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을 위한 복음
(로마서 9:1~3)
임창호목사
초대 선교사인 언더우드선교사님이 한국에 부임하셔서 22개의 교회를 개척하셨는데, 그 첫 번째 교회가 1887년 9월27일에 14명의 성도를 중심으로 세운 새문안교회입니다. 이 교회를 세우신 언더우드선교사님이 김포지역에 3교회를 개척하셨는데, 김포지역 첫 번째 교회가 1894년 3월3일에 세워진 김포읍교회입니다. 언더우드선교사님이 개척하신 7번째 교회로서 8명의 성도를 중심으로 개척한 교회입니다. 지금은 김포가 시가 되어서 더 이상 김포읍교회로 불리우지 않고 교회명을 김포제일교회로 변경했습니다. 저는 김포읍교회에서 자란 사람이고, 언더우드선교사님이 세운 7번째 교회에서 92만에 배출된 첫 번째 목사입니다. 1986년 12월12일에 목사안수를 받게 되었는데, 그 해가 김포제일교회가 세워진지 92년이 되던 해였습니다. 믿어지지 않지만, 92년간 목사가 한명도 안나왔다가 제가 첫 목사가 된 것입니다. 어쨌든, 그런 연유로 해서 오늘 언더우드선교사님이 7번째로 세우신 김포제일교회 출신 첫 번째 목사가, 언더우드선교사님이 세우신 첫 번째 교회인 새문안교회에 와서 말씀을 전하게 된 것을 매우 영광으로 생각하며, 기쁘게 생각합니다. 특별히 북한동족을 위하여 남다른 하트를 갖고 계신 새문안교회 이수영목사님은 저에게는 멘토와 같은 목사님으로서 가장 존경하는 분이기도 합니다.
오늘 북한선교주일을 맞이하여 주어진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민족을 위한 복음이라는 주제로 함께 은혜를 받고저 합니다.
바울은 잘 아시는대로 예수님 이후, 교회에 가장 영향력을 끼친 사도로 여겨져 왔습니다. 27권의 신약성경 가운데 거의 절반에 가까운 13권을 기록했다는 점만 보아도 그 비중과 중요성을 엿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방교회인 안디옥교회에 교사로 초청을 받아가서 사역을 시작한 이후, 안디옥교회의 첫 선교사로 파송되었다는 점에서, 바울은 기독교 이방 선교의 선구자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교회를 제외한 신약에 소개되는 거의 모든 교회는 바울이 개척한 교회들입니다. 고린도, 에베소, 빌립보 등이 그 대표적인 교회들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 같이, 바울같이 라는 말을 합니다. 그렇게 살고 싶다는 이야기지요. 서양사람들의 이름 가운데 바울이라는 이름을 매우 좋아합니다. 그래서 자녀의 이름을 지을 때도 바울이라는 이름을 많이 사용합니다. 영어식으로 발음하면 “폴” 인데, 여러분들도 자주 들어보았던 이름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바울의 개인 간증과 고백과도 같은 내용입니다. 특별한 구절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도 바울은 비장한 다짐이 담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시작부터가 평소와 같지 않고 심상치 않기 때문입니다.
우선 바울은 자신은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하는 말이라고 전제합니다. 둘째 그는 지금 자신의 말은 참말이라고 합니다. 셋째 지금하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라고 합니다. 넷째 자신의 말이 양심에 따른 말이라고 합니다. 다섯째 자신이 지금 하는 말이 양심적인 것은 성령이 증인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이요, 거짓이 아니요, 양심으로 말하는 것이요, 성령이 자신이 양심적인 것을 증명한다고 장황한 서언을 소개한 것입니다. 도무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예수님께서도 중요한 말씀을 하실 때는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라는 반복적 강조의 말씀을 하신 적은 있습니다. 우리들도, 특별한 이야기를 할 때는, 진짜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강조하기도 합니다. 바울은 지금 예수님보다도, 우리들이 하는 말보다도 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틀림없이 매우 중요한 말씀인 것 같습니다. 우리들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걸까요?
그 내용은 2절에 나와 있는데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 이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한테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는 겁니다. 무슨 근심과 고통이길래 이처럼 뜸을 들이고, 긴 서론이 필요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근심과 고통이 있다는 것을 이렇게 까지 말하는 것도 평소의 바울답지 않습니다.
바울은 빌립보교인들에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빌4:6-7)” 교인들에게 염려하지 말고, 근심하지 말라고 한 적이 있는 바울이. 정작 지도자인 바울 자신에게 지금 큰 근심이 있다고 교인들에게 말하는 것은 모순 같아 보입니다. 아마도 매우 심각한 사연의 근심과 고통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도 바울과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있으라(마26:38)”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동산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 면서 근심하지 말라고 하셨던 예수님조차도 고민하신 적이 있었는데, 도무지 바울의 근심과 예수님의 고민은 무엇이었을까요?
바울의 근심과 고통의 구체적인 내용이 3절에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 이말은 형제와 골육과 친척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고통과 어려움도 불사하고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만, 사실 바로 앞장인 8장39절에서 바울은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고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예수의 사람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권세나, 깊은 두려움이나, 그 어떤 피조물들이 협박하고 끊으려 해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끊어질 수가 없는 것이 만일 끊어진다면, 그 고통은 엄청난 것이 될 것입니다. 바울의 이 말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가 끊어질 수도 있다는 말이 아니고, 끊어질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는 것과 같은 아픔과 고통이 뒤따른다고 할지라도, 견디기 힘든 고통이 뒤따른다 할지라도, 형제와 골육의 친척, 즉 자기동족을 구원하는 일은 가장 우선적인 일로 할 것이며, 사명으로 알고 실천하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근심이라는 것도 사실, 넓게는 인류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가깝게는 예수님이 속해있는 자기동족 유대인을 구원하기 위한 근심이었습니다. 내일 십자가에 못밖하시기 전에,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마지막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시며 근심하시던 근심이었습니다.
구약의 모세도 자기 민족이 우상을 만들고, 절하면서 하나님을 등지고 정신을 못 차리고 있어,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때,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출32:32)” 라면서, 자기 동족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만, 자기 이름이 하나님의 기독하신 책에서 지워지는 한이 있더라고 감당하겠다는 중보의 기도였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저는 이 세 명, 예수님과, 바울과, 모세의 고민을 거룩한 근심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민족을 구원하기 위한 헌신의 고민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사실 바울도 예수님도, 모세도 모두 자기 동족들을 위하여 끝까지 희생과 헌신을 아끼지 않았던 분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자기동족들이 모여있던 로마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 순교했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 백성, 자기동족을 위하여 모든 피를 쏟아주셨고, 모세는 40년 동안 광야를 순례하면서 자기 동족 이스라엘을 가나안땅까지 인도하고 마지막을 맞이한 지도자였습니다.
바울과 예수님과 모세, 이들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 공통점은 자기 동족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근심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생명을 구하려는 근심은 거룩한 근심이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근심이라고 고린도후서 7장10절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함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라” 거룩한 근심은 후회함이 없는 근심이요, 구원에 이르게 하는 근심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이 전해주는 바울의 큰 근심과 마음의 그치지 않는 고통은, 한국기독교인들에게 특별히 강하게 전해주는 메시지입니다. 우리들에게도 구원해야 할 동족이 있기 때문이빈다. 지구상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로서, 휴전선을 중심으로 북한에 있는 우리 동족들이 말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서 60여년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에 있는 주민들은 다른 민족이 아닌 바로 우리민족입니다. 다른 나라가 아닌, 바로 우리나라의 일부분에 속해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셨고, 축복하셨던 것처럼, 우리나라의 저 북한 땅도 하나님께서 택하셨던 곳이었고, 축복하셨던 땅이었습니다.
저 북한 땅은 원래 어떤 땅이었습니까? 새문안교회가 개척되기 약 20년 전, 1866년 9월, 북한 땅 평양 대동강에서 한국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결혼도 안한 20대 총각 토마스목사가 첫 순교의 피를 흘린 이 후, 그 피의 순교지에서 복음의 싹이 피어올랐다. 1886년 언더우드선교사가 복음을 들고 이 땅을 찾아온 것입니다. 한국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는 북한 땅 황해도 송천에 있는 교회입니다. 한국의 최초의 신학교인 평양신학교는 1901년에는 북한땅에 세워졌습니다.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한국 최초의 7명의 목사님들, 길선주, 한석진, 방기창, 서경조, 이기풍, 양전백, 송인서 목사님들은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목사안수식을 받았습니다. 한국최초의 선교사 이기풍목사님도 평양장대현교회에서 파송식을 가졌습니다. 한국에서 세계적인 성령대부흥회가 열린 곳도 평양 장대현교회였습니다. 한국목사로서 최초로 한국교회의 담임을 맡았던 길선주목사님의 사역지도 평양장대현교회였습니다. 평양은 한국 초대교회 당시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리우던 곳이었습니다. 평양시민들은 교회에 가지 않으면 사람축에도 들지 못했을 정도였고, 대한민국의 근대사에 길이 남을 선구자들, 독립운동가들은 거의 북한의 성도들이었습니다. 3.1운동 당시 독립선언문에 서명을 했던 33명 가운데 16명이 기독교인들이었고, 1명을 제외한 15명이 목사님들이었고, 그 분들 대부분이 북한출신 분들이었습니다.
1945년 해방 이후, 소련군 장교의 신분으로 북한에 들어온 김일성은, 스탈린정권의 꼭두각시로 북한을 공산화로 만든 이후, 1958년까지, 북한에 있던 1,500교회가 파괴되고 신실한 기독교인들은 처형시켰고, 교회의 직분자들은 강제수용소로 수감되었고, 교인들은 사람들이 살 수 없는 오지로 보내졌습니다. 6.25이전, 대부분의 북한 기독교인들은 남한으로 내려와서 이 땅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며, 통일의 날을 기다리면서 신앙의 행진을 해온 것입니다. 교단마다, 많은 노회가 아직도 이북의 이름을 따서 무지역노회라고 하여 평양노회, 용천노회 등의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부도 1967년부터 통일부라는 부서를 두어 통일의 날을 기다리고 있으며, 초중고등학교에서는 통일교육을 시키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회복되어야 하듯이, 저 북한 땅,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리우던 평양땅, 평양장대현교회를 불태우고 김일성의 동상을 세워놓은 그 땅은 반드시 회복되어져야 합니다. 그 자리에 다시 장대현교회가 세워지고, 평양신학교가 세워져야 할 땅입니다. 모든 교회들은, 한국교회의 북한선교 사명을 기도회만하고 연중 이벤트로만 그칠 것이 아니라, 주일학교어린이서부터 중고등부청소년, 대학청소년들, 장년들에게 공과책에 단원을 만들어 일깨우고 가르쳐야만 합니다.
나아가 우리 한국교회 성도들은, 오늘 동족 구원을 위하여는 어떠한 희생과 헌신도 각오하겠다는 바울의 의미심장한 각오와 마음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고민하셨던 예수님의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동족이 구원을 받게 될수만 있다면, 자기 이름을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지워져도 감당하겠다던 모세의 마음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동족구원을 이루어내야 한다는 각오를 가져야만 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예외없이 동일하게 요구되어지는 말씀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6만 한국교회와 1천만 한국교회 성도들만 이 자세로 북한선교를 시작한다면, 하나님께서 놀라운 역사로 복음통일의 날을 앞당겨 주실 것입니다.
지금 내 생활도 빠듯하고 힘들어 죽겠는데 통일이 되면 북한동족들을 먹여 살리느라 경비가 많이 들어갈 것 같으니까, 통일하지 말고, 북한동족들이야 독재정권 하에 굶어죽든 말든 상관말고 이대로 그냥 우리들이나 평화롭게 지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버려야합니다. 그 자체가 죄입니다. 비겁하고, 이기적이며 악한 생각입니다. 한국기독교인으로서 가져서는 안될 마음일 것입니다. 바울과 모세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마음이 아닙니다. 어떤 어려운 환경과 조건에도 불구하고, 동족구원은 이루어야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강도만난 자에게 보여주었던 사마리아사람을 본받아,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지금 북한선교는 그 어느나라를 위한 선교보다도 우선적이어야 하며, 응급실 환자를 보는 마음으로 살펴야 할 것이며, 교통사고와 질병으로 쓰러져 있는 자신의 가족을 돌보는 마음으로 살펴야만 합니다. 1945년8월15일이 올 것이라고 아무도 모르고 있었듯이, 북한이 열리는 날이 머지 않아 곧 올 것입니다. 그날을 앞당기기 위하여, 우리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한국에 나와 있는 탈북민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끌어 안고 돌보고, 섬기는 일을 통해, 그들을 복음화시켜서, 북한이 열리는 날, 모두 북한의 현지선교사로 파송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탈북민들은 하나님이 통일연습하라고 보낸 선물들입니다.
이미 한국에 있는 탈북자사역자들은 교회와 선교팀과 함께 북한기독교총연합회라는 것을 만들어, 북한이 열리는 날을 대비하며 스스로 북한 복음화를 위한 준비에 착수하였습니다. 이들을 힘있게 후원하고 응원하는 것도 한국교회의 사명일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북한선교의 모든 사역은 민족구원을 위한 복음사역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혜롭게 분별하여 그 어떤 북한선교사역도 북한동족들을 탄압하는 북한정권을 돕는 사역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북한선교사역은 곧, 북한동족을 구원하기 위한 복음이 되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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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원문보기 글쓴이: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