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아[Victoria]
알렉산드리나 빅토리아 하노버,
Alexandrina Victoria Hanover
출 생 : 1819. 5. 24, 런던 켄싱턴 궁 |
사 망 : 1901. 1. 22, 잉글랜드 아일오브와이트 카우스 근처 오즈번 |
국 적 : 영국 |
요약: 영국의 여왕(1837~1901), 인도의 여제(1876~1901).
정식 이름은 Alexandrina Vict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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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Victoria)
ⓒ George Hayter /wikipedia | Public Domain
하노버 왕가의 마지막 군주로서, 그녀가 통치하는 동안 영국 군주의 지위는 오늘날과 같은 의례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켄트 공작 에드워드의 유일한 자식이었으며, 1837년 그녀의 삼촌인 윌리엄 4세에 이어 왕위에 올랐다. 여왕으로서의 조력자는 총리 멜버른이었고, 1840년 결혼한 이후에는 그녀의 남편 앨버트 왕자였다. 앨버트에게 헌신했던 그녀는 모든 문제에 대해 그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빅토리아는 모든 일을 남편에게 의지했고 앨버트는 실질적인 영국의 왕으로서 군림했다.
1861년 앨버트 공이 죽자 빅토리아는 자신의 믿음대로 통치를 시작했다. 그녀는 자주 총리인 윌리엄 글래드스톤과 불화를 일으켰으며 1874년 벤저민 디즈레엘리로 대체했다. 그녀의 이러한 통치기간을 빅토리아 시대라고 부른다. 이는 영국의 팽창시기까지 지속되었으며 군주정치의 존엄과 인기를 회복했다. 영국 역사상 가장 긴 통치를 한 빅토리아는 영국 국왕이 잃어버렸던 위엄과 인기를 되찾았다.
초기생애
조지 3세는 자녀를 15명이나 낳았지만, 맏아들인 섭정왕자(나중에 조지 4세)의 딸 샬럿 공주가 1817년에 죽자 조지 3세의 직계손 가운데 생존자는 한 사람도 없게 되었다. 그래서 왕위 계승자를 얻기 위해 섭정왕자의 아우인 클래런스·켄트·케임브리지 공작 등 세 사람이 1818년에 결혼했다. 다음 번 영국 군주의 아버지가 되기 위한 이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은 조지 3세의 넷째 아들인 켄트 공작 에드워드였다.
에드워드가 낳은 외동딸은 알렉산드리나 빅토리아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에드워드가 죽고 1820년에 조지 4세가 왕위에 오른 뒤, 빅토리아의 왕위계승 서열은 요크 공작(1827 죽음)과 클래런스 공작(나중에 윌리엄 4세)에 이어 3번째가 되었다.
빅토리아는 독일 태생의 어머니와 독일 코부르크 출신의 가정교사인 루이즈 레첸과 함께 켄싱턴 궁에서 단출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공주에게 아버지 노릇을 해준 사람은 외삼촌이자 사촌 형부(샬럿 공주의 남편)인 레오폴트였는데 그는 1831년에 벨기에 왕으로 선출되어 떠날 때까지 영국 서리 주 에셔 근처에 살고 있었다.
빅토리아의 어린시절은 어머니 켄트 공작부인의 조언자인 존 콘로이 경의 농간 때문에 날이 갈수록 불행해졌다. 콘로이는 '못된 삼촌들'이 어린 공주를 위협하고 있다고 부추겨 공작부인과 합세해서 빅토리아를 친가쪽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고립시키고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려고 온갖 술수를 부렸다.
그러나 의지가 강한 빅토리아는 가정교사 레첸의 도움을 얻어 이 시련을 이겨냈다. 빅토리아는 어머니한테서 멀어졌고, 나중에 어른이 되어 왕위에 오른 뒤에도 어린시절의 기억 때문에 어머니를 용서하지 못했다.
왕위 계승
1837년 6월 20일 새벽, 윌리엄 4세가 죽자, 빅토리아가 그뒤를 이었다. 이날 아침, 추밀원은 새 여왕의 우아하고도 자신만만한 태도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새 여왕은 몸집은 작았지만 당당했고, 은방울 소리처럼 맑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방년 18세인 처녀의 즉위는 낭만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여성의 왕위 승계를 금지하는 하노버 왕국의 살리카 계승법 때문에, 그때까지 영국 왕이 겸했던 하노버 왕위는 영국 왕위에서 떨어져나갔고, 하노버 왕위는 윌리엄 4세의 동생들 가운데 연장자인 컴벌랜드 공작 에른스트가 물려받았다.
지금까지 한번도 독방을 쓰지 못했던 여왕은 버킹엄 궁으로 들어가자 어머니를 여왕의 거처에서 멀리 떨어진 방으로 쫓아내고 콘로이도 연금을 주어 퇴직시켰다. 레첸만이 여왕 가까이에 남았다. 외삼촌 레오폴트마저 정치에 간섭하지 말라는 정중한 경고를 받았다.
마침내 '혼자'가 된 빅토리아는 난생 처음 얻은 자유를 마음껏 즐겼다. 특히 영국 총리인 멜버른 경과의 낭만적인 우정 때문에 더욱 신나고 즐거운 나날이었다. 멜버른은 빅토리아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대부분은 불행한 결과를 낳았다. 우아하고 세련된 총리는 새 여왕의 자신만만함과 국왕으로서의 역할에 대한 의욕을 키워주었다. 그러나 여왕이 사회문제를 무시하도록 조장했고, 모든 불만과 소요를 극소수 선동자들의 활동 탓으로 돌리게 했다. 게다가 빅토리아는 멜버른 때문에 열렬한 휘그당원이 되었다.
빅토리아 치세의 첫번째 위기는 1839년에 두 차례 있었는데, 둘 다 빅토리아의 정치적 당파심 때문에 생겨난 위기였다. 이른바 헤이스팅스 사건은 빅토리아가 토리당과 관련이 있는 궁중 시녀 플로라 헤이스팅스에게 임신했다는 혐의를 씌워 강제로 의사의 진단을 받게 한 것이 발단이었다. 진단 결과 여왕의 오해였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뒷공론이 무성했다.
그런데 그해말에 플로라 부인이 뜻밖의 질병으로 죽자, 훨씬 더 험악한 유언비어가 유포되어 대관식(1838. 6. 28) 때의 뜨거웠던 대중의 열정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또 한 차례의 위기는 이른바 '침실 위기'로서, 멜버른이 1839년 5월에 사임하자, 보수당(토리당의 후신) 당수인 로버트 필 경은 휘그당원 일색인 여왕의 시녀들을 모두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왕은 멜버른의 격려를 받아 단호히 이 요구를 거부했다. 그래서 필은 총리직을 거부했고, 멜버른이 다시 그 자리를 차지했다.
앨버트의 군주정치
빅토리아는 외사촌 동생인 앨버트 공의 잘생긴 외모에 매혹되어, 그가 영국 왕실을 방문하러 윈저에 도착한 지 불과 5일 뒤인 1839년 10월 15일에 그에게 청혼했다.
그들은 이듬해 2월 10일에 결혼식을 올렸다. 이 결혼식은 정치적 당파심을 과시하는 하나의 무대가 되었다. 결혼식에 거의 초대받지 못한 토리당원들은 앨버트에게 여왕 다음가는 지위와 우선권을 주어야 한다는 빅토리아의 요구를 거부했다. 그러나 여왕이 앨버트와 결혼함으로써 멜버른과 휘그당에 대한 여왕의 애착이 반감되었다. 앨버트는 여왕의 정치적 관심을 다른 쪽으로 돌렸고, 그는 여왕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다.
여왕은 모든 일에서 남편에게 의지했고 또 그에게서 왕실 통치의 요체와 궁중 생활의 미덕을 배웠다. 곧이어 자녀들이 잇따라 태어났다. 빅토리아는 1840년에 제1왕녀(비키)를 낳았는데, 비키는 1858년에 프로이센 왕세자와 결혼하여 훗날의 독일제국 황제인 빌헬름 2세의 모후가 되었다. 영국 왕세자(나중에 에드워드 7세)는 1841년에 태어났다. 1843년에는 헤센 대공비가 된 앨리스 공주가 태어났고, 1844년에는 뒤에 에든버러 공이자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이 된 앨프레드 왕자가 태어났으며, 1846년에는 헬레나 공주(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제후인 크리스티안의 아내), 1848년에는 루이즈 공주(아가일 공작부인), 1850년에는 아서 왕자(코노트 공작), 1853년에는 레오폴드 왕자(올버니 공작), 그리고 1857년에는 비트리스 공주(바텐베르크의 제후인 하인리히의 아내)가 태어났다.
여왕의 첫 손자는 1859년에 태어났고, 첫 증손자는 1879년에 태어났다. 여왕이 죽었을 때, 살아 있는 증손자는 37명이나 되었다.
결혼초에 여왕은 남편이 정치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6개월이 지나기도 전에 멜버른의 거듭된 제안에 따라 앨버트 공은 공문서를 보아도 좋다는 특별 허가를 받았고, 나중에는 여왕이 각료들을 만나는 자리에 배석할 수도 있게 되었다. 여왕이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에는 앨버트 공이 '비밀 상자를 여는 열쇠'를 받았다.
원하지 않는 임신이 거듭되고 빅토리아가 남편에 대해 차츰 더 의존하게 되자 앨버트의 정치적 역할도 점점 커졌다. 군주라는 칭호는 빅토리아가 갖고 있었지만, 실제로 군주의 기능을 수행하는 사람은 앨버트였다. 앨버트는 어느 점으로 보나 진정한 영국 왕이었다.
멜버른 내각이 1841년 총선에서 패배한 뒤 여왕과 필의 첫번째 면담이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멜버른이 후임 총리에게 여왕을 다루는 법을 충고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멜버른은 여왕이 결코 잘난 체하는 사람이 아니고, 모르는 일이 많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으며, 그런 일들을 쉽게(간단 명료하면서도 자세히) 설명해주는 것을 좋아한다고 충고했다. 여왕은 자신의 견해를 재검토하고 자신의 판단을 재평가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1842년 여름에 여왕 암살 음모가 일어났을 때 필이 진심으로 슬퍼하자, 여왕이 필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은 '차갑고 괴팍한 사람'이라는 평가에서 '당과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지 않는 위대한 정치가'로 바뀌었다.
이렇게 여왕의 인식이 달라진 데는 앨버트 공과 필의 친밀한 관계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외무장관 애버딘 경도 여왕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1842년에 독점욕이 강한 레첸이 독일로 떠난 것은 빅토리아의 총애를 둘러싼 궁중 내 권력 투쟁에서 앨버트가 레첸에게 승리했다는 증거였다. 앨버트는 여왕의 개인 비서가 되었고,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영원한 각료'가 되었다. 앨버트는 부지런히 일했고, 각료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책임을 다했으며, 여왕의 재산을 합리적으로 관리하여 여왕의 수입을 늘렸다.
앨버트 공의 권세와 영향력은 아일오브와이트 섬에 오즈번 왕궁을 짓고, 스코틀랜드에 발모럴 성을 지은 것으로 드러났다.
앨버트는 화려한 파티를 좋아하는 빅토리아에게 런던을 싫어하도록 가르쳤다.
빅토리아는 오즈번 궁에 자주 갔지만, 여왕이 가장 행복해 한 것은 발모럴 성에서 지낼 때였다. 여왕 가족은 이곳에서 소박하고 편안하게 살 수 있었다. 여왕은 스코틀랜드 고지 사람들의 소박한 생활을 좋아하고 그들을 높이 평가했다.
여왕 부부가 스코틀랜드나 아일오브와이트에서 자주 시간을 보낸 것은 영국 군주제가 새로운 유형으로 바뀌었다는 증거였다.
앨버트와 빅토리아는 남의 눈을 의식할 필요가 없는 오붓한 사생활을 추구하여, 중산층 국민과 비슷한 생활 방식을 채택했다. 앨버트는 지적 문제와 과학에 관심이 많았지만, 빅토리아의 취미는 대다수 영국 국민의 취미에 더 가까웠다. 빅토리아는 찰스 디킨스의 소설을 즐겼고, 서커스와 밀랍 전시회를 후원했다. 많은 사람들은 빅토리아가 고상한 체한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빅토리아는 또한 안식일 엄수주의자도 아니었다.
여왕은 발모럴 성에서 가난한 스코틀랜드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즐겼지만, 그래도 사회를 보는 안목은 별로 높아지지 않았다. 1846년에 빅토리아와 앨버트는 기근에 시달리는 아일랜드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해 곡물법(영국 곡물 가격을 인위적으로 높게 유지하는 보호 무역법) 폐지를 지지했지만, 그들 부부는 여전히 아일랜드의 비극보다 오즈번 왕궁 건설과 대외정책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게다가 빅토리아는 정부의 차티스트(광범위한 정치적·사회적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 탄압 정책을 전폭적으로 지지했고, 영국 노동자들이 현재 생활에 만족하고 있으며 여왕에게 충성한다고 믿었다.
1848년에 런던에서 마지막으로 열린 대규모 차티스트 시위가 실패로 끝나자, 여왕은 대다수 국민의 충성심에 감동했다고 말했다.
유럽 대륙에서 혁명이 잇따르자, 빅토리아는 혁명이 나라에 좋지 않을 뿐 아니라 국민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불행을 가져다주는 원인이라고 개탄했다. 그러나 혁명이 일어나든 일어나지 않든 간에, 영국 국민의 대다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불행' 속에서 비참하게 살고 있었다.
빅토리아는 이 사실을 직시하지 못했다.
빅토리아 통치의 절정기는 '만국박람회'가 열린 1851년이었다. 앨버트는 빅토리아 시대의 상징이 될 국제 무역박람회를 조직하는 일에 몰두했다. 만국박람회를 위해 하이드 공원에 세워진 수정궁은 온실에서 착상을 얻은 유리 건물로서, 건축학의 경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건물에서 열린 박람회는 영국의 부와 과학 기술을 전세계에 과시했다. 빅토리아가 생각하기에 박람회의 성공은 남편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또하나의 증거였다. 이 박람회에서 얻은 수익금은 사우스켄싱턴 복합 단지를 건립하는 데 쓰였다.
앨버트는 정당을 초월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빅토리아에게 가르쳤다. 그는 입헌군주제에는 섬세한 균형감각이 필요하다는 것을 빅토리아보다 더 분명히 깨달았다. 그러나 앨버트 자신은 보수당에 공감하고 있었다.
한 예로, 곡물법 토론이 벌어진 첫날, 필이 연설하고 있을 때 하원에 나타나 그를 노골적으로 지지하여 많은 비난을 받았다.
여왕과 마찬가지로 앨버트도 영국 정치에서 군주의 적극적인 역할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군주의 적극적인 역할은 당시의 유동적인 정치 상황 때문에도 더욱 필요해보였다. 곡물법이 폐지된(1846) 뒤, 어느 한 정파가 하원에서 절대적인 우세를 확보하지 못하고 군소 파벌의 일시적인 제휴로 정치가 이루어지는 상황이 1868년 총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시대는 각료가 아닌 평의원의 황금기였고, 이런 상황에서는 군주가 적극적으로 정치에 개입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때로는 정치 개입이 필요하기까지 했다. 군주는 내각 구성자의 역할을 맡았고, 특히 연립내각을 구성할 때는 중재자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여왕의 역할은 본질적으로 언제나 '보조적' 위치에 있었다. 영국 군주는 외교 문제에서 특별한 역할을 맡는 전통이 있었고, 외무장관과 단둘이 외교 문제를 처리할 수 있었다. 빅토리아와 앨버트는 유럽 전역에 친인척이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자주 외국 군주를 방문하거나 외국 군주의 방문을 받았다. 앨버트는 이같은 왕실의 개인적인 관계가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결과 외무장관인 파머스턴 경과 충돌이 일어났다.
빅토리아가 1850년에 파머스턴 장관에게 여왕의 결정을 마음대로 바꾸지 말라고 말한 뒤에도, 그는 앨버트와 빅토리아가 찬성하지 않는 정책, 예를 들면 오스트리아 제국을 해체의 위기로 몰아넣고 있는 민족주의운동을 조장하는 정책을 계속 추진했다. 1851년에는 여왕과 상의하지 않고 루이 나폴레옹(나중에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를 승인하자, 총리인 존 러셀 경은 마침내 그를 해임했다.
그러나 불과 몇 달 뒤 국민에게 인기가 높은 파머스턴은 내무장관으로 다시 공직에 복귀했다. 앨버트가 죽은 뒤에는 파머스턴에 대한 빅토리아의 불만도 줄어들었는데, 그의 보수적인 국내 정책과 영국이 국제 문제에서 정당한 몫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빅토리아의 견해와 일치했기 때문이다.
크림 전쟁(1854~56)이 일어나기 직전에 여왕 부부는 국민의 반대에 부딪혔고, 앨버트는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러시아를 지지하려 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그러나 전쟁이 계속될수록 여왕에 대한 충성심이 뚜렷이 되살아났다. 빅토리아는 부상병을 돕는 여성위원회를 직접 감독했고, 플로런스 나이팅게일의 활동을 후원했다. 병원으로 부상병을 찾아가기도 했고, 빅토리아 십자훈장을 제정하여 용감한 병사에게 수여했다.
1861년 12월 4일에 앨버트 공이 세상을 떠나자, 앨버트를 통한 군주정치도 종말을 맞았다.
그의 영향력 아래서 여왕은 개인적 습관과 정치적 성향을 바꿨는데, 이런 변화는 영국 군주제의 탈바꿈으로 이어졌다. 역사가인 G.M. 영이 말했듯이, 영국 군주는 명확하지만 불안정한 영향력 대신 명확하게 규정할 수는 없지만 잠재적인 영향력을 얻었다.
미망인 시절의 빅토리아
빅토리아 초상화
ⓒ Franz Xaver Winterhalter/wikipedia | Public Domain
앨버트가 죽은 뒤, 빅토리아는 깊은 우울증에 빠졌다.
여왕은 군주가 해야 할 의례적 기능을 수행하지 않고 해마다 4개월 동안을 발모럴 성과 오즈번 궁에서 지냈다. 이것이 각료들에게 주는 불편과 부담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중도 처음에는 여왕의 슬픔을 동정했지만, 자리를 비우는 군주에 대한 참을성을 점점 잃었다. 그러나 아무도 고집센 여왕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여왕은 의례적 의무를 거부했지만 앨버트가 죽은 뒤에도 여전히 효율적인 정치적 역할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여왕이 받은 훈련과 앨버트가 그녀에게 끼친 영향력은 1867년에 선거법이 개정된 뒤 더 나은 정당 조직과 더 광범위한 유권자가 초래한 '진자의 진동처럼 세력교체가 빈번한' 정치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게다가 여왕은 남편의 죽음을 왕세자 탓으로 돌리고(앨버트 공은 아일랜드에서 무분별한 행위를 저지른 젊은 왕세자를 만나러 케임브리지에 갔다가 병에 걸려 돌아왔음) 외로움에서 오는 불만을 왕세자에게 거리낌 없이 터뜨리면서 그에게 어떤 책임 있는 일도 맡기려하려 하지 않았다(에드워드 7세). 이 모자 사이의 불화는 끝내 해소되지 않았고 시간이 갈수록 여왕은 점점 더 노골적으로 왕세자 부부의 인기를 시샘했다.
빅토리아는 벤저민 디즈레일리에게 굴복하여, 19세기의 가장 유명한 정치적 대립 관계에서 한쪽 편을 들게 되었다.
앨버트 공은 디즈레일리를 신사답지 못하다고 생각했고, 1846년에 곡물법을 폐지할 때 디즈레일리가 로버트 필을 신랄하게 공격한 것을 끝내 잊지 않았다. 앨버트 공은 디즈레일리의 정치적 경쟁자인 글래드스턴을 좋아했다. 그러나 디즈레일리는 여왕의 슬픔을 이해하고 공감하여, 여왕의 기분을 달래주고 여왕의 자신감을 되찾아줄 수 있었으며, 외로운 여왕의 부담을 가볍게 덜어주었다.
게다가 디즈레일리는 "폐하께서 되도록 쉽게 일을 처리하실 수 있도록 해드리는 것이 저의 기쁨이며 의무"라고 말했는데, 여왕은 자신이 과로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접근 방식은 특히 성공적이었다. 반면에 글래드스턴은 여왕이 "죽도록 지쳐 있다"는 것을 결코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글래드스턴 자신이 지칠 줄 모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디즈레일리는 쉽게 지쳤다. 여왕은 정치와 외교 문제에 대한 글래드스턴의 도덕적(여왕은 이것이 위선적이라고 생각했음) 접근 방식을 참지 못했다. 글래드스턴은 여왕을 설득하여 군주의 의례적 의무를 다시 시작하게 하려고 애썼는데, 그 끈질기고 재치 없는 설득은 특히 여왕을 화나게 했다. 아일랜드 문제를 둘러싸고 두 사람의 관계는 훨씬 더 멀어졌다. 글래드스턴은 '아일랜드의 평화'를 일생의 '사명'으로 삼았지만, 여왕은 대다수 국민과 마찬가지로 아일랜드의 슬픔을 이해하거나 동정하지 않았다.
여왕은 혼란을 싫어했고, 아일랜드 자치를 제안하는 사람은 분명 충성스럽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여왕은 1874년 선거에서 글래드스턴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선거가 중요한 전기를 이룩했다고 기뻐했다.
빅토리아와 디즈레일리의 공통점은 동방과 제국이라는 개념에 대한 낭만적인 애착이었다. 여왕은 디즈레일리의 선거법 개정(1867)을 지지했지만, 그의 사회 개혁안에는 거의 흥미가 없었고 공감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디즈레일리의 제국주의와 독단적인 대외 정책은 여왕을 매혹시켰다.
디즈레일리가 1875년에 뛰어난 책략으로 수에즈 운하의 주식을 거의 절반 가까이 사들이자(프랑스가 수에즈 운하를 완전 지배하지 못하게 막은 조치), 여왕은 갈채를 보냈다. 1876년 여왕의 칭호에 '인도 여제'라는 칭호가 덧붙자 여왕은 더욱 감격했다. 빅토리아와 디즈레일리는 골치 아픈 '동방 문제'(기울어져가는 투르크 제국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에서 의견이 일치했다. 그들은 투르크를 지지하는 것이 영국에 가장 이롭다는 입장을 취했는데, 투르크가 반란을 일으킨 불가리아인들에게 극악무도한 잔악행위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폭로된 뒤에도 여왕과 그의 총리는 이런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그러나 1877년 러시아와 투르크가 전쟁을 시작하자, 디즈레일리는 호전적인 여왕을 달래야 하는 난처한 입장에 빠졌다. 여왕은 러시아에 선전포고하라고 요구했다. 1878년의 베를린 회의에서 디즈레일리는 승리를 거두었다. 발칸 반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은 줄어들었고, 영국은 전략 요충인 키프로스 섬을 얻었다. 여왕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1879년 9월에 의회 해산이 임박하자 여왕은 자유당의 윌리엄 유어트 글래드스턴이 집권할 것을 두려워했다.
여왕이 걱정한 대로 1880년 선거에서 보수당은 패배했고, 여왕은 글래드스턴을 다시 총리로 임명할 수밖에 없었다. 여왕은 과격파가 지배하는 글래드스턴 내각(여왕은 그렇게 믿었음)이 나라의 안정을 위협한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여왕의 중재 역할 덕분에 상원과 하원은 타협했으며, 이로 말미암아 1884년의 제3차 선거법개정이 결실을 맺었다.
이제 군주는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더이상 내각 구성자로 필요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나 여왕은 전보다 제한된 자신의 역할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1886년에 여왕은 급진 세력에 반대하는 연립내각을 구성함으로써 제3차 글래드스턴 내각을 피하려고 애썼지만 이 시도는 실패했다. 그러나 '국민의 윌리엄'을 패배시킨 것은 여왕이 아니라 아일랜드 자치법안이었다.
말년
제3차 솔즈베리 내각(1895~1902)은 여왕에게 편안함을 안겨주었고, 디즈레일리 시대에 여왕이 즐겼던 제국주의를 통해서 여왕의 말년에 마지막으로 화려한 빛을 던져주었다. 여왕의 말년은 보어 전쟁(1899~1902)으로 몹시 분주했다. 남아프리카에서 영국 병사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자극을 받은 여왕은 수십년 만에 대중 앞에 나타나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부대 시찰, 훈장 수여, 군 병원 방문으로 꽉 짜인 일정을 보내는 빅토리아는 마침내 근대적 군주의 본보기가 되었다. 그리고 국민들의 애정을 얻었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수십 년 동안 왕위에 앉아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빅토리아의 상징적 가치를 높여주었고, 그 때문에 여왕의 인기는 더욱 올라갔다. 여왕이 자기 돈으로 무엇을 했느냐고 묻는 유인물이 나돌던 시대는 지나갔다. 여왕은 나이가 들수록 중산층, 그리고 빈민층을 훨씬 더 만족시켜 줄 수 있었다. 그러나 후기 빅토리아 시대의 중요한 정치적·사회적·지적 흐름에서 멀리 떨어져 있거나 그런 흐름에 반대했다. 민주주의의 발전을 용납하지 못했고, 여성에게 참정권을 주는 것은 가증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노동자 개개인의 고통에는 동정을 느꼈지만, 노동 계층은 여전히 여왕의 시야 바깥에 있었다. 앨버트 공이 죽은 뒤에는 지적인 문제나 예술과는 거의 접촉하지 않았고, 세계가 급격히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것은 여왕에게는 오히려 다행한 일이었다. 철도나 전신이 없었다면 여왕은 오즈번 궁이나 발모럴 성에 오래 머물지 못했겠지만 여왕은 그런 변화를 결코 환영하지 않았다. 시대의 움직임은 늙은 여왕 곁을 그냥 스쳐지나 갔지만, 여왕은 여전히 우편물을 꼼꼼히 검토하고 서류에 규칙적으로 서명하면서 열심히 일했다.
빅토리아는 끝까지 열정적이고 강한 의지를 가진 여성이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민주주의적 군주제'의 발달에 대항하여 오랫동안 지연작전을 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여왕이야말로 어느 누구보다도 이러한 정치 체제를 이룩하는 데 크게 이바지한 인물이었다. 여왕은 군주제를 존중할 만한 것으로 만들었고, 그리하여 입헌군주제의 존속(정치적 권력으로서가 아니라 정치적 제도로서)을 보장했다.
빅토리아의 오랜 통치는 전설을 만들어냈고, 여왕의 권력이 쇠퇴할수록 여왕의 정치적 가치는 높아졌다. 여왕의 정치적 가치는 아마 유권자들이 여왕을 어떻게 생각하고 여왕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느냐에 달려 있었을 것이다. 군주로서의 '실무적' 기능은 별로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군주의 품위를 과시하는 '의례적' 기능은 너무 소홀히 한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여왕의 정치적 중요성은 '실무적' 기능보다 오히려 '의례적' 기능에 있었고, 여왕이 영국 군주제에 가장 크게 이바지한 것도 '의례적' 기능을 통해서였다.
여왕은 잠시 병을 앓다가, 1901년 1월 22일에 오즈번에서 고통없이 세상을 떠났다. 헨리 제임스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 우리는 모두 어머니를 잃은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다. 신비로운 빅토리아가 죽고, 평범한 뚱보 에드워드가 왕이 되었다." 빅토리아는 윈저 궁 근처의 프로그모어에 있는 영묘에 앨버트 공과 나란히 묻혔다. 빅토리아의 업적은 단순했다. 영국 역사상 가장 긴 통치를 한 빅토리아는 영국 국왕이 잃어버렸던 위엄과 인기를 되찾았다.
여왕의 정치적 통찰력과 정치적 중요성 및 입헌군주로서의 역할에 대한 평가는 역사가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여왕의 높은 의무감과 꾸밈 없는 정직함과 소박함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