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덕봉은 맞지만
그럭재는 6km
고리봉은 9.4km로 고쳐야한다
삼국시대에 비홍산에 축성된 포곡식 산성으로,
성벽의 축조 방식과 출토 유물 등을 고려해 볼 때,
남원에서 확인된 척문리산성, 교룡산성, 아막성 등 삼국시대 산성과 비교할 수 있는 자료로 판단된다.
이 산성과 관련되어 전해오는 이야기는
이씨 성을 가진 할머니가 고려 때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치마폭으로 돌을 가져다 쌓은 성이라서 ‘할미성’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또한 군대 식량으로 쓰일 군량미를 창고에 모으고 합하여 둔 곳이라는 의미에서
합미성이 할미성으로 와전되었다는 설도 있다.
영취산과 무룡고개 남쪽 아래에 있는 무룡샘에서 발원한 요천은
동화댐을 지나 번암면으로 나오는 골짜기가 지지계곡이며 마을 이름도 지지리다.
무룡샘에서 흘러온 지지계곡 물은 번암교에서 장남제에서 흘러온 물줄기를 합한 뒤
남원을 관류하여 금지에서 60여 km를 흘러 섬진강에 합류하는 남원의 젖줄이다.
고리봉은 섬진강으로 올라오던 소금 배에서 유래한다.
배가 지류인 요천을 타고 남원까지 드나들었는데
이때 소금 배를 묶어 둔 쇠고리가 고리봉 동쪽 절벽에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억새로 이엉을 엮은 것인 바!
수명은 10년을 넘으며
교체비용은 3천만원 정도란다
2010년 남원으로 내려와 '매월당 고려단차'를 만드는 오동섭 대표가 지은 초가들이다.
그는 야생 차나무가 자생하는 것을 발견, 이곳에 정착했다.
그가 이곳을 매월당으로 이름 지은 이유는
매월당 김시습의 금오신화 '만복사저포기'에 나오는 보련사 터가 주변에 있기 때문이다.
오 대표는 둥글게 덩어리로 만든 발효차인 '고려단차'를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기 위해
항아리에 보관해 숙성하고 있다.
고려단차라는 이름에는 이곳이 고려 시대부터 야생차가 자생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담겨 있다.
이곳에서는 차를 시음해볼 수도 있다.
남원 보련산 자락에서 알려지지 않은 야생차 서식지가 있었다.
18년 전 매월당 대표 오동섭 다인이 차나무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 근처를 헤매다가 만학동 계곡에서 차밭을 만났는데 알고 보니
김시습 소설 <만복사저포기>의 무대가 되는 보련사 터였다.
절은 오래전에 폐사지가 되었고 차나무가 그 역사를 지키고 있었다.
신라말 실상사를 비롯한 구산선문의 선사들에 의해 뿌려진
차 문화의 명맥을 되살리기 위해 터전을 매촌마을로 옮기고
야생차를 채취하여 옛 방식대로 볶고 말리는 과정으로 덩이차를 만들었다.
보드라운 찻잎은 자연의 햇빛과 바람, 빗줄기가 키워냈지만
찻잔에 우려진 오묘한 빛깔과 향기는 다인의 손끝에서 완성된다.
오동섭 다인은 불을 다루는 손끝의 감각을 터득하기 위해
수많은 날을 달아오른 가마솥 앞에서 보내며 탐구했다.
약초를 캐 팔아 생계를 유지하면서 덩이차의 제다법을 복원하기 위해
찻잎은 물론 온갖 초목의 줄기, 뿌리, 꽃송이를 덖으며 경험을 쌓았다.
일생일다(一生日茶), 오직 차 하나면 된다는 뜻을 세우고 살아온 세월이
향기가 코를 찌른다는 고려단차로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시들어버린 차문화의 정신을 다시 일깨우기 위해
지리산 옛사람들의 억새집을 짓고 매월당이란 당호를 걸었다.
평생을 방외거사로 걸림 없는 삶을 살며 초암에서 차를 즐겼던
매월당 김시습의 탈속한 모습을 흠모했기 때문이다.
지리산의 추위와 강설을 견디기 위해 두툼하게 쌓아 올린 매월당 초암은
그 모습만으로도 지리산의 세월과 역사를 말해주는 듯하다.
오랜 세월 이 땅의 보금자리였던 집 한 채가 되살아나듯
맑고 청빈했던 정신문화의 향기가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매월당은 소리소문없이 찾아드는 다인들의 성지가 되었고
삶에 지치고 갈급한 이들에게 고요한 은둔처가 되기도 한다.
우러르면 지리산의 정수리에서 흰 구름이 솟아나고
굽어보면 운봉고원 들녘에서 곡식들이 춤을 추듯 자란다.
지리산하 매월당 / 이형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