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학기 7주차] 여전히,디즈니
오랜만에 대학도서관에서 책을 빌렸다. 평소 책을 읽다 마음에 닿는 글귀에 밑줄을 긋고 떠오르는 생각을 여백에 깨알 같이 적는 걸 좋아해 주로 책을 구입하는 편인데, 학생들에게 가장 많이 대출된 '베스트대출도서' 코너가 마련된 것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최근 관심 있게 읽은 논문의 저자인 교수님의 교육학 도서, 클래식음악에 대한 시리즈 도서를 고르다 자동반사적으로 눈이 멈췄다. 다른 장르에서도 그렇지만 유독 서적에서는 더 내 시선을 사로잡는 '디즈니'라는 글자. <디즈니 프린세스, 내일의 너는 더 빛날 거야> 책을 집어들고 낑낑대며 대출 코너에 가서 책을 빌리고, 책을 품에 한아름 안는 기쁨을 오랜만에 만끽하며 주차장으로 향했다.
어릴 때부터 나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사랑에 대해 기대하게 만든 것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이다. 막연히 해피엔딩, 러브스토리가 좋았던 어린 시절, 디즈니의 여러 스토리들은 마음을 들뜨게 했고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현실 세계를 뛰어넘는 액션을 보여주는 캐릭터들의 몸동작은 가슴에 전율을 일으키게 했다. mbti를 기준으로 파워N 성향을 지닌 나의 상상하고픈 욕구를 충분히 채워주었으며, 더 상상하고 더 꿈꾸라고 말해주는 매체가 있어 내게 디즈니는 유치한 어린이만화가 아닌 상상력에 물을 주는 빗줄기였다.
고등학교 때는 자기계발서에 눈을 떴다. 학급문고에서 발견한 후 반복해서 읽고 또 읽고, 친구들에게도 권했던 <프린세스 마법의 주문> 시리즈는 거의 처음 읽었던 자기계발서였다. 섬세하게 소용돌이치던 마음과 정체성을 발견하는 시기에 '소중한 나, 한껏 계발시켜 반짝반짝 빛나는 나'라는 메세지를 심어주어, 20대의 내가 여러 방면에 도전할 수 있도록 밀어주는 동력이 되었다. 하도 이 책을 광고하고 도서관에 주문도 해서 그런지 반 친구들 중 대다수가 이 책을 읽었는데, 처음에는 "유치하게 무슨 프린세스냐. 언어영역 지문이나 더 읽자" 하던 친구들도 "술술 읽힌다. 재밌다."며 눈을 반짝이는 걸 보고 뿌듯해했던 기억이 난다. 디즈니의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디즈니에 나오는 다양한 캐릭터의 공주들의 실사판처럼 멋진 여성들이 역경을 이겨내고 현실의 삶을 당차게 살아가는 이야기가 담겨 있어 몇 년 전, 이 책의 시리즈를 모두 구입해 책장에 꽂아두었다.
그러다 20대의 끝무렵, 알에이치코리아 출판사에서 '추억의 디즈니 시리즈'를 편찬했고, 당시 베스트셀러는 쳐다보지 않았던 나의 에먼 고집을 꺾고 디즈니 시리즈를 모두 구입했다. 순전히 제목과 표지만 보고 마음이 동했고 저절로 손이 움직여 책장을 넘겨다 보고 있었다. 한창 어려운 철학책, 교육학 서적들에 지쳐있었던 탓인지, 디즈니의 장면들이 책에 생생히 삽화로 들어가 그림책의 느낌을 주면서도 디즈니의 명대사가 의미 있고 긍정적인 글귀와 함께 엮어진 책들을 보니 '독서'에 대한 부담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리 책을 좋아해도 영화, 드라마와는 다르게 어찌되었든 독자 스스로가 '읽어내어야'하니 에너지가 배로 들어가고 마음은 쉼을 얻을지언정 머리는 바삐 움직인다. 그러나 이 시리즈는 디즈니 주인공답게 삶을 진실하고 아름답게 꾸려나가도록 권하는 메세지와 무겁지 않은 통찰이 담겨 있어 마음이 걍팍해질 때, 그리고 20대의 끝을 걸어가며 이상과 현실의 괴리로 인해 마음이 헛헛해질 때 읽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다 공부에 필요한 도서, 신앙서적들만 남기기에도 공간이 부족해 대대적인 책정리를 하며 당시 근무하던 학교, 도서기부함에 기증을 했다.
그 후 한동안 디즈니 책을 잊고 살다가 대학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한 것이다. 책의 겉표지가 씌워져 있지 않아 '오, 이 책은 뭐지? 마구마꾸 끌린다'라며 빌려왔는데, 집에 와서 제목을 검색하니 예전에 내가 기증한 그 책이었다. 나의 건망증을 넘어선 한결 같은 디즈니 취향에 놀라웠다. 얼마전 디즈니플러스 ott를 구독하며 1년간 함께 계정을 공유할 선생님들을 모집했던 걸 보면 디즈니라서 그런 추진력이 발동한 것이었다. 그렇게 어릴 때부터 디즈니는 내 삶, 취향, 생각에 구석구석 스며들었고, 30대가 된 지금도 여전히 나는 디즈니를 좋아하고 디즈니 공주들의 삶과 대사를 통해 감명 받고 지혜를 얻는다.
<디즈니 프린세스, 내일의 너는 더 빛날 거야>의 프롤로그에는 이런 문구가 나온다.
"디즈니 프린세스 시리즈를 관통하는 메시지 중 하나는 '사랑과 내면의 아름다움'입니다. <백설공주>의 왕비도 이미 충분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지만, 백설공주는 사랑스럽고 밝게 왕비는 어딘지 음험하고 어둡게 표현되는 건 그런 이유겠지요. ... 그것은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상하게 하는 일마다 잘 되고, 주변에 사람이 모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살펴보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상냥하게 말하며, 어떤 상황에서든 당당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어두운 곳에 있어도 반짝반짝 빛이 나지요."
프롤로그 안에 내가 살고 싶은 삶의 모습, 이상적으로 그리는 삶의 방향이 담겨 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상냥하게 말하며, 어떤 상황에서든 당당한 삶을 살고 싶은 한 인간으로서의 소망이 담겨 있다. 현실에서는 숨이 턱턱 막히는 많은 업무량과 해야 할 과업들, 시기와 질투로 진실한 관계를 어그러뜨리는 사람들, 자신이 불행하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도 함께 불행에 끌어들이려 발을 걸고 어깃장을 놓는 사람들을 만나며 마음이 아리고 무너질 때가 있다. 그럴 땐 신앙서적이나 성직자의 말씀만으로는 마음이 충분히 헤아려지지 않았다.
힘든 마음을 내비치는 것이 믿음 없는 것으로 간주될 때, 삶이 힘들어 마음이 꼬여버린 사람들을 이해하고 품는 것이 신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 주입하는 비합리적인 상황을 맞닥뜨릴 때, 획일적인 나눔으로 표면적인 견고함을 다지는 공동체를 겪고 나면 움츠려들어 내 마음의 성소로 도피하게 되는 나를 마주한다. 그럴 때 디즈니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역경을 딛고 일어나려는 의지, 마침내 잘 될 것이라는 기대, 누군가 자신을 도와줄 것이라는 희망, 주변을 돌아보고 따뜻한 손과 말 한 마디를 건네는 마음은 현실보다 더 실제적이고, 믿음, 소망, 사랑을 구체적인 형태로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래서 여전히, 나는 디즈니를 좋아한다. 아직 오지 않은 육아에 대한 기대감이 생긴 것도, 아이와 함께 디즈니를 보며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라는 기분 좋은 상상에서 연유한다. 동화지만 더 현실을 비추고 있고, 좋아하는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로마서 12장 21절)"는 말씀이 실현되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어 다시금 삶을 살아갈 마음을 다잡게 된다. 이번 주말에는 어떤 디즈니 영화로 또 마음을 풍요롭게 할까,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