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를 개작한 비유적 형상화 「조선낫」
서태수(시조시인, 수필가-수필집 [조선낫에 벼린 수필<2017. 세종도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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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작품 완성을 위해 숱한 퇴고 과정을 거친다. 그러나 ‘개꼬리 삼년 두어도 황모 못 된다.'는 속담처럼 근본의 한계를 뛰어넘기란 어렵다. 때로는 퇴고가 아니라 환골탈태를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필자의 <조선낫>은 평범한 산문으로 썼던 에세이 <낫>을 비유적 형상화로 개작한 작품이다. 설명문 같던 초고작을 창작적으로 개작함으로써 두 문장의 차이가 극명하게 달라졌다.
(초고작) 낫은 인류의 농경생활이 시작되면서 중요한 도구의 하나로 발명되었는데 초기에는 돌이나 조개껍데기로 날을 끼워 사용하다가 청동기시대에 쇠가 이를 대신하게 되었다. 세계적으로는 기원전 1500년 무렵의 의식용 낫이 출토되었다지만 우리나라는 기원전 2세기에 쇠낫이 황해도에서 출토되었다고 한다.
(완성작) 아득한 옛날, 그녀가 농촌에 처음 시집올 때는 돌이나 조개껍데기 얼굴이었다고 한다. 무쇠로 단련된 그녀의 조상 유적은 서양에서는 삼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지만, 그녀가 조선 규수로 처음 연지곤지 찍고 족두리 쓴 곳은 이천 년 전 황해도 어느 고을 양갓집이라 한다.
윗글 완성작에서 일어난 제재의 변주는 매우 단순하다. ‘낫 = 여인’으로 치환시켰을 뿐이다. 이 단순한 의인화는 곧이어 용모나 행위도 인격을 부여할 수 있게 된다. 문학미감의 차별성을 이렇게 극단적으로 드러나게 한 이유는 수필의 목적이 정보 전달이 아니라 미적 구현이라는 점 때문이다. 미적 장치가 스며들지 않은 글은 문학작품이 아니다. 이것은 몰톤(R.G.Moulton)의 ‘존재의 총계에 부가’라는 관점에서 비롯한 창작 개념으로 ‘시적 발상의 산문적 형상화’를 주창하는 이관희 평론가의 작법 지론이기도 하다.
수필에서 창작성의 방향은 다양하겠으나 대표적 기법은 서사장르의 구성법과 서정장르의 이미지가 될 것이다. 특히 서정약식의 기법인 비유적 형상화를 통한 이미지 환기를 교술양식인 수필에서 구현하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자아의 세계화 양식인 수필은 체험의 고백적 기록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어 자칫하면 일상적 기록으로 전개될 위험성을 지닌 양식이다. 이 위험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체험의 재해석이나 제재의 변주다. 이를 통해 무미건조한 서술성으로부터 탈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의 자아화 양식인 시의 기법, 즉 이미지도 혼입될 수 있다. 이를 위해 초고작 제재인 낫을 완성작에서는 조선 여인으로 치환시키는 특단의 조치로 개작을 시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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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촌살이에서 낫을 사용하다가 이 경험을 토대로 글을 쓰기로 했다. 먼저 제재와 연관된 자료 수집으로 낫의 종류, 특징, 역사, 부위별 명칭 등을 조사했다. 특히 대장간의 낫 제작 과정 이해를 위해 견문과 직접 체험의 공을 들였다.
그런데 완성해 놓고 보니 너무 서술적인 글이 되어 버렸다. 이를 비유적으로 묘사하는 방법을 고심하던 중 낫과 호미를 어머니와 아버지에 비유한 고려가요 <사모곡>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낫 = 어머니 = 조선 여인’으로 확장하여 조선 여인의 삶과 낫의 공통점을 결합시켜 치환은유의 산문적 묘사를 시도한 것이다. ‘낫 = 조선 여인’으로 비유한 두 존재의 동질성 모색은 어려운 과제가 아니었다. 조선낫과 조선 여인의 다부진 외양이 유사했다. 그리하여 이미 조사한 낫의 외양, 기능, 제작 과정, 역사 등에 어우러지는 조선 여인의 품성을 녹여내고자 했다. 그 결과 작품은 영화기법 이중 노출二重露出,Double-Exposure의 복층구조로 진행되었다.
비유적 형상화를 시도해 보니 분량이 늘어나고 주제 이탈이 생겨 초고작의 상당 부분은 버려야 했다. 초고작의 설명적 요소는 과감히 삭제하고 오로지 여인의 모습에만 초점을 집중시켰다. 특히 낫의 성격, 기능, 형태, 제작과정, 역사 등과 조선 여인의 동질성 조화를 세밀히 탐색하였다. 동시에 효과적 화소의 배치를 위한 구성(plot)과 비유적 묘사를 고심했다.
구성의 방향을 면밀히 설계하고 수정한 결과 <제재의 맵시 - 품성 - 탄생 과정 - 심성 - 최후 모습 - 역사 - 품격>의 순서로 전개되었다. 내용은 조선 여인의 성실성과 헌신성을 기조로 하면서 남녀 문제를 고명으로 첨가했다.
초고작과 완성작의 도입 부분인 ‘제재의 맵시’ 내용을 대조하면 다음과 같다. 초고작을 거의 버리다시피 한 부분으로 개작 과정에서 가장 많은 내용 변화가 일어난 곳이다.
(초고작) 낫 놓고 ㄱ도 알고 ㄴ, ㅅ도 만들 수 있지만 낫의 종류와 형태가 이렇게 다양할 줄은 미처 몰랐다. 어릴 적부터 눈에 익고 지금도 거의 매일 밭두렁에서 사용하고 있는 낫이 평낫이란다. 날이 얇고 슴베가 짧아 벼, 콩 등 곡식의 이삭을 자르거나 풀 베는 데에 쓰는 낫이다. 이 외에 모양과 용도에 따라 우멍낫 또는 목낫, 담배낫, 반달낫, 무육낫, 접는낫, 버들낫, 야채낫, 밀낫, 벌낫, 옥낫, 왼낫, 뽕낫, 톱낫, 선낫, 끌낫 등 그야말로 다양하다. 이름뿐이 아니다. 형태도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다.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서 쓰는 평낫은 날이 반달 모양으로 굽었고,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의 것은 날의 각도가 거의 직각이고 날의 너비가 길이에 비해 좁다.
눈을 아시아 문명권으로 돌리면 더 큰 차이가 난다. 슴베가 길고 날이 두꺼운 조선낫은 작고 예쁘게 생겼다. 슴베가 없고 날이 예리한 왜낫은 자루가 꽤 길다. 동남아시아 사람들의 낫은 왜낫보다 날도 자루도 훨씬 길다. 몽골의 낫은 엄청나게 크다. 날도 길거니와 자루가 길어서 낫 한 자루를 장정이 겨우 들 수 있다.
(완성작) 조선낫은 살림꾼 조선 여인의 단출한 매무새다. 날[刃]만큼이나 긴 슴베 끄트머리에 나무자루를 달랑 꽂은 모양이 마치 무명 홑적삼에 짤막한 도랑치마를 걸친 다부진 아낙네 모습이다. 종아리에 닿는 짧은 치맛자락도 행여나 발에 밟힐까 저어하여 낫갱기로 중동끈을 질끈 동여매고는, 풀을 베고 곡식을 거두고 나뭇가지를 치는 바지런한 여인이다. 그녀의 오지랖은 대천한바다보다 넓다. 논두렁, 밭두렁, 논길, 밭길, 따비밭, 다랑논을 재바르게 오가며 구렛들이든 천둥지기든 이 논배미 저 논배미 에돌아 감돌아, 봄여름 풀베기며 가을걷이, 겨울채비에 야산 중턱까지도 휘돈다.
조선낫은 이마에서 정수리까지 낫등 가르마를 곧게 탄다. 그녀의 쪽진 머리는 슴베가 휘어넘는 덜미의 낫공치에 목비녀 짧게 꽂은 단정한 모습이다. 치마허리의 폭 좁은 말기로는 가슴과 허리께를 다 가릴 수 없어 햇살 그을린 속살을 부끄럼 없이 드러낸 이 여인은, 안고름 없는 홑저고리를 입었다고 아무 손이나 살에 닿게 하는 헤픈 여자는 결코 아니다. 마음 준 남정네의 손길에는 주저없이 온몸을 맡긴다. 그러나 어수룩한 촌부村婦라고 가벼이 다가간다면 큰코다치게 된다. 가슴에 은장도를 품고 있는 이 여인은 제 살이 낯선 돌부리에 살짝 스치기만 하여도 쟁그랑! 시퍼런 불빛 번쩍이며 온몸으로 저항한다.
제재인 <낫 = 조선 여인>의 치환은유의 묘사는 의외로 수월했다. 수십 년 전 어머니의 모습을 낫에다 오버랩시키면 되는 작업이었다. 막상 상상해 보니 조선낫의 외형과 어머니의 외모는 기가 막히게도 일치되는 부분이 많았다. 두 제재의 속성 차이를 ‘탄생과정’에서 비교해 표현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초고작) 이러한 차이가 나는 것은 낫의 제작과정이 다르기 때문이다. 조선낫을 벼리는데 8번 이상의 단조과정에다 수백 번을 두드리는 공정을 거쳐야 한다. 또 날[刃]부위와 다른 부위와의 강도에 차이를 주기 위해 특수한 열처리를 한다. 단조가 끝난 낫을 달구어 물방울을 날 부위에 올리고 마치 구슬을 굴리듯 굴려 부분 열처리를 한다. 자연적으로 낫의 날 부위는 냉각 속도가 빨라 조직이 치밀하고 강도가 높게 되지만, 낫등 부위로 갈수록 달궈진 낫에서 나오는 열로 냉각 속도는 상대적으로 느려져 강도가 날 부위에 비하여 떨어지게 된다.
(완성작) 이 여인의 보드라우면서도 아귀찬 눈빛은 그녀의 탄생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대장간에서 태어난 그녀의 성냥은 여우 주둥이처럼 생긴 모루[鐵砧] 위에 올려놓고 수백 번을 두드린 메질꾼의 쇠메와 숱한 담금질을 거쳐야 한다. 북어는 두드릴수록 보드라워지지만 인고忍苦의 조선 여인은 더욱더 강해진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날[刃]을 벼리기 위한 수많은 잔메질이 오히려 개운하다. 이때는 대장장이도 신명난다. 물방울을 여인의 얼굴에 떨어뜨려 구슬을 굴리듯 손목을 휘휘 돌려 보릿대춤을 추며 여인을 어른다. 간질이는 물방울에 한껏 달아오른 여인은 가쁜 숨을 내쉬며 온몸에 흩어져 있는 감각세포를 훑어낸다. 슴베의 감각을 낫등에 몰아오고, 다시 낫등의 감각을 날 끝에 다 모은다. 그래서 조선낫은 날과 등의 체감온도가 달라 날의 충격을 등이 흡수하게 된다. 그녀가 굵은 나뭇가지를 칠 때 제 몸이 휘어지거나 부러지지 않게 되는 것은 오직 이러한 인고의 결실이다. 이것이 온갖 잡일 마다않고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조선 여인의 지혜다.
조선낫의 날카로운 날[刃]을 은근히 성감대에 비견하였다. 자칫 여인의 품성을 훼손할 우려가 있으므로 매우 조심스런 표현으로 마감하였다.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현재법을 많이 사용했다. 문장에서 섬세한 표현을 유지하고 문체는 조용하고 점잖은 문장 호흡을 일관되게 지속시키며 평서형 종결어미를 사용했다.
조선 여인의 심성을 그린 부분은 왜낫을 끌어들여 남자들의 외도와 연결 지음으로써 세속적 재미를 가미했다. 실제 왜낫은 그 섬세함과 예리함에서는 제 나름의 장점을 지녔기 때문이다. 어릴 적 시골 어른들이 벼나 쇠꼴을 벨 때 왜낫을 특히 애용하던 일, 가끔은 찢어진 왜낫을 버리던 기억도 활용했다. 이 부분을 여인들의 시앗 다투는 모습으로 그린 것이다.
(초고작) 왜낫은 주로 풀만을 베기 위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모양이 날렵하고 낫의 두께가 얇다. 반면에 조선낫은 모양이 투박하고 두께가 상대적으로 두껍다. 이 두 가지 낫을 비교해 보면 조선낫의 우수성은 왜낫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중략)
이에 반해 왜낫은 엉거주춤한 자세라 오랜 시간을 낫질할 수가 없고, 조선낫에 비해 풀 벤 자리가 깔끔하지를 못하다. 또 왜낫은 나뭇가지를 치면 금세 찢어지거나 휘어져 버린다. 휘두르는 무게감도 떨어진다.
(완성작) 그러나 아무리 조강지처라도 변덕스러운 것이 인간사라, 새로운 것에 대한 남정네들의 호기심도 더러는 있기 마련. 목덜미까지 기모노를 걸친 성큼한 몸매의 간실간실한 여인이 지나가면, 처음 보는 왜낫에 뭇 남정네들이 한눈을 판다. 왜낫의 긴 자루 허리께를 거머쥐고 엉거주춤 쪼그린 자세로 이 두렁 저 밭등 풀을 베다 나뭇가지를 만난다. 물정 모르는 숫사람이 조선낫 휘두르듯 나뭇가지를 내리찍으면 애당초 쇠메질, 담금질을 겪지 않고 비롯된 왜낫은 고만한 충격에도 휘어지고 찢어진다.
겸연쩍은 남정네는 다시 슬그머니 조선낫을 찾는다. 시앗에는 돌부처도 돌아앉는 법. 앵돌아진 조선 여인은 나뭇가지를 겨냥한 남정네의 힘겨운 낫질에는 행여나 농부 일손 다칠세라 눈길 내리깔고 입술 앙다문 채 다소곳이 참아준다. 그러나 잠시 후 잔풀에 일손이 닿으면, 자분자분한 이 여인도 서슬 퍼런 질투로, 변심한 남정네의 새끼손가락 끄트머리쯤을 살짝 스쳐버리는 앙살스러운 마음은 지녔다.
일부다첩(一婦多妾) 시대를 살았던 조선시대 한국 여인의 삶의 모습을 은근슬쩍 비추면서 당대의 조강지처 사상을 대입시켰다. 그러면서도 ‘새끼손가락 끄트머리쯤을 살짝 스쳐버리는 앙살스러운 마음’으로 여인의 미묘한 시앗감정을 따뜻한 해학으로 표현해 보았다.
제재의 최후를 묘사한 부분은 초고작에는 없던 내용을 부가했다. 가부장적 대가족 사회에서 숱한 식솔 뒷바라지를 온몸으로 하던 한국 여인의 희생적 삶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갈한 심성에는 숫돌이 동원되고, 대가족에 빗대어 많은 농기구가 등장하게 되었다.
(완성작) 수더분한 그녀도 여인인지라 어찌 치장을 마다하랴. 무디어지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그녀는 샘물처럼 정갈하다. 그녀는 언제나 숫돌에서 몸을 씻는다. 물만 찍어 바르는 것이 아니라, 제 몸을 갈아 목욕하는 그녀의 눈빛은 그래서 봄, 가을, 여름, 겨울 없이 형형炯炯하다.
따비, 쟁기, 써레 등을 웃어른으로 모신 층층시하에서도 포도송이 같은 남매들 온갖 뒤치다꺼리로 한 몸 닳아온 이 여인은, 오랜 세월 갈고 벤 날이 뭉개지고 모지라져 슴베만 남게 될 때 말없이 대장간으로 간다. 지조 높은 이 조선 여인은 이날에야 난생 처음 무거운 치마를 벗는다. 그리하여 숯불 벌겋게 피어나는 화덕 위에 누워 푸-푸 들려오는 풀무소리 노래삼아 후생에 태어날 새로운 꿈을 꾸며 전신을 녹여 보낸다.
‘봄, 가을, 여름, 겨울 없이 형형炯炯하다.’에서 계절은 농번기 일감의 순서로 변화를 유도했다. 마무리 부분은 낫의 역사를 혼례로 치환하면서 소박하면서도 격조 높은 삶의 모습을 환기시켰다.
(초고작) 낫은 인류의 농경생활이 시작되면서 중요한 도구의 하나로 발명되었는데 초기에는 돌이나 조개껍데기로 날을 끼워 사용하다가 청동기시대에 쇠가 이를 대신하게 되었다. 세계적으로는 기원전 1500년 무렵의 의식용 낫이 출토되었다지만 우리나라는 기원전 2세기에 쇠낫이 황해도에서 출토되었다고 한다. 2,000여 년 동안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던 우리 대장장이 조상네들의 슬기가 돋보이는 조선낫 기술이다.
최근에는 나도 낫을 하나 만들었다. 평낫의 슴베를 약간 구부려 1미터가 넘는 막대에 끼운 것이다. 이 낫을 두 손으로 잡고는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밭두렁에 올라 두발 적당히 벌리고 서서 풀의 발목께를 겨누어 힘껏 허공으로 후리친다. 풀베기용 낫이다. 이름하여 ‘풀베기 골프낫’이다.
(완성작) 아득한 옛날, 그녀가 농촌에 처음 시집올 때는 돌이나 조개껍데기 얼굴이었다고 한다. 무쇠로 단련된 그녀의 조상 유적은 서양에서는 삼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지만, 그녀가 조선 규수로 처음 연지곤지 찍고 족두리 쓴 곳은 이천 년 전 황해도 어느 고을 양갓집이라 한다.
평생을 그녀와 함께 살면서도 낫 놓고 ㄱ자도 몰랐던 까막눈 남정네들은, 이 여인이 ㄴ도 ㅅ도 이미 몸으로 알고 있는 유식한 여인일 줄은 꿈에도 몰랐으리라. 그래도 이 조선 여인은 내색 않고 평생을 함께 살았다. 숫된 남정네들도 제 여인의 품격品格을 알고는 있었나 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격조格調 높은 여인을 가슴에 품어 풍년가를 부르고 싶은 남정네는, 예나 제나 반드시 한쪽 무릎을 땅바닥에 꿇고 정중히 두 손을 내미는 것이 아니겠는가.
초고작 맨 끝부분 풀베기 골프낫 내용은 사족 같은 요소라서 버렸다. 마무리에서 여인의 품격을 존중하는 의미로 남자의 무릎을 꿇게 하였는데, 실제 조선낫을 섬세하게 사용할 때 농부들은 반드시 한쪽 무릎을 꿇고 손을 내밀기 때문이다.
|작법 공부|
[창작에세이] 26호, 이관희 평설(2017.4.)
본지 창간 이래 마감 후 원고를 편집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금호 편집은 지난주에 마감하였다. 그 후 일주일은 교정 작업 일정으로 잡혀 있었다. 그런 어느 날 서태수 시조시인의 창작수필집 조선낫으로 벼린 수필이 배달되었다.
내용을 살펴본 필자는 잠시 일손을 놓고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왠지 슬프고……, 가슴이 아프다. 작품집 중에서 「조선낫」을 읽은 필자는 무엇이라 비평할 언어를 찾지 못할 정도였다.
지금도 나는 이 작품을 어떻게 평가하면 온당한 학문적 평가가 될 수 있을지 비평언어를 찾을 수 없다.
이 작품은 ‘조선낫’을 ‘조선 여인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고, ‘조선 여인’을 ‘조선낫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분리해 내기 어려울 정도로 혼연일체로 융화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냉정을 되찾아 문학의 본질적 목적이 ‘사람 사는 이야기’에 있음을 생각한다면 이 작품은 조선낫으로 조선여인을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작품구성은 온전한 산문작품임에도 전통적인 서사구성법이 아닌 시적 비유법의 연속으로 짜여져 있다.
‘조선낫은 살림꾼 조선 여인의 단출한 매무새다.’라는 서두 문장으로부터 ‘조선낫은 이마에서 정수리까지 낫등 가르마를 탄다.’ ‘뜨거운 불길과 차가운 물길에 수십 번 달구어진 무쇠로 벼려낸 그녀의 눈매는’ ‘따비, 쟁기, 써레 등을 웃어른으로 모신 층층시하에서도 포도송이 같은 남매들은 온갖 뒤치다꺼리로 한 몸 닳아온 이 여인은,’ ‘평생을 그녀와 함께 살면서도 낫 놓고 ㄱ자도 몰랐던 까막눈 남정네들,’로 연하여 이어지는 ‘산문의 시’ 문장 세계를 열어 보여주고 있다.
지금까지 필자가 발굴해 낸 창작에세이의 대표적 양식 세 가지 중에서도 많이 발견되는 창작양식은 ‘소재에 대한 비유창작 + 서사구성법’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서사를 말하고 있지만 서사 그것은 아니고, 그렇다고 운문의 시문학이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마치 소월의 <진달래꽃>이 분명 운문의 시작품임에도 장편소설 못지않은 이야기를 품고 있듯, 이 작품은 수필이 마침내 ‘신변잡기’ 오명을 벗어버리고 자기 본모습을 회복하게 된다면 드러날 <산문의 시> 그 모습이 아닐까 생각된다.
만약에 필자가 지난 2004년, 30년 만에 귀국하자마자 등단지 現代文學지로부터 ‘신변잡기’ 이유로 쫓겨난 후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 알아보기 시작하였을 때 수필이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고 <우리 고전수필의 맥을 잇는 현대수필>이라는 개념과 그 이론체계가 갖추어져 있는 문학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면 나는 지난 10년 동안 그 외롭고 고달픈 <수필의 현대문학 이론화 운동>을 펴오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고전수필의 맥을 잇는 현대수필’이라는 개념과 그 학술체계가 있는데 왜, 무엇 때문에 <수필의 현대문학 이론화 운동>을 펼친단 말인가?
고전수필이란 무엇인가? 그에 대한 대답은 대한민국 국문학과 학자들 모두가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탄탄한 성벽 같은 학문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어야 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 작품들도 찬란한 것들임이 논증되어 있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왜 <우리 고전수필의 맥을 잇는 현대수필>이라는 개념은 정립되어 있지 않은가? 어찌하여 그 학술체계가 세워져 있지 않은가?
내가 서태수 시조시인이 보내 온 수필집 표지에서 <조선낫에 벼린 수필>이라는 제목을 보았을 때 탄성과 함께 말로 다 할 수 없는 슬픔을 느낀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내가 만약 대한민국 모든 대학 정문 앞에 가서 “이 답답한 국문학과 교수들아, 고전수필은 있는데 왜 고전수필의 맥을 잇는 현대수필이라는 학문체계는 없느냐? 지금이 조선시대냐? 지금이 1800년대냐? 지금은 21세기다. 그렇다면 고전수필의 맥을 잇는 현대수필이라는 것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니냐?”라고 외친다면 저들은 무엇이라고 대답할까?
지난 12년 동안 수필가들을 향한 나의 <수필의 현대문학 이론화 운동>은 실로 메아리조차 없는 면벽의 싸움이었다. 그런 막판에 조선낫으로 벼린 수필을 받아든 내 마음은 말로 다 할 수 없이 착잡한 가운데 깊은 슬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아직 서태수라는 분을 만나보지 못하였다.(책을 받아 본 며칠 후 처음 만나보았다.) 조선낫으로 벼린 수필이라는 제목의 수필집을 낸 서태수라는 분은 ‘우리 고전수필의 맥을 잇는 현대수필’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이 글들을 썼을까? 그 이론 체계가 세워져 있을까? 그래서 책 제목을 <조선낫으로 벼린 수필>이라고 붙이게 된 것일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것은 또다시 얼마나 슬픈 일인가? 왜 수필가라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공부를 안 하는 것일까? 공부란 무엇인가? 그것이 어떤 방면의 공부가 되었든 그 방면의 전문지식을 터득하는 일이 공부가 아닌가? 전문지식이란 학문체계를 의미하지 않는가? 수필가들은 왜 하나같이 공부는 하지 않고 호박에 줄긋기만 하고 있는가?
수필가라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쓰고 있는 글이 호박에 줄긋기 식의 글이라는 사실을 정말로 모른단 말인가? 서태수 시조시인이 만약에 <고전수필의 맥을 잇는 현대수필>이라는 개념을 갖지 못한 채 그냥 쓰다 보니 이런 제목까지 붙이게 된 것이라면 그것은 얼마나,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가 쓰고 있는 현대시조문학에는 ‘우리 고전 시조의 맥을 잇는 현대시조’라는 탄탄한 이론들이 논의되고 있는 줄로 안다.
李泰極 님의 時調槪論에 이런 글귀가 있다. “이 時調文學의 활동기를 다시 나누면 <百八煩惱>에서 <鷺山時調集>(1932)까지의 약 8년간을 시조의 논의 중심의 활동기요 鷺山時調集이후 동아일보에서 행한 時調考選(1940)시대까지를 시조 육성중심의 활동기로 보고 싶다.”(366쪽)
시조문학은 현대문학 초창기부터 활발하게 학문적 ‘논의’를 하였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수필가들은 논의를 할 줄 모르는가?
낫은 전통적인 우리 농기구다. 내가 사는 동네는 단지 산 가까이에 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시장거리에 씨앗과 농기구를 파는 가게가 성업하고 있다. 금년에도 날 풀리기가 무섭게 농기구들을 밖에 내놓았다. 그중에 호미와 함께 절대로 빠지지 않는 것이 낫이다. 낫은 21세기 오늘에도 없어서는 안 될 우리 고유의 농기구인 것이다.
서태수 시인의 수필은 바로 그런 우리 전통 농기구인 낫으로 벼린 수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낫은 21세기 우리 동네 농기구 가게에 나와 있는 낫이 아니고, <조선낫>이라는 것이다. 조선시대가 언제 적 일인데 조선낫으로 수필을 벼린단 말인가?
서태수 시인의 <조선낫>은 농기구로서의 조선낫이 아니었던 것이다. 바로 우리 고전시조(혹은 수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우리 고전시조(수필)의 정신으로 벼린 현대수필>이라는 것이 조선낫으로 벼린 수필이라는 제목의 뜻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벼리기는 고전시조(수필) 정신으로 벼렸는데 그것이 고전수필이 아닌 <현대수필>이라는 데에 있다. 이 분명한 학문적 토대를 놓치면 <고전 수필의 맥을 잇는 현대수필>이라는 개념은 나올 수도 없고, 무익한 다툼만 되고 말 것이다. 기존의 수필이 근거 없는 수필론으로 <자기주장>만 하고 있듯.
<현대수필>이란 무엇인가? <현대>라는 낱말만큼 우리에게 절대적인 역사적 영향을 끼친 낱말이 또 있을까? 5천년 장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민족에게 <현대>라는 용어는 실로 천지개벽적인 분기점을 의미한다. 갑오개혁(1894) 이전과 이후를 비교해 보라. 그것은 봉건사회와 민주주의 사회라는 개벽을 의미한다. 갑오개혁 이후의 모든 정치, 경제, 문화, 교육, 과학, 학문 일체가 <현대>의 정치요, <현대>의 문화예술이다.
‘우리 고전수필의 맥을 잇는 현대수필’이라는 개념의 <현대>는 다름 아닌 서구현대문예사조를 의미하는 것이다. 즉 ‘우리 고전수필의 맥을 잇는 현대수필’이라는 개념의 뜻은 <현대문학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는 우리 고전수필의 맥을 잇는 현대수필>이라는 뜻인 것이다.
만약에 이 같은 ‘우리 고전수필의 맥을 잇는 현대수필’이라는 개념이 성립된다면 그것은 당연히 ‘隨筆’과 ‘essay’가 만나 짝을 이루어 의 양식이 될 것이고, 그 사이에서 <한국형 수필> 이 탄생하게 될 것이 아닌가?
이 너무나도 분명한 수필문학의 나아갈 길을 지난 1백년 수필가라는 사람들은 전혀 생각조차 할 줄 몰랐단 말인가?
서태수 시조시인의 수필집 조선낫으로 벼린 수필은 이상과 같은 충격을 나에게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창간 이래 한 번도 <마감 후 원고>를 게재한 일이 없던 전통을 깨트리고 급히 마감 후 원고를 초과편집하게 되었던 것이다.
서태수 시인은 조선낫으로 벼린 수필의 이론적 근거로 다음과 같은 이론을 소개하고 있다.
“나는 ‘붓 가는 대로 쓰기’의 수필은 실패했다고 선언한다.”
“시조의 율감(律感)을 수필에 원용.”
“문학 미감의 기교를 구성 비유 문체 등에 구체적으로 적용.
趙潤濟 박사는 문학을 문학이라 할 수 있는 조건은 “과거의 전통성이 있고, 또 후세문학의 규범이 될 만한 것”(국문학개설 45쪽)이어야 된다고 하였다. 지난 12년간 수필 문제에 정면충돌한 후 필자는 수필계 어디서도 나의 문학은 어떤 학문에 근거한, 혹은 어떤 이론을 수필작법에 적용한 것이라는 말을 들어 본 일조차 없다. 서태수 시인의 “시조의 율감(律感)을 수필에 원용.”이라는 말이 그래서 더욱 돋보인다.
‘우리 고전수필의 맥을 잇는 현대수필’이라는 개념의 이론체계가 상당 진척되어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아직 없다면 서태수 시인이 시작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