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초반까지 우리동문들이 뛰어놀던 창산벌추억과 그주변에 있었던
내고향에는 어떤 향기가 있었는지 필자가 체험한 위주로 작성된 글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동문들은 지난간날의 모습을 회상한다는 것은 다소 실감이 나지 않겠지만
아무튼 이글을 읽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창산인 모두에게 잊혀져 가는 옛 창산벌에 대한 여러가
지를 회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소망이다.
아울러 이 글을 올릴수 있도록 추억의 창산벌 코너를 특별히 만들어주신 홈피 운영자님께 진심으로
감사 드리고자한다.
창산초등학교 교정(옛 건물 사진이 없어 최근에 찍은 사진임)
창산벌의 추억
1.머리말
나의 호적의 한부분에는 "1949년 경북 영천군 금호면 남성동 285번지에서 출생"이라고 번지까지 게재 되어있다.
그러니까 경상북도 경산군(시)과 영천군(시)의 경계에 위치한 남성동 산골마을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창산벌에서 보냈기 때문에 항상 창산벌에 대한 깊은 애정은 마음속 한구석에 간직하고 있었던 터이다.
그러던 차에 직전 동창회장 조순(영천 영화초등학교 교장)으로 부터 창산국민학교(지금은 창산초등학교) 동창회 홈피가 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우선 동창회 일원으로 가입하여 홈피(카페)를 통해 창산벌의 소식을 접할 수 가 있었다.
이러한 사이버(Cyber) 공간을 통해 전국 각지에서 열심히 살아가고있는 많은 선, 후배들과 서로 만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또한 잊혀져 가는 창산벌에 있었던 여러가지 애환들을 되돌아 볼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애환들을 마음속으로 간직만 할 것이 아니라 시대 변화와 함께 사라진 창산벌의 많은 풍경과 변화되기 전의 창산벌을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전달함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50년대 후반과 60년대 초반의 창산벌의 이모저모를 회상 하면서 이 글을 정리 하게 되었다.
글의 내용중 "창산벌 추억"편은 주로 학교생활을 위주로 다루었고 내고향 향기편에서는 어린시절 창산벌 주변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당시 상황을 회상하여 정리하였지만 당시의 사진 보급이 흔하지 않아 기록 사진을 함께 올리지 못한것이 아쉽기만 할 뿐이다.
아무튼 이글을 읽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창산인 모두에게 잊혀져 가는 옛 창산벌에 대한 여러가지를 회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이다.
2.창산벌의 추억
[창산벌의 아침]
필자의 고향 남성동은 산골마을이라 동네 아낙네들의 물지게 소리로 아침을 맞이하게 하는곳이었다.
삐걱빼각~ 삐걱빼각~ 삐걱빼각~
대부분 아낰네들이 물지게를 많이 이용하였는데 빠른 걸음으로 이동하면 삐걱빼각~ 삐걱빼각~ 하는 소리도 빠르게 이어지고 아직 물지게 사용법에 숙달되지 못한 동네 처녀들은 물지게의 균형에 보조를 맞추지 못해 물통에 들어있는 물이 흔들려 옷을 험뻑 젖기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은 고향마을에도 상수도 시설이 되어 있지만 당시만 해도 동네가 큰 마을(신대동,오계동)이나 작은 마을 할 것 없이 대부분 마을의 공동 우물을 사용하였고 일부 가정은 개인 우물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물론 창산학교에도 정문에서 들어가다 보면 우측편에 두레박을 사용하여 물을 퍼 올리는 큰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는 이 우물가에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다 두레박에 올려진 물을 먹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만 해도 시계가 거의 없어 새벽녘 닭울음 소리을 듣고 어른들은 지금 몇시쯤 되었구나 하고서 일어나 일터로 나가곤 하였고 전기도 없어서 호롱불(석유등잔불)을 사용하여 불을 밝혀 책을 읽었던 시절이었다.
물론 창산벌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창산국민학교에도 전기가 들어오지않았기 때문에 운동회등 학교 중요행사시에는 밧테리를 이용하여 마이크를 설치 사용하였다.
오늘날 창산벌 일대에 사용하고 있는 전기가 보급된것은 정확한 년도는 기억이 나지 않으나 60년대 중반부터가 아닌가 생각된다.
[많이도 달라진 창산초등학교]
금호에서 대창방면으로 약 3km정도 달리다 학당골 고개를 넘어서면 우측 길가에 조그만한 간판으로 만들어진 창산초등학교 표지판이 보인다.
이표지판을 따라 포도밭 사이의 농촌길을 따라 500-600m 내려가면 창산벌이 나오고 창산벌 가운데에 채약산을 바라보며 우뚝서 있는 필자의 모교 창산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학교전경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지금은 현대식 건물로 잘 지어져 있는 학교 건물이지만 1949년 10월11일 개교하여 이듬해 6.25동란 격는등 파란만장한 역사를 지닌 모교 창산초등학교이기도 하다.
필자는 1950년 6.25발발시부터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까지 3년동안 치루어진 6.25동란이라는 상처가 완전히 아물기도 전에 1957년 4월 학교라는곳이 어떤곳인지도 모르고 외삼촌(지금은 작고하신 최명덕 )의 손을 잡고 창산초등학교(당시에 명칭은 금호 창산국민학교)에 입학하여 철부지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여기서 철부지 어린시절이었지만 그래도 기억나는 50년대 후반의 창산초등학교(당시에는 국민학교)의모습을 잠시 상기 해 볼까한다.
먼저 학교 건물면에는 흙벽돌로 만들어진 초가집 교실이 있었는데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초가집 교실 바닥에는 멍석을 깔아서 교실로 사용하였으며 본관은 기와로 만들어진 단층 목조 교실이었으며 교실 바닥의 곳곳에는 나무가 썩어 구멍이 많이 뚫어져 있어 쉬는 시간이나 점심 시간에는 하수구 구멍같은(어린이가 겨우 들어갈 만한 구멍이었음) 곳으로 들어가 동강난 연필이나 지우개등을 주어서 사용하기도 하였던 건물이 있었다.
재학생이 당시 평균적으로 학년별 2학급씩 이었으니 전교생은 600명에서-650명정도 되어 교실이 부족하여 1학년에서 3학년까지는 오전,오후반으로 나누어서 공부를 하기도 했다.
학교 선생님도 여선생님은 한분정도 재직할 때 있었고 전혀 없을때도 있어 대부분 남자선생님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관계로 여선생님이 얼마나 보기가 힘들었나 하면 필자가 6년동안 졸업할때 까지 1학년때 담임을 하였던 주창실 선생님과 나중에 오신 안정남 선생님 두 분이 거쳐갈 정도였다.
그러나 개교이래 60여년이란 세월이 지나오는동안 한때는 번창하였던 창산벌이 도시화 추세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게 됨으로 인해 지금은 재학생이 20여명정도 밖에 되지 않아 이제 모교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니 안타까울 뿐이다.
또한 창산벌 주변에는 논두렁에 콩이 심어져 있는 벼 논(畓)이 많아서 벼 메뚜기가 상당히 많이 번식하고 있었다.
간혹 점심시간 등을 이용하여 벼 논 두렁에 나가 30여분만 잡아도 당시 사용되었던 양은 도시락에 가득하게 채울 수 있을 정도였으니 메뚜기가 얼마나 많이 번식하고 있었는지 짐작이 되리라 생각된다.
그래서 학생들의 도시락 반찬은 메뚜기를 잡아서 튀김을 하여 만든 반찬이 대부분이었다.
이로인해 당시 또래들은 돈을 들이지 않고 순수한 국내산 무공해 보약 메뚜기를 많이먹었던 같다.
그러나 지금은 학교 주변이 대부분 포도등 특용작물을 재배하는 밭으로 변형이 되었을뿐 아니라 어쩌다 벼 논이 있다하더라도 농작물 병충해 예방를 위한 독한 농약을 살포함으로 인해 흔히 볼 수 있었던 벼 메뚜기를 찾아보기가 어려운 환경으로 변화가 되었다.
[ 神처럼 느겼던 1학년 담임선생님]
1학년때 담임선생님은 키도 크고 몸매도 날씬하였던 주창실 여자 선생님이었다.
금호에서 다녀셨는데 어느날 좀 늦게 출근하는날이면 우리는 선생님이 오는 논두렁까지 마중을 나가기도하며 천연스럽게 선생님을 좋아했다.
얼마나 선생님을 좋아했는가 하면 소변도 생각이 없는데 선생님 얼굴을 한번 보기 위해 손바닥을 1대 맞고 일부러 화장실 가는 또래도 있었으니 말이다.(당시에는 수업시간중 화장실 가는학생은 선생님한테 손바닥을 1대씩 맞는 벌칙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선생님은 밥도 먹지 않고 화장실도 가지 않는 神(신)적인 존재로만 알고 있었다.(나중에 일이지만 상급생이 되면서 점차적으로 선생님도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음)
또한 여자 선생님이라 어린꼬마들인 우리들에게 많은 정을 주어 또래들이 쉬는시간을 이용 숨박꼭질을 할때는 선생님 치마 밑에 들어가 숨는 학생도 있었으니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는 나이도 어리고 철부지였기 때문에 선생님이기 전에 엄마 같은 느낌을 가졌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든다.
또 하나 에피소드(Episode)는 수업시간중 어느학생이 선생님 ! 하고 급히 부르고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교실 바닥에 실례를 하였지만 선생님은 해당 학생에 대해 벌도 주지않고 빙그레 웃으면서 상당히 급했구나 ~하고는 뒷처리를 하는 하는 모습을 보고 어린마음이었지만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난다.
선생님을 神처럼 느낀 우리들 세대와 달리 요즘은 선생님의 권위가 많이도 추락하였다.
그러한 배경은 요즈음 학부모들은 맞벌이 부부가 많기 때문에 아들이든 딸이든 관계없이 자녀를 하나씩 둔 가정이 많아 그냥 부모들 품에 안고 귀하게만 키우려다 보니 내자녀가 조금의 체벌이 가해졌다는 소리만 들어도 학교에 뛰어가 잘하고 못함을 따진다는 뉴스는 흔하게 접할 수 있으니 말이다.
뿐만아니라 일부 학부모들은 심지어 자녀체벌에 따른 선생님을 고발조치까지 하는사례도 있다는 언론 보도 등으로 보아 선생님의 권위는 땅에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시대가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러나 필자 개인적 의견으로는 내자녀가 귀하고 소중한것은 사실이지만 무작정 보호만 할 것이 아니라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자녀라면 물한모금 없는 사막지대에 버려 두어도 목적지를 향해 묵묵히 전진할 수 있도록 인내력을 향상시켜주는 것이 진정한 자녀를 사랑하는 학부모의 역활이 아닐까 하는 개인적 소견이다.
[창산벌 운동회]
매년 가을이면 운동회를 하였는데 운동회 날은 창산벌의 잔치날이다.
왜냐하면 신대동,오계동,원기동,남성동,삼호동 ("강회동'은 필자가 재학시에는 대창국민학교 학군이었으며 그뒤 1-2년이지난후 창산국민학교 학군으로 변경된것으로 알고있음)대부분 주민이 참여하는 운동회였으니 말이다.
운동회날이 되기전 몇일전부터 학교운동장 느티나무와 학교 교실 건물 사이에 줄을 연결하여 메달아둔 만국기는 운동회의 가장 기본적인 상징으로 나타내곤 하였다.
더불어 학교 울타리 주변에는 코스모스가 유난히 많아 힌색,노란색, 분홍색 등의 꽃이 운동회 분위기를 돋구어 주기도 했다.
운동회날에는 청군과 백군으로 나뉘어서 목이 터져라 응원을 하고는 당시 한창 유행하던 "아이스케잌" (Ice cake)을 하나 얻어 먹으면 어떻게 그렇게 맛이 있었던지 ...(지금은 아이스케잌에 팥 같은 것이 들어있지만 당시에는 이름 그대로 얼음덩어리였는데도 그렇게 맛이 있었음)
한편 응원석과 경기장 주변에는 국밥장수가 텐트를 치고는 가마솥을 설치하고 주민들이 국밥 한 그릇을 하면서 막걸리도 함께 곁들일 수 있는 공간도 있었고, 고구마를 파는곳, 설탕을 원료로 하여 만든 솜사탕 파는곳,고무풍선 파는곳,국수를 만들어 파는곳도 있었다.
운동회 내용은 주로 달리기 종목이 많았으며 1등부터 3등까지는 노트한권씩을 상품으로 받고는 좋아서 어쩔줄 모르는 선배들이나 후배들도 있었지만 운이없는 아이들은 달리다 넘어지기라도 하여 등수에 포함되지 못한 학생들은 한쪽 모퉁에서 훌쩍 훌쩍 울고 있는 학생도 간혹 있었다.
또한 4, 5,6학년의 기마전 싸움도 있었는데 청백간 대결이 끝나면 승리한팀이 손을 번쩍들어 만세를 큰소리로 3차례(만세! 만세! 만세!) 부르고 패자팀은 박수로 격려를 해주는 등으로 아름답고 멋진 경기를 하였으며, 경기가 끝난후 양팀 모두가 대열을 함께 맟추어 응원석으로 뛰어가면서 "북진통일" "북진통일" 구호를 창산벌이 떠나가도록 외쳤던 기억도 생생하다.
당시에는 아무 특별한 뜻도 모르고 외친 "북진통일" 구호였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6.25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던 시대라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통일정책" 일환으로 상징했던 구호가 아닌가 여겨진다.
운동회의 절정은 각동별 주민이 참여하는 동대항 달리기가 있었는데 재학생 어린이 부터 청년층,부녀층,노년층까지 참여하여 절정을 이루게 되는데 동대항에서는 남성동이 여러차례 우승을 하였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동대항 달리기 경기가 끝나면 이어지는 것은 창산벌 지역내 젊은 청년들이 주로 참여하는 창산벌에서 대창까지 달리는 마라톤 경기로 운동회가 종료되는데 당시 기억으로는 1등에는 신대동 김유난 선배가 2-3년간 찾이한것으로 기억되며 운동회에서 가장 큰 상이었던 소형 가마솥을 상품으로 받고 주민들에게 두손을 번쩍들어 인사하는 모습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기억에 남아있는 교장선생님의 훈시]
요즘에는 환경이 달라졌지만 필자가 국민학교 다닐때만 해도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일주일에 한번인가 한달에 한번인가 정도는 교장선생님에게 훈시를 들었던 같다.
그당시의 풍경은 교장선생님이 교단에 서서 말씀을 하시고 학생들은 운동장에서 그 말씀을 듣게되었다.
그 많은 훈시중에 한가지 기억나는 것은 은희백 교장선생님께서(필자가 생각하기로는 당시에 연세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됨) 훈시하신 내용이다.
어느날 조회일자에 학교 본관앞 운동장에 있는 연단에 키가 훌쩍크신 교장선생님이 양복을 약간 특이하게 입고 올라오셨는데 교장선생님은 양복의 단추를 일부러 정상으로 꿰지 않으시고 약간 뒤틀리게 하여 어깨를 뒤로 젖히시고 연단에 올라오셨던 기억이 난다.
당연히 우리 학생들은 그 풍경이 우스꽝 스러워 킥킥대고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일부 학생들은 입을 가리고 킥킥 웃다가 무서운 교감 선생님한테 걸려서 혼줄이 난 학생도 있었던 것으로 회상된다.
이렇게 웃는 모습을 보신 교장선생님은 한동안 다른 말씀을 하시다가 손벽을 치며 학생들의 시선을 집중 시킨후 말씀을 멈추시면서 " 여러분 교장 선생님을 자세히 보세요" 교장선생님 옷이 삐뚤어지게 입었지요? "왜 옷이 삐뚤어졌는지 아는 사람 손들어 봐요"라고 공개질문을하자 어느 여학생 한사람이 손을 번쩍들고 "단추가 잘못 끼워져서 그렇읍니다"라고 답변을 하였다.
교장선생님은 학생의 답변을 듣고서 한동안 말씀이 없어시다가 학생들의 마음을 약간 긴장을 시키신후이어서 그 여학생을 향해 관찰력이 대단하다고 칭송을 아끼지 않으시며 조회에 참석한 학생과 선생님 모두 힘찬 박수를 치게 하고는 잘못 꿰어진 단추에 대해 설명을 하시기 시작했다.
자 ~ 여러분 ~ 조금전 여학생이 답변한 것처럼 첫 단추가 잘못 꿰어져 교장선생님이 입은 양복이 삐뚤어진 양복이 되었읍니다.
반대로 첫 단추를 예쁘게 잘 꿰여졌다면 교장선생님 옷도 삐뚤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렇듯 첫 단추가 정확하게 잘 꿰어지면 예쁘고 단정한 모습을 볼 수 가 있지만 첫 단추가 잘못 꿰지면 다시 풀릴때 까지는 누구이든 그 모습은 헝컬어져 있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성장하여 성인이되고 사회생활을 할때도 교장선생님의 삐뚤어진 양복에서 보았듯이 첫 단추가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말아야 한다" 고 설명해 주셨던 기억이 난다.
물론 이 단추이야기가 필자 한테는 상당히 중요한 교훈을 주게 되어 졸업을 한후 상급학교에 진학 했을때나 사회인이 되었을 때에도 첫 단추교훈은 항상 머리속에 넣고 언제 어디서나 반드시 필요한 인재가 되기 위해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것 같다.
무엇보다 필자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소위 말하는 밥상머리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래서 더욱더 마음에 와 닿았는지 모른다..
아마 우리 동문들은 년령층이 다양할 텐데 좋은 환경에서 자란 동문들은 밥상머리에서 부모님들로 부터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테고 또 환경이 어려운 사람은 설사 부모님이 있다 하더라도 그러한 삶에 대한한 이야기를 직접 듣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든다.
[즐거웠던 소풍날의 추억 ]
50년대 후반과 60년대 초반까지 창산 초등학교의 소풍은 단골 메뉴가 대창면 치산계곡에 있는 영지사였는데 오전 동안 걸어서 목적지 치산계곡 중턱에 위치한 영지사에 도착하여 준비해간 도시락을 먹게 된다.
도시락(당시에 벤또べんとう라고 하였음)은 지금처럼 보온밥통이 아니라 양은으로 만든 도시락이었다.
이러한 도시락(벤또べんとう)를 보자기로 사서 허리띠에 둥여맨후 영지사까지 뛰기도하고 걷기도 하다보니 도시락은 완전히 엉키고 반찬과 밥이 혼합이 되어 범벅이 되어있었지만 그밥이 왜 그렇게도 맛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나마 일부 환경이 다소 좋은 급우(신대의 박태자,사근달에 최순옥, 섬들에 사는 조병연,강정에 조혜정,또 삼호에 조 경)은 고구마등을 특식으로 가져오기도 하고 김밥도 간혹 준비해온 동료도 있었지만 보편적으로 도시락이 주를 이루고 있는 편이었다.
이러한 도시락은 반찬통과 밥이 구분되어 있는데 도시락을 먹은후에는 도시락안에 반찬통을 담아 허리
또는 어깨에 메어달고 뛰게 되는경우가 많았다.
이때 반찬통과 비어있는 도시락이 서로 부딪쳐 딸각~ 딸각~ 하면서 장단을 맟추어 주었던 소리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영지사 주변의 나무그늘에서 학년별로 둘러앉아 도시락을 먹고 나면 치산계곡 중턱에서 아늑한 분위기를 담고있는 영지사의 대웅전의 불상과 범종을 둘러보고는 다시 한적한 나무아래에 학급별로 둘러 앉아서 수건 돌리기를 놀이를 하게된다.
이때 정신을 바짝 차리지못하고 본인 뒤에 수건이 떨어져 있는것도 모른채 태연하게 있다가 걸리는 학생은 벌칙으로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필자도 한차례 걸려 벌칙으로 노래를 불렀는데 "저산넘어 새파란 하늘 아래는 그리운 고향땅이...."
라는 가사의 동요를 불렀던 같다.
벌칙으로 불렀던 노래는 주로 학교에서 배운 동요를 많이 부르기는 했지만 이날만 선생님이 유행가등을 하도록 허락해주어 남학생중 신대동의 현병화(8회)는 당시 유행하던 " 유정천리" 유행가도 곧 잘 부르기도 했다.
또한 소풍때 마다 단골 이벤트(Event) 행사인 보물 찾기도 하였는데 필자는 재학중 한번도 보물 찾기에 당첨되어 본 역사가 없었던 기억이 난다.
선생님이 숨겨둔 보물을 찾게 되면 노트를 한권씩 주었는데 그 노트 한권을 타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 찾아 보았지만 숨겨둔 보물을 찾기가 그다지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부 학생들이 보물(비표가 있는 종이조각)을 찾아 선생님께 제출하면 노트1권씩 받았던 기억이 난다.그당시에는 보물을 찾아 노트를 받는 동료가 왜 그렇게 부러웠는지 모른다.
아무튼 이러한 추억을 간직한 소풍행사는 주로 저학년때는 종동 소나무골과 어은동 솔밭으로 많이 갔던것으로 기억이나고 그 다음은 영천의 "죽림사" 였으며 가장 많이 간곳이 대창면 치산계곡에 있는 "영지사"로 소풍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울러 이글을 쓰면서 이때 가장 많이 찾아갔던 "영지사"에 대한 문헌(영천시 홈 페이지 http://tour.yc.go.kr/ 문화유산 전통사찰편)을 찾아 보았더니 영천시 대창면 용호동소재 소장문화재로 분류가 되어 있었고, 유래는 신라 무열왕때 의상대사가 창건하여 유지해 오다 이조시대 임진왜란 당시 불타버리고 영지대사가 재건하여 "영지사"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그이름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조선 영조 50년(1774년) 중수(重修 :낡고 헌것을 다시 손대어 고치는것)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설명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등록금 내고 다닌 초등학교]
국민학교 1학년 재학당시로 기억된다.
학교 등록금의 금액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 이승만 초상화가 그려져 있는 1천환짜리를 사용하던시절이었으니 2,500환정도 였던것 같은데 정확한 금액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날 남성동 마을 어른들이 학교가는길을 막고서 등교를 하지 못하게 하여 1주일정도 결석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열심히 다니던 국민학교 재학시 유일하게 결석이란 오점을 만들게 된것이 바로 이때문이다.
당시에는 어른들이 왜 학교에 못가게 하는지 원망스럽기만 했지만 나중에 철이 들어 알고 보니 등록금 거부운동을 펴기위한 스트라이커(Strike)였던 것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러한 등교거부운동은 신대동,오계동,원기동,삼호동,남성동 주민 모두가 동시에 일어난 스트라이커(Strike)가 아니고 남성동등 일부 동네만 등교거부운동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스트라이커(Strike) 효험이 그다지 큰 영향은 미치지 못했던 같다.
이러한 집단행동 방법도 지금은 발전이 되어 붉은 머리띠 둘러고서 집단행동을 통해 의견을 관철시키지만 당시만해도 등교 거부로 주민들의 의견을 표출하였던 것 같다.
이러한 이유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이후 3학년때 부터인가 등록금납부제도가 없어져 이때부터 정책적으로 국민학교는 무상교육이 실시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1961년10월 수학여행시(경주(?)에서 남학생만 기념촬영)
[설레임으로 잠을 못이룬 수학여행날]
누구나 한번쯤 격어보았으리라 생각된다.
국민학교(초등학교) 6학년때 실시한 수학여행은 내 삶에서 잊지 못할 추억들이 많은 편이다.
1961년 10월! 가을이었다.
수학 여행일자와 코스가 정해진 이후 왠지 모르게 설레임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던 것은 나혼자만의 느낌은 아니었으리라 여겨진다.
내일이 수학여행일이라면 하루전에는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세웠던 같다.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당시만 해도 시계가 그다지 많지않아 시계를 소유하고 있는집이 거의 없었고 새벽이면 어김없이 울어주는 꼬끼요~ 의 닭울음소리로 시계로 대신 했던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매일 새벽이면 꼬끼요~ 꼬옥~ 하면서 울어되는 닭움음 소리의 정확도는 시계와 같은 수준이었던 같다.
언제 닭 울음소리가 들리려나 하는 슬레임과 깊은 잠에 들면 닭 울음 소리를 듣지는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 때문에 도저히 잠을 이룰수 가 없었다.
또 하나의 이유는 금호역까지 걸어서 나가야 하는 시간의 강박감과 혹시나 늦어서 기차를 타지 못할까하는 우려 때문에 더욱 뜬눈으로 밤을 보냈는지도 모른다.
거의 밤을 지세우다싶이한 우리는 아침05:00경 거의 금호역에 집결이 되었다.
70여명 조금 넘는 우리학급에서 여행의 행운을 함께한 인원은 50명도 되지 않았으니 당시의 경제사정이 어느정도였는지 대충 짐작 하리라 믿는다.
요즘같으면 좀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겠지만..........
얼마후 담임이신 박종흔선생님을 비롯한 인솔선생님이신 이병기선생님(당시5학년담임)과 김응수 선생님(당시4학년담임)이 도착하고 인원파악후 금호역에서 06:00경 꽥~ ~ 칙~ ~폭~ 칙칙~폭폭~칙칙 폭폭 ~ 소리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면서 목이약간 쉰듯한 느낌을 주는 기적소리와 함께 칙칙폭폭열차를 타고 포항으로 이동하였다.
당시의 열차는 석탄을 넣어 열을 가해 수증기 힘으로 달리는 칙칙폭폭열차가 주축이었고 디젤기관차는
4-5년이 지난후 나온것으로 기억이된다.
영천 경주를 지나 포항까지 가는 길에는 생후 처음으로 접하는 풍경들에 의해 깊은 감회에 사로잡혀 좋아서 어쩔줄 몰라하는동안 기차는 뿌연한 수증기를 내 뿜으면서 힘찬 기적소리와 함께 포항역에 도착하게 되었으며 얼마후 영일만 바닷가에 이르게 되었다.
일정상에는 이곳 영일만에서 잠시 바다만 구경하고 바로 경주로 이동하기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오랜 시간은 허락되지 않았다.
야 이것이 바다로구나~
이렇게 많은 물이 어디서 흘러 내려 이토록 '바다'라는 것을 만들게 되었을까?
난생 처음 보는 바다는 너무나 넓게 보였고 신기하기만했다.
파란색상을 나타내고 있는 바다의 수평선은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분간이 어려웠다.
교과서에서 배울때 바닷물은 짜다고 하였는데 정말 바닷물이 짠맛이 나는 것일까?
영일만 방파제로 밀려오는 파도물을 손바닥으로 받아서 한모금 맛을 보았더니 정말 짠 소금물이었다.
이로인해 바닷물이 짜다는 것을 처음으로 확인한 날이라 더욱 잊혀지지 않는다.
이때 보았던 넓은 바다의 풍경은 내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인상 깊은곳이라 생각된다.
이처럼 어릴적 처음 보았던 바다가 너무나 광활하고 아름답다는 것이 잊혀지지 않아 사회인이 된후 공직에 재직시 포항쪽으로 출장을 갈 기회가 있어 수학여행을 왔던 영일만을 한번 찾아보았는데 밀려와 부서지는 파도의 모습은 그때나 다름이 없었지만 벅찬 감동을 갖게 했던 옛 모습은 찾아보기가 어려웠고 어린시절 바다를 처음 볼때 느꼈던 그 순간의 감격 또한 마음에 와 닿지가 않았다.
얼마동안 영일만에서 시간을 보낸 우리는 열차시간에 맞추어 포항에서 다시 경주로 이동 하였는데 불국사역에서 내려 포장이 되지 않은 도로를 따라 30-40여분 정도 걸어 불국사경내에 도착하게 되었다.
처음 접했던 불국사 전경은 얼마나 아름답게 보였던지 이곳이 극락이라는 곳인가 할 정도였으며 하늘과 불국사 주변의 울창한 숲들이 맞닿아 있는듯한 느낌이었다.
이곳 역시 중학생이 되어 다시 찾아 보았으나 그당시 보았던 천국같은 느낌은 갖지 못했고 단순한 관광지로만 여겨졌다.
전기 구경을 하지 못했던 우리 창산벌의 동료들은 경주시내의 쇼우윈도(Show Window)에 낮처럼 밝혀 주었던 형광등 불빛을 처음 보고는 감탄사를 자아내었던 일들도 못내 잊혀지지 않는다.
저녁에는 또래들끼리 집을 떠나 처음으로 바깥 잠을 자는 설레임으로 남학생이나 여학생 모두가 쉽게잠자리에 들지 못한것 같다.
우리가 투숙한 여관은 당시는 관광객을 유치하는 훌륭한 여관이었지만 음식이 쉰듯한 냄새가 풍기는 이불에 천정이 울퉁불퉁하게 느꼈던 방에서 10여명씩 함께 자면서 잠든 친구 얼굴에 그림을 그리고 숨을 쉬고 있는 코에다 연기가 들어가게 하여 잠을 깨우는등 서로 잠을 자지 못하게 하였던 일들은 또하나의 추억으로 간직하게 하였다.
지금 생각하니 어린시절 접했던 모든 사물들은 생후 처음 접하는 현상들이 많아 더욱 감동을 받았으리라 여겨지며 나이가 들고 어느정도 성인이 된 후 보게되는 사물들은 과거에 보았던 것을 다시 재생을 하여 보기 때문에 감동을 갖지 못하는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하여 수학여행은 생후 처음 접하는 기차,바다,불국사,안압지,석빙고,첨성대,분황사, 쇼우윈도(Show Window)에 비치는 형광등 불빛에 감동만 받고 돌아온 여행이 되었던 같다.
그래서 국민학교(초등학교) 수학여행의 추억은 더욱 잊혀지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동안 많은 세월이 변해 지금의 수학여행은 경주 불국사가 아니라 일본이나 중국,동남아등 해외로 나가고 있는 세상이 되었으니 정말 좋은 시대에 살고있음을 실감케 한다.
1961년10월 수학여행시 경주 첨성대에서(남학생 ,여학생전체 기념촬영)
*여학생 대부분은 한복을 착용한 모습이 많이 보이고 첨성대 우측 주변에 보이는
초가집이 이상적이다.
*당시에는 첨성대 돌계단을 뒷고서 올라가기도 했다.
*지금은 주변에 잔듸로 심어져 접근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져 있음.
[박채현 선생님의 사랑]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3학년때와 4학년때 담임을 맡으셨던 박채현 선생님은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신 선생님이다.
선생님께서 사랑을 주신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선생님께서 어릴때 자라온 과정이 필자와 비슷하다는 이유에서이다.
선생님의 이야기에 의하면 어릴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렵게 공부를 하여 선생님이 되셨다고한다.
필자 또한 어릴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렵게 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 였으니 이런점들이 유사하였던 같다.
3학년때쯤인듯하다.
평소 술을 좋아 하시는 선생님께서는 수업이 끝나고 학교앞 구멍가게에서 당시 막걸리 몇잔을 하시고는 얼큰한 기분으로 하교를 하는 필자를 보고 고성만(당시에는 고성만이라고 불렀음) ~
이리와봐 하시더니 어깨쭉 펴고 열심하거라 그리고 어려운 환경이 너를 힘들게 하더라도 반드시 극복해야 성공을 할 수 있고 앞으로 다가올 사회에서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해주시는 등으로 나에게 용기를 불러 넣어 주셨던 선생님이다.
하루는 숙소가 있는(아마 금호 교대동이었던 것으로 기억남) 금호로 데리고 나가 중국 요리인 우동을 사 주시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날 먹었던 우동은 생애 처음으로 우동이라는 음식을 맛본 날이었으며 배고픈 시절이라 단숨에 한그릇을 후딱 해 치웠던 그 맛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선생님이 사주신 우동을 맛있게 먹었던 이날은 어떻게 해서 선생님 숙소에서 하룻밤 자게 되었는데 친절하고 인자하신 사모님께서 먹을것을 챙겨 주시기도하였다.
이어서 사모님은 나에게 이런말씀을 하셨다.
"선생님이 평소 학생에 대한 자랑을 많이 해서 그렇지 않아도 누군가 하였는데 오늘 참 잘 왔구나 "하시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쉬어 갈 수 있도록 이불을 깔아 주시며 배려 해 주셨던 사모님의 인자하신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사모님께서는 편안한 마음으로 쉬어라고 하셨지만 선생님과 사모님 그리고 나 이렇게 방하나에 선생님과 함께 잠을 자야하는 긴장감과 어려움으로 인해 쉽사리 잠이 들지 못했던같다.
아무튼 철부지 시절 여러 선생님으로 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그래도 박채현 선생님 사랑은 항상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었던 선생님이다.
1959년 5월15일 창산초등학교 화단에서 박채현선생님과 함께
*좌측은 필자 우측은 8회방준식이며 아울러 이사진은 필자가 생후 처음찍은 첫사진
이기도하다.(사진을 자세히 보면 검정색 고무신이 보인다.)
[문화교실 무성영화(느티나무있는 언덕)]
3학년 여름쯤인듯하다.
지금은 없어진 기와집 교실에서(그때는 2개교실을 한개로 합할 수 있도록 조립식으로 되어 있었는데 졸업식이나 학예회등 각종행사는 이곳에서 하였음) 여름철인데도 창문을 닫고 창가에 햇빛을 차단하는 커텐비슷한 천을 가리고 밤처럼 어둡게한후 무성영화 "느티나무있는 언덕"이란 제목의 영화를 본 기억이 난다.
요즘 영화는 영상과 연기자의 대사가 동시에 나오고 외국 영화의경우 자막이 나오는 등으로 발전이 되었지만 그 당시 문화교실 일환으로 상영된 "느티나무있는 언덕" 영화는 무성영화로서 화면에서는 연기자의 입이 움직이지만 대사는 변사가 하였다.
변사는 책상위에 물주전자를 1개가져다놓고 돌아가는 필림옆에 앉아 화면을 보면서 대사 대신 최대한의 감정을 넣어 설명을 하였다.
무엇보다 화면이 변경될때마다 진한 감정을 넣어가면서 설명을 하다보니 변사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이슬처럼 맺혀있기도 했다.
그때는 뒷주머니에 준비되어 있는 손수건으로 흐르는 땀을 훔치며 열성적으로 설명하여 주었던 변사의 모습은 너무나 이상적이고 기억에 남는다.
특히 스크린에서 주인공이 느티나무 언덕에서 그네를 타면서 엄마를 기다리는 장면이 나오자 변사는 크게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바로 이때 ~ 동수는 오늘도 느티나무 언덕에서 어머니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면서 애끊는 감정을 전신을 다해 표현할때 선생님을 비롯한 학생 모두가 박수를 보내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필림도 낡아 스크린에 비쳐지는 화면이 비가 내리듯이 빗금이 생기고 상영하다 도중에 필림이 끊어져 어두운 교실에서 기다리기도 했지만 아무튼 나에게는 무성영화 "느티나무있는 언덕"은 생후 처음으로 보았던 영화이기 때문에 더욱 기억에 남아있다.
그 이후 가끔씩 대창천(문헌에는 대창천으로 표기 되어있으나 지역민들은 남성천으로 많이 불렀음) 주변 잔잔한 돌맹이가 많은 자갈 밭에 천막으로 가설극장을 설치해 놓고 마이크를 통해 오늘 저녁 남성천변(문헌에는 대창천이지만 그때는 대부분 남성천으로 통용되었음)에서 "며느리의 서러움" 영화를 상영예정이니 많은 주민들은 구경을 나오라고 선전을 하는 때가 가끔씩 있었는데 이때에는 신대동 ,원기동(학당골),삼성동,오계동(사근달),남성동의 처녀 총각들이 영화를 보기위해 모여들어 영화구경도 하였지만 무성영화는 아니었던 기억이난다.
어린 꼬마였던 필자 또래들은 돈을 주고 영화를 볼 수 있는 주머니 사정이 온전치 못했기 때문에 흐름한 텐트의 뒷구멍을 뚫고 몰래 들어가려다 지키는 기도한테 걸려 혼줄이 날때도 있었다.
그래도 기는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말이 있듯이 동작이 빠른 선배들은 어느사이 개구멍으로 들어가 공짜 구경을 하는 형들도 있었다.
이제 이러한 풍경은 사라지고 영화관도 아닌 텔레비죤이란 매체를 이용 안방에 누워서 영상을 볼 수 있으니 더없이 편리해진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21세기에 살고있는 우리는 그야말로 천국이 따로 없는 세상에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한다.
[ 한복을 즐겨입었던 여학생과 고무줄 놀이]
필자가 졸업할때 까지만 해도 교복은 별도로 없었고 남학생은 목에 카라가 세워져 있는 검정색 옷을 많이 입었으며 여학생은 대부분 한복을 즐겨입었다.
졸업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일부 학생을 제외한 대부분 여학생들은 한복을 입었다.
그리고 대부분 여학생들은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이 되면 운동장에서 2-3m의 길이의 고무줄을 원모양 형태로 크게 돌리면서고무줄 놀이를 많이 하였다.
이러한 고무줄 놀이를 할때 부르는 노래는 동요가 아니라 특별한 의미도 모르고 그냥 구전으로 전해오는 일본 노래를 주로 부르면서 고무줄 놀이를 하였던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가이땡 고마고마 도우수루노.(돌아가는 팽이- 어떡하나...)
かいてん こま どうするの
또한 우리반은 74-5명정도의 인원이었는데 남자가 여자보다 몇사람 더 많았던 것으로기억된다.
철부지 때 였지만 그래도 남학생들로 부터 인기를 얻고 있었던 여학생은 사근달의 최순옥, 강정에 조혜정, 섬들에 조병연 등이었는데 보통 삼총사로 불리었다.
왜 삼총사라고 명칭을 붙이게 되었는지 그 이유는 잘모르지만 3명의 여학생은 공통적으로 공부도 잘했을뿐 아니라 심성이 곱고 상당히 착했으며 가정 환경도 그다지 어려움없이 여유있는 생활했던것이 이들의 공통점이 아니었나 생각이 된다.
그래서 졸업사진도 최순옥,조혜정,조병연 삼총사가 나란히 서서 찍을 정도로 3명은 졸업때까지 친하게 지냈던 것으로 기억이난다.
아마 이러한 이유로 인해 삼총사라는 명칭이 붙여진 이름일 것으로 추정이 된다.
한편 남자나 여자나 할것 없이 대부분 9살 10살정도되어 1학년에 입학한터라 일부 성숙한 여학생은 사춘기에 접어들었던 여학생도 간혹 있었는듯하다.
왜냐하면 운동장에서 여학생들과 체육활동을 할때 함께 뛰다보면 일부 몸집이 큰 여학생의 경우 앞가슴에서 "와짜작" 탁~ 하는 소리가 들리는 여학생도 있었는데 당시에는 몰랐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브레지어(Brassiere)가 없던 시절이라 아마 광목등 천으로 부푼 앞가슴을 표시나지않게 묶어두었는데 뛰면서 그것이 풀어지는 소리였을 것으로 예측이된다.
지금도 8회 동창회 모임시 당시의 상황등을 이야기하고는 한바탕 웃기도하지만 세월의 경과에 따라 철부지였던 또래의 여학생들이나 남학생할것 없이 힌머리가 하나 둘씩 보이기 시작하니 세월은 속일 수 없음을 실감케한다.
1962.2.10 8회 졸업사진
*자세히 보면 여학생의 대부분은 힌색 한복을 착용하고 있다.(일부 선생님은 5.16직후라서 재건복을 착용한
모습도 보인다)
[학교에서 배급받았던 우유가루]
1학년때 인듯하다.
6.25동란직후여서 나라 전체가 살기가 어려웠던 시기였다. 미국의 원조물자인 우유가루를 학교에서 배급을 받아 먹었던 시절이 생각난다.
우유통 크기는 지금 경유드럼통 처럼 생긴 크기의 둥근통인데 철판으로 만든것이 아니고 종이로 만든통이었다.
학교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우유통을 개봉하여 급사님이 나누어 주는 우유덩어리는 왜 그렇게도 맛이 있었는지 지금도 군침이 돌것만 같다.
철부지 우리들은 배급을 받아 귀가하는길에 엉켜있는 생 우유가루를 마음껏 먹고는 이튼날 설사를 하여 결석을하는 아이도 있는가 하면 일부아이들은 그 우유가루 덩어리를 집에가져가 쪄서 먹는아이도 있었다.
그 때 우유분말에 대한 맛을 알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결혼후 아이를 낳아 자녀를 키울때 아기용 분유를 사두면 아내 몰래 분유를 자주먹기도 했으며 지금도 우유분말은 무척 즐겨 먹는편이다.
3.내고향 향기
[금호장날의 동동구루무 장사]
금호장은 5일만에 한번씩 들어오는 시골장터이다.
친구들과 별로 목적의식도 없이 장날은 한번씩 놀러가기도 했다.
왜냐하면 금호장날에는 어김없이 찾아오는 동동구루무 장사의 익살스런 이바구와 제스쳐는 보는이로하여금 흥미롭기만했다.
뿡빵~ 뿡빵~ 뿡뿡 빵빵 ~
아카디온 소리가 들려오고 어깨에 울러맨 북을 발로 한번 차면 쿵하는 소리가 장터의 모든 사람을 모으게한다.
아카디온 소리와 북 소리에 의해 모여든 장터사람들 대상으로 동동구루무를 파는 아저씨는 늘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았고 재미가 있었다.
이뿐이도 발라 보고,복순이도 발라요~ 하면서 왼손에 조그만한 크림병을 들고 그 크림을 집게 손가락을 곧게 세우고는 여자아이들 볼이나 콧등에 발라주면서 동동구루무를 팔기위해 갖은 익살을 부리는 모습이는 너무나 재미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 동동구루무가 여성화장품으로 최고의 인기를 받고 있을때 우리나라에는 화장품 제조 기술이 없었던 시기였으므로 아마 일본 상품이었던것이 아닌가 생각이든다.
[ "물레방아"가 있었던 강정마을]
강정마을 끝자락에는 물이 떨어지는 힘으로 물레바퀴를 돌려 곡식을 찧게하는 물레방아(지역에서는 보통 '물방아"라고 불렀음)가 있었다.
추수를 하여 가을철이 되면 강정마을 뿐 아니라 남성,신대등 인근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강정마을 끝자락에 있는 물레방아를 이용하였던 것으로 기억 기억되며 필자가 몇살때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큰 아버님과 큰 어머님과 함께 이곳 물레방아간에 몇번인가 따라가 도와주었던 일이 있어 당시 강정마을 물레방아시설을 희미하게 기억 할 수 있었다.
물레가방아가 돌아가는 원리는 인공으로 만든 수로에 물이 일정량 흐르게 하여 물레방아 바퀴에 물이 고여 물의 무게에 의해 전체바퀴가 돌아가게 되는 동력이 발생된다.
이렇게 물의 힘에 돌아가는 외부의 큰바퀴 "물방아"는 천천히 돌아가지만 이 바퀴와 연결되어 있는 방아간의 작은 바퀴는 상당히 빠른속도로 돌아간다.
이처럼 빠른 속도로 돌아가는 방아에 곡식을 넣어 찧게하는 원리였다.
이러한 원리로 활용된 물레방아간은 마을 사람들이 차례를 기다려 곡식을 찧게하면 물레방아 운영자에게 사용료를 지불하였는데 당시에는 돈을 준것이 아니고 아마 일정량의 곡식으로 물레방아 사용료를 지불하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에 강정마을 물레방아가 성황을 이루었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마을의 개인집마다 디딜방아(발로 디디며 곡식을 찧게된 재래식 방아)가 있었지만 많은 노력이 들여야하는 불편이 있기 때문에 사람의 노동력이 거의 필요하지 않았던 물레방아를 많이 이용하게 됨으로 성황을 이루었던 같다.
이와같이 성황을 이루던 강정마을 물레방아(물방아)도 흐르는 세월과 문명의 변화로 50년대 중반이후 부터는 발동기를 이용한 "정미소"라는 새로운 기계가 나오게 됨으로 인해 한때 성황을 이루었던 강정마을의 물레방아간도 점차 쇠퇴하여 50년대 후반에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아무튼 우리 선조들의 지혜로 만들어진 물레방아는 역사속으로 사라지긴 했지만 자연을 이용한 무공해 시설임에는재론할 여지가 없다고 느껴진다.
[사근달 고개길에 얽힌 이야기]
시골학교였기 때문에 수업이 끝나면 또래들과 함께 신대동,삼호동,오계동,원기동에 동료들을 따라 이웃 마을에 놀러가기도 하였다.
몇 학년때 인지는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늦은 가을 하루는 곽정태(사근달),최상찬(사근달),최상섭(사근달)최상진(사근달),방준식(남성동),조윤현(원기동),조순(강정),조경(강정), 황기웅(신대동) 그리고 필자(고성관)등과 함께 사근달(오계동)마을에 놀러가게 되었다.
사근달 마을로 가려면 종동마을에서 사근달 고개길을 넘어야 갈 수 있는데 이 사근달 고개길을 넘을 때 사근달 친구들(정태,상찬,상섭,상진)은 우리 일행을 안내하면서 이런이야기를 해 주었던기억이 난다.
이고개 아래 우측 으슥한 곳(사근달에 살았던 8회 최순옥동기의 설명에 의하면 속칭"양가지골"이라고 불렀다함)에서 100년 먹은 여우가 어슬렁 어슬렁 나타나서 사람을 죽여 간을 빼어 먹고는 다시 사람으로 환생한다는 무서운 이야기를 해주어 잠시 동안 긴장을 하게한적도 있었다.
기억하기로는 당시의 사근달 고개길은 달구지 한대가 지나갈 정도로 넓은길이었고 마을로 들어가는 우측에는 움푹파인 계곡이 있었으며 숲이 다소 있었던것 같다.
사근달 고개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확인하기위해 수지에 살고 있는 8회 최순옥동기를 통해 추가 설명을 들어본 결과 최순옥 동기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사실 내가 학교에 다닐때 사근달 고개를 넘을때 몸집이 강아지 정도의 크기로 생긴 여우(지역에서는 "납딱발이" 라고 불렀다함)를 몇차례 목격을 한적이 있었는데 사람이 근접해도 도망을 잘 가지 않았고 사람인근 주변에서 계속 맴돌았던 기억이 있다"고하였다.
"그 이후 여럿이 다닐때는 괜찮았지만 간혹 혼자서 사근달 고개를 넘을때는 무서워서 넘지못하고 하교할때쯤 되면 할머니가 언덕아래까지 마중을 나와 함께 집으로 가는일이 자주 있었다"는 이야기도 추가로 설명해주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구전으로 전해지다 와전이된 이야기도 있겠지만 여우,늑대등의 야생동물은 실제로 그당시 목격자가 있었던것으로 보아 많이 서식하였던것이 사실이라 여겨진다.
또한 어른들이 자녀들에게 길을 걸어가더라도 매사에 정신을 차리고 조심을 하도록 하기위해 안전교육 차원에서 과장하여 전해진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러한 이야기가 얽혀있는 사근달 고개길을 넘어 마을에 들어가 또래들집(상섭이네 집으로기억됨)에서 부모님들이 주시는 고구마와 감자등을 먹고 있는데 정이 많았던 최순옥어머니는 너희들 동기들이 놀러왔는데 가져다 주라면서 찐쌀(벼가 완전히 여물기전에 베어서 삶아 먹었던 쌀)을 보내주신 기억도있다.
대체로 부끄러움이 많은 당시 여학생들이었기에 최순옥 동기도 그릇에 담은 찐살을 살짝 주고는 얼굴을 가리고 도망을 가버리기는 했지만 또래들은 최순옥 어머니가 보내주신 찐쌀을 한주먹씩 입에 넣고 먹었던 구수한 맛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정월 보름날의 소원을 빌던 마을 처녀와 청년들의 싸움판]
남성마을 입구에는 달맞이 산이 하나있다.
마을 사람들은 먹고 살기가 대부분 어려운 편이었지만 정월 보름날이면 어떻게 마련하였는지 그래도 가옥마다 잡곡밥과 찹쌀밥을 만들어 먹었던 기억이 난다.
오랫만에 잡곡밥과 찹살밥 그리고 고사리나물 등으로 배를 채운 또래들은 마을입구에 있는 달맞이 산에올라가 민둥산 여기저기에 가끔씩 보이는 소나무를 꺽어서 달맞이불을 놓아 연기를 치솟게 하는것이 유행이었다.
요즈음은 울창한 숲으로 인해 달맞이 쥐불 놀이 때문에 대형산불도 발생하지만 그때는 산의 대부분이 민둥산이고 잔듸뿐이어서 산불이 발생하는 불상사는 거의 없었던것 같다.
이러한 달맞이 쥐불로 연기를 피워 달을 맞이하는 행사가 이어지고 오후 늦게 달이 솟을 무렵정도가 되면 남녀노소 구분없이 이곳 달맞이 산에 모여 둥근 보름달을 보고는 절을 하면서 각자의 소원을 빌기도 하였는데 특히 시집갈 나이가된 마을 처녀들은 두손을 모아 합장하면서 좋은 배필을 만나게 해달라고 소원을 비는 누나들도 있었고 , 마을 아낙네들은 마음속으로 자녀들이 잘 성장해 줄것을 희망하는 소원을 빌어보는 등으로 순수하게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보기도 했다.
한편 이와 반대로 혈기가 왕성한 젊은 청년들(주로 10대후반 부터 20대 초반나이 또레)은 달맞이 한다
는 명목하에 남성동 뒷산(이곳사람들은 "막등산"이라고 불렀음)과 석정(石井)골 언덕에 모여 이웃동네 젊은이들과 집단 싸움을 벌이곤 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싸움판은 창산학군내에 있는 신대동 청년과 경산군(지금은 경산시)관할의 평사리마을 젊은 청년들은 매년 년례행사처럼 집단 패 싸움이 있었다.
달맞이 쥐불 놀이를 멈추고 한동안 돌이 날아가고 싸우다 한쪽편의 동네 젊은이가 날아온 돌에 맞아 피가 흐르면 피를 보고 흥분한 젊은 청년들은 더 큰 싸움으로 돌변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남성동 젊은이들은 인원이 얼마되지 않아 신대동측에 편승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되며 필자는 이때만해도 코를 훌쩍 훌쩍 삼키며 돌아다닌 어린나이여서 이들의 싸움판에 구경하러 놀러가기도 했지만 어쩌다 돌맹이가 하나 날아오면 도망가는데 정신이 없었던 같다.
그런데 그때 그 젊은청년들이 왜 정월 대보름날이 되면 집단적으로 싸움을 하였는지 지금도 그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또한 정월 보름날의 젊은청년들의 싸움판은 비단 신대동과 평사동과의 싸움뿐 아니라 여타 부락에도 이러한 집단싸움이 있었던 같다.
오계동에 살았던 조홍락(19회)설명에 따르면 오계동의 경우 금호 어은동 젊은이들과 정월보름날 집단싸움이 주로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점을 볼때 그당시는 특별한 이유도 없이 그냥 맹목적으로 군중심리에 의해 부락마다 싸움판이 벌어지곤 했던것이 공통적인 현상이었던 같다.
돌이켜 본다면 모든 강물이 흘러 바다로 유입되듯이 우리 인생도 멈추지 않는 세월이란 시간의 경과에 따라 당시에 혈기가 왕성하던 그 청년들도 지금쯤 70대가 훌쩍 넘었을 것으로 예상이된다.
그래서 혹자는 세월은 유수와 같다고 하나보다.
[민둥산을 만든 아궁이]
지금은 대체에너지인 가스를 이용 농촌연료로 사용하지만 필자가 국민학교 재학당시에는 집집마다 가마솥을 1-2개 이상씩 걸어놓고 아궁이를 설치해 땔감을 이용 연료로 활용하였다.
결국 마을마다 민둥산을 만들게된 주범이 바로 아궁이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 아궁이로 통해 숱한 나무의 땔감이 연기로 사라졌으니 민둥산이 되지 않을 수 가 없었던 불가피한 현실이었던 것 같다.
기억을 회상해보면 산에 나무가 없으니 올라오는 잔듸를 밀대(낫 모양으로 생겼는데 밀면서 잔뒤를 깍는것임)로 밀어서 땔감으로 사용하였던 일들도 생각이 난다.
이러한 아궁이는 우리가 먹는 밥을 만드는데도 사용하고 겨울에 추울때 군불을 살짝 넣어 보송보송한 아랫목에 몸을 묻게 하는 역활도 했다.
아궁이를 통해 땔감을 태우니까 초가집 지붕에 솟아나 있는 굴뚝에는 해질무렵이 되면 마치 안개가 낀듯한 자욱한 연기가 마을 전체를 덮곤했다.
또한 산의 숲을 연기로 사라지게 만드는 아궁이 영향으로 인해 1960년대초까지만 해도 이들 산야에는 나무는 거의 볼 수가 없었고 민둥산뿐이었다.
박정희 대통령당시 산림녹화정책사업의 강력한 추진으로 인해 많은 세월이 지난 요즈음은 창산벌 주변의 모든 산야가 울창한 숲으로 변해 있다.
여기서 우리나라 민둥산을 울창한 숲으로 만들게된 역사적 배경을 김진홍의 아침묵상(도산선생의 4식론)이란 글에서 설명한 내용을 인용하여 잠시 언급 하고자 한다.
8.15 해방 이후 너도 해방 나도 해방이라는 인식하에 무차별 벌목을 함으로서 산의 나무가 날이 갈수록 사라지고 있던중 6.25 동란을 겪으면서 전국 각지에 산은 나무 한 포기 없는 민둥산을 만드는데 가속화 시키게 되었다.
그런데 60년대 중반 들어 당시 농림부 산림국에서 산림녹화 계획을 세워 박정희 대통령을 설득을 하여 대통령이 산림 녹화에 확신을 품도록 하였다.
당시 농림부 산림국에서 대통령을 설득한 주요 내용은 '산림녹화 사업은 마치 집에 지붕을 덮는 것과 같다. 지붕을 덮지 않는 집은 내부 시설 아무 것도 할 수 없듯이 국토에 산림녹화가 되지 않고서는 농업도, 공장 짓는 것도 모두가 허사가 된다' 고 설득하였다고 한다.
에에 박대통령이 단안을 내려 농림부의 산림국을 산림청으로 승격시키고는 내무부 산하로 옮겨 산림녹화 사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그러기를 2-30년 만에 유엔에서 황폐한 산들에 식목운동을 펼쳐 식목정책을 단기간에 성공시킨 나라로 인정받고 있는등으로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산림녹화에 모범국으로 발돋움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지닌 우리나라 산림정책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산야들의 모습이다.
따라서 이제 민둥산을 만들었던 주범 "아궁이"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역사속으로 뭍혀 민속촌이나 가야만 볼 수 있게 되었다.
촬영년도는 정확한 기록이 없으나 1960년경으로 추정됨( 과거의 남성동 산야 모습)
*사진설명 :좌측 7회 이치용, 우측 필자
*당시에는 이처럼 모든 산들이 간혹 소나무 몇그루만 있고 잔듸로 덮인 민둥산이었음
산의 나무를 연료로 사용하였던 "아궁이" 모습
*당시 현지 사진이 촬영된것이 없어 "아궁이"에 대한 이해를 돕기위해 한국민속촌에서 촬영한 사진을 게시하였음
[인력과 가축에 의존한 농사일]
산업화로 변천하면서 경운기와 터랙트(Tractor)가 등장하여 이젠 농사일도 기계(장비)를 이용하여 쉽게 할수 있는 농촌으로 변모가 되었다.
70년대 이전까지만해도 농촌의 농사는 가축이나 인력에 의존해 농사를 하였다.
돌이켜 보면 우리나라 전체인구의 70%는 농업에 종사하였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여기서 잠시 어릴적 보았왔던 창산벌 주변의 농업상황을 소개 해볼까한다.
모내기를 하기위해서는 이른봄 논갈이를 해야하는데 이러한 논갈이는 주로 집에서 길러오던 소를 이용하여 쟁기에 달고 논(畓)갈이를 하였다.
농사일을 도와주는 소들은 대부분 유순하였지만 그중에는 성격이 사나온 소들은 일을 하다 도주하거나
힘든일을 하기싫어서 논(畓)바닥에 주저앉아 버리는 소들도 간혹 있엇다.
논갈이 방법은 주인장이 소를 향해 이랴~ 쭈 쭈 ~ 이랴~ 쭈쭈~ 소리를 내면서 채찍을 사정없이 내리치면 유순한 소들은 아픈 채찍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앞으로 전진하게된다.
이때 쟁기를 재빨리 논(畓)바닥에 맞추어 흙을 갈아엎는등 순수한 소의힘으로 논갈이를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에 또래들은 철부지였기 때문에 직접 쟁기를 활용하는 체험은 하지는 못했지만 농사기법이 너무나 재래식 방법이 아니었나 하는생각이 든다..
따라서 당시의 농민들은 요즘보다 몇배의 인력을 투자하고 힘겹게 농사를 하였지만 수확은 지금보다도 오히려 소량이었으니 당시 어른들은 재래식 농사기법 덕택에 많은 고생을 하였다고 여겨진다.
뿐만 아니라 모내기등도 모두가 인력으로 하였는데 마을마다 방법은 다르지만 남성동의 경우 마을 주민들이 힘을 모아 세대마다 차례로 돌아가면서 집단적으로 모네기를 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다시 말하면 "품앗이"(힘든 일을 서로 거들어 주면서 품을 지고 갚고 하는 일) 제도를 활용하였다고 생각된다.
요즘은 모네기도 모두가 기계화 되어 있어 많은 인력도 소요되지 않고 기계가 논(畓) 바닥으로 한번 통과하게되면 자동으로 모가 심어지게 되도록 발달이 되었으니 많이도 변천이 되었다.
당시만 해도 벼농사가 주업이었지만 지금은 벼농사보다는 특용작물재배로 농가 소득을 올리고 있는것으로 알고 있다.
한가지 걱정되는 것은 산업화에 따라 농촌의 젊은인구가 도시로 진출함으로 인해 농촌인구는 점차적으로 고령화 되어 멀지 않아 고령화세대가 지나면 내고향 창산벌을 지킬 인구도 점차적으로 없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성미급한 우려도 해본다.
사진의 가운데가 쟁기(벽에 걸려 있는것이 소등에 연결하는 도구임)
*경기도 용인에 있는 한국민속촌에서 촬영한 사진으로 "쟁기"에 대한 이해를 돕기위해 게시하였음
[마을 주민 공동으로 실시한 벼논의 김메기작업]
벼논의 김메기 작업은 년중 가장 더운 7-8월에 실시되었던 농사일이다.
보통 모네기를 한후 가을에 수확을 거두어 들일때까지 3회정도 김메기를 하였던 기억이 난다.
이러한 김메기를 할때는 소위말하는 "두레"(농민들이 농번기에 농사일을 공동으로 하기 위하여 부락이나 마을 단위로 만든 조직)조직을 이용하였던 것같다.
다시 말하자면 일의 지루함을 없애고 능율을 올리기 위해 집단 영농체제를 운영하였다고 생각되는데 지금생각해도 이런 방법은 상당히 좋은제도였다고 여겨진다.
햇살이 떠거운 여름 아침 마을리장은 오늘은 00네집 김메기를 하는날이라고 통보하여(당시에는 마을 스피커도 없이 직접구두전달한 것으로기억됨)한가구당 1명씩 (주로 젊은 청년층이었음)차출하여 공동으로 일을 하였는데 이바구 잘하는 동네어른 한분이 "이 물골 저 물골 다 터놓고 주인 양반은 어디갔나"하면서 풍얼을 선창하게되면 벼 논골에서 김메기를 함께하던 마을주민들은 다같이 따라서 "이 물골 저 물골 다 터놓고 주인 양반은 어디갔나"하는등으로 큰 소리로 복창을 하게된다.
이러한 방법으로 노래를 하면서 일을 하게되면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위도 잊게되고 지루한감이 없어지게됨으로 자연스럽게 일의 능율도 향상되게 하였다고 여겨진다.
그 밖에도 김메기 노래는 많이 듣기는 하였지만 일일이 기억을 되살리지 못해 기록을 하지 못한점이 아쉬움이 따른다.
이렇게 한차례 일이 끝나면 동네 아낙네들은 정성스럽게 국수를 만들어 허기진 배를 채울수 있도록 도와준다.그러니까 김메기 작업은 남녀 노소 할 것없이 마을 주민모두가 하나가되게 하는 중요한 역활도 병행하였던 같다.
점심때쯤은 막걸리 한잔과 쌀이 한톨도 포함되지 않은 보리밥 한그릇, 샛노란 생된장, 싱싱한 풋고추,비린내나는 멸치 젖갈, 맑고 시원한 찬물 한대접 등으로 중식을 하고는 마을의 가운데에 있는 느티나무아래에서 코를 골면서 오침을 한후 오후 3:00경부터 다시 오후 일과을 시작으로 해가 서산에 넘어갈때까지 일을 하여 한세대의 김메기작업을 완료하게된다.
필자는 당시 어려서 직접 김메기작업에 투입은 되지 않고 논두렁에 앉아 국수 한그릇 얻어먹고 각종 심부름을 하였던것이 주 임무였지만 논두렁에 앉아 먹었던 국수맛은 지금까지도 잊지못해 가족한테 자세히 설명을 하여 가끔씩 그런 형태의 국수를 집에서 만들어 먹기도 하는편이다.
필자가 그런류의 국수를 너무나 좋아하여서인지 모르나 자연스럽게 우리집 식구 모두가 논두렁 국수를 즐겨먹게 됨으로 인해 지금은 가족(박춘임)의 국수요리 만드는 솜씨도 수준급 이상으로 향상되었다.
[농촌의 이동수단인 소 달구지와 지게]
지금의 농촌에는 농산물 이동수단으로 경운기를 활용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다소 부유층에는 달구지(또래들은 "구루마くるま"라고 불렀음)를 이용하여 농산물을 이동하거나 요즈음의 승용차처럼 자가용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 서민 농가에는 유일하게 운반 수단으로 사용된것은 지게(짐을 지기 위해 나무로 만든 운반기구)였다.
이러한 지게의 용도는 땔감으로 사용하는 나무짐을 이동하거나 농사를 한후 작물을 거두어 이동하는 수단으로 유용하게 사용되었던 농가의 필수품이었다.
여기서 달구지(구루마くるま)에 대해 좀더 부언의 설명을 하고자한다.
소의 등을 연결하여 이용하였던 달구지(구루마くるま)는 짐을 싣기도하고 사람이 타고 이동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금호장터나 하양장터에 가는 날에는 마을 사람들이 자가용처럼 이동수단으로 사용되기도했지만 아래 사진에서 보는것처럼 두개로 되어있는 큰 바퀴에는 쇠붙이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승차감은 전혀 느낄 수 없었을뿐 아니라 간혹 울퉁한 길쪽으로 이동할때는 달구지(구루마くるま)에 탄사람이 공중곡예를 하는 경우가 많아 넘어지지 않기위해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하지 않으면 떨어지기 일수 였다.
이러한 달구지(구루마くるま)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쇠붙이 바퀴가 점차적으로 들어가고 얼마후부터는 지금의 자동차 바퀴처럼 고무로된 바퀴로 대체되었지만 황소 등에 연결하여 끌었던 것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당시만해도 또래들은 달구지 한번 타보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고 자랑거리가 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니 속도는 시속4-5km정도가 아니었나 여겨진다.
이러한 일들은 이제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농촌에도 자가용시대가 되었으니 세월은 많이도 변하였고 많은 발전을 하였으며 앞으로도 더 발전의 진화는 계속 되리라 본다.
소 달구지(구루마くるま)의모습
*이 사진은 2003년 8월31일 하계휴가시 전남 순천시 낙안면에 있는 낙안읍성 민속마을에서 촬영한
사진으로 소 달구지에 대한 이해를 돕기위해 게시하였음
물자 운반수단으로 이용된 "지게" (2007 한국민속촌에서 촬영한 사진임)
*당시에 가장 하기 싫었던 것이 지게를 이용 볏단 운반하는 일 이었다.
[동네 골목길의 엿장수]
조용한 남성마을에는 일주일에 한두번씩 엿장수가 정기적으로 들어와 골목마다 다니면서 빈병과 고철류, 양은 냄비등을 수거해 가기도 했다.
이러한 엿장수는 소리를 외치는 대신 넓적한 무쇠 가위로 헛가위질을 해서 딸각~ 딸각~ 소리를 내어 엿장수가 나타났음을 알리면 동네의 철부지 아이들은 엿을 사달라고 땡강을 부리는 일이 보통이었다.
딸각~ 딸각~ 엿장수의 가위소리가 나면 동네 어린이들은 이곳저곳에서 모아둔 고물 즉 녹슨 쇠붙이,뚫어진솥, 낡은냄비,양재기,주전자등을 들고서 엿장수 한테로 달려간다.
빈공병보다는 고철이나 양은냄비를 주게 되면 많은 양의 엿을 바꾸어 올 수 있어 이러한 고물을 들고 나오는 친구가 있으면 같이 엿장수 한테가서 기다리다 조금의 엿을 얻어서 먹기도 했는데 그때 얻어 먹엇던 꿀같은 엿맛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익살스러운 일부 엿장수들은 영감,할마이(할머니의 경상도 사투리) 싸움하다 부러진 비녀(여자들의 긴 머리를 묶은후 풀어지지 않도록 꽂는 장신구) 가져오면 엿을 준다면서 동네 꼬마들을 유혹하다 보면 어느사이 엿장수는 우리 꼬마들에게 우상이 되어 아이들은 엿 한쪼각 얻어 먹기위해 엿장수가 가는곳마다 따라다니기도 했다.
남성동 마을에서 환경이 그런대로 괜찮았던 7회 이치용의 경우 필자와 함께 엿장수를 따라다니다 엿은 보니까 침이 넘어가고 부러진 놋숱가락은 없어 누나가 신고 다니는 성한 새 고무신을 몰래 들고 나와 엿을 바꾸어 먹고는 어머니 한테 몰래 사 먹었던 엿이 퉁겨나올 정도로 혼줄나는일도 있었는데 또래들은 같은 공범이다 보니 혼줄 나는 치용이를 보고는 겁에 질려 걸음아 날 살려다오하고 도주하였던 일도 있었다.
그당시 생각으로는 현장에서만 잡히지 않으면 이튼날은 큰 문제를 삼지 않았으니까 또래들은 그것을 이용했던것 같다.어떻게 보면 철부지 시절이기는 하였지만 의리도 없었고 지능범에 가까운 행동을 하였던 같다.
지금은 이러한 추억들이 담겨있는 엿장수는 찾아볼 수 없는 세상으로 변했고 고무신 또한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을까......
그래서 세월은 흐르는 물처럼 지나 추억을 만들고 머리속에 각인된 추억은 세월이 지날수록 더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어 가고 있음을 새삼 느끼게 한다.
[반딧불 속에서 꿈을 키운 또레들]
남성마을의 여름은 어느곳보다도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더위를 견디지 못해 한없이 울어대는 매미소리,날파리를 열심히 잡아먹는 잠자리,초가집 처마끝에 둥지를 만든 제비, 벼논의 곳곳에서 들려오는 개구리 울음소리,무리를 지어 날아다니느 참새떼,야광을 뽐내는 반디불,대기 속에는 마치 나뭇가지나 풀잎이 자라는 소리라도 들리듯이 바스락 거리는 소리 등 모두가 나름대로 특성을 가진 소리를 내면서 서로 생존을 위해 조화를 이루며 살아던 남성마을의 여름풍경 이었다.
무엇보다 어둠이 짙어지면 산 기슭에서 반짝 반짝 빛을 내면서 위치를 알려주는 반디불은 꿈이 많았던 또래들한테는 신비감을 심어 주었던 같다.
또래들은 유난히 빛을 내고있는 반디불을 잡아 종이로 만든 상자에 가두어 두고는 꼬리부분에서 빛을 내고있는 모습을 관찰해 보면서 소녀 시절의 꿈을 키우기도 했다.
캄캄한 밤하늘 아래에서 멍석을 하나 깔고 또래들은 우리우정 변하지말자며 새끼손가락을 걸면서 밤이 늦도록 시간을 보낼때 염치없이 달라붙는 모기떼가 극성을 피운다.
이러한 모기떼를 쫒기위해 잡초를 모아 모닥불을 피워놓게 되면 연기에 의해 모기들은 한동안 접근을 하지 못하고 도주하게된다.
이때 서로 딩굴면서 높고 어두운 밤하늘에 촘촘히 늘어져 있는 별들을 바라보고 저별은 사원이 별,이별은 치용이 별,저것은 나의별 하면서 각자가 자기별을 하나씩 갖기도 하였는데 갑자기 많은 별들중에 유성(流星)하나가 우리들의 머리위로 지나가면 서로가 상대의 별이 떨어졌다고 주장도 하였던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그 밤 하늘이 그렇게도 유난히 깊고, 별들이 그렇게도 찬란하게 보인 적은 없었던 같다.
이렇게 자연과 더불어 적막 속에서 밤을 세우다싶이 보낸후 날이 밝아지면 다시 또래들은 집결하여 꼴망태에 낫을 꽃아 한쪽어깨에 걸치고 산으로 올라가 밤이슬을 맞고 자란 풀잎을 베어 꼴망태속에 일정량을 채운후 마을 윗쪽 계곡에 있는 남성저수지로 모여 또래들과 함께 수영도하였는데 대부분 또래들은 연못을 횡단할 수 있을 정도의 수영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같다.
그 당시 남성저수지의 특징은 맑은물이 아니라 항상 황토색의 물이 채워져 있고 저수지 바닥에는 어린이들의 발목이 빠질 정도의 진흙이 많았으며 수영을 하고 나오면 진흙색갈의 물이 피부에 묻혀 있을 정도로 그다지 깨끗하지 않았을뿐 아니라 수심도 깊은곳은 1-2m정도 였다.
또한 저수지 주변에 자라고 있는 수초사이에는 잔잔한 새우들이 많이 서식하였기 때문에 새우먹이를 넣고 투망을 물속에 잠시만 담구어도 많은 새우들이 잡히기도 했다.
그러나 수초사이에는 그다지 크지는 않았지만 가끔씩 물뱀도 나타나 또래들한테 비상을 걸리게 할때도 있었던 남성저수지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겁없이 위험한 물놀이를 하였다고 여겨진다.
이후 강산이 여러차례 변하면서 남성마을의 생태계도 변화하여 당시의 여러가지 곤충들과 각종 조류들이 서로 어우러져 연주를 하던소리가 자취를 감춘지가 오래된듯하다.
그러나 "한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이라는 말처럼 당시 반딧불 속에서 새끼손가락을 걸면서 우정을 다지며, 꿈을 키웠던 또래들과는 아직도 변함없는 영원한 친구가 되어있다.
[ 북당골의 뻐꾸기 울음소리]
남성마을에서 하양장터로 가는 오솔길을 따라 약 1km정도 올라가다보면 외딴 초가집이 하나 있고 언덕을 하나 넘어 좀 더 가다보면 감나무가 많이 서식하는 북당골(마을사람들은 이곳을 "갓골짝"이라고도불렀음)에 도달하게 된다.
봄을 알리는 감꽃이 필 무렵이면 어디서 날아온 뻐구기인지 모르겠으나 빠꾸기 울음소리가 북당골의 구석 구석을 아름다운 멜로디로 장식한다.
이러한 뻐꾸기의 멜로디를 들어면서 보릿고개의 영향으로 주린배를 움켜쥐어야 했던 또래들(7회 윤희원,7회 윤사원,7회 이치용, 7회 구연오,7회 김종달, 8회 방준식, 8회 윤낙관, 8회 고성관<필자> 등)은 떨어지는 감꽃을 주어서 옷자락에 대충 털어버리고 먹거나 주변에서 서식하고 있는 찔레순을 꺽어먹기도 했던 곳이 바로 북당골(갓골짝)이다.
여기서 말하는 북당골이라는 속칭은 정확한 유래는 모르나 마을에서 북쪽에 있는 골짜기 이름이 아닐까하는 소견이다.
감 꽃의 향기는 약간 씁슬하면서도 나중에는 단맛이 나고,진달래 꽃잎은 감 꽃 맛 보다는 뒤 떨어지지만 입안에 넣어 씹을수록 향기가 은근한 느낌을 주었던 같다.
또한 찔레순은 순이 막 올라올 무렵 물기가 촉촉할 때 먹어야 향긋한 맛이 있지 여름이 되면 찔레나무로 변천되어 버리기 때문에 먹을 수 없게된다.
이러한 감 꽃,진달래 꽃, 찔레순(기타 삐삐풀 등 여러종류가 있지만 일일이 이름을 기억할 수 없어 나열하지 못하였음)을 뜯어 먹고 어느정도 배가 차면 앞이 터진 바지(당시 남자 어린아이옷은 앞이 터진 바지가 많아 거기가 노출 되는경우가 흔히 있었음)를 하나 걸치고 언덕이나 잔듸위에 누워서 공상도 하고 노래도 불렀는데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 꽃 살구 꽃 아기 진달래"......하면서 "고향의 봄"노래를 주로 불렀지만 7회 구연오는 유행가 노래를 어디서 배웠는지 곧잘 불러 "단장의 미아리 고개"를 멋드리지게 부르기도 했다.
그래서 인지 지금도 구연오(7회)는 소꼽친구들과 1년에 한번씩 만나는 날에는 당시의 가락을 살려 노래를 잘 부르는 편이다.
이렇게 한바탕 놀고는 귀가할 무렵쯤 되면 다시 감나무 밑으로 가서 감 꽃을 주어 꽃대궁을 만들어 목에다 주렁 주렁 걸고 개선장군처럼 귀가하였던 당시의 동심은 지금 생각하면 그야말로 천진난만하고 순진하였던 아름다운 추억이라 여겨진다.
최근에 공직에서 정년 퇴직후 어린시절에 간직했던 북당골(갓골짝)의 뻐꾸기 울음소리를 다시 찾아 보려고 시도해 보았으나 지금은 밀림지대로 변화가 되어 있었고 당시 눈을 감고도 갈 수 있었던 북당골(갓골짝)의 때묻은 오솔길은 흔적조차 찾을 방법이 없을 정도로 변해 버렸다.
또한 남성동마을에서 하양장터까지 굽이 굽이 아름다움과 즐거움이 가득배인 발자취의 오솔길은 이제 역사속 발자취로만 남게 되었으며 다시금 북당골(갓골짝)의 버꾸기 울음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어 안타까울 뿐이다.
[종달새 둥지가 많았던 진둥산]
남성 마을의 형성구조는 윗마을과 아랫마을로 구분이 되어있는데 윗마을 가운데에는 소가 누워서 쉬는
형상을 한듯한 모습을 가진 "진둥산"이 하나 있다.
진둥산도 키가 작은 소나무가 간혹 있을 정도로 민둥산이긴 하지만 그래도 장끼(보통 숫 꿩을 "장끼"라 불렀음)의 울음 소리도 간혹 들리고 높은 하늘에서는 종달새(또래들 사이에는 종달새를 "노고지리"라고 부르기도 했음) 소리가 항상 들을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언제나 종달새는 유난히도 높게 날면서 노골~노골~ 종알~종알 ~소리를 하였으며 여름이면 이들도 번식을 위해 둥지를 만들어 알을 낳아 품기도 했다.
이러한 종달새 둥지는 보통 사람들의 눈에 쉽게 나타나지 않도록 은폐를 위해 잔듸와 할미 꽃 사이의
풀숲에 땅을 약간 동그랗게 판후 둥지가 만들어져 있는것이 보통이었다.
둥지 하나에 보통 5-6개의 알을낳아 품고 있는데 알에서 어미가 될때까지는 60%정도가 살아남고 남어지는 알에서 깨어나 성장과정에 여러가지 자연재해로 인해 죽게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철부지 또래들은 꼴망태을 울러메고 먹을 것를 찾아 다니다가 이러한 종달새 둥지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만큼 종달새가 많았고 번식도 많았던것 같다.
이러한 둥지를 발견하게 되면 또래보다 몇살 더 많은 형들이 종달새 덧(가느다란 실을 이용하여 종달새 어미가 알을 품기 위해 들어갈때 목이 졸려서 날아가지 못하게 만들어진 덧)을 만들어 주면 둥지 주변에 풀잎 등으로 은폐시켜놓고 어미 종달새가 들어갈때까지 숨어서 기다리다 어느순간 덧에 걸리면 뛰어가서 목에 걸린 실을 재빨리 풀어 주어 질식사가 되지 않도록 조치한후 사로 잡기도 했다.
이렇게 잡은 어미 종달새를 집으로 가져와서 방안에 두고 키우기도 했지만 야생조류이므로 인해 좀처럼
사람이 주는 먹이는 전혀 먹지 않고 2-3일 지나다 보면 굶어서 죽는것이 일 수 였다.
지금 생각하면 야생조류가 번식을 위해 둥지를 지키는 어미를 잡았으니 철부지이긴 하였지만 잘못된 행동들이었다고 여겨진다.
당시는 종달새가 많아 하루에 또래들이 하루에 한 두마리씩 잡았어도 지속적으로 번식이 되었는데 언젠가 부터 민둥산에서 숲으로 변형이되는 과정에 종달새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볼 수 가 없게 되었다.
고향을 찾을때 마다 그 당시의 종달새 소리를 듣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은 하였지만 멸종이 되었는지 어린시절 보았던 종달새는 더이상 볼 수 가 없었다.
[콩 서리와 밀 서리에 얽힌 추억]
60년대 초반까지만해도 밭농사에는 주로 콩,밀, 목화,메밀,고추,감자,부초(경상도 영천에서는 "정구지"라고함)등을 많이 심었고 일부지역(주로 모래가 많은땅)의 경우 땅콩을 재배하는 곳도 있었다.
한 여름이 지나고 초가을쯤 되면 필자의 또래들이 꼴망태를 메고 몰려 다니면서 콩 서리와 밀 서리를 자주 하였던 기억이 난다.
밭 주인장 몰래 영걸어 있는 콩이나 밀(밀가루 원료)을 뽑아서 소나무잎(남성마을에서는마른 소나무잎을 " 갈비"라고 하였음)이나 나무토막을 모아 모닥불을 피운후 콩,또는 밀을 그 모닥불위에 얹어두면 열에 의해 익혀지게 된다.
화력이 좋으면 콩이나 밀이 새까맣게 타버리기도 하지만 능숙한 또래들은 먹기 좋도록 익히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가 않았다.
모닥불에 의해 익혀진 콩이나 밀은 또래들이 둘러 앉아서 열심히 까먹다 밭 주인이 나타나면 재빠르게 도주하였지만 동작이 느린 일부 또래는 결국 주인장에게 잡혀 혼줄이 나는 경우도 있었다.
주인이 나타날시 도주하는 경로도 사전에 정해져 있기 때문에 한동안 도주를 한 또래들은 정해놓은 계곡 모퉁이에 자연스럽게 다시 집결이 되는데 입술 주변에는 콩과 밀을 먹다 뭍혀진 새까만 검정이 칠해져 있어 서로들 쳐다보고는 배를 움켜쥐고 웃었던일들도 있었다.
이러한 밀 서리와 콩 서리를 한후 날이 어두워져 집으로 돌아갈때는 흔적을 없애기 위해 연못가에서 일제히 세수를 하고 그런일이 없었다는듯이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성격이 까다로운 밭 주인은 집까지 찾아와 혼줄을 내고 돌아가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부질없는 행동이었지만 당시 모닥불에 의해 살짝 익혀진 콩이나 밀을 먹을 당시 졸깃하면서도 구수한 맛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추억의 한장으로 남겨져 있다.
[대창천에서의 홍수와 얼음치기]
대창천의 발원지인 치산계곡에등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이 하류로 내려오면서 많은 물들이 유입되어 강을 이루게 된다.
이러한 대창천은 대창면소재지를 거쳐 강회동앞과 섬들앞을 지나게되며 계속하여 아래로 흐르면서 남성동과 삼호동사이를 지나 강정앞을 통과 하고 신대동앞을 지난후 하양근교에서 금호강과 합류되는 강이다.
문헌에는 대창천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곳 남성동과 삼호동 사이에 흐르는강을 남성마을 사람들은 남성천이라고 부르고 삼성마을 사람들은 삼성천이라고 보통 불렀던같다.
지금은 개발이 되어 제방도 쌓고 높은 교량이 만들어져 있어 차량도 다닐수 있도록 되어 있지만 필자가 창산국민학교에 재학시에는 항상 맑은 물이 흐르는 강으로 이곳에서 여름에는 수영도하고 물고기도 잡았던 곳이기도 하다.
그당시에는 지금처럼 제방이나 교량이 없었고 흐르는 물가운데에 큰 돌을 몇개씩 가운데 놓아 뛰어 넘는 소위 말하는 징검다리가 놓여 있어 남성동에서 다니는 어린이들은 모두 이 이징검다리를 이용하여 학교에 다녔다.
그러나 평소때는 학교에 다니는데 큰 문제가 없었지만 여름 장마철에는 산림녹화가 잘되어 있지 않은 탓에 항상 홍수가 년례행사처럼 발생하기도 했다.
어떤경우 상급생 형들과 손을 잡고 강하게 내려오는 흙탕물을 건너 학교에 가는날도 흔히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황토 흙물이 내려오는 그 강을 어떻게 건너 갔는지 믿어지지 않는다.
하루는 학교에서 수업을 하고 있을 동안 많은비가 내려 강물이 순간적으로 홍수가 나게 되어 남성동 학생들은 강을 건너지 못하고 물이 어느정도 빠질때 까지 기다리다 집으로 귀가 해야 하는데 일부 부모님들은 혹시 내 자녀가 잘못될까 걱정이되어 물이 빠질때까지 강가에서 기다리면서 손짓으로 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수신호를 해줄때도 있었다.
이렇듯 여름은 홍수로 어려움을 주었지만 겨울이 되면 대창천(이곳사람들은 남성천이라 불렀음)은 완전히 얼음판이 만들어져 삼호동,원기동(주로 섬들에 살고있는 또래들이었음),남성동 어린이들에게 일류 놀이터로 제공해준 곳이 바로 이 강(江)이다.
대부분 창산학교 재학생인 우리들은 집에서 만든 스케이트(Skate,철사를 나무에 둥여맨후 미끄러져 나갈 수 있돌록 만들어짐)를 들고 나와 얼음치기와 얼음위에서 팽이치기도 하였던 유일한 놀이터였으며 어른들 한테는 얼음구멍을 뚫어 동면을 취하고있는 물고기를 잡아서 즉석에서 메운탕을 만들어 먹기도 하였다.
요즈음도 남성천(문헌에는 대창천으로 되어있음)을 건널때 마다 발가벗고 멱감던 어린시절 그때를 회상하면서 강을 바라보았으나 그동안 여러차례의 강산이 변하였던 관계로 그 때 맑은 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거품을 내뿜는 오염된 시넷물이 조금씩 흐르고 있어 당시의 향수를 다시는 느낄 수 없게 되어 안타깝고 아쉽기만 할 뿐이었다.
사진제공 :남성동 윤희원(7회) <대창천(이곳사람들은 남성천으로불렀음))의 현재모습>
*대창천(이곳 현지민은 남성천이라고 부르고있음) 강물은 강정마을 앞을 통과하여 신대동앞쪽으로 흘러 내려가 하양근교에서 금호강과 합류되는 강임.
*사진설명: 지금은 사진에서 보이는것과 같이 남성교 교량이 되어있지만 60년대 초반까지만해도 이러
한 교량이 없었고,제방도 없어 징금다리를 이용 왕래 하였던곳이다.(강건너 마을은 삼호동이고 우측으
로 멀리 보이는 마을은 원기동 일부임)
[사라호 태풍의 비극]
1959년 국민학교 4학년때쯤인듯하다.
추석을 몇일 앞둔 어느날 앞이 보이지 않는 소낙비와 함께 천둥 번개가 무섭게 내려치던날 이엇다.
불빛이 번쩍 지나가면 잠시후 지지찍~ 하고는 쾅! 이어서 우르릉 우르릉~ 하고는 번쩍! 이렇게 연속된 번개에 의해 순간적으로 하늘을 찢어 놓은듯한 느낌이었다.
번개와 함께 많은 비가 내리니까 미꾸라지가 빗줄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다 앞마당에 떨어지는 광경도 그때 처음보게 되었다.
캄캄한 하늘에서는 연신 천둥번개 치고 있는동안 마당곳곳에서 미꾸라지가 펄떡거리거나 꿈틀거리며 기어다니는 광경도 보고 직접 잡아보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당시는 독한 농약을 사용하지 않아 논바닥이나 시냇물가에 가면 쉽게 미꾸라지를 잡을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미꾸라지가 서식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쉬지 않고 계속 내리는 비로 인해 초가집 담벼락에 진열되어 있는 빈 장독대에 물이가득차 출렁이기도했고 외양간에 묶여 있던 소도 놀라 허둥되고 있었으니 얼마나 많은 비와 천둥 번개가 동반하였는지 짐작되리라 생각된다.
이렇게 바람과 비를 동반한 사라호 태풍은 경상남도와 경상북도를 관통하여 많은 이재민과 이산가족을 만드는 비극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창산벌 주변에는 어느정도의 피해를 입었는지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고자 한다.
폭풍이 지나간 후에는 언제 그랫느냐는듯 고요한 기상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된다.그래서 태풍이 어느정도 그친 이튼날 오전 먹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지만 언제 그랫느냐는 듯이 하늘은 조용였다.
농업을 주로 하고 있었던 남성동 마을 어른들은 우장(비옷인데 보통볏집으로 만들었음)과 삿갓(비가오거나 햇빛이 강할때 사용하였음)을 착용하고 허물어진 물꼬를 정리하고 넘어진 나무를 일으켜 세우는 등으로 복구작업을 하였지만 미쳐 추수도 하지못한 벼농사는 태풍에 의해 물바다가 되어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한숨만 몰아쉬는 어른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아른거린다.
얼마후 남성천(문헌에는 "대창천"으로 기록되어있음)이 범람하여 온통 물바다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들려와 또래들은 남성천(대창천)이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도끼산 언덕(마을에서는 보통 "도끼덤"으로 불렀음)으로 올라가 보았다.
조그만하던 남성천(문헌 기록에는 대창천)이 그야말로 바다로 변해 있었다.
삼호 강정마을에서 남성마을입구까지 모두가 물속으로 들어가 버렸던것 같다.
지금도 남아있는 전 동창회장 조순 집(당시에는 과수원이었음)과 조만호네집(과수원 가운데 있었음)은 지붕만 보이고 모두가 물속에 잠겨 있었고 주변에 유유히 흐르는 황토물 가운데는 소 ,돼지,닭 등의 가축이 떠내려오는가 하면 뿌리채 뽑힌 사과나무와 떨어진 사과등의 과일이 무수하게 물과 함께 내려오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흐르는 물에 떠 내려보내는 과수원 주인이나 소,돼지의 주인의 마음은 얼마나 비통한 마음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때만 해도 철이 없었던터라 도끼산 언덕에서 유유히 흘러내리는 황토물만 바라 보면서 아픔을 함께하지 못했던 같다.
얼마후 겁이 없었던 또래들은 막대기를 하나씩 들고 도끼산 모서리에서 누런색갈의 황토물과 함께 흘러가는 사과를 건저내기 위해 안간힘을 기울였던 당시를 생각하면 사과 건저내는 것도 중요하였지만 정말 위험한 행동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요즈음은 땜공사가 잘 되어 있어 홍수가 조절이 되지만 당시는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그대로 흘러가가게 되었던 시절이라 비만 오면 홍수가 나지 않았나 하는 소견이다.
몇일후 바다를 이루던 대창천(현지민들은"남성천"이라 통용됨)의 물이 빠지고 학교에 등교하니 담임 선생님(박채현)께서 슬픔에 잠겨 한동안 말을 잊지 못하다가 안타깝게도 이번 태풍에 급우 한명이 실종되었다는 비보를 알려주셨다.
이 비보를 듣고는 심성이 착한 일부 여학생들은 슬픔을 이기지 못해 응~ 응~ 울기시작하자 이어서 선생님도 울고 급우들도 울어 교실안은 한동안 울음바닥이 된적도 있었다.
사라호 태풍으로 실종된 급우(정확하지는 않으나 김인환으로 기억됨)는 신대동 아래에 있는 영천동 갯벌에서 과수 농사를 하는 큰집에서 생활하였던 것으로 회상이된다.
나중에 신대동 급우들과 섬들에 살고 있는 급우들로 부터 듣게된 이야기지만 신대동 갯벌도 완전히 물속에 잠수 되어 바다를 이루었다하였고 섬들의 강주변에 있는 과수원들도 모두 물속에 들어가 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다.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당시 희생된 고인에게 이지면을 통해 머리숙여 명복을 빌어본다.
여기서 사라호 태풍의 위력이 어느정도였는지 독자(동문)들의 이해를 돕기위해 사라호 태풍관련 문헌을 인용하여 잠시 소개하고자 한다.
사라호 태풍에 관해 기록된 문헌(네이버 백과)에 의하면 1959년 9월 15일 서태평양 사이판섬 해역에서 발생해 일본 오끼나와를 거쳐 9월17일 한반도 남부(경상남북도)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다음 날 동해로 빠져 나가 소멸한 태풍으로 최대 중심 풍속은 초속 85m, 평균초속은 45m,최저 기압은 952hpa(핵토 파스칼)을 기록하였다고 한다.
이는 1904년 한반도에서 기상 관측이 시작된 이래 가장 규모가 큰 태풍으로 강풍에 폭우까지 겹쳐 해안 지역에서는 강력한 해일이 일어나고 강이 역류해 남부지방 전역의 가옥과 농경지가 물에 잠겼다.
곳곳의 도로가 유실되고 교량이 파손 되었음은 물론, 막대한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가 발생하였다.
피해 규모는 사망.실종 849명, 이재민 37만 3459명이 발생하였고 선박 파손 1만 1704척 등 총 1900억원 (1992년 화폐가치기준)의 재산피해를 발생한 태풍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사라호 태풍의 영향으로 보릿고개가 더욱 심화 되었지 않았나 하는 막연한 생각도 해본다..
사진제공 :남성동 윤희원(7회) <강정마을 앞으로 흐르는 대창천(현지에서는 "남성천"으로통용)>
*사진설명: 사진의 가운데 교량은 남성교(南星橋)에서 100여m 하류에 있는 삼호동(강정마을)과 남성동
으로 연결한 강정교 교량이며 왼쪽에 보이는 산이 도끼산,우측마마을은 강정이고 멀리힌색으로 보이는
아파트 단지는 하양, 흐리게 보이는 높은산은 팔공산 줄기의 일부인것으로 보여짐.
*또한 1959년 사라호 태풍당시에는 사진에 보이는 하천이 범람하여 이곳부터 좌측에 있는 남성동입구
까지 전역에 완전 물바다가 되어 많은농가를 페허로 만들기도 했지만 오늘의 남성천(문헌에는 대창천
으로 기록되어있음)은 너무나 평화스럽게 보이기만 한다.
*또래들은 사진에 보이는 도끼산에서 소,돼지,닭,사과나무, 사과,가옥등이 황토흙물과 함께 떠 내려가
고 있는 것을 목격 할 수 있었던곳이다.
[보릿고개 밑에서 울었던 그날]
고향을 떠난지도 벌써 40년이 조금 더 넘었으니 강산이 4번이나 변한 것 같다.
그동안 수시로 고향을 찾아가곤 하였지만 고향의 옛 모습은 거의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하고 있었다.
옛날에는 모두가 민둥산으로 가끔씩 소나무가 몇그루 있었는데 지금은 당시의 오솔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울창한 잡목이 우거져 밀림지대로 변해 있다.
필자는 고향을 찾을때 마다 대동한 가족과 아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자주 해주곤 했다.
"나는 고향 마을에서 보릿고개를 배웠고 또 보릿고개를 알게 되었다"
처음엔 가족이나 아이들이 무슨말인지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아 다시 이렇게 설명하였다.
보릿고개는 결코 자랑할 것이 못 된다. 그렇지만 그러한 보릿고개라는 말이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되었는지 이해는 해야한다.
보릿고개는 가을에 추수하여 거두어둔 양식이 겨울이 지나고 봄이되면 거의 대부분 바닥이 난다.이 때 부터 산나물을 뜯어다 멀건 죽을 쑤어 연명을 해야 하는집이 한 두집이 아니었다.
일부 가정에서는 지금의 돈이자처럼 내년도 농사를 지어 원금과 이자를 갚겠다는 조건으로 부유층의 양식을 빌려서 먹기도 하지만 대부분 가정에서는 빌린 양식을 갚을 수 있는 능력이 되지 않아 그렇게도 할 수 없는 가정이 많아 오르지 자연을 이용하여 먹을것을 해결해야 하는 시절이었다.
지옥이 따로 없었던 시절이 바로 그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먹을 것이 없어 철부지 또래들은 낫을 하나들고 산으로 들로 뛰어 다니며 칡도 캐어먹고, 물기가 막오른 소나무 새순껍질도 벗겨 먹기도하고 봄
에 잔디사이에 올라오는 짠데기(지금은 약초로 쓰이는 뿌리)를 캐어 먹는등으로 끼니를 해결하기도하였으나 충분한 영양공급이 되지않아 마침내는 영양실조에 의해 피부에 버짐이 일고 누런 콧물을 길게 달고 다니기도 했지만 즐거워하는 천진스러운 낭만은 그래도 항상 간직하고 있었던 같다.
이때 어른들은 자녀들에게 하나라도 더 먹이기 위해 굶거나 산나물,들나물,콩잎,쑥나물,보리싹 할것없이 죽을 끊여 먹다보니 얼굴 색갈이 누렇게 변하는 영양실조에 걸린이도 한둘이 아니었던 것 같다.
어느날인지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배가 고파 견디지 못해 동생 수만(9회)이와 함께 깡통을 하나들고 이웃 강정마을에 밥 동냥을 하러갔는데 집안에 있는 큰개가 거지가 왔다고 왜 그토록 멍멍짓어 되었는지 겁이 왈칵나서 들어가지 못하고 한없이 눈물을 훔치며 돌아서야 할때도 있었다.
이땐 동생 수만(9회)이는 많이도 울었고, 산천 초목도 울었고, 나도 한없이 울었다.
그 때 흘린 눈물은 슬픔의 눈물도 아니었으며, 기쁨의 눈물도 아니었다. 그냥 목이 메여 흐르는 눈물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어쩌다 조금 동냥을 받은 밥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배고픔에 견디지 못해 차디찬 겨울 찬바람이 몰아치는 논 두렁에서 손으로 모두 집어먹고는 집에돌아와서 할머니 한테 하나도 얻지 못했다고 거짓말을 하였던 것은 지금도 생각하면 너무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가슴아픈 사연들이라 여겨진다.
어릴때의 개에 대한 충격이 잊혀지지 않아 지금도 필자는 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편이다.
이와같이 한창 먹어야 할 소년시절의 내게 있어 진실로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바로 배고픔이었다.
주린 배를 끌어안고 먹을것을 찾아 산과 들녘을 헤메였던 시기는 고통과 눈물이 동반된 보릿고개 시절이었지만 오늘날의 나를 만들어준 좋은 교훈이 바로 이 보릿고개에 있었다면서 강한 어조로 설명을하자 한동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내는 어느사이 눈물을 훔치고 있었고 잠자코 듣고만 있던 아이들도 이해를 하겠다는듯 고개를 끄덕인다.
이러한 보릿고개를 체험한 필자로서는 요즘 근심없이 살아가는 세대가 걱정이 된다.
너무도 쉽게 그리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신세대들이 과연 어려운 난관이 들어닥치면 인내력으로 이겨 낼 수 있을지 우려도 된다.
지금 우리는 참으로 잘 살고 있다.
고향에 돌아와도 타향에 가도 모두들 잘 살고 있다.
여행을 좋아하는 필자로서 지구상 어느나라를 다녀 보아도 우리 처럼 그렇게 잘 사는 나라도 그리 많은 것 같지는 않다는 느낌도 가져보았다.
그러나 이렇게 잘 살수록 우리는 옛날을 잊지 말아야 한다.
보릿고개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다시한번 힘주어 강조 하고싶다.
요즘 신세들은 보릿고개라는 단어를 잘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
보릿고개 이야기를 하면 무슨 고개이름이냐고 반문한다.
그럴수 밖에 없는 것이 보릿고개를 격어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르기 때문이다.
필자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느낀 사항이지만 경상북도쪽이 유독 보릿고개가 심했던것같다.
왜냐하면 경상북도지역은 토질이 그다지 좋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경기도,충청도,전라도등을 둘러보면 모두가 옥토이고 평야이다. 이러한 곳에서는 보릿고개라는 단어는 생소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게 하였다.
불행하게도 경상북도중에서 영천쪽은 대부분 산간지역이고 토질도 좋지 않아 지형적인 조건의 영향을 많이 받아 더욱 혹독한 보릿고개를 체험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러나 보릿고개라는 단어는 당시에는 많은 눈물을 동반한 고통이었지만 분명 나에게 꿈과 용기를 주고 이상을 실현케 해준 좋은 밑거름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호롱불(석유등잔)의 추억]
국민학교 졸업할때 까지만해도 학교는 물론 삼호,신대,오계,원기,남성동에는 전기가 없었다.
지금의 형광등 역활은 석유에 기름을 넣어 심지를 만들어 그 심지에 불을 붙여 불을 밝히는 호롱불(또는 "석유등잔"이라고하였음)을 사용하였던 시기였다.
필자가 자란 남성동 마을의 경우 대부분 호롱불(아래 사진에서 보는것처럼 사기로 만들어졌음)을 사용하였지만 일부에서는 램프를 사용하는 집도 간혹 있었다.
램프는 불을 밝히는 원료로 사용하는것은 호롱불처럼 석유이지만 불을 밝게하는 심지가 호롱불 보다크게 생겼고 테두리에 유리로 되어 있어 호롱불보다는 불빛이 밝은 편이었다.
다시 말하면 램프는 호롱불(석유등잔)보다 한단계 업 그래이드(Up grade)된 것으로 보면 된다.
그러나 이러한 호롱불도 마음껏 사용할 수 없었던것이 당시에 전반적으로 가난한 농촌의 실정으로 인해그야말로 석유를 구입할 수 있는 돈이 없었던 탓이었다.
그래도 금호장날 쌀 몇 되박을 팔아 석유를 구입하여 흙벽돌로 만들어진 초가집의 고요한 방에서 호롱불을 밝혀 큰소리로 책을 읽으면서 순수하고 천진스럽게 지낸 시절이 이제 한페이지의 추억으로 남아 있을뿐이다.
바둑아! 바둑아! 이리와 ! 하면서 말이다.
호롱불(등잔불)의 모습(호롱에 석유를 담아 심지로 불을 밝혀 사용하였음)
*사진은 당시 사용하였던 동일한 모형인데 "호롱불"에 대한 이해를 돕기위해 한국민속촌에서 촬영된 사진을 게시하였음
[내 인생의 값진 밑거름이된 남성동]
문헌(http://tour.yc.go.kr/ 영천시 홈피)에 의하면 남성동의 유래는 약 400년전에 파평 윤씨(坡平 尹氏)가 정착하면서 부락을 이루기 시작한것이 오늘날까지 맥을 이어져오고 있는 마을로 기록 되어있다.
이러한 유래를 가진 남성동 마을의 지형을 주의깊게 둘러보면 주변에 야산이 병풍처럼 둘러쌓여 있어 어떻게 보면 대형바구니에 묘목을 심어 놓은 듯한 모양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음을 느끼게 한다.
또한 창산국민학교 학군(신대동,오계동,원기동,삼호동,남성동)중에서는 가장 산골마을로 알려져 있는 곳이기도하다.
이처럼 지형의 특색을 가진 산골마을 덕택으로 마을 가운데에는 여름이나 겨울에도 항상 시냇물이 흘러내렸기 때문에 동네 아낙네들은 이곳에서 빨래를 하곤하였다.
또래들은 흐르는 냇가의 빨래터에 앉아서 학교에서 배운 동요 를 부르면서 꿈을 키우기도 한곳이다.
"졸~ 졸~ 시냇물아 어디로 가니 넓은세상 보고싶어 강으로 간다"
"강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넓은세상 보고싶어 바다로 간다"
내 인생에서 밑거름은 뭐니 뭐니 해도 어린시절 자연과 더불어 생활하면서 주변환경에 잘적응하여 모든 어려움을 이겨낸것이 그래도 가장 값진 밑거름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그 과정에서 잊지 못할 한가지는 당시의 환경이 학업보다는 농사일을 도와주는 것이 우선순위가 높았기 때문에 여름이 되면은 또래들과 꼴망태를 울러메고 소를 몰고 산에 오르는 것이 거의 일과였다.
그때는 가정마다 소1마리씩은 키우고 있었는데 재산목록 1호이기도 하지만 농사를 하려면 필수적으로 소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소를 기르지 않는집은 거의 없었다.
지금은 울창한 숲으로 변했지만 그당시에는 민둥산으로 인해 소를 몰아 산에오르게 되면 풀냄새,종달새소리, 물소리,나의 발자국소리, 티없이 높고 푸른 하늘의 맑은 공기를 마음껏 마시며 자연 생태계와 더불어 생활을 하면서 작은 우리들의 꿈을 키울 수 있었던 모든것들이 오늘날 내 인생을 품위있게 유지할수 있도록 만들어준 값진 밑거름이 되었던 같다.
지금 생각하면 현대사회는 구조적으로 복잡하고 기능적으로 다양하기 때문에 기본적인 법과 규칙,그리고 건전한 상식으로 해결하기 힘든 문제들이 일상적으로 수없이 발생하고 있지만 순수하고,소박하게 살아갈 수 있는힘 즉, 앞에서 언급된 동요와 같이 시넷물이 모여 강물이 되고 ,강물이 모여 바닷물이 될수 있는 밑거름을 만들어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민둥산에서 숲으로 변천된 남성동마을 전경(2007년 9월촬영)
["펑티기" 아저씨와 어릴적 설]
설남이 가까워 오면 1주일정도 전부터 어디서 오는 아저씨인지는 모르겠으나 털모자를 깊숙히 눌러쓰고 마을의 양지바른 곳이나 길목에서 한몫을 보는 "펑티기" 아저씨가 어김없이 나타난다.
물론 금호장터나 하양장터에가도 쉽게 이들을 만날 수 있지만 설날이 임박해 지면 "펑티기"아저씨는 마을 단위로 순회하면서 일을 하는경우가 많았다.
왜냐하면 설날에 필수품인 강엿(엿콩)을 만들려면 "펑티기"가 반드시 필요한 재료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펑티기"라는 말은 달구어진 쇠붙이 통에 쌀을 넣어 어느정도 열이 가해지면 "펑티기 "아저씨가 기계를 조작하여 압축을 이용해 팅겨 나올때 펑~ ~ 하는소리와 함께 뿌연한 스팀(Steam 수증기)이 주변을 덮게하는데 이 때는 동네 꼬마들이 귀를 막고 한쪽으로 피해 있다가 펑~ 소리와 함께 덮여있던 수증기가 사라진후 다시 모여서 보면 어느새 자루에는 따근한 "펑티기"가 가득하게 되어 있었다.
다시말해 쌀 반되박만 주어도 자루에 한포대가 될 수 있도록 몇배로 부풀게하여 주는 것을 "펑티기" 라고하였다.
이러한 "펑티기" 아저씨가 마을 모서리에 나타나는 날에는 동네 꼬마들이 둘러모여 한번씩 펑~할때마다 나오는 튀밥 일부를 얻어먹기도 하였던 같다.
마을 아낙네들이 이렇게 하여 만든 "펑티기"는 한자루씩 집에 들고 가서 엿을 이용하여 강정(마을사람들은 보통 "엿콩"이라 불렀음)을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로 사용하였다.
먼저 "펑티기"아저씨가 설의 전초전 분위기를 만들어 놓으면 우리 꼬마들은 그날로 부터 설날까지 손꼽아 기다리는것은 당시 또래는 거의 같은마음이었다.
설날을그토록 기다렸던 근본적인 이유는 그날(설날)은 배불리 먹을 수 도 있고 새로운 옷을 한벌 입을 수 있는 계기가 되니까 말이다.
설날이 되기 2-3일 전날쯤이면 설날에 사용할 음식을 집집마다 준비하게되는데 가장 먼저 만드는 것이강정(엿콩)을 만들기 위해 사용되는 엿을 달이게 된다.
엿물의 기본재료(엿기름 등)를 가마솥에 넣고는 아궁이에 장작불을 넣어 활활타게 하여 한동안 달이면 가마솥에서는 펄펄 끊었던 엿물이 커피(Coffee)색으로 변하면서 점차적으로 엿이 만들어지게된다.이렇게 만들어진 엿을 이용하여 펑티기 아저씨가 만들어준 쌀강정도 만들고,검정콩이나 깨를 볶아 콩강정과 깨강정도 만들었다.
이렇게 만든 여러종류의 강정은 소쿠리에 수북이 담아두었다가 설날 차례상에도 사용하고 집에 세배를 하러오는 손님들에게 접대하기도 했다.
이러한 강정(엿콩)만들기가 끝나고 설날 하루전날 정도가 되면 일부 여유가 있는집에서는 쌀을 물에 담구어두었다가 쪄서 앞마당에 떡판을 놓고는 힘있는 장정들이 길게 달린 떡매로 사정없이 내려치면 철컥 ~ 철컥~ 소리와 함께 떡판에선 김이 무럭무럭 올라오면 구경하는 우리꼬마들은 군침을 흘리다 조금씩 얻어 먹기도 했는데 그 맛을 생각하면 다시금 향수에 젖게한다.
떡치는 소리뿐만 아니라 대부분 집에서는 가마솥 뚜껑을 꺼꾸로 뒤집어서(지금의 후라이판<Fry pan>의 대용으로 사용되었음) 파전등 각종 전을 부치기도 하였는데 마을은 온통 음식냄새로 가득하기도 했다.
설날에는 마을 사람들은 조상들에게 차례를 지내게 되는데 마음속으로 차례가 빨리 끝나도록 기다리다 차례가 끝나기가 무섭게 새로운 옷을 갈아입고는 또래들에게 자랑을 하기위해 동네밖으로 뛰어나가기도 했다.
그때부터 이제 정말 설이구나 하는 실감을 하며 아궁에서 타오르는 불처럼 우리들의 마음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던 같다.
왜 ㅡ그토록 좋아했는지 이글을 쓰면서 회상해 보아도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지금 생각하면 철부지 우리들은 설날을 손을 꼽아 기다리기도 했지만 아마 어른들은 걱정이 많았으리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돈은 없는데 아이들 옷한벌 사야지 제사상을 준비해야하는 등으로 근심거리가 한두가지가 아니었었리라 여겨진다.
그런데 지금의 설날은 어떤가?
뼈저린 고생이 없이 자란 신세대들은 설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아이들도 없지만 식료품상에는 다 만든 강정이 쌓여 있고, 다 만들어진 힌떡도 돈만 주면 얼마든지 구입할 수 있는 참으로 편리한 세상이 되었다.
이처럼 사서 입히고 사서 먹이는 편리한 세상으로 변화함에 따라 이제 더이상 동네마을 아낙네들의 정성이 담긴 솜씨나 노력으로 만들어진 강정을 맛 볼 수 없게되었고 아름답고 순박하였던 생활자체가 잃어가고 있는듯한 느낌이 들어 한편 안타까운 마음 뿐이다.
새삼스럽게 옛날의 재래식 삶을 미화하는냐고 반문하는이도 있겠지만 그러나 당시 우리 아낙네(여성)들이 보여준 그 정성들이 삭막해져 가는 현재에 비해 그래도 진정한 행복과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고 힘주어 강조하고 싶다.
초례청(醮禮廳)"(혼례상)과 텐트(채알)
*사진은 한국민속촌 전통혼례식장에서 촬영
신부가 시집갈때 탄 가마 (사진은 한국민속촌 전통혼례식장에서 촬영한 사진임)
4.맺음말
창산벌에 자리잡고 있는 우리모교가 멀지 않아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시대변화와 함께 불가피한 과정이겠지만 모교가 없어진다는 것은 동문 모두에게 가슴아픈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창산인 모두의 추억의 장소였던 창산초등학교가 없어진다는 것은 창산동문에게는 가장 소중한 것을 잃게되었다는 쓸쓸함을 느끼게 하는 지금 이 순간이다.
한때는 600-700명의 학생이 재학하면서 번창 하였던 모교가 역사의 한페이로 장식하고 이제 이별을 고하지만 창산벌의 추억과 내고향 향기는 창산인 모두의 마음에는 언제 어디서나 간직하리라 여겨진다.
금년(2007년) 4월 창산동문회에서 주관한 총동창회체육대회시 학교에 가 보게 되었다.
옛날 내가 배우던 목조건물의 기와 교실은 모두 철거되고 새로운 시멘트 골격의 교사가 야트막하게 지어져 당시의 흔적은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오랫만에 방문한 모교였기에 시간을 내어 후배들이 공부하는 교실에 들어가 의자에 앉아보기도 하였는데 책상도 없었던 당시와 비교해 보니 너무나 좋은 환경으로 변해있었다.
책걸상은 물론 컴퓨터등 각종 교보재 시설이 잘 갖추어진 이러게 좋은 환경에서 후배들이 공부를 한다고 생각하니 흐뭇한 마음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어서 옛추억을 되살리면서 학교주변을 둘러보게 되었은데 나무 한 그루 돌맹이 하나 향수를 자아 내지 않는 것이 없었지만 유독 옛날에 성황을 이루었던 학교앞 구멍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추게 하였다.
비닐봉지에 들어있는 오랜지 쥬스를 사먹던일,눈깔 사탕을 하나 구입하여 녹지않고 오래동안 먹기위해 입안에서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던 일들이 활동사진 필림처럼 떠 올랐다.
그러나 당시 문구류와 눈깔사탕 판매등으로 대성황을 이루었던 가게는 이제 폐가(廢家)로 되었는지 허물어 질듯하였고 가게집 바로 뒤편에 두레박으로 물을 길러 먹었던 우물터는 어디쯤인지 조차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흔적자체를 거의 찾아 볼 수 가 없었다.
이러한 아름다운 "추억의 장소"들이 시간의 경과에 따라 하나둘 속절없이 사라져가고 변화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더불어 창산인의 일원이었던 필자의 정서도 변화된 창산벌을 바라보며 이제 지나간 모든 흔적들은 추억으로만 간직 해야만 했다.
따라서 지금까지 공직에 재직하는 동안 무엇이 그다지 바쁘게 하였는지 뒤를 돌아볼 여가 없이 앞만보고 달리다 보니 항상 마음속에는 창산벌 관련 이야기를 한번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고 이런 저런 이유로 생각으로만 그치는 일이 여러차례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오던중 다행히 창산카페에 "추억의 창산벌"코너가 신설됨에 따라 평소 꼼꼼히 메모해 간직해 두었던 소재를 토대로 하여 어린시절 뛰어놀던 창산벌에 관한 여러가지 추억들을 글로 표현할 수 있게 되어 개인적으로도 큰 영광이라 여겨진다.
끝으로 글을 쓰면서 한가지 아쉬운 것은 당시에는 요즈음과 같이 디지탈 카메라( Digital camera) 시대가 아니라 사진기 자체가 보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현장사진 촬영이 된 자료가 없어 함께 제공하지 못한점이 못내 아쉽기만 하고 안타깝기만 할 뿐이다.
그러나 당시 현장사진은 아니지만 일부 동문이 협조해준 사진과 민속촌등에서 수집한 여러가지 모형 사진들을 최대한 활용하여 이해를 돕도록하는데 노력을 게을리 하지않고 최선을 다 하였음을 알려둔다.
아무쪼록 이글이 당시의 창산벌을 조금이라도 회상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이다.
아울러 "창산벌 추억"이란 글을 작성할 수 있도록 아낌없는 지원과 자료수집에 성의를 다해 협조해준 8회 최순옥 동기와 아직도 남성동 고향마을을 지키고 있는 7회 윤희원 선배님께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하고자 한다.
글쓴이 창산8회 고성관
*2007년 4월13일 창산동문회체육대회시 후배들 교실에서
*이글을 읽고 참고 될만한 사진을 소장하고 있는 동문이 있으면kosungkwan@naver.com 주소의
메일로 보내 주시면 많은 도움이 되겠읍니다.감사합니다.
첫댓글 이 글을 만드신~선배님께 항상 감사함을 전하며...
내가 세네번이상 계속 보아도 추억어린 교정이 늘,변함없기에~그 그리움은 가슴깊이 새겨 지는 듯..ㅎ
친구들도 아마,나와 같은 마음 일런지...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