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에 다가갈 수 없었듯이,
주님의 얼굴을 보여 달라는 모세에게 주님이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고 하셨듯이,
하나님은 실로 근접할 수 없는 빛 가운데 계신
‘빛 중의 빛’이십니다.
인간의 성품과 인격이 제아무리 고매하다 한들,
하나님의 뜻을 어긴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에게
다가갈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이지요.
욥기와 잠언서 및 여러 외경에서 보면 세상에 거하는
하나님의 영인 지혜가 시장과 거리를 활보하며 백성에게
어리석은 길을 따라 생명과 평화의 길을 걸으라고
소리치고 가르치는가 하면,
사람들에게 배척당하고 거할 곳을 찾지 못해 결국
하늘로 돌아가 천사들 가운데 머물기도 합니다.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에게 말을 걸고
서성이는 모습은 짝사랑에 가슴앓이 하는 소년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 뜨거운 사랑의 힘이 결국 말씀으로 하여금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용감한 탄생은 이미 인간을 품으려는
위대한 사랑의 돌진이었으므로 그를 통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평화가 선언되었씁니다.
초기교회는 예수님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습니다.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예수님의 삶의 방식과 사역을 통해
비로소 볼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지요.
강림절에 상기해야 할 기쁜 소식, 즉 복음은 하나님이
영화로운 하늘 아버지로 자족하지 않고 친히 아들로,
인간으로 오셔서 어둠과 죽음 속에서 자신을 나누어 주고,
세상의 구원을 향해 아래로, 더 낮은 곳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완전한 화목은 그때서야 비로소 시작됩니다.
완전한 중재자로 오신 예수님이 복음의 시작이자 평화의 길입니다.
기도 : 세상의 춥고 낮은 곳으로 오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신
주 하나님, 세상을 위해 끝없이 자신을 나누어주고
아래로 향하는 주님의 사랑을 닮아 가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