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광통보제선사비 : 개성시 해풍군 해선리 무선봉 남쪽 기슭의 고려사찰 광통보제선사의 내력을 담은 고려 말기의 비석.1378년에 세워졌으며,목은 이색의 문장이 새겨져있다.높이 2.21m. 탄동리의 영릉( 경종릉), 봉동리의 영릉(충혜왕릉), 판문리의 영릉(숙종릉) 등 3개의 영릉이 개성의 동쪽과 동남쪽에 위치하는데, 이 지역은 현재 개성공단과 배후도시 예정지에 포함되어 있어 훼손이 우려되고 있다. 아울러 개성 주변에는 조선 초의 왕릉과 왕족의 무덤도 있는데, 조선 2대 정종릉인 후릉을 비롯하여 태조 이성계의 비인 신의왕후 한씨의 제릉, 이성계의 아들 방의, 방우의 묘가 있다. 주변에는 서경덕, 박지원의 묘도 있는데, 특히 박지원의 묘는 비교적 보존이 잘 되어 있다고 한다.
2.고려성균관 : 사적 50호. 개성시 선죽동에 위치. 고려말 개혁에 앞장섰던 신진사대부들이 이곳에서 성장하였다. 건물은 남북 중심축을 따라 앞에 명륜당이, 뒤에 대성전이 배치되었다. 현재 성균관이 개성역사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여기에는 개성 근처에서 발굴된 여러 가지 유물들을 모아 전시하고 있으며, 뜰에는 주변의 절터에서 가져온 탑과 불상들을 모아 놓았다.
3.태조 현릉-왕건릉 : 개성시 개풍군 해선리 만수산에 위치. 943년(태조 26) 5월에 조성. 첫째 왕후인 신혜왕후 유씨가 함께 묻혀 있다. 현릉은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몇 차례 이장된 적이 있었다. 1018년(현종 9) 거란이 침입하자 부아산 향림사로 옮겼다가 다음 해 11월 다시 환장하였으며, 1217년(고종 4) 거란족이 국경이 침입하자 태조의 재궁(관)은 다시 봉은사로 옮겨졌다. 또 1232년(고종 19) 강화도로 천도하면서 현릉은 다시 강화로 이장되었으며, 개경으로 서울을 옮긴 1270년(원종 11)에 임시로 이판동에 옮겼다가 1276년(충렬왕 2)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따라서 지금의 현릉 자리가 처음 태조가 묻혔던 바로 그 자리인지는 알 수 없다. 이곳은 또한 1906년(광무 10) 도적들에 의해 파헤쳐진 적이 있었으며, 1950년 한국전쟁 중에 파괴되었으나 1954년 복구한 적이 있다. 1992년 북한에서 발굴조사 후 새로 고치고, 1993년 5월 5일 한자로 쓴 ‘고려태조왕건왕릉개건비’를 세웠다. 이때 12지신상을 새긴 본래의 병풍석들은 무덤 안쪽에 넣어 보존하고 있다. 북한에서 발굴할 때 여러 가지 유물이 나왔는데, 그중 금동불상은 등신불로서 현재 개성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무덤안칸에는 벽화를 그렸는데, 동벽에 매화나무, 참대, 청룡이, 서벽에 소나무, 매화나무, 백호가, 북벽에 현무, 천장에는 8개의 별이 그려져 있다
4.나성: 사적 46호. 북쪽의 송악산(488m)으로부터 남쪽의 용수산(177m)로 연결되는 구릉의 능선을 따라 쌓은 성. 1029년 완성. 둘레 약 23km. 본래 흙으로 쌓았으며, 고려말 내성을 쌓으면서 겹치는 서쪽과 북쪽의 성벽은 돌로 쌓았다. 밑면의 너비는 토성 부분이 7~8m. 석성 부분이 6m 정도이고, 높이는 모두 3~4m 정도이다. [고려사] 지리지에서 25개의 성문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 중 동쪽의 숭인문과 서쪽의 선의문, 남쪽의 회빈문과 북쪽의 태화문(북성문) 동남쪽의 장패문이 중요한 문이었다. 지금 제대로 남아있는 나성의 성문은 하나도 없다. 북쪽의 북창문과 서쪽의 눌리문 등 내성(반월성)과 겹치는 부분의 일부 성문이 누각 없이 돌문만 남아 있으며, 동남쪽 문인 장패문(보정문)과 그 옆의 수구문의 터가 남아있다고 한다.
5.대흥산성 : 사적 52호. 개성의 배후산성으로 조선시기 한양의 북한산성과 같은 기능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처음 축성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대흥산성은 천마산과 성거산의 골짜기를 끼고 축성된 포곡식 산성으로 둘레는 약 10.1km이다. 이곳에는 4개의 큰 문과 사이 문이 있는데, 그중 북문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 또한 이곳에는 4개의 수구문이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송도삼절의 하나인 박연폭포를 이루는 북쪽 수구문이다. 대흥산성 안에는 대흥사와 관음사가 있다. 그중 관음사는 보물급 3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곳에는 대웅전과 7층석탑이 있다. 관음사 대웅전은 조선후기 목조건축물로서 남한에서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7층석탑은 고려시대 것으로 알려져 있다.
6.궁궐터(만월대) : 사적 48호. 북쪽의 개성시 송악산을 배경으로 그 남쪽의 구릉지대에 전개되어 있다. 경복궁을 비롯한 조선시대 궁궐이 대체로 평지에 건설된 것과 달리 흙을 높이 돋아 석축을 한 언덕진 곳에 자리잡은 것이 만월대 궁궐의 특징. 황성의 남문인 주작문을 지나고 궁성의 남문인 승평문을 들어서면 구정이 나오고, 구정을 지나면 다시 신봉문이 나오며, 신봉문을 지나면 본대궐의 중심전각인 회경전의 문인 창합문이 나오게 되는데, 회경전은 4개의 33단 돌계단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 만월대에는 회경전 앞의 돌계단 외에는 중심전각이었던 회경전터를 비롯하여 신봉문 터, 창합문 터, 건덕전 터, 장화전 터, 중광전 터의 주춧돌만 드러나 있다. 개성역사박물관에는 만월대 궁궐의 모형이 만들어져 전시되고 있다.
7.고려첨성대 : 만월대 서북쪽에 위치. 사적 49호. 이것은 고려시기의 천문대로 알려져 있는데, 지금은 화강암으로 다듬어 만든 축대부분만 남아 있다. 축대는 동서남북 방위와 일치하며, 그 높이는 2.8m, 한 변의 길이는 2.6m이다. 첨성대와 멀지 않은 곳에는 인종대 이자겸이 난을 일으켰을 때 목숨을 던져 왕을 구한 홍관의 비가 있었다.
8.수창궁 : 개성의 중심부인 십자가 근처에 있었는데 지금은 그 터에 학생소년궁전을 세워 놓았다. 그 근처에서 발견된 용머리 조각은 회경전 앞에 있었던 용머리 조각과 함께 현재는 성균관 대성전 뜰에 옮겨져 있다.
9.연복사종 : 경기도 개성시 북안동 남대문루에 있는 고려시대의 범종.동합금 주조. 높이 3.3m, 구경 지름 1.9m, 두께 23cm, 무게 약 14톤. 우리나라 5대 종의 하나로 일컬어진다. 몸체는 여러 줄의 굵은 선으로 아래 위 두 부분으로 나뉘어졌으며, 여기에는 명문을 비롯하여 불상, 불경, 여러 가지 모양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특히 물결 모양으로 만들어진 이 종의 구경 테두리에는 물결을 타고 움직이는 모습을 물고기·용·봉황·기린·게 등을 새겼으며, 그 위에 종을 만든 연대와 내력을 써놓았다.
10.영통사지 : 가장 많은 지정문화재를 남긴 영통사는 개성 나성밖 동북쪽인 개성시 용흥리 오관산 남쪽에 있다. 고려 초에 창건된 절로서 고려전기 화엄종단의 대표적인 절이다. 절터에는 현재 국보급으로 지정된 영통사5층탑(37), 영통사 서3층탑(38)을 비롯하여 보물급으로 지정된 영통사 동3층탑(35), 영통사대각국사비(36), 영통사당간지주(37)가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3기의 석탑은 모두 고려초기의 것으로 5층탑을 가운데 놓고 좌우에 3층탑이 동서로 서있다. 또 보물급 36호로 지정된 영통사대각국사비는 1125년(인종 3)의 것으로, 김부식이 지은 비문을 통하여 화엄승려로 활동한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의 행적을 살필 수 있다. 이 비문은 본래 의천이 입적한 다음 해인 1102년 윤관이 지었는데, 김부식이 개찬한 것이다. 이 일로 윤관의 아들 윤언이와 김부식은 서로 사감을 가지게 되었다 한다. 현재 영통사지는 발굴과 복원이 추진되고 있다고 한다.
<영통사5층탑>
11.현화사지 : 개성시 월고리 영취산 아래. 현화사와 관련된 지정문화재는 국보급인 현화사비(40), 현화사7층탑(41)과 보물급인 현화사당간지주(38), 현화사석등이 있다. 이중 석등은 서울의 덕수궁에, 7층탑은 개성시 역사박물관 주변에 옮겨져 있다. 현화사는 현종이 자기 부모의 원찰로 지은 법상종 계통의 절이다. 현종은 1018년(현종 9)에 국력을 기울여 현화사를 창건하고, 많은 토지와 노비를 제공하였다. 1021년에 건립된 현화사비는 채충순이 썼는데, 여기에는 현화사의 창건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현종 때 현화사에는 토지가 2000경, 노비 100구를 비롯하여 많은 물자들이 있었으며, 학도들이 1000명이 넘었다. 현화사 창건 내력을 적은 비 앞면의 위 부분에는 해와 달을 상징하는 까마귀와 토끼 조각이 있으며, 비 양 옆면에는 용이 새겨져 있다.
개성시 방직동 역사박물관 옆에 옮겨진 현화사7층석탑은 1020년에 만든 것으로 고려 초기 석탑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현화사탑에는 탑신 받침.
<현화사7층석탑>
12.불일사지 : 951년 광종이 자기 어머니 원찰로 세운 것. 개성시 판문군 선적리 보봉산 기슭에 위치. 국보급 35호. 1959년 발굴하였으며, 그 다음 해 불일사5층탑을 개성 역사박물관으로 옮겼다. 불일사5층탑을 옮길 때 불일사탑에는 금동9층탑, 금동5층탑, 작은 돌탑 20여 개, 작은 청자 사리단지, 불경 등 많은 유물이 나왔는데, 그것들은 지금 개성 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불일사5층탑>
13.선죽교 : 개성시 선죽동에 위치. 국보급 36호. 이곳에서 고려말 정몽주가 피살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다리의 옛 이름은 선지교였는데, 정몽주가 피살된 날 밤 다리 옆에 참대가 났기 때문에 이름을 선죽교로 고쳤다고 전한다. 선죽교에는 본래 난간이 없었는데, 1780년(정조 4) 정몽주의 후손이 다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설치한 것이다. 한석봉이 썼다고 전하는 ‘선죽교’라고 쓴 비석이 있다.
14. 공민왕릉 : 국보급 문화재 39호. 공민왕릉인 현릉과 왕비인 노국대장공주의 능인 정릉을 포함한 것. 개성시 개풍군 해선리 정릉동 봉명산 기슭에 위치. 1365년 공민왕의 왕후인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공민왕은 직접 정릉을 만들었으며, 1372년에 자신의 사후를 위하여 현릉을 만들어 두었다가 2년 후 그곳에 묻혔다. 1905년 경 도굴된 적이 있고, 1920년에 일부 수리공사를 하였으며, 1956년 개성시 문화유물보존위원회에서 다시 수리하였다. 이때 무덤구조와 내부시설을 조사하고 벽화를 옮겨 그렸다.
공민왕의 현릉의 벽에는 12지상 그림이 한 벽에 4개씩 그려져 있다. 병풍석에 그린 12지상과 같은 모습으로 공민왕이 직접 그렸다고 전한다. 천장에는 해와 북두칠성, 3성 그림이 있으며, 안칸 동벽에는 문을 그렸으며, 그 밑에 네모난 구멍을 뚫어 정릉과 통하게 되어 있다. 동쪽으로 좀 떨어진 개풍군 해선리에는 원찰로 세운 광통보제사의 보제선사비가 세워져 있다. 이 비의 탑신 부분은 다른 탑비와 달리 비교적 넓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으며, 여기에는 광통보제선사와 공민왕릉의 내력이 적혀 있다. 한편 태조 현릉 서북쪽에는 사적 54호로 지정된 고려 7릉군이 있는데, 그 주인공은 확인되지 않았다. 최근 보고에 의하면 7릉 중 6릉은 왕릉급이라고 한다.
15.개성 남대문 : 개성시 북안동에 위치. 내성의 남문. 한국전쟁 때 완전 파괴되었다가 1955년에 복원. 그 문루는 정면 3칸(13.63km) 측면 2칸(7.96m)의 안팎 3포의 합각식 건물로 되어 있다. ‘남대문’이라 쓰여있는 현판은 조선전기의 명필은 한석봉의 글씨로 알려져 있으며, 남대문 문루에는 보물급 30호로 지정된 연복사종이 걸려있다. 연복사종은 1346년(충목왕 2)에 만들어져 연복사에 걸렸는데, 조선 중기 연복사가 불에 타서 없어지자 근처의 남대문에 옮겨 달았던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진은 없었지만,, 도움이 되셨길 바라네요,, 저도 이거 숙제 였었는데 찾아서 다행이었거든요,, 숙제 잘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