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 내사 내 대적으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
2. |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
3. |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음부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게 하셨나이다 |
4. |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찌어다 |
5. |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찌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시103:9 |
6. |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
7. |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
8. |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
9. |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어찌 진토가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
10. | 여호와여 들으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
11. |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
12. | 이는 잠잠치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케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영히 감사하리이다 시16:9, 시57:8 |
② 잠언 30장
○ 개인적인 고백에 의한 잠언 | |
1. | 이 말씀은 야게의 아들 아굴의 잠언이니 그가 이디엘과 우갈에게 이른 것이니라 |
2. |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 내게는 사람의 총명이 있지 아니하니라 |
3. | 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또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거니와 |
4. |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 이름이 무엇인지, 그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 계19:12 |
5. |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
6. |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 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 |
7. | 내가 두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
8. |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
9. |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
○ 동물에 비유한 잠언들 | |
10. | 너는 종을 그 상전에게 훼방하지 말라 그가 너를 저주하겠고 너는 죄책을 당할까 두려우니라 전7:21 |
11. | 아비를 저주하며 어미를 축복하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 |
12. | 스스로 깨끗한 자로 여기면서 오히려 그 더러운 것을 씻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 |
13. | 눈이 심히 높으며 그 눈꺼풀이 높이 들린 무리가 있느니라 사2:11 |
14. | 앞니는 장검 같고 어금니는 군도 같아서 가난한 자를 땅에서 삼키며 궁핍한 자를 사람 중에서 삼키는 무리가 있느니라 시57:4, 욥29:17 |
15. |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고 다고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것 서넛이 있나니 |
16. | 곧 음부와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물로 채울 수 없는 땅과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불이니라 |
17. |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 |
18. | 내가 심히 기이히 여기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
19. | 곧 공중에 날아 다니는 독수리의 자취와 반석 위로 기어다니는 뱀의 자취와 바다로 지나다니는 배의 자취와 남자가 여자와 함께 한 자취며 |
20. | 음녀의 자취도 그러하니라 그가 먹고 그 입을 씻음 같이 말하기를 내가 악을 행치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
21. |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으로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
22. | 곧 종이 임금된 것과 미련한 자가 배부른 것과 |
23. | 꺼림을 받는 계집이 시집간 것과 계집 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 잠12:4, 잠29:21 |
24. | 땅에 작고도 가장 지혜로운 것 넷이 있나니 |
25. | 곧 힘이 없는 종류로되 먹을 것을 여름에 예비하는 개미와 |
26. | 약한 종류로되 집을 바위 사이에 짓는 사반과 |
27. | 임군이 없으되 다 떼를 지어 나아가는 메뚜기와 |
28. | 손에 잡힐만하여도 왕궁에 있는 도마뱀이니라 |
29. | 잘 걸으며 위풍 있게 다니는 것 서넛이 있나니 |
30. | 곧 짐승 중에 가장 강하여 아무 짐승 앞에서도 물러가지 아니하는 사자와 |
31. | 사냥개와 수염소와 및 당할 수 없는 왕이니라 |
32. | 만일 네가 미련하여 스스로 높은체 하였거나 혹 악한 일을 도모하였거든 네 손으로 입을 막으라 |
33. | 대저 젖을 저으면 뻐터가 되고 코를 비틀면 피가 나는 것 같이 노를 격동하면 다툼이 남이니라 |
� 오늘의 역사
① 제물포 조약(1882.음7.17) : 임오군란 때 일본 공사관이 불타고 일본인 10여명이 사상되는 가운데 피난․귀국한 일본공사 하나부사는 1개대대의 병력을 인솔하고 제물포에 상륙, 조선에 대하여 책임을 묻고 협상을 요구하자, 조선정부는 전권대신 이유원․부관
김홍집을 임명하니 8월 28일 인천 제물포에 정박한 일본군 함상에서 회담이 열렸다.
처음에는 조선이 일본의 제안을 수락하지 않아 결렬되었으나 청나라의 중재로 협상은 재개되어 일본제안의 원안에 약간의 수정을 가하여 본조약 6개조와 수호조규속약 2개조가 8월 30일 조인되니 이것이 이른바 ‘제물포 조약’이다.
이 조약에 따라 조선은 배상금 50만원을 지불하게되고 일본공사관에 일본 경비병을 주둔시켰고, 박영효 등을 보내 사과의 뜻을 표했다.
② 신령지구 전투전적비 : 경북 영천군 신령면 화성동 소재.
6.25 전란 당시인 1950.8.30 - 9.16 어간 이 지구 전투에서 국군 제6사단은 괴뢰 제7, 8, 15, 17기갑 사단의 남침을 일진일퇴의 공방전 끝에 저지시키고 총반격의 터전을 마련한 공훈을 기념하여 1958년에 이 비를 건립하였다.
③ 조선 21대왕 영조의 즉위(1724) : 경종의 승하로.
⇨ 8월 3일.
④ 제1차 남북적십자회담 평양서 개막(1972) : 제1차 남북적십자회담이 개막됐다.
남북적십자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대표단은 29일 판문점을 떠나 평양에 도착했다
1972년 8월 30일 제1차 남북적십자회담이 평양 대동강 문화회관에서 열렸다.
남북의 이산가족찾기를 위한 쌍방간의 적십자회담은 1971년 8월 12일 대한적십자사 총재 최두선이 제의하고 북한적십자사가 이를 수락함으로써 성립되었다.
9월 20일 판문점에서 개최한 제1차 예비회담에서는 상설회담 연락사무소 설치와 직통 전화 가설등에 합의, 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했으나, 북측과 남측간에 상호접촉의 대상자 및 제약조건에 이견을 보임에 따라 회담은 난항에 빠지게 되었다.
1973년 7월 13일 평양에서 개최된 제7차 본회담을 끝으로 회담은 별 성과 없이 교착상태에 빠져있다가 12년만인 1985년 제8차 본회담을 서울에서 열고 남북한 이산가족 등의 교환방문 추진에 합의했다. 양측 실무대표는 3차례의 접촉끝에, 8월 22일 쌍방 각기 151명(단장1, 고향방문단50, 예술공연단50, 기자30, 지원인원20)의 교환방문에 합의함으로써 분단 40여년만에 서울-평양 동시방문이 실현되었다.
⑤ 박정희 장군 전역(1963) : 5.16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장군이 쿠데타 발발 2년 3개월만인 1963년 오늘 전역했다.
한 달 반뒤에 치뤄질 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서 군복을 벗은 것이다.
전역식이 열린 강원도 철원의 육군 제 5군단 지포리 비행장에는 국내외 고위인사 6백여명이 참석해 박정희의 연설을 들었다.
[녹취:박정희 육성] "다음의 한구절을 남기고 전역을 인사로 대신할까 합니다.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은 불운한 군인이 없도록 합시다."
공화당의 총재로 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박정희 후보는 민주당의 윤보선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⑥ 대한매일신문, 매일신보로 개칭, 총독부 기관지로 전락(1910) : 1904년 7월 18일 일제의 간섭을 받지 않는 외국인인 베델(영국)을 내세워 민족진영을 대표해 창간한 신문으로 초기 제호는 <<대한매일신보>>로 시작하였으나 한일합병후 총독부 기관지로 만들면서 <<매일신보>>로 제호를 바뀌었다.
당시 총독부의 기관지는 일본어판인 <<경성일보>>와 영문판인 <>와 함께 3개 국어로 발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매일신보>>는 <<경성일보>>의 지휘와 감독을 받는 반쪽짜리 신문이었다.
그후 1938년 4월 편집국이 독립하면서 사장에 최린, 부사장에 이상협을 선출하며 제호도 <<每日申報>> 에서 <<每日新報>> 로 바꾸게 된다.
매일신보는 해방까지 이어오며 기관지로서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고 수 많은 친일인사의 할동무대로 이용되었다.
결국 변절의 흔적을 고스란이 간직한 매일신보는 친일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⑦ 성폭행범 살해 김부남씨 집유(1991) : 8월 16일 전주지방법원 1호 법정. 재판이 진행되는 내내 피고인석에 앉은 여인은 고개를 숙인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재판장이 피고인에게 마지막 진술을 하도록 재촉했다.
여인은 들릴 듯 말 듯 입을 열었다.
사람을 죽인 게 아니라… 짐승을 죽였습니다.
피고인 김부남 씨는 그해 1월 30일 전북 남원시 주천면 자신의 고향집 근처에 살고 있던 송모 씨를 찾아갔다.
56세의 송 씨를 미리 준비해 간 과도로 살해했다.
여인은 넋을 잃은 채 이튿날 아침까지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홉 살 소녀가 서른 살 여인이 될 때까지 20여 년을 하루같이 괴롭히던 악몽의 고리를 끊은 것이다.
소녀는 물을 길으러 가고 있었다.
그때 아저씨가 심부름 하나 해 달라며 소녀에게 자기 집에 들어가 있으라고 했다.
소녀는 시키는 대로 했고 따라 들어온 아저씨는 짐승이 됐다.
그날 이후 소녀는 말을 잃고 먼산바라기가 됐다.
엄마조차 사정을 몰랐다.
소녀의 가슴속 깊은 곳에 똬리를 튼 한은 병이 됐다.
경계성 인격장애라는 병은 소녀의 삶을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1983년 결혼했으나 남편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한 달 만에 파탄 났다.
1987년 재혼했지만 역시 순탄치 못했다.
결국 20여 년을 자란 한이 복수의 칼을 들었다.
검사는 이 기구한 여인에게 살인죄의 최저 형량인 징역 5년을 구형했다.
여성계는 20여 년간 유예됐던 정당방어라며 무죄를 주장했다.
8월 30일 선고공판.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후회하지 않는 피고인에게 징역 2년 6개월, 집행유예 3년, 치료감호처분 3년이 선고됐다.
살인에 대한 죄를 묻긴 했으되 사실상 무죄로 판결한 것이다.
여인은 1993년 5월 치료감호를 마치고 사회로 돌아왔다.
이 사건은 성폭력 범죄를 처벌할 특별법의 필요성을 절감케 했다. 1994년 법이 제정됐으나 성범죄는 좀체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성범죄자의 신상을 공개하고, 전자팔찌에 화학적 거세까지 거론하지만 범죄는 날로 극악무도해지는 듯하다.
올 2월에도 서울 용산구에서는 신발가게 아저씨가 열한 살 소녀를 호떡 먹고 가라며 꾀어 추행하려다 소녀가 극구 저항하자 살해하고 자신의 아들과 함께 시신을 불태우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으니….
그제는 한 청소년 단체의 간부가 10대 청소년 150여 명을 강제 추행한 혐의로 구속됐다.
인두겁을 쓴 짐승들의 마수(魔手)를 막을 방법은 정녕 없는가.
(여규병 기자 3springs@donga.com.2006)
⑧ 미-비 상호 방위 조약 조인(1951) : 워싱턴에서 조인된 미국 -필리핀 사이의 상호 방위를 다짐한 조약.
「한-미 상호 방위 조약」․「미-일 안전 보장 조약」․「미-중 상호 방위 조약」 등과 함게 동북 및 동남 아시아 지역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일련의 조약 가운데 하나이다.
⑨ 동티모르 독립 투표(1999) :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다가 1976년 인도네시아에 강제로 합병된 동티모르.
20여년동안 독립을 열망해온 동티모르 주민들이 1999년 유엔의 감시 아래 독립 여부를 결정하는 역사적인 주민투표를 실시하였다. 98%가 넘는 높은 투표율을 나타낸 이 선거결과 인도네시아의 자치를 거부하고 독립에 찬성한 비율은 78.5%였다.
하비비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독립을 지지한 동티모르 주민의 뜻을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독립에 반대하며 투표를 방해해 온 동티모르의 친인도네시아계 민병대들이 유혈난동을 부리면서 동티모르 곳곳은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상황이 악화되자 유엔은 다국적군 7천5백명을 인도네시아에 파병한다.
하지만 민병대의 저항이 계속되면서 양측사이에는 교전까지 벌어진다.
동티모르 사태가 진정 기미를 보인 것은 두달 뒤인 10월 20일 인도네시아 의회격인 국민협의회가 동티모르의 독립을 승인하면서 부터입니다.
일주일 후 유엔이 동티모르 독립을 위한 과도행정기구를 설립했고 동티모르는 비로소 독립을 향한 첫걸음을 내딛게 되고 결국 독립국이 된다.
⑩ 독일군 레닌그라드 공격(1941) : 1941년 오늘 나치 독일군이 소련 침공 2달만에 레닌그라드를 공격했다.
공격 사흘만에 레닌그라드를 완전히 포위한 독일군은 이후 3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레닌그라드를 함락시키기 위해 공격을 계속했다.
레닌그라드 900일 포위공격!
1944년 1월까지 독일군이 레닌그라드를 철수 할 때 까지 레닌그라드 시민 40여만명은 굶어 죽었다.
레닌그라드 일대를 해방시킨 소련은 나치 독일군에 맞선 레닌그라드시에 '영웅도시'라는 칭호를 내렸다.
*****독일 군의 레닌그라드 포위 공격 시작 : 1941년 7월 10일에 시작된 레닌그라드 전투는 2차 대전 중 러시아와 독일 사이에 벌어진 최대 규모의 전투 가운데 하나이다.
레닌그라드는 1905년과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중심지이자, 1918년 3월 모스크바 수도 이전까지 혁명정부의 수도이기도 했다.
레닌그라드의 본래 지명은 '상트 페테르부르그'(Saint Petersburg)이다.
안나 이바노브나 여제(Anna Ivanovna, 1730-40) 이래 상트 페테르부르그는 러시아의 서울이자 국제도시였다.
1914년 1차 대전 시 민족주의의 고조와 함께 러시아 식으로 "페트로그라드"(Petrograd)로 개명되었다가, 1924년 레닌 사망 직후 "레닌그라드"(Leningrad)로 재 명명된다.
히틀러가 레닌그라드 점령에 열을 올렸던 것은, 이곳이 볼셰비즘의 탄생지이자 스탈린의 산업화 정책의 본거지였기 때문이다.
1전쟁 직전 300여 만 인구에 러시아 전체 산업 생산의 10% 이상을 담당하고 있던 레닌그라드 공격은 히틀러에게 공산주의의 성지(聖地) 점령과 산업 토대 파괴라는 이중의 목표였다.
개전(開戰) 초기 러시아의 완고한 방어 막에 고전하던 독일은 1941년 8월 30일, 레닌그라드 철도를 확보함으로서 레닌그라드 고립 작전에 성공한다.
이로써 러시아는 450km에 달하는 레닌그라드 전선 방어를 위한 보급로를 상실, 1941년 11월부터 1942년 10월까지 64만 여명이 아사하는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된다.
러시아는 스탈린그라드(Stalingrad) 반격 작전에 성공, 레닌그라드에 투입된 독일군 병력을 분산시킴으로써 레닌그라드 방어작전에 유리하게 반전시킬 수 있었다.
특히 러시아는 스탈린그라드 전투 직후인 1942년 11월부터 라도가(Ladoga) 호수의 결빙을 이용, 보급로와 이동로를 확보함으로써 반전의 계기를 맞이하게 된다.
1943년 1월 독일군의 레닌그라드 포위공격에 틈이 생기기 시작했으며, 1년 후인 1944년 1월 27일 러시아의 승리로 레닌그라드 전투가 종결되었다.
⑪ 영국 BBC 정규방송 시작(1936) : 텔레비전의 첫 정규방송이 시작된 때가 1936년 오늘이다.
영국방송협회, BBC가 런던 북부의 알렉산더궁에 마련한 텔레비전 스튜디오에서 첫 정규방송을 시작했다.
텔레비전 시험방송이 시작된지 10년만에 본격적인 TV시대가 막을 올린 것이다.
우리나라는 20년이 지난 1956년 처음으로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됐다.
⑫ 미주기구 헌장 조인(1948) : 8월 30일 보고타에서 개최된 제9회 범아메리카 회의 결과 미주기구(OAS) 헌장이 조인되었다.
미주기구는 "어느 하나의 미주국가에 대한 공격은 전아메리카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된다"는 먼로주의 외교원칙에 근거해 창설되었다.
캐나다를 제외한 아메리카 대륙의 거의 모든 독립국가들이 포함되어 있는 기구로서 서반구의 평화․안전 보장, 회원국간 분쟁의 평화적 해결, 집단안보체제 구축, 경제․사회․문화 영역에서의 상호협력 등을 내세웠다.
미주기구에 의해서 채택된 지역안보에 대한 주요 결정으로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J. F. 케네디 대통령을 지지한 것과 1965년 도미니카 공화국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지지한 것 등이 있다.
또한 '진보동맹' 창설을 위한 '푼타 델 에스테 헌장'을 채택했으며, 1979년에는 '인권문제 미주사법재판소'를 코스타리카의 산호세에 설립했다.
매년 총회를 개최하며, 총회를 보완하는 외무장관협의회가 있어 회원국가가 공격이나 침략을 당할 경우에 집행기구의 역할을 한다. 각 회원국가의 대사로 구성된 상임회의는 미주기구의 집행위원회 역할을 담당하며, 특별위원회는 기술적인 문제를 다룬다.
총회 사무국은 미국의 워싱턴 D.C.에 있다.
⑬ YS-11 : 1962년 8월30일, 일본 나고야 비행장.
중형 여객기 한대가 날아 올랐다.
일본 최초의 국산 여객기 YS-11기의 처녀비행 순간이다.
YS-11은 아시아권에서 생산된 유일무이한 고유 모델 여객기라는 기록을 45년 간 유지하고 있는 기종. 항공기 시장 진입이 그만큼 어렵다는 점을 말해주는 상징물이다.
YS-11은 56분 간의 첫 비행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1965년부터 양산된 64인승 기체는 출력 부족이라는 단점에도 긴 항속거리와 견고한 동체를 지닌 기종이라는 평가를 얻었다.
롤스로이스 엔진을 제외하고는 독자적으로 설계ㆍ제작된 YS-11의 시제 2호기는 도쿄올림픽 성화를 운송해 일본인들에게 자긍심을 안겨줬다.
태평양전쟁의 전범 도조 히데키의 둘째 아들이 핵심설계를 맡았다는 점도 화제를 모았다.
문제는 수요. 민수 판매량의 절반이 수출용(1969년 납북된 대한항공 여객기가 이 기종이다)이었지만 기대에는 못 미쳐 해마다 적자가 쌓였다.
결국 미쓰비시ㆍ히타치 등의 컨소시엄인 일본항공기제조㈜는 1973년 누적적자 360억엔을 안은 채 생산을 중단했다.
총생산 182대. 손익분기점 300대선을 훨씬 밑돌았다.
일본이 독자생산을 포기한 후 지금까지 어느 아시아 국가도 고유 모델을 선보이지 못했다.
역시 수요 탓이다.
우리나라가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중형 여객기 사업이 무산된 것도 중국과의 합작을 통해 수요를 확보한다는 계획이 뒤틀어졌기 때문이다.
완제기 대신 부품 생산에 주력했던 일본은 다시금 중형기 개발에 적극 나서고 있다.
한국과 결별한 후 독자개발로 전환한 중국은 내년 초 국산기를 선보일 예정이다.
중국과 일본이 내놓을 중형 여객기가 캐나다와 브라질이 양분하는 세계시장을 넘을 수 있을지 주목되지만 그보다 걱정스러운 게 있다. 한국은 뭘 해야 할까.
(권홍우 편집위원.서경.2007)
⑭ 아테네마라톤 관중 난입(2004) : 우승은 떼어 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했다.
마라톤 레이스 35km 지점.
그는 이미 25km부터 단독 선두로 달리고 있었다.
경쟁자들은 멀찍이 뒤처져 있었다.
결승선까지 남은 거리는 불과 7.195km.
2004년 8월 30일. 아테네 올림픽의 대미인 마라톤 경기.
브라질 마라토너 반데를레이 리마의 머릿속은 우승의 영광과 스타디움의 환호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순간, 그는 누군가에게 밀려 인도로 넘어졌다.
다시 일어섰지만 뒤따라오던 자전거에 부딪혔다.
그는 승리에 대한 확신이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찾아온 절망으로 무너져 버렸다.
한 남자가 리마에게 뛰어들어 밀쳐 쓰러뜨린 것이다.
일어나 다시 달렸지만 페이스는 이미 흐트러졌다.
다시 달렸지만 5분 뒤 이탈리아의 스테파노 발디니에게 선두를 내줬다.
또 한 명의 마라토너가 그를 제쳤다.
리마는 2시간 12분 12초, 3위에 그쳤다.
리마를 민 사람은 종말론 추종자인 아일랜드 남성이었다.
리마를 밀친 그는 겨우 3000유로(420만 원)의 벌금만 내고 풀려났다.
브라질육상연맹은 리마에게 금메달을 수여해야 한다고 아테네 올림픽 조직위원회에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경기는 없었다.
기록과 순위는 그대로 인정됐다.
리마에게 그날은 선수생활, 아니 인생 최악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은 리마가 끝내 레이스를 포기하지 않은 데 쏠렸다.
그는 더 뒤처지지 않았다.
결승선이 있는 스타디움에 들어와서는 비행기처럼 두 팔을 활짝 펼치는 여유로 관중을 감동시켰다.
관중은 일제히 기립박수로 환호했다.
그는 시상대에서 금메달을 딴 발디니에게 악수를 청했다.
우승에 대한 미련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공정한 경쟁이 아니었다는 안타까움도 지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스포츠맨십으로 패배를 이겨 냈다.
올림픽 정신이 금메달이 목적이 아니라는 점을 세계인에게 상기시켰다.
“메달 색깔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위대한 올림픽 정신을 몸소 실천했습니다.
나를 밀친 관중도 용서합니다.”
그런 그가 10월 3일 서울에서 열리는 ‘2007 국제평화기원마라톤축제’에 온다.
리마는 레이스의 목적이 금메달이 아니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올림픽 정신에 있음을 온몸으로 웅변했다.
대선후보들도 레이스의 목적이 승리가 아니라 국민과 끝까지 가는 비전을 제시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2007)
⑮ 페루 무혈 쿠데타 발생(1975) : 1968년 10월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벨라스코 알바라도 (Velasco Alvarado) 대통령!
집권 7년 만인 1975년 오늘 국방장관 베루무데스 장군이 이끄는 군부 온건파의 쿠데타로 권좌에서 물러난다.
이날 쿠데타로 집권한 베루무데스 장군은 사회주의 혁명노선을 계속 추구하겠다고 선언한다.
이번 쿠데타로 실각하게 된 벨라스코 알바라도 군사정권은 미국계 석유회사를 국유화하고 농지개혁법을 실시하는 등 민족주의 정책을 폈지만 지나친 급진정책과 석유파동으로 경제적 위기에 직면하면서 국민들의 지지를 잃었다.
5년 뒤인 1980년에는 벨라운데 테리(Belaunde Terry)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12년 동안 계속된 페루의 군정에 종지부를 찍는다.
⑯ 세계 최장 다리(1178) : ‘두 줄기 직선의 끝은 도대체 어디일까.
한없이 뻗어나가 물에 잠겼을까.
하늘로 솟았을까.’
세계에서 가장 긴 다리인 폰차트레인 코스웨이(Lake Pontcha-
rtrain Causeway)의 사진만 보고도 이런 생각이 든다.
총길이 38.42㎞. 경인고속도로 전구간(23.9㎞)보다 1.6배 길다.
세계 최장교 밑의 물은 폰차트레인 호수.
미국 중남부의 거점도시인 뉴올리언스 광역도시권의 균형 발전이 거대한 호수 때문에 어렵다는 지적에 따라 1948년 공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호수 중간중간에 인공섬을 조성해 교량으로 연결하는 방안이 제시됐으나 일직선 교량을 세우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공사는 호수 바닥에 9,000여개 콘크리트 기둥을 박아 약한 지반을 다지는 것 외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연안 항구가 막혀 바닷물 호수로 변한 폰차트레인의 물길이 세지도, 깊지도 않아 교각을 세우고 상판을 이어 붙이는 단순공법이 통할 수 있었다.
최초의 다리가 완성된 시기는 1956년 8월30일. 완공 이후 호수 횡단시간이 페리를 이용할 때보다 한 시간가량 당겨졌다.
자신을 얻은 루이지애나주는 1969년 5월 똑같은 교량을 평행으로 건설해 쌍둥이 다리로 만들었다.
총예산은 5,670만달러. 요즘 가치로 약 5억달러에 해당되지만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으로 볼 수 있다.
효율적이고 투명한 공사감리 덕분이다.
내년에 완공될 18.2㎞짜리 인천대교에는 공사비 1조5,914억원이 들어간다.
한때 새로운 구간을 추가해 세 쌍둥이 다리로 확충하는 방안이 거론된 적도 있지만 실행은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9억달러로 추정되는 공사비 확보가 어려워서다.
‘세계 최장 다리’라는 타이틀도 오는 2013년이면 총연장 40㎞짜리 ‘카타르~바레인 우정의 다리’로 넘어갈 예정이다.
(권홍우 편집위원.2008.서경.인터넷한국일보(www.hankooki.com))
⑰ 기타 오늘의 역사
1447 (조선 세종 29) 남대문 새로 고침
1448 숭례문 신축
1802 대원군, 청 군함에 강제 납치
1878 파리서 제2회 국제화폐회의
1883 한․일 조계(租界)조약 체결
1900 귀인 엄씨를 순빈,왕자 강(堈)을 의왕(義王), 은(垠)을 영왕 (英王)에 봉함
1914 독일 비행기 파리에 폭탄을 투하, 세계최초의 공습
1914 뉴질랜드 독일령 사모아 무혈점령
1919 이동휘, 임시정부 국무총리에 부임
1919 시카고 한인교회 설립
1929 예수의 천국관 발행.기독교문헌.저자 갠디어,하아디.김태연 공역.발행처 조선예수교서회.
1937 고등보통학교 학과목서 한문 폐지
1941 독일군, 900일간의 레닌그라드 포위작전 시작. 이로 인해 수 만명사망
1945 장개석, 중경에서 모택동과 회담
1945 국군준비대 결성
1945 미국-영국-프랑스-소련, 독일관리 위원회 설치
1949 최초의 국비유학생 6명 미국으로 출발
1950 감리교 양주삼 목사 순교
1951 미.필리핀 상호안전방위조약 조인
1951 미국 북한 상호안전방위조약 조인
1955 대한기독교나사렛성결회 창설
1956 간호원 이효정, 한국 최초로 나이팅게일 기장 받음
1957 계정 충정공 민영환 동상 제막식 : 서울 안국동 로타리에서
1961 소, 핵실험 재개 발표
1962 한국-엘살바도르, 국교 수립
1963 워싱턴, 모스크바간 핫라인 개통(한국시각-8.31)
1963 박정희 의장 예편 공화당 입당
1967 한일항공협정 발효
1972 남북적십자 첫 본회담 평양서 개막
1976 한국 최초 한의학박사 5명 탄생
1978 부산서 제24회 국제기능올림픽 개막
1979 미국 동부와 카리브지역에 태풍 데리비드호 강타. 1,100명 사 망
1980 중국 실용경제 선언
1980 중국 제5기 전국인민대표자회의 개막
1981 이란 수상관저에 폭발사고, 라자이 대통령과 바호날 수상 사 망
1983 귀온 브루포드, 흑인으로 첫 우주비행사가 됨
1984 교황청, 공식문서로 해방신학 규탄
1987 경찰, 실종된 오대양 총무과장 노순호 등 3명 수배
1989 서해중부 해안지방에 해일 강타
1991 21년 전 성폭행범을 살해한 김부남 피고인 집행유예 선고
1992 사라예보시장에 대한 포탄공격으로 최소한 46명 사상
1993 공보처, 종합유선방송(CATV)의 프로그램공급업체 20개 확정 발표
1995 한국-아르헨티나, 범죄인 인도협정 체결
� 오늘의 인물
① 성총(性聰 ; 1631 - 1700.8.30) : 조선 중기의 중.
13살에 중이 되고 18살 때 취미로 법을 공부.
50살부터 송광사를 비롯한 여러 절에서 법을 연구하고 시를 지었다.
30살 때 임자도에 사람은 없고 책만 가득한 배가 와 닿은 것을 발견 그 중 명나라 평림 엽거사(葉居士)가 지어낸 <화엄경><소초><대명><법수><회현기> 등 195권을 얻어 15년 동안 걸려 지어냈다.
② 염상섭(廉想涉 : 1897.8.30 - 1963.3.14) : 소설가.
호 횡보(橫步).
서울 출생.
보성전문학교에 재학 중 도일하여 교토부립중학[京都府立中學]을 졸업, 게이오[慶應]대학 사학과에 입학했으나 3․1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투옥되었다가 귀국, 《동아일보》 기자가 되었다.
1920년 《폐허(廢墟)》지 동인에 가담하여 문학의 길에 투신했다. 1921년 《개벽(開闢)》지에 단편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발표하여 문단적인 위치를 굳히고 1922년에는 최남선(崔南善)이 주재하던 주간종합지 《동명(東明)》에서 기자로 활약했으며, 현진건(玄鎭健)과 함께 《시대일보》 《매일신보》 등에서 일하기도 했다.
1946년 《경향신문》 창간과 동시에 편집국장, 6․25전쟁 때는 해군 정훈국에 근무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만세전(萬歲前)》 《잊을 수 없는 사람들》 《금반지》 《고독》과 장편 《삼대(三代)》 등이 있고, 8․15광복 후에도 《두 파산(破産)》 《일대의 유업(遺業)》 《짖지 않는 개》 등의 단편과 장편 《취우(驟雨)》 등이 있다.
자연주의 및 사실주의 문학을 이 땅에 건설한 최초의 작가로서 김동인(金東仁)․현진건과 함께 뚜렷한 공적을 남겼다.
특히 그의 처녀작 《표본실의 청개구리》는 한국 최초의 자연주의적인 소설로 평가되며, 그 후의 대부분의 소설은 전형적인 사실주의 계열의 작품으로 일관되었다.
1953년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고 예술원 종신회원에 추대되었으며, 1955년 서라벌예술대학장에 취임하고 아시아자유문학상, 1956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1962년에 3․1문화상(三一文化賞), 1971년 문화훈장 은관 등을 받았다.
③ 홍난파 사망(1941) : ⇨ 4월 10일.
본명이 홍영후.
서양음악 개화기의 선각자인 홍난파 !
그는 일제 강점기에 널리 불려졌던 '봉선화'의 작곡가로 우리나라 최초로 바이올린 연주회를 가졌고, 기악곡과 관현악 조곡(組曲)을 작곡하여 우리나라 근대음악의 새로운 장을 열었던 사람이다.
1898년 4월 10일 경기도 화성군 남양읍 활초리 출생으로 1918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우에노 음악학교에서 2년간 수학한 후 귀국, 1920년 '봉선화'를 작곡하고, 1925년 제1회 바이올린 독주회를 가졌다.
'봉선화'는 창작 음악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우리나라 음악계의 일대 전환점이 된 최초의 예술가곡이다.
이 가곡은 순식간에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 일제는 급기야 이 곡을 금지시켰고 이 곡을 부르는 사람을 사상불경죄로 투옥하기까지 했다.
정력적으로 음악활동을 펼치던 홍난파는 미국 유학시절 '불온집단'인 '흥사단 단가'를 작곡했다는
혐의와 3.1절에 독립기념식을 열고 만세를 불렀다는 혐의로 안창호, 이광수 등과 함께 종로경찰서에 72일간 구금되어 고문을 당했다.
고문 후유증과 미국 유학시절 자동차 사고로 늑골을 다친 것이 재발되어 1941년 7월 15일 경성요양원에 입원했다.
이때 결핵균이 뇌에 침윤되는 바람에 요양원에서 퇴원한 뒤 불과 닷새만에 홍난파는 세상을 버렸다.
그가 작곡한 '성불사의 밤' '옛 동산에 올라' 등 가곡들과 '달마중' '낮에 나온 반달' 등의 동요, '백마강의 추억' 등의 대중가요들은 지금까지도 우리들 가슴 속에 남아있는 명곡들이다. 그는 작곡가이자 도쿄 교향악단의 제1바이올린 연주자를 지내기도 한 바이올리니스트였고, 잡지 '음악계'를 발간한 음악 저널리스트이기도 했으며, '처녀혼' '폭풍은 지난 뒤' 등의 소설을 쓴 아마추어 소설가이기도 했다.
⇨ 7월 23일.
***음악가 홍난파(1898∼1941) 선생 타계 : “조선음악은 대부분이 극히 지완(더디고 느림)하고 퇴영적인(뒤로 물러서서 움직이지 않음) 기분에 싸여 있지만 서양의 음악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경쾌 장중하다.”
홍난파는 ‘동서양 음악의 비교’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할 정도로 서양음악을 열정적으로 보급하려 했다.
그는 늑막염으로 경성요양원에서 1941년 8월 30일 43세로 짧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작곡가, 바이올리니스트, 음악평론가, 수필가, 소설가, 번역가 등으로 다양한 예술 활동을 펼쳤다.
홍난파는 1910년 9월 국악을 배우려고 중앙기독교청년회학관(YMCA) 중학부에 입학했으나 바이올린을 접하게 된 후 서양음악으로 방향을 바꾼다.
1918년 일본 도쿄음악학교 예과에 입학한 그는 1919년 국내로 들어와 한국 최초의 음악잡지 ‘삼광(三光)’ 창간호를 출판했으나 4호를 내고 폐간한다.
홍난파는 1928년 도쿄에 있는 신교향악단의 바이올린 주자로 입단했고, 1929년에는 도쿄고등음악원 본과를 졸업한다.
그 후 그는 다시 서울로 돌아와 재즈 밴드(Korean Jazz Band)를 만들어 방송활동을 하기도 했다.
1930년 그는 같이 음악활동을 하던 사람들 외에도 안익태, 안기영, 현제명, 채동선, 김원복, 김영의, 독고선, 홍재유, 황재경 등과도 함께 연주활동을 한다.
1931년에는 여러 잡지와 신문에 기고를 하여 이름이 널리 알려진다.
홍난파의 일생은 일제강점기 내에 한정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음악은 식민지 시기가 끝나면서 더욱 크게 부각됐다. ‘봉선화’ ‘금강에 살어리랏다’ ‘봄처녀’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와 같은 가곡과 ‘낮에 나온 반달’ ‘퐁당퐁당’ ‘고향의 봄’과 같은 동요는 광복 직후 음악 교과서를 통해 한국인에게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
홍난파는 한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잘 알려진 음악가이다.
이는 한국에서 한 음악가에게 부여된 명성으로는 가장 큰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음악에 서려 있는 ‘애수’는 바로 ‘민족의 애수’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그의 대표곡인 ‘봉선화’를 비롯해 그가 작곡한 여러 곡이 친일 행위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논란을 빚고 있어 그에 대한 최종 평가는 아직까지 정립되지 않은 상태이다.
(안영식 기자 ysahn@donga.com.2008)
④ 유진오(兪鎭午 ; 1906.5.13 ~ 1987.8.30) : ⇨ 5월 13일.
한국의 법학자 ․문인 ․정치가.
호 현민(玄民).
서울 출생.
81세로 작고했다.
현민의 짧지 않은 삶은 온갖 영예로 화려하다.
경기고 전신인 경성제일고보를 거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다니는 동안 그는 자신의 가장 뛰어난 학우들마저 평범하게 보이게 할 만큼 두드러졌다.
모교의 강사로 시작한 그의 교직 생활은 보성전문학교 교수를 거 쳐 해방 뒤에는 그 학교의 후신인 고려대의 총장으로까지 이어졌다. 1920년대 후반~30년대 전반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전성기 때는 동반 작가로 이름을 떨쳤다.
현민은 또 당대 최고의 법학자로서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했고, 초대 법제처장을 지냈다.
1960년대 후반에는 정계에 들어가 신민당 총재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16년 전 오늘 그가 타계했을 때 빈소에서는 큰 소란이 일어났다.
현민의 사회장 빈소가 차려진 고려대는 그가 교직 생활의 대부분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14년간이나 총장을 지낸 실질적 모교였지만, 일부 교수와 학생들은 현민을 반민족.반민주 인사로 규정하고 빈소 철거를 요구하며 시위와 연좌 농성을 벌였다.
사실 현민의 화려한 영예 속에는 지울 수 없는 불명예가 점점이 박혀 있었다.
1980년대 전두환 내란정권의 국정자문위원 자리를 받아들인 것이 그의 마지막 불명예였다면, 1940년대 전반기의 친일 문필 활동은 그의 불명예가 시작되는 지점에 놓여있을 것이다.
일문 잡지 신세대(新世代) 1944년 9월호에 실려있는 현민의 전쟁 선동 연설 한 대목.
일억대화(一億大和), 최후의 돌격을 향해 매진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필승의 신념은 결코 헛된 맹신이 아닙니다.
실로 이와 같은 필승의 이(理)를 자각하고 대화일치(大和一致), 서로 굳세게 최후의 단계를 돌파하고 나아가야겠습니다.(고종석,2003)
⑤ 클레오파트라(Cleopatra VII, BC 69 ~ BC 30.8.30) :에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왕조 최후의 여왕(재위 BC 51~BC 30).
클레오파트라라는 이름은 마케도니아의 왕가, 특히 프톨레마이오스 가문이 이집트에서 애용한 여성의 이름이다.
그녀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오보에를 부는 왕)의 둘째 딸로서, BC 51년 이후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하여 이집트를 공동통치하였다.
그 후 한때 왕위에서 쫓겨났으나, BC 48년 이집트에 와 있던 G.J.카이사르를 농락하여 인연을 맺고 복위하였으며,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카이사르와 싸우고 죽은 뒤인 BC 47년에는 막내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재혼하여 공동통치하였다.
카이사르와의 사이에 아들 하나를 낳아, 카이사리온(프톨레마이오스 15세)라 불렀으며, 그녀는 한때 빈객으로서 로마에 가 있었으나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에 이집트로 돌아왔다.
BC 41~BC 40년 M.안토니우스와 소아시아의 타르소스 및 알렉산드리아에서 인연을 맺었다. BC 37년 옥타비아누스와의 협조가 결렬된 안토니우스는 재차 그녀 앞에 나타나 결혼함으로써 두 사람의 정치적 ․인간적 유대가 심화되었다.
BC 34년 안토니우스는 그녀와 그녀의 아이들에게 로마의 전체 속주(屬州)를 주었다(알렉산드리아의 기증).
그러나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와의 대립은 BC 31년의 악티움 해전으로 번졌으며, 이 해전에서 그녀와 안토니우스 연합군은 패배하였다.
그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안토니우스와 재기를 꾀하였으나, BC 30년 옥타비아누스군의 공격을 받고 독사로 가슴을 물게 하여 자살하였다고 한다.
⑥ 임측서(林側徐 ; 1785.8.30 ~ 1850.11.22) : [요약] 중국 청나라 정치가.
중국 근대화의 선각자.
영국 상인들이 소유한 아편을 몰수해 상자를 불태우고, 아편상인들을 국외로 추방하는 등 강경 수단을 써 아편밀수의 근절을 꾀했다.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 명을 받고 광시순무에 임명되어 부임 도중 병사했다.
호 사촌노인
별칭 자 소목
국적 중국 청
활동분야 정치
출생지 중국 푸젠성
주요저서 《임문충공정서》 《임문충공유서》 《신급록》 등
[본문] 자 소목(少穆).
호 사촌노인(竢 村老人).
푸젠성[福建省] 출생.
1811년 진사(進士) ·지방관을 역임하며 수리사업(水利事業)에 힘쓰고, 승진을 거듭하여 장쑤순무[江蘇巡撫] ·양강(兩江)총독을 거쳐, 1837년 후광[湖廣]총독이 되었다.
이듬해 황제 도광제(道光帝)의 자문(諮問)에 응하여 아편(阿片)의 엄금책(嚴禁策)을 진언(進言)하고, 임지(任地)에서 큰 성과를 올렸다. 이로 인하여 1839년 흠차대신(欽差大臣)으로 발탁되어 광둥[廣東]의 아편무역의 단속을 명령받고, 영국상인들이 소유한 아편을 몰수하여 2만여 상자를 불태우고, 아편상인들을 국외로 추방하는 등 강경수단을 써서 아편밀수의 근절을 꾀하였다.
전부터 중국의 개항(開港)과 자유무역 실현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영국은 자국 상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이에 임칙서는 해외사정을 연구하며 군비(軍備)를 강화하는 한편, 관민(官民)의 협력을 얻어 영국군에 저항하였으나, 오히려 타협파(妥協派) 관료들에 의하여 전쟁도발자로 몰리게 되었고, 1840년 청나라 조정이 강화(講和)로 기울자 그는 모든 관직을 박탈당하고, 이듬해 이리[伊犁]로 유배되었다.
후에 복직이 허락되어 1845년 산간[陝甘]총독, 1847년 윈구이[雲貴]총독을 역임하였다.
1850년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을 진압하라는 명을 받고 흠차대신 광시순무[廣西巡撫]에 임명되어 부임 도중 병사하였다.
저서에 《임문충공정서(林文忠公政書)》 《임문충공유서(遺書)》 《신급록(信及錄)》 등이 있다.
(두산백과사전)
⑦ 톰슨(Sir Joseph John Thomson ; 1856.12.18 - 1940.8.30) : 영국의 실험 및 이론 물리학자.
1906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평화는 인간의 행복한 자연 상태이며, 전쟁은 인간의 타락이며, 치욕이다.” 라는 그의 말은 유명하다.
⑧ 라더포드(Ernest Ratherford ; 1871.8.30 - 1937.10.19) : 영국의 물리학자.
「게임브리지」대학에서 공부하였으며, 캐나다의 「매크릴」대학, 영국의 「맨체스터」대학의 교수를 지냈다.
방사성 물질을 연구하여 원자를 인공적으로 파괴하는데 성공하였으며, 태양계를 모방한 「라더포드 원자 모형」을 확립하였다.
⑨ 존 건더(John Gunther ; 1901.8.30 - 1970) : 내막 기사로 유명한 미국의 신문기자 특파원으로서 세계 각지에 주재하여 <유럽의 내막>을 비롯한 내막 기사를 썼다.
그 밖에 <죽음이여 거만 떨지 말아라><커야튼의 배후><맥아더의 수수께끼〉등의 작품이 있다.
⑩ 펠릭스 가타리( ; - 1992.8.30) :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62세향수.
프랑스 정신분석학의 제4 세대를 대표하는 가타리는 자신이 속했던 라캉학파의 철학적. 정치적 지평을 크게 넓힌 인물이다.
속세의 직업은 정신과 의사였지만, 가타리는 알제리 전쟁기에 격렬한 반식민주의자로 좌파 운동에 발을 담근 이래 20세기 후반 프랑스 진보 운동의 이론과 실천 양면에 자신을 일관되게 구속시켰다.
그러나 가타리가 모색한 좌익적 전망은 제도권의 주류 좌파와는 거리가 있었다.
그는 사회당의 프랑수아 미테랑 후보가 당선된 1981년 대통령 선거에서 풍자만화가 콜뤼슈를 밂으로써 대다수 좌파 지식인들과 정치적으로 결별했고, 그 자신이 주도적 제창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생태주의 정치에 대해서도 그 경화(硬化) 가능성에 지속적으로 우려를 표명했다.
학생 혁명의 물결이 프랑스 전역을 휘몰아치던 1968년 가타리는 파리 8대학에서 철학자 질 들뢰즈를 처음 만났고, 이 만남은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 천 개의 고원, 철학이란 무엇인가? 등의 공동 작업으로 이어졌다.
반(反)-오이디푸스라는 부제로 더 잘 알려진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은 그 본성상 반동적일 수밖에 없는 전쟁기계로서의 국가에 대한 저항을 가리키는 유목민주의나, 그 유목민주의의 기호론적 형태인 탈영토화 등 가타리와 들뢰즈의 철학적 상표가 된 주요 개념들을 대중화시켰다.
무의식은 고아다, 오이디푸스가 유효하게 된 것, 즉 우리가 아빠-엄마를 소비하게 된 것은 자본주의와 함께다라는 이 책의 유명한 선언을 통해 가타리와 들뢰즈는 정신분석학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상징되는 아빠-엄마-나의 삼각 구도에서 구출해내 좌익적 정신분석학이라고 할 만한 욕망의 정치사회학을 수립했다(고종석,2002).
⑪ 기타 오늘의 인물
1797 '프랑켄슈타인'의 저자 메리 윌스톤그래프트 셀리 출생
1810 알존 출생.1880,11,21 사망한 인물로서 승천회 아우구스티누 스수도회를 창설한 성직자.
1817 로이터 출생.독일의 루터교 신학자.베를린대학에서 사강사로 강의를 시작했고,강의는 그당시 역사신학의 전분야에 걸친 것 이었다.
1852 1901년 최초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네덜란드 물리화학자 호프 출생
1901 인권지도자 로이 윌킨스 출생
1908 배우 프레드 맥머레이 출생
1918 야구선수 테드 윌리암스 출생
1919 컨트리싱어 키티 웰즈 출생
1943 올림픽 스키챔피언 장 클로드 킬리 출생
� 오늘의 샘터
① 클레오파트라 자살의 의의 : 그녀의 죽음은 프톨레마이오스 왕가 300년의 종말이고, 로마에 의한 지중해 세계 지배의 일단의 성공이며, 또한 옥타비아누스에 의한 로마제국의 개막을 뜻하는 것이 되었다.
그녀는 용모와 자태에 있어서의 여성적 매력과 수개 국어를 자유로이 구사하는 외교 수완을 발휘하여, 카이사르 ․안토니우스 두 사람의 로마의 영웅을 자유자재로 조종하여 격동기의 왕국을 능란하게 유지해 나간 여왕이었다.
그러나 재색을 겸비한 이 여성에 대해서는 단지 고혹적인 매력만이 강조되어, 오늘날까지 요부 ․간부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제정(帝政)의 창생신화(創生神話)를 형성하기 위하여 꾸며낸 설화로 보는 견해도 있다. 클레오파트라의 생애는 많은 문학 작품의 좋은 소재로서 등장하고 있으며, 예전에는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안토니우스전》과 셰익스피어의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있으며, 근세에 와서는 G.B.쇼의 《시저와 클레오파트라》(1868) 등이 유명하다.
②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 영국의 극작가 셰익스피어의 비극의 하나.
1607년경 작품.
1623년에 출간되었다.
노스가 번역한 《플루타크영웅전》에서 소재를 따서 BC 40년부터 BC 30년까지의 사실(史實)을 다루고 있다.
M.브루투스 일파를 넘어뜨리고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 레피두스 등과 제3차 3두정치(三頭政治)를 조직한 집정관 안토니(안토니우스)는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매력에 빠져 로마로 돌아가지 않고 이집트에 머무르는데, 아내의 죽음과 내란의 위험 등으로 일시 로마에 돌아가서 정국을 안정시키고 옥타비아누스와의 불화도 그의 누이 옥타비아와 결혼함으로써 일시적으로 화해가 성립된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를 잊을 수 없어 다시 이집트로 가자 옥타비아누스는 이를 구실로 안토니를 악티움해전에서 격파한다.
클레오파트라가 자살했다는 허보를 믿고 안토니는 자살한다.
옥타비아누스에게 포로가 될 운명에 처한 클레오파트라도 독사에게 물려 자결한다.
클레오파트라의 성격창조와 함께 사랑의 세계와 정치의 세계, 정욕과 이성, 꿈과 현실을 이집트와 로마의 대립을 통해서 그린 가장 원숙하고 스케일이 큰 장려한 비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