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서원 중구절(重九節) 봉향례
어제 2023.10.23(음력 9월9일)일 화산서원 중구절 봉향례가 있었다.
화산서원은 인동장씨 문중 소유의 서원으로 극명당 (휘 내범), 만회당 (휘 경우) 두 부자의 강학 지소 였으며 지금은 극명당 (휘 내범)을 주벽으로 하고 종향은 만회당 (휘 경우) 두 부자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화산서원의 소재지는 경븍 칠곡군에 소재 하고 있으며 서원의 배치는 다른 곳과 다름없이 전학후묘의 형태를 유지 하고 있다.
보통 서원의 향사는 봄에도 올리고 가을에는 중구절에 제사를 올리는 경우도 있는데 요즘은 중구절 행사는 거의 없어져 생각 보다 많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이번 중구절 봉향례는 대구 경북지역 유림 대표가 헌관이 되어 잔을 드리고 향을 올렸는데 초헌에 도태기, 아헌에 송정근, 종헌에 금중현, 집례 이재수, 축에 정재권님이 소임을 맡아 주셨다.
그리고 그외 인동 장문에서 정규 대종회 회장 , 삭원 대종손., 병홍 종파 회장이 참석을 하셨고 그외 유림의 여러 어른과 인동 장문에서 후손 여러분이 참석읗 했으며 이날 행사는 집사 분정에 따라 소임이 정해 지고 홀기에 준하여 잔을 드리고 향을 올리는 예가 진행이 되었다.
주벽인 극명당 (휘 내범) 선생은 조선조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참판(工曹參判)의 벼슬을 증직으로 하사 받았으며 10세에 선생에게 입문하였다.
한강 선생과 여헌 선생에게 수학하였고 낙재(樂齋) 서사원, 모당(慕堂) 손처눌, 석담(石潭) 이윤우공과 도의지교를 맺기도 했었다
疏竹植軒前(소죽식헌전)
듬성한 대나무는 집 앞에 심겨져 있고
貞松擁宅後(정송옹택후)
꼿꼿한 소나무는 집 뒤에 서 있구나
坐爲此間人(좌위차간인)
이 사이에 앉아 있는 사람은
托盟要永久(탁맹요영구)
친구간의 정 영구하기를 생각한다오
壁上節義字(벽상절의자)
벽 위에 걸려 있는 절의의 글자
畫從高皇手(화종고황수)
고황제의 손에서 나온 것이라네
(高皇帝 : 명나라 태조 주원장)
- 乃範 의 빈 집에 쓰다. / 장현광 -
그리고 종향인 만회당(휘 경우)선생은 극명당 (휘 내범)의 아들로 9세에 여헌 문하에서 수학을 시작 했으며 진사시에 입격후 영릉참봉에 제수 되었으나 불취 하였으며 학문적 성과를 이룬 것과는 달리 관직이나 현실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 했다는 소식에 맏아들 해(海)로 하여금 의병을 창기하여 勤王의 행차를 발정하게 명하니 해 (호: 三優堂)가 의병장이 되어 상주까지 출정 하였으나 이미 항복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대궐을 향하여 통곡하고 돌아 왔다고 한다.
만회당 선생의 벼슬은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通政大夫承政院兼經筵參贊官)으로 추증 되었다.
중구절 제사라 해서 다른 서원의 일반 제사와 다르지 않다. 다만 중구절에 지내는 제사 이니 중구절 제사 이고 또 최근에는 증구절이다 중양절이다 해서 제사를 모시는 곳이 그리 흔치는 않다.
秋盡關河候雁哀(추진관하후안애)
가을이 다 지나간 관하에 기러기 소리 슬픈데
思歸且上望鄕臺 (사귀차상망향대)
고향생각에 잠시 망향대에 오른다.
慇懃十月咸山菊 (은근시월함산국)
은근히 시월에 핀 함산(함흥)의 국화는
不爲重陽爲客開 ( 불위중양위객개)
중양절을 마다하고 나그네를 위해 피었구나!
- 咸興客館對菊 / 鄭澈 -
중구절은 어찌보면 거의 사라진 명절 이지만 옛날에는 중구절 (중양절)이라 해서 꽤나 큰 명절로 여긴 모양인데 이 또한 세월의 변화에 따라가는 것이리라
그래서 중구절에 대해 알아 보니 중구절은 음력 9월 9일 달과 날이 겹치는 숫자의 날을 명절로 정했다는데 重九는 음양의 철학적인 重日 명절 중의 하나라고 한다
음력 3월 3일을 삼짇날, 5월 5일을 단오 등 陽數가 겹친 날이지만 특히 9월 9일을 일컫는 말이 중구절 이다.
중구절은 重陽이라고도 하는데 양의 수가 중복 되었다 해서 증양이라 하며 또 이날은 국화를 따다가 떡을 해서 먹는데 삼월 삼짇날의 진달래 떡과 같은 화전(花煎)이라고 한다.
옛 부터 홀수는 양이라 하고 짝수는 음이라 하여 우리 선조들은 홀수를 재수의 상징으로 여기고 홀수인 양을 무척 좋아 했단다.
上元須酌豪友(상원수작호우)
정월대보름엔 모름지기 호탕한 벗과 술 마시고
端午須酌麗友(단오수작려우)
단오에는 고운 벗과 잔 나누며
七夕須酌韻友(칠석수작운우)
칠석에는 운치 있는 벗과 잔질하고
中秋須酌淡友(중추수작담우)
추석에는 담박한 벗과 술잔 나누며
重九須酌逸友(중구수작일우)
중구절엔 뜻 높은 벗과 한잔하리라.
그래서 1월1일 설날, 3월3일 삼월삼짇날, 5월5일 오월단오, 7월7일 칠월칠석, 9월9일인 중구절 이라 해서 이날을 모두 명절로 여겼다고 한다.
그리고 신흠 선생은 사는 동안 한식과 중구만은 삼가서 헛되이 보내지 말아야 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四時의 변화 가운데 이 절기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한다.
중구절에 대한 기록은 신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보아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 고유의 명절로 인식 되어 왔으며 조선초에는 삼월 삼짇날과 중구절은 나라에서 시제를 지내도록 권하기도 했단다.
故園歸路渺無窮(고원귀로묘무궁)
고향 땅에 가는 길 아득하여 끝없으니
水繞山圍第幾重(수요산위제기중)
물 돌고 산 돌아서 다시 또 몇 겹인가?
望欲遠時愁更遠(망욕원시수갱원)
먼 데를 바라보면 시름 더욱 깊어지니
登高莫上最高峯(등고막상최고봉)
높은 데 올라가도 최고봉엔 가지 마소
- 重九日 / 鄭道傳 -
중구절의 시제는 조선 후기 특히 영남 지방에서 不祧廟를 모신 집안을 중심으로 행해져 왔으며 부조묘가 인정된 조상에 대한 시제는 중일을 택하여 삼월 삼짇날 또는 중구절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중구일의 국화술은 백가지 재앙을 물리칠 수 있다는 속설이 있다는데 그래서 일까 음력 9월9일 중구절에는 손이 없는 날이라 해서 죽은 날을 알지 못하는 사람의 영혼을 달래는 제사를 올렸다고 하기도 하는데 그런 이유로 요즘은 갈곳 없이 구천을 떠도는 혼령들의 제사를 지내는 날로 더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또 일설에는 고려 정중부의 난때 죽임을 당한 문신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이날 제사를 올렸다는 설도 있는데 그것이 요즘 각 집에서 중구절에 올리는 제사의 시작점 이라고 하는 설도 있다.
獨在異鄕爲異客(독재이향위이객)
나 홀로 타향 땅의 외로운 나그네 되니
每逢佳節倍思親(매봉가절배사친)
명절때 마다 육친이 더욱 그리워지네.
遙知兄弟登高處(요지형제등고처)
먼 고향 땅 형제들은 높은 곳에 올라가
遍揷茱萸少一人(편삽수유소일인)
수유를 꽂고 놀며 한 사람 비었다 하겠네.
- 九月九日 憶山東兄弟 / 王維 -
중구일은 양의 수로 우리가 좋아 하는 양의 수가 중복된 날로 좋은 의미에서 그 날은 큰 명절이고 또 추수를 끝 내고 햇 곡식으로 조상께 제사를 올리는 기쁜 날이자 길일 이었다.
그래서 중구절에는 햇곡식에 막 담아낸 국화주를 나누기도 하고 또 절기에 맞게 남자들은 국화꽃 잎을 따서 술잔에 띄워 마시며 단풍을 주제로 시를 짓기도 했고 부녀자들은 내방가사를 읊고 농부는 농악을 울리며 단풍과 국화꽃 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급변하는 시대 그 것까지 다 챙기며 살아가기에는 부담이 된다 힐 수도 있지만 이 또한 우리네 명절 풍습의 하나 이고 또 아직도 제사를 모시는 가정도 적지 않다고 하니 중구절에 대한 의미를 돌아 봤으면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