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절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더 아름다운 직분(excellent minister)은 더 좋은 언약의 중보의
보증인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계약이 실천이 안 되면 보증인이 책임을 집니다.
그래서 언약에는 보증인이 있어야 됩니다. 보증인 없는 계약은 무효입니다.
세상에도 그렇고 하나님과의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구원의 보증을 성령님이
서십니다. 그래서 ‘성령을 근심시키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분이 우리의 보증입니다.
보증인 없는 계약은 없습니다. 그 계약의 보증은 예수 그리스도가 서십니다.
예컨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마다 ‘저 아이도 맞아?’ 물으시면 ‘예 맞습니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하십니다. ‘저 사람도 맞아? 저래도 되겠어’ 하시면 ‘예 아버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제가 보증합니다’ 하십니다. 그리스도는 이와 같은 보증을 하나님
우편에서 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은 보통이 아닌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육체로 있을 때는 죄 사함의 제사장이지만 지금은 살아계셔서
새 언약의 중보의 제사장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서 육체로 십자가에서 이루신
속죄의 제사장의 사역에 대해서는 잘 압니다. 그러나 지금도 살아계셔서 중보의
제사장이 되심을 잊어버립니다. 사실 성령의 내주하는 역사가 없이 사람이 거룩하게
되려면 무미건조한 부처님을 닮아갑니다. 그야말로 고목나무가 되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한 번 비침을 받아 내세의 능력을 맛보기는 했는데 그만 놓쳐버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내 속에서 역사하고 새 언약의 중보자인 그리스도를
알고 ‘내가 아니고 당신이십니다. 내가 아니고 그리스도이십니다. 나는 주와 함께
죽었습니다. 당신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당신이 있으므로 나는 존재합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 속에서 계속 역사합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키워내십니다. 하늘의 형체가 안에서 생깁니다.
이 형체가 드디어 자신의 자화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행복감을 느끼도록 만듭니다.
속에서 차 올라옵니다. 그렇지 않고 은혜만 맛보고 난 뒤에 ‘내가 기도도 하고
전도도 하고 말씀에 순종도 한다’고 나오면 이건 갈라디아 교회와 같이 됩니다.
이게 바로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진행되는 겁니다. 죄 사함의 중보만 알고
새 언약의 중보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죄 사함의 중보이며 그리스도는
새 언약의 중보이십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게 하시는
의지와 능력이 됩니다. 바로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사람들이 이걸 잘 몰라요.
그렇기 때문에 수고와 무거운 짐을 지고 신앙을 하고 있습니다. 수고는 육체의 수고이며
무거운 짐은 정신적인 것이고 죄 짐입니다. 이걸 늘 자신이 지고 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고난을 참으면 복이 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켜라’고
말하면 자신을 스스로 자꾸 때립니다. 자기와 자기가 싸웁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해결이 안 됩니다. 항상 얼굴이 굳어져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깨달음이
많은 것 같으나 항상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겁니다. 성령이 없는 경건의 특징입니다.
외식의 첫째가 비판입니다. 남을 비판하는 것이 외식의 제 일보입니다. 다시 말하면
남을 비판함으로 말미암아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표현입니다. 자신은 아니라고
강조하기 위해서 남을 비판합니다. 왜 그러느냐? 자신이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그 속에 있는 사망과 음부의 요소가 그렇게 하도록 한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죄 사함의 중보와 새 언약의 중보이신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복을 주기위하여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죽음은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 아들을 그렇게 죽여서라도 우리에게 이 어마어마한 복을 주셨는데 겨우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것뿐이겠습니까? 우리를 앵벌이처럼 부리면서 천당 가면 모든 상이
다 있다고 말씀하시려고 그렇게 했겠느냐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심 얻으려고
쇼를 해서 우리를 감동시켜 헌금 하도록 하고, 일을 시켜 먹으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에덴을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찾아주기 위함입니다. 바로 새 예루살렘을
내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새 예루살렘은 올라가서 찾는 것이 아니라 성경은 새 예루살렘이
분명히 내려온다고 말씀했습니다. 계21장2-3절에 내려온 새 예루살렘 안에 있는
우리들은 나중에 주님이 흰 보좌 심판장으로 오실 때에 찰나적으로 단번에 변화되므로
영원히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이 세상역사의 세계와 동시에 신도시가 이루어져 있습니다. 지금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에 감동된 심령으로 주를 찬송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성령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아이들의 궁전입니다. 우리가 여기에 들어왔습니다.
이와 같은 구원으로 초대 받은 우리가 사실은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주께 영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