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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2. 묵상글 (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 잘 익은 벼로, 잘 익은 밥을! .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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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2.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잘 익은 벼로, 잘 익은 밥을!
아시다시피 초대교회는 몇 번 위기를 맞았습니다.
-사도행전 6장에서 음식을 분배하며 차별 문제가 발생했을 때
-11장에서 베드로가 할례받은 사람들과 음식을 먹은 것 때문에
유대인들이 들고일어났을 때
-15장에서 유대인들이 안티오키아까지 와서 할례받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가르쳐 바오로 바르나바와 갈등이 생겼을 때입니다.
이 세 경우 모두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유대 중심적인 차별 때문에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분열의 위기에 처했던 것인데 특히 어제와 오늘
유대인들의 그리스도교와 이방인들의 그리스도교로 갈라설 수도 있는
위기 상황을 앞두고 초대교회는 예루살렘 회의를 개최하고 현명히 대처합니다.
요즘 우리가 시노달리따스(Synodalitas)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예루살렘 회의가 바로 이 시노달리따스의 원형인 셈이기에 이참에 저는
오늘 우리 공동체들이 어떻게 합의와 일치를 이루어갈 것인가 성찰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합의와 일치를 이루어가는 성숙한 공동체의 여러 요소가 있겠지만
‘겸손과 자기를 내려놓는 것’ 이것을 저는 첫째로 꼽고 싶습니다.
어렸을 때 선생님이나 어른들이 자주 해주시던 말씀이 있습니다.
벼는 익을수록 머리를 숙인다!
이 말씀을 어렸을 때는 명심하며 살았는데 한동안 잊고 살았습니다.
한동안 많이 교만했다는 반증입니다.
요즘 합의와 일치를 잘 이루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 교만 때문입니다.
교만 때문에 오래 숙고하지 않고 설익은 자기주장을 내놓기 때문입니다.
숙고(熟考)와 성숙(成熟)은 같이 가는 것이고
숙고할 때 성숙하게 합의와 일치를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숙(熟)’이라는 한자가 ‘익다’라는 우리말에 해당하지요.
겸손한 사람은 자기주장을 펴기 전에 숙고를 많이 하고,
거기서 내려놓을 것과 내놓을 것을 가릴 것입니다.
자기는 내려놓고 공동선을 위한 것은 내놓을 겁니다.
두 번째로 제가 꼽고 싶은 것은 사랑과 이웃 존중입니다.
밥은 익어야 맛있고 그러기 위해서
익을 때까지 솥뚜껑을 열지 말아야 하고 뜸을 한참 들여야 합니다.
숙고에 숙고를 거듭한 나의 익은 의견을 겸손하게 제의한 다음
그것을 받아들일 이웃의 시간을 존중하며 한참 뜸 들이는 것입니다.
제의하는 나에게 숙고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처럼
받아들일 그에게도 숙고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줄탁동시同時 또는 줄탁동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줄(啐)과 탁(啄)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이고,
그것이 동시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깨진다는 말이지요.
이것은 새끼가 알을 깨고 나올 때
새끼가 안에서 껍질을 톡톡 쫄 때까지 기다려야지
그 이전에 어미 닭이 성급하게 껍질을 깨버리면 새끼는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경우 미숙아로 나오면 인큐베이터에서 한동안 성숙을 돕지요.
아무튼 이때 새끼가 안에서 쪼는 것을 줄(啐)이라고 하고
밖에서 어미 닭이 쪼는 것을 탁(啄)이라고 한다고 하는데
그의 시간이 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나의 제의에 대한 그의 동의를 강요하지 않는 것입니다.
함부로 날 선 공격을 하지 않음은 물론
숙고 되지 않은 말도 하지 않아야 하고,
공동선을 위한 겸손한 나의 말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이웃의 시간을 기다리며 이웃의 의견을 존중할 때
공동체의 합의와 일치는 이루어짐을 깊이 생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잘 익은 벼로 잘 익은 밥을 지어야지요.
덜 익은 벼로 설익은 밥을 짓진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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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2.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본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특히 자기보다 큰 존재를 제대로 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어렸을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개미집을 향해 과자 부스러기를 지고 개미를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이 개미를 도와주고 싶어서, 개미와 개미가 진 과자 부스러기를 함께 개미집 앞으로 이동해 주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개미는 자기가 짊어졌던 과자 부스러기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급하게 도망갑니다. 바로 앞에 자기 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반대로만 향합니다. 가는 길을 손으로 막으면서 개미집으로 들어가게 하려고 했지만, 나중에는 제 손을 기어 올라가서 도망갔습니다.
개미가 이런 저를 제대로 봤을까요?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마 ‘이게 무슨 일이야?’하면서 도망친 것이 아닐까요?
어린 자녀가 부모에게 아픈 말과 행동을 계속합니다. “엄마, 아빠가 내게 해준 게 뭐 있어?”라면서 습관적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이때는 부모의 마음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너무 작은 존재이기에 부모의 큰마음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어린 자녀가 또 한 아이의 부모가 될 때 비로소 깨닫습니다.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셨구나.”
우리는 과연 주님을 제대로 볼 수 있을까요? 나의 존재가 너무 작기에 볼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가 큰 존재가 되어야 비로소 주님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존재를 키우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주님 안에 머무르면서 그 안에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성장하기 위해 영양소가 될 수 있는 것들을 먹어야 합니다. 바로 주님의 말씀을 먹으면서 그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 때 우리는 진정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성장한 사람만이 그 크신 주님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 큰 기쁨을 누릴 수가 있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을 하신 이유를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다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성장하기를 바라는 주님의 뜻을 잊지 않으면서, 나의 존재가 주님 안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온 힘을 다 기울여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주님의 말씀을 먹고 자라는 우리는 영적으로 튼튼해집니다. 어떤 순간에서도 흔들리지 않으면서 큰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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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무엇을 견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견디는가 하는 것이다(세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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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2.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10)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요한 15,9)
이는 우리가 이미 사랑을 받았다는 선포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기원이 아버지께 있다는 선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분명, ‘이미 사랑을 받은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아버지께로부터 왔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베풀어진 아버지의 사랑으로부터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결코 떼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그 사랑을 받을만한 아무런 자격이 없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 호의와 자애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곧 선사된 사랑이 베풀어진 것입니다.
자신이 선사받은 존재임을 깨닫는 일, 모든 것이 베풀어진 사랑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 이처럼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이 오늘 우리를 경탄과 탄성, 경배와 예배, 음미와 감사, 찬미와 찬양의 삶을 불러들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성자께서 모든 것을 아버지께로부터 받았다’는 사실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찬미찬양의 삶을 사셨듯이 말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 사랑 안에 머무르기를 초대하십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여기에는 ‘먼저’ 당신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이 전제됩니다. 곧 선사되는 당신의 사랑을 ‘먼저’ 받아들여 그 안에 머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당신의 사랑이 우리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먼저’ 자신을 허용하고 승복하는 일입니다. 그래야 다른 사랑이 아니라, 선사받은 바로 그 사랑 안에 머물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랑 안에 머무는 방법도 함께 가르쳐주십니다.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10)
이미 당신께 선사받은 그 사랑을 지키는 것이 곧 당신 사랑 안에 머무는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그 어떤 사랑이 아니라, 선사받은 그 사랑을 간직하고 준수하는 것입니다. 이는 당신의 사랑은 말이나 생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사랑하기를 실행할 때 그 실행 안에 머문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당신의 이 사랑을 실행하는 것이 ‘새 계명’으로 선포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5,12)
그리고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 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무르게 되면 당신의 기쁨이 우리 안에 들고 우리 또한 기쁨으로 차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그 기쁨은 뒤에서 요한이 말한 대로, “그 누구에게도 빼앗겨지지 않는 기쁨”(요한 16,22)입니다. 그러기에, 그 기쁨은 예수님께로부터 선사받은 신적인 기쁨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쁨은 결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사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의 만족, 나의 성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의 실현으로부터 오는 까닭입니다. 오늘 하루 그 기쁨이 가득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
주님!
제 안에는 당신의 숨결이 흐릅니다.
제 안에 새겨진 당신의 사랑입니다.
제 안에 굴을 파고들어 와 빈 무덤으로 모습을 숨긴
그지없이 충만한 사랑입니다.
결코 빼앗길 수도, 빼앗겨지지도 않는 기쁨입니다.
주님! 당신의 기쁨의 숨결이 온 세상에 퍼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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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2.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무슨 일을 하든 억지로 마지못해 의무감으로 하면 기쁨을 갖지 못합니다. 그러나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자발적으로 하면 보람과 기쁨이 큽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명령이나 의무에 의해 한다면 진정한 사랑을 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나 계명을 내리는 분의 뜻을 알기 위해 또 그분과 하나가 되기 위해 지킨다면 그 의미가 풍요로워집니다. 사실 진정한 사랑을 한다는 것은 그만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것을 인식하는 사람이 많이 사랑할 수 있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실제적으로도 이웃의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자기를 먼저 생각하는 부족한 사랑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받은 사랑에 감사하고 또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무조건 ‘머물러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그들을 위한 당신의 사랑이 선행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신 것과 같은 사랑으로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끝까지, 목숨을 내놓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아버지께 받은 사랑은 제자들을 위한 사랑의 기초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아들 예수님께서 받으셨고 예수님의 사랑을 제자들이 받았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제자들 서로 간에 사랑을 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이웃 사람에게로 사랑의 손길을 펴게 되었습니다. 그리해서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임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13,35).
우리 옛 속담에 “부모가 온 효자가 되어야 자식이 반 효자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식은 부모가 하는 것을 보고 따라 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과 예수님, 그리고 제자들은 내리사랑 안에 머물렀습니다. 우리도 같은 사랑을 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품 안에는 아홉 자식이 있을 곳이 있지만, 아홉 자식의 어느 집에도 아버지가 있을 곳은 없다.” 는 격언이 마음을 아프게 하는 시대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 안에 머물라고 당부하는 것은 ‘당신의 기쁨을 제자들에게 전해주고 그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쁨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만이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계명을 지키는 것에서 충만한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혹 계명을 억지로 지키는 사람은 헛고생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계명을 지키십시오. “마음속 깊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도 그를 아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채비가 갖추어져 있는 만큼 그는 하느님을 사랑합니다”(디아도쿠스주교).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 사랑받는 존재가 됩니다”(작은 거인들에서). 망설이지 말고 사랑을 위한 사랑을 함으로써 주님의 계명을 기쁘게 지키시길 바랍니다. ‘말로나 혀가 아니라 행동으로 진심으로 사랑합시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으며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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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2.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지순례에서 성모님의 발현이 있었던 곳엘 다녀왔습니다. 두 곳은 교회에서 성모님의 발현을 공적으로 인정한 곳이고, 다른 두 곳은 아직 공적으로 인정하지 않은 곳입니다. 루르드와 파티마는 교회에서 인정했기에 보편교회의 전례력에도 축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루르드의 성모님 발현 기념일은 2월 11일입니다. 교회는 이날을 세계 병자의 날고 기념하기도 합니다. 루르드의 성모님은 자신을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라고 선포하였습니다. 파티마의 성모님 발현 기념일은 5월 13일입니다. 파티마의 성모님은 3가지 비밀을 알려주었다고 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성인이 되신 요한 바오로 2세의 피격이라고 합니다. 파티마의 성모님은 자신을 ‘묵주기도의 마리아’라고 선포하였습니다. 1981년에 시작되었던 메주고리예의 성모님 발현은 교회에서 공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신자들이 순례하는 것은 허용하고 있습니다. 교황청은 이렇게 발표하였습니다. “메주고리예 순례에 대해서는, 그것이 개인적으로 하는 순례라면, 현재 교회의 조사가 진행 중이고, 지금까지 일어나고 있는 중인 사건으로, 입증되지 않은 상황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본 성은 순례가 허락된 것임을 지적합니다.” 1961년에 시작되었던 가라반달의 성모님 발현도 교회에서 공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신자들이 순례하는 것은 허용하고 있습니다. 성모님 발현의 공통적인 메시지는 ‘회개, 성경읽기, 묵주기도, 미사참례, 고백성사’와 같은 것입니다. 성모님 발현에 대한 공적인 인정은 보편교회의 권한입니다.
오늘은 성 아타나시우스 주교 학자 기념일입니다. 아타나시우스 주교님은 아리우스 이단으로부터 교회의 신앙을 지켜낸 분입니다. 아리우스 이단은 알렉산드리아의 사제 아리우스로부터 발달하였는데 그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시라는 교회의 믿음에 반기를 들고 예수님의 신성을 적극 부인함으로써 반삼위일체론을 주장하였습니다. 교회는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여 아리우스의 주장을 단죄합니다. 또 니케아 신경을 발표하여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완전한 신이라는 삼위일체설을 당당하게 고백하였습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때는 전통 교리를 따르는 교회보다 더 많은 교세를 유지기도 했던 아리우스파의 제자들에 의해 아리아니즘은 북부 게르만 민족에게 전파되었고 게르만족의 로마 진입과 더불어 로마 제국 전역에 퍼져나갔습니다. 7세기에 이르러서야 교회는 아리아니즘을 완전히 몰아낼 수 있었는데 이때 중추적인 역할을 하셨던 분이 오늘 기념일로 지내는 아타나시우스 주교 학자입니다. 그는 아리우스 이단을 단죄하고 파면하기로 결행한 니케아 공의회의 가르침을 지키려 혼신의 힘을 바쳤고 가톨릭교회의 정통 가르침을 지켜내셨던 분으로 교회사에 기억되고 있습니다. 성 아타나시우스 주교 학자의 기념일을 지내면서 어떠한 혼란과 암담한 상황 속에도 하느님께 충실하고 정통 가르침을 수호하는 사람이 결국 승리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교회는 항상 영원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다양한 환경과 사상 속에서 정통 가르침을 흔들려고 하는 많은 이단 사상들을 만나게 됩니다. 오직 정통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고 지킬 때, 혼란스러운 사상과 이단적인 가르침이 정화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교회의 식별은 공의회나 조사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신앙인으로서 개인의 식별도 필요합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 23항 ‘원리와 기초’에서 개인의 식별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사람은 하느님을 믿고 알아, 구원받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기꺼이 사용할 것이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버릴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 있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 있고, 오래 사는 것보다 단명함을 택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 삶의 기준은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식별의 기준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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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2.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얼마 전 향초 하나가 생겼습니다. 너무 예뻐서 켜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그 초에 불을 댕겼습니다. 역시나 예쁜 초는 타들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예쁜 모양을 잃어갔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향초는 그저 모양이 변하고 사라져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방안에 향기가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향초는 자신을 태워 방안에 향기를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을 짧게 요약해 보겠습니다.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안에 머무르는 것이고 이 머무름은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할 것이다.
이렇게 한 줄로 주님의 말씀을 요약했으니 이제 그 말씀을 풀어보겠습니다.
우선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계명을 지킨다는 뜻은 늘 주님의 계명 안에 산다는 뜻입니다. 삶은 듣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산다는 것은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즉, 실천을 동반합니다.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계명을 삶 안에서 실천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 안에 머무름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계명을 실천하는 모습으로 머무를 때 우리 삶은 기쁨으로 충만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신 복음입니다.
우리 삶의 기쁨은 그 종류가 다양합니다. 무엇인가를 이뤘을 때 느끼는 기쁨이 있을 수 있고, 무엇인가를 가졌을 때 느끼는 기쁨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기쁨 중 하나는 바로 나눴을 때 느끼는 기쁨입니다.
사랑은 나눌 때 그 배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를 채우려는 사랑은 늘 부족할지 모르나 나를 비우고 다른 이를 채우려는 사랑은 하면 할수록 더 커진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계명은 사랑입니다. 그분 안에 머무름은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눔은 우리를 천국의 기쁨으로 안내할 것입니다.
향초의 향기가 방 안 가득 담기는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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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보고 싶다면
어릴 적 첩첩의 산골에서 어디를 가려면
하루에 몇 번 다니지 않는 버스를 타야 했습니다.
버스를 타는 방법 아세요?
버스를 타려면 버스를 기다려야 합니다.
물론 정확한 시간에 정확하게 탈 수도 있겠지만
그 시절 시골 버스는 정확한 시간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저 이 골짜기, 저 골짜기를 넘어오는 버스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야 버스를 탈 수 있습니다.
꽃이 보고 싶다면
그 역시 기다려야 합니다.
꽃은 그냥 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꽃은 긴 겨울을 보내고, 거칠고 딱딱한 껍질을 찢고 나와야 합니다.
그 시간을 우리는 그저 기다려야 합니다.
어쩌면 기다림은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의 덕목일 것입니다.
기다림 없는 결실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꽃이 보고 싶다면…. 기다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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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2.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평생 사랑의 학인(學人)’인 우리들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당신의 영광을 백성에게,
그 기적을 만백성에게 두루 알리라.”(시편96,3)
하느님 사랑의 영광, 사랑의 기적을 알리라는 시편 화답송 말씀입니다. 이미 읽었던 내용도 새롭게 마음에 와 닿을 수 있습니다. 교황님 홈페이지를 여는 순간 와닿은 말마디들입니다.
“인내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제공한다.”
“교만은 겸손으로 싸워라.”
“모든 것은 믿음의 인내로 가능하다.”
이 모두의 뿌리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의 인내, 사랑의 겸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옛 어른 다산의 말씀도 결국은 사랑으로 귀결됩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애틋하게 여기고, 익숙한 사이일수록 어려워하라.”
“수양의 근본은 효우(孝友;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이니, 여기에 본분을 다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학식이 높고 글재주가 좋더라도 흙담에 색칠하는 것이다. 아주 예전에 써놨던 사랑이란 두편의 시도 생각납니다.
1.“사랑은
하느님 안에서
제자리를 지켜내는
거리를 견뎌내는
고독의 능력이다
지켜냄과 견뎌냄의 고독중에
순화되는 사랑
깊어지는 사랑
하나되는 사랑이다”-1997.3
2.“나무는 넉넉한 품
언제나 거기 있어
날아 오는 새들 모두 안아 들이는
넉넉한 품
새들은
나무에 자취를 남기지 않고
나무는
새들에 집착하지 않는다
사랑은 이런 것”-1997.3.
서로의 거리를 존중하는 사랑, 배려하는 사랑, 집착없는 초연한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을 강조한 것입니다. 주는 사랑, 나누는 사랑, 섬기는 사랑, 돌보는 사랑을 강조한 것입니다. 수도공동체 형제들의 신원을 저는 주님의 형제, 주님의 전사, 주님의 학인으로 세차원에 걸쳐 설명하곤 합니다. 더불어의 공동체 삶이기에 형제애, 전우애, 학우애의 균형과 조화의 공동체가 참 좋은 공동체라 정의하곤 합니다. 역시 뿌리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해서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본질은 허무도 무지도 탐욕도 아닌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만민의 공통보편언어가 사랑입니다. 만병통치약이 사랑이요, 만병의 근원이 사랑결핍임을 깨닫습니다. 온갖 정신질환의 뿌리에는 사랑 결핍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사랑과 더불어 자존감 높은 삶이요 또렷한 신원의식입니다. 도대체 사랑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배는 밥으로 채울수 있어도 무한한 가슴은 사랑만으로 채울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밖에 길이 없다, 사랑밖에 답이 없다 "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 수도공동체 역시 ‘섬김의 학교’라 하는데 사랑의 학교라 할 수도 있습니다. 평생 공부해도 졸업이 없는, 늘 공부해도 여전히 초보자처럼 느껴지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사랑도 능력이요 평생 보고 배워야 함을 깨닫습니다. 늘 해도 늘 부족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 오랜 세월 사랑을 주제로 강론해왔지만 늘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해도해도 끝이없는 사랑입니다. 사랑없는 인생이라면 참으로 무의미하고 허무한 삶일 것입니다. 사랑해서 사람이요 사랑은 모두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라 선물로 주어진 인생이요, 마지막 죽음을 앞두고도 여전히 목마른, 배고픈, 못다한 사랑일 것입니다. 오늘 강론 주제도 사랑입니다. 어제는 “너희는 내 안에 머물러라” 였는데, 오늘은 사랑이 더해져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순식간에 읽혀지는 오늘 복음 전문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슬픈 성인은 불쌍한 성인이다”라는 말마디에 공감합니다. 사랑과 함께 가는 충만한 기쁨, 또한 주님의 참 좋은 선물입니다. 사랑도 배워야 함을 봅니다. 사랑에도 기준이, 모범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사랑하신 것처럼'이 예수님의 사랑법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은 예수님의 롤모델입니다. 마찬가지 우리도 예수님으로부터 예수님의 계명을, 사랑법을 배워야 합니다. 평생 아버지께 순종의 사랑을 다한 예수님은 우리의 롤모델입니다.
이런 사랑의 평생 수행과 더불어 비로소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삶이, 날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이 가능하겠고, 이것이 우리 인생의 유일한 목표일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데 원천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참으로 마르지 않는, 끊임없이 샛솟는 “사랑의 샘”인 주님과 하나로 일치되어 있을 때 비로소 지치지 않는 사랑의 수행일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랑의 모범이, 믿음의 모범이, 오늘 기념미사를 봉헌하는 알렉산드리아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입니다. 정말 백절불굴의 믿음의 투사, 사랑의 투사, 성 아타나니오 주교 학자입니다. 아리우스 이단에 대항하여 끝까지 정통교리와 교회를 지켰고 이런 와중에 다섯 번이나 유배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그 옛날에 78세까지 장수하셨으니, 새삼 인명은 재천임을 깨닫습니다. 알렉산드리아 교회 신자들에게도 참으로 사랑받았던 목자였습니다.
성 대 바실리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와 함께 동방 4대 교부에 속한 분이며 후대에 수도승들의 교과서 같던 “안토니오의 생애”를 저술한 분입니다. 사막 유배중 안토니오와 빠코미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던 참 각별한 성인입니다. 역시 이런 백절불굴의 신앙의 뿌리에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 하느님 백성들에 대한 목자적 사랑이 자리하고 있음을 봅니다. 아타나시오를 비롯한 교회 하늘에 무수히 각양각색으로 영롱한 빛을 발하는 별같은 성인들은 바로 우리 삶의 길잡이가 됨을 깨닫습니다. 문득 떠오른 오래전 '민들레꽃' 자작시입니다.
“어! 땅도 하늘이네
구원은 바로 앞에 있네
뒤뜰 마당 가득 떠오른 샛노란 별무리
민들레꽃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 수 있겠네”-2001.4.18.
지금도 옛 수도원 본원 건물 소박한 한옥 뒤뜰 마당에 눈부시게 피어난 민들레꽃들을 보며 쓸때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았던 사랑의 성인들이요 우리 또한 그러합니다. 사랑은 분별의 잣대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의 베드로와 야고보 사도가 그 모범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두 인물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직제자가 아닙니까? 예수님의 사랑을 보고 배웠기에 이런 사랑에 의한 지혜로운 분별일 것입니다. 베드로의 감동적인 고백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하신 것처럼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시어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정화하시어, 우리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도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왜 우리 조상들도 우리도 감당할 없던 멍에를 형제들의 목에 씌워 하느님을 시험하시려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 예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습니다.”
역시 명불허전, 그 스승 예수님에 그 수제자 베드로답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목자적 사랑이 하나된 베드로의 고백에, 다소 베드로보다 후퇴한 느낌이지만 야고보가 역시 분별의 지혜로 율법의 요구를 최소화하여 매듭을 지어줌으로 예수님의 제자이자 사도로서 참 어른의 진면목을 보여줍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랑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도록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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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2.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랑>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10)
사랑
받아요
그러하니
사랑
주어요
그리하여
사랑
되어요
그러도록
사랑
주어요
그럼으로
사랑
받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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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2.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9-10)
사랑이 모든 행위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
계명을 지키는 것이 사랑의 가장 중요한 표시라면, 사랑이 없을 경우, 영광스러운 은총의 선물들 - 더없이 숭고한 권능들과 사람을 완전하게 만드는 믿음 자체와 계명들-의 가장 효과적인 작용도 도움이 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우리는 몹시 두려워해야 합니다. … 사랑이 없다면 법규들을 지키고 의로운 행위를 하더라도, 또 주님의 계명을 지키고 은총의 놀라운 표징을 행하더라도 그 일들은 부정한 행위로 여겨질 것입니다 ... 그것을 행한 이들의 목적이 자신의 뜻을 만족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 바실리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6 사람은 숭고하다
사람을 “하느님 다음가는 자리에 앉혔다”는 시인의 찬양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람이 하느님처럼 창조되었다고 하는 주제는 엑카르트의 설교에서 거듭 되풀이 된다.
“영혼이 창조되던 그 순간부터, 하느님은 영혼에게 애정과 호의를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자신의 모상 속에서 기쁨이 넘치는 일들을 이루기 위해 영혼에게 신적인 빛을 부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피조물들을 지으셨을 때, 그들은 하느님이 활동하기에는 너무 작고 좁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자신과 똑같은 모습의 영혼을 지으시고, 그 영혼에게 자신을 내주셨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고귀한 사람들이 그들의 본성대로 지어졌으며, 그들이 은혜를 통해 신적인 상태로 치솟을 수 있으며, 그들이 그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가르치십니다. 성서의 태반이 이 말씀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어졌습니다 ... 사람은 하느님과 한 핏줄이자 한 씨입니다.“(163)
✝️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4장 오직 고통뿐
언제나 새로운 희생을 발명하며
어느 날 셋이서 돌담 사이로 손을 접어 넣어, “딱”하고 재미있는 소리를 내는 풀을 뽑으면서 놀다가 히야친타는 우연히 가시가 돋친 풀에 손이 닿자 몹시 따가운 것을 느끼게 되었다. 이것이 하나의 빛이 되어 그녀는 그 풀을 한 줌 움켜쥐고,
“봐라. 이것 보아. 고행하는 데 아주 근사한 것을 찾았다."
그때부터 그들은 가시풀을 보기만 하면 꺾어 가지고 자기네 다리를 치는 것이었다.
네 번째와 다섯 번째 발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들은 양떼를 뒤쫓아 어떤 길을 걷고 있었다. 루치아는 아마도 짐마차에서 쓰는 듯한 굵은 밧줄 자투리를 발견했다. 그녀는 그 밧줄을 주워 들고 장난삼아 팔을 동여매 보았다. 그러자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꼈고 자국이 났다.
“어쩜! 이렇게 하니 아프다 얘. 우리 이것을 허리에 매면 또 한 가지 희생을 바칠 수 있겠다."
하고 루치아가 큰 발견을 알리자 두 사촌도 여기에 찬성했다. 이 굵은 밧줄을 나눌 만한 칼을 갖지 않았던 그들은 돌을 주워서 바위 모서리에 대고 두들겨서 끊어 가지고 각각 고행의 띠를 띠게 되었다.
밧줄이 너무 굵었음인지 혹은 너무 졸라 댔음인지 이 띠는 종종 심한 통증을 일으켰다. 히야친타는 어떤 때 눈물을 흘렸다. 그래서 루치아가 밧줄을 끊어 버리라고 권하자
“아니야! 죄 보속과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고통을 당해야 해."
하고 대답하면서 참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음의 9월 13일 발현 때 귀부인께서는 정답게 말씀하셨다.
“성자께서는 너희들의 고행을 아주 흐뭇해하신다. 그러나 잠잘 때는 풀어 놓고 자라고 하신다. 그러니까 낮 동안만 매고 있거라."
아이들은 말씀대로 했다. 그리고 예수님과 성모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이 고행을 계속해 나갔다.(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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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2.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어제에 이어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도, 유다인들의 ‘옛 계명’과 그리스도인들의 ‘새 계명’이 대조됩니다.
독서는 ‘예루살렘 공의회’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새롭게 믿게 된 이들이 더 이상 유다인들의 외적 관습을 지킬 필요가 없음을 밝힙니다.
“여러분은 왜 우리 조상들도 우리도 다 감당할 수 없던 멍에를 형제들의 목에 씌워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입니까?”
복음은 유다인들의 옛 전통과 율법을 완성할 새로운 계명으로 ‘사랑’을 제시합니다.
인간은 율법의 준수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으로 구원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특별히 이 말씀은 지금까지의 ‘비유’(참포도나무와 가지)와 달리 갑자기 명령형이 사용되고 직접 화법으로 강조됩니다.
그리고 이때 쓰인 동사 ‘사랑하다’(‘아가파오’)는 상대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의지적 행위를 말합니다.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구원에 이르는 길로 제시한 사랑은 상대를 위하여 ‘죽는 것’, ‘목숨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 머문다는 것’은 그저 가만히 멈춘 상태로 있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그 사랑의 본질에 다가가는 여정을 뜻합니다.
역설적이게도, 상대를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내주고 상대를 대신해서 죽을 때, 오히려 그 사랑은 온전히 살아나고 자신도 구원됩니다.
자신의 생명을 내어 준 만큼 영원한 생명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실존하는 가장 큰 힘이며 신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런 사랑을 받고 있음을 알려 주시고, 그 이유도 말씀하여 주십니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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