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막상막하〃이야기
지은이- 너도 만만친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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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녀가 자신의 흰 한복 치맛자락을 쎄게 움켜쥐었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는 듯 최대한 눈을 크게 뜨고 목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흘러나오는 눈물을 멈추기란 쉽지 않은 일이였는지,
결국 커다란 눈물 방울은 그녀의 하얗고 고운 볼 위로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재빨리 손을 들어 올려 눈물을 훔치고 뒤를 돌아보았다.
커다란 키의 한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며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눈물을 애써 감추며 환히 웃어보였다.
"오라버니, 아버지만 찾으면 돌아올 거예요! 걱정마세요!"
배 위에서 그렇게 소리쳤지만 자신의 목소리가 그의 귀에 들릴 일은 만무했다.
곧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리며 배가 출발하기 시작했고 그녀는 그 남자를 보려는 듯 다리를 움직였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배는 부두에서 멀어져버렸고 그녀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리고 그제서야 참았던 눈물들을 서럽게 흘리기 시작했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였다.
조국을 떠나는 사람 모두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소리 없이 모든 눈물을 흘러내고 있었다.
그때였다.
왠 젊은 남자가 자신의 팔을 붙잡고 있는 중년의 남자를 뿌리치며 안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하얀 일본 제복을 입고 있는 남자는 보통 일본 사람보다도 훨씬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듯 했다.
- 시끄러워. 쇼타.
- 하지만 도련님!
- 그 말은 지금 나더러 그 여자와 결혼하라는 소리밖에 되지 않잖아!
아버님께 똑바로 말씀드려 주시게. 그 여자와 결혼할 생각은 죽어도 없다고.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눈물을 흘리며 서 있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여자는 무슨 슬픈 일이라도 있는 건지 서럽게 울고 있었다.
그것도 한국이 아닌 일본으로 가는 배 안에서 흰색의 한복차림으로….
그녀는 당황했던 것인지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도 그냥 고개를 돌려버리려다 자신도 모르게 다시 고개가 그녀를 향해 돌아갔다.
그녀는 이젠 보이지도 않는 부산항을 바라보고 있는 듯 했다.
- 이봐 쇼타!
- 네. 도련님.
- 내 가방.
-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집사는 고개를 숙인 채 선실 안으로 들어갔고 그는 오른쪽 팔을 선반에 걸친 채 몸을 기대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얗게 드러난 이마와 까만 머리를 뒤로 땋은 전형적인 한국 여성의 모습이였다.
곧 집사가 가방을 가지고 왔고 그는 자신의 집사에게서 가죽 가방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가방에서 손수건을 뺀 채 가방을 다시 집사에게 돌려주고 여전히 울고 있는 그녀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울음소리를 내지 않으려는 듯 두 주먹이 꽉 쥐어진 채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앞에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부산항이 있는 곳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왼 손을 들어 손수건을 그녀의 얼굴 앞에 들이밀었다.
갑작스러움에 놀란 그녀는 뒤로 한발자국 물러섰고 그는 팔을 다시 들어 보이며 손수건을 더 앞으로 내밀었다.
그런데도 그녀가 받지 않자 오른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가 놀란 듯 손을 빼려들었고 눈을 크게 뜬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오른손에 더욱 힘을 주며 그녀를 향해 웃어 보이곤 그녀의 손에 자신의 손수건을 쥐어주었다.
갑자기 손을 놓아버리자 잔뜩 힘을 주고 있던 그녀가 휘청거렸다.
그는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아 일으켜 세워주었다.
그녀는 재빨리 손에 힘을 주어 그의 품안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했다.
"가…감사합니다. 하지만 이 손수건은…."
- 추한 눈물이나 닦도록 해. 여자가 우는 거 질색이니까.
그가 차갑게 말을 뱉으며 뒤돌아 섰다.
그의 태도에 당황했고 그의 말투에 당황한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헛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는 눈썹을 찡긋거리며 다시 뒤 돌아섰고 그가 뒤돌아 서자 그녀는 손수건을 펼쳐 알겠다는 듯 눈물을 닦아내었다.
그리고 코까지 깨끗하게 풀어 손수건을 다시 접은 다음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당황한 그는 웃지도 못한 채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집사 역시 당황한 듯 그녀와 그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고 주위 사람들 모두 그 두 사람을 주시했다.
"뭐? 추한 눈물? 그래 왜놈 눈엔 내 눈물 따위 추하겠지! 이거 가져가!"
"아니, 아가씨 미쳤어요? 이 분이 어떤 분인 줄 알고나 이런 짓을 하는게요?"
"네?"
집사가 뛰어오며 그녀 앞에 서서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당황하고 말았다.
집사는 아주 자연스럽게 조선어를 구사하고 있었고 그녀의 손목을 잡아내려 끌었다.
"일어를 알아 들…었던가?"
집사의 뒤에 서 있는 그가 놀랬다는 듯 그렇게 말을 내뱉었다.
틀림없는 조선어였다. 집사와 마찬가지로 발음이 거의 완벽했다.
순간 그녀는 낭패라는 듯 인상이 찌푸려져 버렸다.
그가 조선어를 알아들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였었다.
그때였다.
왠 뚱뚱한 아낙이 재빨리 걸어오며 그녀를 자신의 뒤로 세웠다.
"죄송하구만유. 저희 조칸데 아직 버릇이 없어나서…. 정말 죄송해유.
손수건은 깨끗이 빨아서 돌려드릴께유. 야, 뭐하냐. 빨리 가자."
아낙은 그렇게 말하며 굽신굽신 인사를 하고 그녀의 손목을 잡아 이끌었다.
그녀는 영문도 모른 채 그 아낙에게 끌려가고 있었고 곧 사람들로 득실대는 대기실로 들어와 앉았다.
3등급실. 쾌쾌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있었고 사람들은 뒤엉켜 잠을 자거나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거의 다 조선인들이였고 그녀도 예외는 아니였다.
"아가씨 미쳤남?"
"절…아세요?"
"당연히 모르지. 그런데 거기 있다간 큰 일 당할까봐 데리고 왔구먼."
"무슨 말씀이신지…."
"아까 그 남자가 어떤 남자인 줄 아는감? 도쿠가와 집안의 후계자여. 후계자!"
"도쿠…가와?"
"일본 천황도 설설 긴다는 도쿠가와 집안을 모른단 말이여?
도쿠가와 타츠야라고 그 집안 후계자라고 하는 구만. 어쩌려고 그런 말을 했어!"
틀림없이 그의 차림새를 보고 예사 사람은 아니라고 짐작은 했었다.
하지만 일본 최고의 가문인 도쿠가와 집안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였다.
그녀는 한심스럽다는 듯 두 눈을 감아버렸다.
그는 선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누워버렸다.
집사도 따라들어 왔지만 그는 한쪽 팔을 들어 올려 눈을 가려버렸다.
집사는 그가 말하기 싫다는 뜻을 알아듣고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 의외로군요. 도련님께서 손수건을 여자분에게 드리다니….
집사가 말을 꺼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금의 움직임조차 보이지 않았다.
집사 역시 혼자 웃어보였다.
알고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지켜 봐왔던 분이였다.
차가운 듯 하나 따뜻하신 분이라는 걸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따뜻함이 나중에 해가 될거라는 생각도 해보았으나 그건 그리 걱정할 문제가 아니였다.
그는 일본인에게든 조선인에게든 평등하게 대하는 것이 똑같았다.
자신이 한번도 남보다 높은 자리에 있다고 해도 권력을 행사하는 일 따윈 없었다.
- 순경들이 없어서 다행이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말도 없는 그를 보고 집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문을 열며 입을 열었다.
- 측은해 보였을 뿐이야.
- 누군지 알아보고 올까요?
- 필요 없어.
그는 더 이상 말하기 귀찮다는 듯 차갑게 말을 뱉은 뒤 몸을 돌려 누워버렸다.
집사는 어깨를 으쓱한 채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녀는 깨끗하게 빨아놓은 손수건을 손으로 꾸낏거리고 있었다. 벌써 이틀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그는 배가 동경항에 도착할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어차피 가져온 짐도 손으로 들 수 있는 조금 커다란 가방밖에 없었기에 그녀는 가방을 힘을 주어 들어 올렸다.
"아주머니, 저 가볼게요."
"어디를 가. 갈데는 있남? 그냥 우리와 살지."
"정말…그래도 돼요?"
그녀의 말에 아낙은 커다랗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보였다.
며칠 겪어보진 않았지만 아낙은 좋은 사람이였고 자신의 처지를 항상 딱하게 여겼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고개를 들었는데 여러 사람에게 둘러 쌓여 나오고 있는 그를 보았다.
재빨리 가방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지만 그의 곁에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때 신식 원피스를 입고 그의 앞에 서는 젊은 여자를 발견했다.
그 여자는 그를 향해 웃고 있었으며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뭐하고 있냐. 갈 길이 바쁘다. 어여 가자."
"아, 네."
그녀를 걸어가면서도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이상하게도 처음 만난 날부터, 그가 손수건을 건낼때부터 신경이 쓰였던 사람이였다.
그는 묘하게 자신의 신경에 거슬렸었다.
하지만 별 것 아니라고 치부해버리고 아낙의 뒤를 재빠르게 쫓아갔다.
- 타츠야, 오랜만이예요.
- 그렇군.
료코는 밝게 웃으며 자신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눈에 신경이 쓰이는 사람은 료코가 아니였다.
아까부터 아무리 둘러보아도 보이지 않는 그 조선 여인이였다.
하지만 결국 그녀의 흔적조차 찾지 못한 채 준비되어 있는 차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곧 차가 출발하기 시작했고 차에 올라타서도 료코는 입을 쉴새없이 놀려대고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창밖에 머물렀다.
그런데 그때 그의 눈에 보인건 그녀였다.
가방이 무거운 듯 두 손으로 든 채 이마의 땀을 닦는 듯 어깨소매로 훑고 있었다.
순간 그가 멈칫하자 료코가 그에게 말했다.
- 왜 그래요?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요?
- 아, 아니야.
순간 차를 멈춰 세우라고 말할 뻔 했다.
그리고 다시 창 밖에 머물러 있던 시선을 돌렸다.
그저 연민일 뿐이라고 치부해버리면서….
2
일본 전통의 커다란 가옥 앞에 검은 차는 세워졌고 기사가 문을 열기도 전에 자신이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열려져 있는 대문을 지나 걷기 시작했다.
인공정원이 아주 잘 다듬어진 집. 바로 도쿠가와의 본가였다.
복도를 지나 걸어가자 옆으로 쫙 서 있는 남자들이 허리를 구십도로 숙인 채
인사를 했고 그는 한번 눈을 감았다 뜨며 복도 끝에 있는 방으로 향하였다.
곧 문이 열리고 그는 방안으로 들어섰다.
오른쪽으로는 일본도가 가 잘 눕혀져 있었고 도쿠가와의 사람들이 양쪽으로 앉아 있었다.
그는 마련되어 있는 중앙의 방석 앞으로 가 무릎을 꿇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다시 일어섰다.
- 앉거라.
- 네.
- 그래. 경성에는 잘 다녀왔느냐.
- 그렇습니다.
- 안도가와 사돈을 맺었으면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 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진회색의 나가기를 입고 단상에 정좌하고 있는 그를 보고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아버지.
- 말하거라.
-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저는.
- 되었다. 물러가서 쉬거라.
그의 아버지는 그의 생각을 알았던지 말을 끊어버렸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서 허리를 구십도로 숙여 인사를 하고 뒤 돌아섰다.
막 방을 빠져나오고 문이 닫히자 그는 고개를 돌려 방문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주먹을 쥔 채 팔을 뻗어 나무 기둥을 한번 치고 나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먹에선 피가 새어나오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는 정원 밖으로 나와 한참을 걸어가다가 한발로 땅을 치며 욕을 내뱉고 있었다.
- 도, 도련님!
- 젠장! 술집으로 가자.
집사가 뭐라 말도 끝내기도 전에 그는 대문 밖으로 나가버렸고
집사도 어쩔 수 없이 그의 뒤를 따라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미 뒷좌석에 앉아 있었고 집사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운전석에 앉아 차 머리를 시내로 향했다.
눈을 들어 올려 거울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팔을 괴고 창 밖만 바라볼 뿐이였다.
술집 앞에 차가 서자 그는 먼저 차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집사는 한숨만 내쉬었다.
그가 술집에 들어서자마자 마담이 나와 웃으며 그를 안내했고
그는 다다미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자리에 앉아 준비되어 있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 도쿠가와 도련님. 오랜만이네요. 아가씨를 불러올까요?
사람 많은 건 좋아하지 않으시니 한 명만 데리고 오겠습니다.
그는 들었는지 아니면 듣지 않았는지 상관없다는 듯 계속 술만 마셨다.
마담이 나간 뒤 잠시 후에 문이 열렸으나 그는 문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술잔에 술만 채워 마셨다.
곧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방안으로 밀쳐졌는지 한 여자가 들어섰다.
그도 소란스러움에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고 말았다.
그녀는 몸을 웅크린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기만 할 뿐이였다.
이모라고 부르라던 그 아낙이 자신이 잠든 사이에 술집에 팔아 넘겨버렸던 것이였다.
주위의 여자들은 모두 호기심의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그런 눈빛을 참기가 힘들었다.
언제 입혀놨는지 옷은 붉은색이 가득한 화려한 기모노로 입혀져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문이 열리며 마담이라는 사람이 들어왔다.
- 마담언니, 도쿠가와 도련님 오셨다며? 내가 들어갈게.
- 아냐, 내가 들어갈게.
그러나 마담이라는 사람은 그 여자들을 뿌리치고 자신의 앞으로 걸어왔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올려 마담을 바라보았고 마담 역시 그녀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 너!
"네?"
- 따라와.
"네?"
- 끌고와라.
마담의 소리에 나비 넥타이를 메고 있는 남자 두 명이 들어오더니 그녀의 곁에 서서 끌고 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어디로 가는 줄 몰라 그렇게 끌려가다 손님의 시중을 위해 끌려가고 있던 사실을 알아차렸다.
소리를 지르며 반항했지만 곧 그들의 걸음이 멈추었고 방문이 열리고 말았다.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려 했지만 남자 두 명의 팔 힘에 당해낼 수는 없었다.
어정쩡하게 겨우 중심을 잡고 섰는데 넓은 방안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분명 그 남자였다. 도쿠가와 타츠야라는….
그 역시 그녀를 알아본 건지 먹던 술잔을 내려놓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고개를 숙여버렸고 그녀가 고개를 숙여버리자 그는 술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 앉아.
"네? 아, 네."
그녀는 재빨리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았고 그는 계속 술을 마시고 있었다.
30분쯤이 지났고 다리가 저려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계속 술만 마실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리가 아파 오른쪽 다리를 들어 올려 접는 순간 그가 입을 열었다.
- 기모노를 입으면 무릎을 꿇어 앉는게 예의다.
그의 말에 그녀의 얼굴은 확 붉어졌다.
그 정도가 예의라는 것 정도는 그녀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옷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건 참을 수 없는 고통이였다.
"일어를 알아듣긴 하지만 할 수는 없던가?"
"아, 아닙니다."
"그럼?"
"제 입으로…일어를 내 뱉고 싶지는 않습니다."
- 웃기는 군. 이리 와서 내 옆에 앉아.
그의 말이 끝났는데도 그녀는 그 자리에 앉은 채 움직이질 않았다.
그는 술잔을 다시 내려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도 한참간을 그를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의 옆자리로 다가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가 술잔을 들어올렸다. 무슨 의미라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술병을 들어 올려 그의 잔에 따랐다.
그런데 그는 그 술을 마시지 않고 그녀의 앞으로 내밀었다.
술이라는 것을 마셔보지도 않은 그녀인지라 어떻게 해야할지를 몰랐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술잔을 그녀의 앞으로 내밀고 있었고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술잔을 받아 들었다.
한 입에 털어 넣기는 했지만 확 올라오는 냄새 때문에 삼키지를 못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손을 들어 올려 그녀의 머리를 감싸쥐고 거칠게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안에 있던 술이 입가로 흘러나와 기모노를 적시고 있었다.
너무나 당황스러워서 어찌할 줄을 모르던 그녀는 따뜻한 무엇이 입 안으로 들어오자
정신을 차렸고 손에 힘을 주어 그의 가슴을 밀어내버렸다.
그리고 오른손을 들어 그의 따귀를 때리려고 했으나 그가 왼손으로 간단히 그녀를 제압해버렸다.
- 결국 이런건가? 조선에서는 살날이 막막하여 일본 술집으로 왔던가?
"그런 것까지 일일이 그쪽에게 말 할 이유는 없습니다."
- 그래? 그럼 천하디 천한 년이겠군. 내가 안아도 상관없다는 건가?
그는 그렇게 말하며 눈동자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땅에 박아진 채 움직이질 않았고 그녀의 눈동자는 불안한 듯 떨리고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 따라나와.
그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거칠게 열고 나가버렸다.
순간 당황해서 가만히 앉아 있던 그녀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뒤를 따랐다.
그는 이미 커다란 대문 밖으로 나가고 있었고 마담은 자신에게로 걸어오며
자신의 짐가방을 그 집사에게 건내주고 있었다.
갑작스런 상황에 적응을 못했는지 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마담 얼굴을 바라보았고
마담은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집사는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고 그녀도 손이 잡힌채로 덩달아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집사가 먼저 밖으로 나갔고 그녀는 자신의 가방을 받기 위해 손을 빼려고 했다.
그런데 마담은 자신의 손을 꽉 잡고 놔주질 않았다.
- 좋겠구나. 가보거라. 그리고 다신 이런 곳에 오지마. 넌 이런 곳과 어울리지 않으니까.
"무슨…."
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마담은 그녀의 등을 떠밀어버렸다.
그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았으나 이미 커다란 문은 닫혀버리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보았을땐 그가 손에 자신의 가방을 쥔 채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오더니 가방을 그녀에게로 내밀었다.
- 사정은 들었다. 이제 니 갈 길로 가.
그는 그렇게 말을 내뱉고 뒤 돌아섰다.
그리고 열려져 있는 차 속으로 들어가 앉았고 집사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계속 그대로 서 있을 뿐이였다.
- 도련님. 출발할까요?
집사의 물음에도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30분이나 흘렀는데도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고
그 역시 차 안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였다.
집사가 다시 말을 꺼내려 입을 열었을 때 그는 문을 열고 차에서 빠져나간 뒤였다.
- 왜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는 거지? 네게 자유를 줬는데.
그의 물음에 그녀는 한참동안 대답이 없었다.
그녀가 말을 하기 싫어한다고 생각하고 뒤 돌아서는 순간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갈 곳이 없으니까요."
3
갑작스런 그녀의 말에 그는 다시 걸음을 멈춰 뒤 돌아섰다.
그녀가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뒤돌아서버리고 만 것이였다.
- 뭐?
"그냥 두지 그러셨어요. 어차피 갈 곳도 없…."
"원래 그런 여자였던가? 아, 술집에 취업하기 위해서 일본으로 건너온 거였어?
그랬다면 내가 실수를 했군."
정확한 한국어 발음.
도저히 외국인이라고는 믿지 않을 만큼 매끄러운 발음이였다.
그는 비웃듯 한쪽 입꼬리만 올린채 웃고 있었고 그녀는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지만 이미 큰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그래도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자 그녀는 들고 있던 가방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하지만 한번 맺혀버린 눈물은 그대로 볼 위로 흘러나와 버렸다.
당황한 그녀는 재빨리 가방을 내려두고 손을 들어 올려 거칠게 자신의 눈가와 볼을 훔쳐내었다.
덕분에 애써 해 놓은 화장이 엉망이 되어버렸지만 그녀는 그걸 자각조차 하지 못했고
그는 기어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의 웃음에 더욱 비참해져버리는 것 같아 그녀는 손을 들어 올려 그의 가슴을 쳐버렸다.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 이런 곳에 취업하기 위해 왔다고?
우리나라에도 술집은 많아! 당신이 뭘 안다고 그러는데?
원래 그렇게 말을 쉽게 하는 사람이야? 그래. 잊고 있었네.
당신이 그 더럽고 추잡한 일본인이라는 것을! 도대체 당신이 뭘 알…아서…."
결국 그녀는 말을 끝마치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서 그대로 쭈그리고 앉아 눈물을 흘려버리고 말았다.
그는 팔짱을 끼운 채 그대로 서 있다 팔짱을 풀고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그녀의 가방을 들고 차 쪽으로 끌기 시작했다.
그녀가 몸부림을 치며 반항했지만 거칠게 차에 태워버리고 차를 출발시켰다.
곧 이어 도착한 곳은 커다란 일본식 저택이였다.
커다란 일본식 저택을 처음보는 그녀였기 때문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와 집을 번갈아 보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손에서 가방을 빼앗아 들며 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망설이던 그녀 역시 집사의 안내로 집 안으로 들어섰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보인 건 잘 꾸며졌지만 인공적인 냄새가 나는 전형적인 일본식 정원이였다.
정원 가운데로는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돌담이 세워져 있었고
주위로는 커다란 나무들과 돌들로 잘 어울려져 있었다.
집사는 앞에 서서 손으로 안내를 했고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집사 뒤를 따라갔다.
돌담을 건너 집 안으로 들어오자 은은한 향냄새가 풍겼으며
복도 역시 다다미식으로 된 일본 전통 건물이였다.
기다란 미로같은 복도를 따라 도착한 곳은 커다란 방이였다.
그는 가방을 대충 방 구석으로 던져두고 창문을 밀어 열었다.
그러자 조금은 쌀쌀한 바람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이 방을 쓰도록 해."
"그럴 순 없어요! 전 이만 가보겠습…."
"돈도 다 털렸다 들었는데. 갈 곳이나 있나?"
그는 창문에 기대서서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 웃음이 또 자신을 비웃는 듯 해 그녀의 자존심은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였다.
그 아낙에게 돈도 다 털려버려 조국으로 돌아갈 돈도 한 푼 없었다.
아니, 밥 한끼 먹을 돈조차도 없었다.
그녀의 씁쓸한 웃음에 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려 다시 창 밖을 바라보았다.
대나무들이 양쪽으로 숲을 이루고 있었고 가운데에는 길이 놓여져 있는 뒷 정원을 바라보며 그는 눈을 감았다.
지금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저 한낱 연민 때문에 냉철한 판단을 하지 못하고 처음보는 조선의 소녀를 자신의 집으로까지 데리고 와버린 것이였다.
"돈을 조금만 빌려도 될까요? 조선으로 돌아가면 바로 보내드리겠…."
"내가 너의 무엇을 믿고?"
그녀의 말을 끊어버리고 자신에게 물어보는 그의 대답에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기도 하였기 때문에 그녀도 입을 다물어버렸다.
계속 창 밖만 보고 있던 그가 천천히 돌아서며 입을 열었다.
"꽃을 가꾸는 일을 하도록해."
"네?"
"그렇게 되면 돈을 줄테니까. 그때 여유가 생기면 조선으로 건너가라는 말이야."
"왜 제게 이런…."
"니가 불쌍해 보일 뿐이야. 내 눈에 걸린게 다행인 줄 알아.
계속 거기 있었다간 넌 일본인들의 성적노리개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으테니까.
니가 할 일은 쇼타에게 알려두지."
그는 또 그렇게 차갑게 말을 내뱉어 버리고 방문을 나가버렸다.
그가 나가자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그 자리에서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으며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바보처럼 그 자리에 앉아 한 참을 멍하니 앉아 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문쪽을 바라보았다.
집사가 인자한 미소를 띄우며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고 그녀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섰다.
곧 집사는 그녀의 앞으로 다과상을 내밀며 자리에 앉았고 그녀 역시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는 한 참 동안 말이 오가지 않았다.
그녀는 긴장하고 있는지 자신의 옷고름을 손에 쥐고 꾸깃거리고 있었다.
"도련님은 생각보다 차가우신 분이 아니십니다."
"네? 아, 네."
"이름이…."
"윤…령후."
"윤령후. 좋은 이름이로군요. 앞으론 령후 아가씨라고 부르겠습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집사의 물음에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두어번 끄덕거렸고 그런 그녀를 보며 집사는 웃어보일 뿐이였다.
그녀는 일본인답지 않은 친절함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올리고 집사를 바라보았다.
집사는 찻잔을 들고 음미하듯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도 아무 말 없이 손을 뻗어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향을 맡아보았다.
처음 맡아보는 향기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때 마침 눈을 뜨던 집사와 눈이 마주쳐 버렸고 그녀는 손에서 찻잔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곧 뜨거운 차가 그녀의 허벅지로 쏟아져버렸고 집사 역시 놀란 듯 재빨리 찻잔을 상에 올려두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재빨리 손으로 자신의 치맛자락을 털었고 그녀의 소탈함에 집사는 또 다시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다 털었는지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여쭈어 봐도 될까요?"
"앞으로는 쇼타라고 부르십시오. 묻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물어보세요."
"일본에는 왜 오신 것입니까?"
집사의 물음에 그녀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리고 꼭 닫힌 조그마한 입은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집사는 모르는 척 그냥 넘어가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집사가 일어서자 그녀도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고 집사의 손짓에 집사의 뒤를 쫓아나갔다.
아까 그가 바라보고 있던 뒷 정원이였다.
그 방의 바로 뒤로 보였던 대나무 길.
그리고 조그마한 연못이 있었고 그 안에는 비단잉어들이 유유히 헤엄을 치며 다니고 있었다.
집사가 걸음을 멈춰선 곳은 붉은 색의 꽃들로 이루어진 그리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화단이었다.
"앞으로 아가씨께서 맡으실 화단입니다."
"제가 이 꽃들을 돌보면 되는 건가요?"
"도련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처음 보는 꽃이예요."
"장미라고 하는 서양 꽃입니다. 아, 함부로 만지지 마십시오. 가시…."
그러나 이미 그녀의 하얀 손을 가시에 찔려버렸고 집사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빼내 그녀의 손을 잡아 감싸쥐었다.
그녀는 쑥스럽다는 듯 웃어 보였고 집사는 그런 그녀를 보며 왠지 모르게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건물 뒤쪽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그와 마침 고개를 들던 집사가 눈이 마주쳤다.
집사는 그녀의 손을 놓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의 눈은 젖어있었고 집사는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죠?
- …알고 있었나?
- 그럼요. 누구보다도 도련님을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저라는 건 도련님도 잘 알고 계시잖습니까.
집사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멀리서 손을 손수건으로 쥔 채 서 있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손위에서 손수건을 치워내며 손바닥에 생긴 상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 천천히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의 갑작스런 움직임에 그녀는 얼어버린 듯 움직이질 못했고
그는 한참이나 고개를 숙인 채 그녀의 손에 자신의 얼굴을 묻고 있었다.
- 다치지 마라. 아프지도…마라.
그렇게 말하던 그가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대나무 길 사이로 걸어갔고 이내 그의 모습은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순간 살짝 쥐었던 손을 펼쳐보았다.
눈물 방울.
그의 눈물이였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어 이미 사라지고 보이지도 않는 대나무 길을 바라보았다.
참으로 이상한 사람이었다.
무례하게 굴다가도 친절해지고 또 친절해지다가 차가워지고 또 차가워지다 따뜻해지는….
4
그렇게 며칠이 지나갔다.
그녀는 그간 이국 생활에 많이 적응한 듯 했고 그녀를 바라보는 집사 역시 항상 따뜻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그녀는 여지껏 썼던 인부들보다 화단의 꽃들을 더 아름답게 피게 만들었다.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물을 뿌리는 그녀를 보며 집사는 천천히 다가가 뒤에 섰다.
"도와드릴 일은 없습니까?"
"아, 괜찮아요. 오늘은 이 물만 뿌리면 돼요."
그녀의 말에 집사는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도 물을 다 뿌렸는지 물통을 내려놓았고 탐스럽게 활짝 벌어진 장미들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녀의 눈에 띈 건 구석에 있는 꽃이 없고 잎만 있는 식물이었다.
겉이 검은 빛을 띠는 짙은 갈색의 잎.
그녀는 자리에 앉아 한참간을 그 식물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막상 그 식물의 이름이 궁금해져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이미 집사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 상사화.
"네?"
"상사화라고 하는 꽃이지."
"상사화? 상사병에 걸린 꽃인가요?"
그녀는 웃으며 말했고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외의 이름에 놀란 그녀는 그를 바라보았고 그도 천천히 다가와 그녀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그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계속 시선을 상사화에만 둔 채 움직이질 않았고 그녀 역시 그와 계속 같은 곳만 바라보았다.
"6월에서 7월이 되면 이 잎은 다 말라서 떨어져버리지."
"그럼 죽나요?"
"그리고 8월에 꽃이 피어. 여기 보이는 꽃줄기에 적게는 4개 많게는 7,8개 정도의 자주 빛 꽃이 피지."
"잎이 있을땐 꽃이 없고 꽃이 있을땐 잎이 없어 상사화라 부르는 거군요."
그녀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녀는 왠지 그 꽃이 불쌍해졌다.
그리고 손을 뻗어 정성스럽게 흙을 눌러 다듬어주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고 그녀도 흙을 다 다듬은 다음 자리에서 일어섰다.
"꽃들이 많이 피었군."
"그렇군요."
"상사화는 멍청한 식물이야."
"네?"
"이루어 질 수 없는 걸 모른 채 계속 잎이 지면 꽃이 피고 꽃이 지면 잎이 나는 멍청한 식물.
그래서 난 상사화가 싫어."
그는 그렇게 말하며 걷기 시작했고 또 다시 그 대나무 길 사이로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한참 동안 그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다 다시 시선을 돌려 상사화를 바라보았다.
잎만 달려있는 초라하게만 보이는 식물.
그녀는 천천히 연못의 돌다리를 건너 대나무 길로 향했다.
대나무 길은 생각보다 길었고 결국 그녀는 포기한 채 뒤로 돌아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곤 뒤를 돌아 다시 한번 그 길을 훑어본 다음 다시 종종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꽃들을 돌보는 것으로 그녀의 하루하루가 가고 있었고 그녀는 초조함을 느꼈다.
아침에 나가 꽃들에게 물을 주고 나서 방안으로 들어와 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하얀 종이에 편지를 서내려 가기 시작했다.
종이를 구겨서 버리고 또 버리고 세 번째 장이 되어버렸다.
"오라버니, 전 잘 지내고 있습니다. 오라버니 역시 잘 지내고 계시죠? 걱정마세요. 금…."
구겨져서 뒤에 버려진 편지를 그가 펴서 읽고 있었다.
그녀는 재빨리 일어서 그의 손에서 자신의 편지를 빼앗아 버리려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는 재빨리 손을 뒤로 숨켜 버렸고 그녀는 손을 앞으로 밀어 달라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런데 그는 웃기다는 듯 웃어버렸고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는 미안하다는 기색도 없이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였다.
"이게 무슨 짓이…."
"친오라버니?"
"어서 그 편지 내 놓으세요!"
"묻잖아."
"그…."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며 왠 여자가 들어왔다.
저번 부두에서 보았던 그 여자였다.
그녀의 시선에 따라 그도 고개를 돌렸고 그가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사람은 료코였다.
그런데 료코의 시선은 자신이 아닌 그녀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등뒤에 있는 손으로 편지를 접은 뒤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고 료코를 향해 돌아섰다.
- 갑자기 무슨 일이지?
- 갑자기라뇨? 제가 온게 잘못된 거기라도 하나요?
- 연락도 없었잖아.
- 저 여잔 누구죠?
- 쇼타에게 못 들었나?
- 말을 해주지 않던데요?
- 알아서 생각해.
그는 그렇게 말하고선 료코를 지나 방을 나가버렸다.
료코는 그 자리에 서서 그녀의 차림새를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그리 비싸 보이지 않는 한복을 입고 있는 그녀를 보고 료코는 붉은 입을 열었다.
- 어떻게 된 거죠? 어떻게 타츠야의 집에 있나요? 하긴 알아듣지 못하겠지.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뒤돌아서 그가 나갔던 문으로 방을 빠져 나가버렸다.
그 두사람이 나가자 그녀는 천천히 문으로 다가가 문을 닫고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아 편지를 써내려 가기 시작했다.
"저, 집사님."
"네. 아가씨."
"부탁이 있는데 괜찮을런지요."
"부탁이요?"
"이 편지를 좀 붙여주셨으면 좋겠는데…."
"아, 고향으로 보내시는 것입니까? 이리 주십시오."
"고맙습니다."
그녀는 정말 즐거운 듯 보였고 집사는 그런 그녀를 보며 자신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콧노래까지 부르며 정원으로 나섰고 집사는 그런 그녀를 보며 고개를 숙여 편지를 보았다.
그리곤 이름을 확인하고 고개를 까딱여 보였다.
[장서후]
그런데 그때 자신의 앞에 누군가가 서는 것을 느꼈고 고개를 들어보니 그가 팔짱을 낀 채 앞에 서 있었다.
집사는 재빨리 편지를 뒤로 숨겼으나 그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숙이며 집사의 뒤를 바라보았다.
- 도련님. 이건 아가씨께서 붙여달라 하셔서….
- 아, 그 오라버니라는?
- 그런 것…같군요.
집사는 그렇게 말하며 그의 곁을 스쳐지나갔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그의 말에 자리에서 멈춰서버리고 말았다.
그의 말투가 평상시와 같지만 어딘가 모르게 강해 보여 그렇게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 내가 보면 안되기라도 하나? 쇼타 답지 않게 급한 행동이군.
- 아닙니다. 도련님. 제가 그럴 일이 있겠습니까.
집사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웃고는 집사의 곁을 스쳐지나 밖으로 나가버렸다.
집사는 한숨을 내 쉬고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편지를 다시 한번 내려다보았다.
깨끗하고 정갈한 글씨체.
한눈에 봐도 정성을 많이 들인 글씨라는 걸 알 수가 있었다.
다만 그에게 보여주지 못했던 건 그가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는 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를 봐온지 25년이 되는 세월동안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너무나도 잘 알기에 보여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돌담에 앉아 비단 잉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멀리서 그녀를 바라보던 그 역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비단 잉어들에게 빠져있는지 그녀는 그가 곁에 와 있는 사실조차
눈치를 채지 못했고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옆에 앉았다.
그런데도 그녀는 고개를 숙여 잉어들을 바라만 볼 뿐이였다.
"너희들은 좁은 연못에 갇혀 불쌍하구나."
- 불쌍해?
갑작스런 그의 목소리에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란 듯 순간적으로 몸에 중심을 잡지 못했다.
다행히 그가 팔을 뻗어 자신의 허리를 잡는 바람에 연못으로 빠지진 않았지만 창피함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는 조용히 그녀의 허리를 잡았던 손에서 힘을 뺐고 그녀는 한참동안이나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런 그녀를 보곤 조용히 웃어 보이고 자신의 주머니에서 잉어들에게 줄 사료를 꺼내보였다.
그리고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펴게 만든 다음 사료를 손에 한가득 부어주었다.
- 언제까지 날 뚫어지게 쳐다볼 셈이야? 뭐해? 안 던져주고?
그의 목소리에 그녀는 그제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사료들을 뿌려보았다.
잉어들이 고개를 수면위로 내밀고 조그마한 사료를 뻐끔거리며 먹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자신의 손을 움켜쥐며 사료를 연못으로 다 뿌려버렸다.
- 답답하게 하나씩 줄 셈인가?
그리곤 그녀의 손을 잡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 돌담을 걸어 연못을 건너 대무나 길로 걷기 시작했다.
5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당황한 그녀는 그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려고 했지만
그가 힘을 주어 잡았는지 쉽사리 빠지지가 않았다.
한참간을 씨름하던 그녀는 이제 포기했는지 손이 잡힌 채로 천천히 그에게 끌려갔다.
항상 그가 혼자 걸어갔었던 그 긴 대나무 숲이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숨을 들여 마시며 걷고 있었고 그녀는 그런 그의 얼굴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슬퍼졌다.
그는 항상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에 놀란 것처럼. 마치 무언가를 잃은 것처럼. 항상 그렇게 슬픈 얼굴 표정.
그래서 그런 그를 보면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아파왔다.
끝이 없을 것 같던 대나무 숲에서 벗어나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조그마한 정자였다.
그때 그가 손을 놓으며 그 정자쪽으로 걸어갔고 그녀는 천천히 커다란 연못을 돌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
연꽃이 만발해있고 바위 위에는 거북이들이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대나무 숲 뒤에 이런 곳이 있을 것이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그는 이미 정자 위에 올라가 난관에 걸터앉아 있었으며 멍하니 연못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가 혼자 있고 싶어하는 것 같아 그녀는 천천히 뒤 돌아섰다.
그리고 왔었던 대나무 길로 천천히 되돌아갔다.
다시 화단 앞으로 돌아와 자리를 잡고 앉으려 할때 걸어오는 집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재빨리 집사에게로 뛰어갔다.
"편지는요?"
"우체부에 전해주었습니다."
"정말 고마워요."
"소…중한 분이신가요?"
집사의 물음에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얼굴이 붉어졌다.
집사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를 지나 대나무 길로 향했다.
그녀는 재빨리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아 기도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찾게 해달라고. 오라버니를 빨리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그리고 아픈 표정을 짓고 있는 그가 웃는 표정을 짓게 해달라고.
한 참을 기도하고 있는 순간 갑자기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고 그녀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아까 그 여자였다.
그 여잔 자신의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그녀의 무릎 앞으로 던졌다.
엔화. 지폐들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무슨 영문인지 몰라 고개를 들어 료코를 바라보았다.
- 그 정도 돈이면 되겠죠. 당장 타츠야의 집에서 나가주세요.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든 채 료코를 바라보고 있었고 료코는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노려보듯 보고 있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지폐를 집어 들어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그녀쪽으로 뻗었다.
그녀의 의외의 행동에 료코는 다시 한 번 놀란 듯 했고 료코가 돈을 받지 않자
그녀는 료코의 손을 붙들곤 돈을 쥐어주었다.
- 이, 이봐요!
- 저와 도쿠가와 타츠야씨는 일종의 계약관계입니다. 함부로 깨지 못하는 관계라는 것도 잘 아실 테지요.
제가 이 집에서 일을 하고 제 몸값을 갚을 때까지는 나가지 못합니다.
단호한 그녀의 말과 유창한 일본어에 료코는 두 번 놀라고 말았다.
이제껏 자신에게 저딴 식으로 말을 하는 조선인은 없었다.
항상 자신의 말에 설설기고 일본이라면 설설기던 조선인들만 봐왔었다.
너무나도 당당한 그녀의 눈빛을 보며 료코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려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놀란 가슴을 추스르기도 전에 자신의 곁을 스쳐지나 나가버렸고
료코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 헛 짓 하지마.
차갑고 무미건조한 말투가 들렸다. 틀림없는 그였다.
료코는 떨고 있는 자신의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지 고개조차 뒤로 돌리지 못했다.
그는 방안에 뿌려진 지폐를 보고 눈살을 찌푸려 버렸다.
충분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만큼의 분위기라는 걸 그도 잘 느끼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걷더니 허리를 숙여 흩어진 지폐들을 주워 료코의 앞으로 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내밀었다.
료코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고 차가운 그의 눈빛에 다시 고개를 숙여버렸다.
- 돈으로 쫓아내려고 했나? 누구 마음대로? 니가 그럴 권리가 있나?
- 난 당신의….
- 나의 뭐?
- 그러니까 난…그러니….
- 니가 내 부인이라도 되나?
그의 말에 료코는 얼굴을 더 들지 못하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고 조용히 료코의 옆을 지나쳤다.
그리고 문턱 앞에 멈춰서 왼손을 주머니에 꽂은 채 입을 열었다.
- 두 번 다시 내 비위 건드리는 일 하지마.
니가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안도가와 도쿠가와가가 함께 가는 길이 힘들어 질지도 모르지.
친구로써인 너까지 잃고 싶진 않아.
그는 눈을 살짝 내려 깐 채 말했고 다시 눈동자를 바로 하며 그 방에서 빠져나왔다.
료코에게 어떤 식으로 모욕을 당했을지 그래서 상처받아 혼자 울고 있진 않을지 걱정이 되어 발걸음을 재촉했다.
예상대로 그녀는 화단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고 그는 거의 뛰다싶이했던 걸음을 멈추고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조그마한 어깨가 축 늘어 쳐져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을 뻔했다.
그의 옆에 집사가 섰고 그는 힘없이 고개를 돌려 집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집사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를 바라만 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기만 했다.
- 쇼타.
- 네. 도련님.
- 올해 니 나이가 쉰 여섯이였던가?
- 그렇습니다. 도련님.
- 집에 좀 다녀오는게 어때?
그의 말에 집사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웃어 보이며 오른손을 들어 올려 쇼타의 어깨를 감싸쥐었다.
쇼타는 고맙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때 마침 자리에서 일어서던 그녀와 눈이 마주쳤고 그녀의 모습에 그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틀림없이 울고 있을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웃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인지 쿡쿡 거리며 입으로 손까지 막고 있었다.
그러다 그와 눈이 마주쳐 재빨리 고개를 숙인 것이였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앞으로 걸어나갔다.
"저…."
- 니가 어떤 자리에 있는지 알고 있나?
"네?"
- 니가 말하는 일본인들이 어떤 사람이지?
"그건…."
- 조선을 지배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무슨 짓을 한건지 알고 있나?
안도가의 아가씨를 모욕하다니. 꽤나 간이 부었군.
"이봐요. 그…."
- 내가 봐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또 다시 차가워져버린 그의 말투에 그녀의 가슴이 철커덩 내려앉았다.
조금은 가까워졌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는 전혀 아니였는지 자신에게 차가운 말들을 퍼붓고 있었다.
전후사정도 모른 채 한쪽 말만 듣고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조국을 모욕하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던 료코는 자신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그이지만 친구로써인 자신을 걱정해주는 그의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료코는 뒤 돌아서며 다짐했다.
도쿠가와 후계자의 옆자리에 서겠다는 굳은 다짐.
료코가 돌아가고 나서 집안은 더욱 냉랭해져버렸다.
이미 며칠이 지난 지금 그 동안 쇼타는 자신의 집에 다녀왔고 그 뒤론 그의 모습도 한번도 볼 수가 없었다.
자신은 잘못을 하지 않았지만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식민지국의 백성이라면 이런 모욕을 당해도 되는 것이라고 자기 합리화를 시키려고 했다.
그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임을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힘없이 자신의 방을 나서 화단 앞으로 걸어갔다.
한참 물을 주고 있는데 하인들이 창고에서 부지런히 일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하면서도 그녀는 화단에 물을 뿌리기만 할 뿐 그들의 행동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 도련님. 오늘 일…말씀하지 않으실 겁니까?
쇼타의 물음에도 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고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댄 채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였다.
그때 쇼타의 옆에 여자 하인이 서며 조용히 말을 하였고 쇼타는 그에게 고개를 숙인 채 걸어갔다.
그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그녀가 하는 일을 보고 있었다.
한참을 물을 뿌리던 그녀가 힘이 든 듯 오른 팔을 들어 올려 소매로 이마의 땀을 닦고 허리를 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뒤 돌아섰고 돌아선 순간 쇼타와 함께 걸어오는 키가 커다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자신보다 조금은 커 보이는 키에 깔끔한 흰색 셔츠와 베이지색의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 누구지?
- 저…그게….
그녀는 기지개를 펴다가 뒤돌아서는 그를 발견했다.
재빨리 입을 열려고 했지만 며칠전의 일 때문인지 입이 쉽게 열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곧 그의 뒷모습 뒤로 비치는 한 사람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차 올랐다.
그녀는 재빨리 손을 들어 올려 눈물을 닦아버리고 밝게 웃었다.
"오라버니!"
6
그녀의 목소리에 집사와 남자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있는 힘껏 뛰어와 남자의 앞에 섰고 급히 숨을 몰아쉬었다.
그 남자는 웃는 얼굴로 손을 올려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잘 지냈느냐?"
"네. 오라버니. 오라버니께서도 잘 지내셨지요?"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맞잡은 채 마주보고 있었고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냉정했다.
쇼타 역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의 표정을 주시했고
하나의 변화도 없는 그의 표정에 안심이 되었지만 그녀의 행동에 불안해져왔다.
그런데 그 남자는 그녀의 손을 한번 힘을 주어 잡더니 그녀의 손을 놓고 그를 향해 돌아섰다.
그때까지 팔짱을 낀 채 비스듬히 서 있던 그가 팔을 내리고 몸을 똑바로 하고선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 남자는 자신의 앞으로 몇걸음 걸어오더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 장서후라고 합니다.
- 장…서후? 아, 난 도쿠가와 타츠야라고 합니다.
그가 먼저 손을 내밀었고 그 남잔 조용히 그의 손을 바라보더니 자신도 손을 들어 올려 그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그의 손과 차가운 남자의 손.
한참동안 잡았던 손을 서로 놓았을 때 그 남잔 자신의 주머니에서 하얀 봉투 하나를 꺼내었다.
그게 무엇인지 몰라 그는 그 봉투를 바라보았고 그 남자는 한번 더 봉투를 들어보였다.
- 우리 령후를 돌보아주신 사례금입니다.
- 사례금? 난 그런 걸 받을 필요따윈 못 느끼는데.
그의 말투에 남자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타츠야는 다시 팔짱을 끼고 비스듬하게 서서 서후를 바라보았다.
그런 타츠야의 모습에 서후의 눈썹이 씰룩거렸고
타츠야는 못 본 척 하며 몸을 돌려 화단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 버렸다.
서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쇼타에게 돈 봉투를 건네고 령후의 손목을 붙잡았다.
- 령후는 이제 데리고 가겠습니다.
서후는 그렇게 말하고 령후의 손목을 끌었다.
령후는 당황한 채 어쩔 줄 몰라하며 뒤를 돌아보았고 타츠야는 손을 뻗어 장미꽃을 하나 꺽었다.
그리고 곧 장미꽃을 든 하얀 손 사이로 그의 붉은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놀란 것은 령후 혼자 뿐만이 아니었다.
서후 역시 당황해서 어찌할 줄을 모른 채 그 자리에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였다.
- 도, 도련님!
- 그녀와 난 계약관계입니다. 계약이 끝나기 전엔 돌려보낼 수 없습니다. 계약은 약속이니까.
- 계약 위약금까지 드리죠.
- 내가 엄청난 위약금을 물고 늘어지면?
- 그렇게…멋대로인 사람입니까?
서후의 물음에 타츠야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붉은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손을 들어 올려 장미꽃의 봉우리를 자신의 코앞에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향을 마시듯 숨을 들여 마셨다.
- 음. 향이 좋군.
- 무슨 짓입니까!
서후가 크게 소리쳤다.
타츠야는 서후의 소리지름에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서후를 바라보았다.
서후는 기가 막히다는 듯 놀란 눈을 하고 쇼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쇼타는 아무런 표정 없이 타츠야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였다.
- 뭘 하시는 겁니까? 저렇게 다….
- 그렇다 당황하실 것까진 없습니다. 항상 있어왔던 일이었습니다.
요즘 들어 사라졌다고 생각했었지만 또 보게되는 군요.
서후는 집사의 말에 다시 한번 놀라고 말았다. 항상 있어왔던 일이라니….
서후의 눈에는 자기학대로 밖에 보이질 않았다.
령후 역시 놀란 듯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여전히 피를 흘리고 있는 타츠야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후는 주머니를 뒤지며 타츠야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곤 자신의 손수건을 타츠야의 앞으로 내밀었다.
타츠야는 아무 말 없이 그런 서후를 바라보았고 서후는 재빨리 손을 그에게 뻗었다.
하지만 그는 손을 자신보다 먼저 들어 올려버렸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을 펼쳤고 장미꽃은 힘없이 땅위로 떨어져버렸다.
- 고맙지만 필요 없소.
- 하지만 그러다….
- 파상풍이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그러냐?
이미 십년 넘게 이 짓을 해왔는데도 아무런 이상이 없으니 그걸로 된 거 아니오?
타츠야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하얀 셔츠에 그대로 손을 닦아버렸다.
하얀 셔츠에는 그의 붉은 피가 점점 스며들고 있었고 령후는 재빨리 뛰어가
자신의 하얀 저고리를 떼어버리고 그의 손을 빼앗다 싶이 쥐고서는 감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령후의 행동에 당황한 건 타츠야 뿐만이 아닌 서후까지였다.
저고리로 그의 손을 다 감고 나서야 령후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다는 걸 자각하고야 말았다.
"그래요. 오라버니. 계약관계라는 말을 먼저 꺼낸 건 저이니 계약이 끝나는대로 돌아가겠습니다."
"령…후야."
"걱정마세요. 건강한 모습으로 빨리 돌아갈테니까요."
부드럽지만 강하게 말하는 령후의 모습을 보며 서후는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손을 들어 올려 그녀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의 행동에 령후의 얼굴은 붉게 물들었고 서후 역시 그런 령후를 바라보며 또 다시 웃음지을 뿐이였다.
그리곤 자신의 주머니에 손을 넣어 종이 한 장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게 뭔가요?"
"내가 머물고 있을 곳이다. 언제든 찾아와. 그리고 이 집에서 나오는 날 함께 조선으로 가자꾸나."
"네. 오라버니."
- 그리고 돌아가자마자 혼례를 치루자.
서후의 갑작스런 일본말.
그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던 타츠야가 고개를 들었고 서후는 여전히 미소를 띈 채 령후를 바라보고 있었다.
타츠야에게 들으라고 하는 소리와 진배없었다.
타츠야 역시 알고 있는 듯 그리고 기가 막히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웃어 버렸고
쇼타는 그런 두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서로 경계하고 있는 눈빛이 뚜렷한.
하지만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무언가의 불안함.
쇼타는 연륜으로 그들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 타츠야가 팔짱을 끼고 있던 팔을 풀고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는 모습이 들어오자
모두들 타츠야가 인사를 하는 쪽으로 바라보았다.
흰색의 양장식 원피를 하고 하얀 모자를 쓰고 있는 중년의 부인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 사, 사모님.
- 쇼타. 잘 있었나요?
- 그렇습니다. 사모님.
쇼타는 갑작스럽진 않지만 뒷 정원까진 그녀가 올줄은 몰랐기에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고 말았다.
타츠야는 걸음을 천천히하며 걸어왔고 그녀의 앞에 서자 조용히 고개를 숙여보였다.
- 오셨습니까. 어…머니.
- 그래. 손을 보니 또 장미를 꺽은 모양이구로구나. 괜찮니?
- 괜찮습니다. 날이 조금은 덥습니다. 안채로 들어가시죠. 쇼타. 모셔.
- 알겠습니다. 도련님.
곧 쇼타가 앞장섰고 부인 역시 쇼타의 뒤를 따랐다.
타츠야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부인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리고 서후는 저고리에 감긴 타츠야의 주먹이 조금씩 떨리고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한참동안 그의 주먹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그가 뒤 돌아섰다.
그리곤 자신과 영후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고 서후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들어 올려
령후의 어깨를 감싸쥐고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타츠야는 그런 서후의 모습을 보고 비웃기라도 하듯 코웃음을 치며 팔짱을 꼈고
그들의 앞에 다다르자 걸음을 멈춰 세웠다.
- 만나뵙게 되어 즐거웠습니다.
- 저 역시 그렇습니다.
- 조선의 남자들이란 원래 그러한가?
- 무슨….
- 아닙니다. 그럼 이만 실례해보겠습니다.
존대는 하면서도 적당히 시건방진 말투.
타츠야의 말투에 서후는 미묘하게 자신의 신경이 거슬리는 것을 느꼈다.
타츠야는 고개를 약간 숙여보이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드는 순간 령후와 눈이 마주쳤고 타츠야는 다시 코웃음을 치며 뒤로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혼례? 퍽도 재미있는 생일 선물이군."
그렇게 말하며 타츠야가 사라지자 서후는 놀란 듯 령후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령후는 그가 이미 사라져 보이지 않는 곳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본디 심성이 여리고 착했던 그녀인지라 그의 상처가 걱정되었을 뿐이라고 단정지으며 그녀를 돌려세웠다.
"조선어를 구사할 줄 아는 것이더냐?"
"네? 아. 그렇습니다."
"윤 진사 어르신은…."
서후의 물음에 령후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어버렸고 이내 고개를 숙이며 고개를 천천히 좌우로 흔들었다.
서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걱정말거라. 내가 찾아서 꼭 모시고 올 것이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리거라."
"네. 오라버니. 믿고 있을게요."
"니가 이 집에서 나오는 그 날 바로 일본을 떠날 것이다.
물론 윤 진사 어르신과 함께. 그러니 너무 걱정 말거라. 그리고…."
서후의 말이 끊겼고 령후는 천천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 없이 웃어버리기만 할 뿐이였다.
서후는 그녀의 어깨를 놓고 뒤 돌아서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 역시 그의 뒤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대문으로 가는 길까지가 이렇게 짧은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였었다.
하지만 그와 함께 걷는 이 길은 무척이나 짧았다.
대문 앞에 다다랐을때야 그가 뒤 돌아섰고 그녀 역시 걸음을 멈춰 세웠다.
이미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 올라 있었고 그 눈물은 볼 위로 조금씩 흘러내렸다.
서후는 손을 들어 올려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여전히 울보아가씨로구나. 걱정말고 들어가거라."
"오라버니. 다녀오십시오."
"그래."
그가 천천히 뒤 돌아섰고 흐릿하게 보이던 그의 뒷모습이 이내 많은 사람들 사이로 묻혀져 버렸다.
그녀는 손을 들어 올려 눈물을 다 닦아버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이미 사라져버린 그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자리에 못이 박힌 듯 쉽사리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냥 모든 걸 관둬버리고 따라가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타츠야의 상처 때문에…그의 상처 때문에.
그리고 이미 그렇게 무작위로 가시가 있는 꽃을 꺽어 버린지가 십년도 넘어버렸다는 이야기에
서후를 따라 쉽게 갈 수 없는 이유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단지 그가 불쌍해서 그러는 것이라고
단지 그의 다친 손이 걱정이 되어서 그러는 것이라고 단정지으며 두 주먹에 힘을 주었다.
- 따라가.
7
갑작스런 그의 목소리에 뒤돌아보니 대문에 몸을 기댄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몸을 일으키며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녀는 재빨리 안으로 뛰어 들어갔지만 이미 그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한참동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발걸음을 천천히 떼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화단 앞엔 그가 앉아 있었다.
두 팔을 뒤로하고선 고개를 젖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프지 않아요?"
그녀의 물음에도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두 팔을 떼버리고 그대로 뒤로 누워버렸고 그녀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곁으로 가서 앉았다.
그런데 그가 팔을 들어 올려 그녀의 팔을 끌어 당겼고 그의 힘에 그녀 역시 그대로 잔디밭에 누워져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하얀 뭉게구름이 떠다니는 파란 하늘이었다.
"하늘은 조선이나 일본이나 똑같을 거야."
"그런가? 모르겠어요. 한번도 이런 식으로 하늘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그녀의 말에 그는 픽 웃어버렸고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손을 내미려다가 그냥 혼자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 그녀를 보고선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 니가 누구를 닮았어. 그래서…내가 이러는 거야.
"네?"
그녀는 순식간에 그에게 안겨버렸고 그는 한참동안 그녀의 어깨를 얼굴을 묻고 있었다.
그녀는 몸에 힘을 주며 그를 떼어내려고 했지만 그는 강한 힘으로 그녀를 붙잡고 있었고
그녀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그의 허리를 살며시 감싸안았다.
그런데 그는 갑자기 그녀의 어깨를 잡더니 그녀를 떼어내 버렸고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놀란 건 그녀였다.
그는 항상 갑작스런 행동을 해서 그녀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런데 걸어가던 그가 갑자기 휘청이며 쓰러져버렸고 그녀는 재빨리 뛰기 시작했다.
처음엔 장난인 줄 알았지만 그의 얼굴은 붉었고 이마에 손을 대어보니 열이 불덩이 같았다.
그때마침 저 멀리서 쇼타가 뛰어오고 있었고 쇼타는 그를 업었다.
방문 앞에서 기다리기를 한시간.
그의 어머닌 이미 돌아가신 뒤였고 많은 손님들도 돌아간 뒤였다.
곧 문이 열리며 의사와 간호사가 나왔고 쇼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손짓하였다.
그녀는 천천히 방안으로 들어갔고 창백한 얼굴로 누워있는 그의 모습이 그녀의 눈에 비쳤다.
"갑자기 왜 이런거예요?"
"생각보다 손의 상처가 깊었던 모양입니다.
곧 괜찮아 지실테니 아가씨께서 옆에서 간호 좀 해주십시오.
저는 잠시 본가에 다녀와야 겠습니다."
"네? 아, 알겠어요. 다녀오세요."
"그럼."
집사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방을 빠져나갔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그의 이마에 있는 천을 걷어내고 손을 대어봤다.
열은 다행히 아까보단 많이 내린 모양이였으나 다시 찬 물에 적셔 그의 이마 위에 올려두었다.
어느덧 해가 져버렸는지 방안이 캄캄해졌고 그녀는 전기불을 켜려다 초를 켜서 방을 밝혔다.
그가 눈을 뜨자 초의 은은한 밝기에 방의 천장이 눈에 들어왔고
고개를 돌렸을땐 그녀가 무릎을 세운채 고개를 숙이고 잠을 자고 있었다.
그는 지끈대는 이마를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하지만 무리였는지 다시 자리에 누워버리고 말았고 그의 기척에 그녀는 깜짝 놀란 듯 잠에서 깨었다.
그는 한 팔을 이마에 올린 채 누워있었고 그의 이마에 올려져 있던 천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괜찮으신…."
- 걱정말고 나가.
"하지만…."
- 걸리적거리니까 더 피곤해.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고 고개를 숙이고 난 뒤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막 방문을 열려고 할 때 그가 입을 열었다.
- 내일 아침 떠날 준비해.
"그렇게는 못하겠습니다."
- 뭐?
"계약을 이수할때까진 남아있어야겠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쉬쉽시오."
- 하, 조건 없이 놓아준다고 해도 안 간다? 잔소리말고 준비해.
그는 그렇게 말하며 돌아 누워버렸고 그녀는 방문을 닫고 나와버렸다.
그리고 막 자신의 방으로 가려 신발을 신는데 쇼타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빨리 신발을 신고 쇼타를 향해 고개를 숙여보였다.
"깨어나셨어요. 방으로 가보겠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쇼타의 곁을 스쳐지나갔고
쇼타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돌리려던 몸을 멈추고 그녀를 불러세웠다.
쇼타의 목소리에 그녀는 뒤 돌아섰고 쇼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이…아니, 12시가 지났군요. 어젠 도련님께서 태어나신 날이였습니다."
"아…몰랐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가를 다녀왔는데 아무래도 안도가의 아가씨와 약혼식을 올리게 되실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축하한다고 전해주세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곤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그래서였을까.
그가 생일선물이라는 말을 내뱉었을땐 무슨 말인지 몰랐었지만 지금은 알 것 같았다.
쇼타는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혼자 한숨을 내쉬어 보였다.
그리고는 자신도 천천히 뒤돌아섰다.
쇼타가 방안으로 들어서자 그는 자리에 일어나 앉아 있었고
쇼타는 고개를 먼저 숙이고는 무릎을 꿇어 자리에 앉았다.
- 괜찮으십니까?
- 이 정도 가지고 죽진 않겠지.
- 도련님!
- 내일 떠나라고 말했어.
- 어찌….
- 그녀가 곁에 있을수록 더 힘들어 지는 건 나라는 걸 깨달아버렸으니까.
왜 하필이면 내 앞에 나타났을까. 다른 사람도 아닌 내 앞에….
그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자리에 누워버렸고 쇼타는 그런 그를 보며 고개를 돌려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 고개를 돌린 채 서로의 생각 속으로 빠졌다.
아침은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평온했다.
그녀는 오늘도 역시 화단에 물을 주며 하루를 시작했다.
그때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장미꽃의 가시였다.
아무 생각 없이 장미꽃에 손을 뻗는데 누군가가 자신의 팔을 잡아 당겼다.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그가 자신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 함부로 만지지마.
"그게…."
- 떠나라고 말했을텐데…. 내가 연락 넣어 주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팔을 놓아버렸다.
그리고 천천히 뒤돌아 걷기 시작했고 그녀는 멍한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날 이렇게 데려온 건 당신이였잖아. 그래. 자꾸 잊어먹어. 당신이 일본인이라는 것을.
그렇게 소원이면 내 발로 내가 나갈테니 그렇게 닦달하지 마시죠! 도쿠가와상!"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들고 있던 호수를 내 던져버리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곤 들어오자마자 가방을 열어 옷가지들을 집어넣고 가방을 닫은 다음
서후가 건네주었던 쪽지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오는데 쇼타가 앞에 서 있었고 그녀는 쇼타를 향해 고개를 깊히 숙였다.
"그 동안 감사했어요. 아저씨. 이제 가볼게요. 수고하세요."
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그 집을 빠져나가 버렸다.
쇼타는 그런 그녀를 잡으려 했지만 결국 잡지 못했다.
그리고 발걸음을 뒷 정원으로 옮겼다.
그가 잔디밭에 누워 한쪽 팔을 이마에 얹은 채 하늘을 보고 있었고 쇼타는 천천히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는 그 자리에 누워 미동도 않고 눈만 질끈 감아버렸다.
- 왜 그러셨습니까.
- 그러는게 좋을거라 생각했어.
- 본가에서 조만간 불러들이신다 하십니다.
- 그래?
- 왜 약혼을 하신다 하셨습니까.
- 그러면 내게 결혼을 밀어붙이지 않을테니까. 약혼이라도 해주면…그럴테니까.
그는 그렇게 말하며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쇼타 역시 그의 뒤에서 걷기 시작했고 그는 천천히 대나무 숲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항상 이 숲을 걸을때마다 걸음이 늦어진다.
이 곳에 머물고 싶어서 일까. 아니면…어떤 누군가가 생각나서일까.
그는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리며 대나무 숲을 바라보았다.
사계절동안 항상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는 대나무.
그 대나무 숲을 어린시절부터 유난히 좋아했던 그였다.
- 이 곳도 이렇게 볼 날이 멀지 않았군.
- 도련님.
- 본가에서 불러들이기 전에 위에서 연락이 오겠지.
- 그게 무슨…?
쇼타의 물음에 그는 그냥 웃어 보이며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팔을 뻗어 대나무를 만져보았다.
쇼타는 그런 그를 보며 알 수 없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그도 뒤돌아 쇼타를 바라보았다.
- 조선 경찰청 경감으로 발령되겠지.
8
령후는 한참동안이나 어떤 집 앞에서 서성대고 있었다.
분명 손에 들고 있는 쪽지는 서후가 건네주었던 그 쪽지였고 주소도 맞아떨어지는 집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있게 계약기간이 끝날때까지 걱정말라 말해주었는데 이제와 들어가기가 어려웠던 것이였다.
이렇게 서성이기도 세시간째.
점점 다리가 아파와 결국은 그 집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버리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타츠야의 몸이 움찔했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쇼타는 아무 말 없이 타츠야의 왼손을 잡아주었고
타츠야는 그런 쇼타의 행동에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막 문을 열고 내리려고 하는 순간 서후가 자신의 차 앞을 뛰쳐 지나갔다.
그는 손에 닿았던 손잡이를 놓아버리고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령후야!"
"어? 아, 오라버니."
령후는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엉덩이를 털었다.
서후는 그런 령후의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릴 수 밖에 없었고
령후는 쑥스러운지 한 손을 들어 입을 가린 채 웃어보였다.
그런데 그때 서후는 령후의 옆자리에 자리하고 있는 가방을 발견했고 다시 고개를 돌려 령후를 바라보았다.
"저 가방은…."
"아, 별거 아니에요."
"니가 떠날 때 가지고 갔었던…."
"중요한게 많이 들어있으니까요. 그래서 가지고 다녀요."
령후는 순간적으로 거짓말이 입에서 튀어나왔고
의외로 거짓말이 술술 나오는 자신을 보며 한편으로는 놀라면서도 불안했다.
그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서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령후의 가방을 들었고 곧 옆에 있는 찻집으로 들어섰다.
령후는 처음으로 와보는 찻집의 분위기에 이리저리 둘러보았고
그런 령후를 보며 서후는 웃어 보일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곧 따뜻한 차가 앞에 나왔고 서후는 찻잔을 들어 천천히 마셨다.
"저…아버지는…."
"백방으로 수소문해보고 있는데 아직 못 찾고 있구나. 조금만 기다려보자.
곧 찾을 수 있을게야. 그래. 일이 힘들진 않니?"
"힘들긴요. 그냥…꽃 돌보는 일밖에 하는게 없는 걸요."
서후는 령후의 표정을 보고 웃으며 찻잔을 놓았고 손을 뻗어 령후의 모아져 있는 두 손을 잡았다.
령후의 손은 서후가 한손으로 잡아 감싸 쥘 만큼 작았다.
"우리 아가씨 더 커야겠군요. 손도 이렇게 작고…."
"오라버니 손이 큰 거잖아요."
"그런가?"
"그럼요. 거기다 오라버니 키가 보통 키예요? 거인이라구요. 거인."
예전의 령후로 돌아온 것 같은 표정과 말투에 서후는 말 없이 웃어 보였고
서후의 웃음 때문에 토라졌는지 입을 삐쭉 내보였다.
그녀는 되도록 많은 웃음을 보여주려고 애를 썼고 다행히 서후는 그녀의 처지를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결국 찻집에서 나와 서후는 가방을 들어 데려다준다 성화였고
령후는 겨우 서후의 손에서 자신의 가방을 빼앗아 들었다.
"아니예요. 그냥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오라버니는 들어가세요."
"그래도 날도 곧 어두워질…."
"그러니까 들어가시라구요. 전 괜찮으니까요. 가볼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서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을 흔들어 주며 그녀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고 그녀가 보이지 않자 웃었던 얼굴의 근육이 풀어지며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주위를 경계하듯 둘러보며 자신이 기거하고 있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 출발해.
- 네. 도련님.
타츠야는 그런 서후의 모습을 보며 의아하다고 느꼈다.
령후와 있을땐 그리도 온화한 미소를 짓더니 령후가 보이지 않자 비정함이 감도는 표정이라니….
두 번째 보는 얼굴이였지만 다양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판단되었다.
- 쇼타.
- 네. 도련님.
- 장서후가 누군지 알아봐.
- 알겠습니다.
타츠야는 다시 고개를 돌려 그가 들어간 집을 바라보았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곧 이어 도착한 집 앞엔 그녀가 서 있었고 그는 예상했다는 듯 웃으며 차에서 내렸다.
곧 그의 기척에 놀랐는지 그녀는 고개를 숙여버렸고 그는 그런 그녀를 보며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고 짧게 웃었다.
그런 그의 행동에 그녀는 기가 눌린 듯 고개를 숙인 채 움직이지 않았고 곧 쇼타가 그들의 곁으로 다가왔다.
- 쇼타. 들어가 있어.
- 알겠습니다. 도련님.
쇼타는 고개를 숙여보이고 집 안으로 들어갔고 그는 차에 기댄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고개를 들어 보였고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표정에 그 역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 제 발로 나간 사람이 이 곳에는 왠일이실까?
"부탁이 있어서 왔습니다."
- 부탁?
"게으름 피우지 않고 열심히 일할테니 며칠간만 말미를 주세요."
- 오호라. 그렇다면 여태껏 게으름을 피웠다?
"그건 아니지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여버렸고 그는 그런 그녀를 보고 웃으며
그녀의 곁을 스쳐지나가며 그녀의 가방을 들었다.
그의 행동에 놀란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들었고 그녀의 표정에 그는 웃으며 고개짓을 해보였다.
- 안 들어 올 건가?
그의 장난스런 표정에 그녀는 웃어 보였고 그는 웃으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의 뒤를 따라서 그녀 역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던 서후는 주먹을 쥔 채 옆에 있는 벽을 내려쳤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도쿠가와 집을 나왔다는 것을.
하지만 곧 말해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끝끝내 아니라며 말을 해주지 않았고 다시 도쿠가와 집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그녀가 하는 행동이 지금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한가지 분명한 건
서후로써는 굉장히 씁쓸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행동이었다.
서후는 어쩔 수 없이 뒤 돌아섰고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꽂은 채 힘 없이 길을 걸었다.
그녀는 하루만에 들어온 방안에 꼼짝없이 앉아만 있었다.
곧 쇼타가 방안으로 들어섰고 그녀는 빨리 자리에서 일어나며 쇼타를 맞이했다.
쇼타는 그런 그녀의 행동을 보며 입을 가리고 웃어보였고 그녀는 왜 그러냐는 듯 눈을 크게 떠보였다.
"하루종일 힘드셨죠?"
"네? 아니예요."
"밥은…."
"괜찮아요."
그녀가 밝게 웃어 보이며 말했고 쇼타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갔다.
쇼타가 나가자 그녀는 가방을 열어 자신의 수첩을 꺼내들고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듯 해 자리에서 일어나 창을 열었고
정원 잔디밭에 앉아 그가 뭐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냥 신경쓰지 말자고 생각하고선 다시 자리에 앉았지만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정원으로 향해 걷기 시작했다.
달빛에 비친 그의 모습이 정말 근사하다고 생각했다.
반듯한 이마에 오똑 솟은 얇은 콧날. 그리고 붉은 입술에 갸름한 얼굴.
남자치고는 하얀 피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눈치챘던건지 그는 고개를 돌려
턱을 밑으로 한번 까딱해 보이며 이리 오라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의 표정에 가만히 서 있던 그녀는 천천히 걸으며 그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직 밤 기운이 차네요."
- 그런가?
"어제가 생일 이었다면서요? 죄송해요. 그것도 모르고…. 알았다면 조그마한 선물이라도…."
그녀의 말에 그는 코웃음을 쳤고 그녀는 그에게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렇게 말했던 것인데 그는 코웃음만 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자신의 손목을 잡아끌어 당겼고 너무나 놀라 눈을 꾹 감고
다시 눈을 떴을땐 그의 얼굴이 바로 자신의 얼굴 앞에 있었다.
고개를 재빨리 뒤로 빼며 눈을 깜박거렸고 그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조그마한 선물? 가령 어떤거?"
"예? 아…그냥 뭐. 자수라도…."
"자수도 놓을 줄 알던가? 보기보다 요조숙녀로군. 그래."
"제가 이래뵈도 자수를 얼마나 잘 놓는다구요. 잘 안해서 그렇지."
"자수 놓는 걸 우리 어머니도 즐겨하셨지."
"아…어제 그 분이요?"
그녀의 물음에 그의 얼굴에 걸쳐져 있던 미소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고
그의 표정변화에 그녀는 혹 실수라도 한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그는 씩 웃으며 그녀의 팔몰을 놓고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쉬었지만 그의 말에 안도했던 숨을 다시 멈출 수 밖에 없었다.
"그 분은 친어머니가 아니야."
"네?"
"내 어머닌…저기 계시지."
"네? 어디요?"
그녀의 물음에도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잠시 후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모르던 그녀는 곧 그의 뜻을 알아차렸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곧 손을 들어올려 그의 어깨를 쳤다.
"사내대장부가 뭐 그런 거 가지고 우울해하고 그래요? 어? 눈에 눈물 고였네? 피. 재미없다."
일부러 쾌활한 듯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를 알아들었던지 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향해 웃어보였다.
그녀는 그런 그를 보고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곧 그녀의 표정도 우울해지고 말았다.
"우리 엄마도 도련님 어머님과 같은 곳에 계세요."
"뭐?"
"아버지도…그렇게 하늘로 가셨는지는 모르겠지만…."
9
그녀의 말에 그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고 그녀는 별것 아니라는 듯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곧 울 것 같은 그녀의 눈에 그는 주머니에서 자신의 손수건을 꺼내주었고
그녀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자신의 소매로 흘러나오는 눈물을 쓱 닦아버렸다.
"일본에 온 건 아버지를 찾기 위해서 왔던 거였어요.
사실은 이미 돌아가셨을 거라는 주위의 만류에도 뿌리치고 온 건데 갈수록 희망이 없어져요.
살아 계실거라는 확률도 거의 없지만 그래도 시신이라도 거두어 갈 수 있을까해서요.
타국에서 눈도 못 감으실 것…같아서요."
결국 그녀의 말끝이 흐려졌고 이내 많은 눈물이 그녀의 눈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에 올리려다 주먹을 쥐어버리고 손에 들고 있던 손수건을 그녀에게 건넸다.
하지만 그녀가 받지 않자 그녀의 손을 잡아 힘을 주곤 손바닥 위에 자신의 손수건을 내려놓았다.
그의 행동에 그녀는 피식 웃고 말았다.
얼굴은 심통난 어린 아이같은 얼굴을 하고선 자신을 위로하는 모습이라니….
"도련님. 그거 알아요? 차가운 줄 알았는데 따뜻한 모습도 있고 또 따뜻한 줄 알았는데 무서운 모습도 있고.
무서운 줄 알았는데 의외로 착한 모습도 있고. 아, 실례가 되었다면 죄송해요."
그는 그녀의 말을 듣곤 피식 웃어버렸고 그가 웃자 그녀도 덩달아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서 걷기 시작했고 그녀 역시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그래."
그녀는 그의 말을 듣고 재빨리 고개를 숙인 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런 그녀의 행동을 보고 그는 소리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참으로 이상한 여자였다.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했고 난처한 일을 겪고 있으면 보기가 안쓰럽고 금방 눈물을 지었다 또 금방 웃는.
아침이 되자마자 쇼타는 재빨리 타츠야의 방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미 일어났는지 방에 없었고 뒷 정원으로 나와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만 화단에 서서 꽃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대나무 숲쪽에서 걸어오는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 쇼타.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
- 우선 방으로 들어가시죠.
그녀는 화단에 물을 주며 쇼타를 바라보았다.
평상시 같았으면 자신에게 인사를 했을테지만 쇼타는 뭐가 그리 급한지 그를 끌고 가듯 걷고 있었다.
그녀는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그 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화단에 물을 주기 시작하였다.
- 지금 뭐라 했나?
- 아가씨의 아버진 독립운동가들의 뒤를 돌보아주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도련님께서도 이름은 들어보셨겠죠. 윤석진이라고 합니다.
타츠야는 자리에 앉으며 쇼타가 하는 말을 들었고 쇼타 역시 그렇게 말하며 타츠야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타츠야는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헛웃음을 내보였고 쇼타 역시 당혹스러운 듯 손을 들어 올려 입가를 쓸었다.
윤석진이라면 타츠야 역시 잘 알고 있는 인물이였다.
만주에서 활동을 하며 독립운동가들과 학생들을 절대적으로 후원해주는 조선의 뼈대 높은 집안.
거기다 현재 일본총독부에서 독기를 품고 찾고 있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아버지를 찾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왔다고 했었다.
그리고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단정짓고 있었다.
- 일본으로 건너왔다는 소문도 돌던데 혹 일본에서 봐주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그래. 있겠지. 타스케. 일본 야쿠자 조선지부를 맡고 있다 하던가?
- 그렇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야쿠자는….
- 본래 조선인이라고 했었던 것 같은데. 아냐, 그 다음은?
- 장서후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쇼타의 말에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쇼타를 바라보았다.
눈에 힘을 주며 이성을 차리려 했지만 장서후라는 말에 순식간에 마음 한구석이 쓰라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현재 나이는 도련님과 같고 독립 운동을 하는 학생이라고 합니다.
현재는 경성대학 법학과에 재학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령후 아가씨와는….
쇼타는 말을 끊었고 그는 감았던 눈을 떴다.
쇼타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고 그는 괜찮다는 듯 손을 들었다.
- 정혼한 사이라고 합니다.
- 정혼?
- 그렇습니다. 집안과 이어진지라 태어날때부터 그렇게 정해져….
- 그래서 이름 끝자가 같나?
- 그렇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일본에 와 있습니다.
그때 막 누군가가 방 문 앞에 꿇어앉아 바닥을 두드렸고 쇼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 문을 열었다.
여자 하인이 무릎을 꿇은 채 고개까지 숙이고 있었다.
- 무슨 일이던가?
- 본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 알았다. 가서 볼 일 보거라.
그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서 옷을 갈아 입기 시작했다.
단정한 제복으로 갈아입으며 한숨을 내쉬고 본가로 향하였다.
"도련님!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요? 어디에 계신다고 하십니까?"
"타스케씨라고 하는데…."
"알겠네. 어서 주소를 이리 주게."
"여기 있습니다."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는 서후에게 종이를 건네주었고 서후는 웃옷을 입으며 걷기 시작했다.
주소에 적어져 있는 집이 가까워져 올수록 서후는 긴장이 엄습해왔고
그 집에서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친절하게 그를 맞이했다.
커다란 정원이 돋보이는 일본 전통 가옥이였다.
정원에는 누군가가 앉아 있었고 그는 단박에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아버님!"
그의 목소리에 곧 앉아 있던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돌아보았고 곧 버선발로 뛰어오며 그를 맞이했다.
그리고는 그의 두 손을 꼬옥 잡았다.
그 역시 얼굴엔 한가득 미소를 머금고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사람의 두 손을 역시 쎄게 잡았다.
"령후는? 령후는 보았는가?"
"만나보았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이제 조국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령후가 걱정이 많았겠구먼."
"걱정마십시오. 이렇게 아버님께서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면 금방이라도 이리 달려올 듯 할 것입니다."
석진은 서후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고 서후 역시 그런 석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곧 서후를 안내하며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많은 사람들이 집 안 구석구석 배치되어 있었고 방안으로 들어서자 정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서후는 그 남자를 한번 훑어보고서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 장서후라고 합니다.
"그래. 듣던대로 아주 미남이구만. 자리에 앉게."
"조선어를 할 줄 아십니까?"
"내 한국 이름은 선우인일세. 만나서 반갑네."
그의 말에 서후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떠보였고 석진 역시 그런 서후의 표정을 보며 미소지어 보였다.
서후는 다행이라는 듯 입 밖으로 소리를 내며 숨을 쉬었고 그런 그를 보며 우인은 입가에 환한 웃음을 띄었다.
- 지금 뭐라고 했느냐!
- 약혼은 하지 못합니다.
- 네 이놈!
- 청일전쟁이 끝이 난지도 얼마되지 않았고 저는 곧 있으면 조선의 경찰청으로 발령될 것입니다.
거기다 혼인을 서둘러야 할 만큼 나이도 많지 않습니다.
- 넌 이 집안의 하나밖에 없는 자손이다!
- 그 정도쯤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 솔직히 말하거라. 료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냐.
아니면 니가 마음에 두고 있는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이냐!
그의 아버지의 목소리에 그는 더 이상 들을 말도 할 말도 없다는 듯 고개를 힘 있게 숙이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예외의 행동에 방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 놀란 듯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고
그의 아버지는 들고 있던 칼집을 그에게로 던졌다.
곧 칼집은 그의 가슴을 맞고 땅바닥 아래로 떨어졌고 그는 허리를 숙여 칼집을 주워
천천히 그의 아버지 앞으로 가 단상에 칼집을 두고 뒤로 돌아섰다.
- 네 이놈!
- 아버지껜 드릴 말씀도 들을 말씀도 더 없는 것 같습니다.
조선으로 떠나는 날 인사드리러 오겠습니다.
- 이 자리에서 말하거라! 료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냐!
- 그녀는 친구 이외의 감정을 느껴본 적이 한시도 없습니다.
아버지가 제 어머니께 그랬던 것 처럼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 방문을 거칠게 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쇼타는 그의 행동에 어쩔 줄 몰라하며 자리에서 일어섰고 자신의 오래된 친구인 도쿠가와 타쿠야.
즉, 타츠야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 나도 이만 물러나겠….
- 저 아이가 요 근래…그녀를 생각한 적이 있던가?
- 항상 그 대나무 숲을 가지. 그리고 생일날도…아마 생각했을 것이야.
- 내가 집안 등쌀에 떠밀려 그녀와 혼인을 올리지 않았더라면 자네가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었을테지.
- 아니네. 난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을 거야.
그녀는…도쿠가와 타쿠야만 죽을때까지 사랑했으니까.
타츠야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쇼타가 저런 말을 하길 바라지 않았다.
차라리 당신때문이라고 외쳐주기를 바랬다.
커다란 정원을 한참을 걸어 대문 밖을 빠져나와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몸을 멈춰세웠다.
그리고는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입을 열었다.
- 장서후씨로군.
10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서로의 눈을 마주보며 웃고 있었다.
하지만 곧 서후는 의외라는 듯 그의 앞으로 다가왔고 타츠야 역시 차에 기대 기울어져 있던 몸을 똑바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곤 서후를 향해 손을 내밀었고 서후 역시 한쪽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서로 기분좋게 웃고 있는 듯 했지만 생각은 따로 잠겨 있었다.
"그만 놓으시죠?"
서후의 말에 타츠야는 그제서야 감탄사를 연발하며 잡고 있던 손을 놓았고 자신이 실수했다는 듯 웃어 보였다.
그때 쇼타가 커다란 대문에서 나오고 있었고 타츠야는 그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쇼타는 막 문을 나서는 순간 눈에 들어오던 광경에 잠시 당황했지만 곧 웃으며 서후를 맞이했다.
"안녕하십니까."
"네. 안녕하셨는지요."
"그런데 어쩐일로…."
"도쿠가와씨께 드릴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서후의 말에 타츠야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빳빳히 듯 채 자신을 마주하고 있는 모습이랑 여지껏 조선인들에게선 보지 못하던 모습이였다.
항상 자신의 앞에선 허리를 낮추고 고개를 숙였으며 저런 자신감따윈 보지도 못했었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처음부터 저 일관된 자신감으로 그의 앞에 당당히 서 있었다.
"무슨 말씀이시길래 본가까지 찾아오셨을까."
"이제 조선으로 떠날까합니다."
"아, 그래서 윤령후를 데리고 가겠다?"
"그렇습니다."
"그렇게하시죠. 쇼타. 가지."
타츠야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돌려 차 문을 열어 자리에 앉아버렸고
쇼타는 재빨리 서후를 향해 고개를 숙여보이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서후는 떠나는 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분명 그가 령후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저렇게 차갑도록 대하는 모습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다.
당혹해하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자신의 착각이였다는 걸 그의 행동을 향해 깨닫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타츠야는 한쪽 팔을 괸 채 한참동안 생각에 빠져있었고 그런 그를 보며 쇼타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타츠야를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자신인데 지금 타츠야의 감정을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입을 다물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타츠야는 정원으로 향하기 시작했고 쇼타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남모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여전히 화단에서 꽃들을 돌보고 있었고 그런 그녀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오자 더욱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오른손을 뻗어 장미가지를 움켜쥐고 꺽어버렸고 그런 그의 모습에
그녀는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상관도 하지 않고 계속 걷고 있었고 그녀는 재빨리 손수건을 집어 들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
언제나 그가 말 없이 혼자 걷던 길.
그 대나무 숲이였다.
그의 걸음이 어찌나 빠르던지 그녀는 이제 숨이 턱까지 차오를 지경이 되었고
어두운 대나무 숲을 벗어나자 환한 빛이 새어나오는 조그마한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여전히 조그마한 정자 난관에 걸터앉아 있었고 그녀는 천천히 그 정자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그를 향해 손수건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는 연못만 바라보고 있었고 그녀는 어쩔 수 없어 자신도 그의 앞에 앉아 그의 손을 끌어당겼다.
그녀의 그런 행동에도 그는 움직이도 않았고 여전히 멍한 눈으로 연못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 곧 장서후가 올 것이다. 그러니 떠날 준비 미리 하고 있거라.
"네?"
- 알아 들었으면 이만 가봐.
그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수건을 다 동여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보이고 뒤로 돌아섰다. 정자 계단을 터벅터벅 내려와
연못 주위로 걷다가 뒤를 돌아 그를 바라보았다.
연못을 보고 있는 것인지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의 곧 울 것 같은 표정에 그녀는 다시 정자위로 올라갈까 생각했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며 뒤 돌아섰다.
대나무 숲을 천천히 걸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빼곡이 세워져 있는 푸른 대나무들은 왠지 차가워 보여 꼭 그를 보는 것만 같았고
이내 고개를 흔들며 그의 생각을 지워버리려 애를 썼다.
대나무 숲을 빠져나와 돌담을 건너는데 눈에 들어온건 화단 앞에 서서 꽃들을 보고 있는 서후였다.
"오라버니!"
"그래. 령후야."
"어쩐 일이세요. 이렇게 갑자…아…."
"응?"
"아니예요."
"이제 조선으로 돌아가자꾸나."
령후는 순간 놀란 듯 눈을 크게 떠보이며 서후를 바라보았고 서후는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아버지…."
"그래. 찾았다."
"살아는 계신가요? 잘 계세요? 몸은요? 건강하세요?"
"허어, 숨 떨어지겠구나. 그래. 잘계시다. 물론 건강하시고. 널 많이 보고 싶어하신다.
내가 도쿠가와씨껜 말씀을 드려놨으니 짐을 쌓거라. 오늘 오후에 출발이다."
서후의 말에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너무 기뻐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하고 있는데 그때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서후의 뒤에 서 있는 쇼타였다.
그녀는 잡고 있던 서후의 손을 놓으며 쇼타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간 정말 감사했었어요. 아저씨."
"뭘요. 다 아가씨께서 잘 하신 탓이지요."
"이 은혜 평생 잊지 못할거예요. 그리고 도련님께서 이 은혜 꼭 갚…."
- 그 말은 내게 직접해야지.
갑작스런 그의 목소리에 그녀는 몸을 돌려세웠고 타츠야는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웃고 있는 그에게로 천천히 다가가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 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이 은혜 잊지 못 할거예요. 꼭 갚겠습니다."
- 그래. 잊지 말고 꼭 갚아. 쇼타. 가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곁을 스쳐 걸어나갔고 그녀는 몸을 돌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마냥 좋기만 했었는데 갑작스럽게 그를 보니 또 심란한 마음이 앞서왔다.
그의 뒷모습은 항상 사람을 외롭게 만든다.
아니 그가 외로워서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를 보는 사람 또한 외로워진다.
서후는 그런 령후의 뒷모습을 보며 아무 말 없이 다가가 어깨를 감싸쥐었다.
"가요. 오라버니. 이제 짐을 싸야죠. 사실 쌀 것도 없지만…. 지긋지긋한 일본 생활도 이제 벗어나네요."
서후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앞서나갔다.
알고 있다.
그녀가 지금 억지 웃음을 짓고 있는 것을.
분명 마음 한구석에 그가 걸릴 것이다.
어려서부터 누구보다 마음이 여리고 착한 아이였다.
그래서 쉽게 정이 들어버리고 쉽게 정을 떼지 못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바랬다.
그저 고마움을 느끼는 정일 뿐이라고.
단지 그런 거라 지금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라고.
그녀의 방으로 들어서자 그녀의 향이 그대로 나는 듯 했다.
그녀는 짐을 벌써 다 싼 듯 서서 서후를 바라보고 있었고 서후는 웃으며 그의 짐 가방을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건물 밖으로 빠져나왔고 그녀는 혼자 대문 앞에 서서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데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해보였다.
"가요. 오라버니."
"보는 사람도 없는데 왜 인사를 하고 그래."
"그래도. 제겐 고마운 사람들이었잖아요."
"그래. 늦겠다. 서두르자. 지금 아버님께서 항에서 기다리고 계시거든."
서후는 정말 늦겠다는 듯 서둘렀고 그녀도 가슴이 뛰는 걸 참으며 그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그 둘을 먼 발치에서 바라보고 있던 타츠야는 주먹을 쥐었고 왠지 모를 감정에 이제 짜증까지 나기 시작했다.
결국 도착한 곳은 처음 그녀를 만났던 술집이었고
쇼타는 그런 그가 걱정된다는 듯 이곳까지 따라오긴 했지만 어찌할지를 몰라했다.
곧 커다란 술상이 들어왔고 마담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 도쿠가와 도련님. 상이 준비되었습니다. 드시지요.
- 나가봐. 그리고 아무도 들이지마.
- 알겠습니다.
모두들 빠져나가자 그는 술잔에 술을 부으며 몽땅 입에 털어 넣어 넣기 시작했다.
그렇게 급하게 한 병을 비워버리자 쇼타는 자신이 다른 술병을 들어 그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러자 그는 코웃음을 치며 술잔을 들어 입에 털어 넣었고 쇼타는 또 아무런 말 없이 그의 술잔에 술을 채워 넣었다.
그렇게 또 삽시간에 두 번째 병이 바닥났고 쇼타는 세 번째 병을 집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가 먼저 그 술병을 집어 들었고 쇼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런데 곧 얼굴 앞에서 느껴지는 느낌에 눈을 떴고 그의 눈 앞엔 술잔이 보였다.
그가 손을 뻗어 술잔을 권하고 있었고 쇼타는 조용히 두 손을 들어 올려 잔을 받았다.
그러자 그는 잔에 술을 채웠고 쇼타는 바로 그 잔을 비워버렸다.
- 이리 주십시오. 도련님. 제가 따라드….
- 차라리 당신 때문이라고 말하지.
- 무슨 말….
- 당신 때문에 그녀가 죽었다고. 당신만 그리워하다 죽었는데 어떻게 얼굴한번 비추지 않았었냐고.
차라리 그럴거 였다면 그녀를 차지하지 말지 그랬었냐고. 내가 행복하게 해줬을거라고 따지지 그랬어!
- 도련님!
- 후회하잖아. 언제나 후회하고 있잖아. 어머니를 닮은 날 보며 언제나 후회하고 있잖아.
왜 그래! 도대체 왜 뭐든 걸 버리고 지켜주려고 해! 왜?
그는 타츠야의 물음에 답도 하지 않고 거칠게 그의 손에서 술병을 빼앗아 버렸다.
그리고는 잔에 술을 채우며 마셨고 그렇게 한참을 마시던 그가 술병을 내려놓았다.
그런 그를 보며 타츠야는 팔꿈치를 상에 대고 자신의 이마를 움켜쥐었다.
- 사랑하신다면 가서 잡으십시오.
11
순간적인 쇼타의 말에 타츠야는 이마에 대고 있던 손을 떼고 쇼타를 바라보았다.
쇼타는 여전히 아무 표정 없이 혼자 잔에 술을 따라 마시고 있기만 할 뿐 자신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타츠야의 입에선 웃음소리가 흘러나왔고 그런 타츠야의 모습에도
쇼타는 술만 마시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타츠야는 다른 술병을 들어 자신의 잔을 채우고 마시고 또 다시 채우고 마시기를 반복했다.
술이라는 건 참 오묘하다.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게하다 또 다시 기분 나쁘게 만들고 사람을 들뜨게 만들다 또 다시 그 들뜬 기분을 가라앉게 만든다.
술은 악마다. 아니, 술은 천국이다.
지금 타츠야에게 있어서 술은 술이란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 사랑? 누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거지?
- 아가씨를 사랑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 쇼타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나? 내가 사랑이라는 것을 하고 있다고?
그건 다만 연민이였을 뿐. 또 그리움이었을 뿐. 절대 사랑이 아니야.
사랑이라는 감정이라면 내가 이 자리에 이렇게 앉아 있지도 않겠지.
내가 도쿠가와 다츠야라는 것을 잊었나? 갖고 싶은게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 갖어. 그게 물건이든 사람이든.
타츠야는 그렇게 말을 끊어버리고 계속 술을 입 속으로 들이부었다.
쇼타는 그런 그를 보며 숨을 크게 내쉬었고 타츠야는 코웃음을 치며 잔에 술을 따랐다.
술병을 놓고 술잔을 들기 위해 오른 손을 뻗었는데 술잔위로 장서후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상을 쓸어버렸다.
- 젠장! 장서후! 그 자식이 뭔데! 도대체 뭔데…. 내 앞에서 그렇게….
- 도련님.
- 항에 다녀오겠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고 쇼타는 같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고개를 숙였다.
그가 거칠게 문을 닫고 나가버리자 다시 자리에 앉아 술잔에 술을 부었다.
그녀를 잡고 싶었다. 어떻게 해서든 잡을 수 있었다면 잡았다.
하지만 자신의 친구를 사랑하는 그녀를 보며 도저히 사랑한다고 고백할 자신이 없었다.
그 누구보다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녀가 사랑하는 자신의 친구를 배신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괴로운 과거를 생각하며 쇼타는 입 속으로 술을 들이부었다.
령후는 석진을 보고 한참동안 눈물만 흘렸다.
석진도 그런 령후의 어깨를 꼭 감싸안아 줄 뿐이였다.
령후는 어린 아이처럼 그렇게 석진의 품안에 안겨 있었다.
"아버지, 정말 괜찮으시죠? 어디 편찬으신 곳은 없는 거죠?"
"그래. 어디보자. 우리 딸. 이게 얼마 만이더냐."
"2년만이예요. 청일전쟁때 갑자기 그렇게…. 너무 놀랬잖아요. 세상에 저 혼자 남겨질 것 같아서."
"왜 세상에 너 혼자냐. 이 아비도 있고. 서후도 있고, 령희도 있는데."
"…아버지."
령후는 눈물을 끝까지 멈추지 못했고 뒤에 서 있던 서후 역시 그런 부녀의 모습을 보며 조용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게 30분 가량을 울고 난 후에야 령후는 겨우 진정된 듯 그리고 쑥스러운 듯 웃었다.
석진은 그런 령후를 보며 손을 들어 올려 령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령후는 기분 좋게 웃어 보였다.
"늦겠습니다. 이제 그만 배로 오르셔야죠."
"음. 그래. 오르자꾸나. 어허! 녀석. 그만 울음을 멈춰야지."
"너무 좋아서 그런 걸 어떻게 그래요."
그때였다.
막 석진에게 팔짱을 끼고 돌아서던 령후의 앞엔 타츠야가 서 있었고 령후는 너무 놀라 석진의 팔을 놓아버렸다.
석진은 왜 그러냐는 표정으로 령후를 바라보았고 그 뒤에 서 있던 서후 역시 놀란 듯 타츠야를 바라보았다.
타츠야는 아무 말 없이 손수건을 꺼내 령후의 앞으로 들어 보였고 령후는 고개를 숙여 그 손수건을 보았다.
장미꽃 가시에 찔려 상처가 났을 때 자신이 묶어주었던 그 손수건이었다.
- 닦아.
"네?"
- 눈물 닦으라고. 또 내게 그딴 소리 듣고 싶지 않다면.
"누구냐? 령후야."
"아, 아버지. 그 동안 절 돌보아주신 분이세요. 도쿠가와 타츠야씨라고."
"뭐? 도쿠가…."
그때였다.
어디선가 날라온 총알이 정확히 석진의 이마에 명중했고 령후의 얼굴이 석진의 피로 가득 젖어버렸다.
그리고 바로 앞에 서 있던 타츠야의 흰 제복에도 붉은 피들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타츠야는 얼굴에까지 튀었던 피를 닦으며 주위를 둘렀다.
선착장에 서 있던 그 남자.
타츠야는 소매를 들어 올려 얼굴에 튄 피를 닦으며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치여 제대로 앞으로 나가지 못했고 그 남자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두 팔을 무릎에 지탱하고 숨을 헐떡이고 다시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그녀가 석진을 품에 안은 채 오열하고 있었다.
"아버지! 아…버지. 아니죠? 그렇…죠?"
타츠야는 그런 그녀를 보며 고개를 돌려버렸고 서후는 그런 그의 곁으로 서서히 다가왔다.
타츠야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고 서후와 눈이 마주쳤다.
"범…인은."
"…놓쳤소."
"젠장!"
서후는 무릎을 꿇어앉으며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쳤고 타츠야는 천천히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손에 쥐어져있는 손수건은 이미 빨갛게 물들어져 있었고
타츠야는 천천히 자신의 윗옷을 벗고 석진의 얼굴 위를 덮어주었다.
그리고 그의 셔츠 깃으로 눈물과 피로 얼룩진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울음을 그치지 못했고 타츠야는 손을 내려버렸다.
그때 서후가 천천히 다가왔고 석진을 들어 올렸다.
"오…오라버니."
"배 시간이 다 되었다. 장례는 조선에 가서 치르자꾸나."
"하…하지만."
"그 어떤 분보다 독립에 앞장서오신 분이다! 일본에서 장례를 치르는 일따윈 있을 수 없어!"
서후는 감정 조절이 안되는 듯 평소와 다르게 커다란 목소리로 소리치고 있었고 령후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타츠야를 향해 허리를 숙이고 인사를 해보였고 서후의 뒤를 따라 천천히 배 위로 올라섰다.
타츠야는 그런 그녀를 잡지도 못한 채 바라만 보고 있었고 커다란 배는 고동소리만 울리며 멀어지고 있었다.
타츠야는 그렇게 배가 보이지 않을때까지 그 자리에 힘없이 서 있기만 했다.
- 도련님! 어떻게 되신 겁니까? 다치신 곳은 없으….
- 그녀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 네?
- 윤석진이…죽었어.
그는 그렇게 말을 뱉으며 힘없이 걷기 시작했다.
쇼타는 대충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예상하며 그의 뒤를 따랐다.
그는 집에 도착해서도 아무 말 없이 화단 앞에 서 있기만 할 뿐 움직이지도 말도 하지 않았다.
쇼타는 그런 그가 걱정이 되어 뒤에 서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꼼작도 하지 않았다.
- 옷을 갈아입으시죠. 나가기를 준비해 뒀습….
- 술을 마시지 않았더라면…잡을 수 있었어.
- 도련님.
- 얼굴에 묻은 피를 닦지만 않았어도 잡을 수 있었어.
- 그 분이 돌아가신 건 도련님의 탓이 아닙니다.
- 알아! 하지만 그 범인은 잡을 수 있었어.
- 일본 정부에서 잡으려 혈안이 되어 있던 사람입니다. 정부에서…한 짓이겠지요.
- 식민지라는 것 때문에. 독립운동을 한다는 이유 때문에 그렇게 죽어야 하나?
그렇게 자주적인. 민족적인 나라를 삼키려 했다면 그 정도 운동가들은 감수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죄 없는 사람을 그리 죽여도 되는 건가? 도대체 나란 인간은 뭘 하기 위해 이렇게 서 있는 거지?
- 식민지의 사람의 독립운동을 한다는 것이…죄입니다.
쇼타의 말에 그는 눈을 꽉 감아버렸다.
잘 알고 있었다. 그게 바로 죄라는 것을.
하지만 사람이 직접 자신의 눈 앞에서 죽어버리는 것을 본 그는 머릿속에 혼란이 오기 시작했다.
너무나 허무하게 쓰러져버리는 석진을 보며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버리는 것 같았다.
- 그는 날 알고 있는 것 같았어.
- 네?
- 내가 어떤 집안의 인간인지…. 잘 아는 것 같았어.
경성으로 올라오자 마자 장례를 치뤘고 많은 사람들이 집을 다녀갔다.
그가 죽었다는 이유 만으로도 사람들은 힘이 든 듯 어깨들이 쳐져있었다.
그가 죽었다는 것은 조선의 커다란 손실이였다.
사람들이 알도록 앞에서 힘을 쓰진 않았지만 언제나 뒤에서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고 조언하던 어진 사람이였다.
그렇기에 그를 알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며 기도하고 있었다.
하얀 소복을 입고 힘없이 앉아 있는 령후를 보며 서후는 령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 오라버니."
"힘들테니 그만 들어가 쉬거라."
"괜찮아요."
"아니야, 누나. 이제 내가 있을게."
령후는 고개를 돌려 령희를 바라보았다.
이제 스무살이 될 자신의 동생을 보며 령후는 또 눈물을 지었다.
령희는 그런 자신의 누나를 바라보며 속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버렸고 령후는 서후의 부축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령희야, 잠시만 보고 있거라. 령후를 좀 눕히고 오겠다."
"네. 형님."
령후는 방에 들어와서도 눕지도 않고 앉아서 눈물만 흘릴 뿐이였다.
서후는 그런 령후를 보며 숨을 길게 내쉬었고 령후는 울음을 참아보려 했지만 한번 터져버린 울음은 참아지지가 않았다.
서후는 손을 들어 올려 엄지손가락으로 령후의 볼에 흐르는 눈물들을 닦았다.
령후는 그런 서후가 고마워 서후의 손을 잡았다.
"좀 진정이 되느냐?"
"고마워요. 오라버니. 이럴 때 곁에 있어 주셔서…."
"당연한 일이지 않느냐. 이제 좀 누워서 쉬거라. 밖은 나와 령희가 볼 것이다."
"항상…오라버니를 힘들게만 해서 죄송해요."
"그런 말하는 것이 아니다. 너와 내가 어떤 사이더냐.
서로 고맙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않아도 된다.
아버님께서 갑작스레 돌아셔서 니가 경황이 없어 그러는 것이다.
걱정말거라. 꼭…그 범인을 잡고야 말 것이다."
- 1개월 후
조선 경찰청은 여전히 분주했지만 이상하게도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리고 경관들의 수근거림도 다른 날보다 많았다.
곧 문이 열리며 흰 제복을 입고 들어오는 남자가 보이자 모두 경례를 해보이며 양쪽으로 쫙 늘어섰다.
곧 그는 흰 모자를 벗었고 그가 모자를 벗자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모두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더 놀랐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곧 그의 옆에 있던 검은 제복의 남자가 그에게 고개를 숙였고 곧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돌아섰다.
- 이번 조선경찰청의 경감으로 온 도쿠가와 타츠야입니다.
12
순간 경찰청 안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도쿠가와 타츠야라면 동경대학 법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유능한 인재였다.
그런데 그런 그가 왠만해선 맡기 싫어하는 조선경찰청의 경감으로 발령되어 온 것이었다.
그의 집안, 또 그의 학력 등 모든 걸 포함해 이 보다 훨씬 유리한 조건을 건 제의도 많이 있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거기다 사람들이 더 놀란 이유는 그가 머리를 숙이며 인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서장실로 가죠.
- 네? 아, 네. 이쪽으로 오십시오.
그를 안내하던 남자 역시 많이 놀란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안내했고
그는 사람들을 향해 한번 웃어준 뒤 남자 뒤를 따라갔다.
서장실 앞에 도착했을 때 이미 서장실 문은 열려져 있었고 서장은 자리에 일어서서 그를 반기고 있었다.
그는 당황한 듯 웃으며 자리에 앉았고 그가 자리에 앉자 서장이 자리에 앉았다.
- 어서오십시오. 경감님.
- 말씀 낮추십시오. 제게 상관되시는 분께서….
- 아닙니다. 앞으로 일들을 잘 해결해 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 도움이 많이 필요할 것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그는 고개를 숙이며 서장실에서 나갔고 그가 나가자 모두들 긴장했던 듯 한숨을 쉬며 가슴을 감싸쥐었다.
그리고 그가 완전히 서장실에서 빠져나가자 모두들 자리에 앉았고 서장 역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 많이 걱정하고 있었는데 역시 다르신 분입니다.
- 그렇습니다. 서장님.
- 사실 콧대 높은 잘난 집안의 부잣집 도련님으로만 생각했던게 사실 아니였습니까?
그렇게 보이진 않으시니 다행입니다.
그들은 대체적으로 만족한 듯 웃음을 지어 보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자리에 앉은 다음 깊은 생각에 잠겼다.
커다란 책상과 검은 가죽의 의자.
역시 같은 재질로 만들어진 소파들.
값비싸 보이는 그림들.
그가 어떤 자리에 있는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잘 알려주고 있는 듯 했다.
그는 팔을 괸 채 두 얼굴을 감싸쥐고 있었고 생각을 잊고 싶기라도 한 듯 오른손으로 머리를 헝클어 버렸다.
그리고는 등받이에 몸은 완전히 기대어 버리고 의자도 돌려버렸다.
그리고 완전히 의자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아버렸다.
- …감님? 경감님?
갑작스런 목소리에 그는 의자를 돌리고 다시 돌아앉았고 고개를 들어 앞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은 웃으며 자신의 앞에 서류를 내 놓았고 그는 이게 뭐냐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 경감님께서 준비하라 말씀하셨던 서류입니다.
- 아, 감사합니다. 나가보십시오.
- 네.
그 사람이 밖으로 나가자 그는 서류에 손을 뻗고 들어 올리고 한 장 한 장 내려가며 읽었다.
그러다 신경질 적으로 들고 있던 서류를 던져버렸고 주먹을 꽉 쥔 채 책상을 내려쳤다.
"오라버니, 다녀오셨어요?"
"그래. 별일은 없었고?"
"그럼요."
"어디 가는 길이니?"
"잠시 장에요. 그간 정신이 없었더니 집안에 먹을게 하나도 없더라구요.
령희도 한참 먹어야 할때고…."
"같이 갈까?"
"아니에요. 혼자 다녀올게요. 오라버니. 안에 들어가 계세요. 빨리 돌아올게요."
령후는 그렇게 말하고 웃으며 집 밖으로 나와 시장으로 향하였다.
얼마만에 밖엘 나와본 건지 그동안 밖은 많이 변해 있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에 다녀오고 바로 장례를 치러서 밖에 나와볼 기회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였다.
그녀는 또 다시 아버지 생각에 눈물이 가득 고여버렸고 이내 눈물이 볼 위로 흐르자
팔을 들어 올려 거칠게 닦아 올리다 팔을 멈추었다.
그녀의 눈앞으로 갑자기 지나간 건 타츠야였다.
자신의 눈물을 하얀 옷소매로 닦아주던 사람.
아버지의 얼굴을 자신의 옷으로 가려주던 사람.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그 사람 생각이나 당황했던지 피식 웃어버리고 손을 내렸다.
그런데 이내 그녀의 눈이 커지고 앞으로 걸어가는 사람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잘못본게 아니라면 틀림없는 도쿠가와 타츠야였다.
곧 그와 눈이 마주쳤고 그도 의외라는 듯 그녀의 곁으로 걸어왔다.
그는 당황한 듯 웃음을 지어보이더니 이내 그녀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 동안 잘 지냈나?"
"네? 아…네. 이 곳에는 무슨 일로…."
그녀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그가 내민 손을 보지 못했고 그는 무안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손을 내렸다.
그리고 그녀에게 무언갈 설명하려다 주먹을 쥐고 그냥 웃어버렸다.
그의 웃음에 그리고 그의 등장에 당황한 건 그녀였다.
- 사람을 찾으러 왔어.
"어떤…사람이요?"
- 내가 너에게 그런것까지 설명해야 할 이유가 있나?
"아…그렇군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안녕히계세요."
갑작스러게 차가워진 그의 말투에 더욱 당황한 그녀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그의 곁을 지났다.
그런데 앞으로 가지 못하고 그가 자신의 팔을 잡아버리자 자리에서 멈춰섰다.
"성질도 참 급하시네. 가르쳐줘."
"네? 뭘요?"
"너희 집 주소."
"네?"
"조선에서 아는 사람이라곤 너뿐인데. 왜? 가르쳐 주기 싫나? 언젠 꼭 갚겠다더니?
나 지금 무지 배가 고픈데. 갑자기 와서 지낼 곳도 마땅치 않고. 이번엔 그쪽이 날 구제해줬으면 하는데?"
그녀는 어색한 듯 고개를 숙인채 자꾸 그를 힐끔힐끔 쳐다보았고
국밥을 말아먹던 그는 불쾌했는지 숟가락을 놓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그가 먹던 것을 멈추고 자신을 바라보자 그녀는 당황한 듯 몸이 굳어 허리가 쫙 펴져버렸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그는 웃겼던지 큰 소리로 웃어버리고 다시 숟가락을 들고 국밥을 입으로 넣기 시작했다.
사실 그가 이런 식당으로 자신을 끌고 올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그저 부잣집 도련님으로 곱게 자란 것만 같았는데 아주 서민적인 음식.
그것도 조선인들이 먹는 아주 싼 밥을 저렇게도 먹음직스럽게 먹는 것을 보고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뭘 그렇게 쳐다봐. 넌 안 먹냐?"
"네? 아, 네. 먹어요."
그는 고개를 밥 그릇쪽으로 숙인채 말했고 그의 목소리에 더 긴장해버린 그녀는
숟가락을 들고 급히 밥을 말아 입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너무 급하게 먹은 탓인지 이내 사래가 걸리고 말았고 그녀는 괴로워하며 기침을 해대기 시작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 양은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 그녀 앞으로 내밀었고
그녀는 고맙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그릇을 받고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괜찮아졌는지 그녀는 민망스럽다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아, 밥 맛 떨어져서 더 못 먹겠네."
"죄…송해요. 갑자기 사래가 들리는 바람에…. 그럼 다른…."
"돈 많나봐? 다른거 사주게? 나 집에서 쫓겨나서 돈이 하나도 없거든."
"네? 집에서 쫓겨나요? 왜요?"
"결혼 안 한다고 말했더니 그대로 쫓겨났어."
그의 말에 그녀는 놀랐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언제나 그의 옆에 있어야 할 것만 같았던 쇼타도 보이지 않았다.
"쇼타는요?"
"내가 주인이 아니라 우리 아버지가 주인인데 내 옆에 있을 이유가 없지."
그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심각해하는 그녀의 얼굴 표정에 그는 웃음을 참느라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처음부터 거짓말할 생각은 아니였지만 그녀의 행동과 표정이 그를 즐겁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조금 더 그녀에게 거짓말을 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그녀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명목까지.
"표정이 왜 그래? 불쌍한 사람 보듯. 너한테 동정까지 얻을 만큼 나 불쌍한 사람 아니니까 그런 얼굴 치워."
"네? 아…정말 죄송해요. 저…마땅히 지내실 곳이 없으시면 저희 집으로 오세요. 비워져 있는 방도 있고…."
"그러면 나야 고맙지."
"그런데…짐이 없는데…."
그녀의 말에 그는 한방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옷은 평상복 차림이였고 그녀에게 의심을 갖게 할 만한 물건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잠시 이마를 긁적이더니 입을 열었다.
"곧 도착할거야. 쇼타가 보내준다고 그랬거든."
"저…그런데 저희집엔 일본 옷이나…서양 옷은 없는데…. 그리고 음식도 입맛에 맞을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나 데리고 가기 싫다고?"
"그게 아니라…."
"대충 줘. 밥은 아무거나 줘도 잘 먹고 옷도 아무거나 줘도 잘 입으니까.
내가 그리 까탈스러워 보이나?"
"그게 아니라…빨리 드세요. 식겠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기 시작했고 그런 그녀를 보고
피식 웃은 다음에야 그도 고개를 숙이고 밥을 입으로 넣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먹어보는 맛이라 생소했지만 그래도 입맞에 맞았던지 그는 순식간에 밥그릇을 비워내고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다.
"다 먹었으면 이만 일어…."
"너 아직 다 안 먹었는데?"
"저 다 먹었…."
"아깝게 왜 또 버리고 그래."
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어 그녀의 밥그릇을 자신의 앞으로 가져가 숟가락을 들고 마저 먹기 시작했다.
의외의 그의 모습에 그녀는 계속 놀라고 있었고 그런 그녀의 표정을 그는 눈치챈 건지 혼자 웃어버렸다.
그리고 다 먹었는지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제서야 그녀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그는 당연한 듯 계산대 앞으로 걸어갔고
그의 행동에 그녀는 의아한 듯 그를 바라보았고 그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뭐해? 계산 안해?"
13
그의 말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고
그는 당연하다는 듯 계산대에 몸을 기댄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돈을 내고 식당 밖으로 나왔고 그 역시 밖으로 나오며 그녀의 뒤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웃음을 계속 참을 수 없어 손으로 입을 가리며 계속 웃었고
그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그녀의 작은 어깨가 계속 떨리는 것을 봤다.
- 뭐야? 웃겨?
"네? 아, 아니예요."
- 뭐야, 사람 뒤에다 놓고 혼자 웃고.
그는 혼자 투덜대며 앞으로 걸어갔고 처음으로 보는 그의 어린애 같은 모습에 그녀는 당황스러우면서도 즐거웠다.
결국 그와 함께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고 그는 손에 들고 있는 짐들이 무겁다며 자꾸만 투덜댔다.
그런 그를 보며 그녀는 앞으로 가서 그의 왼팔에 들려 있는 짐을 빼려 들었지만
그는 피하며 그냥 앞으로 걸어가기만 할 뿐이였다.
"무겁다면서요. 이리주세요."
"말이 그러다는 거지. 꼭 들어달라는 얘기는 아니였어. 그리고 남자가 이런거 가지고 무슨…."
그는 그렇게 말하며 앞서 걸어갔고 그녀는 또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는 계속 앞서 걸었고 그녀는 그를 불렀지만 그는 못 들었는지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조금 더 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기요."
"응?"
"여기가 저희 집인데요?"
그녀의 말에 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가 말한 집을 둘러보았고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가 왜 자신을 그렇게 바라보는지 몰라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고
그는 천천히 걸어오며 그녀와 집을 번갈아 보았다.
"왜 그러세요?"
"아니, 너 일본에 있을 때 돈 하나도 없어서 못사는 줄 알았더니 집도 좋잖아?"
그는 진짜 의외라는 듯 육중한 대문을 바라보았고 그녀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용자와 호자가 한문으로 커다랗게 박힌 나무 대문에 그런대로 커보이는 기와집.
그는 전혀 상상 이상이라는 듯 그 집을 훑어보았고 그녀는 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제서야 그도 집 안으로 들어갔고 집에 막 들어서자마자 한 남자와 눈이 부딪쳤다.
"아, 령희야. 인사해. 내가 일본에 갔을 때 잠시 신세졌었던 그 분이야."
그녀의 말에 령희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해보였고 그는 짐들을 내려두며 가볍게 그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러자 령희는 재빨리 그의 앞으로 달려가 그가 내려놓은 짐들을 가지고 마루 위에 올렸고 그는 그런 령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감사합니다. 저희 누나가 신세를 많이 졌….
"괜찮아. 조선말로 해도."
"어? 잘…하시네요?"
"응. 어머니께서 조선을 좋아하셨거든. 그런데 이거 어떡하지?
앞으로 내가 이 집에서 좀 신세를 져야할 것 같은데…."
"괜찮아요. 저희 누나 보살펴주시고 또 술집에 잡혀갔는데 꺼내주셨다는 말도 들었어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누가 왔…. 도쿠가와?"
그때 막 문을 열고 마루 밖으로 나오던 서후와 타츠야의 눈이 부딪쳤고
서후는 놀란 듯 눈이 커지며 타츠야와 령후를 번갈아 보았다.
타츠야 역시 의외의 상황에 당황한 듯 얼굴이 굳어졌고 서후는 마루에서 내려와 신발을 신고 그의 앞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타츠야도 아무 말 없이 그가 내민 손을 잡아 악수를 했다.
순간 잡힌 손에 힘이 꽉 들어가는 것을 느꼈고 타츠야 역시 손에 힘을 주었다.
서후는 살짝 웃으며 손에서 힘을 뺐고 타츠야도 힘을 빼며 손을 내렸다.
"그땐 미쳐 감사하단 말씀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럴만한 상황이였으니까요. 너무 신경쓰지는 마십시오."
"헌데…조…아니, 이 곳에는 무슨 일로…."
"갑작스럽게 오게 됐는데 이 곳에서 신세 좀 질까합니다."
"령후는 어떻게 만나셨는지."
"장에서 우연히 만났습니다. 물론 먼저 발견한 건 제가 아니였지만.
아무렴 어떻습니까? 앞으로 자주 뵙게 될 것 같은데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타츠야는 그렇게 말하며 그의 곁을 스쳐지나갔고 그녀에게 앞으로 자신이 묵게 될 방이 어딘지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정신이 든 듯 그녀를 안내했고 그녀가 안내한 곳은 석진이 쓰던 사랑방이었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놀란 서후는 그녀에게로 다가가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
타츠야는 아무런 말도 않은 채 그 방으로 들어갔고 서후는 그녀를 돌려세웠다.
"이 곳에서 지낸다고?"
"네. 오라버니."
"그래. 그렇다 치자. 그런데 저 사랑방은 아버님께서 쓰시…."
"제 은인이신데 아무데서나 묵게 하실 순 없잖아요."
령후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려 사랑방을 쳐다보았고 서후는 그런 령후를 보고 한숨을 내 쉬었다.
사람이 좋은 건지 착한 건지, 혹은 맹한 건지 엉뚱한 건지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그때 열렸던 대문으로 노부부가 들어왔고 령후는 뛰어가서 그 노부부를 맞이했다.
마침 사랑방안에서 나오던 타츠야는 그런 령후를 바라보며 고개를 까닥였다.
마루에서 내려와 신을 다시 신었을 때 그 노부부는 자신의 앞에 서 있었고 타츠야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그 노부부 역시 타츠야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일본에서 저희 아기를 잘 보살펴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아…. 그런데 누구신지…."
"저기 있는 놈이 제 아들놈이고 령후는 우리 며느리가 될 아이입니다."
노부부는 인자하게 웃어 보였고 타츠야는 고개를 돌려 령후와 서후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정혼자라는 것 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였지만
이렇게 직접 눈과 귀로 확인하니 그건 또 다른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때 령후가 다가오며 노부부의 손을 잡고 마루로 향했다.
곧 두 부부는 마루에 자리를 잡아 앉았고 타츠야 역시 마루위로 올라가 그들 앞에 앉았다.
령후는 곧 부엌으로 들어갔고 서후와 령희도 마루로 올라와 앉았다.
그렇게 아무런 말도 없는 침묵 속에 그들은 갇혀 있었다.
"이 대청마루에 앉아 장기를 두는 것을 윤 진사가 참으로 좋아했었는데…."
대석은 눈을 지긋이 감은채 회상하고 있는 듯 했다.
그때 령후가 다과상을 내왔고 타츠야는 아무 말 없이 앞에 있는 식혜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그리고 대석을 바라보았다.
대석은 아직도 눈을 감고 있었고 타츠야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가 장기를 조금 둘 줄 압니다. 저와 한 수 두시겠습니까?"
대석은 타츠야의 의외의 말에 눈을 떴고 웃고 있는 타츠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꽤 오래 지나도록 승패가 나지 않았고 대석은 오랜 시간동안 장기 돌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포를 선이 이어진 곳으로 움직였고 그런 대석의 움직임에 타츠야의 입엔 미소가 지어졌다.
대석은 그제서야 타츠야의 미소를 알아차렸다.
파란 색의 타츠야의 차가 움직이면 자신이 먹히는 것을 그제서야 눈치를 챘던 것이었다.
하지만 타츠야는 차를 조용히 뒤로 물렀고 대석은 고개를 들어 타츠야를 바라보았다.
"한 수 물러두겠습니다."
"허허, 똑똑한 친구로구만. 윤 진사와 똑같은 길로만 다니고…. 예사 머리가 아니야. 내가졌네."
대석은 그렇게 말하며 크게 웃어 보였고 서후는 유심히 장기판을 살폈다.
계속 밀리고 있다고 생각했던 타츠야는 일격을 가했고 순식간에 대석의 패를 무너뜨렸다.
얼핏 보기엔 석진이 두었던 장기와 비슷했지만 그 보다 한발 앞선,
전혀 장기를 모르는 듯 두고 있다가도 한방에 상대를 누를 수 있는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서후도 그제서야 타츠야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지금은 저렇게 사람 좋은 듯 웃고 있지만 언제 저 얼굴이 바뀔지 모르는 사나운 맹수라는 것도.
타츠야는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서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타츠야도 지지 않겠다는 듯 눈 초점을 그에게로 맞추었다.
그러나 이내 두 사람의 신경전도 대석에 의해 끝나버렸다.
"석진이 그렇게 갑자기 세상을 떠날 줄 알았더라면 진작 혼인을 시킬 걸 그랬구나.
그래. 올해 서후 니 나이가 몇이더냐?"
"스물 여섯이옵니다."
"그래. 령후 나이는 몇이더냐?"
"스물 하나이옵니다."
"여름이 지나고 돌아오는 가을에 식을 올리자꾸나."
대석의 말에 서후와 령후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령희는 환히 웃으며 령후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모두들 웃고 있었지만 타츠야는 웃음을 지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내 대석과 눈이 마주쳤고 억지로 웃어 보였다.
대석은 그런 타츠야의 표정이 의아했던지 눈에 힘을 주었고 타츠야는 자신의 속 마음을 들킨 것 같아 고개를 숙여버렸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다시 들어 웃어 보였다.
"축하해 주시겠소?"
"혼인이라면 당연히 축하해야할 일이 아닙니까. 축하드립니다."
타츠야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한번 숙여 보였고 대석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계속 타츠야의 표정이 신경이 쓰였다.
무언가 어두우면서도 깊은 생각에 빠져있는 눈동자.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면 웃고 있는 입.
눈과 입이 서로 다른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이 또래 답지 않은 깊은 눈이 어쩌면 처음부터 계속 신경이 쓰였었는지도 모른다.
타츠야는 그런 그의 생각을 알았던지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눈을 한번 쓸어 내리고 앞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도련님!"
14
타츠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고 얼굴엔 반가움이 가득했다.
령후 역시 마찬가지인 듯 뛰어가서 쇼타를 맞았다.
령후의 눈에는 벌써 눈물이 고여있었고 쇼타는 자신의 손수건을 그녀에게로 내미려다 그냥 그녀를 보고 환히 웃어주었다.
그녀는 저고리로 눈매를 닦으며 그를 향해 환히 웃어주었고 쇼타 역시 환한 미소로 답했다.
타츠야가 곧 천천히 다가왔고 쇼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해보였다.
노부부가 돌아가고 서후와 령후는 안방에 마주보고 앉았다.
서후는 아무 말 없이 령후를 바라보았고 령후는 자수를 놓고 있었다.
초를 밝혀둔 방안은 밝았고 령후는 촛불에 의지하며 자수를 열심히 놓기만 할 뿐이였다.
서후는 가만히 앉아만 있다 입으로 바람을 불어 초를 꺼버렸다.
그러나 곧 들리는 그녀의 신음소리에 다시 재빨리 초를 켰다.
그녀의 손가락에선 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서후는 재빨리 팔을 뻗어 그녀의 손가락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괘…괜찮아요. 오라버니."
"미안하다. 괜히 장난을 쳤나보구나."
"아니에요. 자수만 두고 있던 제 잘못이에요."
"앞으로 널 울리지 않을 자신은 없다."
"오…라버니."
"언제나 행복할 수만도 없다. 싸우게 될 일도 부지기수 일 것이다.
하지만 그 무슨 일이 있어도 너 하나만 바라보며 사랑할 것이다. 이것만은 약속해 줄 수 있다."
서후의 말에 령후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여 버렸고 서후는 그런 령후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어려서부터 항상 자신을 잘 따르던 아이. 언제나 자신만을 보고 웃던 아이.
그 아이가 벌써 이렇게 커 자신에게 올 것이라고 생각하니 마음 한 구석이 따뜻해졌다.
- 이렇게 쇼타와 누워보는게 오랜만인 것 같아.
- 그렇습니다. 도련님.
어두운 사랑방에 누은 채 타츠야는 쇼타의 손을 잡았다.
어느 덧 많이 늙어버렸다.
그의 손에 있는 주름도 고개를 돌려 본 달빛에 비친 그의 얼굴에 있는 굵은 주름들과 잔주름들도 너무 많이 늘어버렸다.
타츠야는 자신도 모르게 그런 쇼타의 모습을 보며 서러워졌다.
아버지 이상으로 믿고 따랐던 사람. 언제나 밖에서만 맴돌던 아버지 대신
자신과 어머니의 옆자리에 서서 모든 걸 이끌어 주던 사람.
언제나 사랑만을 베풀어주었던 사람.
타츠야는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아 다시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버렸다.
- 갑자기 약혼도, 결혼도 하지 않겠다고 말씀해버리고 떠나셔서 놀랐습니다.
- 료꼬는 좋은 친구야. 그녀는…내 평생의 반려자가 될 순 없어.
- 그건 도련님의 극단적인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 잘 알잖아. 어머니를 보면서 느꼈어. 난…료꼬가 우리 어머니처럼 되는게 싫어.
왜냐하면 좋은 친구니까. 그런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아.
- 왜 어머니처럼 될 거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쇼타의 물음에 타츠야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달빛에 비치는 그의 옆모습은 더욱 슬퍼 보였고 외로워 보였다.
쇼타는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하지만 타츠야는 천천히 붉은 입술을 열었다.
- 내 자신이 아버지를 너무 많이 닮아 버린 것을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마음을 줄 수 없다는 사실도 알아버렸으니까.
육체는 줄 수 있어도…마음과 정신까지는 주지 못한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아버렸으니까.
내가…쇼타를 조금이라도 닮았더라면 이렇게 되진 않았을텐데….
타츠야는 자신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동안 어머니를 버린 배신감 때문에 아버지를 미워하고 있을거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속 깊이 숨겨두고 있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쇼타는 느낄 수가 있었다.
언제나 아버지와 부딪치지만 상처만 주지만 서로 깊게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두 부자는 모르고 있었다.
아니, 알지만 서로 내색을 하지 않고 더 숨기려고만 하는 건지도 몰랐다.
그랬기에 쇼타는 조금은 더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조용히 눈을 떴다.
- 저를 닮으셨더라면…더 후회하셨을 것입니다.
- 왜?
- 전 제대로 제 의사를 표현해 본 적도 그럴 수도 없으니까요.
쇼타는 그렇게 말하며 잠이 들었고 타츠야는 밤이 새도록 그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동이 터오기 시작해서야 잠을 이룰 수가 있었다.
문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타츠야는 잠에서 깼다.
이미 해는 중천에 떠올라 있었고 자리에서 일어나 대충 이불을 개고 밖으로 나오자 령후가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령후의 앞에는 상이 차려져 있었다.
"아침을 준비해 왔어요."
"밥그릇이 왜 세 개지? 그러고 보니 다 보이는데 장서후가 안 보이는 군."
"새벽에 급히 어딜 가셨어요."
"그래? 밥 먹지."
곧 그가 마루에 자리를 잡고 앉았고 령희와 쇼타도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런데 령후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런 령후가 의아하다는 듯 타츠야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밥 안 먹고 어딜가?"
"도련님. 조선에서는 남녀가 겸상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
타츠야는 웃기다는 듯 웃어버리고 젓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앞에 있는 된장국을 들고 마셨다.
쇼타도 타츠야와 같이 행동하다 얼굴이 빨갛게 변하고 말았고 타츠야 역시 괴로운 듯 기침을 해보였다.
령희는 차마 웃지도 못하고 물을 따라 두 사람 앞에 내 놓았다.
"좀…짜군."
"그렇습니다. 도련님."
"여기 있는 수저로 떠드시면 되요. 아, 일본 사람들은 수저를 잘 사용 안 한다고 했었지."
"고맙다. 꼬마."
타츠야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어 령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수저를 들고 밥을 먹기 시작했고 수저로 밥을 먹는 폼은 어색하기만 했다.
그러더니 나중엔 수저만 들고 밥을 먹고 있었다.
쇼타는 놀란 듯 타츠야를 바라보았고 타츠야도 그런 쇼타를 보고 웃어보였다.
"귀찮잖아."
타츠야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고 령희는 그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한번도 일본 사람과 식사를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모습이 신기하게만 보일 뿐이였다.
그런데 곧 타츠야가 들고 있던 밥그릇을 놓칠 뻔하더니 상에 내려놓았고
쇼타 역시 들었던 밥그릇을 재빨리 상에 놓아버렸다.
"아, 한국은 밥그릇이 목기가 아닌 놋그릇이라 열 전달이 빨리 되어 뜨겁습니다.
그러니 그냥 상에 놓은 채 드셔야 할 텐데…."
"우리가 무슨 개도 아니고…."
"도련님!"
"아, 그래. 그냥 상에 놓고 먹지 뭐."
불만스럽게 말하다 쇼타의 눈치를 보며 그렇게 말하는 타츠야를 보고 령후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처음에는 일본인이라는 것 때문에 그리고 그의 차가워 보이는 인상에 겁을 먹고 있었지만
이렇게 실수를 연발하고 자신과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 때문에 마음이 놓였다.
거의 밥을 다 먹어갈때쯤 령후가 곧 쟁반을 들고 나타나 자신들 앞으로 김이 하얗게 나는 그릇을 내놓았다.
그리고 다시 마루에서 내려가 버렸고 타츠야와 쇼타는 이게 무엇인줄 모르겠다는 듯 계속 그 그릇을 쳐다만 보았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한번 만졌다간 그대로 데일 것만 같았다.
"이게…뭐지?"
"숭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밥을 하고 난 뒤에 밑에 누룽지가 생기면 거기에 물을 붓고 끓이는 것이지요.
조선에서는 밥을 먹고 난 뒤에 물 대신 숭늉을 마십니다."
령희는 그렇게 말하고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그릇을 쥐고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조금 마셔 보이고 다시 내려두었고
타츠야 역시 령희를 따라 손을 그릇에 대었다가 금새 손을 떼어버리고 말았다.
만지기에는 그릇이 너무 뜨거웠다. 쇼타 역시 용기가 나지 않는 듯 손을 대지 않았다.
타츠야는 가만히 있다 숟가락을 들고 숭늉을 떠서 천천히 불며 입안으로 넣었다.
생각외로 고소한 맛에 타츠야는 계속 숭늉을 입안으로 집어넣었고
쇼타는 그릇이 어느 정도 식자 그릇을 들어 한 모금 마셔보았다.
- 조선은 참 신기한게 많아.
- 그렇습니다.
- 쇼타도 이곳에서 생활할텐가?
- 아닙니다. 전 관사에서 생활하겠습니다.
- 그래. 그렇게 하도록 해.
타츠야는 거울을 보며 마지막으로 넥타이를 만져보고 방을 나섰다.
령후는 그런 타츠야의 모습을 보며 어딜가냐고 물어보았고 령희 역시 궁금한 듯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자리라도 알아봐야지. 이대로 굶어 죽을 수는 없잖아."
"그…렇군요. 그런데 쇼타는…."
"저도 여기서 계속 생활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벌써 시간이…. 먼저 나가보겠네."
타츠야는 허리에 차고 있는 시계를 보더니 급한 듯 밖으로 빠져나갔고
타츠야의 그런 뒷모습을 보며 령후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쇼타 역시 타츠야가 사라진 문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자신의 손가방을 열었고 곧 하얀 헝겊을 꺼내어 령후의 손위에 올려주었다.
령후는 조심스럽게 싸져 있는 헝겊을 풀었고 그 안에는 씨앗으로 보이는 것이 들어 있었다.
"쇼타. 이게 뭐예요?"
"무슨 씨 같은데?"
"그렇지?"
쇼타는 그런 두 남매를 보며 빙그레 웃어 보였고 령후는 뒤돌아
화단의 흙을 파내어 그 안에 씨를 넣고 다시 흙을 덮어 물을 주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돌아 쇼타를 바라보았다.
"선물입니다."
"선물이요? 무슨 씨앗인데요?"
"상사화."
15
타츠야는 출근을 하자마자 경감실에 딸려있는 탈의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대충 옷깃을 정리하며 문을 열자 책상 앞에 누군가가 서 있었고 자신을 보며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해보였다.
타츠야는 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 무슨 일인가?
- 경사 이에노우 나츠입니다. 올리시라던 보고서입니다.
- 놓고 나가보도록.
- 네.
타츠야는 다시 정리되어 있는 보고서를 훑어보기 시작했고 소리가 나도록 서류를 책상위에 내려놔 버렸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 경감실을 빠져나와 경찰서를 둘러보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그들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 나츠가 다가왔다.
- 무슨 일이지?
- 싸움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종종 일어나는 일이니 신경은 쓰지 마십시오.
- 종종 일어나는 일이라고? 그럼 수고하게.
타츠야는 다시 경감실로 돌아와 그 동안 올라온 보고서들을 꼼꼼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정리가 거의 끝나갈 때쯤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리며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마지막 장까지 철저하게 정리를 끝낸 다음에야 타츠야는 고개를 들었고 그가 누군지 확인하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 서장님. 우선 앉으시지요.
- 바쁜데 내가 방해했던건 아닌가?
- 아닙니다. 거의 끝났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 오늘 저녁에 술이나 한잔할까 해서 왔는데.
- 벌써 퇴근시간이 되었군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타츠야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고 서장 역시 그를 보며 웃어 보였다.
발령된지 일주일만에 그는 거의 완벽하게 임무수행을 하고 있었고 그런 그를 보는 사람들은 그를 칭찬하며 아꼈다.
커다란 술집에는 한 상 가득 차려져 있었고 서장이 앉자 타츠야도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곧 원색의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기녀들이 들어와 자리를 메우기 시작했다.
그때 막 타츠야는 자신의 옆에 앉으려는 기녀를 제지했다.
"됐다. 나가보거라."
- 왜? 싫은가?
- 전 여자는 됐습니다. 술만 있으면 됩니다.
- 허허, 결혼할 여자라도 있는겐가?
서장의 물음에 타츠야는 그냥 웃어버렸고 그런 타츠야를 보며 서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술병을 들어 그의 앞으로 내밀었고 그는 술잔에 술이 채워지자 술병을 받아 서장의 잔에 술을 채워 넣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술을 마시고 있었고 타츠야는 쉬지도 않고 입 속으로 술을 넣어 털었다.
- 젊은 사람이 술도 잘 마시는 구만. 난 조선의 이런 분위기를 좋아하지. 거기다 여자들도 어여쁘지 않은가?
- 그렇습니다.
- 이거 취하는 구만. 내가 마시자고 해놓고 내가 먼저 가겠네.
- 많이 취하신 것 같은데 이만 일어나 보십시오.
- 내일은 내가 저녁을 사지.
서장은 그렇게 말하며 육중한 몸을 가녀린 기생에게 기댄 채 일어섰고 곧 방에서 빠져나갔다.
타츠야는 다시 자리에 앉아 잔에 술을 채우며 마셨지만 아무리 마셔도 술은 취하지 않았다.
집 근처에 다다랐을 때 누군가가 대문 앞에 서 있었고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 대상을 살폈다.
그녀가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타츠야는 빠른 걸음으로 그녀에게로 다가갔고 갑자기 나타난 그 때문에 놀랐는지 그녀는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장서후를 기다리는 건가?"
"네? 아니요. 늦으시길래. 걱정이 되어서…."
"고마운 일이군. 들어가지."
"밥은 드셨나요?"
"대충 먹었으니 괜…."
"밥은 잘 드셔야지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밥상 차려서 나오겠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사라져 버렸고 그는 대충 마루에 걸터앉아 팔로 몸을 지탱한 채 고개를 위로 올렸다.
거무스름한 하늘엔 동그란 보름달이 떠 있었고 주위로 달무리가 지어진 것도 볼 수 있었다.
그때 령후가 자신의 앞으로 밥상을 내 놓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는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고 그는 멍하니 밥상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을 많이 배려한 듯 일본 음식들이 상위에 차려져 있었고 그릇도 놋그릇이 아닌 목기였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수저를 들어 된장국을 한 모금 떠서 마셨다.
일본식 된장국.
그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려 버렸고 고개를 돌려 그녀가 들어간 안방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대로 수저를 놓고 자리에서 일어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대체 그게 무슨 말이오! 또 죄 없는 동료들이 셋이나 잡혀 들어갔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요즘들어 더욱 경계가 강화된 듯 합니다."
"그래도 그렇지 그들이 지금 무슨 죄를 지었길…."
"단지 독립운동을 한다는 이유 때문에 잡혀갔지요. 그게 바로 우리의 죄 아닙니까."
"아, 선생님."
서후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후의 어깨를 한번 두드리고 자리에 앉았다.
서후도 흥분했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리에 앉았다.
그는 인자하게 웃으며 서후를 바라보았고 서후는 여전히 분이 삭히지 않는 듯 거친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상하이에서까지 그들이…."
"되었습니다. 곧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충칭으로 옮길 것입니다. 거기에 신경을 써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서후는 고개를 숙여 정중히 인사를 한 뒤 사무실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난관을 기대어 붙잡고 힘이 든 듯 고개를 푹 숙여버렸고 그때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를 잡았다.
고개를 들어 올려 그 사람을 보았을 때 자신도 모르게 눈이 커져버리고 말았다.
"이게 누구야! 현성이 자네!"
"잘 지냈는가?"
"어찌된거야? 갑자기 만주에는 어떻게 오게 된 것이…."
"식구들을 다 버리고 왔네."
"지금 자네…."
"친일파따위 때려치우고 그리 도움은 되지 않겠지만 나라를 도와보고자 하고 왔네."
서후는 그렇게 말하는 현성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도록 현성을 놓아주지 않고 끌어 안은채 뜨거운 눈물만 흘렸다.
보통학교를 다닐 시절 무던히도 많은 싸움을 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던 친구였다.
한 사람은 독립운동가로. 한 사람은 친일파의 후손으로.
하지만 그는 집안도 식구도 모두 버리고 자신에게로 아니, 나라에게로 달려와 주었다.
"뭐가 그리도 눈물이 나는겐가! 나는 이러면 안되는가?"
"아닐세. 너무 반가워 그랬네. 밥은 먹었는가?"
"같이 술이나 한잔하세."
서후는 그런 현성을 보며 어깨동무를 하고 근처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가 술을 시키고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은 서로 반가워 어찌할 줄은 모른 채 술이 나오자 한잔씩 나눠 마시고 다시 입을 열었다.
"언제 왔는가?"
"세달쯤 되었네. 자네가 일본에 가 있다고 하더군."
"잠시 급한 일이 있어 일본에 다녀왔었네. 물론 중간에 좋지 않은 일도 있었지만
우리에게 큰 도움을 주실 분을 만나게 되었어."
"그 분이 누구신가?"
"이 자리에서 할 이야기가 못되네. 잠시 후에 선생님과 모든 분들이 모이면 그때 이야기 나누세.
무슨 일이 있어도 독립될 것이야. 더 이상 제놈들도 버틸 수 없게 만들 것이야.
이 땅에서 벗어나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해주겠어. 그간 피를 흘린 수많은 동료들과 친구들.
부모 형제. 우리 민족을 기만하는 일 따위 더 이상은 봐줄 수가 없네! 감히 지네들이…."
"이보게 진정하게. 여긴 눈이 너무 많아. 나 역시도 울화통이 터지는 일일세.
그간 아버님께 너무 속고만 살아왔어. 자네에게 너무나 부끄럽기만 하네."
"아니야. 이제라도 이렇게 되었으니 다행이지 않은가."
"한때 서후 자네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지. 난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다.
더더욱이 우리 민족은 너무나 아끼고 사랑한다.
하지만 일본인들보다 더 한 친일파는 죽어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일세."
"내가 그랬던가?"
"사실은 그 날 충격을 많이 받았었네. 그리고 그 뒤로 많은 고민을 했었어.
과연 내 길이 정말 옳은 것인지. 자네의 길이 옳은 것인지. 참으로 바보 같았지.
정말 고맙네."
"내가 더 고마우이. 한잔 받게나."
서후는 기분 좋게 웃어 보이며 술잔을 가득 채웠고 두 사람은 서로 술잔을 맞 부딪히며 기분좋게 술을 마셨다.
현성은 무슨 할 이야기가 그리 많았는지 밤을 새워가며 열변을 토하고 있었고 서후는 그런 현성의 말은 다 들어주었다.
그런데 여지껏 웃고 있던 현성의 얼굴이 갑자기 심각해지며 입이 열렸다.
"또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곧 전쟁을 일으킨다는 말도 있네."
"무슨 짓을 하건 내쫓고 말 것이야.
죄 없는 일본인은 용서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조국과 민족을 등한시하고 침략한 일본인은 죽어서라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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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소설]
소설: 상사화 (相思花) # 1 ~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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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1빠!
잼있네요~
2빠?ㅋㅋ 재밋어요?ㅋ
4빠네..ㅋㅋㅋ
상사화뜻이 모예욤 ? = =a
6ㅃr>_<
재밌다
ㅎㅎ음;;
재밌어욤^-^//상사화보고싶네=ㅁ=ㅎㅎ
10빠넹..ㅋㅋ
다 재밋다고 하네요-ㅁ- 나도 재밌어요>ㅁ<-돌은거 같네
11빠~
ㅋ 다른 소설하고 진짜 달라서 재밌어요 >_ <
제밋내요..^^....
흠 재밋네 ㅋ
乃.~~good
오우~좋은 소설입니다~>-<b
상사화는 꽃이구요, 꽃말은 '이루워질수없는사랑' 입니다.
이 소설쓰시는분 글잘쓰신다 ㅋ
잼있네염
신선한 소재네요 식민지 때의 일이라...
누가누굴말하는지 모르겟어 =ㅁ= ; 근데 재밌어 ㅋㅋㅋ
재미있어요~히히
금은반지님... 저두요... 상사화가 좀 흔한 소재였던가?? 애기도 비슷한데.- _ -
이런소설은 처음 본 다는-_-;; ㅎㅎ 그래도 달라서 재미있습니다..작가분이 누군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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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재밋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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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내려놓고먹으면 개인가..-_-...어쨋든 재미있다는,..-ㅁ- 하지만 좀 지겹내요 -ㅁ-...........내용도 어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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