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회 선교사 프란시스 사비에르와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를 통해 본 임진왜란!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가 쓴 “일본사” 는 “임진왜란” 에 관해 상세히 기술하고 있는데
그 전에 자퐁(Japon 일본) 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1271년 부터 1295년 까지 중국을 여행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치핑구(지팡구)” 라고 나온게 처음으로.... 원나라가 1274년과
1281년 일본 원정에 실패한 후에 저작되었으니 치핑구는 금이 가득한 엘도라도로 묘사됩니다.
“치핑구는 육지에서 동쪽으로 해상 1500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섬이다. 매우 큰 섬이고, 주민들은 피부가
희고 깨끗하며 잘생겼다. 우상숭배자들이고, 다른 어느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고 자기들끼리 독립해
있다. 또한 여러분에게 말하건대 그곳에서는 헤아릴수도 없이 많은 금이 나기 때문에 황금이 대단히 많다”
위의 내용은 수백년간 유럽에서는 일본에 대한 유일한 묘사로 유럽인들의 상상력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쳤는데... 16세기에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아시아 무역항로를 열고 무역 거점을
확보해 일본인과 접촉하게 되면서, 1512년부터 포르투갈의 무역거점 말라카에서 활동한
상인 토메 피레스(Tomé Pires) 의 “동양에 대한 보고” 에 일본인에 대한 묘사가 다시 나옵니다.
얀 후스에 이어 마틴 루터와 칼빈등 종교개혁으로 가톨릭 세력이 줄어드니 종교재판으로 프로테스탄트
를 뿌리뽑아 없애려 했던 도미니크 수도회도 성과가 부진하자... 식견이 뛰어난 이그나티우스
로욜라는 교황을 알현해 세상의 종교를 교황청 중심으로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청빈과
독신으로 예수를 닮겠다고 서약한 프란시스 자비에르 등과 1539년에 “예수회(Jesuite)” 를 창설합니다.
토메 피레스가 일본인을 묘사한지 30여년이 지나 인도 고아에서 말래카를 거쳐 1549년에 일본에
온 첫 예수회 선교사는 프란시스 자비에르 이니 규슈 가고시마에는 자비에르 공원 ザビエル
公園 이 있고 공원 안에 일본에 최초로 "천주교를 전파한 자비에르" 를 기념하는 성당이 있으며
또 야마구치시에도 기념비와 성당이 있고 그 외에 시모노세키시 항구에도 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 Α-Ω 알파에서 오메가“ 라고 적힌 비문은“聖 フランシスコ サビエル 下関上陸記念碑” 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데.... 예수회 소속 신부 프란시스코 자비에르는 인도 고아에 파견되어
전도를 하다가 말레이시아 말래카의 저팬타운에 거주하던 일본인 안지로 를 만나 전도
를 하고는..... 인도 고아에 보내 신학공부를 시키면서 일본 포교에 대한 가능성을 확인합니다.
안지로를 성바울 대학에 보내기 수십년전 말래카에 거주하던 “베르나도” 로 알려진 일본인
이 최초로 유럽에 가서 대학공부를 하고 교황 바오로와 이그나시오 로욜라를 만났으며
그후 1557년에 포르투갈 코임브라에서 죽었고, 1582년에는 기리시탄 영주들인 아리마
하루노부 와 오무라 및 오토모 요시시게 등이 4명의 "덴쇼 소년 사절단을 로마" 에 보냅니다.
조선인들은 500년간 단 한척의 무역선을 띄우지 못하고 단 한명의 상인도 자율적으로 해외로
나가지 못했지만..... 일본인들은 임진왜란 이전부터 무역선을 타고 중국 영파와 필리핀,
베트남의 호이안과 캄보디아, 태국의 아유타야와 인도네시아 및 말레이시아의 무역항
말래카에 저팬타운을 건설하고 무역에 종사했으니 예수회 선교사를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조선은 나라에서 쇄국정책을 실시한 탓도 있지만 또 “효” 의 나라라 외지에서 부상을 당해
부모님 걱정끼치는걸 큰 불효로 생각했으니... 때문에 무역도 중국에 사신이 갈때 연줄을
잡아 많은 돈을 내고 상인으로 따라가는데, 화물의 종류와 수량등 국경 및 사신의 엄격한
통제하에 있었으며..... 북경 사신관 마당에서 찾아온 중국 상인과 거래하는게 전부였습니다.
프란시스 자비에르등 예수회 수사 3명과 세례받은 일본인 3명등 6명 일행이 말래카에서 배를 타고
안지로의 고향 규슈 가고시마 에 도착한 것은 1549년 8월 이니, 먼저 가고시마에서 안지로의
친척들에게 포교를 한 것을 시작으로 1549년 9월 자비에르는 이찌우지 성에서 타카히사 성주를
만나 천주교를 전도한후 북쪽 규슈 센다이로 가서 포교활동을 해 100명의 예수교인을 확보합니다.
1550년 7월 금지령이 내려 나가사키현 히라도로 쫃겨난 후에 교토로 가기 위해 후쿠오카를 거쳐서
시모노세키에 상륙한후 야마구치 (山口)에 갔는데 나가토와 히로시마등 6국은 백제 성왕의
셋째아들 임성태자의 31세손인 오우치(大內)씨 영지 였으니 프란시스코 자비에르는 다이묘
오우치 요시타카에게 화승총을 바친후 빈 절을 하사받고 예수교 전도에 대한 편의를 제공받습니다.
프란시스 자비에르는 야마구치에 몇달동안 머물면서 길거리에서 포교를 한 결과 무려
500여인에게 세례를 줍니다! 그러고는 1551년에 동양정신의 원천인 유교가
발생한 나라 중국 전도를 위해 일본을 떠나는데.... 하지만 중국에는 입국금지로
상륙하지 못하고 1552년 11월 27일에 광둥성 앞의 상치안섬에서 열병으로 죽었습니다.
자비에르가 떠난지 12년이 지난 1563년에 31세의 예수회 선교사인 루이스 프로이스 (Luis Frois)
는 요코세우라(横瀬浦, 나가사키현 사이카이시)에 상륙해 일본 선교 활동을 시작하는데 먼저
일본어를 배운 뒤, 1564년에 규슈 히라도에서 교토로 향했으며 1565년 1월 31일 교토에
입경해 가스파르 빌레라와 일본인 수사 로렌소 료사이(ロレンソ了斎) 등과 함께 선교 활동을 합니다.
루이스 프로이스는 1569년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으로 세우면서.... 세력이 커진
오다 노부나가와 교토 니조성 건축 현장에서 처음 대면하였는데 노부나가가 불교계와 사이가
나빠지자 노부나가의 신임을 받아 기나이에서 포교를 허락받고 선교사 오르간티노와 함께 선교활동
을 하여 많은 신도를 얻었는데 노부나가는 이교도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호의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후 규슈에서 선교했지만 1580년 순찰사 알레산드로 발리냐노의 일본 방문에 즈음해 통역으로
시찰에 동행해 비와호 아즈치성에서 노부나가를 배알했으며 1583년 예수회 총장의 명령
으로 선교를 떠나 일본 예수회의 활동사를 기록하는 일에 전념하였으니 이후 프로이스는
심혈을 기울여 일본 전국으로 견문을 넓혔는데 이 기록이 후에 “일본사" 라고 불리게 됩니다.
그런데 히데요시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잘 나가던 예수회의 선교사업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규슈를 정벌해 사쓰마(가고시마)의 영주 시마즈씨의 항복을 받은후인 1587년 션교사 추방령
을 내리면서 된서리를 맞는데, 예수회가 기리시탄 다이묘들에게 큰 영향을 발휘하는데 큰
위험을 느낀데다가 포르투갈인들이 일본인을 사서 노예로 전세계에 판다는 사실에 분노한 것입니다?
일본사에 보면 히데요시가 선교사 코엘류에게 힐문하는데 그 중에 “상거래를 위해서 온 포르투갈인
들이 일본인을 사들이고 그들이 조국, 부모, 자식, 친구를 잃고 노예가 되어 여러나라로 끌려가는
것을 알고 있다. 용서할수 없는 행위이니 너희 선교사는 인도와 그밖의 나라로 끌려간 일본인
들을 돌아올수 있게 조치하라. 불가능하면 현재 포르투갈인들이 구입해 있는 사람들이라도 풀어주라!”
오니즈키 히데아키의 저서 “천황의 로사리오” 에는 도쿠토미 소호의 저서 “근세일본국민사” 를 인용해서
천주교를 믿는 지방 영주들이 화승총이나 화약 또 그 원료인 초석을 구입하기 위해 여자들을 짐승처럼
서양인에게 팔아 넘기니 여자들이 울고불며 소리지르고 몸부림치니 참담함은 지옥과 같다고 적었습니다.
1582년에 기리시탄 영주인 아리마 하루노부, 오무라 및 오토모는 4명 덴쇼 소년 사절단을 로마에 보냈는데
1590년에 귀국해 순찰사 알렉산드로 발리랴노가 인도 부왕의 사절 자격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배알
할 때 함께 갔는데 네명의 소년들은 서양 악기를 연주하자 히데요시는 감탄해서 몇곡을 더 연주하게 합니다.
이 소년들이 쓴 기록에 보면 그들이 로마에 도착했을 때 “우리 일행 앞으로 지나가는 일본인
노예들, 소년 소녀들을 보았는데 싼 값에 가축처럼 팔려와서 짐승처럼 취급을 받는데도
우리나라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니 그저 분노하는 마음이 인다” 라며 경악했는데...
일본인 노예는 흑인의 3분지 1 가격이었기로 소년사절단이 싼 값에 팔렸다고 분노한 것입니다.
10년후 임진왜란때 수만명의 조선인이 잡혀가 일부는 나가사키에서 노예로 팔렸으니 메디치가의
집사인 피렌체 상인 프란체스코 카르레티가 한국 소년 다섯명을 마카오에서 흑인 노예의 7분지
1에 해당하는 헐값으로 사서는 인도의 포르투갈 식민 도시인 고아로 데리고 갔는데, 가격이
쌌던 것은... 한꺼번에 너무 많으 "조선인들이 노예시장" 에 풀려 공급이 수요를 초과한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도 고아에서 함께 여행중이던 아버지가 죽자 프란체스코는 인생무상을 느껴 4명은
풀어주고 5명중에 한 명만을 피렌체로 데려왔으니 이 아이가 바로 안토니오 꼬레아로
서양 "꼬레아성(姓)의 시조" 가 되었다는데..... 현재 이탈리아 남부 칼리브리아주
카탄자로 인근의 알비 Albi 시와 또 시칠리아섬의 콜레오네 시에 그 후손들이 살고 있습니다.
1608년에 네델란드 화가 피터 루벤스 가 코레오네인을 그렸는데 제목이 A manin Corean Costume 으로,
잡혀온지 10년이 흐른 이때 까지도 한복을 입고 있는 모습을 그렸으니.... 그림은 1983년 런던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드로잉 사상 최고가인 6억 5천만원에 미국 LA 폴 게티 미술관이 낙찰 받았습니다!
1992년 11월에 알비 Albi 시장 듀란테와 한국-이탈리아 협회장 안토니오 코레아 씨가 저 그림을 들고
서울에 와서는 할아버지를 찾겠다니 문화재청장 장경호 씨가 현지를 방문한 일이 있다고 하며 그외
시칠리아섬 팔레르모 남쪽에 콜레오네 Corlene 에도 안토니오 꼬레아의 후손들이 많이 산다고 합니다.
루이스 프로이스가 지은 일본사에 보면 1592년 4월 13일 왜군 선봉장으로 독실한 기독교도
기리시단에 속한 고시니 유키나가는 “흰 비단에 붉은색 십자가” 가 그려진 깃발을 앞세운
채 1만 8,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부산포에 상륙했으니.... 적국을 침략할 때 십자가 깃발 을
앞세우는 것은 십자군 기사 들과 템플 기사단이나 프리메이슨 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김훈도‘칼의 노래’에서 천주교도인 '고니시 유키나가' 의 부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부산에
상륙하여 동래성을 함락하고 조령을 넘어 북진했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는
줄곧 큰 깃발을 앞세우고 있었다. 붉은 천에 흰 글씨로 십자가가 그려진 깃발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원래 붉은 비단에 흰색 십자가 깃발을 사용했으나 1587년 금교령으로
대신에 1번 깃발을 사용했는데 아쉬운지 십자가와 천사의 나팔을 조합한 2번
깃발도 썼으며...... 3번 깃발은 사위인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가 사용했고, 4번 깃발은
마츠우라 다카노부, 5번 깃발은 아리마 하루노부로 모두 1군 소속 기리시단 다이묘 입니다.
왜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 는 1584년 영세를 받았으니 세례명 아우구스티노인데 아버지는 요나단
이고 어머니는 막달라이며 처는 쥬스타이고...... 대마도(對馬島) 도주인 소 요시토시(宗義智) 의
부인이 된 딸은 마리아 였으니 신앙심이 매우 독실 한 크리스찬 집안 으로 “믿음의 가족” 이었습니다.
개신교가 구태하고 부패한 천주교의 최대 경쟁자로 떠오르자 예수회는 일본을 선점하려고 했으니
프란시스 자비에르는 포르투갈 상인을 통해 일본에 조총(鳥銃) 을 전수했으며, 1600년
일본인 중에는 60만명의 천주교 신자가 있었고 조선을 침략한 15만의 왜군 가운데 상당수가
가톨릭 신자였으니 때문에 일부 역사학자들은 임진왜란의 배후에 천주교 예수회가 있다고 봅니다.
세스페데스 (Cespedes) 신부는 조선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장수들
에게 조언을 바쳤다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6년 취락제에서 코엘류등 예수회 신부
들을 만나 “명나라와 조선을 정복하게 되면 이교도들인 조선과 중국 전역에 교회당을
세우고 백성들을 모두 천주교인으로 만들겠다.” 라고 호언장담을 하고는 임진왜란을 일으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 군대에 종군한 “세스페데스 신부” 는 1593년 12월 27일 남해안 웅천왜성
(倭城)으로 들어왔으니 조선 땅을 처음으로 밟은 서양인 사제(司祭) 인데.... 일요일이면
왜군 진영에서는 “미사” 가 열렸으니 “하느님의 복음이 이땅에 최초” 로 전해 졌으며...
임진왜란 중에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들 중에는 천주교에 귀의한 자들이 다수 있었습니다.
1611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천주교 박해 때는 “21명의 조선인 천주교 신자가 순교” 했습니다.
이때 세스페데스 신부 는 조선에서 잡혀간 수만명의 포로 중에서 노예가 되어 마카오등지로
팔려가는 “조선인 남녀 2천여명을 구출하여 영세” 를 주고 가톨릭 신도 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독실한 크리스챤인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 외에도 제3군 대장 구로다 나가마사, 구로다 간베에, 다카야마
우콘, 고지마 쥰겐, 야마쿠사 다네모토, 소 요시토시, 오토모 소린, 아리마 하루노부, 오토모 요시시게,
오무라 요시아키, 고니시 사쿠에몬등이 일본의 기리시단(吉利支丹 Christian) 으로 잘 알려진 다이묘니
기리시단 부대는...... “십자가 군기(軍旗)” 를 앞세우고 조총으로 무장해 “조선 침략의 선봉” 에 섰습니다!
개신교 선교사 귀츨라프는 항해기에서 많이 과장 되기는 했어도.... “임진왜란 당시 왜 장군들은 전부
그리고 사병들도 대부분이 천주교인 이었다.” 라고 썼습니다. 대영 백과사전의 일본인 역사
편에서 블린클리는‘부산에 상륙한 25만 왜군 중 최소한 10% 이상이 천주교인 이었다.’라고 적었습니다.
예수회가 교황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조직이라 “서양인들에게 침략” 당할까 두려워진 도쿠가와 이에야스
는 1611년 “천주교인들을 씨를 말리기” 시작하니 1637년에는 천주교인 신자 4만명이 규슈
에서 시마바라의난 이라는 반란을 일으켰으나, 에도막부는 12만 대군을 동원해 하라성을 함락시켜
진압했으며 조직적 학살로 이어져 천주교도 박해가 끝난 19세기에 신도는 2만명으로 크게 줄었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선인 전쟁고아 “줄리아” 를 규슈 우토성(宇土城) 에 데려가 처인 쥬스타에게
맡기니 1596년 5월 베드로 모레홍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았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 후궁의
시녀가 되었다가 1612년 절해 고도인 고즈시마(神津島)에 유배 되어 죽는데 지금도 매년 5월
셋째주 토, 일요일 “줄리아 축제” 가 열리니 도쿄에서 180km 떨어진 뱃길인데도 사람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하는데 일본의 밴드“서던 올 스타스”가 작사· 작곡한 노래 “꿈으로 사라진 줄리아” 입니다.
돌아가라 나의 푸른 새 메마른 느릅나무의 가지 곁으로
네가 없는 오오 세상 속은 아침 해 조차 떠오르지 않아
불타라 여름의 십자가 남쪽하늘 높이
밤의 어둠을 비추는 별자리는 눈물의 상들리에
마치 무지개처럼 꿈으로 사라진 줄리아.
사랑의 끝을 알리듯이 찢겨진 나의 로자리오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며 30여년을 왜국
에서 직접 체험하거나 전해들은 사실을 기록한 일본사(日本史) 에서 조선인 을 ‘이교도
(異敎徒)’ 라고 기술했고.... 기리시단 장수와 지도자를 ’성모(聖母)를 위해 전쟁을 승리
로 이끄는 영웅’, ‘하느님이 쓰시는 칼’, ‘임진왜란을 하느님의 성전(聖戰)’ 이라고 적었습니다.
위의 표현은 성결대교수이자 전 중앙일보 기자로 이순신 인성 리더쉽 포럼 대표인 김동철씨의 글에 나오는데
그외 홍성옥 목사, 필립 천지인, 사랑해 알라스카, 바닷속, 감만 라디오, 초승달 및 대한민국 역사운동본부,
아천님의 블로그에도 보이지만 루이스 프로이스가 쓴 정성화역 임진난의 기록과 박수철역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한글역에는 잘 보이지는 않는데 12권 짜리 일본어판 완역서에는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임진왜란은 조선인들에게는 끔찍한 전란 이지만 예수교 신부들에게는 하느님의 성전 이라? 그는 또 일본사
(日本史) 에서 히데요시는 인물됨이 하찮았지만 우상을 믿는 불교도들을 죽이는 것을 보고는 ‘하나님의
칼과 채찍’ 이라 여겼으며, 왜란때 제1군 선봉장인 고니시는 세례를 받고 예수회를 광신하는 자 였던
바, 히데요시가 임진왜란때 아고스티뉴(고니시) 를 제1군 선봉장으로 매우 신임했다 라고 적고 있습니다.
루이스 프로이스가 지은 일본사(日本史) 를 보면 하느님의 기독교군대가 이교도인 유교와 불교의
나라 조선을 침략한걸 정당화 하는 점에서, 예수회의 조선진출 야욕 과 맞물려 임진왜란이
일어났다는 추정이 가능한 대목이기도 한데... 히데요시가 조선과 중국을 정복해 교회를
세우고 예수교인으로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한데에 조선인 선교의 기대를 걸었던 것 같습니다.
가톨릭 예수회의 열렬한 신자였던 고니시 유키나가와 쌍벽을 이루며 불구대천의 앙숙이던 가토 기요마사는
일연종(日蓮宗) 즉 법화종(法華宗)의 신도 였으니... 제1 선봉대인 고니시의 군대가 십자가 를 내세웠다면
제2군 가토의 군사들은 남묘호렝게교 (南無妙法蓮花經 남무묘법연화경) 라는 깃발을 앞세웠습니다.
이처럼 두 사람은 믿는 종교가 다른 이교(異敎) 사상 으로 사사건건 배척하고 반목질시하면서 경쟁 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견원지간인 두 장수의 경쟁을 이용해 한양 선점과 선조의 포획을 부채질 했습니다.
이순신이 가토 기요마사와 부산을 치라는 조정의 명을 거역해 통제사에서 파면되는데.... 고니시가 가토
에게 해를 가하려 한다는 정보를 도저히 믿을수 없었으니 함정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제3군 수장 구로다
나가마사도 천주교 신자지만 조선에서 5천500개의 코를 베어 일본에 보내니 12만이 묻혔다는 이총 입니다!
그전에 자비에르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들을 일본어로 번역해 전도용 책자를 만들어 창조 의 역사
를 설명하니 일본인들이 "창조주 하느님" 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조슈(야마구치) 에서
성공적으로 전도활동을 해 규슈등 600명의 그리스도인을 만든 후에 자비에르는
1551년 11월 듀알트 드 가마의 배를 타고 일본을 떠나 다네가시마섬을 거쳐 중국으로 갑니다.
프란시스 자비에르가 중국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일본인들의 정신 속에는 중국 문화" 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해서 중국을 통해 일본에 복음이 다시 전해져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중국 정부는 외국인
의 입국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1552년 12월 중국 칸톤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샹치안이
라는 섬에서 죽었으니 중국 선교는 30년 후인 1582년에 중국에 온 마테오 리치에 의해 이루어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