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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 갇힌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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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의 아뜨리에,.. 애송시 스크랩 국화 외 / 안상학
동산 추천 0 조회 122 09.08.14 10:2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국화 / 안상학

 


 

올해는 국화 순을 지르지 않기로 한다.
제 목숨껏 살다가 죽음 앞에 이르러
몇 송이 꽃 달고 서리도 이슬인 양 머금다 가게


지난 가을처럼
꽃 욕심 앞세우지 않기로 한다.
가지 잘린 상처만큼 꽃송이를 더 달고
이슬도 무거워 땅에 머리를 조아리던
제 상처 제 죽음 스스로 조문하던
그 모습 다시 보기는 아무래도 쓸쓸할 것만 같아


올해는 나도 마음의 가지를 치지 않기로 한다.
상처만큼 더 웃으려드는 몰골 스스로도 쓸쓸하여
다만 한 가지 끝에 달빛 닮은 꽃 몇 달고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나는 슬픔을 위문하며
서리라도 마중하러 새벽 길 가려한다.

 

 

 

 

 

 

 

 

 

 

 

 

백련사에 두고 온 동전 한 닢 / 안상학

 

 

 

누군가 나에게서 떠나고 있던 날
나도 내 마음속 누군가를 버리러
멀리도 떠나갔다 백련사 동백은
꽃도 새도 없이 잎만 무성하였다 우두커니
석등은 불빛을 버리고 얻은
동전을 세며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손을 모으게 했을
잘 안 되는 일들의 기록을 살피고 있었다
나도 내 잘 안 되는 일들의 기록을
동전 한 닢으로 던져 주었다, 석등은
내 안의 석등도 오래 어두울 것이라 일러주었다


가질 수 없는 누군가를 버리고
돌아오는 길, 꽃등 없는 동백나무 한 그루
끝끝내 따라와서 내 가슴에 박혀 아팠다
백련사 석등에게 미안했다 누군가에게
너무 오래 걸린 이별을 바치며 미안하고 미안했다


 

 

 

 

 

 

 

rats' year

 

 

 

나무가 햇살에게 / 안상학  

 

 

              
바람 타는 나무가 더러 운다고 해서
사랑이 흔들리는 것은 아니리
그 어느 바람에도 뿌리째 흔들리지 않았고
그 어느 눈보라에도 속까지 젖지는 않았으니


구름 타는 햇살이라 더러 울기야 하겠지만
나에게 이르는 길을 몰라서가 아니리
그 어느 바람에도 날리지 않아서 내 잎새에 이르렀고
그 어느 추위에도 얼어붙지 않아서 내 가슴에 스미었으니


어느 날에는 햇살 속에 살겠네  
어느 날에는 나무 안에 살겠네


 

 

 

 

 

 

 

 

 

 

 

 

부도원에 가서 / 안상학

 

 

 

미황사 부도탑 동쪽 원숭아
미황사 부도탑 북쪽 원숭아
미황사 부도탑 서쪽 원숭아
미황사 부도탑 남쪽 원숭아


너희들은 어찌하여
모든 재주 다 숨기고 오직
한 영혼을 지키려
그토록 오랜 세월 풍우설움 견디며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고
탑신에 바짝 붙어 사랑을 지켰느냐


너희를 보면
순정한 사랑의 모습 이젠 알 듯도 한데
오늘도 나는 이별을 하고 와서
너희가 부러워 너희가 부러워
사랑도 재주만 넘은 내가 부끄러워
너희 결 맑은 사랑 앞에 자지러지네
내 안에 깃들였던 영혼조차 지키지 못한
못난 사랑을 숨기고 우네


미황사 부도탑 원숭들아
미황사 부도탑 원숭이들아


 

 

 

 

 

 

 

mistymorn

 

 

 

 

선어대 갈대밭 / 안상학

 

 


갈대가 한사코 동으로 누워 있다
겨우내 서풍이 불었다는 증거다


아니다 저건
동으로 가는 바람더러
같이 가자고 같이 가자고
갈대가 머리 풀고 매달린 상처다


아니다 저건
바람이 한사코 같이 가자고 손목을 끌어도
갈대가 제 뿌리 놓지 못한 채
뿌리치고 뿌리친 몸부림이다


모질게도
입춘 바람 다시 불어
누운 갈대를 더 누이고 있다
아니다 저건
갈대의 등을 다독이며 떠나가는 바람이다
아니다 저건
어여 가라고 어여 가라고
갈대가 바람의 등을 떠미는 거다


 

 

 

 

 

 

 

 

 

 

 

아버지의 수레바퀴 / 안상학  

 

 

 

아버지의 인생은 오토바이 바퀴에서 그쳤다.  

달구지 하나 없는 화전민으로 살다가  

지게 지고 안동으로 이사 나온 뒤  

아버지의 인생은 손수레 바퀴였다.  

채소장수에서 술배달꾼으로 옮겨갔을 땐  

아버지의 인생은 짐실이 자전거 바퀴였다.  

아들 딸들이 뿔뿔이 흩어져 바퀴를 찾을 무렵  

아버지의 바퀴는 오토바이 두 대째로 굴렀다.  

아들 딸들이 자동차 바퀴에 인생을 실었을 무렵  

아버지의 인생은 오토바이 바퀴에서 끝났다.  

뺑소니 자동차 바퀴가 오토바이 바퀴를 세운 것이다.  

아버지의 인생에서 마지막 바퀴는 병원으로 실려가는 그때의 택시바퀴였다.  

석 달 긴 끝에 깨어난 뒤  

바퀴 ?은 아버지의 인생은 지팡이였다.  

걸음 앞에 꾹꾹 점을 찍는 아버지  

인생의 마침표를 찍는 연습을 하는 것 같다.  

하나 남은 바퀴는 죽어서 저기 갈 때,  

아버지의 인생 아버지의 노동은  

오토바이 바퀴가 찌그러지면서 끝이 났다
 

 

 

 

 

 

 

 

Morning meeting by the Ganges, Varanasi

 

 

 

새들마을 이씨 가로되 / 안상학

 

 


 어느 해던가. 재릿재 너머 정노인, 당근 금이 좋다고 당근 심었지. 알콩
달콩 키워서 처자 알종아리 같은 놈들을 그 얼마나 캤던고 웬 걸, 그 놈의
당근 값이 똥값이 되어 차띠기 장삿꾼도 포기하고 말았지. 그런다고 그 걸
내다버릴 양반 아니지, 암만. 곡기 끊고 주야장창, 때마다 당근만 깎아 먹
었다지. 그 독한 양반, 겨우내 당근 하나로 버텼으니, 참. 그래도 봄이 오니
다시 삽날 팍팍 꽂는데 웬 힘이 그리 있던지, 눈빛은 또 어떻고, 아마도 이
소문이 나면, 몸에 좋은 거라면 못 먹는 게 없다는 양반들, 그때서야 바리
바리 돈 싸들고 당근 찾아 전국을 헤맬지도 모르지. 근데 낭패야. 정노인,
제발 마늘농사만은 짓지 말아야 될 텐데, 아니라도 더운 여름 한 철 마늘만
먹겠다면, 나, 참, 환장할 일 아닌가. 안 그런가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도라지꽃 신발 / 안상학

 

 

공중전화 부스에서 딸에게 전화를 걸다
문득 갈라진 시멘트 담벼락 틈바구니서 자란
환한 도라지꽃을 보았네 남보랏빛이었네
무언가 울컥, 전화를 끊었네
 

딸아
네 아버지의 아버지도 저리 환하게 살다 가셨지
환하지만 아주 환하지는 않은 저 남보랏빛 꽃처럼
땅 한 평, 집 한 칸 없이도 저리 살다 가셨지
 

지금 나도 저렇게 그렇게 살아가고 있겠지
환하지만 아주 환하지는 않은 얼굴로
아주 좁지만 꽉 찬 신발에 발을 묻고 걸어가고 있겠지
도라지의 저 거대한 시멘트 신발 같은 걸 이끌고
네 아버지의 아버지처럼


환한 딸아 지금 내가 네 발 밑을 걱정하듯
네 아버지의 아버지도 내 발 밑을 걱정하셨겠지
필시, 지금 막 도라지꽃 한 망울이 터지려 하고 있다
환하지만 다 환하지만은 않은 보랏빛 딸아
내가 사 준 신발을 신은 딸아


 

 

 

 

 

 

 

 

 

별 / 안상학

 

 


가슴속에 넣어두고 키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오직 하나 별이었으면 좋겠네. 그것도
한 천 년 거리에서 살다가
지금은 다 부서지고 흩어져서 오직
빛으로만 남은 별이었으면 좋겠네.
한 천 년
내 가슴속에 눈물처럼 깃들여 살다
어느 한 순간 자취도 없이 사라질 그런 별,
별 하나만 살았으면 좋겠네


 

 

 

 

 

 

 

 

 

 

 

 

봄에 태어날 아이에게 / 안상학

 

 

 


온단다
삼월이 오면
그리운 사람 하나
맨몸으로
나를 찾아온단다
사내로 사내로
계집이면 계집으로
부끄럼 없이 맨몸으로
온단다


봄이 오면
온단다
내 청춘의 무거운 짐을 풀었던
기찻길 옆 어두운 방
환하게 만났던 여인이
겨우내 품었던
꽃씨와도 같은 사람 하나를
내게 보내온단다
우리에게 보내온단다

 

 

 

 

 

 

 

 

Monks

 

 

 

 

맹인부부 / 안상학

 

 

 

길을 보지 못하는 그들이
길을 묻는다. 침술원이 어디냐고
길을 보지 못하는 그들에게
저기 있어요. 손으로 가리키다가
말문이 막힌다.
 

소매를 잡고 길을 간다.
횡단보도 앞에 서서 눈을 감아본다.
두 눈 멀쩡히 뜨고 살면서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엄살 떤 적 있었던가.
 

침술원 문을 열고 들어서니 캄캄하다.
귀를 쫑긋 세우는 맹인 침술사
불도 켜지 않은 채
맹인부부의 손을 잡고 인사를 나눈다.
거리로 나서는 순간 눈앞이 캄캄하다.
햇살이 더 어둡다.

 

 

 

 

 

 

 

 

 

 

 

 

나는 너는 / 안상학

 

 

  나는 나비였지만, 이제 나비를 싫어하기로 작정한다. 꽃만 찾아 그

내밀한 꽃샘에 긴 혀를 박고 전율하는 그 집요함도 싫어하기로 한다.

그 지독한 꽃 중독에 걸려 세상 위해 한 번도 노래하지 않은 무관심도

이젠 안녕이다. 꽃향기와 꿀물의 단맛에 젖어 나무와 새와 풀과 땅과

하늘을 외면한 편집증도 안녕이다. 나는 그런 나비였다. 이제 긴

애벌레의 잠으로 돌아가 자성의 고치를 튼다. 다시 태어나면 벌이 될

것을 꿈꾼다. 싸울 때 목숨 바칠 줄 알고, 일 할 때 땀 흘릴 줄 알고,

사랑할 때 영혼을 다하는.

  너는 꽃이었지만, 이제 꽃을 싫어하기로 다짐한다. 속 깊은 곳 다

헐도록 나비에게 꿀 향기 주었지만 아무 것도 잉태하지 못한 꽃잎

접기로 한다. 오랫동안 한 나비의 혀를 물고 있던 입술에 힘을 빼고

꽃잎 지기로 한다. 너는 그런 꽃이었다. 씨를 낳지 않아도 다시 꽃

피는 쓸쓸한 나무의 꽃에서 물러나 자성의 겨울잠에 든다. 다시 태어

나면 풀꽃이 될 것을 꿈꾼다. 몸은 스러져도 씨를 잉태하고 다시

환생하는.

 그런 봄이 더디 와도 아주 안 오지는 않을 것이다.

 

 

 

 

 

 

 

 

 

  가르마 / 안상학 

 

 

  단골집 이발사는 머리를 깎다 말고
  가르마 쪽 머리가 잘 빠지는 법이라고 했다.
  나는 성긴 가르마를 비춰 보며 문득
  가장 가까운 머리카락끼리 헤어진 상처라고 생각했다.


  하필 빛바랜 금강산 사진이 걸려 있는 이발소에서
  또 나는, 지금 이 나라도
  그런 가르마를 곱게 빗어 넘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누군가 빗겨 준 것이라고 생각했다.


  머리를 깎으며 자꾸만
  허전한 가르마가 거슬려
  차라리 빡빡 밀어버릴까
  아니면 올백을 해버릴까 궁리 중인데
  내 생각을 눈치 챈 듯, 잡생각 말라는 듯 어느새
  나를 누이고 목에 칼을 들이대는 이발사의 콧구멍이 벌름거리고 있었다.

거울에 거꾸로 박힌 낡은 텔레비전에서는 평택 대추리에 미군 기지를

마련해 주겠다고 이 나라 군인들이 철조망으로 가르마를 타고 있었다.

순하디 순한 논바닥에서는 가장 가까운 흙들끼리 헤어지고 있었다.

 

 

 

 

 

 

 

 

*******************************************

 

안상학 시인

 

1962년 경북 안동 출생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 그대 무사한가 >, < 안동소주 >, < 오래된 엽서 > 등

 

 

* 시작메모 / 안상학 시인

 

  오월은 비우는 계절인 것 같다. 비움의 고수는 아무래도 저 나무들이

아닌가 한다. 겨우내 아무 것도 내 놓을 게 없다는 듯 시침떼고 있더니만

언제 그랬냐는 듯 마구 속엣것들을 비워내고 있다. 봄이 와도 한동안

참고 있던 감나무까지 가세해서 마구 속내를 드러내며 꾸역꾸역 게워내고

있다. 신통한 것들. 그래도 자기들은 속내가 자못 푸르고 맑고 싱싱하다는

듯 하나같이 푸르고 밝은 잎들을 내어놓고는 자랑처럼 서있다. 부럽다.


  엄살 같지만, 내 안의 풍경이 을씨년스러워 못 배기겠다. 나도 나무라면

마구 게워내 버리고 싶다. 어둡고 습한 마음의 풍경에 숨어 있는 아픔과

슬픔, 외로움과 서러움을 마구마구 비워내고 싶다. 하지만 절망한다.

아무래도 내 그것들은 푸르고 맑지가 않을 것만 같다. 여름내 옷깃 꼭꼭

여미기에는 너무 냄새난다. 몇 잎 슬쩍 틔운 게 이 시들이다. 역겹다.

잘 가라 잎들아.


  비워내고 비워낸 빈 마음에 밝은 빛들로만 가득 찼으면 좋겠다.

너무 밝아서 한낮의 태양을 본 눈처럼 한 순간 아득해져서 안 보였으면

좋겠다. 虛室生白, 결국 또 무언가로 채우고 말 마음이여.

도대체 무얼 버린단 말인가. 잘 가라, 지겨운 안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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