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로마서 13장 1-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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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로마서 13장에서 대해서 살펴봅니다. 로마서 13장은 세 단락의 이야기로 나뉘어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인들이 국가 권력에 대해서 가져야 하는 자세에 대해서, 2.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이웃 사람들에 대하여 지녀야 하는 자세에 대해서, 그리고 3.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자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1-7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국가 권력에 대해서 가져야 하는 자세에 대해서 세 가지를 말씀 하고 있습니다. 첫째, 국가 권세들에게 복종하는 것, 둘째, 다스리는 자들(권세들, 위정자들)은 하나님이 쓰시는 사역자(도구)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 셋째, 국가가 정한 납세의무를 준수 하는 것입니다.
첫째, 국가 권세들에게 복종하는 것에 대해 살펴봅니다. 1-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2.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역사적으로 국가권력과 교회가 충돌하는 사건이 많았습니다. 한쪽의 힘이 커지면 다른 한쪽은 핍박과 고통을 받았습니다. 주후 1075년에 교회 주교들의 서임권 문제로 큰 다툼이 있었습니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하인리히 4세가 자신의 측근들을 주교 임명하자, 교황인 그레고리우스 7세는 이를 철화해 줄 것을 정중히 요청합니다. 황제가 끝까지 이를 거부하자 교황은 황제를 파문(카톨릭 신자에서 출교당하는 징계)하고 황제의 자리를 폐위 시킵니다. 황제는 결국 교황이 파문을 철화해 줄 것을 요청하려 교황이 머무는 카놋사 성 앞에서 눈보라를 맞으며 삼일간이나 무릎 꿇고 화해를 요청한다. 교황은 황제의 파문을 철화 하였지만, 이 사건은 황제가 교황에게 굴복하는 ‘카놋사의 굴욕’으로 역사에 남아있습니다.
‘카놋사의 굴욕’ 사건이 교황에 의한 황제의 굴복 사건의 대표적인 예라면, ‘아비뇽 유수’ 사건은 교황이 황제의 권력에 무참히 짓밟힌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왕 필리프 4세는 교황인 보니파키우스 8세와 세금문제로 싸우다가 말을 듣지 않는 교황청을 강제로 프랑스 아비뇽으로 옮겨 버립니다. 그리고 주후 1309년부터 1377년 까지 로마 교황청을 프랑스 황제의 권력아래 강제적으로 굴복하게 교황이 굴복하게 만들었습니다. 70년이 지나 교황청이 로마로 복귀 했지만, 아비뇽 유수 기간에 로마에도 교황청에도 교황이 있고, 프랑스 아비뇽에도 교황이 선출되어 극심한 교회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카놋사의 굴욕’과 ‘아비뇽 유수’에서 보듯이 국가권력과 교회는 힘과 힘의 대결의 역사를 지녔지만, 지금은 별도의 자리에서 서로의 지위를 존중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생각하는 종교와 국가와의 관계는 공존하며 상호 평등아래 있는 것입니다. 상호 존중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교회는 당연히 하나님으로부터 세워졌지만, 국가와 권세자(위정자)도 하나님이 쓰시려고 세우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기 때문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절차에 의해 선출된 위정자에게는 당연히 복종하여야 하겠지만, 폭동이나, 무력이나, 전쟁으로 인하여 강탈 하듯이 권세를 잡은 집단이나, 그 집단의 우두머리에게는 결코 복종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총칼로 사람을 마구 죽이고, 사람들의 인권을 유린하고 강제적으로 폭압정치를 한다면 그 권세는 하나님으로 나오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사람의 욕심과 욕망이 만들어낸 괴물일 뿐입니다. 특별히 기독교를 부정하고 그리스도인들을 대놓고 박해하는 권력 집단과 위정자들에게 순순히 복종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복종이 아니고 굴욕을 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권세와 위정자에게 복종하라고 하신 것이지 하나님과 복음에 반하는 세력에게 굴욕을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1절에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라는 말씀이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때로는 악용되기도 합니다. 좋든 싫든 다 하나님이 주신 권세이니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라고 강요하는 근거의 말씀으로 인용됩니다. 실제적으로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 이 구절을 인용해서 무조건 복종을 강요 했습니다. 공산주의 집단이나, 무력으로 정권을 잡은 집단이 기독교를 획일화 시키고, 그리스도인들을 권력 앞에 무릎 꿇게 만들기 위해서도 이 말을 인용되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하면 무조건 모든 권세에 복종하는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고,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를 박해하고 핍박하는 권세를 결코 허락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과 정면으로 대치하면서 교회를 향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격해 오는 어떤 집단이나 위정자들이라면, 그들에게 복종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워 강력하게 대적해야 합니다. 그런 거짓 권세와 거짓 위정자들에게는 교회 전체가, 그리고 그리스도인 전체가 하나가 되어 불복종 운동을 펼쳐야 합니다. 그렇게 해왔던 것이 교회 역사에서도 고스란히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정당한 이유 없이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다만 여기서도 역시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꾀하고 백성들에게 고통을 안겨다 주는 불의한 권세자에 대해서는 탄핵이나 퇴진 운동을 통해 물러나게 하는 일에 앞장서는 것도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국가 권력과 권세자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모든 권세를 주관하셔서, 자리에 앉히시기도 하시고, 물러나게도 하실 수 있는 주권자 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역사 속에서 살아계셨고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치욕과 실패의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역사속의 강대국가와 절대적인 권세를 누린 위정자들은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임을 망각하고,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일하심보다 자신의 의지를 앞세워 나가려고 하다가 실패하고 나라가 패망하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하나님을 앞세우면 성공이요, 영원한 나라의 주인이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을 뒤로 하고 사람이 앞서간다면 실패할 것이고, 국가와 민족은 나라 없는 백성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국가와 권세자들을 위해 할 역할이 있습니다. 우선은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 권세자들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도록 힘써 도와야 합니다. 그리고 국가와 권세자들이 하는 일을 늘 감시하고, 도울 것은 적극적으로 돕되, 대내외적으로 무능력하여 국격을 떨어뜨린다거나, 정도에서 벗어난 일로 무리수를 두어 혼란을 초래 하거나, 백성들을 생각하지 않는 후안무치한 행동을 할 때에는 소리를 높여서 비판하고 견제를 가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권력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쓰여져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위정자들의 자리는 하나님만을 높여 드리는 자리로 사용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권력의 힘으로 가리려 하고, 자릴 주었더니 교만과 아집에 사로 잡힌다면, 하나님의 공의로움과 진노하심의 심판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정말 살기 좋은 나라이고, 하나님이 사용하고 계시는 복음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고 세워주신 대한민국과 한 민족에 대한 자긍심을 가지고 나라사랑을 더욱 소중히 여길 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세우신 권세자들을 자꾸 흔들려고 하고 비난의 대상으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칭찬도 하고, 도움을 줄 것은 확실하게 도와주어야 합니다. 잘한 것에 대해서는 칭찬에 인색하고, 못한 것은 서슴없이 책망하기를 빨리 한다면 어느 누구라도 자리에서 버티기 힘듭니다. 기회를 주고 잘 할 수 있을 때까지 여유를 가지고 지켜보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먼저 국가와 위정자들을 위해 더욱 힘써 기도하기를 바라고, 이 나라 이 민족, 그리고 권세자들이 정말 제대로 정신 차려서 하나님의 주신 권력과 기회를 잘 사용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더욱 크게 들어 쓰시는 대한 민국, 그리고 하루 속히 남과 북이 통일 되어 한 민족 한 나라가 되는 날이 오기를 원합니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신 권세들에게 먼저 복종하는 모범을 보이고, 세워진 권세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백성들을 잘 이끌어 가도록 감시하고, 견제하는 성숙한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인들이 국가 권력과 권세자들에게 대하여야 하는 두 번째 자세는, 다스리는 자들(위정자들, 정치인들)이 하나님이 쓰시는 사역자(도구)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3-5절을 읽겠습니다. “3.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4.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5. 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
여기서 ‘다스리는 자들’은 ‘위정자(통치자, 지도자)’를 말하는데, 개역성경에서는 이들을 ‘관원’이라고 했습니다. 1,2절이 권세와 위정자들에 대한 일반적인 말씀 이라면, 3-5절은 권세자들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권세자, 특히 국가의 지도자는 하나님이 쓰시는 사역자라고 보아야 합니다. 국가 지도자가 하나님의 사역자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지도자 자신이 제일 먼저 알아야 할 것이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성도)도 이를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쓰시는 사역자(도구)라는 인식이 있어야, 내가 누구 때문에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게 되었는지, 나에게 무엇을 하라고 이 자리에 오르게 하셨는지, 내가 어떤 판단, 어떤 결정으로 나라를 이끌어 가야 하는지 정말 진지하게 고민 할 수 있습니다. 인식하는 지도자는 하나님의 뜻을 항상 생각하게 될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자신의 생각이나, 참모들의 의견만 듣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식하는 지도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은 복종하는 마음으로 어이지고, 복종하게 되면 다윗 시대와 같은 평안과 번영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국가의 지도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도구라는 인식하에 언제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국가를 경영해 나가야 하고, 그리스도인들은 국가의 지도자를 하나님이 귀하게 쓰시는 사역자라고 인식하여 존중하고, 모든 일에 기도로 협력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의 지도자가 하나님만을 온전하게 인식하여, 올바르고 정직하게 나라를 이끌어서 통일 대한민국의 초석을 다지고, 세계역사를 선도하는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그리스도인들이 국가 권력과 권세자들에게 대하여야 하는 세 번째 자세는, 국가가 정한 납세의무를 성실하게 준수하는 것입니다. 국가의 재정은 세금으로 운영이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국가에서 정한 세금이 불만이 있고 공평하지 못하다고 하여도 안 내려고 하거나, 속여서 덜 내려고 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금을 속이는 자는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무시하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적인 근거를 넘어서는 용납할 수 없는 세금을 매기려고 하는 것에는 단호하게 거부 의사를 밝혀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세자들 이라면, 하나님에 친히 세우신 규례와 법도와 계명을 어기면서 무리한 세금을 납부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힘만을 내세워 강제적으로 세금을 강요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에 반하는 무리수입니다. 세금 잘 내시고, 체납 하지 마십시오. 의무를 다하게 되면 권리도 그 만큼 커집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은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드리고, 국가에 내야할 것은 정해진 대로 잘 납부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자세입니다.
국가 권력, 그리고 권세자들(위정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의 관계 세 가지를 정리해 봅니다. ①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국가 권력에 복종해야 합니다. 복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하심을 온전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② 국가 지도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사역자라는 사실을 인식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이를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③ 국가에서 정한 세금은 속이지 말고 제 때에 잘 납부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바울을 통해서 국가와 권세자들에 대한 자세를 세밀하게 가르쳐 주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선은 하나님이 모든 행사의 계획자이시고 주관자이심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모든 행사를 하나님이 경영하시도록 의뢰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성숙한 그리스도인들 이라면 비난과 비판보다는 기도하면서 칭찬과 격려와 순종의 마음으로 국가와 지도자들에게 협조하라는 당부입니다. 나라와 민족과 지도자를 위해 많이 기도 하셔서, 이 나라 이 민족이 하나님이 영원토록 이끌어 가시는 복음이 충만한 나라가 되어가기를 축복합니다.
8-10절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이웃 사람들에 대하여 지녀야 하는 자세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8-1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웃에 대한 자세는 딱 한 마디로 정리 됩니다. ‘사랑’으로 대하여야 합니다. 사랑의 마음이 어느 정도 되어야 하겠습니까? 최고의 마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자신을 내어 주신 정도로, 내가 가진 것을 다 내어 줄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하면 됩니다. 이 정도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기가 어렵다면, 최소한으로 현재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사랑 받고 있다고 느끼는 만큼 이웃을 사랑해 나가면 됩니다. 내가 사랑 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되면,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기는 매우 힘듭니다. 내 안에 사랑의 온기가 남아 있지 않다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도 불가능 합니다. 사랑은 받은 만큼 줄 수 있고, 채우는 만큼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수많은 계명들이 있지만 그 중에 사랑의 마음만 있다면 그 모든 계명들을 다 아우를 수 있다고 합니다. 믿음을 지닌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인해 평생 갚지 못할 ‘사랑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영원한 사랑의 채무자입니다. 우리는 도저히 이 사랑의 빚을 변제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사랑에 대해서는 영원토록 진행형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무슨 말씀이냐면, 하루라도 사랑을 받지 아니하고는 살 수 없으며, 하루라도 사랑을 나누어 주지 않고는 빚진 자로서 마음의 부담을 덜어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매일같이 주님으로부터 사랑 받고, 받은 사랑을 이웃에게 나누어 주고, 또 다시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아서 이웃에게 나누어주는 이 행동이 무한 반복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 진행형의 삶입니다.
바울은 “사랑의 율법의 완성 이니라”라고 정의 합니다. 복잡하고 수많은 율법들을 전해 듣고, 이해하고, 나아가서 그것들을 전부 지키도록 행동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율법을 완벽하게 다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그러나 ‘사랑’ 하나만 전하면 그 많은 율법의 기능들이 한 번에 해결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법은 내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이웃에게 그 사랑을 계속 전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이웃에게 사랑을 전하는데 힘쓰십시오. 사랑을 전하실 수 있는 결단과 용기와 실천이 있다면, 나는 이미 충분히 사랑 받은 자입니다. 나는 이미 사랑 받은 자이지만 계속 사랑에 목말라 하시고, 사랑에 배고파하십시오. 사랑 많이 받아서 행복하게 살아가시고, 사랑 많이 나누어 주어서 내가 진 빚을 매일 매일 변제해 나간다는 기분으로 살아가십시오. 세상을 변화 시키는 재료는 사랑 밖에 없습니다. 이웃을 섬기는 재료도 사랑이면 충분합니다. 주님이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시킨 것과 같이, 우리 모두가 조건 없이 사랑을 나누어 주는, 사랑의 메신저 역할을 기쁨으로 감당하시기를 축복합니다.
11-14절은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자세에 대해서 말씀 하고 있습니다. 11-14절을 함께 읽습니다. “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인생을 즐기면서 살다보면, 어느 샌가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지?, 내 나이가 이렇게 까지 되었나?“라는 것을 실감할 때가 있다고 합니다. 대개 그 나이들이 30, 40, 50..이렇게 10년 단위의 선을 넘어갈 때 그렇다고 합니다. 시간이야 막을 수 없으니 어쩔 수 없겠지만, 그리스도인들과 비 그리스도인들이 느끼는 시간의 종착역에 대한 느낌은 사뭇 다를 것입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지나간 시간이 아깝다고 느낄 때도 있고 후회할 일들도 많지만 지금 저의 나이, 그리고 현재 주어진 지금의 시간들을 존중합니다. 그리고 죽음이나 미래에 대한 어떤 두려움도 없고 그저 덤덤 합니다. 이런 평안의 마음이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성경은 구원의 날이 멀지 않고 가까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정신 차리고 허랑 방탕함을 벗어나 빛의 갑옷을 입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으라고 합니다.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마음자세가 끝날, 심판의 날, 구원의 날, 천국에 들어가는 날, 부활 하신 주님 만나는 날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기록된 대로 언제고 순식간에 구원의 날이 올 것입니다. 준비하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시간이 내게 주어진 마지막 시간이라는 종말의식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신앙이 긴장감이 있고 항상 주님을 만나고 싶은 갈망이 식지 않게 됩니다.
육체의 옷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육체의 유혹과 욕망, 그리고 끊임없는 교만이 나를 넘어뜨리고 무감각하게 만들고 구원 받은 백성으로 살아가려는 것을 방해 받습니다. 다시 만날 주님을 향한 마음이 식어지게 만들고, 급기야는, “내가 그리스도인이 맞기는 한가?”라는 근본적인 정체성마저 흔들기도 합니다. 영화의 대사처럼, “절대, 절대 현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시간을 빼앗고 몸을 망가지게 하고, 구원의 길을 어떡하든지 못 가게 만드는 사탄의 유혹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계속 될 것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물리치시고, 구원 받은 백성으로 선포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마라나타 신앙으로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말씀은 그리스도인들로 살아가는 우리가 ① 국가와 국가 지도자에게 복종하는 자세로, ② 사랑의 빚진 자로서 우리의 이웃에게 그리스도의 크신 사랑을 날마다 전하며 살아가는 자세로, 그리고 ③ 종말의 시대에 다시 만날 주님을 맞이할 준비된 자세로 살아가야 함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더 이상 율법에 매인 자가 아니라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확실한 믿음 안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구원받지 못한 이웃을 위해서, 그리고 내 자신의 안녕과 평안을 위해서 힘써 기도하며, 구원의 그날을 온전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승리하며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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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말씀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사랑을 다시 한 번 느끼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우리가 국가와 이웃과 내 자신을 더욱 사랑하게 하시고, 이 세상에 사랑의 향기가 널리 퍼지도록 사랑의 진한 향기를 발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율법에서 벗어나 사랑 안에 거하게 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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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김민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