(朱熹: 주자)가 집대성한 주자학(朱子學: 성리학)이 양반 사대부 계급의 선천적 우월성을 주장하는 반면 16세기 초 명나라의 왕양명(王陽明)은 모든 직업이 평등하다는 이업동도(異業同道)를 주창했다.
이회영은 고종 망명계획에 관여한 것 때문에 복벽파(復벽派: 왕정복고파)란 오해도 받았는데, 김종진에게 ‘내가 고종을 앞세우려고 한 것은 복벽적(復벽的) 봉건사상에서가 아니라’ 한국독립문제를 세계적인 정치문제로 제기하기 위한 ‘하나의 방책에 불과했다’고 설명했다.
이회영은 또 ‘무정부주의자들의 방법론인 자유연합이 너무 허황된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자유연합이 독립운동의 견지에서 가장 적절한 이론”이라면서 “남들이 강철의 조직이라는 공산당도 적색(赤色) 러시아처럼 정권을 잡은 후에 강제와 복종의 규율이 생긴 것이지 그 전에는 운동자들의 자유합의로 행동했다”고 분석했다.
‘독립 후 어떤 사회를 건설해야 하겠는가’라는 질문에는 ‘각 국가와 민족이 모두 평등해야 하고, 민족 내부에서도 자유 평등의 원칙 아래 국민 상호 간에 일체의 불평등·부자유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권력집중을 피하고 지방 분권적인 지방자치제를 확립해야 한다면서 ‘지방자치체들의 연합으로 중앙정치기구를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제체제에 대해서는 “재산의 사회성에 비추어 일체 재산의 사회화를 원칙으로 사회적 계획 아래 관리해야 하지만, 이 경우 자유를 제약할 위험이 있으므로 사회적 자유평등의 원리에 모순이 없도록 관리와 운영이 합리화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교육에 대해서도 “사회 전체의 비용으로 부담하고 실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회영은 “무정부주의는 공산주의와 달라서 꼭 획일성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니까 그 기본원리를 살려 나가면서 그 민족의 생활습관이나 전통과 문화, 또는 경제적 실정에 맞게 적절히 변화를 가미하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회영은 “무정부주의의 궁극의 목적은 대동(大同)의 세계를 추구하는 데 있다”고 말했는데, 공자가 <예기(禮記)> <예운(禮運)>편에서 말한 대동(大同)사회는 모든 사람들이 고루 잘사는 사회를 뜻한다. 한국 아나키즘이 해외 이론을 무조건적으로 수입한 것이 아니라 우리 전통 사상 속에서 그 장점을 수용했다는 뜻이다.
이회영은 ‘인간은 선사시대부터 상호부조(相互扶助)하고 협동노작(協同勞作)하는 사회적 본능이 있었다’면서 “태고로부터 연면히 내려온 인간성의 본능은 선한 것”이라고 간파했다(<시야 김종진 선생전> <한국 아나키즘 운동사>).
이회영은 “목적이 수단과 방법을 규정짓는 것이지 수단과 방법이 목적을 규정할 수 없다”면서 “독립운동은 운동 자체가 해방과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라고도 말했다. 때로 한 개인의 결단이 큰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는데, 김종진이 아나키즘을 받아들인 것도 마찬가지 사례다. 김종진은 만주로 가서 김좌진과 함께 아나키스트와 민족주의자의 연합기구인 한족총연합회를 결성해 북만주에 이상촌 건설을 시도한다
9. 한족총련 결성 - 공산주의자와 틀어진 김좌진, 아나키스트와 연대
이상과 현실의 조화만큼 어려운 과제도 없다. 아나키스트들은 상황이 아무리 어려워도 자유와 평등이 실현되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 결과 많은 어려움을 겪지만 북만주에서 김좌진 장군과 손잡고 이상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김좌진 장군과 아나키스트들이 한족총연합회를 운영했던 산시(山市)의 역. 대련에서 만주리까지 가는 중동선의 요지였다. [사진가 권태균]
1927년 10월 하순, 북만주 일대를 관할하던 신민부(新民府) 김좌진(金佐鎭) 장군의 목단강(牧丹江) 거처에 족제(族弟) 김종진이 찾아왔다. 대련에서 소·만 국경 만주리까지 연결하는 2400㎞의 중동선(中東線)상에서 목단강, 영안(寧安), 해림(海林) 등은 신민부의 요지였다. 김종진이 김좌진을 찾았을 무렵 신민부의 상황은 그리 좋지 못했다.
1925년 3월 발족한 신민부는 김혁(金爀) 등이 이끄는 대한독립군정서와 김좌진 등이 이끄는 대한독립군단이라는 두 군사세력에 민간세력이 가담한 조직이었다. 김혁이 중앙집행위원장, 김좌진이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이었는데 목릉현 소추풍에 성동(城東)사관학교를 세워 무관들을 양성했을 정도로 무장투쟁을 중시했다.
남쪽으로는 백두산 북방의 돈화(敦化)·안도(安圖)에서부터 북쪽으로는 러시아 국경 부근의 밀산(密山)까지 15~16개 현에 50만여 명의 한인(韓人)들을 관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민부 결성 직후인 1925년 6월 만주 군벌 장작림(張作霖)이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三矢宮松)와 미쓰야협약(三矢協約)을 맺고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해 조선총독부에 넘겨주면서 사정이 급격히 나빠졌다. 심지어 신민부 중앙집행위원장 김혁까지체포되어 조선총독부에 넘겨지는 상황이었다.
격분한 김좌진은 중국 국민당의 자금과무기지원을 받아 신민부를 중국 중앙군 제8로군으로 개편해서 장작림 군벌을 타도하려 계획했다. 그러나 국민당의 만주공작 책임자 공패성(貢沛誠) 등이 장작림에게 체포되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다(만주의 삼부⑧북만주의 통합바람 참조).
이때 신민부가 장작림 군벌 정권 타도에 나섰다면 독립운동사에 지각변동이 일어났을 것이다. 부패한 군벌정권이 의기충천한 독립군들을 상대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1 산시역 모습이다. 2 김좌진 장군이 거주하던 산시 정미소 자리. 단군 초상이 보인다. 신민부 군정파에는 대종교 계통의 민족주의자들이 다수 가담해 있었다.
이 무렵 신민부에서 활동했던 이강훈(李康勳)은 “당시 김좌진 장군은 중국 국민당의 밀사와 약속한 것이 수포로 돌아가 크게 실망하고 계셨다. 아무리 큰일이 일어나도 눈 한 번 깜짝하지 않는 분인데 이번만큼은 무척 상심이 크신 모양이었다(민족해방운동과 나(1994))”라고 회상했을 정도다.
설상가상으로 신민부는 1927년 12월 위하(葦河)현 석두하자에서 열린 총회에서 김좌진의 군정파(軍政派)와 김돈(金墩) 등의 민정파(民政派)로 양분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제 발로 찾아온 김종진은 김좌진에게 큰 힘이었다.
그에겐 김좌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운동 노선과 구체적인 방법론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종진은 먼저 만주를 근거로 한 한국 독립운동의 기본계획안을 작성해 제출했다.
김종진은 일제와 만주 토착지주들로부터 이중의 착취를 당하는 만주 교포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①의식주 ②토지 ③협조와 비호의 따뜻한 손길’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만주 한인들의 생활공동체로서 경제적 협력기구를 조직하고, 이를 중심으로 농촌자치제를 실시하려고 구상했다. 농사를 짓는 한편 군사훈련도 받는 병농(兵農)일치제의 둔전양병제(屯田養兵制)가 그 방안이었다(시야 김종진 선생전).
김종진은 탁상공론만 일삼는 지식인이 아니었다. 그는 먼저 북만주의 지리를 숙지하고 독립운동 현황과 교포들의 생활상을 체험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영하 30~40도의 혹한을 무릅쓰고 1928년 1월 중동선 해림역을 출발해 8개월 동안 신민부 전 지역을 방문했다.
다시 해림으로 귀환한 김종진은 답사 결과를 김좌진에게 보고하면서 앞으로의 대책을 건의했다. 한인들의 생활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면서 독립운동도 전개할 수 있는 조직체를 꾸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때만 해도 김좌진은 김종진의 아나키즘에 관심은 있었지만 단체 통합까지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김좌진에게 더 중요한 것은 삼부(三府:참의부·정의부·신민부) 통합문제였다. 김좌진의 신민부 군정파가 1928년 9월 길림 근방 신안둔(新安屯)에서 열린 삼부 통합회의에 대표를 파견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민정파에서도 대표를 파견하면서 대표권 문제가 발생했다. 민정파가 정의부를 지지하자 군정파는 삼부통합회의를 탈퇴하고 1928년 12월 하순 정의부의 김동삼, 참의부의 김승학 등과 혁신의회를 조직하고 ‘유일독립당재만책진회(在滿策進會: 이하 책진회)’를 만들어 만주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에 나섰다.
그러자 신민부 민정파는 1929년 3월 길림에서 참의부의 심용준(沈龍俊), 정의부의 현익철(玄益哲) 등과 국민부(國民府)를 결성하는 것으로 혁신의회의 통합 요구를 일축했다. 김좌진이 이끄는 신민부 군정파는 통합운동을 포기하고 책진회를 떠나 북만지역으로 돌아갔다. 어떻게 보면 김좌진의 신민부 군정파가 고립되었다고 볼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에 아나키스트들과 더욱 가까워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1929년 7월 김종진·이을규·유림(柳林)·이붕해(李鵬海)·엄형순(嚴亨淳)·이강훈·김야봉(金野蓬)·이달(李達)·이준근(李俊根) 등 17명의 아나키스트들은 북만주 해림의 소학교에서 아나키스트들과 신민부 일부 인사들의 연합체인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滿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이하 연맹)을 결성했다.
연맹은 3개항의 강령에서 “①우리는 인간의 존엄과 개인의 자유를 완전 보장하는 무지배 사회의 구현을 기약한다… ③각인은 능력껏 생산에 근로를 바치며 각인의 수요에응하여 소비하는 경제 질서의 확립을 기한다” (이을규, 시야 김종진 선생전)라고 규정했다. 중요한 것은 연맹의 당명 강령 제6항에서 “우리는 항일독립전선에서 민족주의자들과는 우군적(友軍的)인 협조와 협동작전적 의무를 갖는다”고 명기했다는 점이다.
항일투쟁에서 공산주의가 아닌 민족주의와 협동전선을 펼치겠다는 뜻이었다. 삼부(三府) 중에서 신민부는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이 가장 강했다. 1921년 6월 러시아 자유시(알렉세예프스크)에서 적군(赤軍)에 의해 독립군이 참살된 자유시 참변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여기에 조선공산당 만주총국(滿洲總局)이 신민부 조직 와해 공작에 나선 것이 상황을 악화시켰다. 1927년 9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위원이었던 김낙준(金洛俊: 김찬)은 1931년 일제 신문조서에서 만주에서 자신의 주요 활동 중에 “신민회에 대한 반대…”가 있었다고 진술했다.
그리고 “신민부는 조선의 독립을 표방하지만 사실은 독립운동이 아니라 독립운동의 가면을 쓰고 자금을 징수해서 농민들을 괴롭히고 있다” (김낙준 조서)고 선전했다고 덧붙였다. 김낙준은 1928년 9월 정의부의 중앙집행위원이 되고 이후에도 만주에서 민족통일전선의 지속을 주장하다가 그해 12월 만주 총국 위원에서 해임되는데, 정작 북만주에서는 신민부 와해 공작에 나섰다.
그 결과 신민부는 ‘주의(主義)에는 주의로 맞서야 한다’고 주장하던 아나키스트들에게 더욱 다가갔고 1929년 7월 21일 신민부와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의 연합조직인 재만한족총연합회(在滿韓族總聯合會:이하 한족총련)가 결성되었다.
위원장 김좌진, 부위원장 권화산(權華山)등 최고지도부에는 신민부 출신을 추대하고 농무(農務) 및 조직선전위원장 김종진, 교육위원장 이을규 등 아나키스트들은 실무를 책임졌다. 연합회는 강령에서 “1. 본회는 국가의 완전한 독립과 민족의 철저한 해방을 도모한다”고 명기했으며, 사업정강에서는 “혁명: 1. 파괴, 암살, 폭동 등 일체 폭력운동을 적극적으로 진행한다. 2. 일반 민중은 혁명화하고, 혁명은 군사화한다…”라고 규정했다.
신민부의 무장항일투쟁 전통과 의열단의 혁명노선을 결합시킨 것이다. 또한 중국인 지주에게 토지를 공동으로 빌려서 공동으로 경작하는 공농제(共農制)의 적극적 실시를 주장했다. 또한 ‘공동판매, 공동소비조합 설치를 장려하고, 농촌식산금융조합을 설립’해 이상적인 농촌공동체를 만들려고 시도했다.
또 중앙집권제를 배격하고 지방자치제 실시를 명기했는데, 아나키스트들 스스로 “4천년 조선 역사 이래 새로운 방식에 의한 농민자체의 조직체”(산시사변의 진상, 탈환 1930년 4월)라고 자부할 정도로 새로운 운동방향이었다.
정화암이 “지금까지 대부분의(독립운동)조직들은…교민 위에 군림하는 관료주의적 조직”으로서 ‘독립운동자금이나 조직운영비 명목으로 갹출되는 돈 때문에(한인 교포들은) 생활에 큰 타격을 받고 있었다’(몸으로 쓴 근세사)라고 쓰고 있었는데, 아나키스트들은 자신들의 식생활은 자신들이 해결하겠다고 선언해 농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일종의 직업혁명가로서 자체적으로 생계를 해결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한족총련의 아나키스트 활동가들의 생계는 곤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때 복음이 들려왔다. 국내로 들어갔던 아나키스트 신현상이 친지 최석영과 충청도 호서은행의 거금을 빼돌려 북경으로 들어왔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10. 거성 김좌진 암살사건 - 청산리 대첩의 영웅, 공산주의 총탄에 스러지다
우파는 아나키즘을 공산주의의 사촌이라고 공격했지만 공산주의를 가장 먼저 비판한 것도 아나키스트들이었다. 특히 볼셰비키 러시아가 전체주의 사회로 변하면서 아나키스트들은 공산주의자들과 적대적 관계로 변했다. 김좌진 장군의 암살 사건도 이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김좌진 장군이 암살당한 북만주 산시역 부근의 정미소. 아나키스트와 연합했던 김좌진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소속 한인에게 암살당했다. [사진가 권태균]
1930년 벽두. 김좌진(金佐鎭) 장군은 오랜만에 활기에 차서 새해를 맞았다. 전년 7월 결성된 재만한족총연합회(在滿韓族總聯合會: 이하 한족총련)가 북만주지역 운동에 새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1월 20일 오후 김좌진은 중동선(中東線) 산시(山市)역 근처에 있던 한족총련 소속 도정(搗精)공장으로 나갔다. 중동선 일대의 한인들이 생산하는 수만 석의 미곡을 도정해 위탁판매 과정에서 중국 상인들에게 농단을 당하지 않게 설치한 정미소였다.
그날 오후 4시 김좌진은 이 정미소에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소속 한인(韓人)의 총에 사망하고 말았다. 공산주의 세력이 김좌진 제거라는 극단의 선택을 한 배경에 아나키스트들과의 갈등이 있었다. 김좌진 등이 주도하는 신민부 군정파는 ‘독립운동의 가면을 쓰고 자금을 징수한다’는 공산주의자들의 비난에 이론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신민부의 자금 징수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신민부는 1925년 10월 총회에서 매호당 6원의 의무금 징수를 결의하고 가능한 지역부터 징수해 목릉현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에서 500여 명의 독립군 장교를 양성하는 비용 등에 충당했다. 그러나 신민부 군정파는 공산주의자들의 선전 공세에 대응책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공산주의에 대한 반박 이론을 갖고 있었고 자신들의 이상을 펼칠 활동공간이 필요했던 아나키스트들과 결합해 한족총련을 결성했던 것이다.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의 6개 항의 당면 강령 중 1번이 “우리는 재만동포의 항일 반공사상의 계몽 및 생활개혁의 계몽에 헌신한다”는 것이었다. 항일과 반공을 같은 가치처럼 대했던 것은 볼셰비키 혁명 후의 러시아 상황 때문이었다. 아나키스트 바쿠닌은 1870년에 이미 “그에게 러시아 인민 전체에 군림할 왕좌를 주거나 독재권을 주어 보라……일 년도 못 가서 그는 차르(러시아 황제) 자신보다 더 악독한 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코로코트'지(誌), 제네바)”라고 공산주의의 전체주의화를 예견했다.
러시아 혁명에 참여했다가 서유럽으로 망명했던 볼린은 “비록 잠정적이고 과도기적인 형태라 할지라도 국가사회주의자들에게 그 운명이 맡겨진 혁명은 반드시 파산하고야 만다”고 주장했다.
충남 홍성의 김좌진 장군 사당.
김좌진은 독립운동에 나서기 전 집안 노비들을 모두 해방시켰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다니엘 게렝은 “사실상 사회주의 정부와 사회혁명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요소다. 양자를 화해시킬 수는 없다'아나키즘')”고 서술했던 것이다. 이회영도 1921년 5월 러시아에 갔던 조소앙(趙素昻)이 북경으로 돌아오자 그 상황을 물은 후 “그러한 독재권을 장악하고 인민을 지배하는 정치는 옛날의 절대 왕권 정치보다도 더 심한 폭력 정치이니 그러한 사회에 평등이 있을 수 없으며, 마치 새 왕조가 세워지면 전날의 천민이 귀족이 되듯이 신흥 지배계급이 나타나지 않겠는가?”라고 비판했다.
우익은 물론 좌익 전체주의에도 아나키스트들은 반발했다. 이을규가 “소위 좌익이란 자들이 그 지방에 끼어 있거나 넘나드는 곳에서는 반드시 운동자 상호간은 물론이요 주민들 사이에서도 불화와 알력이 일어나고 있었다('시야 김종진 선생전')”고 회고한 것처럼 정서적인 반감도 심했다.
김종진은 “공산주의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무시하고 유린하는 강권노예적인 사대주의적 독재사상이기에 민족자주독립과 국민의 자유인권을 위해 투쟁하는 우리로서는 배격해야 될 반동사상이라는 것을 적극 계몽 선전하자는 결론을 얻었다('시야 김종진 선생전')”고 말했다.
그런 김종진에게 공산주의자 김남천(金南天)이 찾아와 타협을 요청한 적이 있었다. 대화가 결렬되자 김남천은 토론회를 개최해 민중의 판단을 받자고 제안했고, 아나키스트 김종진·이을규와 김남천 외 2명의 공산주의자 사이에 토론회가 열렸다. 토론 당사자 이을규는 그 상황을 생생하게 전한다.
“만주에서 그들의 반민족적, 비인도적인 행동을 열거 성토하여 ‘민족의 죄인이요, 인류의 반역자’라고 단죄하고 ‘소련의 주구는 물러가라’고 호령을 하자 청중들이 만세를 부르며 일제히 호령하는 바람에 그 자들 10여 명 일당은 형세 불리함을 알고 도망했다.(<시야 김종진 선생전>)”
공산주의 세력을 항일(抗日) 공동전선의 우군(友軍)으로 바라보지 않고, ‘민족의 죄인’ ‘인류의 반역자’ ‘소련의 주구’로 공격했으니 타협이 불가능했다. 한족총련에서 활동했던 정화암은 “해림(海林)을 중심으로 한 한족총련 지역과 영안(寧安)현을 중심으로 한 공산지역은 항상 팽팽한 대결상태에 있었다. 어쩌다 잘못하여 상대방 지역으로 들어가게 되면 서로 죽고 죽이는 비극이 벌어지기도 했다(<몸으로 쓴 근세사>)”고 회고했을 정도였다.
김좌진 장군의 고향인 충남 홍성에 세워진 동상.
한족총련은 이처럼 일제와 공산주의 세력 모두를 적으로 돌린 채 조직 확장에 나섰다. 재만한인무정부주의자연맹의 강령 중에 “우리는 한 개의 농민으로서 농민대중과 같이 공동으로 노작(勞作)하여 자력으로 자기 생활을 영위”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한 명의 농민’을 자처하면서 생활비를 자체 해결하는 아나키스트들에게 농민들이 신뢰를 보낸 것은 당연했다. 한족총련 교육위원장 이을규는 당시 활동을 이렇게 회고했다.
“과거의 다른 단체와 같이 권력과 위세를 부리지도 않으며 공산당들과 같이 모략이나 또는 무조건 나를 따르라는 식의 궤휼이나 오만도 없이 자기네(농민)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다같이 일하고……부락적으로 집결해 이웃끼리 서로 도우며 안전하게 살자고 하는데 누구 하나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또 중국 지주와 중국 관청과의 토지 매매, 임대 등의 교섭을 대행해 준다고 하니 이런 고맙고 편리한 일이 또 있겠는가. 이것이야말로 하늘에서 떨어진 복이요 캄캄한 밤중의 햇빛이었다.(이을규, <시야 김종진 선생전>)”
그러나 러시아 국경과 접해 있었던 북만주 지역은 만주의 다른 지역보다 공산주의 세력이 강한 지역이었기에 그만큼 공산주의 세력의 반발도 거셌고, 그 결과가 극단적인 암살로 나타났던 것이다. 테러를 부정하면서 결정적 시기에 봉기할 것을 주장하는 공산주의 혁명 이론과도 다른 일탈이었다. 더구나 그 대상이 청산리 대첩의 영웅 김좌진 장군이었으니 만주는 물론 국내도 큰 충격이었다. 김좌진이 암살되자 한족총련에서는 즉각 범인색출에 나섰다.
“군사위원장 이붕해(李鵬海)씨의 지휘로 치안대의 일부는 그날 밤으로 해림역 부근에 있던 적마(赤魔)의 소굴(巢窟)을 급습해 김봉환(金奉煥: 일명 金一星) 외 1명을 잡는 동시에 놈들의 문서를 압수해서 이번 흉계가 김봉환의 지시라는 것과 직접 하수자가 박상실(朴尙實: 일명 朴尙範, 金信俊)이라는 것이 밝혀졌으나 하수자 박상실은 끝내 잡지 못했으므로 수일간 엄중한 조사를 마친 후 김봉환 외 1명을 처단했다.(<시야 김종진 선생전>)”
김봉환의 체포 장소에 대해 정화암은 ‘예배당에 숨어 있던 김봉환을 잡아 조사한 후 처형했다’고 조금 다르게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박상실도 무사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동아일보 1931년 9월 11일자는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모처에 도착한 정보에 따르면……전 신민부 수령 백야 김좌진씨를 총살한 박상실(최영석)이 이번에 아성현(阿城縣) 호로군(護路軍)총사령부의 손에 체포되어 그곳 영심처(令審處)에서 사형의 판결을 받고 수일 전에 형을 집행코자 봉천(奉天)으로 압송되었다 한다.”
동아일보는 만주 아성(阿城)현의 조선인 공산당 11명이 중국 관헌에게 체포될 때 박상실도 체포되었는데 때마침 민족주의 단체 행동대장 고강산(高岡山)도 체포되었다가 박상실을 알아보고 알려서 사형을 받게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근래 연변에서는 김좌진의 암살범이 박상실이 아니라 공도진(公道珍: 일명 李福林)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고려공청 만주총국 선전부장 양환준의 증언에 바탕을 둔 것이다. 양환준은 ‘조공 만주총국에서 김좌진을 제거하기로 결정하고 1929년 가을 공도진을 산시에 잠입시켜 이듬해 1월 제거한 것’이라면서 자신이 직접 만나서 들은 이야기라고 주장했다(<연변문사자료, 제4집>, 1985년 11월).
이복림으로도 불리는 공도진은 조공 만주총국의 지시로 김좌진을 살해한 후 반일유격대에 가담해 동북항일련군 제3군 제1사 정치부 주임, 중국공산당 북만임시성위(臨時省委) 조직부장을 역임했다가 1937년 전사했다는 인물이다.
한족총련은 엄동설한에 땅을 팔 수 없어 우선 초빈(初殯)했다가 4월에야 해림과 산시 사이의 석하역(石河驛) 동북방 산록에 안치했는데, 전 만주와 국내에서까지 수천 명의 조문객이 운집했다. 김좌진이 살해된 이후에도 한족총련은 조직을 정비하고 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자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에 잠입했던 신현상이 거금을 구해 북경으로 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을규는 “이 소식은 선생(김종진)과 재만무정부주의자 연맹원들은 물론 한족총련 간부들에게도 참으로 기사회생의 기쁨이었다”라면서 김종진과 함께 희망에 차서 북경으로 향했다.
11. 북만주 운동의 종말 - 아나키스트 그룹, 호서은행서 6만원 빼냈지만 허사
사상운동에서는 큰 틀의 성격 규정이 중요하다. 대일항쟁기 때 아나키즘과 공산주의 세력은 사상의 적이란 다른 측면과 함께 둘 다 항일 세력이란 공통점이 있었다. 양자는 같은 항일세력이란 공통점에서 연대해야 했지만 사상의 적이란 측면에서 부딪치면서 숱한 비극을 낳았다
사상운동에서는 큰 틀의 성격 규정이 중요하다. 대일항쟁기 때 아나키즘과 공산주의 세력은 사상의 적이란 다른 측면과 함께 둘 다 항일 세력이란 공통점이 있었다. 양자는 같은 항일세력이란 공통점에서 연대해야 했지만 사상의 적이란 측면에서 부딪치면서 숱한 비극을 낳았다
천진의 금탕교. 이회영과 한인 아나키스트들의 집단 주거지인 금탕교장이 다리 부근에 있었다. 다리 양쪽은 중국의 경제개발로 인해 격세지감이 느껴질 만큼 변모했다. [사진가 권태균]
1930년 3월 중순, 천안경찰서의 형사들이 인천에서 맹렬한 수색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그 내용은 철저한 비밀이었다. 그래서 동아일보 기자가 탐문에 들어간 결과 '선하증권(船荷證券)을 위조, 6만여 원을 사취(詐取)'라는 제목의 보도를 할 수 있었다.
화물 운송 기관이 발행하는 선하증권은 은행에서 현찰로 교환할 수 있었다.기사는 ‘피해자는 호서(湖西)은행’인데 충남 아산에서 미곡상을 하는 최석영(崔錫榮)이 7만여 원 상당의 선하증권을 위조해 천안 호서은행에서 6만여 원으로 할인해서 바꾸고는 ‘어디로인지 종적을 감추어버렸다’는 내용이었다. 일경이 긴장했던 것은 최석영이 국내로 잠입한 아나키스트 신현상(申鉉商)과 함께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형사대가 인천 일대를 뒤지고 있을 때 신현상과 최석영은 이미 북경에 도착해 있었다. 정화암은 ‘호서은행 본점과 지점을 통해 15회에 걸쳐 5만8천원이라는 거금’을 빼냈다면서 ‘엄청난 거액’이라고 회상했다. 1929년 말 최상품 쌀 10㎏이 2원20전이니 현재 10㎏당 2만5000원 정도로 환산하면 6억원이 넘는 거액이었다.
그래서 한꺼번에 들여오지 못하고 일부만 가져왔는데 북경에 안전한 장소가 생기면 나머지도 가져올 계획이었다.자금이 생기자 중국 내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無聯) 대표대회(이하 대회, 일부에서는 무정부주의자 동양대회로 표기)’를 개최했다.
앞으로 운동 방향을 토의해서 결정한 뒤 자금을 집중하기 위한 것이었다.북경과 천진은 물론 상해, 복건 등지에서 활동하던 한인 아나키스트들이 북경으로 달려왔다. 북만주의 한족총연합회에서는 김종진과 이을규가 일제의 감시가 심한 중동선(中東線)을 우회해 천진을 거쳐 북경에 도착했다.
1930년 6월 하순 열린 이 대회에서는 두 방향을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유기석(柳基石:일명 柳絮) 등은 의열단처럼 국내로 잠입해 직접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김종진, 이을규 등은 북만주 운동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회에 참석했던 이을규는 “선생(김종진)은… 각지 동지들이 만주기지의 중대성을 인식하고 재정적인 면에서는 물론 인적(人的)인 점에서도 우선적으로 총력을 기울여 민족대계의 기반을 만주에다 닦자고 호소해서 만장일치로 승인했다(<시야 김종진 선생전>)”고 전하고 있다.
그런데 대표대회가 끝나갈 무렵 예기치 않은 사건이 발생했다. 몇 명씩 분산 숙식하던 아나키스트들의 한 숙사(宿舍)를 새벽녘에 중국 경찰을 앞세운 일본영사관 경찰이 습격한 것이다. 자금을 마련해 온 신현상·최석영은 물론 김종진·이을규 등과 이회영의 아들 이규창까지 체포되었다. 일제가 조선 강도단이 북경에 잠입했다고 사칭하면서 일부 부패 경찰을 매수해 숙소를 급습한 것이었다.
복건성에서 농민 자위운동에 나섰던 한국과 중국의 아나키스트들
이들 중 일부는 국내로 압송되면 장기간 투옥되는 게 불가피했다. 이 대회에 참석했던 오면직(吳冕稙:일명 양여주)과 김동우(金東宇)는 훗날 일제에게 사형당했을 정도로 아나키스트들은 대일항쟁의 최일선에 있었다. 이때 중국 대학 출신인 아나키스트 유기석이 같은 아나키스트였던 북경시장 장음오(張蔭梧)를 비롯한 중국 국민정부 간부들에게 일제의 간계이자 중국 주권의 침해라고 설파해 신현상과 최석영을 제외한 전원을 석방시켰다.
문제는 사라진 자금이었다. 만주 운동에 사용할 활동자금은커녕 여비도 없었다. 이회영의 거처인 천진 금탕교장(金湯橋莊) 부근에 큰 방 하나를 얻어서 공동으로 자취하던 아나키스트들은 비상수단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천진의 일본 조계지 한복판인 욱가(旭街)의 중·일 합자은행 정실은호(正實銀號)를 털기로 한 것이다. 중국의 사법권이 미치지 못하는 치외법권 지대는 그만큼 경비가 삼엄했다.
거사에 동행했던 정화암은 “김지강·양여주(오면직)·장기준·김동우가 실행하고 내가 후견인으로 동행하기로 했다. 네 동지들은 정해진 시간에 권총을 가지고 떠났다. 나는 그들이 돌아올 길목에서 기다렸다. 12시15분 정각, 양여주와 장기준은 창구에서, 김지강은 정문에서, 김동우는 후문에서 일시에 총을 뽑았다.(<몸으로 쓴 근세사>)”라고 회고하고 있다.
잠시의 실랑이 끝에 금고 문을 열지는 못하고 책상 위에 있던 돈만 자루에 담고 빠져나왔는데, 정화암은 “보따리를 풀고 돈을 세어보니 우리가 기대했던 금액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그런대로 우선의 대책을 세울 수 있는 금액이었다. 중국 돈 3천원과 일본 돈 몇백원이었다”라고 설명했다.
이 사건은 다음 날 <중국대공보(中國大公報)>를 비롯한 각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는데, 은행을 빠져나간 지 불과 2∼3분 후에 경찰이 출동했고 30분 뒤에는 일본 조계에 비상경비망이 쳐졌다고 보도하고 있었다. 조금만 지체했으면 백주에 총격전이 벌어졌을 상황이었다.
이들은 이 자금을 가지고 만주로 떠나는데 무기 때문에 이동이 쉽지 않았다. 만약에 대비해 3진으로 나누어 1진이 떠난 다음 날 2진이 출발하고, 그 다음 날 3진이 출발하는 식으로 북만주로 향했다. 이때 이회영의 딸인 규숙·현숙 자매가 권총 10여 정과 폭탄 10여 개를 몸 속과 짐 속에 넣어 운반했고, 이회영은 아들 규창과 복건성의 농민 자치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상해로 떠났다.
인원이 보강된 북만주의 한족총련은 사업 확장에 나섰다. 한족총련의 아나키스트들은 농민들에게는 지지를 받았지만 공산주의자들은 물론 일부 민족주의자들과도 대립했다. 한족총련의 지방자치주의에 중앙 중심의 사고에 젖어있던 일부 민족주의자들이 반발했다.
1931년 구정(舊正)에 구파 백정기(白貞基)가 고령자(高嶺子)에서 공연한 항일 연극도 문제가 되었다. 독립운동가를 자칭하는 한 관리자가 국내에서 쫓겨 온 부부의 재산과 미모의 부인을 빼앗기 위해 그 남편에게 일제 첩자라는 누명을 씌우는 연극 내용에 일부 민족주의자들이 반발했다. 결국 1931년 여름 일부 민족주의자들이 한족총련을 탈퇴하고 말았다.
1930년의 ‘5·30 간도사건’은 아나키스트와 공산주의자를 무력대결로 몰고 갔다. 1930년 5월 30일 자정, 연변 용정촌(龍井村)의 한인 공산주의자들이 동산(東山) 대륙(大陸)고무간판 밑에 집결해 책임자 김철(金喆)의 회중전등을 신호로 영사관, 정류장, 기관차, 전기공사, 철도 등을 차례로 방화한 것이 ‘5·30 간도폭동’의 시작이었다.
만주 전역을 충격으로 몰아넣은 이 사건은 한인들이 주도했지만 조선공산당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의 지시로 시작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코민테른에서 한 나라에는 한 개의 공산당밖에 없다는 일국일당주의(一國一黨主義)를 식민지에도 기계적으로 적용하면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은 1930년 3월경부터 해체되고, 그 자리를 중국공산당이 차지하게 되면서 명령권자가 바뀐 것이었다.
문제는 이때 중공(中共)은 이립삼(李立三)의 극좌 모험주의 노선이 지배하던 때라는 점이다. 1930년 6월 중공 정치국 회의에서 ‘현 단계 당의 정치적 임무에 관한 결의’를 채택했는데 이것이 중심 성시(成市)를 먼저 장악함으로써 전국적 승리를 쟁취하자는 ‘이립삼 노선’이었다.
중공 만주성위원회에서 ‘5·30 간도 폭동’을 통해 이립삼 노선을 먼저 시범으로 보인 셈이었다. 1931년 6월 28일 <조선일보>는 재판 결과를 보도하면서 “동일 동시에 화룡(和龍), 연길(延吉), 두도구(頭道溝) 등 간도 일대는 일대 수라장으로 변했다”고 보도했을 정도로 위력이 있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이즈음 만주군벌 장학량(張學良)이 1928년 6월 부친 장작림(張作霖)이 일본군에 의해 폭사한 이후 항일의지를 불태울 때였다는 점이었다. 장학량이 장개석(蔣介石)의 국민정부에 가담해 만주 전역에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를 거는 역치(易幟)를 단행하고 항일에 나선 시점이었으니 시기에 문제가 있었다.
이 사건에 대해 일제 재판기록이 “(중공 만주성위원회에서) 조선공산주의자들에 대하여 중국공산당에 입당시킨다는 미끼를 던져, 그들을 총동원하여……(<中國共産黨事件判決寫: 1933>)”라고 말한 것처럼 한인들의 중공 가입을 미끼로 이립삼 노선을 먼저 실천해 보였던 것이다. 문제는 중국인들은 빠지고 한인들만 앞세웠다는 점이다.
이후 장학량은 공산주의자 토벌에 적극 나서는데, 공비토벌대장인 길림성 군법처장 왕과장(王科長)에게 남대관(南大觀), 백남준(白南俊) 등 10여 명의 한족총련 회원들이 가담하면서 공산주의와 충돌은 더욱 격화되었다.
공산주의자들도 이에 맞서 한족총련 간부차장인 이준근(李俊根)과 김야운(金野雲)을 석두하자 김좌진 장군의 동생 김동진(金東鎭)의 집에서 저격 사살했고, 1931년 7월 11일에는 김종진도 해림역전 조영원(趙永元)의 집에서 납치해 살해했다. 그러나 이때는 같은 식민지 백성들끼리 살상전을 벌일 때가 아니었다.
김종진 살해 두 달 후인 1931년 9월 18일 일제가 만주사변(일명 9·18 사변)을 일으켜 만주 전역을 장악하면서 아나키스트들은 만주에서 도주해야 했다. 민족주의자나 공산주의자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아나키즘 등장하다’ 끝
[출처] :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아나키즘 등장하다/ 중앙 선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