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머리핀 /최호택
현관을 나서자 보름달이 유난히 밝고 커 보였다. 선생님 댁에서 하던 과외를 선생님이 숙직인 까닭에 학교에서 마치고 운동장으로 나오는 길이었다. 화단에는 키가 큰 향나무를 가운데 두고, 이름 모를 꽃들이 지나가는 바람에 몸을 맡긴 채 흔들거리고 있었다. 이따금씩 부는 바람이 가을이 왔음을 일러주었다. 방학이 끝나고 2학기 첫 과외를 끝낸 동무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머지않아 통금 사이렌이 불 것이지만 오리나 되는 길을 걸어 집으로 가야 했다. 읍내를 벗어나 철길을 따라 걷다보면 저만치서 어머니가 오고 계실 것이다. 철길로 접어들자 멀리 우리 동네 앞 미군부대 울타리를 따라 가로등 불빛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직 어머니의 모습은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난 여름방학 때 할머니를 따라 경원선 기차를 타고 영등포에 사는 둘째 고모 댁에 갔었다. 고종사촌 아우는 이곳저곳으로 나를 데리고 다녔지만 매일이라도 가보고 싶은 곳은 영등포 시장이었다. 그곳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지금껏 본 적도 없는 물건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돈이 있다고 해도 아무 것도 살 수가 없었다. 식구 중 누군가가 무엇이든 사는 것을 보았다면 모를까 가게에 진열된 물건들은 우리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이라는 생각뿐이었다. 공책 한 권도 사다 주어야만 쓸 줄 알았던 나는 대체 누가 저런 물건을 사는지 궁금했다. 신기하게도 사람들은 이 가게, 저 가게에서 쉽게 흥정하고 물건을 샀다.
고모 댁을 떠나기 전 날 고종사촌과 함께 또 다시 시장구경을 갔다. 고모 댁을 떠난다는 사실보다 시장구경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것이 속상했다. 출근길에 전차운전수 옷을 멋지게 차려입은 고모부는 공책을 사 쓰라며 내 손에 십 원짜리 지폐 한 장과 일 원짜리 동전 몇 닢을 쥐어주었다. 할머니는 시장에 가면 고종사촌과 맛있는 것을 사먹으라고 하셨다. 숙맥인 나는 무엇이 맛있는 것인지, 맛있는 것을 어떻게 사는 것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고향 초등학교 앞 낯이 익은 문방구 주인아저씨 말고는 선뜻 나서서 물건 값을 묻지도 사지도 못하는 얼치기였다. 돌이켜 보면 그 돈은 종이쪽에 불과했다.
우리는 점심 후 반나절이나 시장 바닥을 누비며 구경에 열중했다. 어느 잡화점에 유독 내 눈을 끄는 노란 머리핀이 진열되어 있었다. 같은 반 여자 친구에게 그 머리핀을 사주고 싶었지만 선뜻 살 수가 없었다. 사촌은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볼 것이며 누구에게 줄 것이냐고 물어올 것이다. 그런 물음에 대답할 자신이 없었다. 마음속에는 저 핀을 사 친구의 손에 꼭 쥐어주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가게 주인도 이상하게 생각할 것만 같았다. 그는 형 우리 뭐 사 먹을까, 하며 유혹을 했지만 머릿속에는 온통 색색의 머리핀이 있는 가게로부터 멀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지고 조바심이 일었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시장은 점점 한산해지고 있었다. 가게 문을 닫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식은땀이 흘렀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체면 불구하고 사촌에게 머리핀을 샀으면 좋겠다고 용기를 내 말했다. 그는 잡화점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내가 손가락질로 가리킨 노란 색 머리핀 한 개를 쉽게 샀다. 가게 주인은 관심 없다는 듯 물건을 선뜻 내주었다. 아우는 여동생 주려고 사는 것이냐고 물어왔지만 사실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얼버무렸다. 신통하게도 그는 머리핀을 산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손에 땀이 나도록 핀을 꼭 쥔 채 고모 댁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용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집으로 내려왔다.
지금 쯤 그 아이는 집에 도착해 시간표대로 가방을 쌀 것이다. 가방에 몰래 넣어둔 머리핀을 보았을까. 보았다면 좋아하기는 했을까.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그 아이의 집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철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철길 중간쯤에서 만난 어머니는 가방을 받아든 채 오늘 배운 것을 물어왔지만, 온통 내 관심은 그 아이가 머리핀을 발견했을까, 내일 그 핀을 머리에 꽂고 학교에 올까 하는 것뿐이었다. 결국은 그 아이가 그 머리핀을 꽂은 것을 보지 못한 채 졸업을 했다. 벌써 사십 오륙년 전쯤의 일이 되고 말았다.
언제인가 동창 모임에서 만난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초등학교 육학년 때 노란색 머리핀이 가방 속에 있었던 것을 기억하느냐고. 그녀는 책가방을 싸다가 그 머리핀을 발견했노라고, 생긴 모양이 꼭 나비 같았다고 용케도 기억을 해냈다. 그녀는 아, 그게 역시 너였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내가 준 것이라고 짐작은 했지만 물어볼 용기는 없었단다. 남들이 남자 친구로부터 선물 받은 것이라고 눈치를 채고 놀려댈 것만 같아 더 더욱 머리에 꽂을 수는 없었다고 했다. 꽤 오랫동안 잘 간직했었는데 언제 쯤 그 핀을 잃어버렸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작년 겨울 청첩장이 왔다. 큰 딸을 시집보낸다는 것이다. 참석해 축하해주고 싶었지만 마침 해외출장이 계획되어 있었다. 우체국에 들려 우편환으로 축의금을 보내고 참석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전화를 넣었다. 조만간 할머니가 되고 할아버지가 되겠지만 지금도 그 때 생각을 하면 소년마냥 가슴이 뛴다. 아마도 하지 못한 말이 남아있어서 일 것이다.
첫댓글 오랜만에 최호택선생님 글 고맙습니다. 노란 머리핀에 돌아갈 수 없는 어린시절 동경이 담겼네요.
소년시절의 맑고 청순한 사랑에 읽는 독자도 더불어 즐겁습니다. 감사합니다.
두 분 선생님 오랜만입니다. 제가 게을러 언제나 인사가 늦습니다. 안 선생님 책 잘 읽었습니다. 건강하시고 좋은 글 많이 쓰시기 바랍니다. 배 선생님의 노력 덕분에 카페가 나날이 번창합니다.
최선생님! 부산카페에 단골이신 줄 미처 몰랐군요. 뵌지 오랩니다. 건강하시지요? 노란 머리핀을 머리에 꽃고 고마운 인사를 하며 손을 잡아주었다면 좋았을 것을. 어린 가슴 속에선 콩당콩당 소리가 났겠지요. 재밌게 읽었습니다.
아름다운 날의 스케치군요. 그런 날들 속으로 한번 가볼까 합니다. 송연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