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옛 모습이 담긴 사진이나 자료들을 볼 수 있는 개인블로그, 홈페이지들이 인터넷에 많이 있습니다. 개인이 소장한 사진들도 있고 어렵사리 외국에 나가서 발견한 자료나 혹은 인터넷이나 책자를 통해 찾은 사진 등을 다운로드를 받거나 스캐닝 하여 올린 자료들이 바로 그것 입니다.
위 지도는 인터넷에서 찾은 것입니다. 대구의 달성공원과 서문시장 부근인데요. 달성공원에 '대구신사'라는 한자 글씨가 씌여 있는 것으로 보아 일제시대때 지도인 것 같습니다.
지금의 서문시장 자리엔 정확히 '시장'이란 글씨가 적혀 있습니다. 예전엔 이곳이 못이 있던 자리라고 들었는데 이곳을 매립해서 시장북로쪽에 있던 시장을 옮겨온 것이라 하더군요. 그런데 지도에는 벌써 이곳을 시장이라 이름 붙인 것으로 봐서는 상당히 오래 전에 매립이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제가 어렸을때 살았던 저희 집이자 식당이었던 '풍각관'이 있던 곳은 '시장북통'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길 오른쪽으로 골목길로 들어가면 나오는 곳입니다. 지금 당장에라도 지도에다 표시를 하라면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최근에 대구에서 발간된 '대구 신택리지'라는 책을 통해 알게되었는데 시장북로(통)쪽이 예전엔 소시장, 말시장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신정'이라는 글씨가 써 있는 곳은 지금의 미싱골목 일대라고 생각됩니다. 지도를 보면 맨 아래 오른쪽에 해성학교라는 학교이름이 있는데 이는 첨 듣는 이름입니다. 혹시 계성학교를 말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위치상으론 비슷한 것 같거든요.
그리고 저희 가정집이 비산동에 있었는데, 지도에서 서문시장에서 주욱 내려오다 삼거리가 나오는데 (지금은 네거리) 제가 초등학생에 들어가기 전인 1964년경에는 시민극장앞 은 삼거리였습니다. 그러다 1971년경인가 새로 도로를 하나 내는데요.그 길을 서신로라 이름 붙였죠. 시민극장 앞~삼성예식장~고개를 넘어 당시 서부국민학교~경상여자상업고등학교를 잇는 큰 도로가 생겼지요. 그 공사가 어느 정도 이뤄진 모습을 찍은 사진이 바로 아래에 있습니다. 매우 보기드문 귀한 사진이지요.
이 길은 당시로서는 보기드문 매우 넓은 도로였습니다. 사진에서 왼쪽 맨 윗부분 튀어나온 건물이 지금도 그 자리에 있는 대성초등학교 본관건물 지붕입니다. 제가 살았던 가정집은 사진에서 맨 왼쪽 중간지점에 약간 비탈진 길의 모습이 어두운 실루엣처럼 어렴풋이 보이는데 그 언덕길 두번째 집입니다. 기와 지붕도 보이는 것 같네요. 지붕위 기왓장 몇 개는 제가 밟아 부숴진 것입니다. TV가 잘 안나오는 날이면 지붕에 올라가 TV안테나선을 까서 새로 잇는 작업은 늘 제 몫이었거든요. 평소 손끝 하나 까딱 않던 구들목 장군이 왜 그렇게 솔선수범하는가 하면요, 제가 그때 워낙 TV광이었던지라 TV가 찌직거리거나 잘 안나오기라도 하는 날이면 누가 고치라는 소리가 없어도 어김없이 지붕 위로 기어 올라가 안테나를 이리저리 돌려보거나 끊어진 TV선을 시커먼 전기테이프나 투명 유리테이프로 이어 감았던 것이죠. 방안에 TV화면을 확인하는 일은 누나의 몫이었고 말이죠. 덕분에 우리집 지붕 기왓장은 그럴 때마다 몇 장씩이나 깨졌던 것입니다.
참으로 감회가 새롭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1976년 때 까지 저는 이곳에서 줄곧 살았구요, 1982년에 돌아가셨던 친할머니, 누나, 여동생 그리고 둘째고모(작고)와 이모님 식구들도 모두 이 집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도로 오른편 주택 뒷편으로는 달성공원이 얼핏 보입니다. 이 길이 생기기 전엔 오른편으로 아주 오래된 언덕길이 있었는데 이 길은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임금님이 행차하고 한양으로 가기도한 옛날 지도에도 나오는 아주 역사가 깊은 길이라고 합니다. 제가 이곳에 살던 때는 '푸른다리거리' 라고 불려지기도 했습니다. 이 도로 위로 시발택시, 합승버스 등이 오르내리고 사람들이 차도, 인도도 제대로 구분 안된 이 길을 차와 자전거를 피해 길 바깥쪽으로 바짝 붙어 다니던 기억이 나는 먼지와 배기가스로 가득찬 아주 복잡한 길이었단 기억이 납니다. 그 '푸른다리거리'에는 병원이 하나 있었는데 병원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저와는 각별한 인연이 있던 병원이었습니다. 고교1학년때 건강이 안좋아 이 병원에서 주사를 맞기위해 매일 들리곤 했습니다. 그리고 언덕길에서 미싱골목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할머니 심부름으로 가끔 가던 담뱃가게도 있었습니다. 겨울이면 막걸리를 데워 드시길 좋아히셨던 할머니는 늘 곰방대에 풍년초 담뱃가루를 넣어 피우셨거든요.
위나 아래 2장의 달성공원 사진은 비교적 최근의 달성공원과 인근 모습을 찍은 것으로 보입니다. 달성공원 정문에서 보면 오른쪽으로 난 복개도로를 따라 들어가면(예전엔 시궁창 물이 흐르고 있던 개천이었습니다) 나오는 옛'인동촌시장'길이 잘 정비가 된 듯한 모습을 봐서는 그런 느낌이 듭니다.
인동촌시장이 제가 대학을 다니던 1978년 당시에는 속칭 '텍사스'라고 불리는 빨간불을 켠 술집들이 복개도로 양편으로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말이 시장이지, 환락가 다름아니었습니다. 물론 골목 드문드문 가게나 점포들이 들어서 있긴 했지만 저급한 술집들의 난립으로 인해 시장으로서의 기능은 거의 상실했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으니까요. 그 술집들은 바가지 술값으로 악명높기가 전국에서도 알아줄 만큼 대단했습니다. 바가지를 씌운다는 말은 요즘엔 사실 듣기 어려운 말입니다만. 술이 방으로 들어 올 때마다(주로 맥주) 그때마다 아가씨들은 손님에게 갖은 아양을 떨어 안주를 들여오곤 하는데 안주라는것이 조그만 접시에 땅콩과 대구포 몇개 올려놓고는 한 접시에 만원, 만오천원씩을 받는 폭리를 취했습니다만, 이것은 어찌보면 양반에 가깝구요. 안주접시 밑바닥에 또하나의 접시를 슬쩍 붙여 들여와 나중에 술값을 치를때 술상에 쌓인 접시숫자대로 계산을 치르게 되는것이므로 엄청난 술값이 나오게되는 것입니다. 당시는 이런 공공연한 행위가 마치 합법적인 것처럼 자행(?)되어지던 시대였는데, 놀라운 것은 그 곳을 찾는 손님들도 이 사실을 사전에 익히들어 알고 있으면서도 제발로 찾아간다는 사실입니다. 대구바닥에서 술 꽤나 푼다던 젊은남자들 쳐 놓고 이곳을 한번도 찾지 않는 이가 거의 없을 만큼 인동촌시장 '텍사스촌'은 대구뿐 아니라, 명실상부 전국적 명물로 자리매김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곳을 찾기 전 술꾼들은 이를 미리 대비하기위한 작전을 짜서 가는데, 예컨데 방문 앞에서 마담들이 방안으로 들여놓는 안주접시를 정확히 세는 사람, 술은 안 마시면서 안주빨 엄청받는 아가씨를 제지하는 사람, 술을 덜 마시고 술상 밑 빈 맥주잔이나 물수건에 슬쩍 뱉거나 버리는 아가씨를 꾸짖는 사람 등등, 그곳을 가기 전 나름대로 직책(?)이나 임무를 부여하거나 하는 작전을 세우기도 했던 것입니다.
모도마찌(元町)라고 불린 일제시대 최대의 상권지, 북성로
일제시대 북성로는 동경의 긴자거리를 본따 은좌(銀座)로 불렸다. 은방울 모양의 수은가로등으로 밤에도 대낮처럼 밝았기 때문이다. 거리 정식명칭은 원정(모도마찌, 元町)이었다. 일제시대 상권의 번영을 상징하는 일본인백화점인 미나까이(三中井, 삼중정)오복점은 바로 북성로에 있었고 5층짜리 건물에다가 엘리베이터까지 있었던 명물장소였다. 일제시대엔 미나깡이에서 우동한그릇이 지금의 패밀리레스토랑에서의 외식수준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건물은 철거되고 대우주차장이 들어와있다. 지금은 옛날의 번화가임을 추측해주는 수많은 주상병용일본식건물과 첨단의 공구기자재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대구역 옆에 있는 청과물상가가 원래 북성로 공북문 입구에 있었다가 옮겨간 것이라 한다. 해방후 문인, 예술가들의 단골다방이었던 백조다방도 있었다. 현재 북성로에 남아있는 근대건축물은, 벽산페인트건물로 쓰이는 구 조일탕건물과 37년에 지어진 상점병용주택으로 광명페인트사로 쓰이는 건물이 있고 시민회관 건너편 쪽에는 태성주방으로 쓰이는 구 구성운(九星運)건물은 34년에 지어진 건물이다. 그 외에도 대부분의 건물들이 반백년 전에 지어져서 대구 근대건축사에 많은 데이터를 제공하고 있는 길거리 건축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블로그 '내고장 대구')
1905년. 계산성당 뒤 초가집들 사이에 담처럼 보이는 것이 파괴되기 전 대구읍성 성벽 일부. 성벽 뒤에 보이는 곳이 성내로 대구의 중심지. 사진의 성벽은 영남제일관에서 달서문 사이의 성벽이며 이 성벽터는 현재 약전골목으로 이용되고 있다.
(사진 위) 대명동 옛 대건중고등학교 일대 모습.
지금은 성유스티노신학대로 바뀐 대건중고등학교 건물과 운동장이 보인다.
행정구역상으로 남산3동에 해당되며 계산오거리에서 남문시장 가는 도로를 경계로 남산2동과 구분되는 지역이다. 국채보상운동의 선구자였던 서상돈 선생이 이 지역 일대에 종묘원을 운영하고 있었던 임야지대였다. 남산3동 대구대교구를 비롯해 주변지역 일대가 그의 땅으로 추정된다. 당시 ‘앞고개’로 불렸던 곳이다.
1905년 경 일본 효코현兵庫縣의 야키八木太郞 라는 사람이 서상돈을 찾아가 현재의 신학교 언덕에 ‘부식원富植園’이란것을 차렸다. 당시 돈으로 1만원 정도 투자했으며 화훼, 과수’ 기타 원예, 신종 야채류까지 재배했다. 그 언덕 위에 대규모 우물을 파고 커다란 2층짜리 일본 가옥 두 채를 세웠다. 하지만 원예재배는 실패로 끝나고 1907년 가을 야키는 도망을 쳤다. 그가 세운 집 중 한 채는 오하시大僑松太郞이 구입해 완전동으로 이건하여 1919년경까지 살았다고 한다. 1905년 당시 원예과수의 시험재배를 했다는 것은 아주 대담한 시도였고 서상돈은 이것으로 적지 않은 손해를 봤다고 한다.
이 땅을 서상돈은 대구교구에 기증했으며 프랑스선교사들은 성유스티노신학대학, 교구청, 살트르수녀원, 성모당 등을 지으며 가톨릭타운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해방 이후 대건, 효성학교가 들어섰다가 1990년에 이전하게 된다. 이외에 계명대학 사거리 못가서 경구중학교, 경북기계공고 등이 자리잡았고, 남산초등학교가 대명동 화장터(현 까치맨션) 건너편에 일제시대부터 자리잡게 된다. 성모당 뒤에 남산성당도 근대건축물이다. 대교구와 아파트, 학교부지 이외에 대부분 오래된 집들은 재개발의 붐으로 점점 사라지고 있다.
반월당이란 덕산동 일대를 지칭하는 지명으로, 지금부터 약 50여년전 건평 61평의 2층 목조건물로 지은 대구 최초의 백화점 “반월당”의 이름이다.
극장 이름은 알 수 없지만, 극장 앞에 세워진 광고탑에 '사나이 현주소'라는 영화 제목이 붙어있고 두 손을 잡고 권총을 겨누고 있는듯한 사람 모습이 바로 오지명씨다. 박노식, 장동휘,김지미, 허장강씨 얼굴도 간판에 그려져 있다.
“선생님, 예전에 멋진 액션배우셨다면서요?”
‘오박사네 사람들’ ‘순풍산부인과’ ‘쌍둥이네’로 온 국민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웃게 만들었던 코미디의 달인, 오지명. 그가 젊은 시절엔 최고로 잘나가던 액션배우였다!
어머니께서 남긴 유품 속에 ‘사나이 현주소’의 포스터가 들어 있었다. 그가 당당히 피 묻은 주먹을 쥐고 있다. 액션영화 주연배우였던 것, 맞다. 당시 평균 제작비였던 1500만원을 들인 이 영화는 “영양가 있을 때, 즉 ‘박수 칠 때 한 방 크게 하고 떠나야지’라고 꾀(?)를 부렸던 마지막 제작영화였다”는 고백이다. 돈도 좀 벌었다는 이 영화 포스터엔 박노식, 장동휘, 김지미, 최불암, 허장강씨 등 당대 최고의 배우들이 포진해 있다. 잘 보면 이 영화로 데뷔했다는 이대근씨도 있다.
연극, TV, 영화를 아우르며 70년대에 대단한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다 ‘쉬면서 고민과 기다림의 시간’을 4~5년이나 보내야 했던 이 진지한 액션배우를 코미디배우로 옷을 바꿔 입게 한 사람은 작가 김수현씨다. 79년 ‘엄마 아빠 좋아’라는 TV드라마에 그를 캐스팅, 상상 못했던 변신을 시켜주었고 그해 최고 주연남우상까지 받았다.
“무섭다, 그의 말이 곧 법이다, 무데뽀다….”
그를 감싸고 도는 괴상한 소문들이 정말 다 사실이냐고 어렵게 물었다. 진상을 살펴보면 대략 이렇다. 밥 배달이 안 돼서 굶어가며 일하다가 음식 시켜먹자고 소리 좀 지른 것, 후배가 PD 눈 밖에 나서 제명당하게 생겼기에 동료들 동원해 풀게 한 것, 비상시국이라고 방송국 정문에서 명찰 달고 오라기에 그 길로 집으로 그냥 가버렸던 것 등등. 따져보면 남의 일 해결하다가 생긴 문제들이고 그 혜택은 동료들이 받았음에도 뒤에선 무서운 사람으로, 때론 정의의 사도로 그렇게 수군거림의 대상이 되었나 보다고 회상한다. 돌이켜 보건대 아니꼬운 꼴 못 보고, 학벌 좋다고 까부는 놈 못 봐주고, 잘 나간다고 기고만장한 PD는 더더욱 못 참았던 유별난 성격 탓에 방송국에서 힘든 일도, 탈도 많았다.
기억에 남는 사람으로는 고인이 된 추송웅씨를 잊지 못한다. 벌써 30년도 더 전, 추송웅씨가 국립극단 단원으로 막 들어왔을 때, “야 나보다 더 찌그러진 그 얼굴에 사투리까지? 너를 위해 해주는 말인데 너 연기 하지 마라!” 하고 두 눈 부릅뜨고 기를 죽였다. 훗날 빨간 피터가 되어 천재적인 연기로 각광받은 그가 85년 방송국으로 찾아와서는 “선배님이랑 한무대에서 대결하고 싶습니다” 하고 부탁을 했단다. 그 자리에서 흔쾌히 수락했는데 그로부터 한 달 뒤 돌연히 그가 세상을 떠났다. “같이 한무대에 섰더라면….” 그것이 참 가슴 아프단다. “지금 생각하면 배우란 건 아무나 되는 건데 내가 그때 왜 그랬을까?” 싶다.
90년 한창 ‘서울뚝배기’를 하는데 “저놈은 어린 것이 나보다도 더 연기를 잘하네” 싶어 눈여겨봤는데 요즘의 양동근이더란다. 연기하는 게 예사롭지 않고 ‘천생 배우다’라고 생각했던 그애가 지금 활동하는 게 보기에도 그렇게 좋다. 평생을 맺은 인연과 사연의 골들은 들으면 들을수록, 물어보면 물어볼수록 구수한 옛날 이야기보다 더 재밌게 술술 깊이를 더한다.
미국의 ‘코스비 가족’을 뒤집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시트콤의 재미를 모르던 시기에 ‘오박사네 사람들’의 대히트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당선했던 ‘애국시민 노기찬’의 작가 오진홍이 사실은 그였다는 걸 누가 알까.
며칠 전 크랭크 인(촬영 시작)한 영화 ‘까불지마’에서 그가 주연이자 감독인 것은 그래서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최불암, 노주현도 함께 나온다. 멋쟁이 후배 김용건이 어느 날 “형님, 영화 제작하신다면서요?” 하기에 “왜? 떫으냐?” 했단다. 왜 사서 고생이냐는 후배의 마음을 읽었지만 그냥 감독을 하기로 했다.
“왜 꼭 감독을 하셔야 해요?” 나도 같은 질문을 했다. 이런저런 말을 두서없이 마구 섞기에 “그냥 하시고 싶으신 거죠?”라고 허리를 끊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맞다고 한다. 막 들으면 기분 나쁘지만 ‘까불지마’라는 이 제목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제목인 듯도 하다. 올겨울엔 ‘가슴을 적시는 아저씨 액션’의 바람이 불어주길 간절히 기대하고 있다.
(2004.6.14 조선일보. 정승혜 씨네월드 이사·영화칼럼니스트)
오지명씨는...
1939년 충북 청원에서 태어났으며 성균관대 경제학과 2학년 때 국립극단에 입단했다. 연극 ‘박꼬지’ ‘이순신’ 등에 출연하다 1966년 최불암씨와 함께 ‘공채를 가장한 특채’ 형식으로 KBS 4기 탤런트가 됐다. 이듬해 반공 드라마 ‘제3지대’에서 연기를 시작하며 탤런트의 길을 걸었다. 1968년 ‘방랑대군’, 70년 ‘번개 같은 사나이’ 등 150여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90년대 중반 이후 시트콤 ‘오박사네 사람들’ ‘순풍산부인과’ 등에서 코믹 연기로 각광받았다. 65세 감독 데뷔작으로 ‘까불지 마’를 촬영 중이다.
이 길이다. 국민학교 다닐 때 나는 늘 이골목길을 지나 다녔다. 비좁았던 이 골목길은 내 기억에도 늘 좁고, 복잡하고, 지저분하고, 시끄러웠던 길이었다. 점포 밖 길가에 까지 기계나 공구들을 잔뜩 내놓아 사람들이 지나다니는데 불편을 끼치긴 했지만 다들 당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불평 한마디 없이 다녔던 길이다. 먹고 사는 일에는 너도나도 이해 해주고 참아주던 당시 인심이었다. 사진에서 보이는 길바닥은 그땐 늘 더러운 구정물이 흥건히 괴어 있었다. 비가 많이 오기라도 하면 여기저기 아스팔트가 패인 구덩이에 괴인 흙탕물이 튀어 신발이나 바지가랑이를 더럽히곤 했다. 그 때는 그 길에 온통 사람과 삼륜차, 짐 자전거, 리어카 등이 뒤엉켜 혼잡하기도 했거니와 철공소 같은 곳에서는 쇠를 깎아내는 소리, 모터 돌아가는 소리 등 골목길이 온통 소음으로 뒤덮이기도 했다. 사진에서 왼쪽 붉은색 건물(서울미싱)은 목욕탕이 있었다. 일년에 몇번 안하는 목욕을 이곳에서 하고 이발소가 이층에 있어서 이발에 면도까지 했다. 비산동집은 국민학교부터 고교시절까지 살았으므로 고교때 수염이 거뭇거뭇 났던 난 이 목욕탕 건물에 딸린 이발소에서 면도사 아가씨의 능숙한 면도솜씨에 늘 감탄하며 이곳을 이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