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오 기택) 님 은 1962년도 <영등포 의 밤> 으로 데뷔 하였다. (김 부해) 님 작사 작곡 으로 이노래가
나오자말자 레코드 가계 에는 그날 아침 에 LP판 이 들어 오면 오후가 되면 기염 을 토해 내듯 모두 팔려
나갔다. 정말 대단한 인기를 얻어 이제 데뷔 한 신인 을 단번 에 스타 로 만들어 버렸다.그당시 (이 미자)
님 의 <동백 아가씨>가 유행 을 타고 한참 인기 를 끌고 있었는데 데뷔곡 으로<영등포 의 밤> 이 나오고
나서 주춤 하는 영향 을 받았을 정도 였다.타고난 가창력 과 매혹적인 음색으로 부르는 곡 마다 폭발적인
힛트를 치며 당대 최고 의 인기 를 얻는 가수가 되어 버렸다.
1939년 전남 해남군 북일면 월성리 에서 태어났다. 호적상 으로 는 1943년생 으로 되어 있지만 태어난건
1939년이다. 아버지 는 세살 되던 해 에 돌아 가셨고 홀어머니 밑 에서 북일 초등 학교 와 해남 중학교 를
졸업 하고 서울 성동 기계 공업 고등학교 기계과 를 졸업 하였다.고교 졸업 후 동화 백화점 (현재의신세계
백화점) 에 있던 동화 예술인 학원 에 다니며 노래 를 배웠는데 고 고복수 선생님이 운영하던 학원 이었다.
1961년 동화 백화점 대표 로 KBS TV 가 주최한 직장인 콩쿠르 대회 에 나가 1등 을 차지 하게 되었다. 당시
TV로 내가 노래 하는것을 보신 작곡가 김 부해 선생 이 보름간 이나 나를 찾아 다녔다고 한다.
당시 충무로 에 있는 가요작가 동지회 가 있었는데 그 사무실 로 찾아 가보니 김 부해 선생, 반 야월 선생.
조 춘형 선생 박시춘 선생 등 당시 우리나라 에서 제일 유명한 작가 선생들이 한자리 같이 있었서 놀랬다고
한다.
(김 부해) 선생이 나를 보고 대뜸 "노래 한번 해 봐라" 하면서 피아노 건반위에 손을 얹어 울고 넘는 박달재를
쳐주면서 노래를 불렀다. 김부해 선생은 나를 보고 "노래 참 잘한다" 며 "내일 다시 오라"고 하였다. 오디션
에 합격 한 것 이었다. 다음날 이 되어( 김 부해 )선생 을 찾아가니 약보를 여러장 내 놓는 것 이었다.
영등포의 밤, 가버린 영아,키스 키스 키스,등 을 내놓어 셨다. 몇달 동안 김 선생님 과 함께 노래 를 연습 을
하고 김 선생님 의 추천 으로 신세기 레코드사 와 전속 계약 을 하였다. 당시 초봉이 월 5천원 이었는데 엄청
큰 돈 이었다.
1962년도 12월 에 영등포의 밤 노래 가 담긴 나의 첫 앨범은 이렇게 만들어져 새상에 나오게 되었다.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고 당시 최고로 유행 하고 있던 이미자의 동백아가씨 의 기세를 꺽을 정도로 반응
이 압도적 이었다. 당시 신세계 레코드사 는 부도의 위기에 처해 있었는데 이노래 하나가 신세계를 부도위기
에서 탈출 하게 만들고 밤을 세워 가며 찍어 내어 도 모자랄 정도 로 잘 팔려 부도 의 위기 에서 구해 내었다
이노래가 힛트를 치게 되자. 1965년도 강민호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영등포의 밤이 나오게 되었다.
남궁 원과 엄앵란 이 주연 이었던 이영화 의 주제곡으로 영등포 의 밤 이 선점 되었다. 영화도 대성공 이었다
그 영화 속 에서 내가 노래 부르는장면이 나오도록 하여 더욱더 많은 인기를 얻었다. 그러던 어느날 창법이
왜색 이 짇다고 하여 이미자 의 동백 아가씨 와 함께 방송 금지 노래로 지정되어 묶였다가 다시 해금 되기도
하였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방송심의 위원 이었다. 이런 시련기 에도 이노래를 많이 좋아 하는 애호가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달 되면서더욱더 많은 사랑을 받게 되었다.
영등포 구청은 구민들 에게 추억과 문화적 자긍심을 심어 주기 위해 2.4m의 높이로 기타모형 을 형상화 하여
영등포 의 밤 의가사를 적어 세워졌다.
영등포의 밤 (1962년 발표)
작사 김 부해
작곡 김 부해
노래 오 기택
1절
굿은비 하염없이 솓아지는 영등포의 밤
내 가슴 에 안겨오는 사랑의 불길
고요한 적막 속 에 빛나는 그대 눈동자
아~~영원히 잊지못할 영등포의 밤이여
2절
가슴을 파고드는 추억어린 영등포의 밤
영원속에 스쳐오는 사랑의 불길
흐르는 불빛 속 에 아련한 그대 의 모습
아~~ 영원히 잊지못할 영등포 의 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