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명 :
거문도소개 쪽빛 비단이 넓게 깔린 들판에 여린 봄바람이 일 듯, 찰랑대는 바다. 덜 영근 아침 햇살 비친 섬 들이 진주알 처럼 아름답습니다. 한 폭의 수채화 같은 다도해, 미끄러지듯 섬 사이를 항해하는 배가 가까워 질 때마다 작은 섬 들은 신부의 나신처럼 물안개를 걷고 다가섭니다. 100년 역사의 등대가 있고, 영국군들의 묘지가 있으며, 산에는 진초록 동백숲이 들어차 있고, 나무마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꽃망울이 가득 매달려 있는 거문도!!......... 여수에서 거문도까지 114.7km로 쾌속선으로 여수항을 떠나 징검다리처럼 이어지는 다도해의 포구 손죽, 초도 의성을 들러, 약 2시간20여분 만에 도착하는 제주도와 여수의 중간위치에 있는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의 최남단의 섬입니다. 옛 부터 슬픈 역사가 많은 섬, 물 맑고, 인심 좋고, 인재 많고, 효심이 남다르고, 개척정신이 강했던 거문도는 서도,동도,고도의 세 개의 주 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고도와 서도는 연도교(삼호교)로 연결 되어 있습니다. 옛 이름은 삼도(三島), 거마도(巨馬)등이었으나, 중국 청나라 제독 정여창이 이 섬에 학문이 뛰어난 사람이 많은 것을 보고 문장가들이 많다는 뜻인 “거문도(巨文島)”로 개칭하도록 건의하여, 거문도(巨文島)가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세 개의 섬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마치 어머님의 품처럼 아늑하고 포근한 1백만 평 정도의 천연적 자연항만이 호수처럼 형성되어 있는 곳을 ‘도내해(만내)’라고 하는데, 깃을 세운 파도도 내항에만 들어서면 숨을 죽일 만큼 항상 바다가 잔잔하기 때문에 옛날에는 러시아,영국,미국,일본등 열강이 탐냈던 천혜의 항구였습니다. 산세는 3개의 섬이 병풍처럼 둘러쌓여, 항만을 형성하는 안쪽으로 경사도가 완만하여 6개의 부락을 이루고,항구의 뒤쪽으로는 깍아 지른 듯한 단애(斷崖)로 대개가 형성되어, 이 두 지점의 경계선인 산 능선을 따라 음달산에서 거문도등대 까지 단장된 산행로는 아열대의 삼림욕을 만끽할수 있는 국내 최고의 섬 산행코스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 교 통 : 여수 여객터미널에서 쾌속여객선으로 2시간 20분 소요. ○ 관광자원 ▷ 거문도등대 : 1905년 4월 5일 첫등이 밝혀진 동양최대의 규모이며, ▷ 동지나해를 드나드는 어선의 뱃길안내는 물론 싱가폴의 말래칸해협처럼 ▷ 동북아교류에 없어서는 아니될 국제적 항로의 안전에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으며, 주변 천혜의 경관은 관광객의 격찬을 받고있다. ▷ 유림해수욕장 : 유루우미(파도가 밀려오다)라는 일본인에 의해 유래한 지명으로 전해 오며, 완만하고 깨끗한 사질(沙質)과 투명한 물빛은 여태껏 익사자가 없기로 유명하다. ▷ 백도군도 : 백도소개 참조 ▷ 거문도해안절경 : 150여미터의 능선을 기점으로 항구쪽으로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어, 100여만평의 항만이 천혜의 피난항으로 유명하며, 능선밖으로는 깎아지르는 단애(斷崖) 로 이루어져 쪽빛바다와 감동의 비경을 자아낸다. ▷ 동백나무숲 군락지 : 동백(冬栢) 은 겨울에 피어나야 진정한 동백꽃이다. 우리나라 최대의 천연밀림으로 이곳에 서식하는 360여종의 아열대식물중의 70%를 차지하며, 매년 10월말부터 이듬해 3월말까지 지천이 붉은빛으로 가득하다. ▷ 산행코스 : 산행코스 참조. ▷ 전라남도무형문화제인 거문도뱃노래 ▷ 녹산곶 등대 : 여객선을 타고가다보면 거문도항 초입에 위치한 초목위의 그림같은 등대로 특히 초목이 금빛으로 물드는 겨울과 가을에 바람결에 나부끼는 출렁임은 가히 장관이다. ▷ 해밀턴파크 : 1885년 영국해군이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저지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거문도를 무단점거할 당시 9명의 주둔군 수병이 사망하였으며, 이중 3구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다. 주둔군 제독의 이름을 따서 영국에서는 거문도를 "포트해밀턴"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여수시 에서 관광사업 정책의 일환으로 이 묘역을 "해밀턴파크"라 명칭화하여 조성하고있다. ▷ 가족 선상 체험낚시 : 포구마을앞에 자그마한 배를 띄우고 가족끼리 즐기는 낚시로써, 6월부터 9월까지의 기간에는 바다에 줄낚시를 드리우기만 하면 다양한 어종이 남녀 노소없이 물어줍니다. ▷ 기타 : 스쿠버 다이빙, 해수욕장 2곳.
○ 특 징 1885년에 영국군이 이 섬을 점령하였던 거문도사건, 국가명승7호로 지정된 백도의 기암괴석. 360여개의 무인고도 외에도 고급 어종과 무려 360여종의 아열대 동,식물들이 서식하고 있는 천혜의 자연보고이기도합니다.
○ 자연특색 ▷ 동물 - 흑비둘기.동박새.가마우지. ▷ 식물 - 동백.풍란.후박나무등 360여종의 다양한 아열대 식물 분포
○ 지역 생산물 은빛갈치.농어.강성돔.삼치.홍합.돌미역.전복.홍해삼,뿔소라,거문도 약쑥
○ 편의시설 ▷ 현금인출기 : 우체국 1개소, 농협지소 1개소, 민원실내에 설치되어 직원이 근무하는 시간에만 이용 가능, ▷ 낚시점 : 2개 점포(낚싯대 용품 대여 및 판매) ▷ 숙박업소 : 6~15개의 룸으로 장급여관 8개와 화장실과 샤워실을 갖춘 다수의 민박, ▷ 식당 : 다수의 횟집이 있으며, 50명이상을 수용할수 있는 3~4곳의 업소가 있음, 맛은 최고랄수 있으나 조금 비싼편, ▷ 이동통신 통화품질 : 백도일원을 제외한 모든 지역이 양호한 통화권임, ▷ 생활용품 : 육지와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타 섬 지역에 비교하면 동일하거나 저렴한 편임.
○ 위치 ▷ 경도 - 동경127˚19˙ ▷ 위도 - 북위34˚1˙ ▷ 육지의 항만거리 - 82km ▷ 대안육지거리 - 40km
○ 일반현황 (2006년 1월 31일현재) ▷ 인 구 : 1.631명(남 : 836명 / 여 : 795명) ▷ 가구수 : 739세대 ▷ 면 적 : 면적-27.48㎢ ▷ 해안선 길이 : 99km ▷ 공공기관시설 - 학 교 : 초등학교(분교) : 1개교(3)-학생수 : 105명- 교사수 : 10명 중학교 : 1개교- 학생수 : 10명- 교사수 : 6명 - 기 관 : 면사무소 1개. 우체국 1개. 진료소 1개.경찰파출소 2개. 해경 1개. 농협출장소 1개. 수협출장소 1개
◆ 거문도 뱃노래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예로부터 어업에 종사해 온 어민들이 많았으며 어로작업중 많은 노래를 불러왔다. 그러나 어부들은 어획기에 어장을 찾아 모여드는 관계로 여러 지역간의 교류가 있었으리라 추측되나 전라남도 무형문화제 제1호인 거문도 뱃노래는 타지방 뱃노래와 섞이지 않고 순수하게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 어부들이 노래부르는 것은 대개 다음과 같은 작업을 할 때다. ▷ 닻을 올리 때 ▷ 노를 저을 때 ▷ 그물을 당길 때 ▷ 고기를 풀 때 ▷ 고기를 많이 잡아 가지고 풍어기를 나부끼며 귀항할 때 등이다. 거문도 뱃노래는 「술비소리」「고사소리」「놋소리」「월래 소리」「썰소리」등인데, 「술비소리」는 배에서 쓰는 칡넝쿨 밧줄을 드릴 때 부르고「고사소리」는 출어전에 용왕에게 만선의 풍요를 기원하면서 부르는 일종의 주가이다. 「놋소리」는 노를 저어가 면서 부르는 소리이고, 「월래소리」는 그물을 당길 때,「가래 소리」 는 고기를 가래로 퍼낼 때,「썰소리」는 만선이 되어 입항할 때 부르는 소리이다. 위의 노래들은 육지의 농요에서처럼 설소리꾼이 소리를 메기면 여타의 뱃사람들이 뒷소리를 받는다. 이 거문도 뱃노래는 순박하면서도 힘찬 어민의 기질과 정서가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영국해군 점령사건 1885년(고종22)부터 1887년까지 약 23개월에 걸쳐 영국군이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다는 구실로 거문도를 무단 점령하였던 "거문도 사건" 과정에서 병에나 사고로 죽은 영국군의 묘지이다. 당시 영국군의 철군 결과를 확인하고자 거문도에 내려온 경략사이원회의 보고에 의하면 사망자의 묘지는 총 9기였으나 현재는 3기만 남아있다. 서구식 비문에는 [1886년 3월 알바트로스호의 수병 2명이 우연한 폭발사고로 죽는다. 월리암, J.메레이와 17세 소년 찰스 댈리로 새겨져 있고, 십자가에는 [1903년 10월 9일 알비온호 승무원 알렉스 우드 잠들다] 라고 새겨져 있다. 거문도 묘지는 당초에는 고도의 하늘땀(여객선 터미널 동북쪽 100미터 지점)에 있었는데 1910년 한일합방과 더불어 일본인에 의해 거문리가 면소재지로 됨에 따라 현재의 자리로 이장하였다. 일제 말엽 2차대전 당시에는 미·영 타도가 높아지자 일본인 무뢰한에 의해 지금 남아 있는 묘비보다 더 큰 서구식 묘비는 박살이 나고 현재 남아있는 서구식 비도 두 동강이 되어 굴어 다녔는데, 해방 이듬해 섬 유지들이 보수하여 다시 세웠다고 한다.
한국인과 러이사인의 최초의 만남은? 한국인과 러시아인의 최초의 만남은 언제일까? 또 누가 어디에서 그 최초의 해후를 했을까? 1246년 7월 22일, 몽고의 하궁에서 제3대 군주,정종의 즉위식이 거행되었다. 여기에 러시아 교황 「Innocene」4세의 사절이 참석하여 수기를 적었다. 이를 보면 즉위식에 참석한 외국사절의 이름을 기록한 가운데 「Solanges」의 왕자가 들어있다. 따라서 이 기록은 한국인(당시로서는 조선인)과 러시아인이 만난 최초의 기록이라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