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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8. 묵상글 ( 부활 제5주일. - 화수분 같은 주님 사랑.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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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8. 부활 제5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화수분 같은 주님 사랑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부활 제5주일 주제는 이런 것일 겁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라!
주님의 계명인 사랑을 실천하라!
그리고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면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이고,
주님 사랑 안에 머묾이 없이 사랑을 실천하려 하면 아무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오늘 해야 할 모든 얘기를 요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것을 좀 더 풀어서 얘기하면 이런 것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우리 사랑은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말도 되겠습니다.
이것은 주님 품 안에 안겨 있는 것과도 같고,
주님 사랑 안에 푹 잠겨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렇게 안겨 잠자고 나면 옛날 엄마 품에서 잠자고 난 것처럼 다시 기운이 나고,
그렇게 사랑 안에 오래 잠겨 있다가 나오면 충전된 건전지처럼 힘이 넘치겠지요?
그렇긴 한데 우리가 엄마 품도 아니고 주님 품도 아니고,
연인의 품에 안겨 잠자고 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도 되겠습니까?
힘을 얻을 수도 있고 뺏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오래 가지 못할 수도 있고
아무튼 주님 품보다 불완전하고 불충분합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딱 보조 배터리입니다.
주님 사랑의 보조 충전기이고 보조 배터리입니다.
그리고 그나마 주님께 충전 받아야 충전해줄 수 있는 충전기이고 배터리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영원한 사랑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에게 주님의 보조 배터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우리가 직접 주님 사랑 안에 머물고 잠겨야만 합니다.
이것이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이고,
이래야 주님 말씀대로 열매를 많이 맺는 가지가 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주님의 계명을 지키면 주님 사랑 안에 머물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주님의 계명인 사랑 실천을 잘하고
그래서 사랑의 열매를 많이 맺는 길입니다.
우리 사랑이 열매 맺지 못함은 우리 사랑이 주님 사랑에 머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얼마 안 남은 우리 사랑으로 이웃 사랑을 하려고 하니
사랑하다가 그만두게 되고 사랑한다면서 사랑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심지어 사랑하다가 미워하게도 되고 분노하게도 됩니다.
한두 번 물 준 것으로 나무가 계속 싱싱하고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없습니다.
사랑 나무와 사랑 열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 떨어지면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 하느님 사랑에서 물을 길어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화수분 같다고 하는데
주님 사랑만이 화수분 사랑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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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8. 부활 제5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022년 6월 초, 기상청에서는 곧 올 장마를 예고했습니다. 이번 장마는 7월이 아닌 6월에 시작할 것이라면서 이른 장마로 큰 피해가 있을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이 예고에 농가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예정보다 이른 시기에 작물을 수확해야 했습니다. ‘혹시’라는 마음에 버티다가 정말로 비가 와 버리면 아무것도 얻어낼 수 없기에 가치가 조금 떨어지더라도 서둘러 수확하는 쪽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6월 장마 예고는 어긋났습니다. 비가 조금 오기는 했지만, 장마 수준은 아니었던 것이지요. 이에 수확을 미리 앞당겼던 농부들은 큰 피해를 봤다면서 항의했습니다. 기상청 예보는 맞지 않는다는 비판도 쏟아졌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보면 이 과잉 예보가 훨씬 낫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비가 온다고 했다가 오지 않으면 경제적 피해를 보는 데서 그치겠지만, 비가 오지 않는다고 했다가 퍼부으면 준비하지 않아서 재산 피해뿐 아니라 인명 피해까지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상청은 비가 올지 안 올지 모를 때는 비가 온다고 예고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준비는 중요합니다. 더 큰 피해를 막는 데 꼭 필요합니다.
세상은 이렇게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해 준비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들은 어떤 것을 준비해야 할까요? ‘과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는 잘하고 있는가?’라는 준비가 아닐까 싶습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계속 지금 상태가 계속될 것이라는 안일한 마음을 가지고서는 큰 후회를 남기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계속해서 ‘늘 깨어 있어라.’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서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라면서 포도나무의 비유 말씀을 해주십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는 그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라고 하시지요. 이 가지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님과 연결되어 있어야 영원한 생명이라는 결정적인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가지는 포도나무와 언제 붙어 있어야 할까요? 내가 어렵고 힘들 때만 붙어 있으면 될까요? 아니면 기분 좋을 때만 붙고, 그렇지 않으면 떨어져 있어도 될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가지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만 살 수 있고, 붙어 있어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주님께 붙어 있는 것은 여유가 있고 마음이 평안할 때가 아닙니다. 또 어렵고 힘들어서 부탁할 때만 붙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 붙어 있어야 할까요?
단 한 순간도 떨어져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미래를 위한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확실한 준비가 됩니다. 따라서 매 순간 주님과 붙어 있으면서 주님의 뜻을 세상에 실천하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려거든 역사를 바로 읽을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거든 역사를 익혀 바로 알게 할 것이다(신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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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8. 부활 제5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는 나 없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오늘은 부활 제 5 주일이며, 생명주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바오로의 회심이 그 자신에게 있어서 얼마나 단호하고, 결정적인 사건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참으로 그의 회심은 죽음을 담보로 한 회심이었습니다. 그의 회심은 신앙이 하나의 장신구가 아니라, ‘신앙이 아니면, 삶이 의미도 없다.’라는 실존적 선택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윤리 도덕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사도 바오로에게 목숨을 불사하게 한 신앙의 진리는 무엇이었을까?
이 진리에 대해서,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해줍니다.
“말로써가 아니라 행실과 진리로써 사랑합시다.”(1요한 3,18)
이는 단지 언행일치의 윤리도덕 차원의 차원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진리로써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신적 속성인 “진리로써 사랑한다.” 것은 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그 근거를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은 단지 “포도나무와 가지”에 대한 비유가 아니라, “참 포도나무와 가지”에 대한 비유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백성’을 지칭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참”이라는 형용사가 붙어서, 예수님의 진리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참된 진리는 “참 포도나무와 가지와의 관계, 곧 참 된 진리이신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이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여덟 번이나 반복되고 있는 “머물다”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신비스런 단어인 “머물다”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오늘 <복음>에서는 우선적으로 “붙어있음”을 말합니다. 곧 포도나무에 붙어있어서, 다른 데서가 아닌 바로 그 포도나무로부터 수액을 받아먹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마치 물고기 물을 떠나면 죽음이듯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머물다”는 말은 뗄레야 뗄수 없는 “상호 불가분의 긴밀한 관계”로 ‘붙어있음’ 말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포도나무에 “붙어있다”는 사실만으로는 결코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뭇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다하더라도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잘려져 불에 태워져버리기 때문입니다. 결국, 붙어있되, “열매를 맺는 이”라야 “머물러 있는 이” 입니다.
따라서, “머물다”는 말의 의미는 단지 그분께 ‘붙어있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열매 맺으실 수 있도록 자신을 비워드림이요, 그분의 말씀의 권능이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허용하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그분의 ‘참 생명’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요, 그분과 결합하여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 역시 <코린토인들에게 보내는 둘째 편지>에서 말합니다.
“주님과 결합하는 이는 그 분과 한 영이 된다.”(1코린 6,17)
그러기에, “머물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상호내주 혹은 상호공유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과 인간이 함께 벌리는 역동적인 활동이 벌어지는 ‘상호 친교’요, ‘상호교제’요, ‘상호교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오늘 <예물기도>에서는 “거룩한 교환”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사도 베드로가 밝히듯,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2베드 1,4). 참으로 하느님께서는 하찮은 우리에게 영광의 관을 씌어주셨습니다.
참으로 예수님께서는 신비로운 방식으로 우리 안에 계시며 활동하십니다. 참으로 우리는 참 포도나무이신 그분과 이토록 신비롭게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러한 “공동본성”(Connaturality)에서 오는 앎에 경탄하여 탄성을 질렀습니다. “아, 우리가 하나라는 걸 그토록 모르는가?” 바로 이 ‘공동본성’이 우리에게 신적 진리, 참된 진리를 가능케 하는 자리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 자리가 신적 진리로써 사랑이 피어나는 곳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스런 ‘참 사랑’, 하늘스런 ‘참 생명’이 피어나는 곳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토마스는 ‘공동본성에서 오는 사랑의 지혜, 하느님 사랑으로 주어지는 신적 지혜 혹은 관상’이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 신적 진리, 참된 진리에 참으로 머물러 있고,
열매를 많이 맺을 수가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을 오늘 <복음>에서 찾아본다면, “너희는 나 없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라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곧 가지는 나무에 속해 있을 뿐 스스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가지가 나무를 지탱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가지를 존속시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또 열매를 맺으실 수 있는 그분께 승복하여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라야, 참된 사랑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단지 붙어있어야 할뿐만 아니라, 좀 더 적극적으로 머물러 있어야 할 일입니다. 이미 우리 안에 내주하신 그분의 수액을 받아 마시며, 말씀 안에 머물고, 사귀고, 교제하면서, 당신께서 열매를 맺으시도록 하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오늘 사도 바오로처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요한 15,4)
주님!
당신께서는 무너뜨리지만 열매를 맺어주셨고
부서뜨리지만 새싹을 틔워주셨습니다.
이토록 제 자신이 부서지고서야, 제 자신을 건네주고서야,
당신께 머무르는 법을 배워갑니다.
꽃이 지듯, 제가 무너지는 것을 안타까워하지 않게 하소서.
열매가 떨어지듯, 제가 사라지는 것을 서러워하지 않게 하소서.
주님, 저는 오늘도 떨어져야 머물게 되는 이 신비로운 사랑 앞에
떨어지지 못함이 부끄럽고 죄송스러워 고개를 떨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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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8. 부활 제5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내 안에 머물러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당신 안에 머물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이미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머무십니다. 이 시간 주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는 은총이 충만하길 기도합니다. 아울러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시는 15분 모두에게 언제나 주님 안에 붙어있는 굳건한 믿음을 주시길 청합니다.
흔히 하는 말입니다. “기는 놈 위에 뛰는 놈 있고,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 아무리 능력 있고 똑똑하다고 해도 그보다 위인 사람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나는 놈 위에 붙어 다니는 놈 있다”고 합니다. 정말 똑똑하고 잘난 사람은 실세가 누구인지 파악해서 그 옆에 꼭 붙어 다니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소위 줄을 잘 서는 것이지요.
우리는 꼭 붙어있어야 합니다. 누구에게? 주님께 꼭 붙어있어야 합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풍성한 열매를 맺는 비법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것입니다. 꼭 붙어있어야 뿌리로부터 생명의 수액을 받아 열매를 맺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주님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무엇인가를 이루어 보겠다고 애쓰는 신앙생활은 실패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증언합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1코린5,6-7). 그러므로 자만을 버리고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온전히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치시켜야 합니다. 주님께 모든것을 내어놓고 항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4,6). 자신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 커가는 만큼 주님의 도움과 멀어진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신 말씀은 ‘말씀에 대한 믿음이 없이 청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먼저 믿음으로 주님 안에 머물러야 하고, 믿음으로 청해야 소망을 이룰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 하느님께 빌면 무조건 이루어지리라는 자기중심적이고 맹목적인 신앙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는 믿고 바라고, 믿고 감사하고, 믿고 기뻐하고, 믿고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하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예수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그대로 실천하며 산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그 의미를 깨닫고 그분과 일치하는 삶을 말합니다. 2독서를 보면,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3,24).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압니다”(1요한 4,12-13).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면, 나무에서 가지가 영양을 공급받는 것이지, 가지가 나무를 풍요롭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열매는 가지에 달리지만 가지가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잘려진 가지는 뿌리에서 분리되므로 살 수가 없습니다. 가지는 홀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포도나무인 주님 없이 가지인 제자는 절대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님 안에 머물지 않으면 결코 주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혹 무엇인가에 성공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주님과의 일치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내일일 뿐 주님의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디에 머물러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사실 주님을 믿는 이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 것에 마음을 두지 않고 천상 것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것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6,31-34).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고달픔만 더하고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 안에 머무르지 못하고 내 뜻을 먼저 찾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무엇이든 청하여라.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말씀에는 관심이 있지만, 바로 그 앞부분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하는 말씀을 간과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분명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이 먼저입니다.
오늘은 주님 안에 머물러 꼭 풍요로운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정 안에서, 일터에서, 삶의 자리에서 주님 안에 머물러 기쁨을 누리시길 빕니다. 그리고 주님 안에 머물지 못한 일은 헛수고임을 일찍 깨우쳤으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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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8. 부활 제5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순례 중에 ‘개신교회’에서 천주교로 개종한 분이 있었습니다. 같은 하느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지만, 성모님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천주교회는 ‘성지순례’가 신앙의 행위로 익숙하지만, 개신교회에서는 성지순례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개신교회는 오직 믿음으로, 오직 말씀으로 신앙생활을 하기에 성모님에 대한 특별한 지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모님을 예수님의 어머니로 인정하지만, 성모님을 교회의 어머니로 인정하지는 않습니다. 당연히 성모님에 대한 신심이 없고, 성모님에 대한 신심이 없기에 성모님의 발현을 인정하는 성모 성지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합니다. 성지는 대부분 열심한 신앙인들의 땀과 눈물이 있던 곳에 있습니다. 그분들의 놀라운 열정과 헌신이 있던 곳에 있습니다. 성지는 대부분 순교자가 묻혔던 곳에 있습니다. 성인들의 유해가 있는 곳에 있습니다. 개신교회는 성인들에 대한 공경과 신심이 없기에 성지순례를 갈 기회가 없다고 합니다. 대부분 성지에는 가톨릭교회의 성당이 있기에 개신교회에서 성지순례를 올 이유도 없다고 합니다. 개신교회에서 천주교회로 개종하신 분 중에는 열심한 분들이 많습니다. 개신교회의 장점과 천주교회의 장점을 받아들여 신앙이 더욱 깊어졌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4장은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우물에서 물을 퍼 올리고 있었습니다. 목이 마른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물을 한 잔’ 달라고 하셨습니다. 여인은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은 서로 상종하지 않는데 물을 청하느냐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네가 주는 물을 마시면 곧 다시 목이 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자 여인은 예수님께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물’을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남편’도 데리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여인이 예수님께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과거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 여인에게는 여러 남자가 있었습니다. 여인은 자신의 지난날을 모두 아시는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참된 예배는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참된 예배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참된 예배는 개신교회나 천주교회라는 장소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참된 예배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개신교회에 다니다가 개종했어도, 행실이 바르지 못해서 비난받았을지라도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따른다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과거라는 안경을 쓰고 상대방을 쉽게 판단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용서와 이해라는 안경을 쓰라고 하십니다. 중국의 개혁과 개방을 이끌었던 덩샤오핑이 있습니다. 10억 중국이 경제 대국으로 우뚝 설 수 있도록 이끌었던 덩샤오핑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검은 고양이든, 하얀 고양이든 쥐만 잡을 수 있다면 상관이 없다.” 이는 공산주의든, 민주주의든 중국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면 상관없다는 의미였습니다. 덩샤오핑의 개혁과 개방으로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 될 수 있었고, 경제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사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울은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체험했던 사울은 이제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박해했던 사울을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교회는 사울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사울은 이제 바오로가 되었습니다. 바오로는 초대교회의 교리와 신학을 정립하였습니다. 바오로는 참된 예배는 예루살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 ‘참된 예배’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어떤 사람이 열매 맺는 가지가 될까요? 개종했을지라도, 지난날의 허물이 있었을지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을 말과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그분의 계명은 이렇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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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8. 부활 제5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여러분, 가지가 더 중요합니까? 줄기가 더 중요합니까? 줄기가 더 중요합니다. 가지는 줄기에 붙어 있어야 살 수 있지요? 그런데 가지가 줄기에 무슨 힘으로 붙어 있습니까? 밥풀? 접착제? 아무튼 무슨 힘으로 붙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온 줄기는 하느님이시고, 가지는 우리입니다.
옛날 어느 왕국에 왕의 뒤를 이어 어린 아들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린 왕은 아랫사람에게도 인사를 했습니다. 그러자 비서실장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왕은 절대로 머리를 숙이는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그 어린 왕이 비서실장에게 이런 주문을 했습니다. 해골과, 말 대가리와 닭대가리를 구해오라고 말입니다.
닭대가리는 첫 아이를 무사히 낳는다는, 말 대가리는 무병장수한다는 풍습이 있어서 다 팔렸는데 해골은 팔리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보고하자 어린 왕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거 보십시오. 사람은 죽으면 닭대가리, 말 대가리만도 못합니다. 그런데 왜 머리를 못 숙입니까?”
이때 비서실장은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비서실장도 다음날부터 인사를 하기 시작했고, 겸손의 모습은 왕국을 평화로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바로, 이 겸손이 가지가 줄기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는 힘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잘 보아야 합니다. 겸손은 어떻게 얻어집니까? 고개만 숙이면? 말로 “안녕하세요?” “죄송합니다.” 그러면 겸손해집니까? 소리를 꽥꽥 지른다고 교만한 것입니까?
겸손은 자기 모습을 투명하게 바라볼 때 나타납니다. “내 꼬라지가 이것밖에 안 되는구나!”
겸손한 모습을 가질 때 우리는 하느님께 의지하게 됩니다. 오늘 내 모습을 잘 보십시오.
늘 우리라는 가지에 ‘겸손’이라는 열매가 달려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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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들이 놀고 있습니다.
동네 산책을 하는데
강아지들이 놀고 있습니다.
무는 시늉도 하고
따라가기도 하고 피하기도 하며
잘 놀고 있습니다.
갑자기 부러워졌습니다.
강아지들에게는 고민이 없어 보였습니다.
진정으로 오늘을 사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강아지들은 미래를 걱정하지 않습니다.
계획을 세우거나 고민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오늘, 이 태양을 즐기고
그저 오늘 이 바람에 감사하고
그저 오늘이라는 이 선물에 행복해합니다.
너무 많은 걱정과 고민은 좋지 않습니다.
아직 다가오지 않았으니
잠시 미래를 내려두고 오늘을 한 모퉁이를 즐겨보세요.
감사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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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8. 부활 제5주일. 키엣 대주교님.
주님과의 친밀함
식물을 키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꽃과 열매를 원합니다. 그러나 잎이 푸르다고 모두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영양이 잎으로만 간다면 속이 빈 쭉정이만 수확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세심한 관심과 정성이 필요합니다. 풍성한 수확을 위해 필요한 것들에 대해 생각해봐야 합니다.
가지는 반드시 나무에 붙어있어야 한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다면 결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영양분을 받지 못해 벌레에게 파먹혀 시들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불필요한 가지를 과감히 잘라버려야 한다 .
잎이 푸르고 무성하며 가지가 많은 나무는 보기에는 외형적으로 아름답지만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열매를 원한다면 가지치기를 해야합니다. 그러나 수맥을 상하지않게 가지를 잘라내야만 영양분이 흘러갈 수 있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것은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기 위해 필요한 것과 다르지 않기에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영적인 삶을 포도나무 가지에 비유하셨습니다.
주님과의 친밀함
가지가 포도나무와 붙어있어야 열매를 맺듯 우리 역시 예수님과의 친밀함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삶의 원천이시기에 그분과 떨어져서는 살 수 없고 성장할 수도 없습니다. 은혜의 강이신 그분과 하나된다면 우리의 영혼은 넘치는 은혜로 생명력있고 충만한 삶을 이룰 것입니다.
주님과의 친밀함이란 그 분이 주신 생명으로 살고, 우리의 말이 주님의 말씀이 되고, 우리의 행동이 주님의 행동이 되게 합니다. 또한 주님의 뜻에 따라 판단하고, 주님의 눈으로 사람과 사물을 보고, 주님의 사랑으로 내 이웃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과의 완전한 일치가 이루어질 때 내 마음속에 계신 그 분의 의지대로 우리의 모든 것이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나의 이익을 위한 것은 모두 잘라내야 합니다
가지가 많아 포도나무가 뒤틀리면 잎이 제대로 자랄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스며드는 것을 방해하는 곁가지들을 잘라주어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나의 뜻대로 마구 자라는 가지들을 잘라주어야 주님의 뜻대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영혼 깊숙한 내면까지 들어갈 수 있도록 외형적인 겉치례를 잘라내야 합니다. 소박하고 겸손한 마음을 얻기 위해 과장된 권위를 잘라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온 평생 아버지이신 하느님과의 일치된 삶의 여정은 우리가 본 받아야할 모범입니다. 친밀함은 아버지의 뜻을 찾기 위해 기도하고 그 뜻에 순종할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은총입니다.
진정한 포도나무이신 주님,
저희가 진실로 주님과 하나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소서. 저희가 주님의 뜻대로 신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저희에게 해로운 것을 잘라내야 함을 알게 하여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지금 나와 주님과의 일치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2. 내가 잘라내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3. 주님을 위해 언제나 어느 것이나 잘라낼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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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8. 부활 제5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내 안에 머물러라”
행복은 선택이요 선물이요 발견이다
기대반 설렘반 마음으로 십자가의 예수님과 태극기 앞에서 만세칠창과 더불어 시작하는 행복한 하루입니다. 저는 늘 만세칠창과 더불어 하루를 시작합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성령님 만세!”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성 요셉 수도원 만세!”
만세칠창과 더불어 선사되는 행복입니다. 그리고 다음 시편 구절을 되뇌입니다.
“주님께 아뢰옵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시편16,2)
과연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누구나의 소망이 행복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우리에게 바라는 유일한 소원도 우리 하나하나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행복의 미사잔치”에 초대해 주셨습니다. 요즘 신록의 기쁨으로 빛나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파스카의 축제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파스카의 기쁨, 신록의 기쁨, 파스카의 행복, 신록의 행복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신록과 파스카 봄꽃들의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기대반 설렘반 마음으로 수도원 자비의 집 문을, 집무실 문을 열때마다, 가슴 가득 안겨오는 신록과 파스카의 봄꽃들, 아름다운 환경이 흡사 우리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행복의 초대장”처럼 느껴집니다.
행복한 사람 거의 만나지 못했습니다. 모두가 힘겨운 삶을 고달프게 살아갑니다. 도대체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기다려서 언젠가 행복하기로 하면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행복하게 사는 것은 우리의 의무요 책임이요 권리입니다. 언젠가의 행복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야 할 행복이요 하늘나라 천국입니다. 지금 행복을, 하늘나라 천국을 못살면 내일도, 죽어서도 못삽니다. 행복은 선택이요 선물이요 발견입니다. 누구나에게 활짝 열려있는 행복의 문입니다. 2018년부터 시작된 제 행복기도를 다시 나눕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중에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희망과 기쁨, 평화와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정말 마음을 담아 끊임없이, 한결같이 바치시면 행복은 선물처럼 주어질 것입니다. 행복은 선택입니다. 행복은 선물입니다. 행복은 발견입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모두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 부활 제5주일 말씀도 행복의 비결을 알려 줍니다. 누구나에게 활짝 열려 있는 “행복의 문”입니다. 소개해 드립니다.
첫째, 주님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이 참 명쾌하여 군더더기 설명이 필요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를 참 행복하게 합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복음 서두 말씀부터 마음에 듭니다. 아마 직업중 가장 하느님을 닮은 분들이, 하느님의 인내와 겸손을 닮은 분들이, 하느님께 가까이 있는 분들이 농사를 짓는 농부일 것입니다. 성당에서 성사(聖事)요, 식당에서 식사(食事)요, 농장에서 농사(農事)이니 참 중요한 삼사(三事)중 하나가 농사입니다. 농사짓는 분들의 고백을 들어보면 80% 하느님께서 하신다 고백합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우리의 행복의 소재를 알려줍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네 안에 머무르겠다...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행복의 우선적 조건이 바로 주님 안에 머무르는 사랑의 관상입니다. 주님 안에 머물러 주님과의 친교를, 관계를 깊이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오늘 복음에 머무른다는 말마디가 9회 나옵니다.
그러니 늘 주님 안에 머물러 사는 기도의 훈련, 사랑의 훈련이 얼마나 행복에 절대적인지요! 장소와 전혀 무관합니다. 언제 어디나 계신 주님이기에, 언제 어디서나 주님 안에 머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들이 진짜 사랑의 관상가들이요 누구나에게 열려있는 가능성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주님과의 관계를, 친교를 깊이하는 영적훈련시간이기도 합니다.
둘째, 사랑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제대로 머물러야 열매를 맺습니다. 냉담으로 주님 안에 제대로 머물지 못하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머무르다”와 “열매맺다”가 하나로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다음 주님 말씀에 절대적으로 공감합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무슨 열매입니까? 두말할 것 없이 사랑의 열매입니다. 부부간 사랑의 열매가 자녀들입니다. 참으로 부부가 사랑의 열매인 자녀를 갖기를 원한다면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관상기도에 힘쓰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참으로 사랑의 주님 안에 머무름에, 사랑의 관상에 충실했느냐는 그 사랑의 열매로 검증됩니다.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는 사도 요한입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음을 알게 되고 그분 앞에서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 머무름의 관상은 사랑의 계명을 지킴으로 완성됩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우리의 부족한 사랑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그분의 계명은 이렇습니다.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안에 머무르십니다.”
주님 안에 사랑의 머무름과 사랑의 실천은 함께 갑니다. 마치 사랑의 관상과 사랑의 활동처럼 말입니다. 바로 이런 사랑의 열매를 보면 그 사람의 관상 정도를 헤아릴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사울을 두둔하고 보호하는 바르나바의 형제애가 참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사울을 두려워하여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바르나바는 사울을 받아들여 사도들에게 가서 자초지종 사울의 일화를 들려주면서 이들의 불신과 두려움을 말끔히 해소시켜 줍니다. 바르나바의 사랑의 변호에 감격한 사울은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드나들며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설교합니다. 바르나바의 사랑의 열매가 바로 사울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오늘 참행복의 비결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늘 주님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살아있다고 다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 포도나무에 가지들로 붙어있어야, 주님 안에 머물러 있어야, 그리고 끊임없이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참으로 살아있다 할 수 있고, 참으로 행복하다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정말 살아있는가? 죽어있는가?”
예전에 읽은 "나이 30에 죽어 70에 묻힌다"는 말도 생각납니다. 살아 있다 하나 실상 주님을 떠나 세상 안에 머무름으로 죽어 있는 것이 아닌지 성찰해 봐야 합니다. 무지와 허무의 어둠 속에 머물러 살 때 죽어있는 인생이요, 생명과 빛이요 사랑이신 주님 안에 머물러 살 때 비로소 살아있는 삶, 행복한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안에, 무지와 허무 안에 머물러 살다보면 자기가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 모르고 사는 사람도 참 많을 것입니다.
참 자주 물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정말 살아 있는가? 죽어있지는 않은가?”
주님 안에 머물러 끊임없이 사랑의 열매를 맺는 삶이야 말로 참행복한 살아있는 삶이요, 세상 안에 머물러 자신만을 위한 사랑의 열매를 맺지 못한 이기적 삶이라면 죽은 삶임에 분명합니다.
베네딕도 16세 전임 교황의 임종어는 “주님, 사랑합니다.”였고, 바로 참 행복한 삶이었음을 반영합니다. 제 아는 어느 분의 임종어는 “주님, 감사합니다.”였습니다. 역시 참 행복한 삶이었음을 반영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아닌 기쁨은 믿지 마십시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신비가는 말합니다.
“당신의 삶을 통해 바치는 유일한 기도가 ‘하느님 감사합니다.’로 이루어져 있다면 이미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어제 읽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는 누구나를 위한 방이 있습니다. 나는 언제나, 언제나 한 장소가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만일 교구내 본당신부가 환영하지 않는다면, 나는 이해합니다. 그러나 가서 보십시오(go and look). 거기에는 언제나 한 장소가 있습니다. 결코 교회로부터 떠나지 마십시오. 교회는 매우 큽니다. 교회는 성전보다 많이많이 큽니다...당신은 교회로부터 떠나선 안됩니다.”
옛 어른의 다음 말씀을 보면 역시 참행복의 경지에 도달한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어떤 특별한 순간도 일상만큼 반복하지는 못한다. 평범한 일상을 유지하는 일만큼 비범한 것은 없다.”<다산>
“평소에는 공손하고, 일을 할 때는 경건하며, 다른 사람에게는 진실해야 한다. 이는 어떤 상황에서도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논어>
이처럼 평범한 일상을 한결같이 살아가는 이들이 참행복한 사람들입니다.
행복은 선택이요 선물이요 발견입니다.
주님 안에 머무르십시오.
사랑의 열매를 맺으십시오.
참 행복의 비결입니다. 교회 안에 머무르는 것이 주님 안에 머무르는 것이 참으로 살아있는 참행복한 삶입니다. 교회의 품은 예수님의 품이요 하느님의 품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 안에, 교회 안에 머무르는 우리에게 주님은 당신과의 일치를 굳게 하시고, 참행복을 선사하시며, 참으로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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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8. 부활 제5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과 함께한다는 것>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요한 15,2)
참으로
당신과
함께한다는 것은
그저
당신 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롯이
당신처럼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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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8. 부활 제5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해 당신과 우리가 사랑안에 하나로 서로 결합되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어떤 때에는 포도나무와 같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지녀 다른 이들에게 베푸는 마음을 지니기도 하다가 다른 때에는 누군가에 사랑을 받고 인정을 받으려는 전적으로 외부에 의존하는 가지와 같은 마음을 지닐 때도 있습니다.
오늘 1독서에서 바르나바와 사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들어가서 주님의 제자들과 어울리려 하였지만 모두 그를 믿지않고 두려워하여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사울은 가지와 같은 존재가 되었기에 포도나무와 같이 의지할 누군가가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먼저 바르나바가 그의 포도나무가 되어 줍니다. 바르나바는 사울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그를 지지해 줍니다. 바르나바는 사도들을 설득하여 사울을 제자 공동체에 받아들이게 합니다. 그 이후 사울에게 제자 공동체는 포도나무와 같은 존재가 되었고 공동체에 가지와 같이 소속되어 친교를 나누며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게 됩니다.
이처럼 사울이 포도나무에 떨어져 나간 가지처럼 말라 죽을 상황에서 바르나바와 제자공동체는 그의 포도나무였습니다. 이런 믿음과 사랑에 힘입어 사울은 가지에서 포도나무와 같은 존재로 거듭나게 됩니다. 사울은 자신의 포도나무에서 사랑, 기쁨, 평화의 열매를 맺어 모든이에게 희망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제 2독서에서 요한 1서는 단죄하지 말고 서로 사랑하라고 얘기합니다. 단죄 받는 사람은 사랑이라는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가 말라 비틀어져 죽어가는 존재가 됩니다. 사랑받고 사랑으로 결합될 때 사도 바오로 처럼 사랑, 기쁨, 평화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사랑이 없는 격려와 칭찬은 아첨이 됩니다. 사랑이 없는 꾸지람과 충고는 비난이 됩니다. 사랑이 없는 관심은 간섭이 됩니다. 사랑이 없는 정의는 폭력이 됩니다. 사랑이 없는 존중은 시기와 질투가 됩니다. 사랑이 없는 겸손은 교만이 됩니다. 사랑이 없는 나눔은 인색이 됩니다. 이처럼 사랑이 단절되어 아첨, 비난, 시기, 질투, 교만 등으로 만연이 되어 그 어디에서 사랑을 찾아 볼 수 없을 때 이것이 죽음의 문화입니다. 이런 죽음의 문화의 결과로 고통받는 이들, 가난한 이들, 억압받는 이들, 소외된 이들이 생겨납니다. 이런 죽음의 문화를 생명의 문화로 바꾸려면 우리 각자는 포도나무이신 주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포도나무이신 주님의 사랑을 바라봅시다. 그 분의 사랑안에 머무를 때 우리 또한 다른이의 포도나무가 되어 줄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 스스로가 메마른 가지 체험을 해야 합니다. 사랑이 단절되어 외로움, 불안, 절망, 괴로움, 고통으로 영혼이 메말라 죽어갈 때 그분의 사랑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죽음의 체험을 통해서 참사랑의 가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가지처럼 메마른 이들의 심정을 깊이 이해하게 되고 존재 깊은 곳에서 사랑이 흘러나와 함께 아파하고 고통을 나누고 그들의 버팀목이 되어 줄 수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말한 참된 사랑의 의미를 실천하며 사람을 살리는 작은 일꾼이 되시길 바랍니다.
“자기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나 함께 있을 때나 똑 같이 그 형제를 사랑하고 존경하며 그 형제 앞에서 사랑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을 뒤에서 말하지 않
는 종은 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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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세계적으로 유명한 암스테르담(Amsterdam)의 기적
네덜란드 - 1345년
1945년 3월 13일에 네덜란드의 가톨릭 신자들은 자신들의 아름다운 도시를 발전과 번영의 도시로 이끌어 준 성체기적 600주년 기념일을 맞이하였다.
14세기에 암스테르담(Amsterdam)은 아주 보잘 것 없는 조그만 어촌이었다. 네 개의 큰 거리 몇 개의 골목길, 자그마한 어부들의 집, 그리고 커다란 베퀴넨(Beguinen) 수도원 건물이 그 당시 암스테르담의 전부였다.
1345년 3월 13일, 이 자그마한 마을에 한 가지 커다란 기적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암스테르담은 네럴란드 전국에 알려졌고 일자리와 번영을 가져오게 한 순례자들의 목적지가 되었다.
바로 그 의미깊은 날에 신부는 임종에 다다른 한 어부에게 불리워갔다. 신부는 어부의 고해를 듣고 나서 그에게 노자성체를 영해 주었다. 그런데 그 신부가 막 떠나갔을 때 그 어부는 심한 기침을 하여 음식물을 토해내었다. 어부의 부인은 아직도 상하지 않은 성체가 있는 토사물을 곧바로 화덕 속에 던져버렸다. 다음 날 아침 그녀가 잔잔하게 타오르고 있는 화덕의 불을 크게 하려고 했을 때에야 비로소 그녀는 자신이 그 거룩한 성체를 얼마나 무관심하게 다루었는지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놀랍게도 그 성체는 하나도 흠이 나지 않은 채 그 주위에 밝은 빛을 내며 불꽃 위에 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화덕의 불 속에서도 성스러운 성체는 타지 않았으며 또한 조금도 더럽혀지지 않았다.(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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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8. 부활 제5주일.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오늘 복음에서도 요한 복음서의 특정 문구 “나는 –이다.”가 등장합니다.
좀 특별한 점은 “너희는 -이다.”라는 문장도 함께 등장하여 ‘나’와 ‘너희’의 ‘상보성’이 강조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만찬 이후 ‘당신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할’ 제자들에게 “너희가” 앞으로 하여야 할 일을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 이 당부의 핵심은 “내 안에 머물러라.”입니다.
이 표현은 ‘열매를 맺다.’라는 표현과 함께 연결되어 ‘머무름’의 결과가 ‘열매 맺음’이라는 것까지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독서의 본문들 또한 주님 안에 머물러서 맺게 된 열매에 대하여 묘사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불신을 감수하여야 하였던 바오로는 예수님 안에 머무름으로써 그러한 의혹과 소외의 상황을 이겨 냅니다.
그 결과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설교하고”, “교회는…굳건히 세워지고,…그 수가 늘어나게” 되는 찬란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도대체 ‘주님 안에 머문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수도자에게 이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없기에 늘 제 마음에 담고 있던 물음입니다.
주관적 판단일 수 있지만, 오늘 본문에서 그 일차적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머문다는 것은 ‘떨어져 나가지 않는 것’, 곧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다시 말하여, 주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일단 ‘떠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무런 확신이 들지 않고, 하느님께 버려진 듯하며, 잔인하게 느껴지는 도전들이 연이어 다가온다 하여도, 그분을 떠나거나 공동체(나무)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가 먼저 할 수 있는 ‘머물기’가 아닐까 합니다.
붙어 있는 가지는 언젠가는 열매를 맺습니다. 다만 그 때와 방법을 우리가 모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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