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이는 걸리고
둘째는 손목 잡고 셋째는 안고
전투복을 입으신 젊은 남편과
밤이면 하늘에 별들이 조약돌처럼 박히는 곳
강원도 화천으로 앉게 되었습니다
봄 야생화에 갇히고
여름 폭우에 갇히고
가을 무장공비에 갇히고
겨울 눈에 갇히던 곳
(뒷날 세 아이들에게 남기려 적었던 글의 일부다)
사격 훈련장에서 총성이 멈추었다. 봉숭아 꽃물처럼 노을이 덮이는 초저녁 산새들 후드득 숲으로 섞이고 구절초가 소소히 피기 시작하는 ○○○고지 능선 하늘에는 불티처럼 다투어 별이 솟았다. 여기는 일기예보에 남한에서 제일 추운 곳으로 표시되는 대성산과 화악산이 어깨 걸어 만나는 산등성 최전방 중부전선이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산뿐이라 흡사 밤이면 잠깐 어둠이 둥지를 틀다가 되 물러가는 듯하다. 오늘은 새콤달콤하게 오이도 무쳐 놓았는데 불시 순찰이라도 나가신 걸까? 군화소리가 들리면 찌개를 데우고 다시 데우다 밖으로 나가 그를 기다리기로 했다. 지나간 밤에 내린 비가 추위를 한 겹 더 데리고 왔나 보다. 아 ! 직녀가 내건 등불일까 저 별 등은? 강원도 화천 명월리의 밤하늘엔 빗물처럼 별이 내려오고 있었다.
“비무장 지대에서 마라도까지 내가 머무는 곳 어디에나 영희 씨만 있어주면 되오.” 고운 데라고는 없는 신부와 신혼살림이라야 책이 반이었던 13평 낡은 거여동 아파트 시절 그 양반은 특전사 중대장이었다. 결혼 후 혹한기에 천리행군을 떠났다. 400㎞를 걷는 천리행군 중에 깊은 산속에서 야생벌집을 발견하고 산길 삼십 리를 걸어 소포로 보내왔고 나는 부대에서 훈련장으로 가는 재보급편에 몇 몇 밑반찬과 중대원들 앞앞으로 초콜릿을 싸고 편지를 보냈다.
“11대대 4지역대 16중대 여러분께. 어느 준령에서 이 편지를 받아보실까요. 바람에 눈발이 새치처럼 날리는 저녁입니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그 푸른 걸음의 군화소리가 들릴 것 같습니다. 장태규 중사님, 김라인 상병님을 비롯 중대원들 모두 건강하신가요? 훈련 마지막 일주일은 400㎞를 행군하여 귀대하신다지요. 혹 동상이 들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산중이라 온도가 많이 내려갔겠지요. 여러분들은 지금 생애 가장 아름다운 시간입니다. 그 땀방울들은 사회로 돌아가면 인생반전의 지렛대, 큰 재산이 될 것입니다. 저도 기도하겠습니다. 그 땀방울들에 가장 귀하고 가장 값진 무게를 얹어 주시라고요. 걷다가 드세요. 초콜릿을 좀 보냅니다. -거여동에서 중대장 노수우 대위 가족 올림-”
“노수우 대위님 귀하. 혹한의 눈바람을 천막 하나로 막고 당신이 쉬고 계실 먼 발치 한줌 햇살을 펴 놓을 수 있다면 마음의 온기로나 받으시지요. 장장 천리를 걸어오실 모습을 생각하니 저도 가슴이 뜁니다. 당신이 오시면 이곳 추위도 곧 물러가겠지요. -거여동에서 영희-”
한 달여 만에 그가 천리행군에서 돌아왔다. 엄동의 산등성 어디쯤 모닥불 옆에서 언 손을 녹이느라 불똥에 뻥뻥 구멍 난 야전상의를 입고 한 달 내내 목욕은 물론 면도도 못한 초췌한 구레나룻의 얼굴에 위장용 크림을 까맣게 바르고 행군 마지막 일주일 동안 400㎞를 걸어 피로 골절의 다리를 절룩이며 남편이 돌아왔다. 자칫 감상의 눈물을 흘릴 뻔하였지만 나는 눈물을 가슴에 밀어 넣으며 그 양반 귀에 걸린 동상과 낙오된 중대원들의 안부를 물었다. 장대비가 와도 군복을 입은 채로는 우산을 쓰면 안 되는 사람. 헬기에서 강하를 할 때나 무장공비가 출현했을 때에도 빗줄기처럼 총탄이 쏟아지는 전선에서도 가슴에 군번줄 하나 걸고 조국 수호에 몸을 던져야 하는 사람. 나는 그렇게 군인의 아내여야 했다.
여기는 고개를 조금만 넘으면 대남방송이 들리는 비무장지대가 가까운 곳, 대전차 장애물 고개를 시작으로 넘어도 넘어도 다시 고개를 만나는 첩첩산중이다. 큰아이가 입학한 학교는 전교생이 칠십여 명, 반 아이들이 열 다섯이었다. 송홧가루 묻어오는 바람 속에서 아이들이 자라고 야생화 지천한 언덕에서 꿀벌에게 쏘이기도 하며 메뚜기·소금쟁이·여치를 쫓아 들판을 내달리고 산골짜기 개울가에서 가재를 잡아 오기도 한다. 이등병이 전입 오는 날은 연병장 미루나무 가지에 까치가 먼저 알고 날아와 신고를 했다. 강원도 바람은 귀를 떼어 갈 듯 매서웠다. 그러나 추운 곳에 왔으니 추위에 내성을 키우리라. 부대에선 해마다 얼어붙은 호수를 스케이트장으로 만들어 관리를 해 주었다. 나는 아이 셋을 데리고 스케이트장으로 출근(?)을 했다. 두 벌의 내의를 입히고 세 켤레씩의 양말을 신겨서 호수 둑 밑 얼음동굴을 지나 출렁다리도 건너 보고 온통 은박지를 깔아 놓은 듯 반짝이는 눈 천지를 거닐었다.
그 하늘. 계곡을 껴안은 안개. 이따금 소나무들 잠에서 깨어 눈을 터는 소리. 동화 속의 한 필름이었다. 유난히 춥고 긴 이곳, 겨울이 가고 언 땅이 녹아 아지랑이를 피워 올리면 우리 군인가족들은 봉지 봉지 씨앗을 들고 나와 텃밭에 상추며 쑥갓, 들깨 씨를 묻고 어느새 밭 고랑가에는 지난해 떨어진 냉이며 꽃다지 민들레가 한 벌의 옷으로 갖은 아름다움을 다 피워냈다. 상추 잎이 너풀너풀 돋고 쑥갓 꽃이 핀 텃밭에는 노랑나비도 찾아와 봄을 보탰다.
도시에서는 흔한 전시회나 음악회, 기타 공연 등 문화나 위락시설을 누릴 수는 없지만, 모내기철엔 개구리 소리도 듣고 도롱뇽을 잡기도 하며 그 하늘의 별들을 오래오래 바라보고 문화지수와 환경지수를 바꾸어 살았다. 교통이 조금 불편한 외딴 곳이지만, 아이들은 아빠가 군인임에 자랑스러워하니 고맙고 다행이었다.
그렇게 정이 들 무렵 여름이었다. 갑자기 사나흘 동안 무거운 빗줄기가 쏟아졌다. 인접 철원에서 군 내무실 막사가 붕괴됐다는 긴급한 소식이 뉴스 첫 머리에 나왔다. 어디서 그 많은 비구름이 모여 있었을까? 양동이로 쏟는 듯한 비가 대엿새 내린 이곳도 수도, 전기, 가스가 끊기더니 곳곳이 산사태로 도로와 교량이 휴지처럼 되어 버렸다. 도로가 끊긴 산속 부대에 부식이며 환자를 후송하느라 비행기 조종석이 보일 듯한 헬기가 공중 위협을 하듯 연일 저공으로 나르며 공포감을 더했다. 기상 관측상 새로 이름을 붙인 게릴라성 폭우로 우리 사단부대도 많은 인명피해가 있었다. 스물한 살 스물 둘 젊고 아름다운 이들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 한 평 남짓 초소에서 붙박이처럼 서서 불침번을 서느라 추위에 손가락 몇 개 쯤 동상에 걸렸을 이들. 갈참나무 잎새와 풀들로 철모를 위장하고 까맣게 칠한 얼굴로 40㎏ 군장을 메고 샛별을 따라 조국의 산하를 둘러보았던 이들. 이제 머잖아 고향의 어른들 가깝게 뵐 날을 그리던 이들. 그들이 조국의 산하에 그렇게 목숨을 내놓았다. 나는 시 한 편을 써서 하늘에 올렸다.
중부 전선 1996년 여름
안개가 드는 복주산 처마 머리는
우로 화악산이 다가와 어깨를 걸고
손 벌려 엄마 품으로 안기듯 대성산을 기대고
밤이면 수없이 별똥이 빠지는 곳
예서 얼마 아니면 비무장 지대
지난여름 그 우기의 끝자락
산은 제 몸을 들썩이며 울었네
산은 제 가슴 쓸어안고 울었네
산은 낮은 데로 낮은 데로 떠나며 울었네
하나, 둘, 셋, 넷
스물 하나, 스물 둘, 스물 셋
산은 제 핏줄 손 놓으며 울었네
나무들 엎드려 여윈 어깨를 떨었고
숲 속 도롱뇽 버섯 달팽이도 눈물을 훔쳤네
하늘은 그리 험하게
몇 날 며칠 목을 놓았다네
-중략-
악아아-아가아-
불러도 대답은 건너오지 못하는구나아
그 몸 벗고 좋은 곳 가거라아
그 몸 떠나 좋은 곳에 환생하거라아
아니다 아니지
어찌 손을 흔들 수 있나아
어찌 너를 돌아가라 이를 수 있나아
도리질 쳐지게 그리우면 기도하거라
그리하여 다음 생에
엄마가 푸는 밥주걱의 밥 냄새를 맡으며
둥기 둥기 백년은 살아보자
봄 추위를 보내면 네가 올까
창밖에 바람이 떨면 네가 거기 있을까
너의 손목은 놓았지만
어찌 이 하늘 아래
네가 비인 날이 있겠느냐
비인 날이 있겠느냐
이제 길을 잡으시지요
아름답고 먼 나라
다시 오실는지요
범부세간(凡夫世間) 내세(來世)에
촛불을 키웁니다
두 손끝을 세우고
향 풀어 올립니다
- 육사신보 1997년 5월 31일 -
비가 그쳤다. 스물 세 명의 인명 피해 중 실종된 군우(軍友)를 찾아야 하고 도로, 교량, 유실된 농지, 폭발물 등 폐허의 흔적은 이제 우리의 몫이었다. 지휘관, 간부, 병사, 민간인 등 이 외딴곳엔 강아지까지 바쁜 하루가 시작되었다.
폭우가 지난 후에 의레 그렇듯 폭염이 시작되었다. 생사를 같이한 군우가 실종된 채 이름 적힌 전투화만 찾았을 때의 안타까움, 수 미터 물살을 떠내려 가느라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얼굴조차 알아 볼 수 없었던 민간인, 까마귀들이 자주 내려앉은 곳에서 발견한 사체, 그 뜨거운 폭염 속에 방탄복, 철모를 쓰고 폭발물을 찾느라 수 킬로미터의 개울 벌을 다 뒤져 나갔다. 급기야 이웃 부대의 공병대대장님이 수해 복구 과로로 순직하셨다는 소식도 왔다.
우리 군인 가족들도 가만히 보고만 있기엔 유리 조각 같은 것이 가슴을 꾹꾹 찔러 왔다. 커피를 만들고 초코파이를 준비하여 어린 아기가 있는 엄마들은 아기를 등에 업고 병 아저씨들 현장 위문을 하였다. 장작을 피워놓은 듯한 찌는 더위에 아예 웃옷을 벗고 굵은 땀을 흘리며 파묻힌 논에서 벼이삭을 세우고 흙더미를 치우느라 얼굴이 구릿빛이다 못해 흑인 같았다. 길가 가로수 잎새에도 바람 한 점 걸리지 않아 땀을 흘리는 오후, 커피를 따르고 초코파이 두어 알씩을 나누어 드렸다. 그러나 정작 우리들은 누구 하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이 아무것도 아닌 정성이, 동료들을 잃은 허한 가슴 갈피에 그들의 고단한 어깨에, 강물에 퍼지는 고요한 물무늬처럼 번져, 작은 위로나 되기를 바랐다. 내심 침묵이 어색하다 싶어 격려의 말을 꺼냈다.
“…보석 같은 땀방울입니다.” “필승! 감사합니다.”
제법 객기가 있어 보이는 상병 아저씨가 커피를 받아 들고 갑자기 큰 소리로 경례를 붙이는 바람에 하마터면 놀랄 뻔하였고 서먹한 분위기가 갑자기 웃음바다가 되었다. 이 전선에서 쏟은 땀방울들은 뒷날 그들 가슴에 값진 보물로 장전되어 있으리. 개울 건너 함박나무 다래넝쿨이 뒤엉킨 숲에서 바람 한 줄기가 나와 그들의 짧은 이마를 쓸고 지나갔다. 그 여름을 어찌 잊을까, 그 여름을 어떻게 잊을까?
뒷산에 도토리가 알눈처럼 부풀어 오르고, 단풍 잎새 고운 물을 채워갈 무렵, 강릉 앞바다에 간첩선이 나타났다. 수해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남편은 ‘진돗개 하나’ 명령으로 며칠째 부대에서 무장한 채 비상대기로 집에 오질 못했고, 공비들과 접전 중 산화한 영령들이 검은 상장(喪章) 속에 여미어져 나갔다. 아! 이념이란 무엇이고 그들과 우리가 왜 무엇이 달라야만 하는가. 허허로운 계절이었다.
남편의 직책이 연대 작전과장이었던 어느 휴일, 온 식구가 우리 부대 GOP를 견학했다. 아산 OP 전망대에서 관측장교로부터 지금의 상황에 이르기까지를 상세히 브리핑받고 새삼 가슴이 무거웠다. 우리는 6·25전쟁 때 적으로부터 직접적인 위협이 없었던 나라들이 이역만리 대한민국에 와서 피를 흘리며 자유를 수호했다. 살아서 고국으로 돌아갔다면 백발이 성성할 6·25 참전 16개국 용사와 이 땅에 혼을 묻은 전사(戰士)님께 시공을 넘어 군인의 아내로서 한 국민으로서 경의를 표했다.
계급도 군번도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하고 오로지 순수한 애국충정(愛國忠情)으로 순국한 용사, 그 어린 초병의 포복으로 지켜진 이 나라는 다시 반으로 나뉜 분단의 자유를 갖게 되었지만 그 희생의 열매로 이루게 된 것이다.
아! 하늘에서 두레박이 내려올 것 같은 이 아름다운 강산에 철조망이 둘리어야 하다니. 군인의 아내 11년 아이들에게 따뜻한 고향을 정해 주지 못하는 아픔을 느낄 무렵 이제야 남편이 서 있어야 하는 자리의 정적과 삼엄함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이 나라 오천 년 사직(社稷)을 지켜 내려온 이 땅은 남쪽 바다 끝 마라도에서나 비탈진 해안초소, 어느 하늘 밑 비무장지대에서도 누군가가 그 무엇을 감당해 내고 있어야 했다. 조국의 안녕은 이름 없는 고지에서 이름 없이 스러져 간 귀하고 아름다운 피와 살이 있었기에 보존되었던 것이다. 돌아오는 길 말고개 충혼탑에서 우리 가족은 묵념을 올리고 나는 아이들에게 일렀다.
“아빠의 철모 속 까만 머리에 흰머리가 섞이면 그땐 아빠의 철모를 너희들이 받아야 한다”라고.
부대 앞 다리 위에서 차량 불빛이 우리 아파트 방향으로 길을 들었다. 마당은 이슬이 내리기 시작했고 별들도 한둘은 잠에 들었다. 여기 명월리 사서함 99-1호. 충직한 남편의 푸른 군복 솔기를 손질하며 군번줄 없는 군인의 아내 이곳에 함께 서 있으리. 문패처럼.
<한영희 육군22사단 노수우 대령(진) 부인> |
첫댓글 오래전 뉘신지 여러 카페에 제 글을 올려놓으셨던 글입니다 쑥스럽지만 노수우대령을 아껴주시고 , 가깝게 여기시려는분께 이글을 펼쳐드립니다 , 그리고 격려의 전화 목소리 ...노수우 대령( 010 5074 2376 ), 사진속 큰 아이는 대학2년마치고 군에 갔고 둘째도 대학1년이고 셋째가 고3이되었습니다
지난주 군에있는 아들에게 전화를 받았습니다 ," 아들 이 무더위에 훈련 받으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했더니 " 무슨 말씀을요 아버지에 비하며 십분에 일도 않되는걸요 ...아버지는 30년을 충성하셨잖아요 어머니 " 저는 그만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아들의 그 한마디에 아마 몇 달은 행복하겠지요 우리아들은 올 3월9일 입대한 이병 노재이 입니다 ,
아이고, 어느새 커서 그렇게 장한 아드님이 되셨군요. 정말 축복받은 일임이 분명합니다. 축하드리고 또 감사합니다.
우리 아들도 6월8일 입대해 춘천 102보충대를 거쳐 현재 강원도 화천 소재 7사단8연대 1대대 2중대에 배속돼 GOP 철책근무를 서고 있는데 아들 놈 생각이 나네요. 짠한 글 잘 읽고 갑니다...()()()
7사단이면 화천이군요 이글이 화천 군막사붕괴 무장공비 사건등 그 실화입니다 , 삼엄한 철책근무까지 장하신 아드님 입니다 , 다음 면회가실때 가보실만한곳 알려드릴게요 ,건강하고 늠늠한 아드님 반갑게 만나시기를 저또한 기원드립니다 , ()()()
감사합니다. 아들 면회갈때 자문 구하겠습니다. 친구를 통해서 불심이 가득하심을 전해 듣고 있는데 저또한 불교학생회 출신으로 현재 조계종 포교사단 충북지역단 수석부단장을 맡아 청주 근교 13공수여단내 흑표사 군법회를 집중 지원하고 있습니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되세요_()_
저희도 토요일에 아들 보고왔습니다 ,훈련 잘 마치어 연대장님 표창도 받고 (4박5일포상휴가) ,중대 군종병으로 일요법회를 돕고 있다고하니 대견하고 감사했답니다 , 행을 하고 계시니 또한 좋은 가을 맞으시기를...
늘 좋은글에 감명받습니다. 53회 일원으로 활동해주심에 동문페이지를 살찌우게 해주셔서 다시감사!
쑥스러운 말씀입니다 ,그리고 감사드립니다. 다만 저의남편 노수우대령을 보듯 대신 저를 ...
감동적이고 고운 글 잘 읽고 갑니다. 이런 내조에 힘입어 반드시 별을 달 것입니다.
주신 마음만으로도 저 하늘의 구름, 달, 별이 다 제것같습니다 ,부족한 저희부부지만 서로 부적이라도 품으며 오래도록 건강하게 왕래하시면서 그렇게 뵙기를요 _( )( )(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