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산악회 회원들이 자체 인공등반훈련을 실시했던 기사로 월간 마운틴 2004년 1월호부터 5월호까지 연재되었습니다.
지나간 책이라 다시 구하긴 어렵지만 카페에 소개할 만한 기사라 올려봅니다.
앞으로 시간 나는 대로 여성산악회 자료들 모아서 게시판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나의 인공등반 훈련기 1
피피훅과 등강기 세팅
“이 많은 장비를 어찌 장만할꼬”
글 최순규 한국여성산악회·사진 전홍준 사진작가
선등연습 후 하강하기 위해 준비 중인 이연희 씨.
저녁 7시. 인공등반 이론강의가 시작되는 10시까지는 아직 3시간, 많이 늦지 않을 것 같다. 배낭을 꾸린다. 먹고 자고 입는 데 쓰는 것 말고 내일 등반에 쓸 장비는 모두 빌려왔다. 등산학교 암벽반에서 처음 만져본 피피훅, 허리부분이 두꺼운 안전벨트, 이중 장비걸이, 2개의 줄사다리(Aider), 왼손과 오른손 등강기, 2개의 스텝(일명 ‘주마링’때 등강기에 연결해 사용하는 발걸이), 기본적인 개인장비들이지만 하나도 장만해두지 않았던 것들이다. 클라이밍을 배우고 지난 3년간 주로 자유등반을 다닌 나는 그다지 필요성을 못 느꼈던 품목들이다. 로프를 못 가져가는 대신 코펠과 버너를 챙기고 꼭대기에 헬멧을 얹는다. 무거운 확보장비 한 종류 없이도 60ℓ배낭이 꽉 들어찬다. 1박 2일 인공등반을 가려면 80ℓ 배낭은 있어야겠다. 무게에 질려 어휴, 한숨이 절로 난다.
밤 9시 40분, 집을 나서 11시 30분이 넘어서야 약속 장소인 의정부 샤모니 암장에 도착했다. 익스트림라이더등산학교 조우영 강사의 ‘요세미티식 대암벽 등반’에 대한 이론수업이 한창이다. 막 등강기와 스텝에 관한 설명을 마치고 해머와 피톤회수기 부분을 시작하려던 참이다. 생각보다는 진도가 빠르지 않다. 다행이다.
이 한밤중, 어느 건물 지하에 모여 앉아 ‘뜨거운 태양 아래 빳빳이 고개 들고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듯 서있는, 저 당당하고 거만하기 이를 데 없는 암벽을 오르는 방법’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고 듣는 사람들의 풍경이 문득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피톤은 독일식으로는 ‘하켄’이라고 부른단다. 아아, 하켄! 어떤 산서에서 ‘암벽에 박는 일종의 못’이라고 씌었던 기억이 난다. <14번째 하늘 아래서>의 예지 쿠쿠츠카가 하켄을 애용했다지. 그런데 죽음을 맞았던 로체 남벽을 오를 때 그 파트너는 한참 동안이나 쿠쿠츠카가 하켄을 박는 맑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했지. 이렇게 생긴 것이 그 하켄이구나. 앵글 피톤 말고도 버드빅이며, 로스트애로우, 각종 훅 종류, 너트와 헤드, 캠 장비, 슬라이더, 볼트와 행거 등의 생김새를 직접 확인한다. 각각의 쓰임새와 설치 방법에 대해서도 듣긴 했지만 처음 장비를 구경하고 만져본 나는 잘 알아들을 수 없다. 이해한 부분도 막상 그 확보물을 사용할 때 기억해낼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약속은 등반의 시작이다
밤 1시가 넘었다. 자리를 정리하는 가운데 김점숙(익스트림라이더등산학교 강사) 언니가 따끔히 한마디를 한다.
“집이 멀다, 일이 늦게 끝났다, 길을 헤맸다, 모두 약속 앞에서는 필요 없는 말이에요. 강사는 9시 반부터 준비하고 기다리는데 정작 수업을 들어야할 사람들이 늦어서 11시에야 시작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등반은 파트너와의 신뢰가 없이는 이루어 질 수 없고, 약속을 지키는 것은 등반의 기본중의 기본이지요.”
왜 진도가 늦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그저 산악회 사람들이 좋고 막연히 등반이 좋아서 인공등반도 배워볼까 하던 어영부영한 마음이 얼어붙는다. 점숙 언니와 이명선(청암산우회) 언니가 내일 등반에 쓸 장비를 세팅하고 준비한다. 언제나 손 빠르게 움직이고 조용히 다른 이들을 기다리는 두 사람, 이렇게 조금씩, 무뚝뚝한 바위 너머의 뜨거움을 배운다. 파일 옷을 두 개나 입고 오버복과 우모복까지 껴입어도 냉기가 스며든다. 이런 날도 바위를 오를 수 있다는 게 신기하고 즐겁다. 오늘은 안전벨트에 기본 장착될 장비 세팅하는 법을 배우고 캠 종류와 너트를 사용하는 루트에서 등반을 하게 된다. 등반지는 도봉산장 앞 부엉이바위다. 가지고 온 장비들을 바위 앞에 꺼내 놓는다. 모두들 정갈하게 장비를 다룬다. 문득 심정화(도이터코리아) 언니의 편지가 생각난다. ‘쪽빛 하늘을 올려다보고 늘어놓은 장비들을 하나하나 착용하며 이야기를 건단다. 쇳덩어리들이지만 이때만은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는 거야. 나를 지켜줄 친구들이지. 나는 이 쇳덩어리들이 좋아. 바위에 손을 대고는 가만히 속삭이지. 서로의 마음을 묶는거야.’ 안전벨트를 차고 피피와 확보줄, 등강기를 세팅한다.
“이제 등반합시다. 등반을 해봐야 자신의 스타일도 알 수 있고 빨리 늘어요.”
점숙 언니가 먼저 나선다. 크랙의 모양과 넓이를 살펴 캠 장비를 척척 설치하고 줄사다리는 2단을 밟고 선다. 1단에 서면 속도는 빠르지만 허리와 몸에 힘이 많이 들어가니까 2단에서 다음 확보물을 설치하면 편하다는 설명도 덧붙인다. 수직의 바위에 설치한, 겨우 한 뼘이 될까하는 쇳덩이에 체중이며 장비의 온 무게를 싣고 있는 점숙 언니가 따뜻한 안방에 있는 것처럼 편안해 보인다. 중간쯤에 너트를 하나 쓰고 어느새 훌쩍 완료지점에 닿았다.
확보를 보던 명선 언니가 점숙 언니가 벗어두고 간 우모복을 줄에 묶어 올려보낸 후 재빠르게 스텝과 무릎 보호대를 차고 후등을 시작한다. 오른손 등강기를 높이 걸고 줄에 매달려서 스텝을 차면 된다는 설명을 마치고 능숙하게 주마링을 하며 확보물을 회수한다. 익스트림라이더 인공등반대회에서 우승을 한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순간이다. 곧이어 ‘학생’들의 등반이 이어진다. 점숙 언니가 선등을 했던 루트는 박미경(마운틴하드웨어), 바로 옆 크랙으로는 정화 언니가 등반한다. 선등 자일을 묶고, 안전을 위해 점숙 언니가 내려준 톱로핑 줄을 다시 묶는다. 인수봉 등반 경험이 많은 미경이는 중간에 너트를 하나 쓰고 캠을 이용해 산뜻하게 등반을 마친다. 후등을 하는 김양숙이 주마링 요령을 터득하지 못해 한참 애를 쓴다. 점숙 언니와 명선 언니는 어느새 첫 루트 왼쪽 길로 또 한번의 등반을 마쳤다.
다양한 인공등반장비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는 김점숙 씨.
10년만의 인공등반에 기억을 더듬으며 선등 연습 중인 심정화 씨.
선등자 확보를 보고 있는 황미현 씨. 추운 날씨에 코끝이 빨갛게 얼어있다.
등반이 최고의 연습이다
컵라면으로 간단히 허기만 달래고 부지런히 등반에 매달린다. 이연희 언니가 합류해 방금 점숙 언니가 등반을 마친 루트에서 황미현과 짝을 이뤄 등반을 시작한다. 아이가 둘인 연희 언니지만 등반은 아직도 여유롭고 부드럽다. 나는 언제나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올봄 이후 처음 나선 인공등반이라며 아이처럼 들떠있던 점숙 언니는 오른쪽 너머의 코스를 살펴보고 돌아와서는 몇 가지 빼놓고 온 장비를 아쉬워한다.
정화 언니가 등반한 코스에서 내가 처음으로 주마링을 시도한다. 제법 그럴 듯하게 흉내를 낸다. 설치된 장비 위로 오른손 등강기를 옮겨놓으니 회수하는데 힘을 들이지 않아도 된다. 점숙 언니가 알려준 대로 왼손 등강기까지 옮기면 더 쉬워진다. 언니들 등반도 보고, 주마링 경험하고 나자 자신감이 좀 생긴다. 시간이 오후 3시 30분을 넘어섰다. 해가 지기 시작하면 이내 깜깜해지는 요즘이다. 서둘러 선등 연습에 나선다.
점숙 언니가 정화 언니에게 걸어준 것처럼 훅을 걸고 호기롭게 줄사다리에 올라선다. “엉덩이 뒤로 빼지 말고 똑바로 서. 훅은 무게를 아래로 제대로 실어야 얌전히 있는단 말이야.” 정화 언니가 한 마디 한다. 몸이 뜻대로 잘 세워지지 않는다. 겨우 첫 캠을 설치하고 체중을 옮기는데 타닥, 훅이며 캠이며 다 터져 버린다. 톱로핑 줄이 아니면 바닥을 치는 추락이다. 오기가 난다. ‘자, 터덜대지 말고 차분히 가자.’ 호흡을 가다듬는다. ‘처음부터 다시!’
훅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돌을 짓이겨놓는 바람에 좀 경사진 위쪽에 다시 설치한다. 장비가 흔들리지 않게 조용히 일어선다. 방향을 살피며 첫 캠을 크랙에 넣는다. 아래로 지그시 당기자 캠이 벌어지며 바위를 파고든다. 잘 걸렸군. 줄사다리를 걸고 체중을 옮긴다. 다음 설치 장소가 좀 멀다. 손을 한껏 뻗으며 어찌할까 고민하는데 점숙 언니가 1단을 밟고 서란다. 1단에 양발을 넣고 엉덩이가 빠지지 않게 곱게 일어서 짧은 피피를 캠에 직접 건다. ‘이야, 내가 이런 걸 다 할 수 있네. 캠을 설치하며 나도 너트를 써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지만 도무지 어떤 모양의 크랙에 어떻게 설치할지 알 수가 없다. 에라 모르겠다, 비슷한 크기의 캠만 있는 대로 동원한다.
마지막으로 등반을 시작한 옆 루트의 미현이 또한 엉덩이 집어넣으라는 말을 줄기차게 들으면서도 어느새 바로 아래 와있다. 나는 이제 두 개의 큰 캠을 써야하는 크랙이다. 제일 큰 캠을 먼저 쓴다. 믿어지지 않아 계속 넣었다 뺐다 만지작댄다. 캠은 기특하게 잘 버티고 있다. 마지막 캠도 그렇게 설치하고 일어섰는데 종료 지점의 와이어에 확보줄이 닿지 않는다. 아차, 그래서 정화 언니가 아래쪽 캠을 회수해서 다시 썼지. 줄사다리 1단의 끝을 밟고 와이어를 잡았는데도 확보줄 걸기에는 모자란다.
“레다(줄사다리) 걸어!”
바보같이. 정화 언니도 똑같은 말을 들었던 게 이제야 기억난다. 종료지점에서 하강줄을 내리고 장비를 회수하는 데에도 옆에서 등반을 완료한 미현의 코치를 받는다. 등반이란 것이 안전에 안전을 기해야하는 일이라서, 덜렁대며 무언가 하나씩 잊고 다니기 일쑤인 나는 완전히 익숙해지기까지 주위 동료들에게 끊임없이 잔소리를 요청해야만 했다. 묻고 또 묻고 확인에 확인을 거듭해야 안심이다.
하강을 완료하자 네 장비 내 장비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날이 저물었다. 미현이와 하산하며 인공등반의 색다른 느낌에 서로 공감한다. 다음 등반에는 어떤 루트, 무슨 장비가 기다리고 있을까. 이른 궁금함에 ‘이 많은 장비를 어찌 장만할꼬’하는 걱정마저 즐겁다.
5. 6. 확보물을 설치한 후 줄사다리를 밟고 일어서는 김점숙 씨.
줄사다리에서는 두 다리를 쭉 펴고 서있어야 오랜 등반에도 다리가 피곤하지 않고 다음 확보물을 최대한 높이 설치할 수 있다.
후등자 주마링중 설명을 듣기 위해 잠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최순규 씨.
다음 확보물에 줄사다리를 설치하고 있는 이연희 씨.
40대 주부임에도 불구하고 줄사다리의 1단에 여유 있게 올라서는 실력을 과시했다.
Information
피피훅 세팅과 용도
선등시 데이지 체인에 카라비너를 연결하여 사용하는 확보줄과 함께 5∼6㎜ 코드슬링의 양쪽을 7∼10㎝와 50㎝ 길이로 두개를 만들어 끝에 피피훅을 연결한다. 코드슬링은 안전벨트에 직접 묶는다. 등반시 줄사다리에 올라서서 피피훅을 확보물에 걸고 다음 확보물을 설치하거나 휴식을 취한다. 급경사에 유리하다.
등강기 세팅과 주마링
안전벨트에 직접 연결한 데이지 체인에 등강기를 설치하여 위쪽 등강기가 등반자의 얼굴위치에 오면 적당하다. 아래쪽 등강기에 스텝 또는 줄사다리를 연결하여 부드럽게 딛고 일어서는 동시에 위쪽 등강기를 밀어 올린다. 위쪽 등강기에 매달려 아래쪽 등강기를 밀어올린다. 등강기에 연결한 카라비나는 가급적 잠금 카라비너를 사용하여 개폐구가 열리는 일이 없도록 한다.
너트(Nut) 회수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크랙이나 피톤을 자주 박아 넓어진 크랙에 사용한다. 충격을 받아 회수가 어려운 경우 너트 회수기를 너트의 아래쪽 부분에 대고 해머로 두드려 회수한다.
캠(S.L.C.D:Spring Load Caming Device)
무게가 무거운 단점이 있으나 설치와 회수가 빠르기 때문에 확보물로 가장 많이 사용된다. 확보물 설치가 어려운 나팔형(일명 벙어리) 크랙에서 사용할 수 있으나 신뢰할 수는 없으며, 가능한 슬링을 짧게 걸어 로프가 직선이 되도록 해야 한다.
요세미테식 대암벽등반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전반기 사이에 처음 시작되었다. 대부분 인공등반기술이 사용되며 등반하는데 이틀 이상이 걸리는 루트를 의미한다. 1947년 사라테와 안톤 넬슨이 로스트애로우 침니를 초등하였으며 1958년 워렌 하딩과 웨인 메리, 조지 웨드모어에 의해 앨캡 노즈가 장장 일년 반만에 초등되었다. 1961년 단지 13개의 볼트만을 사용하여 사라테월을 초등한 로얄 로빈슨, 콤 프레스트, 척 프레트에 의해 요세미테 대암벽등반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첫댓글 야아, 이거 정말 오랫만에 다시보네. 우리도 저런 시절이 있었구나 싶어 어깨가 으쓱하네요. 소라야, 수고했다^^
우와~~ 얼마나 더 많은 자료가 나올까? 기대되요~~
정말... 이 사진들을 보니 얼굴에 미소가 스르르... 처음 배우는 인공등반이었는데 점숙언니가 말하는걸 이해를 못해 계속 갸우뚱만,,, 여튼 아직도 어리버리한것 여전하네요. 소라씨 정말 정말 이 거 올려줘서 고마워요, 복 받을껴,ㅎㅎ
멋지십니다.
오랫만이네, 진영. 넘진 남정네들이랑 지낸다고 노처녀 언니들의 질투가 태평양을 넘는것 같구나.
오래전 산지에서 본 기억이 새록새록 나네여~~언제 여성산악회 정기산행으로 한번 더 하져?ㅎㅎ
정말..멋지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