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와 희망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Ⅸ
1.군부 갈등과 2·26사건
다른 나라 사람들은 물론 일본인들도 일본군이 1930년대 후반부터 왜 그렇게 확전을 거듭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불나방처럼 전쟁에 뛰어들었다. 통제되지 않는 군부가 스스로 정치세력이 되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사태가 터진 것이다.
도쿄를 장악한 이른바 결기부대. 히로히토 일왕의 진압명령 때문에 ‘3일 천하’로 끝났다.
"1935년 8월 12일 도쿄 미야케자카(三宅坂)에 있는 육군성에 대만(臺灣) 보병 제1연대 소속의 아이자와 사부로(相澤三郞) 중좌가 들어섰다. 육군중장인 야마오카 시게아쓰(山岡重厚) 정비(整備)국장을 인사차 방문했다는 그가 향한 곳은 육군소장 나가타 데쓰잔(永田鐵山:1904~1935) 군무(軍務)국장실이었다.
아이자와는 군도(軍刀)를 빼어들고 “국가를 위태롭게 만드는 장본인을 베러 왔습니다”라고 말하고는 나가타를 내리쳐버렸다. 군국(軍國) 일본의 심장부인 육군성 내에서 발생한 살인극이 바로 ‘아이자와 사건(相澤事件)’이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헌병에게 아이자와는 “임지(任地)에 가야지”라고 태연하게 말했다.
현장에 달려온 야마오카 중장은 꾸짖기는커녕 아이자와의 상처 난 왼손을 손수건으로 감싸주고 ‘의무실로 데려가라’고 명령했다. 아무도 아이자와를 제지하지 않은 것은 물론 네모토 히로시(根本博) 대좌는 감격의 악수를 청했다가 야마시타 도모유키(山下奉文) 대좌에게 주의를 받았다.
여기 엉킨 다섯 명의 고급 장교들은 모두 육군유년학교 출신의 전쟁기계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육군유년학교는 13~14세의 어린아이들을 입교시켜 전쟁기계로 길렀다. 살해당한 나가타는 육군중앙유년학교와 육군대학을 각각 2위로 졸업하고 참모본부 제2부장 등을 역임했는데, 만주사변의 주역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를 두고 ‘육군에는 이시하라가 있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그의 선배인 나가타 역시 ‘육군에는 나가타가 있다’며 장래의 육군대신감으로 칭송받던 인물이었다.
아이자와도 센다이(仙台) 육군유년학교와 육군중앙유년학교 출신이고, 야마오카 중장도 나고야 육군지방유년학교와 중앙유년학교 출신이고, 악수를 청했던 네모토 히로시도 센다이 육군지방유년학교와 육군중앙유년학교 출신이었다. 심지어 네모토에게 주의를 주었던 야마시타도 히로시마 육군지방유년학교와 육군중앙유년학교 출신이었다.
군·정계 거물들을 ‘간신·국적’이라며 습격
아이자와 사건은 육군 내 두 파벌이 극단적으로 충돌한 것이었다. 이른바 통제파(統制派)와 황도파(皇道派)의 충돌이었다. 두 파는 여러 번 충돌했지만 이념상의 차이는 크지 않아서 이 사건은 일종의 조폭 간 나와바리(縄張り) 빼앗기였다.
두 파는 모두 군부가 일본을 주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육군대학 출신의 엘리트들이 포진한 통제파도 당초 쿠데타를 계획했다가 육군대신을 통해 정치적 요구를 실현하면서 서구 열강에 맞서는 ‘고도국방국가(高度国防国家)’를 건설하는 것으로 수단을 조금 바꾸었을 뿐이다.
황도파라는 말은 육군대신이었던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가 일본군을 ‘황군(皇軍)’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하는데, 이들은 군부 쿠데타로 정당과 의회를 무력화시키고 일왕(日王) 친정의 군국(軍國)국가로 개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황도파는 끊임없이 군부 쿠데타를 도모했다. 1934년 11월에는 무라나카(村中孝次), 이소베(磯部淺一) 등이 사관학교 학생들을 이끌고 쿠데타를 결행하려다가 통제파에게 발각되어 미수로 끝난 이른바 ‘사관학교 사건’도 발생했다.
1935년 8월 육군대신 하야시 센주로(林銑十郞)가 황도파의 수장이었던 마사키 진자부로(眞崎甚三郎) 교육총감을 파면한 뒤 통제파였던 와타나베(渡邊錠太郎)를 임명한 사건은 아이자와를 격분케 했다.
1936년 1월 28일부터 제1사단 사령부의 군법회의에서 재판이 열렸는데 특별변호인 미쓰이(滿井佐吉) 중좌는 이 사건이 군부 내에 확산되고 있는 국가개조운동의 한 단면이라면서, “이 사건을 잘못 처리하면 제2, 제3의 아이자와가 나타날 수 있다”고 협박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1936년 2월 26일 새벽. 1사단 소속의 구리하라 야스히데(栗原安秀) 중위를 비롯한 황도파 청년 장교들은 보병 제1연대, 제3연대, 근위보병 제3연대 사병들을 눈 덮인 연병장에 소집했다. 구리하라는 “지금부터 소화유신(昭和維新)을 향한 행동을 개시한다”고 훈시하고선 ‘존황(尊皇)’과 ‘토간(討奸)’을 암호로 하달하고 실탄을 나누어주었다.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2·26사건’의 시작이었다. 구리하라는 아이자와가 데쓰잔을 살해한 직후 사관학교 사건으로 정직된 이소베 아사이치(磯部淺一)에게 “아이자와가 행한 것은 바로 청년 장교들이 실행했어야 하는 일이었다”고 토로한 인물이었다.
이들의 제거 대상인 ‘간신’의 범주는 어마어마했다. 두 단계에 걸쳐 간신 제거 계획을 세웠는데, 제1차 목표는 총리대신 오카다 게이스케(岡田啓介:해군대장)를 필두로 일왕의 시종장 스즈키 간타로(鈴木貫太郎:해군대장), 내대신 사이토 마고토(斎藤實:해군대장, 조선총독과 수상 역임), 대장(大藏)대신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清:전 총리대신) 등과 정계 최고 원로였던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전 수상) 공작 등이었다. 이렇게 간신들이 득실거리는데 어떻게 나라가 망하지 않았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1차 습격 대상이 주로 내각과 일왕을 둘러싼 인물들이었다면 제2차 제거 대상은 주로 의회와 재계 인물들이었다. 추밀원 의장 이치키 기토쿠로(一木喜德郎) 남작, 전 대만총독인 귀족원의장 이자와 다키오(伊澤多喜男), 미쓰이(三井)재벌 총수 미쓰이 하치로에몬(三井八郎右衞門), 미쓰비시(三菱) 재벌 총수 이와사키 고야타(岩崎小弥太), 내무대신 고토 스미오(後藤文夫) 등이 그들이었다.
1931년에 잇따라 발생했던 3월 쿠데타 기도나 9월의 만주사변, 10월의 쿠데타 기도사건 등을 모두 하시모토 긴고로(橋本欣五郞),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 같은 영관급 장교들이 주도했다면 2·26사건은 위관급 장교로 더 내려갔다.
구리하라 중위 등이 이끄는 이른바 결기부대(決起部隊)는 모두 1483명이었다. 구리하라는 300명의 병력으로 수상 관저를 포위한 뒤 권총으로 대항하는 경비경찰을 제압하고 관저 안으로 들어갔다.
오카다 게이스케(岡田啓介) 수상은 총소리가 나자 해군대장 출신답게 잽싸게 가정부 방 장롱 속으로 숨었다. 결기부대는 총리의 매부이자 개인비서였던 마쓰오 덴조우(松尾傳蔵) 전 육군대좌를 수상으로 오인해 사살했다. 구리하라 일행은 만세를 부르면서 다른 부대에 ‘소화유신’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고 알렸다.
그러나 숨죽이고 숨어 있던 오카다는 문상객으로 가장하고 27일 밤 관저를 극적으로 탈출했다. 나카하시 모토아키(中橋基明) 중위는 근위보병 3연대 병력을 이끌고 대장대신 다카하시의 사저를 습격했다. ‘국적(國賊)’이라는 외침과 함께 침실에서 사살된 82세의 대장대신 다카하시의 시신에 나카시마(中島莞爾) 소위는 ‘천벌’이라면서 군도로 난도질했다.
조선총독 지낸 78세 사이토도 난자 당해
사카이(坂井直) 중위는 보병 제3연대 병력을 이끌고 조선총독과 수상을 역임했던 사이토 마고토 내대신(內大臣)의 사저를 습격했다. 총소리에 놀라 침실에서 뛰어나온 일흔여덟 노구의 사이토도 권총과 기관총, 군도로 난자당했다.
사이토는 47발의 총탄과 10번의 난도질을 당했는데 한 장교는 사저를 포위하고 있는 병사들에게 피 묻은 손을 들어올리며 ‘보라, 국적의 피를!’이라고 외쳤다. 사이토를 처단하려고 폭탄을 던졌다가 매국경찰 김태석에게 체포되어 사형당한 강우규 의사가 들었으면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이외에 교육총감 와타나베(渡邊錠太郎) 육군대장도 살해되었다. 안도(安藤輝三) 대위는 보병 3연대 병력을 이끌고 전 총리대신이었던 스즈키 간타로 시종장의 관저를 습격했다. 안도는 4발의 총알을 맞은 스즈키의 목을 자르려다가 부인 스즈키 다카(鈴木たか)의 애원을 받고는 곧 죽으리라는 판단으로 중지했다.
그러나 스즈키는 겨우 목숨을 건졌고, 일왕 히로히토(裕仁)의 유모였던 부인 다카는 궁성에 이 소식을 전했다. 히로히토는 자신의 친정(親政)을 내걸고 쿠데타를 일으킨 젊은 병사들보다 유모의 남편에게 더 애정이 갔는지 스즈키의 부상 소식에 격분해 진압명령을 내렸다. 2월 28일 라디오에서 “칙령이 나왔다…폐하의 명령에 따라 원대로 복귀하라…”는 ‘병사에게 고한다’는 방송이 나왔다.
결기부대는 29일 아침 원대로 돌아갔으나 이 실패한 쿠데타에 히로히토가 분노했으므로 가혹한 뒤처리가 뒤따랐다. 노나카 시로(野中四郎)와 고노(河野壽) 대위는 자결했고, 구리하라 등 16명의 장교는 사형당했다. 이뿐만 아니라 황도파에게 소화유신의 이념을 제공했던 극우파 사상가 기타 잇키(北一輝)와 니시다 미쓰기(西田税)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 사건을 주도한 대부분의 청년 장교들 역시 육군유년학교 출신의 전쟁기계들이었다.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지만 군부는 이 사건을 빌미로 정계와 언론계를 협박했다. 소화유신을 모방한 10월 유신이 의회와 정치권, 언론을 극도로 위축시켰던 것처럼 소화유신을 표방한 2·26사건 이후 일본 사회는 극도로 위축됐다.
그러면서 군부는 군수산업을 중심으로 하는 중공업 재벌과 결탁해 확전의 길로 나섰다. 조직폭력배에 불과한 군부와 무기상으로 변신한 중공업 재벌의 이른바 군상(軍商)복합체가 이후 일본을 병영국가로 몰고 갔으니 확전은 불가피했다."
2. 최종전쟁론이란 국책 -일등병·순사 충돌…군부·내무성 맞서자 일왕 개입
세계 역사에서 군부가 정부 위에 존재할 때 생기는 비극을 1930~40년대의 일본 군부처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례도 찾기 힘들다.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일본 군부는 세계 정복이란 허황된 꿈을 꾸면서 잇따른 확전에 나섰다. 상식과 문명, 문화에 대한 반동이었다.
서안사변 당시 장개석이 연금돼 있던 서안 화청지 오간청.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가 서려 있던 이곳이 중국 근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장소가 되었다. [사진가 권태균]
‘존황토간(尊皇討奸)’을 기치로 총리대신 오카다(岡田啓介)와 내대신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등을 살해한 1936년의 2·26사건 이후 군부는 국가 차원의 조직폭력배로 변해 갔다. 경찰이 군인과 다투었던 1933년의 ‘고스톱 사건’은 이미 신화였다.
1933년 6월 17일 오사카(大阪) 덴신바시(天神橋) 부근에서 제4사단 소속 나카무라(中村政一) 일등병이 영화를 보러 가다가 교통계의 도다(戸田忠夫) 순사에게 신호등 위반으로 적발됐다. 나카무라는 “군인은 헌병에는 따르지만 경찰관의 명령에는 복종할 의무가 없다”고 저항하면서 난투극이 발생해 양자가 모두 부상을 입었다.
6월 22일 선민(選民)의식으로 무장한 4사단 참모장 이세키(井關隆昌) 대좌는 “이 사건은 일개 병사와 일개 순사의 사건이 아니라 황군(皇軍)의 위신이 걸려 있는 중대한 문제”라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경찰의 사과를 요구했다.
아와야 센키치(粟屋仙吉) 오사카 경찰부장도 “군대가 폐하의 군대라면 경찰관도 폐하의 경찰관이다.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맞서면서 군부와 내무성의 대립으로 확산되었다. 아와야 경찰부장은 1945년 8월 히로시마 원폭 투하 때 시장으로 있다가 사망하는데 세칭 일고(一高)라고 불렸던 제일고등학교와 도쿄제대 법학과를 나온 엘리트 관료였다.
오간청 내부. 장개석과 송미령의 결혼사진이 걸려 있는 것이 이채롭다.
5相회의에 육군·해군대신 들어가 좌지우지
‘관청 중의 관청’이라고 불렸던 내무성 중에서도 아와야가 속했던 경보국(警保局:지금의 경찰청)에는 도쿄제대 법학부를 상위의 성적으로 졸업한 엘리트들이 포진하면서 ‘신관료(新官僚)’로 불렸다. 신문은 연일 ‘군부와 경찰의 정면충돌’이라고 보도했고, 오사카의 요세(寄席)라고 불렸던 만담장의 소재로 사용되었다.
8월 24일에는 목격자였던 헌병 다카다(高田善)가 자살해 흥미를 더했다. 드디어 양측의 충돌을 우려한 일왕 히로히토(昭和)는 데라우치 히사이치(寺內壽一) 4사단장의 친구였던 시라네 다케스케(白根竹介) 효고(兵庫)현 지사에게 특명을 내려 중재하게 했다.
일왕이 걱정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군부는 급속하게 태도를 바꾸어 사건 발생 5개월 만인 11월 18일 이세키 참모장과 아와야 경찰부장이 공동성명서를 발표하고, 20일에는 사건 당사자인 도다 순사와 나카무라 일병이 와다 료헤이(和田良平) 검사관사에서 악수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10월 23일 후쿠이(福井)현에서 육군특별대연습을 참관하던 히로히토가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 육군대신에게 ‘오사카 사건은 어떻게 되어가는가?’라고 묻자 황군(皇軍)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살던 아라키가 ‘황군은 폐하께 걱정을 끼치는 일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면서 데라우치에게 사건을 끝내라고 지시했다는 설도 있다. ‘진지사건(進止事件)’이라고도 불리는 고스톱사건은 민간 엘리트들이 군에 제동을 건 마지막 사건이 되었다.
메이지헌법의 통수권(統帥權) 개념 때문에 일본군에는 황군(皇軍)이란 개념과 민간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도 된다는 위험한 개념이 생겨났다. 군부는 자신들을 황국(皇國)의 이상을 실현하는 존재로 격상시키면서 군대 밖의 사회를 ‘지방’ 또는 ‘사바’라는 한 단계 낮은 분야로 취급했다.
이런 군부에 의해 해군대장 출신의 현직 총리까지 살해되면서 군부에 대한 민간의 공포는 급속도로 커져 갔다. 이미 거대한 폭력조직으로 변질된 군부의 횡포에 대해 일본 국민은 2·26사건 때 총리 관저를 사수하다가 사살당한 경찰관 유족에게 성금을 22만 엔이나 내는 것으로 반응했다.
언론들도 5월 1일 민정당의 사이토 다카오(齊藤隆夫)가 의회에서 “국민은 모두 분개하고 있지만 이를 입 밖으로 말할 자유를 박탈당하고 있다”고 말한 것을 게재하는 것으로 군부 비판을 대신했다.
사건 이후 데라우치 히사이치 육군대신은 군부의 정치 간여 문제에 대해 “일반 군인의 정치 간여는 금지하지만 군부대신은 국무대신으로서 직무상 정치에 관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답했다. 데라우치가 이렇게 말했던 것은 1936년 5월 육해군성 관제의 부속별표(附屬別表)가 개정되면서 육·해군대신 현역제가 부활했기 때문이었다.
1913년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라고 불렸던 헌정옹호운동의 결과 폐지되었던 현역군인의 육·해군대신 부임제가 2·26사건 와중에 슬그머니 부활한 것이다. 이후 군부의 동의 없이는, 즉 육군이나 해군에서 대신 파견을 거부하면 내각도 구성할 수 없었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데라우치 육상(陸相)은 신임 히로다 고키(廣田弘毅) 총리에게 ‘국책(國策) 수립’을 요구했다. 히로다 내각은 군부의 위세에 눌려 ‘총리·외무·대장(大藏)·육군·해군’의 다섯 대신이 참석하는 오상회의(五相會議)에서 주요 국책을 결정했는데, 이 오상회의에서 1936년 8월 7일 ‘국책(國策)의 기준’을 작성했다. ‘국책의 기준’은 외부에는 발표하지 않았지만 이후 일본을 미친 전쟁으로 몰고 간 기본 국책을 결정한 것이었다.
‘국책의 기준’은 “제국(帝國) 내외의 정세에 비추어… 근본 국책은 외교와 국방 모두 동아(東亞) 대륙에 있어서 제국의 지위를 확보함과 동시에 남방해양으로 진출해 발전하는 데 있다”고 결정했다. 북방의 중국과 러시아뿐 아니라 남방, 즉 미국·영국도 전쟁 대상으로 삼겠다는 말이었다.
‘국책의 기준’ 원 입안자는 만주사변의 주모자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였다. 그는 1935년 8월 참모본부 작전과장으로 부임해서는 ‘전쟁계획’을 주창하면서 ‘전쟁 지도계획’을 만들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육군의 이른바 ‘국방국책(國防國策)’인데 그 골자는 군부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군수공업을 일으켜 세계 최종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만주국을 중화학공업기지로 만들겠다는 방침은 이래서 나온 것이었다. 1936년 6월 참모본부는 ‘국방국책’을 입안하고 수행하기 위한 전쟁지도과(戰爭指導課)를 만들어 이시하라가 과장으로 취임했다.
1937년 국방비 대거 증액하자 물가 급등
국방국책은 ‘일만북지(日滿北支:일본, 만주, 화북)’의 지구전 블록을 형성해 소련을 타도하고, 새 중국(新支那)을 건설하고 비약적으로 실력을 향상시켜 미국과의 최종 전쟁을 일으켜 승리함으로써 전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계획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허황된 세계정복론과 비슷한 이런 공상이 20세기에 실천에 옮겨졌다는 것 자체가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육군에서는 12년 계획으로 군비 대확장 계획을 수립했는데 사단 수 증강은 물론 비행기전차화포 등의 근대적 무기의 대폭 확충에 나섰다. 해군도 무사시(武藏), 야마토(大和) 같은 세계 최대의 전함과 항공모함 건조에 나섰다.
1937년 육·해군성에서는 14억 엔이 넘는 국방비를 요구했고 군부의 위세에 눌린 대장대신 바바 에이치(馬場鍈一)는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전년도에 비해 일시에 8억 엔이 증가한 30억 엔 이상의 대규모 예산안을 편성했다. 이른바 이 바바(馬場)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4억2000만 엔의 증세를 하고, 8억3000만 엔의 공채를 발행했는데, 예산안이 발표되자마자 물가가 급등해 시장이 혼란스러웠다.
국방국책에 따르면 일본군은 화북(華北) 전역으로 전선을 넓혀야 했으며, 만주국 같은 괴뢰정부를 세워 전 중국을 실질적으로 통치해야 했다.
일본 정부와 군부의 대중국 정책은 ‘무시하고 비웃는 것’이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런 분위기가 팽배하면서 일본군은 물론 낭인·민간인들과 중국인들의 충돌이 잦아졌고, 항일 여론이 급격하게 높아져 갔지만 일본은 이를 무시했다.
일제가 만주를 손쉽게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장개석(蔣介石)이 내부의 공산당을 먼저 격멸한 후 일제와 전면전을 전개하겠다는 ‘선내양외(先內攘外) 방침’에 따라 동북군 사령관 장학량(張學良)에게 ‘부저항(不抵抗) 철군’을 종용했기 때문이었다.
만주에서 쫓겨난 장학량은 홍군(紅軍) 토벌에 염증을 느끼고 이 무렵 공산당과 비밀협상을 진행했다. 비밀협약 1단계가 홍군과 동북군 사이의 적대행위를 중지하는 것이었다.
장개석은 서안까지 날아가 장학량에게 공산당 토벌에 적극 나서라고 요구했지만 장학량은 1936년 12월 12일 ‘내전 중지, 일치 항일’을 주장하면서 장개석을 서안 화청지(華淸池)에 감금하는 ‘서안사변(西安事變)’을 일으켰다.
공산당 내에서는 장개석 처형 목소리가 높았지만 모택동(毛澤東)은 주은래(周恩來)를 서안으로 파견해 항일민족통일전선 결성을 조건으로 오히려 장개석의 석방을 종용했다.
일본 정부와 군부는 서안사변의 기본적 성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당초 장개석의 국민정부가 더욱 반공정책을 강화할 것으로 예상하고 반겼다.
그러나 장학량의 요구를 받아들인 장개석은 12월 25일 장학량과 함께 낙양(洛陽)으로 귀환하면서 중국인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고, 1937년 1월에는 모택동이 서안에 입성했다. 1937년 2월 국민당 3중전회는 내전 정지와 화북(華北)의 실지(失地) 회복을 결의했다.
이렇게 제2차 국공합작, 즉 항일민족연합전선 결성이 눈앞에 드러나면서 전 중국이 항일의 도가니로 변해갔다. 그러나 일본 군부는 여전히 중국을 얕보고 전쟁 확대에 나섰다. 이런 점에서 중일전쟁 발발은 필연이었는지도 모른다.
3. 노구교 사건 -고노에 내각, 군부 죄기는커녕 때론 확전 앞장
군(軍)이 정치의 통제를 벗어나 스스로 권력기관이 되면 국가뿐만 아니라 군도 불행해진다. 그래서 초기에 그런 조짐을 억제하는 국가 역량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1930~40년대의 일본 정치가들은 군의 눈치를 보기에 급급했고 그 비극은 고스란히 국가 전체로 떨어졌다.
1937년 일본군이 북경 부근 장신점(長辛店) 근처 철로에서 중국군과 교전하고 있다.
[사진가 권태균]
1937년 1월 21일 제70회 일본 제국의회에서 할복문답(割腹問答)이 벌어졌다. 입헌정우회의 하마다 구니마쓰(濱田國松) 의원이 ‘근년… 국민들의 언론 자유에 압박을 가하고 있고… 군(軍)의 저변에 독재 강화라는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도도하게 흐르면서 문무(文武)가 서로 삼가고 조심하는 선을 파괴할 우려가 있다’면서 점차 노골화되는 군부의 정치 간여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 발단이었다. 만 예순아홉 나이에 의원 경력 30년의 하마다는 36년 1월까지 중의원 의장을 역임한 정계 원로였다.
노구교 전투상황.
하마다는 다시 등단해서 “속기록을 검토해서 내가 군을 모욕한 말이 있다면 할복으로 사과하겠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가 할복하라”고 되받아쳤다. 의회는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다음날 데라우치는 히로다 고키(廣田弘毅) 총리에게 ‘정당들의 시국 인식이 부족해서 생긴 사건’이라며 정당의 반성을 요구하는 의미에서 의회를 해산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히로다는 물론 대형 전함의 건조 예산 등이 필요했던 해군대신 나가노오사미(永野修身)도 반대했지만 데라우치가 단독으로 사퇴하면서 내각은 붕괴했다. 히로다가 군부에 끌려다니면서 부활시킨 육·해군대신 현역제에 따라 육군에서 대신을 내지 않으니 내각이 무너졌던 것이다.
중일전쟁 당시 일본 총리 고노에 후미마로. 때론 군부보다 더 강경하게 확전론을 펼쳤다.
1937년 총선 뒤 국정방향 못 틀어 禍 자초
1937년 2월 히로다의 뒤를 이은 후임 총리는 전 조선주둔군사령관 하야시 센주로(林銑十郞)였다. 하야시는 1931년 만주사변 때 참모본부의 지시도 없이 조선주둔군 제39혼성여단을 불법적으로 만주 경내로 입경시켜 ‘월경장군(越境將軍)’이라 불렸던 인물이었다. 상부 명령 없이 타국의 영토를 불법 침공한 하야시가 처벌 받기는커녕 7년 후에는 총리직까지 오른 것이다.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의 만주사변 도발 이후 일본군 내에 상부 명령 없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출세의 지름길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만연했다. 월경장군 하야시는 입헌정우회(立憲政友會)와 입헌민정당(立憲民政黨) 등이 법안 지연전술을 펼친다면서 중의원을 해산하고 총선거를 실시했다.
그러나 그해 4월 30일 실시된 제20회 중의원 총선거 결과는 하야시의 예상과는 정반대였다. 총 466석의 의석 중 입헌민정당은 179석, 입헌정우회는 175석으로 전체의 70%가 넘는 대승을 거둔 반면 하야시가 밀었던 소화회(昭和會)는 18석, 국민동맹은 11석에 그쳐 제3당이 된 사회대중당의 36석에도 미치지 못했다.
월경장군 내각은 4개월 만에 붕괴하고 1937년 6월 원로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의 추천을 받은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磨) 내각이 들어섰다. 고노에가 국민적 열기와 인기를 바탕으로 국정의 키를 제대로 잡아나갔으면 이후 일본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5섭가(攝家:섭정이나 관백에 임명될 수 있는 집안) 출신으로 귀족원 의장을 역임한 고노에에게 이런 요구 자체가 애당초 무리였다. 고노에는 이후 두 번 더 총리를 역임하지만 1940년에 국민총동원을 목적으로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를 출범시켰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군부에 끌려갔을 뿐’이라고 변명했지만 총리 재임시 때로는 군부보다 강경하게 군사적 해결을 주장하기도 했다.
고노에가 총리가 된 지 불과 한 달 만인 1937년 7월 7일 밤 노구교(蘆溝橋)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육군 일등병과 순사가 부딪쳤던 고스톱 사건처럼 사소한 일이었다. 그날 밤 북경 서남쪽 노구교 부근에서 일본의 천진 주둔군 1여단 1연대 3대대는 이치키 기요나오(一木清直) 소좌의 지휘로 야간 훈련을 하고 있었다.
이치키는 5년 뒤인 1942년 8월 남태평양 과달카날 전투에서 전사한다. 에드윈 폴락 중령이 이끄는 미 1해병연대 2대대에 의해 부대원 전원이 전멸당하고 만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기세등등했던 게 일본 육군이었다. 노구교 사건은 일본과 중국 양측 모두 상대방이 먼저 도발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 측은 한밤중에 몇 발의 탄환이 날아온 뒤 3대대 8중대원 135명 중 한 병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 문제가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중대장 시미즈 세쓰로(淸水節郞) 대위는 병사를 찾으라고 지시했는데 이 병사는 용변을 보러 간 것이어서 곧 복귀했다. 일본 측은 다시 중국군 쪽에서 여러 발의 탄환이 날아왔다고 주장했다.
이치키 대대장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연대장 무타구치 렌야(牟田口廉也)는 “두 번이나 발사했으면 명백한 적대행위니 단호하게 전투를 개시하라”며 일본군의 장기인 상부 명령 없는 단독 공격을 지시했다.
중국군 제29군장 송철원(宋哲元)은 일본의 후원으로 화북(華北)을 지배하던 인물이자 사쿠라이(櫻井德太郎)가 제29군 고문이어서 중국군의 의도적 도발 가능성은 없었다. 그래선지 일본은 중국공산당이나 학생들의 소행이라고 바꾸어 주장했다.
그러나 패전 후 일본 육군의 음모 공작을 폭로했던 다나카 류키치(田中隆吉:소장) 중좌는 전후 심판 받는 역사(裁かれる歴史―敗戦秘話, 1948)에서 노구교 사건 다음날 중국군과 일본군 양쪽 모두에 총알이 날아들었다는 정보를 듣고, 공작에 능했던 시게카와 히데카즈 소좌에게 “그렇게 만든 원흉이 너지?”라고 묻자 고개를 끄덕였다고 밝혔다.
이 수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국 쪽에서 실제 발포했었다고 하더라도 노구교 사건은 일본군의 공작 결과였다. 사건 보고를 들은 고노에 총리가 “설마 또 육군의 계획적인 행동은 아니겠지?”라고 말했다는
일화도 이를 뒷받침해준다. 만주를 고스란히 내주고도 현상 유지에 바빴던 중국군이 먼저 도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중국군이 사격했다고 해도 전사자는커녕 부상자도 없는 상황에서 진격 명령부터 내린 것은 이시하라 간지의 무용담을 훈장처럼 동경하던 일본군 전쟁기계들의 계획된 도발이란 증거였다.
연대장 무타구치는 중위 시절에 그 어렵다는 육군대학교에 입학했을 정도로 촉망 받았지만 2·26사건 후의 인사쇄신 차원에서 천진으로 좌천된 인물이었다.
그런 만큼 상황을 역전시킬 한 건이 필요한 처지였다. 다음날 무타구치 연대장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여단장 가와베 마사카즈(河邊正三) 소장 역시 상하개념 없던 일본군 장군답게 자신의 지시도 없이 내려진 진격명령을 수긍했다.
그러나 화북(華北)의 지배권을 빼앗길까 두려웠던 제29군장 송철원은 7월 11일 ‘노구교의 인도, 대표자 사과, 책임자 처벌, 항일단체 단속’ 등 일본군의 모든 요구를 받아들이는 현지협정을 맺어 사태를 종결지으려 했다.
이렇게 ‘노구교 사건’이 국지전으로 끝나려던 바로 그날,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은 이를 ‘북지(北支:북중국)사변’으로 부르면서 본토에서 2개 사단을 급파하는 화북(華北) 파병안을 승인하며 확전에 나섰고 북경과 천진을 점령했다.
고노에는 내부의 시선을 밖으로 돌리는 확전이 ‘국내대결 상태’를 해소하는 좋은 방책이라고 여겼다. 확전이 일본이 갖고 있는 모든 사태의 해결책이라고 막연하게 믿었던 언론들도 현지협정 체결 기사는 구석에 조그맣게 게재하면서도 전쟁 선동 기사는 1면부터 여러 면에 걸쳐 대서특필했다.
언론도 ‘中대륙 곧 점령’ 환상에 부화뇌동
만주를 손쉽게 점령했던 과거 경험에 마취된 일본의 정계·군부와 언론계는 일본군이 전면전을 전개하면 전 중국을 곧 점령할 수 있다는 환상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겉으로는 국제여론을 의식해 전선 불확대 방침을 표명했으면서도 속으로는 전선 확대를 추진했다.
스기야마 하지메(衫山元) 육군대신이 8월 17일의 각의에서 ‘전선 불확대 방침을 이전처럼 고수한다’고 발표한 뒤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패전 후 남경학살 전범으로 처형) 상해파견군 사령관을 도쿄역까지 환송하면서 “남경까지 진격하라”고 역설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특이한 점은 만주사변의 장본인 이시하라 간지가 참모본부 작전부장이란 요직에 있으면서 전선 불확대를 주장했다는 점이다. 이시하라가 물론 전쟁 자체에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화북으로 전선을 확대하기보다는 만주국을 튼튼하게 세워서 소련과 미국을 물리치고 전 세계를 지배해야 한다는 세계 최종전쟁론에 따라 반대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1936년 이시하라가 내몽골 분리공작을 추진하는 관동군들에 중앙의 통제를 따르라고 설득하자 관동군 참모 무토 아키라(武藤章)가 “이시하라 각하께서 만주사변 당시에 했던 행동을 모방하고 있습니다”라고 반박했다. 그 순간 동석했던 젊은 참모들이 웃었다는 일화가 전해지는 것처럼 전쟁기계들은 이미 이시하라의 통제도 벗어났다.
이시하라는 9월 전선 확대파에 밀려서 참모본부 작전부장에서 관동군 참모부장으로 좌천되었다. 이시하라는 자신의 부하들이 자신의 흉내를 내면서 확전에 나서는 것을 씁쓸하게 지켜보면서 참모본부를 떠났지만, 확전을 주장했던 무토 아키라는 패전 후 전범으로 교수형에 처해진 반면 이시하라는 전범에서 제외되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다.
[출처] :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폐허와 희망 / 중앙선데이
4. 천인침과 남경학살 - 6주간의 학살극 … 살인귀·강간귀로 전락한 일본군
전쟁은 정치의 한 부분이기에 군은 정치에 종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스스로 최고 권력이 된 일본 군부는 일관된 사령탑도 없이 여기저기 전선을 확대시켰다. 연일 승전고는 울려 퍼졌지만 상황은 자꾸 불리해지는 이상한 전국(戰局)이 계속되었다.
남경 점령 후 일본군을 시찰하는 마쓰이 이와누 상해파견군 사령관. 패전 후 전범재판에서 남경학살의 주범으로 인정돼 사형을 당했다. [사진가 권태균]
1938년에 개봉한 일본 최초의 컬러 영화가 ‘천인침(千人針)’이다. 흰 보자기에 1000명의 여성이 붉은 실로 한 바늘씩 ‘武運長久(무운장구)’ 따위의 글귀를 떠서 전선의 병사들에게 보내는 것이 천인침의 스토리다. 특별히 호랑이해인 ‘인년(寅年)생’ 여성은 자신의 나이만큼 수를 놓을 수 있었다.
일본의 고사성어, “호랑이는 천리를 가고, 천리를 돌아온다”는 말에서 유래한 풍습으로 병사들의 무사귀환을 바라는 일종의 부적이다. 오전(五錢) 혹은 십전(十錢)짜리 동전을 꿰매기도 했는데 사전(四錢)이 사선(死線)과 같은 ‘시센’으로 발음되고, 구전(九錢)이 고전(苦戰)과 같은 ‘구센’으로 발음되기에 사선과 고전을 넘어서 무사히 돌아오라는 염원을 담은 것이다.
길 가는 여성에게 한 수를 요청하는 것은 눈에 익은 거리 풍경이었는데 식구의 무사귀환을 바라는 여인들의 마음을 탓할 수는 없겠지만 이들이 인류평화라는 대의와는 정반대의 정복전쟁에 나섰다는 점이 문제였다.
통일된 지휘부가 없는 일본군의 특성은 중일전쟁 때도 마찬가지였다. 스기야마 하지메(衫山元) 육군대신은 마쓰이 이와누(松井石根) 상해파견군 사령관에게 도쿄역에서 “남경(南京)까지 진격하라”고 격려했지만 정식 명령서가 전달된 것은 아니었다. 스기야마가 일왕 히로히토에게 ‘사변은 두 달이면 끝난다’고 상주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중일전쟁을 만주사변의 재판(再版)으로 착각했을 뿐이었다.
참모본부에서 “남경을 점령하면 국민정부에서 항전을 단념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 (林三郞, 『太平洋戰爭陸戰槪史』)한 것처럼 일본군은 남경을 점령하면 장개석의 국민정부가 항복할 것으로 오판했다.
이런 예상이 빗나가자 남경학살의 비극이 발생하게 된다.
장개석의 국민정부가 항전에 나서면서 일본군은 곳곳에서 고전했다. 일본군은 1937년 7월 29일 일본 본토 및 만주에서 온 증원군과 합세해 북경(北京)과 천진(天津)을 점령했지만 그때뿐이었다.
8월 13일에는 상해에서 일본 해군육전대와 중국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져 일본 본토의 대부대가 증파됐지만 상해를 점령하지 못했다. 일본 제국의회는 7월 말의 제71 특별의회와 9월 초의 제72 임시의회를 열어 부랴부랴 25억 엔이 넘는 전비 지출을 승인했다. 이런 특별예산은 매년 편성되면서 일본 경제를 압박했다.
참모본부 ‘남경 점령 땐 장개석 항복’ 오판
남경에서 일본군이 중국인을 산 채로 매장하고 있다.
일본군에 대해 전 국민적 분노가 일면서 동아시아 역사를 바꾸는 제2차 국공합작(國共合作)에 박차가 가해졌다. 국민정부의 토벌로 존폐의 위기에 몰려있던 중국공산당과 홍군(紅軍)의 구세주는 다름 아닌 일본군이었다. ‘중국 내부의 공산당을 먼저 섬멸한 후 외부의 적과 싸우겠다’는 장개석의 ‘선내양외(先內攘外)’ 정책은 서안사변으로 위기를 맞다가 중일전쟁으로 완전히 폐기될 수밖에 없었다.
1936년 12월의 서안사변의 결과로 이듬해 2월부터 국민당과 공산당이 협상을 했지만 국공합작에 목을 맨 모택동과 달리 장개석은 그리 탐탁해하지 않았다. 그러나 1937년 7월 7일의 노구교사건과 일본군의 북경·천진 점령, 상해 공격은 장개석의 선내양외 정책을 유지할 수 없게 만들었다.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7월 15일 국공합작 선언을 발표하고 이후 속개된 회담에서
①내전을 정지하고 국력을 모아 외세와 싸우자
②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인정하고 모든 정치범을 석방하라
③각당(各黨)·각파·각계·각군(各軍) 대표회의를 소집해서 공동 구국에 나서자
④대일항전 체제를 신속히 완성하자
⑤인민생활을 개선하자는 5개 사항을 요구했다.
명분을 가진 쪽에 힘이 실리는 동아시아 정치의 특성상 중국공산당의 주장에 힘이 실리지 않을 수 없었고, 1937년 9월 22일 정식으로 제2차 국공합작이 성립됐다. 주요 내용은 ‘공농정부(工農政府:소비에트 정부)는 중화민국 특구정부(特區政府)로 개칭하고, 홍군(紅軍)은 국민혁명군으로 개칭해 남경 국민정부와 군사위원회의 지시를 받고, 중국공산당은 지주들의 토지몰수 정책을 중지하고, 항일민족통일전선에 나선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국민정부의 토벌로 존폐의 기로까지 몰렸던 중국공산당은 기사회생했다.
화북(華北) 지역의 홍군은 홍비(紅匪)에서 ‘국민혁명군 팔로군(八路軍)’으로 개편됐고, 화중(華中) 지역의 홍군은 ‘국민혁명군 신사군(新四軍)’으로 개편됐다. 팔로군 총사령은 주덕(朱德), 부(副)총사령은 6·25전쟁 때 인민지원군 총사령으로 유엔군과 맞섰던 팽덕회(彭德懷)였다.
장개석은 9월 23일 “중국공산당의 폭동정책 포기, 중국 소비에트 정부의 해소, 홍군의 해산은 모두 우리 국력을 동원해서 외적의 위협과 싸움으로써 국가의 존립을 보증하기 위한 기본조건”이라는 성명을 발표해 국공합작을 승인했다.
모택동은 9월 29일 ‘국공합작 성립 후의 절박한 임무’라는 문건에서 “중국공산당의 합법적 지위를 인정하는 장개석씨의 담화는 너무 오래 지연되어 유감스럽기는 하지만”이라고 장개석을 겨냥해 한마디 토를 달면서도 국공합작을 반겼다.
중국인들의 열화 같은 환영 속에 제2차 국공합작이 성립됨으로써 일본은 전혀 다른 중국 정세에 직면하게 됐지만 일본 수뇌부 중 이런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인사는 없었다. 모택동이 같은 글에서 “일본 침략자가 양당(兩黨)의 통일전선이 결렬됐을 때는 총 한 방 쏘지 않고도 동북 4성(만주)을 탈취할 수 있었다고 한다면 양당의 통일전선이 다시 결성된 오늘에 와서는 그들은 피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는 중국 영토를 탈취하지 못할 것”이라고 호언한 것처럼 더 이상 과거의 중국이 아니었다.
중일전쟁은 국민당의 토벌에 쫓기던 공산당을 살린 것은 물론 이후 전 중국을 장악할 수 있는 토대를 모택동에게 제공해주었다. 모택동은 1937년 가을 섬북(陝北)으로 출발하는 팔로군에게 “중일전쟁은 중국공산당 발전의 가장 좋은 기회”라며 “우리의 정책은 7분(分) 발전(發展), 2분(分) 응부(應付), 1분(分) 항일”이라고 강연했다. 중공(中共)의 역량 가운데 70%로는 공산당의 자체 발전을 꾀하고, 20%는 국민당
의 요구에 응해서 내주고, 10%만 항일에 쓰겠다는 뜻이었다(金俊燁, 中國共産黨史, 1961).
전쟁 수렁 깊어지는데 日 본토선 기고만장
두 소위가 100명의 머리를 먼저 베기 경쟁을 벌였다는 동경일일신보 1937년 12월 13일 보도 내용
일본 수뇌부의 희망과는 달리 일본은 이제 모택동의 말대로 ‘피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는 중국 영토를 탈취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일본군은 11월에야 항주만(杭州灣)에 대병력을 상륙시켜 겨우 상해를 점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상해를 빠져나간 군사들은 국민정부의 수도 남경으로 집결했다. 마쓰이(松井石根)가 이끄는 상해파견군과 제10군이 또다시 상부의 진격명령서도 없이 남경으로 진격하자 참모본부는 부랴부랴 중지나방면군(中支那方面軍)이란 명칭을 새로 부과해서 남경 점령을 지시했다.
남경만 점령하면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이 일본이 가진 전략의 전부였다. 장개석은 중국군의 자체 역량으로 남경을 방어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11월 20일 당생지(唐生智)를 남경방위사령관으로 임명하고는 한구(漢口)를 임시수도로 삼아 중앙기관을 이전했다. 이와 함께 중경(重慶) 천도를 선언했다. 남경을 점령하더라도 일본군은 종전은커녕 다시 한구와 중경까지 점령해야 했다.
일본군은 공군의 폭격까지 수반한 대공세 끝에 12월 7일 남경 외곽의 저지선을 돌파하고 12월 9일 남경을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다음날부터 총공격을 개시해 사흘 후인 13일 남경을 점령했다.
그 이전부터 주변 촌락에서 일본군의 살상행위가 보고됐는데, 남경 점령 후 6주간에 걸쳐 무자비한 학살극이 벌어진 것이 ‘남경학살(南京虐殺)’이었다. 성내(城內)는 주로 나카지마 게사고(中島今朝吾)가 지휘하는 16사단이 학살의 주역이었다.
1939년 일본 육군성이 작성한 『비밀문서 제404호』가 ‘어느 중대장은 강간 후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돈을 쥐여주든지 아니면 그냥 죽이도록 하라고 지시했다’며 “군인들을 하나하나 조사하니 모두 강도살인, 강도강간 범죄자들뿐이었다”고 자인했을 정도였다.
학살 규모에 대해 중국 측은 30만 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일본의 동맹통신사(同盟通信社)에서 1938~39년 발간된 『시사연감(時事年鑑)』 등에는 “적방(敵方:중국 측) 유기 사체(遺棄死体) 8만4000, 포로 1만500”이라고 적시하고 있어 일본 측 주장을 따르더라도 엄청난 학살극이 벌어졌음을 알 수 있다. 무사귀환을 바라는 천인침의 장본인들은 살인귀·강간귀로 변해버렸다.
남경을 점령했지만 종전(終戰)은 요원했다. 장개석이 이끄는 중국군은 무한삼진(武漢三鎭)으로 불리는 양자강 내륙 유역의 한구(漢口)·무창(武昌)·한양(漢陽)으로 주력부대를 포진시켜 항일을 다짐하고 있었다. 게다가 일본군이 점령한 도시들은 점(點)에 불과했다. 점과 점 사이를 잇는 선(線)을 장악하지 못했으므로 선에 의해 거꾸로 포위당한 형국이었다.
일본 본토에선 연일 승전고가 울려 퍼졌지만 정작 일본군은 헤어날 수 없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수렁으로 빠져들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기고만장하는 일본 정계와 군부 수뇌부의 착각이었다.
5. 북방정책서 남방정책으로- 관동군, 몽골 넘보다 ‘노몬한 사건’으로 소련에 혼쭐
1930년대 일본의 군부는 물론 정계에도 ‘짝퉁’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들이 득실거렸다. 이시하라가 상부의 명령 없이 만주사변을 도발한 것이 만주국 건국이란 찬란한(?) 결과물로 나타나자 그의 방식을 모방하는 붐이 마약처럼 일본 지배층에 번진 것이었다.
노몬한의 소련군 탱크부대. 노몬한 전투는 과대포장 되었던 일본군의 진짜 실력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사진가 권태균]
일본이 국민정부 수도인 남경(南京)만 함락하면 전 중국을 지배할 수 있으리라고 예상했던 것은 만주국 학습효과에 불과했다.
그러나 만주와 중국 본토는 전혀 달랐다. 일본군이 1937년 12월 남경을 함락시켰지만 장개석은 내륙 깊숙한 중경(重慶)을 임시수도로 선포했다. 정부기관을 양자강 유역의 한구(漢口)로 옮겨놓고도 중경을 수도로 선포한 것은 한구가 점령당하더라도 끝까지 싸우겠다는 의지의 표시였다.
국민당 주력군은 한구를 중심으로 하는 무한삼진(武漢三鎭:한구·무창·한양)에 포진해 일본군과의 결전을 다짐하고 있었다.
국공합작 뒤 국민당과 공산당은 내전을 중지하고 항일에 나섰지만 양당의 처지는 판이했다. 모택동은 ‘지구전에 대하여(論持久戰)’에서 장개석이 진지전(陣地戰)을 전개했다고 비판했지만 집권당이었던 국민당이 주요 도시를 공격하는 일본군에 맞서 싸우지 않고 도망부터 갈 수는 없었다.
반면에 국민혁명군 팔로군(八路軍)과 신사군(新四軍)으로 개편된 홍군(紅軍)은 일본군과 전면전을 치를 필요가 없었다. 모택동의 유명한 16자 전법은 이런 상황에서 나온 것이었다. “적이 전진하면 우리는 퇴각한다(敵進我退), 적이 멈추면 우리는 적을 교란시킨다(敵止我搖), 적이 피곤해하면 우리는 타격한다(敵疲我打), 동쪽을 치는 척하고 서쪽을 공격한다(聲東擊西)’의 16자 전법은 공산당의 역량을 보존하면서 일본군의 진을 빼놓는 전략이었다.
팔로군 총사령 주덕(朱德)의 ‘적이 공격하면 우리는 퇴각한다((敵進我退), 적이 주둔하면 우리는 소요를 일으킨다(敵駐我騷), 적이 후퇴하면 쫓아간다(敵退我追)’는 전략도 마찬가지였다. 일본군이 공격하면 공산당군은 이미 도망간 뒤였다. 그래서 주둔하면 주위가 소란한 운동전(運動戰)을 전개했다. 그러다가 후퇴하면 곧바로 공산당군의 진지가 되어버렸다.
日 배상금 요구로 ‘트라우트만 조정’ 결렬
중국 점령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일본군이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참모본부는 모처럼 자존심을 접고 강화협상에 나섰다. 1937년 말 ‘트라우트만 조정(調停)’이라고 불리는 재중 독일대사 트라우트만(Oskar P. Trautmann)의 화평공작이 그것이다.
참모본부 차장 겸 육군대학 교장이었던 다다 하야오(多田駿)와 이시하라 간지 등이 화평공작에 적극적이었다. 다다 하야오도 1938년 북지나방면군(北支那方面軍) 사령관을 맡았다가 패전 후 전범으로 체포되지만 이때는 군부 내 불확전파의 중심인물이었다.
트라우트만의 중재로 장개석의 국민정부와 일본의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정부 사이에 강화협상이 전개되어 거의 성사단계에 이르렀다.
그런데 고노에가 느닷없이 중국 측에 ‘배상’을 요구했다. 남경학살까지 자행한 일본에 배상금까지 쥐여주면 장개석의 국민정부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트라우트만 조정’이 1938년 1월 15일 결렬된 배경이다.
고노에는 다음날 ‘장개석의 국민정부를 상대하지 않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참모차장 다다 하야오가 “보통은 강경해야 할 참모본부가 오히려 겁을 먹었고, 소극적이어야 할 정부가 강경한 것은 정말 기괴하게 느껴진다… 정부는 중국을 가볍게 보고 만주국의 외형만 보고 낙관적으로 생각한다”는 수기를 남긴 것처럼 강화회의를 주도해야 할 고노에가 ‘짝퉁 이시하라’의 대표가 되었던 것이다.
고노에는 패전 후 펴낸 자기변명서인 잃어버린 정치(失まれし政治)에서 “일본제국 정부가 중국 국민정부를 상대하지 않고 일본제국과 제휴하기에 걸맞은 신흥 정권의 수립과 발전을 기대하고 있었고, 그런 후에 양국 국교를 조정하자는 성명이었다”고 고백했다. 부의(溥儀)를 내세워 만주국을 건립한 것처럼 다른 한간(漢奸)을 내세워 괴뢰정부를 수립한 후 국교를 새로 맺으려는 전략이었다.
이에 따라 일본은 남경 점령 다음날인 1937년 12월 14일 북평(北平:북경)에서 일본 유학생 출신의 왕극민(王克敏:1945년 패전 후 옥중 자살)을 정부(政府)위원장, 도쿄제대 의학박사 출신의 양이화(湯爾和:1878~1940)를 의정(議政)위원장으로 삼은 이른바 중화민국 임시정부(화북 임시정부)를 출범시켰다.
이 정부는 1940년 3월 20일 남경에서 국민정부의 제4기 행정원 원장(1932~35)이었던 왕정위(汪精衛:汪兆銘)를 주석 겸 행정원 원장으로 삼는 중화민국 국민정부로 개편되었다.
1 노몬한의 일본제 89식 전차. 2 노몬한에서 포로가 된 일본군. 노몬한 전투의 주력부대인 일본군 23사단은 와해되었다.
그러나 대다수 중국민에게 이 정부들은 일제의 괴뢰정부였고 장개석의 국민정부가 유일한 합법정부였다.
협상이 결렬된 채 전선이 고착화되자 일본은 드디어 1938년 8월 한구(漢口) 진격 명령을 내렸다. 한구를 점령하면 전 중국을 지배하리라는 망상에서 나온 명령이었다.
한구 진격은 일본군의 전 역량을 동원한 것이었다. 지나파견군 하다 슌로쿠(畑俊六:패전 후 전범재판에서 종신형 선고) 대장 산하에 히가시(東九邇稔彦:왕족, 패전 직후 총리 역임) 중장이 이끄는 제2군 소속 3개 사단과 오카무라(岡村寧次) 중장이 이끄는 제11군의 3개 사단 외에 지나파견군 직할 4개 사단, 1항공군단, 1기병여단 등 모두 30여만 명으로 구성된 대부대였다. 그러나 이런 대부대를 동원했음에도 일본군은 10월 25일 중국군이 철수하고 나서야 겨우 한구를 점령할 수 있었다.
한구 함락 소식에 일본 전역은 열광의 도가니로 변했다. 전국적으로 축하 제등행렬이 이어졌다. 일본인들은 이제 중국을 다 점령한 것처럼 들떴지만 일본의 중국 침략으로 가장 큰 수혜를 입은 모택동은 6개월 전인 1938년 5월 말 연안(延安) 항일전쟁연구회에서 ‘지구전에 대하여(論持久戰)’란 유명한 연설로 일본군의 이런 기대에 코웃음을 쳤다.
모택동은 “중일전쟁은 지구전이고 종국적 승리는 중국의 것”이라고 전제하면서 지구전을 세 단계로 나누었다. “제1단계는 적이 전략적으로 진공하고 우리가 전략적으로 방어하는 시기이며, 제2단계는 적이 전략적으로 수비를 하고 우리가 역공을 준비하는 시기, 제3단계는 우리가 전략적으로 공격하고 적이 전략적으로 퇴각하는 시기”라고 나누면서 아직 1단계도 끝나지 않았다고 갈파했다.
종전은커녕 본격적 전쟁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모택동의 말대로 무한을 점령했지만 전쟁은 갈수록 치열해졌다. 헤어날 수 없는 수렁, 즉 지구전에 빠져버린 것이다.
주코프 이끈 제57군단, 화력 앞세워 승리
이런 상황에서 일본군의 진짜 실력이 드러나는 노몬한 사건이 발생했다. 1939년 5월 만주 서북부 노몬한에서 소련과 충돌한 것이다. 참모차장 다다 하야오나 작전부장 이시하라 간지가 확전을 반대했던 것은 소련 때문이었다.
만주국은 소련 및 소련의 영향력 아래 있는 몽골인민공화국과 무려 4000㎞에 달하는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만주국을 인정하지 않았던 소련은 국경선을 새로 획정하지 않고 청나라 때 국경선을 고수했다.
일본 육군 지도부는 몽골의 배후에 소련이 있었기 때문에 관동군에 가능하면 분쟁을 일으키지 말라고 지시했지만 짝퉁 이시하라 간지들이 득실거렸던 관동군에선 여차하면 소련과 붙기로 내부 방침을 정했다.
몽골은 만주 서북부 호롱바일 초원 전부를 영토라고 여겼지만 만주국은 10~20km 정도를 더 차지하는 하루하 강을 국경으로 여겼다. 그래서 충돌한 것이 노몬한 사건인데 1939년 5월의 제1차 사건과 7월의 제2차 사건으로 나뉜다.
육군유년학교 출신의 전쟁기계인 제23사단장 고마쓰하라 미치타로(小松原道太郎) 중장은 "몽골병사 700명이 국경을 침범했다"면서 23사단을 진격시켰다. 히틀러의 소련 침공에 대비하던 스탈린은 독일과 붙기 전에 일본의 콧대를 꺾을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게오르기 주코프를 제57군단장으로 임명해 싸우게 했다.
병력 숫자는 일본이 많았지만 중화기는 소련이 우세했다. 기세 좋게 하루하 강을 건넜던 무적(?)의 관동군 23사단은 전사 7700여 명, 전상(戰傷) 8600여 명, 부상 2300여 명으로 2만여 병력 중 3분의 2 이상이 손실되어 사단 자체가 와해되었다. 제3전차연대 요시마루(吉丸) 대좌는 전사하고, 전차 보병 64연대장 야마가타 대좌와 수색 제23연대장 이오키 중좌가 자결하는 등 대부분의 연대장이 죽고 말았다.
소련도 8000여 명의 전사자를 냈지만 소련과 몽골의 의도대로 호롱바일 초원 전부가 몽골의 영토가 되었으므로 결국은 일본의 패배였다. 한마디로 관동군의 실제 전력이 여실히 드러난 전투였다.
9월 16일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관동군사령관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와 참모장 이소가이 렌스케(磯谷廉介) 중장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옷을 벗었다. 그러나 정작 노몬한 전투를 기획했던 관동군 작전참모 핫토리 다쿠시로(服部卓四郞) 중좌는 육군보병학교로 전근되었다가 1940년 10월 참모본부 작전과장으로 영전했고, 같이 확전을 주장했던 쓰지 마사노부(辻政信)도 참모본부로 부임했다.
노몬한 사건으로 소련에 호되게 당한 이들이 미국·영국과 맞서는 남방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태평양전쟁의 발단이었다. 윗동네를 기웃댔다가 크게 혼난 조직폭력배가 아랫동네를 노리는 식으로 나라의 운명이 흘러가는 이상한 시대였다
6. 병영으로 변한 한·일 - 창씨개명, 반 년 새 1만6천 호서 320만 호로
일본이 군국주의로 가는 길에 가장 먼저 시동을 건 것은 조선 총독 미나미 지로였다. 미나미는 중일전쟁 직후 식민지 한국을 병영(兵營)으로 만들었다. 그 뒤를 따라 일본 본토의 ‘민간 파시스트’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가 국민총동원법을 만들어 전 국민을 군부의 노예로 만들었다.
1935년 5월 이회영의 아들 이규호(李圭虎:이규창)는 엄순봉(嚴舜奉:엄형순, 일제에 사형당함)과 함께 상해의 친일파인 조선거류민회 부회장 이용로(李容魯)를 처단하다가 국내로 끌려와 종로서 고등계 사이가(齊賀)에게 취조를 당했다.
“나를 보고 ‘국어(國語)’할 줄 아느냐고 묻기에 안다고 하니 해보라고 하기에 내가 지금 하는 말이 우리나라 국어가 아니고 또 따로 무슨 국어가 있느냐고 반문하니 사이가가 발끈 화를 내면서 ‘바가야로’를 연발하며 피우던 담배를 수갑 찬 내 손등에 지졌는데 내 손등이 담뱃불로 지글지글 타서 참으로 참기가 어려웠다…사이가는 ‘너는 골수에 박힌 민족의식을 가진 놈이구나’…(『운명의 여진』).”
한국어 말살정책을 펴기 전인 1935년부터 벌써 한국어를 말하면 ‘골수에 박힌 민족의식을 가진 놈’으로 취급했던 것이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면 황도파(皇道派) 파시스트였던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패전 후 A급 전범)가 식민지 한국을 병영(兵營)으로 만드는 전조이기 때문이다.
조선군사령관(1929)을 역임했던 육군대장 미나미는 1936년 8월 조선총독으로 부임해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패전 후 A급 전범으로 종신형)로 교체되는 1942년 5월까지 조선총독을 역임했다. 그는 관동군 때 만났던 시오바라 도키사부로(鹽原時三郞)를 총독부로 데려와 조선총독부 학무국장 대리로 임명한다. 총독부 직제상 국장은 칙임관(勅任官:고등관 2등~1등) 이상만 부임할 수 있었기 때문에 편법으로 ‘대리’를 붙인 것이었다.
황민화 위해 1촌 1신사 운동도 보급
남산에 있던 조선 신궁의 입구(사진 위)와 조감도(아래). 개신교계 중심으로 신사참배 거부 운동이 일어나서 2000여 명이 검거 또는 구속됐으며 주기철 목사 등이 옥중에서 순교·순국했다.
황민화 위해 1촌 1신사 운동도 보급
도쿄제대 법대 출신의 시오바라는 1918~21년 일본 내의 민주화운동인 ‘대정(大正) 데모크라시’에 맞서 ‘흥국(興國)동지회’를 결성했던 극우 파시스트였다. 미나미는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만드는 황민화(皇民化) 정책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그 모사꾼이 ‘반도의 히틀러’로 불렸던 시오바라였다. 미나미는 중일전쟁 직후인 1937년 10월 2일 경성발로 ‘황국신민(皇國臣民)의 서사(誓詞)’를 제정했다. 총독부 학무국 촉탁이었던 이각종(李覺鍾) 같은 친일파도 이 서사 작성에 관여했는데, 아동용과 성인용 두 종류가 있었다.
아동용의 주 내용은 ‘저희들은 대일본제국의 신민(臣民)입니다. 저희들은 합심하여 천황폐하께 충의를 다하겠습니다. 저희들은 인고(忍苦) 단련(鍛鍊)하여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는 것이었다. 모든 학교와 관공서는 물론 일반 가정에서도 매일 아침 ‘황국신민의 서사’를 제창하면서 일왕이 있는 동쪽 일본을 향해 절을 하는 동방요배(東方遙拜)를 강요받았다.
또 한국의 모든 촌락에 한 개 이상의 신사(神社)를 세우겠다는 ‘1면(面:촌) 1신사(神社)’ 운동도 함께 추진되었다. 이런 황민화 정책에서 아주 중요했던 것이 종로서 고등계 사이가가 이규호에게 말했던 국어(國語), 즉 일본어 상용화 정책이었다.
1937년부터 모든 행정기관에 근무하는 한인들은 일본어만 상용해야 했다. 1938년 제3차 조선교육령은 조선어를 선택과목으로 전락시켰고, 1943년 4월에 개정된 제4차 조선교육령에는 조선어 과목 자체를 삭제했다. 전국 각지에 국어(國語:일본어) 강습소가 개설되고, 국어교본(國語敎本)이 배포되었다.
관청에 진정서를 쓸 때 일본어로 쓰지 않으면 접수 자체를 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1938년 한국인 중 일본어 해득자가 12.38%에 불과했으나 1943년에는 22.15%로 증가했다. 그래도 22.15%는 황민화가 요원하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각급 학교에서 한국어를 쓰다가 발각되면 벌금을 내거나 치도곤을 당해야 했다.
어린아이들은 기발한 놀이로 국어상용(國語常用)을 비꼬았다. 한국어와 발음이 같은 일본어를 찾아내는 놀이인데, 한 아이가 “고구마”라고 말하면 다른 아이가 “조선어를 사용했다”면서 선생님에게 이르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면 그 아이는 “나는 조선어 고구마가 아니라 일본어 고구마(小熊:새끼곰)를 말한 것”이라고 응수하는 식이었다.
한국의 병영화(兵營化)는 거꾸로 일본 본토로 파급되었다. 일본 본토의 병영화는 일본군의 진짜 실력(?)이 드러나면서 강화된다는 특징이 있다. 중일전쟁 때 스기야마 하지메(衫山元) 육군대신은 일왕 히로히토에게 ‘사변(事變)은 두 달이면 끝난다’고 상주했지만 자기도취에 불과했다.
일본 군부의 나팔수가 된 언론들은 연일 승전보를 전했지만 일본의 자본, 즉 돈은 본능적으로 일본 군부의 실력을 알아차렸다.
중일전쟁 발발 소식에 도쿄 주식시장의 주가는 폭락했다. 남경 함락 직후 잠시 반등했지만 1938년 1월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총리가 “장개석의 국민정부를 상대하지 않겠다”는 성명을 내자 다시 대폭락했다.
고노에의 성명은 중일전쟁이 장기전으로 갈 것이라고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중일전쟁 장기화에 초조해진 민간 파시스트 고노에가 스기야마 육군대신과 손잡고 만든 것이 1938년 4월의 ‘국민총동원법(國民總動員法)’이었다.
국민총동원법은 일본 국민들을 군부의 노예로 만드는 전 국토의 병영화 법령이었다. 국민총동원법은 제1조에서 ‘전시(또는 전쟁에 준하는 사변을 포함)에 국방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국가의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통제 운용하기 위한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범주가 모호한 포괄적 입법이란 점이다. 제4조는 ‘정부는 전시에 국가 총동원의 필요가 있을 때 칙령으로 정하는 바에 의거해 제국 신민을 징용해서 총동원 업무에 종사시킬 수 있다’고 규정했다. ‘칙령으로 정하는 바’라는 모호한 용어로 인신과 재산을 징발할 수 있었다.
국민총동원법 공포에 일본 증시 대폭락
국민총동원법이 공포되자 주가는 다시 대폭락했다. 그중에서 주식시장에 가장 민감했던 조항은 제11조였다. 이 조항은 두 가지 내용이었는데 하나는 기업의 자금 조달이나 이익 부분의 처분에 대해서도 국가가 개입할 수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금융기관에 대해 강제로 대출이나 채무인수 등을 명령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일본 경제를 자본(資本)의 논리가 아니라 군부(軍部)의 논리대로 통제하겠다는 법이었다.
조선을 먼저 병영화해서 일본 본토에 수출했던 미나미는 국민총동원법이 제정되자 더욱 조선을 옥죄었다. 일제는 식민지 한국에는 메이지 헌법을 적용하지 않았음에도 국민총동원법 같은 악법은 식민지에도 동시에 적용했다.
미나미는 내친김에 창씨(創氏)개명까지 밀어붙였다. 조선총독부는 1939년 11월 제령(制令) 제19호로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을 개정해서 한국 고유의 성씨를 폐지하고 일본식 씨명(氏名)으로 바꾸라고 명령했다.
일본식 성씨가 ‘씨(氏)+명(名)’의 구조라면 한국에선 ‘본관(本貫)+성(姓)+명(名)’ 구조였지만 본관을 표기하지는 않았다. 창씨개명의 논리는 복잡했지만 그 골자는 한 자로 되어 있는 성(姓)을 일본처럼 두 자로 만들라는 것이었다.
미나미는 ‘조선인의 뜨거운 여망’에 의한다고 주장했고 겉으로는 “씨(氏)는 호주(戶主)가 이를 정함”이라고 해서 자발적인 것처럼 호도했지만 사실은 강제 그 자체였다. 1940년 2월에 이를 시행하면서 동년 8월까지 ‘씨(氏)’를 결정해서 제출하라고 명령했다.
거부하면 ‘비국민(非國民)’ 또는 ‘불령선인(不逞鮮人)’의 낙인을 찍어서 경찰 수장(手帳)에 기입해서 사찰하고, 징용 때 우선하거나 식량 배급에서 제외했다. 또한 자녀들의 각급 학교 진학이 거부되었다.
그러나 ‘성(姓)을 갈겠다’는 게 최대의 욕이었던 한국에서 성을 바꾸는 것은 아무리 군사력에 의지한다고 해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실시 첫 달인 1940년 2월 호적총수 428만2754호 중 0.36%인 1만5746호만 개명했다.
다급해진 총독부는 행정관서와 경찰 등의 공조직과 중일전쟁 1주년에 만들어진 친일단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같은 친일 사조직을 동원해 개명을 독려해서 8월까지 320만116호를 달성했다. 호적총수의 무려 79%였다.
창씨개명은 수많은 일화를 낳았다. 이광수는 1940년 2월 20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쓴 ‘창씨와 나’라는 글에서 ‘향산광랑(香山光浪:가야마 미쓰로)이 조금 더 천황의 신민(臣民)답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라면서 성은 물론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바꾸었다. 윤치호(尹致昊)는 이토 지코(伊東致昊)로 성만 바꾸었고, 김활란(金活蘭)은 아마기 가쓰란(天城活蘭)이라는 종교적 색채의 성씨로 바꿨다.
고육책도 잇따랐다. 전(田)씨나 전(全)씨 등은 조선왕조의 탄압을 피해서 성에 왕(王)자의 흔적을 남긴 고려 왕씨의 후예들이 많았는데, 전규헌(全圭憲)은 고려에서 고(高)자를 따고 고려 수도 송도(松都)에서 송(松)자를 따서 후루마쓰(古松)라고 개명했고, 백낙준(白樂濬)도 시라하라 라쿠준(白原樂濬)으로 백(白)씨의 흔적은 남겼다. 가네다(金田), 가네무라(金村) 등도 마찬가지 경우였다. 요시야마(佳山)라고 최(崔)씨를 파자(破字)한 경우도 있었다.
전남 곡성의 유건영(柳健永)은 “슬프다, 유건영은 천년고족(千年古族)이다…나라가 멸망했을 때 죽지도 못하고 30년간 치욕을 받아왔지만…짐승이 되어 사느니 차라리 깨끗한 죽음을 택하겠다”고 목숨을 끊은 경우도 있었다.
전북 고창의 설진영(薛鎭永)은 아이의 교사가 진급시키지 않겠다고 협박해 아이가 울며 보채자 창씨개명 뒤 다음날에 자결했다. 성을 바꾸었으니 견자(犬子:개새끼)라고 신고한 사람도 있었다고 전한다. 히틀러가 유대인을 멸종시키려 했다면 히로히토와 미나미는 한민족을 일본민족으로 바꾸려고 한 것이다.
7. 삼국동맹 체결 - 독일·이탈리아와 동맹, 동남아 점령 나선 일본
1930~40년대 독일의 히틀러가 명확한 목적 아래 전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넣었다면 일본은 정확한 플랜도 없이 마구 전선을 확대했다는 차이가 있다. 통제되지 않는 군부는 그때그때 만만한 상대를 골라 전선을 확대했다. 그런데 만주 외에는 더 이상 만만한 상대가 없었다.
사이 좋은 삼국’이란 제목의 독일·이탈리아·일본의 방공협정 체결 홍보 엽서. 1938년 소학관(小学館)의 『소학3년생(小学三年生)』에 실린 것이다. 왼쪽이 히틀러, 가운데가 고노에 후미마로, 오른쪽이 무솔리니다. [사진가 권태균]
소설가 김동환(金東煥)이 발행하던 삼천리는 1940년 3월호에 이른바 ‘성전(聖戰) 제4년 기념사’를 게재했다. “지나사변(支那事變:중일전쟁)은 만주 건국과 함께 굳게 약속되어 있는 예정의 코스였다”고 시작하는 이 기념사는 만주국 창건을 ‘세계 유신(維新)의 제1단계’로 치켜세우면서 “머지않은 장래에 완고한 중경(重慶)정부 및 장개석은 자기의 비(非)를 뉘우칠 날이 올 것이요, 현명한 4억의 민중은 저들의 우(愚:어리석음)를 각(覺)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김동환은 중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를 추호도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인 1940년 2월 제75회 일본 제국의회에서 민정당의 사이토 다카오(齊藤融夫)는 일본의 대중국 정책을 강하게 비판해서 큰 소동을 일으켰다. 속기록이 삭제돼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발언 내용은 전해진다.
1938년 1월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총리는 ‘장개석의 국민정부를 상대하지 않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부의(溥儀)가 이끄는 만주국 같은 괴뢰 정부를 만들어서 그 정부와 협상할 계획이었다. 그래서 일제는 남경 점령 직후인 1937년 12월 왕극민(王克敏)을 중심으로 ‘화북 임시정부’를 세웠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일제는 한때 장개석의 정적이었던 왕정위(汪精衛:汪兆銘)를 대표로 새 정부를 구성하는 것으로 방침을 전환했고 1940년 3월 왕정위를 중화민국 국민정부 주석으로 선출해 장개석의 국민정부에 맞서게 했다.
그런데 왕정위 정부가 중국인들의 지지를 받으려면 ‘당근’이 필요했다. 사이토 다카오는 바로 이 ‘당근의 모순’을 지적한 것이었다. 사이토는 ‘중국에 대해 영토나 보상금을 요구하지 않고, 경제상 독점도 요구하지 않으며, 내몽골 부근 이외로부터 일본군이 철수한다’는 것이 사실이냐고 물은 뒤 “수만 명의 영령과 1백 수십 억의 전비를 희생한 대사건을 그런 식으로 처리해도 좋은가”라고 질문한 것이다. 한마디로 ‘뭐 하러 전쟁했느냐’는 비판이었다.
1 중일전쟁 전비 조달 채권. 1940년 중일전쟁 장기화로 일본은 극심한 경제난에 시달렸다. 2 화북의 항일벽화. 일본군의 잔혹성을 고발하고 있다.
이에 일본 군부가 ‘성전(聖戰)을 모독했다’고 사이토를 비판하자 군부의 거수기로 전락한 의회는 사이토를 제명했다. 하지만 사이토의 질문은 성전이란 현란한 구호 뒤에 감춰진 중일전쟁의 모순을 그대로 폭로한 셈이었다.
일본, 독·소 불가침조약에 경악
1939년 8월 23일 독일의 히틀러는 소련의 스탈린과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해 일본을 충격에 빠뜨렸다. 히틀러는 공산주의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1936년 일본과 독·일 방공(防共)협정을 체결한 데 이어, 이듬해에는 이탈리아까지 포함하는 독·이·일(獨伊日) 방공협정을 체결했다.
그런 히틀러가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과 상호불가침조약을 체결했으니 경악하는 것도 당연했다. 독·소 불가침조약은 좌우 전체주의 수괴들이 서로 손잡은 세기의 사건이었다.
스탈린은 소련 공산당의 하부기관으로 전락한 코민테른을 통해 전 세계 사회주의자들에게 파시즘에 대항해 부르주아지 및 지주와도 손을 잡으라는 ‘반파쇼 인민민주주의 전선’을 강요해놓고 자신은 파시스트 수괴 히틀러와 손을 잡은 것이었다. 독·소 불가침조약에는 폴란드 및 동유럽을 소련과 독일이 분할한다는 비밀의정서가 첨부돼 있었다.
1938년에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한 히틀러는 폴란드에 눈독을 들였는데 폴란드는 이미 영국·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있었다. 그런데 히틀러에게 남은 변수는 영국과 프랑스가 아니라 소련이었다. 그래서 히틀러는 소련을 묶어둔 채 영국·프랑스와 전쟁하기 위해 스탈린에게 여러 차례 조약 체결을 권유했고, 스탈린이 “불가침조약이 우리 양국 간 정치관계 개선에 결정적 전기가 되기를 바란다”는 친서를 보냈던 것이다.
비밀의정서에 따라 독일은 1939년 9월 1일 폴란드 서쪽을 침공했고, 소련도 같은 달 17일 폴란드 동쪽을 침공해 폴란드를 나눠가졌다. 독일은 내친김에 1940년 4월부터 덴마크, 노르웨이,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를 점령했다.
또한 프랑스가 자랑하던 마지노선을 단숨에 무력화시키고, 덩게르크 해안에서 연합군 주력 부대를 패퇴시켰다. 독일군은 패주하는 프랑스군을 쫓아 6월 14일 파리를 점령했고, 6월 17일 프랑스 페탱은 비시에서 신정부를 수립해 그날로 독일에 항복했다.
일본은 독·소 불가침조약에는 경악했지만 독일의 눈부신 서전 승리에 도취되었다. 그래서 일본은 1940년 7월 민간 파시스트 고노에 후미마로를 다시 총리로 선택했고, 고노에는 육군유년학교 출신의 전쟁기계 도조 히데키(東條英機:A급 전범으로 처형) 등 군부와 사전에 논의해 7월 26일 ‘기본 국책요강’을 결정했다.
기본 국책요강은 “세계는 이제 역사적 일대 전환기에 처해 있다”며 “대동아 신질서 건설”을 천명했다. 8월 17일에는 ‘세계 정세 추이에 따른 시국처리 요강’을 결정했는데 그 골자는 독일·이탈리아와 ‘삼국동맹’을 결성하겠다는 것이었다.
전 지구적 차원의 ‘파시스트 연합전선’을 구축하겠다는 뜻인데, 이는 1939년 1월 히라누마 기이치로(沼騏一郞) 내각 때 히틀러가 이미 제의했던 내용이었다. 당시 일본이 선뜻 가담하지 못했던 이유는 ‘한 동맹국이 전쟁할 경우 자동으로 참전해야 한다’는 내용 때문이었다. 히틀러가 영국이나 미국과 전쟁할 경우 일본도 즉각 참전해야 할 의무가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일본이 아시아의 맹주가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영·일동맹과 가쓰라-태프트 비밀조약이 말해주는 것처럼 미국의 지지가 있었다. 그래서 영·미와의 전쟁에는 일본 내에서도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일본 군부는 일왕 히로히토에게 ‘독·이·일 협정체결에 관한 대본영 육군부의 의견’이란 문서를 올려서 “본 협정은 원래 차기 세계대전에 대비… 이런 정치전략상 소련과 영·미를 격파하는 것이 차기 대전의 근본 방침임과 동시에 동아(東亞)신질서 건설에 부과된 문제”라면서 동맹 체결을 주장했다. 일본 군부와 우익 세력들은 히틀러의 승전을 자신의 승전으로 착각한 채 “이러다가 버스를 놓치겠다”면서 동맹 체결을 목청 높여 주창했다.
친미·친영파였던 추밀원 고문 이시이 기쿠지로(石井菊次郎)가 “독일과 조약을 맺어서 이익 본 나라가 없다… 일본과 방공협정을 체결해 놓고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한 것은 명백한 모순”이라고 반대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렇게 1940년 9월 27일 ‘독·이·일 삼국동맹’이 체결되었다.
日 인도차이나 점령 뒤 美 압박 거세져
조약의 주 내용은 ‘일본은 독일과 이탈리아가 유럽에 신질서를 건설하는 것을 확인하고, 독일과 이탈리아는 일본이 아시아에 신질서를 건설하는 것을 확인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중일전쟁 또는 유럽 전쟁에 현재 참가하고 있지 않은 국가가 동맹국의 어느 나라를 공격할 경우 삼국은 정치적·경제적·군사적 방법에 의거해 서로 원조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현재 참가하고 있지 않은 국가’란 미국을 뜻했다.
반면 소련에 대한 내용은 누락되었다. 삼국동맹 체결 5개월 전인 4월 13일 일본과 소련이 ‘소·일 중립조약’을 체결한 영향도 있었지만 상부 명령 없는 진격이 장기였던 일본군이 이길 자신이 있었다면 소련에 대한 내용을 누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1941년 6월 히틀러가 선전포고 없이 소련을 침공했어도 천하무적이라고 자랑하던 만주의 관동군은 얼어붙어서 꼼짝하지 못했다. 노몬한에서 소련군에게 혼쭐난 일본군은 북쪽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아직 싸워보지 않은 미국과 붙어볼 생각에 남쪽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삼국동맹 체결 직전 일왕 히로히토는 “만일 미국과 전쟁해야 할 경우에 해군은 어떠한가? 도상 연습 때 미·일 해전에서 좋지 않은 성적이 나왔다는데 괜찮은가?”라고 물었다. 해군대학에서 실시한 도상 연습에서 일본 해군은 미 해군에 번번이 패전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삼국동맹을 문제 해결의 만능키로 여긴 일본은 1940년 9월 23일 중국으로 들어가는 군수물자 지원을 차단한다는 명분으로 베트남을 침공했다. 이때도 일본군의 장기인 상부 명령 없는 무단침공이었다. 당초 일본은 독일에 항복한 프랑스 페탱 정부와 협상해서 베트남에 무혈 입성할 계획이었고, 페탱 정부는 승인하기로 돼 있었다.
그러나 참모본부 제1부장 도미나가 교지(富永恭次)는 남지나(南支那)방면군 사령관 안도 리기치(安藤利吉:패전 후 중화민국 정부에 억류 후 음독자살)에게 먼저 진격할 것을 권유했고, 총격전이 벌어지자 일본은 또다시 전 세계의 비난 대상이 되었다.
일본은 1941년 1월 안도 리기치를 잠시 예비역으로 편입시켰다가 같은 해 11월 대만군 사령관으로 복귀시키고 대만총독도 겸임시켰다. 후일담이지만 1945년 전황이 불리해지자 제4항공군 사령관 도미나가는 마닐라에서 참모들과 기생들, 위스키 등을 비행기에 싣고 안도가 총독으로 있는 대만으로 도주했다. 지휘관을 잃고 버려진 1만4000여 명의 병사는 대부분 전사했다.
일본이 인도차이나반도를 점령하자 미국이 강하게 대응하기 시작했다. 미국이 1940년 7월 항공기용 가솔린 수출을 제한한 데 이어 9월에는 고철과 철강 수출을 금지시키자 일본 내에서 전쟁불사론이 불거졌다. 드디어 이시하라 간지가 ‘세계최종전쟁론’에서 예상한 대로 일본과 미국의 최후 결전이 다가온 것이다.
세계최종전쟁론에 따르면 일본은 중국은 물론 소련도 다 쓰러뜨리고 마지막 남은 미국과 세계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아직 소련은커녕 중국도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또다시 미국과의 전쟁에 나선 것이다
8. 대미 개전론 공방 -‘군부 파시스트’ 도조 내각 개전 결정 … 日, 진주만 기습
때로 역사는 합리적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중국전선에서 발목이 잡힌 채로 미국을 공격했던 일본이 이를 말해 준다. 중일전쟁으로 실력이 드러난 일본은 상처를 극소화하면서 정치적 퇴각을 모색해야 했다. 그러나 일본은 거꾸로 대미(對美) 전면전이라는 최악의 거보를 내디뎠다.
1943년 12월 7일(미국시간) 하와이 진주만 습격 때 격침된 오클라호마호의 잔해. [사진가 권태균]
1941년 4월 13일 오후 5시 모스크바역. 스탈린과 외무상 모로토프가 일본 외무대신 마쓰오카 요스케(松岡洋右: A급 전범으로 재판 중 병사)를 배웅했다. 그루지야 출신의 스탈린은 마쓰오카에게 “우리는 아시아인”이라고 속삭였고 일본인으로서는 드물게 기독교도였던 ‘민간 파시스트’ 마쓰오카는 이제 마음 놓고 남방으로 진출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마쓰오카는 이날 5년 기한의 ‘소·일(蘇日) 중립조약’을 체결했다. ‘소·일 중립조약’ 제1조는 “양국 영토의 보전 및 불가침을 존중한다”는 것이었는데, 조약 체결 직후 스탈린은 일본 무관(武官)에게 “일본은 이제 안심하고 남진할 수 있겠군”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스탈린은 1939년 8월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었지만 히틀러를 믿지 않았다. 스탈린은 독일이 쳐들어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일본을 묶어두기 위해 ‘소·일 중립조약’을 체결한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두 달 후인 1941년 6월 22일 히틀러는 전격적으로 소련을 침공했다. 이번에도 히틀러는 동맹국인 일본에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았다.
그런데 소·일 중립조약을 체결한 뒤 영웅 대접을 받았던 마쓰오카는 독일의 소련 침공 소식을 듣자 갑자기 태도가 돌변했다. 6월 27일 열린 대본영(大本營) 회의에서 느닷없이 “소련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오히려 스기야마 하지메(衫山元) 참모총장이 “지금 당장 공격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발을 뺐다. 중국전선도 정리하지 못한 상황에서 노몬한에서 크게 혼쭐난 소련까지 공격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미·영(美英) 선제공격론이었다. 미·영 선제공격론은 누가 봐도 무리한 주장이었다. 현대전은 군사전일 뿐만 아니라 경제전쟁이기도 했다. 1941년 미국의 철강 생산량은 7500만t, 영국은 1250만t인 데 비해 일본은 700만t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일본은 1941년 7월부터 12월까지 네 차례의 어전회의를 열어 대미 개전을 논의했다. 1차는 7월 2일, 2차는 9월 6일, 3차는 11월 5일, 4차는 12월 1일이었다. 1차, 2차 어전회의 때는 민간 파시스트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가 수상이었고, 3차 어전회의 때부터는 새로 수상이 된 군부 파시스트 도조 히데키(東條英機)가 수상이었다.
1 진주만의 건조도크에 있는 펜실베니아호, 앞에 있는 구축함은 다운스호와 캇신호. 2 ‘진주만 공격에 보복하자’는 내용의 미국 포스터
대미 회담 물밑으로 전쟁 준비 착착
제1차 어전회의에서 히로히토와 고노에는 “제국은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고… 지나사변(중일전쟁) 처리에 매진하고… 남방진출의 발걸음을 내딛는다. 또 정세의 추이에 따라 북방문제를 해결한다… 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대영·미전도 그만둘 수 없다”고 결정했다.
한마디로 수퍼맨이 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중일전쟁은 계속하고 상황에 따라 북방의 소련도 공격하고 남방의 미·영과도 맞붙겠다는 뜻이었다.
2차 어전회의 하루 전날 히로히토는 스기야마 참모총장과 나가노 군령부총장 등을 불러 ‘미국과 전쟁하면 육군은 어느 정도 기간 안에 정리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가?’라고 물었다.
스기야마가 ‘남쪽 방면만 한다면 3개월 안에 정리할 수 있습니다’라고 답변하자 히로히토는 ‘지나사변(支那事變:중일전쟁) 때 육군대신이었던 자네는 1개월 정도면 정리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4년이나 끌었는데도 아직 정리가 안 되지 않았는가?’라고 재차 물었다.
스기야마는 ‘지나(중국)는 오지가 넓어서 예상과 달리 작전이 잘 진행되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히로히토는 ‘태평양은 더 넓지 않은가? 무슨 확신으로 3개월이라고 말하는가?’라고 또다시 물었고 스기야마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는 고노에 후미마로가 전후에 자신의 전쟁 책임을 군부에 떠넘기기 위해 쓴 회고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날짜 육군 대본영 기밀일지에는 ‘약간 긴장감이 돌긴 했지만 어전회의에 대해서 두 총장(스기야마와 나가노 군령부총장)의 답변을 듣고 천황이 가납했기에 모두 안도했다’고 적고 있다. 만주사변 이후 패전 때까지 일왕 히로히토는 기회주의로 일관했다.
고노에 내각의 서기관장(書記官長)이었다가 패전 후 자민당 의원이 된 도미타 겐지(富田健治)는 히로히토에 대해 “(대미)전쟁에 반대하셨지만 때로는 약간씩 개전 쪽으로 가까워진다고 생각될 때도 있었다”라고 말했다.
일본의 중국과 동남아 침략에 대해 미국이 강경하게 원상회복을 요구하자 일본은 두 방면으로 대처했다. 미국과 양해안 체결을 위한 회담을 진행하는 한편, 물밑으론 전쟁 준비에 나섰다.
미·일 회담에서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①모든 나라의 영토와 주권 존중 ②내정불간섭 ③모든 나라의 평등원칙 ④태평양의 현상유지’라는 4원칙을 들고 나왔다. 중국은 물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철수하라는 요구였다.
1941년 10월 2일 미국은 이 4원칙을 재차 확인하면서 중국 및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반도에서 일본군의 전면 철수를 요구했다. 이 내용이 알려지자 일본은 들끓었다. 육군대신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A급 전범으로 처형)는 “중국 철병은 인간으로 치면 심장이 멎는 것으로서 4년 동안 싸웠던 지나사변의 성과가 제로가 되어 만주국이 위험하게 되고 조선을 국방의 최전선으로 삼는 것도 불가능해진다”면서 대미 개전(開戰)을 주장했다.
‘조선을 국방의 최전선으로 삼는 것도 불가능해진다’는 말은 의미심장했다. 식민지 한국도 유지할 수 없게 된다는 뜻으로서 일본 제국의 붕괴를 뜻하기 때문이었다. 연일 승전고를 울리고 있다고 선전하던 중국전선에서 느닷없이 철수하면 만주국과 식민지 한국까지 도미노처럼 무너질 것이란 우려였다. 기세 좋게 중국에 쳐들어갔다가 진짜 실력이 드러나면서 제국 유지 자체가 위기에 빠진 것이었다.
대미 개전론을 놓고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민간 파시스트 고노에 내각이 무너졌는데 10월 18일 그 뒤를 이은 것은 군부 파시스트 도조 히데키 내각이었다. 집단적으로 이성이 마비된 상태였다.
제4차 어전회의서 대미 개전 결정
미국과 맞대결할 자신이 없었던 연합함대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는 하와이 선제공격을 주창했다. 야마모토는 ‘수없이 고민하고 연구했는데 개전 벽두 항공 병력을 가지고 적 본영에 쳐들어가 다시 재기하기 힘들 정도의 타격을 가하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항공모함에 몰래 비행기를 싣고 가서 진주만의 미 태평양 함대를 격멸시키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야마모토는 11월 13일 각 함대의 장관과 참모장 등을 히로시마(廣島) 부근의 이와쿠니(岩國) 해군항공대로 집결시켜 “12월 ○일 미·영(美·英)에 대한 전단(戰端)을 열 것이다. ○일은 현재로선 12월 8일로 예정되어 있다”고 하달했다.
이틀 후인 11월 15일 열린 3차 어전회의에서 ‘12월 1일 0시를 기한으로 대미 교섭을 중단한다’는 이른바 ‘제국국책수행요령’이 결정되었다. 12월 1일까지 대미 협상이 타결되지 않으면 선제공격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11월 26일 미국의 코델 헐(Cordell Hull: 1945년 노벨평화상 수상) 국무장관은 ‘헐 노트’를 일본 측에 전달했다. ‘중국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일본군의 전면 철수, 미국은 중국에서 장개석 정권만을 인정, 미·일 양국 정부는 중국에서 일체의 치외법권 포기, 제3국과 체결한 협정을 태평양 지역의 평화유지와 충돌하는 방향으로 발동하지 않을 것’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 1931년의 만주사변 이전으로 아시아를 되돌리라는 요구였다.
특히 중국 철수 요구는 일제가 세운 왕조명(汪兆銘:왕정위) 괴뢰정권은 물론 부의(溥儀)의 만주국도 해체하라는 것이었다. 비록 한국을 강제 점령한 1910년 이전으로 되돌리라고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일본의 항복을 요구한 셈이었다.
12월 1일 열린 4차 어전회의에서 대미 개전 결정이 내려졌고 연합함대사령관 야마모토는 전군에 “니이타카 산에 올라가라 1208”이라는 암호 명령을 하달했다.
12월 8일(미국시간 7일)은 미국의 일요일이었다. 항공모함 6척, 전함 2척, 순양함 3척, 구축함 11척으로 구성된 일본 함대는 오전 1시30분 두 차례에 걸쳐 353대의 비행기를 발진시켰다. 선전포고는 공격 한 시간 후에야 전달했다. 일요일 새벽에 무방비로 있다가 급습당한 미국해군항공대는 “진주만이 공격당했다. 이것은 연습이 아니다”라는 경보를 발표했다.
일본군 제1진은 애리조나·캘리포니아·웨스트버지니아호 등을 격침시키고 오클라호마호를 전복시켰다. 제2진은 메릴랜드·네바다·테네시·펜실베이니아호에 큰 타격을 입혔고 사망자도 2300명이나 발생했다. 그 밖에도 함선 18척이 침몰되거나 큰 손상을 입었고 180여 대가 넘는 비행기가 파괴되었다. 태평양 함대 소속 항공모함 3대는 진주만에 없었기 때문에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다음날 상·하 양원 합동연설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은 12월 7일(미국시간)을 ‘치욕의 날(the day of infamy)’로 명명하고 ‘미국과 일본 사이의 거리를 생각하면 일본의 공격은 며칠, 아니 몇 주 전부터 계획되었다는 것이 명백하다’면서 ‘일본은 모략을 꾸며 미국을 속였다’고 비난했다.
상원은 82대 0, 하원은 제1차 세계대전 참전에도 반대했던 지넷 랭킨만 반대해 388대 1로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일본군은 항상 몰래 습격한 전투만 승리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진주만 습격 소식에 일본 전역은 환호의 도가니로 변해버렸다.
9. 무너지는 파시즘 제국 - 전쟁에 미친 일제의 마지막 발악 ‘히노마루벤토’
불나비처럼 뛰어내리는 가미카제 특공대. 일본의 전쟁 기계들은 이미 이길 수 없는 전쟁에 일본은 물론 식민지의 젊은이들을 사지로 내몰았다. [사진가 권태균]
히노마루벤토(日の丸弁当)’라는 것이 있다. 번역하면 ‘일장기 도시락’쯤 될 것이다. 매실장아찌(우메보시) 하나를 도시락 한가운데 박아놓으면 일장기(日章旗)가 되는데 점심때쯤이면 장아찌의 붉은색이 번져나가서 욱일승천기(旭日昇天旗)처럼 보이는 것이다. 일본은 물론 식민지 한국의 학생들도 일제 말기 ‘히노마루벤토’를 싸오라고 강요받았다.
그런데 이는 민간단체의 주장이 아니다. 1939년 8월 8일 히라누마 기이치로(平沼驥一郞) 내각에서 이른바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을 더욱 강화하는 차원에서 매월 1일을 ‘흥아봉공일(興亞奉公日)’로 정하면서 학생들에게 강요했던 것이다. 또한 모든 국민에게도 국 하나와 반찬 한 가지만 먹는 ‘일즙일채(一汁一菜)’를 요구했다.
남자의 장발을 금지시키고 여성의 파마도 금지시켰다. 어린 학생들은 파마를 한 여성이 지나가면 둘러싸고 ‘파마에 불이 붙으면 금방 대머리~’따위 노래를 부르면서 놀려댔다. 영어 추방운동도 전개해서 ‘미식축구는 갑옷을 입고 하는 구기라는 뜻의 개구(鎧球), 파마는 전발(電髮), 페니실린은 벽소(碧素)’ 등으로 바꾸었다. 심지어 전국의 댄스홀까지 모두 폐쇄시켜 온 나라를 엄숙한 군국주의로 몰고 갔다.
그러나 학생들의 도시락에 매실장아찌를 박는다고 일본군이 전투에서 승리해 욱일승천기를 휘날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즙일채 권장은 역으로 그만큼 물자가 부족하다는 뜻에 다름 아니었다.
1940년 일본인들의 신년 인사는 “넉넉합니까?”였다고 『중앙공론(中央公論)』 1940년 1월호는 전하고 있다. 한두 달이면 끝낼 수 있다던 중일전쟁은 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주가는 폭락했고, 1939년의 큰 가뭄으로 일본 서부와 한국·대만의 쌀 수확마저 줄어들었다.
과달카날 전투(1942년 8월~1943년 3월) 때 파괴된 일본 군함
박춘금 “조선도 지원병 가게 해달라”
본토 일본인들의 불만이 높아가자 일제는 식민지 백성들을 쥐어짜서 불만을 달래야 했다. 1939년 11월의 곡식 강제매입제도, 즉 공출(供出)이 그것이다. 공출이란 곡식 등의 생필품을 총독부에서 강제로 헐값에 매입해 일본으로 보내는 제도였다. 그렇지 않아도 수탈에 시달리던 식민지 백성들은 공출까지 겹쳐서 굶어죽을 지경이 되었다.
『동아일보』 1940년 7월 14일자는 ‘읍·면장의 증명 있어야 보리방아를 찧는다-수확의 4할은 공출하라-’는 기사를 경기도 안성(安城)발로 보도했다. 당국에서 공출에 필요하다면서 안성읍촌 정미소의 30여 대 보리방아를 일제히 정지시켰다는 것이다.
그 결과 굶는 농가가 속출해 ‘읍·면장의 증명서를 가져오는 농가에 한해 보리방아를 찧게 허용한다’는 기사였다. 일본으로 식량을 공출하면서 식민지 한국 백성들이 아사(餓死) 상태에 빠지자 만주 등지에서 들여온 콩깻묵(豆粕) 같은 동물용 사료를 공급했다.
식민지 백성들을 압박하는 것은 공출뿐이 아니었다. 일본 본토에서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을 하는 판국이니 식민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일제는 1941년 2월 제령 제8호로 ‘조선사상범 예방구금령’을 반포했는데, 이는 ‘악법 위의 악법’이었다.
‘악법도 법이다’란 말 속에는 악법이라도 지키기만 하면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는다는 역설이 담겨 있다. 하지만 예방 구금은 아무런 법 위반을 하지 않았어도 마음대로 잡아가둘 수 있다는 희한한 법이었다. 예방구금은 검사의 청구에 따라 재판소 합의부가 결정한다지만 재판소는 허울 뿐이고 검사가 결정권을 갖고 있었다.
이 법의 제10조는 “출두명령에 불응하거나 주거부정·도주·도주의 우려가 있을 때 재판소는 대상자를 강제로 구인할 수 있다”는 것이며,
제11조는 ‘주거부정·도주·도주의 우려가 있는 자는 예방구금소나 감옥에 가수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제17조는 ‘구금기간은 2년이며, 재판소의 결정으로 갱신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아무런 죄가 없어도 2년씩 반복해서 죽을 때까지 투옥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같은 해 3월 8일에는 치안유지법을 개악(改惡)했는데 과거 “국체를 변혁하고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함을 목적으로 결사를 조직하거나 또는 정(情)을 알고 이에 가입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는 조항에서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를 ‘사형 또는 무기징역’으로 상향시켰다.
파시즘이 기승을 부리는 것은 그만큼 종말이 가까워 왔다는 뜻이다. 식민지의 상류층들은 연일 계속되는 일제의 승전보에 취해서 일본이 미국과 싸워도 이길 것으로 착각했다.
폭력배 출신으로 일본의 중의원까지 되었던 박춘금(朴春琴)이 중일전쟁 직후인 1937년 8월 6일 제71제국의회에서 “조선 출생의 일본인은 제국 군인으로 제1선에 서서 일할 수가 없다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라며 조선에 지원병 제도를 시행해 달라고 청원한 것은 일본이 중일전쟁에서 이길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3·1운동의 주역이었던 최린(崔麟)은 대미 개전 직전인 1941년 11월 『삼천리』에 실은 ‘임전애국자(臨戰愛國者)의 대사자후(大獅子吼)!’란 글에서 “문제의 인물은 사실상 장개석(蔣介石)이도 아니요, 영국 수상 처칠도 아닙니다. 오직 미국(米國) 대통령 루스벨트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 루스벨트를 재교육시키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라고 사자후를 토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최린은 루스벨트를 겨냥해 “‘당신이 일본의 국체와 실력을 인식하오’라고 말하고 싶다. ‘대화(大和:야마토)의 정신을 아느냐’고 말하고 싶다”며 자신이 태생부터 일본인인 것처럼 말했다.
역시 33인의 한 명이었던 『동양지광』 사장 박희도(朴熙道)는 1942년 초 ‘미·영 타도 좌담회’의 사회를 보면서 “좌담회를 시작하기 전에 일동 기립하여, 무운장구(武運長久)와 영령에 대해 감사의 묵도를 올렸으면 하는 바입니다(『동양지광』 1942년 2월호)”라고 말했다.
이들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섰던 것은 모두 일본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진주만 습격에 성공한 일본군의 진격 속도가 눈부시게 빨랐다. 히틀러의 독일군이 그랬던 것처럼 일본군도 서전은 항상 승리로 장식했다. 1941년 12월 10일 루손 섬에 상륙했고, 11일에는 괌, 23일에는 웨이크, 25일에는 홍콩을, 1월 2일에는 마닐라를 점령했다.
난관은 영국의 퍼시빌 중장이 8만5000명의 혼성부대를 이끌고 있는 싱가포르였다. 그러나 일본의 야마시타(山下奉文) 중장은 3만5000명을 이끌고 1942년 2월 7일 공격을 시작해 8일 만인 15일에 싱가포르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유럽 전선에 전력을 기울이던 영국은 싱가포르에 약체의 혼성부대를 배치하고 있었지만 싱가포르 함락 소식은 일본이 이길 것이라는 착각을 심어주었다.
싱가포르·말레이시아 화교 대량학살
일본인들은 전후에 1931년의 만주사변부터 패전 때까지 두 번의 큰 기쁨을 맛보았다고 회고하곤 했는데, 1938년 10월의 한구(漢口) 점령, 1942년 2월의 영국령 싱가포르 함락이 그것이었다. 그때마다 제국(帝國)은 열광의 도가니로 변해서 제등행렬이 이어졌고, 곧 중국과 전 세계를 점령할 듯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한구 점령이 중일전쟁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에 불과했던 것처럼 싱가포르 점령도 세계 정복의 끝이 아니라 몰락의 시작에 불과했다. 게다가 야마시타의 일본군은 중국의 국민정부를 지원한다는 혐의를 씌워 화교(華僑)들을 집단 학살했다.
남경학살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싱가포르에서 약 2만5000명, 말레이시아에서 10만여 명의 화교가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시민들이 물건을 훔치다 잡히면 머리를 잘라 접시에 담아 캄파야 시장에 전시했다는 목격자 증언도 있을 정도였다. 이 때문에 야마시타는 패전 후 화교 학살 혐의로 전범재판에서 사형당했다.
싱가포르 점령 후 곧 세계를 점령할 듯한 환호성에 빠졌던 일본인들이 자신의 처지를 깨닫게 되는 데는 넉 달밖에 필요하지 않았다. 1942년 6월 5일 발생한 미드웨이 해전이 그것이다. 미드웨이 해전 역시 일본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었다.
태평양까지 전선을 확대한 일본은 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미드웨이를 점령해서 중간 기지로 삼으려 했다. 미국 항공모함 3척, 일본 항공모함 6척이 각각 순양함 등을 이끌고 맞붙은 미드웨이 해전은 미·일 양군이 서로의 작전을 인지하고 맞붙은 최초의 대규모 전투였다.
결과는 일본 해군의 궤멸이었다. 일본은 항공모함 4척이 격침당했다. 미군은 항공모함 1척만을 잃었는데 전사자도 미군이 307명인 데 비해 일본군은 그 열 배인 3057명이었다. 이 패전으로 일본은 제해권을 완전히 상실했고, 전쟁의 주도권은 미국 쪽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일본 신문들은 사실과 거꾸로 보도했다. 대본영에서는 ‘미 항모 엔터프라이즈와 호넷 격침, 전투기 120대 격추, 아군 피해 항공모함 1척 상실, 1척 대파, 순양함 1척 대파, 미귀환 전투기 35기’라고 발표했고, 일본 국민들은 ‘미드웨이에서도 이겼다는군’이라고 환호했다.
미드웨이 해전은 1941년 12월 8일 진주만 습격으로 시작된 태평양전쟁이 6개월 만에 일본의 패전으로 끝났음을 말해준 것이었다. 이후는 유년군사학교 출신의 전쟁 기계들이 자국의 젊은이들을 사지로 내몰면서 발악한 기간에 불과했다.
10. 멸망하는 제국과 분단 - 관동군 허망한 붕괴가 한반도 분단 단초 되다
그릇된 과거의 족쇄를 끊지 못한 사회는 미래로 갈 수 없게 된다. 현재 동아시아 평화를 위협하는 일본 극우세력들의 뿌리는 일제 말기 군국주의 세력이다. 미국이 승전 후 천황제를 정점으로 한 군국주의 세력을 해소하지 못한 결과 그 후손들이 지금껏 고통을 받는 것이다.
1945년 3월 10일 미군이 대공습을 가한 직후 초토화된 도쿄 시내의 전경. 미 항모에서 발진하는 폭격기들
1945년 1월 8일 일본 궁성 앞 광장에서 관병식(觀兵式)이 거행되었다. ‘대원수 폐하’로 불리던 일왕 히로히토가 참석한 연례행사였지만 이날의 관병식은 서둘러 끝낼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B-52폭격기가 도쿄 상공을 날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이미 제공권(制空權)을 상실했다. 미드웨이 해전에 이어 가미카제(神風) 특공대를 등장시켰던 44년 10월의 레이테 만(灣) 해전에서도 패배해 제해권(制海權)도 빼앗겼다. 미군 잠수함 때문에 수송선(輸送船)도 보낼 수 없었기에 불과 몇 개월 전 기세 좋게 동남아를 점령했던 일본군에선 아사자(餓死者)가 속출했다.
관병식 다음 날인 45년 1월 9일 미군은 필리핀 북부 루손 섬에 상륙해 필리핀 함락을 기정사실로 만들었다. 가미카제 특공대는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지만 6%에 불과했던 성공률로 2500여 명의 젊은이만 희생시켰을 뿐 전세를 바꾸지는 못했다.
일본이 발악하자 미국은 45년 1월 인도와 중국에서 폭격기를 지휘했던 폭격전술의 명장 커티스 머레이 중장을 마리아나 방면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45년 3월 10일 도쿄에 대대적인 야간공습을 실시했는데 과거와 달리 저공 공습이었다.
폭격 후 현장을 시찰하던 히로히토가 시종장 후지타 히사노리(藤田尚徳) 전 해군대장에게 ‘관동대지진보다 훨씬 비참하다. … 도쿄는 초토화되었구나’라고 탄식했을 정도로 제국의 수도는 커다란 피해를 봤다.
히로히토가 이때 항복했다면 5개월 후 원폭 투하의 비극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대본영(大本營)에서 주창하는 ‘본토 대결전’에 기대어 천황직 유지에 미련을 두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맥아더를 찾아간 히로히토. 현인신(現人神)이었던 히로히토가 맥아더 옆에 초라하게 서 있는 모습은 일본 국민에게 충격을 주었다
일제, 황당한 ‘본토 대결전’ 계획 집착
자칭 무적황군(無敵皇軍) 대본영의 ‘본토 대결전’ 계획은 군사적 전문성이 결여된 황당한 것이었다. 대본영은 44년 7월께면 이미 본토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그래서 도쿄로 들어올 수 있는 태평양 연안의 항구 도시 몇 곳에 진지를 구축하라고 명령하고 7월 24일에는 ‘육해군의 이후 작전대강(作戰大綱)’을 하달해 ‘필리핀·쿠릴열도·대만·본토’ 네 방면에서 결전을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이때 이미 ‘본토’가 포함돼 있었다는 것은 상황이 절망적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한때 전세가 뒤집히는 줄 알고 환호했던 사건도 있었다. 44년 10월 대본영은 미군의 오키나와·대만 공격에 맞서던 일본의 기지항공대가 항공모함 10척과 전함 2척을 격침시켰다고 발표했다. 정부는 국민에게 술까지 배급하면서 환호했지만 미숙한 탑승원의 관측 실수에 불과했다.
일본은 45년 1월 20일에는 ‘제국 육해군 작전계획대강’을 작성해 쿠릴열도, 오가사와라 제도(小笠原諸島), 오키나와 이남, 대만 등지를 전연지대(前縁地帯·외곽지역)로 설정했지만 이미 의미 있는 방어 능력을 상실한 지역들이었다.
대본영은 미군이 일본 본토에 상륙하는 시기를 가을께로 예측했다. 그래서 45년 2월 22~25일 『본토결전(本土決戰) 완수 기본요망』을 작성해 3월 말까지 31개 사단, 7월 말까지 43개 사단, 8월 말까지 59개 사단으로 확대하고 국민의용군도 편성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전투능력이 없는 민간인을 군인으로 마구 편제 하는데 불과했을 뿐 그들을 무장시킬 총검도 없었다.
미군이 상륙할 경우에 대비한 대본영의 작전 계획은 ‘모든 수단을 강구해 미군의 제1진을 격파한다’는 단순한 것이다. 모든 수단 중에는 국민을 죽음으로 내모는 인해전술이 포함되어 있었다. 45년 초가 되면 미·영 등의 연합군과 소련군 중 누가 먼저 베를린을 점령할 것인가를 두고 경쟁할 정도로 유럽의 파시스트 히틀러는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일본의 고립은 심화되었다. 독일은 결국 5월 8일 무조건 항복하고 말았다.
45년 2월 4~8일 크림반도의 얄타에서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 소련의 스탈린은 3거두 회담을 열었는데, 이때 루스벨트는 소련의 대일전(對日戰) 참전을 독려했다. 일본이 발악하면서 미군의 희생도 급증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독일 항복 후 ‘2, 3개월 이내에 대일전에 참전하겠다’면서 그 대가로 1904년의 러일전쟁으로 상실한 극동 이권의 반환을 요구했다. 소련은 사회주의의 외피를 쓰고 세계 사회주의자들의 조국을 자처했지만 속내는 슬라브 민족주의의 재현에 지나지 않았다. 소련은 한 번도 자국의 이익을 세계 사회주의 전체의 이익을 위해 포기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소련이 제정 러시아의 이권을 되찾으려면 장개석이 중국 영토 일부를 내주어야 했다. 장개석이 거부하자 스탈린은 대일전에 참전하지 않았다. 45년 4월 12일 루스벨트는 뇌출혈로 쓰러졌고 트루먼이 뒤를 이었다. 더 큰 변수는 7월 중순 미국에서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한 것이었다.
7월 말께 태평양의 일본 해군은 모두 궤멸당했지만 처칠이 “일본제국의 권력은 아직도 패배를 수락하기보다는 집단 할복자살을 택하기로 결정한 군부의 손에 있다”고 말했듯이 일본의 전쟁 기계들은 모두 같이 죽자는 ‘1억 옥쇄’를 전략이라고 내세웠다.
7월 26일 트루먼, 처칠, 장개석, 스탈린이 일본에 최후통첩을 한 장소가 베를린 근교의 포츠담이란 사실은 의미심장했다. 소련은 아직 대일전에 참전하지 않았기에 스탈린은 서명하지 않았지만 ‘군국주의를 일소하고, 연합국이 일본을 점령하며, 한국을 해방시키고, 대만과 만주국은 중국에 반환하며, 남(南)사할린을 소련에 반환하고, 전쟁범죄자를 처벌하고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확립한다’는 포츠담 선언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포츠담 선언에 대해 도조에 이어 총리가 된 스즈키는 “다만 묵살할 뿐이다. 우리들은 전쟁 완수를 위해 노력한다”고 오기를 부렸다.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 외무대신은 소련을 중재자로 삼아 협상하려 했는데, 일본 공격 시기를 저울질 중이던 스탈린을 중재자로 여겼다는 자체가 일본 외교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번스, ‘천황제 유지’ 조건부 항복 거부
미국은 45년 8월 6일 히로시마(廣島)에 원폭을 투하했다. 대본영은 원폭이란 말 대신에 ‘신형폭탄’이라면서 ‘상당한 피해가 발생했다’고만 발표했다. 8월 9일 미국은 나가사키(長崎)에 다시 원폭을 투하했다. 스탈린은 참전 조건을 놓고 장개석과 실랑이하다가는 아시아에서 아무런 이권도 챙기지 못하게 될 것을 우려해 8월 9일 전격적으로 참전했다.
놀라운 사실은 무적 황군(皇軍)을 자처하던 관동군이 변변한 저항 한 번 못해 보고 해체되어 버린 것이다. 지휘체계 자체가 무너져 우왕좌왕하는 것이 자칭 무적 관동군의 실체였다. 히로히토를 비롯한 동양의 파시스트들은 두 차례의 원폭 투하와 소련 참전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8월 10일 일본은 ‘천황의 국가통치 대권에 변경을 가하는 요구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전제 아래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한마디로 천황제만 유지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 국무장관 번스는 ‘천황 및 일본 정부의 국가통치 권한은… 연합국 최고지휘관에게 종속된다. 일본국의 최종 통치 형태는 국민이 자유롭게 표명하는 의지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며 거부했다.
8월 12일 일본 군부는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히로히토는 종전을 결심했다. 자리는 둘째 치고 도쿄에 원폭이 투하될 경우 목숨을 잃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원폭 투하 목표 지역에 도쿄는 들어있지 않았지만 히로히토는 이런 사실을 몰랐다. 그래서 히로히토는 8월 14일의 어전회의에서 무조건 항복을 결정했다.
이때 맥아더가 번스의 답변에 따라 ‘천황제를 해체하고 일왕을 전범으로 처벌’했다면 전후 아시아의 정치 지형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과거가 미래의 발목을 잡는 현재 동아시아 상황의 원죄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8월 15일 히로히토는 “짐은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상을 깊이 생각하여 비상조치로써 시국을 수습하고자 충량한 너희 신민(臣民)에게 고한다. 짐은 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영·중·소 4국에 대해 그 공동선언을 수락할 뜻을 통고케 하였다”면서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태평양전쟁으로 일본은 육군 140만여 명, 해군 41만여 명, 군인 및 군속 155만여 명, 일반 국민 185만여 명을 합쳐 도합 521만여 명의 사망자를 냈지만 단 한 평의 영토도 넓히지 못했다.
게다가 일제는 관동군이 허무하게 무너지면서 한반도가 분단되는 단초를 제공했다. 관동군이 흩어지면서 소련군의 한반도 전역 점령이 시간문제가 된 것이다. 미국은 전략회의를 열고 한반도 분할 점령선에 대해 논의했다. 여기 참여했던 참모본부의 딘 러스크는 이 회의에서 소련에 ‘38도선을 권고하기로 결정했다’고 전하고 있다.
소련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 미군이 현실적으로 주둔할 수 있는 지역보다 훨씬 북쪽이지만 미군 지역 내에 한국의 수도를 포함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딘 러스크는 ‘소련이 38도선을 승낙했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다. 나는 그들이 더욱 남쪽 선을 주장하리라고 생각했다(『United States Department of State』)’고 말했다.
스탈린은 원자폭탄을 가진 미국과 정면대결을 선택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소련이 챙겨야 할 전리품은 유럽에도 많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방과 동시에 남북 분단이 결정되면서 한반도의 해방정국은 실타래처럼 엉키게 되었다.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폐허와 희망
11. 새로운 도전 - 절반만 바뀐 역사, 미·소 군정으로 외세 위력 여전
한국 현대사의 가장 뼈아픈 대목은 광복과 동시에 분단체제가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식민지 시대가 객체였던 것처럼 해방 공간에서도 한국인은 객체였다. 그러나 일제가 쫓겨간 빈 공간을 채울 임무는 한국인들에게 주어졌다. 역사는 해방과 동시에 새로운 과제를 부여했던 것이다.
광복군. 김구(가운데) 선생의 왼쪽이 지청천, 김학규, 오른쪽이 차리석, 한 사람 건너 이시영 등이다. 광복군은 국내 진공작전을 펼치려 했으나 일본의 조기 항복으로 작전이 무산되었다. [사진가 권태균]
일제의 항복 소식에 식민지 한국의 일반 백성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태극기를 흔들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지만 정작 독립운동가들, 특히 해외 인사들의 반응은 달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8월 15일 중국 서안(西安)에서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고는, “이 소식은 내게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라고 토로했다.
백범 김구는 불과 일주일 전인 8월 7일 서안의 광복군 제2지대 본부에서 이청천(李靑天) 광복군 총사령, 이범석(李範奭) 지대장 등과 미국의 OSS(전략정보국) 총책임자인 도너번 소장, OSS 중국 측 책임자인 홀레웰 대령 등과 작전회의를 하고 “오늘부터 아메리카 합중국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이에 적 일본에 항거하는 비밀공작이 시작된다”(『백범일지』)라고 선언했었다.
임정은 총지휘 이범석에게 전국을 3지구로 나눈 국내정진군(國內挺進軍)을 조직하게 했다. 안춘생(安椿生)이 대장(隊長)이었던 제1지구는 평안도반(반장 강정선), 황해도반(반장 송면수), 경기도반(반장 장준하)으로 구성했다. 노태준(盧泰俊)이 대장이었던 제2지구는 충청도반(반장 정일명), 전라도반(반장 박훈)으로, 노복선(盧福善)이 대장이었던 제3구는 함경도반(반장 김용주), 강원도반(반장 김준엽), 경상도반(반장 허영일)으로 구성했다(『독립운동사』6, 김준엽,『장정』).
각 반은 2~4개 조로 나누어 국내로 들어갈 계획이었는데 김구는 그 방법에 대해 “산동(山東)에서 미국 잠수함에 태워 본국으로 들여보내서 국내의 요소를 혹은 파괴하고 혹은 점령한 후에 미국 비행기로 무기를 운반할 계획까지도 미국 육군성과 다 약속이 되었다”고 아쉬워하고 있다.
강원도반 반장이었던 장준하는 “통신장비와 무기와 식량과 휴대품을 갖추어 놓고, 일본 국민복과 일본 종이와 활자로 찍은 신분증을 가졌으며, 비용으로는 금괴(金塊)가 준비되어 있었다…국내 잠입준비는 완료되었고 출발명령만 내리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게 되었다”라고 회고했다.
해방 다음날 서대문 형무소를 나온 사람들과 환영 인파. 일제는 사상범 예방구금령 등으로 무수히 많은 사람을 죄도 없이 가두었다.
이승만, 반공주의자 맥아더의 후원 받아
해로(海路)뿐만 아니라 비행기로도 낙하할 계획이었다. 국내정진군 본부요원으로서 지리산에 낙하할 계획이었던 이재현(李在賢)은 “만약 내렸다면 1개 사단 병력 만드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한국독립운동증언자료집』)”라고 회고했다.
이재현은 ‘8월 9일 정도면 일본이 패망하리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면서 “그때는 모두들 자기가 가겠다고 야단이어서 제비를 뽑았다”고 회고했다. 일본의 패망이 눈앞에 닥친 상황에서 임정 산하 광복군이 초모공작을 하면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자칭 ‘천하무적’ 관동군이 허깨비처럼 저항 한 번 변변히 못해보고 무너진 데다 원자폭탄에 놀란 히로히토가 미군이 일본 본토에 상륙하기도 전에 허겁지겁 항복하면서 국내 진공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그래서 김구는 “수년 동안 애를 써서 참전을 준비한 것도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고 안타까워했던 것이다. 만약 국내 진공작전으로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냈다면 해방 후 분단도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김구의 아쉬움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임정 의정원은 환국 후의 시국수습 방안 ‘14개조 원칙’을 김구 주석 명의로 발표하고 중국 전구사령관 웨드마이어 장군에게 국내 치안 유지 문제 등을 임정에 맡기는 방안 등을 제시했다. 하지만 미국 측은 이를 거부하고 임정 요원들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것을 통보했다.
사태가 이렇게 돌아가자 누가 먼저 귀국해서 정국의 주도권을 잡느냐가 중요해졌다. 임정의 OSS 대원들은 8월 18일 비행기를 타고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했지만 일본군의 체류 거부로 다음날 산동성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런 혼란 속에서 세월은 흘러갔다. 김구 일행이 중경에서 장개석과 부인 송미령(宋美齡)의 성대한 환송식을 받은 후 중국 비행기를 타고 상해에 도착한 것은 해방 후 거의 석 달이 지난 11월 5일이었다. 김구 일행은 상해 홍구공원에서 6000~7000여 명의 교포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감격적인 연설을 했다.
김구를 수행했던 장준하는 ‘김구가 올랐던 단은 바로 그 자신이 윤봉길 의사를 시켜 일본 요인들에게 폭탄을 던지게 했던 그 자리’라면서 “정말 역사가 바뀌어 저 어른이 저 단에 서셨구나”라는 감회를 토로했다.
그러나 역사는 절반만 바뀌었던 것이어서 김구 일행의 귀국은 차일피일 미뤄져 11월 23일에야 미군의 C-47 중형수송기를 타고 개인 자격으로 귀국길에 오를 수 있었다. 어쩌면 해방 후 귀국 때까지 석 달 여드레가 일제 36년보다 더 길었을지도 모른다.
미국에 있던 임정 주미 외교위원부 위원장 이승만은 10월 16일 이미 귀국해 있었다. 미국에 있던 이승만이 김구보다 한 달 이상 빨리 귀국할 수 있었던 것은 같은 반공주의자였던 맥아더의 후원 덕분이었다.
이승만은 8월 27일 맥아더에게 ‘공동점령이나 신탁에는 반대한다’고 전제하면서도 만약 점령이 필요하다면, “미군만의 단독점령을 환영합니다(『Syngman Rhee to MacArthur』)”라는 편지를 썼다.
맥아더는 9월 말 국무부가 요청한 다른 재미 한인들의 귀국 요청은 거부하면서도 유독 이승만의 입국은 허용했다. 또한 이승만이 10월 12일 도쿄에 도착하자 주한 미 군정청 사령관 하지 중장을 도쿄까지 불러들여 만나는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하지는 이후 이승만을 만난 사실을 숨겼지만 이때 이미 이승만-맥아더-하지 사이에 삼각 커넥션이 만들어졌고, 이승만이 중경 임정 요인들보다 한 달 이상 빨리 입국할 수 있었던 건 이 커넥션의 힘이 컸기 때문이다.
미국이 김구와 이승만을 서로 다르게 대접했던 것처럼 소련도 김일성과 연안파(조선의용군)를 달리 대했다. 팔로군 포병사령관 출신의 무정(武亭:김무정)이 포진하고 있던 조선의용군은 해방 후 무장한 채 압록강을 건넜다. 김호(金浩)·김강(金剛) 등이 이끄는 조선의용군 선견종대(先遣從隊) 1000여 명은 45년 10월 12일 신의주 동(東)중학교에 모여 있었다.
그러나 팔로군과 태항산맥을 누비며 항일 투쟁을 전개했던 조선의용군을 기다리는 것은 소련군의 강제 무장해제였다. 김구 일행에게 개인 자격으로 입국하라는 미국의 통보가 임정 요인들의 암울한 미래를 암시했던 것처럼 소련군의 강제 무장해제 역시 조선의용군, 즉 연안파의 암울한 미래를 암시했다.
김일성, 만주·압록강 거쳐 귀국하려다 포기
국내에서 해방 당일부터 발 빠르게 움직인 세력은 사회주의 계열들이었다. 정백(鄭栢)·이영(李英) 등의 ‘서울파’ 계열과 박헌영(朴憲永) 중심의 ‘재건파’ 계열 중에서 먼저 선수를 친 것은 해방 당일 밤 종로 2가 장안빌딩에서 회합을 가진 서울파였다.
그러나 16일경부터 “근로대중의 위대한 지도자 박헌영 선생은 어서 나와 우리를 지도해 달라”는 벽보가 서울 시내 곳곳에 붙기 시작하면서 주도권은 박헌영의 재건파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경성콤그룹 사건(1940~41)의 리더였던 박헌영은 일제 말기 검거를 피해 전라도 광주의 벽돌공장으로 피신해 김성삼(金成三)이라는 가명으로 동지들과 비밀리에 연락하던 중 해방을 맞이했다.
박헌영은 8월 20일 서울 명륜동 김해군의 집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자신이 작성한 『현 정세와 우리의 임무(8월 테제)』를 조선공산당의 잠정적인 정치노선으로 통과시키면서 국내 공산주의 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했지만 이 역시 국내용일 뿐이었다.
대중적으로 인기가 높았던 여운형도 발 빠르게 움직였다. 8월 15일 저녁 여운형·안재홍·이만규·이여성·이상백·정백·최근우 등은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결성하고 여운형을 위원장으로 추대했다. 여운형은 8월 16일 하오 1시께 자신의 집 근처인 휘문중학교 교정으로 몰려든 5000여 군중에게 건준 결성 경과를 알렸다.
건준이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인공) 건국을 선포하자 전국 각지에서 이에 호응해 지방 인민위원회를 결성했다. 그러나 미 군정장관 아널드는 10월 10일 “38도 이남에는 오직 한 정부가 있을 뿐”이라면서 인공을 부인하고 미 군정만이 유일한 정부라고 선언했다.
미국과 이승만의 관계는 소련과 김일성의 관계와 비슷했다. 1940년 가을경 관동군과 만주군에게 쫓겨 소련 영내로 들어간 김일성은 하바롭스크의 야영지에 편성된 88특별저격여단에 소속되었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르면서 88특별저격여단도 광복군처럼 참전을 학수고대했다.
8월 9일 소련이 참전하자 자신들도 싸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관동군이 너무 쉽게 무너지는 바람에 소련은 이들을 동원할 필요가 없었다.
88특별저격여단장 주보중(周保中)은 9월 5일경 이조린(李兆麟)·김일성 등을 하얼빈·연길 등지로 출발시켰다. 김일성 등은 만주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입국함으로써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귀국한 것처럼 만들려고 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목단강에 머물던 김일성은 다시 소련 영내로 들어가 소련군함 ‘푸카초프호’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해서 9월 19일 원산에 상륙했다. 이승만이 맥아더의 후원으로 김구 일행보다 먼저 귀국할 수 있었던 것처럼 김일성도 소련의 후원으로 해외 인사 누구보다 먼저 귀국할 수 있었다.
남북을 점령한 두 강대국의 후원을 받는 이승만과 김일성에게 유리한 정치 환경이 조성되었다. 일본은 물러갔지만 한국은 아직도 외국의 강한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다. 새로운 시련이자 기회의 시작이었다. (‘근대를 말하다’ 끝. )
“자기 귀에 듣기 좋은 역사만 들으려 해선 안 돼”
'근대를 말하다’ 2년 연재 마친 이덕일 소장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52·사진)이 약 2년간 중앙SUNDAY에 연재된 ‘근대를 말하다’를 지난 17일 끝마쳤다. 우리네 고달픈 근대사를 읊었던 이 소장이었지만 “더 깊이 들어갈 부분도 많았는데 방향을 잃을까 봐 그러지 못했다”며 못내 아쉬움을 드러냈다. 하지만 ‘역사학계의 풍운아’답게 노론사관과 식민사관에 대해선 날 선 비판을 잊지 않았다.
그는 요즘 연구소에서 역사 강좌를 강의하며 한국학대학원대학 설립의 꿈을 다지고 있다. 1997년부터 집필 활동을 하면서 마감시간을 한 번도 어기지 않는 비결도 털어놨다. 오랜 집필 활동에 지쳤는지 그는 “배낭 하나 메고 오지를 탐방하며 안식년을 갖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27일 오후 이덕일 소장을 만나 역사와 한국 사회에 대한 고민을 들었다. 대담은 중앙SUNDAY 이양수 편집국장이 진행했다
-2011년 3월부터 ‘근대를 말하다’를 연재하며 고생이 많았겠다.
“한·중·일을 종횡으로 잇는 선행 연구가 너무 없었다. 일제 식민지였던 한국 사회를 규정한 힘은 한국보다 오히려 일본 쪽에 있었다. 우리 입장에선 독립운동사가 중요하겠지만 당시 국제정세의 종속변수였다. 어쨌든 우리 역사가 아시아 세계와 전면적으로 맞물려 돌아간다는 관점을 강조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사회주의운동사나 아나키즘운동사 등을 소개했다. 만주의 3부(府), 즉 참의부·정의부·신민부라는 그동안 묻혀진 항일 무장투쟁의 의미도 되짚어 봤다.”
-2년간 한 번도 마감시간을 어긴 적이 없다. 비결은 뭔가.
“직장인처럼 똑같이 출퇴근하며 낮엔 개인 약속을 삼간 채 자료를 보거나 글을 썼다. 신문 1개 면 전체를 줄곧 써야 돼 압박도 적지 않았다. 내가 잘 아는 조선시대가 아니라 새로 자료를 찾아야 되는 분야여서 매번 다음에 뭘 써야겠다고 고민하며 준비했다. 글쟁이에게 마감이라는 건 가장 기본적인 약속이지 않나.”
-대략 100년가량의 근대사지만 구체적인 사료가 부족하진 않았나.
“역사의 빈 공간을 채워주는 사료가 부족한 반면, 어떤 부분은 너무 많이 중복돼 있다. 그중 일본·중국 현대사와 한국사의 관계를 설명해 줄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래서 중·일의 1차 사료를 직접 본 뒤 그걸 독자가 이해할 수 있게끔 노력했다. 일본 고서점도 여러 차례 다니고 중국을 갈 때마다 서점들을 순방했다. 그렇게 꾸준히 모아놨던 사료들을 많이 활용했다. 매회 수십 권을 참고했다고 말할 수 있다.”
-더 다루고 싶었던 부분은 없었나. 남북 분단의 경우 외세 때문이라고 했는데 내적인 요인도 있지 않았나.
“그건 따로 한번 더 해야 할 얘기다. 내가 우려하는 건 우리 사회가 그것을 소화할 만큼 성숙해 있느냐다.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그게 형성되는 원인, 뿌리, 과정이 있다. 우리는 해방과 내전을 겪었지만 남북 모두 그런 시스템이나 지배세력이 유지되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적으로만 바라보는 진영 논리가 작동하는 사회다. 양쪽 세력을 묘사하다 보면 때론 이쪽을 비판할 수도, 저쪽을 옹호할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우리 사회는 1차 사료나 근거를 갖고 다투는 게 아니라 먼저 편을 가른다. 우리가 통일을 지향한다면 북한을 통합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우리가 잘못한 건 잘못했다 말하고, 북한의 잘못된 부분도 비판해야 한다. 그래야 양쪽이 서로 공감하고 통합을 지향하는 논리가 나올 수 있다.”
-독립운동의 정통성을 항일 무장투쟁에서 찾으려는 이도 있는데.
“항일 무장투쟁을 얘기하면 김일성이 수행했던 동북항일연군을 많이 떠올린다. 그러나 무장투쟁의 꽃은 1920년대 참의부·정의부·신민부(3府)였다. 그때가 가장 전성기였다. 당시 국경지대는 상시적인 접전 지역이었다. 내가 식민사학을 비판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역사학계의 주류를 형성한 식민사학자들이 독립운동 자체를 가르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반 대중들이 잘 아는 청산리대첩, 봉오동전투 같은 것만 가르쳤다. 그 결과 무장투쟁 하면 1930년대 말 중국공산당 산하부대 비슷했던 동북항일연군 산하 한인들 일부의 무장투쟁을 떠올리게 됐다.”
-일본의 과거사 왜곡과 우경화가 심각하다. 일본은 왜 독일처럼 반성하지 않나.
“독일은 패전 이후에 모든 시스템이 나치와 단절하는 방식으로 재건됐다. 독일에선 지금도 딴 것은 자유민주주의로 다 용인하지만 나치를 옹호하면 바로 감옥에 보내지 않나. 그런데 일본에선 군국주의 시스템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했다. 일왕 히로히토를 전범으로 처벌하고 광범위한 인적 청산을 했어야 마땅하다. 그걸 못해서 기시 노부스케 같은 전범이 계속 총리를 하고, 국민들도 자기네가 잘못한 게 없었다는 식으로 생각하게 됐다. 한반도 침략, 만주사변, 동남아 침공, 미국 공격 등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힘이 없어서 우리가 졌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일제시대의 일본인들도 극소수를 빼곤 모두 불행했다. 일본의 역사 왜곡 문제는 스스로의 반성과 각오가 있어야 해결될 수 있다. 우리가 만날 항의해 본들 불가능하다.”
-이 소장께선 ‘역사는 딱딱한 학문’이라는 도식을 깨는 데 큰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강단 사학계에선 정조 독살설 같은 음모론을 남발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나는 일관되게 두 부분을 비판해 왔다. 첫째 노론 사관이다. 노론 세력은 인조반정 이후 250년 가까이 집권하고도 나라가 망할 때 나라를 팔아먹는 데 가담했다. 그 다음이 일제 식민사관이다. 이것들이 잘못됐다는 전제를 해야 그 다음 논의가 가능하다. 이 나라의 일부 역사학자들은 정조 독살을 얘기하면 바로 자기들을 향한 공격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가문 사관, 당파 사관으로 임하기 때문이다. 합리적인 역사 해석을 가로막는 주범 중 하나는 문중 의식이다. 조선시대에 진짜 양반은 인구의 3~5%밖에 안 됐는데 자꾸 양반의 관점, 특정 가문의 관점으로 역사를 바라보려 한다. 정조 독살 혐의가 없다면 그쪽에서도 1차 사료를 대고 반박하면 되지 않겠나. 그런데 자꾸 이덕일 개인에 대한 인신공격을 해댄다. 또 한(漢)사군이 한강 북부에 있었다는 사료는 단 한 개도 없다. 반면에 만주에 있었다는 1차 사료는 너무 많다. 중국 학자들이 동북공정을 할 때도 한국 주류학자들의 주장을 인용하는데 우리 역사학계에서 좀 더 합리적인 토론이 성사됐으면 좋겠다.”
-한국학대학원대학을 설립하겠다는 꿈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안다. 요즘 연구소에서 교양과목, 전문 강좌를 하고 있는데.
“연구소 전문 강좌는 이번이 3학기째인데 재수강률이 대단히 높다. 수강생 30여 명 중엔 고위 공직자나 대기업 임원, 의사·약사 같은 전문가들도 있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인문학에 굶주려 있다. 강의 자료로는 한·중·일의 1차 사료를 쓴다. 예컨대 중국 지리서인 『수경주(水經注)』를 갖고 한국 고대사의 강역 문제를 다룬다. 또 삼국통일을 전후한 한·중·일 3국의 역사를 각국 원전으로 비교 분석한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역사는 다른 분야와 다르다. 예를 들어 사마천의 『사기』와 반고의 『한서』 사이엔 큰 차이가 있다. 사마천은 한나라와 맞서 싸운 항우 이야기를 황제와 관련한 본기에 써놓았다. 반면에 체제 순응적인 반고는 본기에 써놨던 걸 열전으로 빼놓았다. 거기에서 역사학자의 관점이 드러난다. 요즘 우리 사회는 자기 귀에 듣기 좋은 역사 얘기만 해달라고 요구하는 풍조가 있다. 조선시대의 ‘사화’를 쓸 때 선비 사(士)자와 함께 역사 사(史)자도 쓰지 않나. 자기 정체성을 찾고 한 사회를 고차원적으로 통합하려는 게 바로 역사학이다. 우리 세대의 기대수명이 크게 늘고 있는데 제 2의 인생에 가장 좋은 게 공부라고 생각한다. 역사 공부를 하면 재미와 의미를 함께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