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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내 나이 마흔 넷이다.
지리산 정기를 받고 전라남도 구례에서 1968년 8월 4일 오시(오전 11시 - 오후 1시)에 태어났다.
시골이 다 그렇듯, 아버지는 목수로 어머니는 농사짓는 가정에서 2남 1녀 막내로 평범하게 태어났다. 벌써 이렇게 나이를 많이 먹었다는 생각에 세월이 무섭게만 느껴진다. 나는 어떻게 살아왔으며, 현재 어떻게 살고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될 지 한번쯤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과거가 있었기에 현재가 있고 현재가 있기에 미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현대 사회의 변화 속도가 너무 빠르다 보니 잠깐 한 눈을 팔면 나도 모르게 세월에 밀려 내 정체성을 잃어버리곤 한다. 과거의 모습을 되돌아 보고 현재를 발판삼아 남은 인생을 알차고 보람있게 살아야겠다. 입장이 난처하지 않는 선에서 실명을 공개하니 실명이 거론된 분께는 넓은 아량을 구하고 거론되지 않은 분은 입장을 고려하여 밝히지 않으니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지금까지 살아온 내 삶을 돌아보면 치밀한 준비성도 없고 절실함도 없이 막연하게 세웠던 꿈을 향해 세월만 보낸 것 같다.
어릴 때, 깨어계셨던 어머님이 없는 살림에 서당과 주산 학원에 보내주었다.
새벽에 서당에 다니면서 부수, 사자소학, 추구, 1800자, 3600자, 천자문, 명심보감, 4서 3경 등을 배웠다. 그러다 보니 한글의 약 70%가 한자와 연관이 있어 국어 공부를 잘 할 수 있었다. 또한 주산 학원에 다니다 보니 남들보다 계산이 빨라 수학은 잘 할 수 있었다. 당시로 보면 조기 교육의 덕을 본 것이다. 어머님의 조기 교육에 대한 투자로 시골에서 공부를 잘 할 수 있는 기초를 닦았다. 그런 배경을 바탕으로 구례 중학교에 진학 하였는데, 그 때 영원한 나의 스승이신 송용복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선생님은 첫 부임지라 그래서인지 열성과 정과 실력이 넘치셨다. 선생님도 마흔이 넘어서 태어난 때문이지 마흔이 넘어 태어난 나를 무척이나 예뻐하셨고 손수 연습장을 매어주시며 공부를 열심히 하는데 있어 동기부여가 되었다. 그래서 선생님 덕분에 중학교 1,2 학년 때, 나는 많은 성장을 하였다. 홍도에 계신 선생님께 신혼 여행을 갔을 정도로 내가 존경하는 선생님이다.
그나마 내가 현재의 모습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근본적 원인이기도 하다. 그런데, 중 3 때, 선생님이 전근가시면서 내 삶의 변화가 오기 시작하였다. 새로 맞이한 김영미 선생님이 내게 맡긴 것이 3학년 7반 실장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2학기 때, 학급 회장하고는 천양지차였다. 초등학교 때는 단순히 선생님 보조 역할이었다면, 중학교 때의 실장 역할은 어마어마했다. 우리가 존경하는 이문열 선생님이 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 나오는 엄석대처럼 힘이 많았다. 숙제 검사도 내가 하고, 그 숙제에 대한 책임도 내가 묻는 등 반원에 대해 통제할 수 있는 많은 힘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많은 권력이 내게 주어졌던 것 같다. 어릴 때, 처음으로 느꼈던 힘의 논리였다. 그 위임받는 힘이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 지에 대한 한계와 책임이 없었던 시절이라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끔찍하다.더구나 빈부격차의 심각성도 그 때에 뼈저리게 느꼈다. 체육대회 때, 잘 사는 부실장이 싸온 도시락과 어머님 나름대로 준비한 하얀 쌀밥과 배추 김치가 전부인 도시락은 비교가 되었다. 대부분 선생님은 다양한 반찬이 있는 도시락으로 손이 갔으나 어머님이 싸주신 도시락은 인기가 없었다. 그 때에 왜 그렇게 눈물이 핑 도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때에 막연하게 빈부격차 없는 평등한 세상을 만들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정치를 하고 싶어하게 된 첫 계기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그 당시에는 가장 유명했던 순천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교육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구례 촌에서 상경하여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매주 월요일 오전에 성적에 반영하는 주초고사를 봐서 주말에 논다는 생각은 가져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래서 무식하게 열심히 공부했다. 그 때가, 공부로는 가장 열심히 했던 것 같다. 순천 고등학교에서도 최상위권에 있었으니 지금 생각해 보아도 열심히 했었다. 더구나 인생에서 내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임채호 회장님과 동기분들이 만든 죽림이라는 써클에 들어가게 되었다. 경쟁이 치열한 학교이다 보니 그런 경쟁보다는 민족을 선도하고 국가에 봉사하자는 미래 지향적인 모임이었다. 실력은 부족했으나 구례라는 지역 할당제 덕분에 나도 선발될 수 있었다. 구례 출신으로는 2년 선배인 현재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황정수 판사가 시초였다. 죽림 선배님들의 끊임없는 격려가 고등학교 생활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그 때에 내가 이 나라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다 내린 결론이 대통령이 되어야 하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였다. 그런데, 처음으로 내 인생에 있어서 역경의 순간이 왔다. 고 1,2 때는 그런 일이 없었으나 고 3 때에 청소년의 고민과 갈등을 내가 가졌던 같다. 공부보다는 다른 삶에 관심이 많았던 동기들과 몇 번 부딪치게 되었다. 현명하게 참았으면 되었는데, 그 당시 나는 그렇게 대처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공부보다는 폭력에 맞서기 위하여 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한창 공부할 고 3 때에 킥복싱, 유도, 합기도 등 폭력을 제압하기 위하여 안 해 본 운동이 없다. 잘 하지는 못하지만 운동에 시간을 많이 배정하다 보니 그렇게 잘 했던 공부가 점점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잃은 것이 있다면 얻은 것도 있다는 진리를 새삼 깨닫는다. 그 때에 지식의 양은 내 머리에서 점점 멀어져갔으나 인생의 깊이와 잊을 수 없는 나의 친구인 정태선을 얻었다. 친구와 같이 운동하면서 서로 지기 싫어 대련을 몇 시간이나 하면서 우정을 쌓을 수 있었다. 지금도 나의 든든한 동반자요 조언자다. 그렇게 이유없는 반항의 시기가 흘러갔다. 그 반항의 증거가 고 3 때에 찍은 졸업 사진이다. 성적이 떨어지다 보니 내 스스로 머리를 빡빡 밀었는데, 그 때에 졸업 사진을 찍었다. 지금도 졸업 사진을 보면 혐오스럽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고등학교 시절을 공부와 반항으로 격동기를 보낸 것 같다. 물론, 큰 수확이라면 인생의 목표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 3 때의 방황은 아니나 다를까 첫해 서울 의대 입시에서 낙방을 하게 되었다. 실력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지원한 결과였다. 그 때부터 내 인생의 고난이 시작된 것 같다. 과거에 공부를 잘 했던 기억이 계속 서울대 입시에 내 인생을 몰아갔다. 1점 2점으로 계속 실패한 입시로 20살부터 37살까지 서울대 입시를 보았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서울대 재정에 나도 많은 기여를 한 것 같다. 이과 출신이였던 내가 군 복무를 마치고 문과로 전향하여 서울대 법대를 지원하게 된 것이 장수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였다. 본의아니게 제자들에게 학벌이 서울대 법대라고 속인 이유이기도 하다. 다시 한번 제자들에게 선생님으로서 학벌을 속인 것에 대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다. 작년에 안양 시장에 출마하여 출판 기념회를 하지 않았더라면 평생 제자들에게 거짓말하는 선생님으로 낙인찍였을 것이다. 항상 허위 학벌에 죄를 지은 것 같아 지금도 식은 땀이 난다.참으로 아쉬움과 안따까움이 교차한 세월들이었다. 그리고 일순간은 남을 속일 수 있을련지 모르지만 영원히 남을 속일 수도 없고 더구나 자신의 양심은 결코 속일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그 거짓의 굴레에서 벗어나서 지금은 너무 행복하다. 아무 것도 아닌 학벌의 굴레에 내 자신을 18년 동안이나 묶어났다는 사실에 내 삶에 분노를 느낀다. 학벌보다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 지에 대한 가치관이 중요한데,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가 인생을 그렇게 보내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내 인생에서 스스로 배운 것이 많다. 진실되게 살면 모든 것이 통한다. 그리고, 기회도 더 많아진다. 내 인생에서 거짓의 굴레를 벗어난 지금이 가장 내게 기회가 많은 것 같다. 제자들에게 이 면을 빌려 다시 한번 선생님의 용서를 구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7년에 막연하게 상경한 서울은 막막했다. 이모님 집에서 기거하면서 살 길을 찾아야 했다. 시골에서 학비를 대줄 형편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독서실이었다. 독서실 실장님께 과외할 수 있도록 몇 명만 소개시켜 달라했는데, 그것이 내 인생에서 직업이 될 지 꿈에도 몰랐다. 고 3이어서 나보다 한 살 어린 후배들과 합숙하면서 과외를 하였다. 처음에는 살기 위하여 과외를 했는데, 그것이 직업이 되어버렸다. 또한 나의 꿈인 대통령이 되기 위해 가칭 한얼국제평화회의라는 당을 만든 것이 화근이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동지들을 규합하기 위해서는 내가 계속해서 돈을 벌지 않으면 안 되었다.그리고 제자들을 많이 배출하여 잠재적 지지자를 확보하기 위하여 계속 아이들을 가르켰다. 군 복무시도 아이들을 가르켰다. 그래서 한 해도 아이들을 가르키지 않은 해가 없다. 특히, 우리 고향은 지리산이라 특수 지대이다. 그러다 보니 구례 출신 대부분이 소위 방위라고 말하는 18개월 단기 사병이다.재수를 하다가 23에 늦은 나이에 군대를 갔는데, 구례에 야학이 있었다. 5시까지 군 복무를 마치고 저녁에 고향 후배들을 가르켰다. 내가 나이가 많다 보니 야학 회장을 18개월간 했다. 그 당시 나는 대학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에 운동권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야학 회장이라는 이유로 보안대에서 몇 번이나 조사를 받았다. 조사 결과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기에 그 당시 이영국 대대장이 적극적으로 야학을 지원해 주었다. 9시 이후로는 밖을 돌아다니지 못하는데, 우리 야학을 하는 병사들은 예외로 인정해 주었다. 그 때에 우리 사연이 라디오 방송에 나왔는데, 처음으로 내가 언론에 나온 최초의 경험이었다. 더구나 나는 행정병으로 근무하면서 우리 나라 행정 체계를 알게 되었다. 실질보다는 형식을 중요시하는 군 문화이다 보니 효율성이 결여되고 보여주는 전시 행정이 많았다. 그 때에 우리 나라 행정도 간소하게 바꿔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야학 회장으로서의 경험이 소외된 계층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양극화가 심해지는 현실에서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소외된 계층에 대한 교육 지원을 심각하게 고려해보아야 한다. 가난의 대물림이 교육까지 이어져 세상에 태어나 아무런 기회도 갖지 못한다면 얼마나 비합리적인 사회인가? 누구나 기회는 평등하게 가지고 능력에 따라 대우받는 사회가 와야 한다. 능력에 따라 많은 대우를 받는 사람도 그 대우도 사회에서 주어진 것을 깨닫고 주위와 나누는 아름다운 미덕이 있어야 한다. 이처럼 야학을 포함해서 올해로 벌써 25년이 되었으니 제자들도 24년간 대학을 보냈다. 돈을 버는 목적보다는 제자들을 많이 배출하여 내가 꿈꾸는 정당으로 대통령에 도전해 보기 위하여 지금도 제자들을 가르키고 있는 지 모른다. 내 제자가 나보다 한 살 어린 제자부터 있으니 세월이 감개무량하다. 물론, 대학 다닐 때, 그 흔한 MT 한번 가지 못한 것은 후회가 된다. 연고전에 가서 응원도 한번 못해봤다. 나만이 간직할 청춘의 경험이 별로 없는 것이 너무 아쉽다. 20대와 30대를 막연하게 대통령이 되기 위하여 보낸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왜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 지에 대한 막연한 생각이 사회 통합을 이루기 위하여 소외된 사람들을 배려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해야 하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굳어진 계기가 되었고, 우리 나라 행정을 형식보다는 효율적으로 전환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막연하게 보낸 20대와 30대의 나의 인생에 위기가 닥쳤다. 주위에서 자꾸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 시위원도 출마해보지 못했다는 말이 자극을 주었다. 이 때부터 막연하게 꿈을 이룰 수 없다는 절박감이 나를 압박했다. 그래서 2006년 지방 선거가 끝나자마자 인덕원에 선거 사무실을 무조건 열었다. 그리고 꿈을 이루기 위하여 내가 살고 있는 안양부터 알아야 하겠다는 일념하에 많은 조직에 가입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호남 향우회에 가입할려고 호남 향우회 본회에 가서 입회하고 싶다고 했더니 그 당시 박창기 사무국장께서 지회부터 가입하라고 해서 부흥동 지회에 가입하게 되었다. 그 때부터 향우 활동을 하여 많은 좋은신 분들을 만났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양부모님으로 모신 두 가정이 생겼다. 김분례 어머님 가족, 장소원 아버님 가족해서 졸지에 형제가 많지 않았던 나에게 소중한 부모님이 생겼고 많은 동생들이 생겨서 너무나 행복하다. 향우회에 들어와서 내게 너무 많은 것을 안겨준 소중한 인연이 된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안양에서는 호남 향우회가 향우들의 자랑이다. 각 지회 회원님들을 비롯하여 1대부터 4대 박원식 회장님, 5대 김정옥 회장님, 6대 박순오 회장님, 7대 전상희, 문세중 회장님, 8대 공준원 회장님, 9대 신동윤 회장님, 10대 이종오 회장님,11대 손창복 회장님, 12대 최영식 회장님, 13대 박석락 회장님을 비롯한 역대 회장님과 이재후 수석 부회장을 비롯한 많은 부회장님, 지회장님, 이사님, 최홍준 위원장님을 비롯한 자문 위원님, 이화기 위원장님을 비롯한 상임 위원님, 사무국장님, 간사님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좋으신 분들과 인연을 맺었다. 고향 선배님들의 애정어린 사랑과 격려가 내가 지탱할 수 있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벌써 나도 본회 부회장으로 일하고 있는 지도 4년째이다. 작년에 향우 출신인 최대호 안양 시장을 만들고 나서 야유회 추진 위원장을 했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향우에 대한 봉사가 쌓여 더 나아가 안양 전체, 경기도 전체, 국가 전체로 확대될 것이다. 내 주위의 향우들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 무슨 정치를 할려고 하느냐 하는 대 선배님의 가르침이 지금도 귓전에 맴돈다. 그래서 내가 출생한 구례를 사랑하는 모임(구사모)를 설립하여 1대 김판석 회장의 뒤를 이어 2대 회장을 역임하면서 고향 사랑과 리더십을 배울 수 있어 좋았다. 힘들 때, 고향 친구가 나에게 든든한 힘이 된다. 20대에 같이 살았던 양원용, 김막근, 이달상은 나와는 형제나 다름없다. 그러나, 친구이다 보니 자주 싸운다. 지금은 친구들에게 소홀하다고 해서 욕도 많이 얻어 먹는다. 친구이기에 많은 이해를 바란다. 내가 외롭고 힘들 때에 돌아갈 수 있는 곳은 나의 친구들이라는 것을 나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유승철 국장님을 비롯한 고향 선배님들께도 감사의 말을 올린다.
그리고 내가 가입한 곳이 안양 카네기 18기였고 관악 로타리 클럽이었다. 카네기 수업을 통하여 리더가 갖춰야 할 조건을 배웠고 로타리 클럽을 통하여 봉사의 가치를 배웠다. 지금도 18기 카네기 동기들은 나의 동반자로 끈끈한 정을 이어가고 있다. 또한 로타리 전임 회장님들의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는 것도 나에게는 커다란 행운이었다. 봉사하는 마음이 좋고 내가 아이들을 가리키다 보니 송태학 회장님이 중심이 되어 있는 한마음 21 장학회에 가입하여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는 학생들을 도울 수 있어 좋았다. 그 구성원들의 순수한 마음이 너무 좋았다. 나아가 위형윤 교수님이 중심이 된 옳은 일을 함께 실천하려는 의맥회에 들어간 계기가 나에게 새로운 직업을 안겨주었다. 특히, 박명국 회장님과의 만남은 인생을 같이하고 있는 동반자요, 정치적 조언자요, 형제나 다름없다. 박명국 회장님 추천으로 내 평생 아이들 가르키는 이외에 다른 직업을 갖게 되었다. 내가 문화의 진흥과 과학 기술 발달에 관심이 많은 것을 아신 회장님께서 한국학술진흥원 이사장과 평생교육개발원장 자리를 추천해서 내가 사회에 나오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박명국 회장님이 바라보는 정치적 판단은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다. 정치적 판단뿐만 아니라 선거 연설은 심금을 울린다. 또한 정이 많아 틈난나면 농수산물 시장에 가서 새우와 꽃게, 꼬막 등을 손수 사 오셔서 여러 지인들에게 많이 베푼다. 남을 배려하고 베푸는 모습이 너무 좋다. 그런 회장님 덕분으로 지금은 한국학술진흥원 이사장과 평생교육개발 원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참으로 인연이 소중하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한다. 소중한 인연이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그리고 내가 평생 업으로 살아온 아이들을 가르키다 보니 안양시, 의왕시 학원 연합회에 동질감을 가지고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장병택 원장님, 핸재 도의원이신 장태완 도의원님, 윤완규 연합회 회장님, 기병준 원장님, 윤인한 원장님 등 너무나 많은 격려와 도움을 받고 있다. 더구나 내가 경영하고 있는 수학, 과학 전문 로고스에 근무하시는 박대석 원장님, 조영숙 부원장님, 조애숙 실장님, 김선채 팀장님, 많은 선생님, 기사 선생님께도 이 면을 빌어 다시 한번 감사의 말을 올린다. 그 분들이 아니었다면 내가 하고자 하는 길을 걸어가고 있지 못하 것이다. 이런 학원 쪽에 인연이 되어 누가 무엇이라 해도 한국청소년운동 연합회 의왕시 이사로 일하고 있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최근에는 안양 과학 대학 평생교육원에서 주관하는 외식 산업 최고위 과정에서 안양에서 열심히 일하시는 사람들을 알려고 노력하고 있고 주간 현대 신문이 주관하는 CEO 과정에서 라온제나(즐거운 우리) 산악 회장으로 지역 리더분들과 소통할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고등학교 시절이다 보니 고등학교 동문회에 많은 애착을 가지고 있다. 나에게는 동문회에 가서 삶의 멘토를 얻게 된 것이 나의 행운이었다. 순고 사무총장으로 오랜 기간 봉사하신 장동일 회장님을 만나게 된 것이 나의 행운이자 축복이었다. 무슨 일만 있으면 회장님께 자문을 구하면 명확한 해답을 내려준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재경 총동창회 부회장으로 봉사하고 있고 재 안양 과천 의왕 군포 사무총장을 4년간 봉사하였고, 현재는 부회장으로 나름대로 봉사하고 있다. 특히, 나의 고등학교 동기이자 내 삶의 동반자인 김성겸을 만나게 된 것은 운명이었다. 재 안양 과천 의왕 군포 동문회를 만들기 위하여 불철주야 뛰어다니는 친구의 모습에 살아있는 감동을 느꼈다. 지금은 친구가 하고 싶은 것이 있어 잠시 떨어져 있지만 곧 다시 뭉쳐 더불어 사는 삶을 만들려고 노력할 것이다. 윤리 경영에 관심이 많은 친구에게 나는 농담삼아 교수가 되라고 한다. 무슨 일에 빠지면 전념하는 모습에 학자의 향기가 느껴진다. 하여튼 친구 덕분에 조직을 설립하는 것을 배울 수 있었고 조직을 운영하는 것을 배웠다. 인생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이다. 이 때, 내가 모신 고광우 고문님, 배형진 고문님, 이효준 회장님, 황성준 회장님, 조경운 회장님의 희생과 봉사에 감사의 말을 올린다. 특히, 서동석 선배님의 많은 도움으로 재 안양 과천 의왕 군포 순고 동문회가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그리고 안양 시장에 출마했을 때 많은 도움을 주신, 이승근 선배, 재 안양 과천 의왕 군포 많은 동문님, 송파에서 세무사로 일하는 정진철, 나와 인생과 가치가 비슷한 이상은, 윤정근, 김천구, 나의 영원한 죽림 동기들인 나상옥, 오석원, 장선재, 정기주, 최진태, 최형선, 최훈배, 고등학교 단짝 친구인 안영인, 구례 중학교에서 순고로 같이 간 조경익, 장병규, 백영훈, 박연재, 이동규, 고정희, 전창호 등 우리 동기, 현재 순고 재경 36기 회장인 서승원, 나처럼 학원을 경영하는 이계성, 신희상 등 무수한 동문들의 격려가 있었기에 이 자리에 있지 않나 생각이 든다.
그리고 오랜 장수 기간에도 내가 졸업한 대학 동문회에 애착이 간다. 내가 법학과로 졸업한 한양대학교와 경영학과로 졸업한 연세대학교의 학창 시절은 잊을 수가 없다. 저녁에 학원 경영을 하다 보니 낮에 주로 술집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점심 먹으러 가자고 나이 어린 후배들을 유혹하여 엄청나게 술을 먹였다. 학교에서 나를 보면 후배들이 도망갈 정도였으니 말을 하지 않아도 짐작이 간다. 데모하는 후배들 따라갔다가 앞니 3개가 부러진 것이 지금도 영광으로 남아 있다. 그 때, 1년 후배 방석준이의 도움으로 현재 내 치아의 모양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 한 구석에 아픔으로 영원히 남을 것 같은 동생이 한 명 있다. 법대 시절 내 리포트와 시험 공부와 학교 생활에 가장 도움을 준 대구 출신인 강희천이라는 동생은 잊을 수 없다.영호남 화합 차원에서 나는 경상도 동생들을 무지 무지 사랑했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영호남 화합 차원에서 비서실장 시킨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어쩌다가 고시원 앞에서 오토바이 타다가 그만 돌부리에 오토바이가 걸려 넘어져 그 자리에서 운명을 달리했다. 어찌나 서럽던지 지금도 서럽다. 저 세상에서 잘 살고 있는지 가끔 생각이 난다. 엉뚱한 이야기지만 내가 예뻐했던 안재환이와 희천이는 내 기억에서 떠나지 않는다. 재환이가 운영하는 가계에서 글라스로 양주를 마셨던 기억이 어제같은데, 운명을 달리했다. 비서실장 물망으로 강희천이가 운명을 달리했으나 내가 또다른 비서실장으로 점 찍은 동생이 국가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있다. 그 때, 언론에 취직할려는 것을 내가 국가 기관에 취직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는데 지금은 국가에 없어서는 안 될 인재이다. 하여튼 학문적으로 졸업장은 있으나 경영학과 법학은 잘 모르지만 학창 시절에 나와 같이 했던 나의 동생들과의 인생담론은 나에게 커다란 후원군이다.
그리고 내가 아들을 위해 가입한 곳이 학교 운영 위원회다. 과거 내가 학교 다닐 때의 육성회와 비슷한 것이다. 어린 마음에 잘 사는 친구 부모들은 모두 육성회 구성원이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내가 자식을 낳으면 나의 전철을 되풀이 하지 않게 하리라는 마음으로 학교 운영 위원회에 들어갔다. 희성 초등학교 학부모 운영 위원회 역사상 최초의 남자 학부모 운영 위원이 된 것이다. 그 때, 소중한 사람들을 너무 많이 만났다. 안양 토박이 오지은 운영 위원장, 정완기 지역 위원은 지금은 너무나 소중한 친구이다. 그 친구들을 통하여 안양의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어서 안양에 사는 것이 외롭지 않다. 역시 친구들 잘 두어야 세상 사는 것이 외롭지 않다. 우리 학교는 정당 가입한 사람은 운영 위원이 될 수가 없기에 시장 출마하면서 민주당에 가입했기에 현재 운영 위원은 하지 않고 있으나 나와 같이 운영 위원을 했던 위원들과 지금도 두 달에 한 번씩 만난다. 대부분 여성이다 보니 나도 그 모임에 있으면 완전 여성이다. 같이 수다떨고 밥 먹고 하는 모습이 영락 가정주부이다. 여성의 마음을 이해하고 내가 가정에 충실할려고 노력하는 자양분도 여기에서 얻었을 것이다. 학교 운영 위원회에 들어가서 나는 또 한번의 행운을 얻는다. 사무실에 근무하신 간사님이 그만 두게 되어 사무실 간사님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 때, 학부모 대표로 계셨던 이미수 사무국장님을 그 곳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일일찻집 티켓 팔러 왔다가 김성겸 친구와 나를 보고 측은지심이 발동되어 우리 사무실에 근무하게 된 것이 벌써 4년째이다. 그날로 사무국장님과 살고 계신 남편분인 이상선 형님과 인사하고 형님과는 막연한 사이이다. 형님의 양해와 이해가 없었다면 국장님이 근무하는데 있어서 많이 어려웠을 것이다. 다시 한번 이 면을 빌어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올린다. 특히, 소개받은 안양 친구 중에 유달리 안덕근, 이태희가 기억에 남는다. 타지에서 만난 친구임에 불구하고 내일처럼 모든 것을 해 준다. 항상 친구들에게 빚만 지고 사는 것 같아 마음이 안따깝다. 그래도 아들 덕분에 너무나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기분이 좋고 여성의 마음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 항상 고생하시는 이미수 사무국장께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정치를 한다는 것은 언론과 뗄레야 뗄 수 없다.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언론에 종사하시는 분들과 많은 이야기를 한다. 그래야 현재 진행되고 있는 여론을 수렴할 수 있고 정책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앙 언론지와는 달리 지방 언론지의 경영 상태는 매우 열악했다. 그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언론의 역할을 수행할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가슴 아팠다. 지역 언론이 우뚝 설 수 있도록 재정 자립도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지역 언론이 살아야 안양이 발전할 수 있다. 견제와 감시가 없으면 모든 조직은 부패하기 마련이다. 모든 사회적 기능에 있어서 언론이 살아야 모든 것이 투명화되고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언론에서 종사하시는 분 들 중에 유난히 존경하는 분들이 많다. 그렇지만 언론의 중립성으로 인하여 실명을 거론하지 않는 것이 예의일 것 같아 언급하지 않는다.
이처럼 많은 조직에 가입하여 안양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기시작하였다. 또한 내가 앞으로 대통령이 되기 위하여 철학이 필요했다. 나는 우리 나라가 앞으로 문화 산업을 통한 수출과 과학 기술 발달에 따른 IT 기술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2007년에 만든 단체가 문화와 과학을 나누는 모임(문과나모)이다. 내가 지금도 회장으로 머물고 있고 내가 가장 애착을 두는 단체이다. 왜냐 하면, 이런 가치를 추구하는 정당 출현이 우리 나라도 곧 올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문과나모 회원은 나의 정치적 동반자이자 후원자임에 틀림없다. 하은주 수석 부회장을 비롯하여 이도정 총무하에 박창대, 정희, 박철수, 박병만, 서영빈, 나경진, 김동일, 서영주, 이미자, 조승권, 양정근, 송정우, 이경희, 김일수, 김완동, 이성범, 이창우, 조창익, 김명원, 김은애, 김선채, 최경자, 이달상, 조영숙, 정진쳘, 이경화, 정병윤, 정태선, 이명순, 이상은, 이동열, 강봉원, 이경환, 김정식, 강창석, 이권희, 이동철, 노초영, 김일수, 김태형, 박종원, 김현, 박귀용, 임현준, 이조희, 송영욱 등 많은 회원들이 있기에 내가 살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박홍석 박사가 중심이 된 21c 한국생명과학발전연구회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우리 나라 과학 기술이 발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또한 물질 만능주의가 팽패한 현대 사회에 정신 문화를 되살리기 위해 충효 사상를 고취할려고 임귀선 회장님, 백옥현 여성 회장님이 임원으로 계신 바르게살기협의회에 들어가 상임이사로 틈나는 대로 최선을 다할려고 노력하고 있다.
더 나아가 안양을 벗어나 우리 나라 리더들과 소통하기 위하여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 최고위 과정 26기를 수료하였다. 최고인 사람들과 살아남기 위해서는 촌놈이 성실성 밖에는 없었다. 수료할 때, 최고의 상을 받았던 기쁨이 지금도 생생하다. 최현철 원장님, 마동훈 부원장님과는 애특한 정이 심어져 있고 26기 정문주 회장님을 비롯하여 동기분들과는 형제와 가깝다. 더 나아가 요즘 세상에 화제가 되고 있는 안철수 교수나 박원순 변호사와의 인연도 빼 놓을 수 없다. 청춘 콘서트를 주관한 평화재단에서 전 윤여준 장관과 법륜 스님이 세운 평화 리더십 아카데미 1기 수료생이고 박원순 변호사가 세운 좋은 시장 학교 3기 수료생이고 좋은 시장 학교 정책 위원장을 맡고 있다. 우리 나라 리더들의 강의는 내 삶을 바꾸어 놓았고 시장 학교 동기분들 때문에 전국 방방곡곡에 동문들이 있어 전국 어디를 가도 굶어 죽지는 않을 것이다. 제가 존경하는 박원순 변호사님이 시민 대표로 서울 시장에 출마했다는 그 자체에 새롭기도 하지만 그 도전에 감탄을 금한다. 머리 속에 있는 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비겁한 지식인이라고 나는 생각하기에 실천하는 지식인을 좋아한다. 그러기에 정당 문화를 떠나서 박원순 변호사의 서울 시장 도전 성공 여부를 떠나 나는 개인적으로 존경한다. 내가 도전하는 지식인인 윤동주, 이육사를 좋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개인적으로 박원순 변호사님이 성공하기를 빌어본다. 왜냐 하면, 이념과 철학을 현장 정치에서 가장 실현할 수 있는 나의 스승이기 때문이다. 정당 문화를 체험하지 못한 한계는 민주당과의 협조를 통하여 해결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이렇게 2006년부터 내 나름대로 준비한 것을 실천에 옮기고자 2009년 12월 1일에 안양 시장에 출마 선언을 하며 민주당에 입당하였다. 무조건 입당하고 안양 시청 브리핑실에서 출사표를 던지고 자전거 유세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시장이 되겠다는 절실함이 부족하고 준비가 미흡하여 1차 경선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치열함과 절실함이 부족했던 나로서는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에 입문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 주셨던 윤학상 전 도의원님께도 감사의 말을 전한다. 의형제를 맺고 김대중 대통령께 세배갔을 때가 즐거웠다. 김대중 대통령께서 '자네 결혼했는가? 열심히 살아야 해.' 하시는 말씀이 귓가에 스친다. 윤학상 전 의원님 덕분에 많은 정치인들을 만날 수 있었고, 현실 정치에 관한 기본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의 정치적 멘토이신 김의중 새마을 금고 이사장께는 많은 것을 직접 배웠다. 연설하는 방법, 정책, 사람 대하는 방법 등 정치적으로 판단할 때, 나의 스승이시다. 또한 선거 본부에서 고생했던 김삼주 이사님, 정찬오 이사님, 양원용 사무장, 이달상 팀장, 금강석 팀장, 이미수 사무국장께도 감사의 말을 전한다. 그리고, 같이 시장 출마를 했던 이종태 후보, 백일산 후보, 손영태 후보, 현 시장인 최대호 후보께도 선의의 경쟁에 대한 감사의 말을 전한다. 비록 정치적 이해 관계에 따라 서로 소원한 관계가 있을지언정 안양 시장 교체를 위해 서로 선대본부장을 하면서 협력했던 아름다운 기억만 남았으면 한다. 경쟁이 끝나면 동지로 돌아가 서로 협력하면서 지역과 국가에 봉사하는 정치인으로 남았으면 한다. 이석현 의원님과 이종걸 의원님이 민주당 출신시장 당선을 위해 노력하시는 모습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현역 의원들의 활동과 연설에 정치 초년병으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또한 안양시에 재정 상태나 정책에 대하여 조언을 아끼시지 않았던 김영환 시의원, 심규순 시의원께는 진정으로 감사의 말을 전한다. 남자로서 신의를 항상 느끼게 하는 김창근 본부장의 만남은 나에게 신선함을 준다. 항상 열성적으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시는 이순자 향우회 부회장님의 열성에는 탄복이 간다. 안양의 어른으로 계신 공준원 회장님과 가재춘 회장님의 정치적 조언은 항상 살아가는데 귀감이 된다. 카네기 총 회장이신 김희영 회장님이 남을 배려하고 섬기는 모습은 우리 정치인이 본 받아야 할 덕목이다. 무슨 일이든 철저한 준비로 승부해야 한다며 계획성과 준비성을 강조하시는 조기호 지사장님, 항상 남자다우면서 의리를 좋아하는 박복만 회장님, 항상 후배들이 잘 되기 위하여 격려해주시는 남궁성배 형님, 남자는 비겁하게 살지말아야 한다며 의리를 강조하시는 이희환 형님,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여 노력하신 이봉환 회장님, 항상 즐겁게 사시면서 노력하시는 이창원 회장님, 민주당 발전에 항상 노력하시는 채수한 회장님, 항상 고생한다고 선거 활동원을 챙겨주셨던 최인범 회장님, 김영문 형님의 정치적 감각과 김종권 형님의 따뜻한 배려는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된다. 최병렬 대표와 김광남 교수와 강미 원장님의 따뜻한 격려와 정치적 조언은 내가 가야할 길에 대해 지표를 제시해 준다. 외로울 때, 내 인생 이야기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박철수 형님, 진영태 형님의 인간미도 빼 놓을 수 없다.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는 능력이 대단한 백승원 형님, 선거에 많은 경험과 창의적인 송순기 민주당 청년 조직 위원장님의 열성도 잊지 못한다. 그리고 가장 잊지 못할 만남은 경기도 도지사 선거에 나온 김진표 의원님과의 만남이다. 소탈한 성격에 술도 잘 마시고 민주당 당선을 위하여 정열적으로 노력하시는 모습에 지금도 현역 의원님 중에 가장 존경하고 좋아한다. 의원님 말씀이 아무 때나 전화하는 세 사람이 있는데, 선배분 한분, 친구 한분 그리고 백종주 시장이라고 놀리곤 하셨다. 추석 때, 손수 전화를 하셔서 연휴 잘 보내라고 배려하는 모습에 많은 인간애를 느꼈다. 그리고 일상 생활에서 정치를 하시는 송순택 도의원, 박용진 도의원, 임채호 도의원, 강득구 도의원, 정기열 도의원, 최우규 도의원의 열정에 찬사를 보내며 권혁록 시의장님을 비롯하여 문수곤 시의원, 임문택 시의원, 하연호 시의원, 권주홍 시의원, 박현배 시의원, 홍춘희 시의원, 김성수 시의원, 이문수 시의원, 방극채 시의원, 송현주 시의원, 김선화 시의원님의 열정에도 경의를 표한다. 물론, 당은 달랐지만 곽해동 시의원, 이재선 시의원, 권용호 시의원, 심재민 시의원, 김주석 시의원, 이승경 시의원께도 개인적인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
또한 내가 정치에 입문하고서 마음 아팠던 것이 현 정당 문화와 공천 문제였다. 가장 민주적인 곳이어야 할 정당이 가장 비민주적인 곳이 아닐까 생각했다. 지역 주민들의 의사보다는 현역 위원장들의 의사 반영이 높았고 일부 지역 주민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의 시민들이 정치에 무관하였다. 그래서 평상시에 정당 활동을 통하여 지역 사회에 봉사하고 상향식 공천체를 통한 실질적 민주주의를 완성하기 위하여 정말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모임(정민회)을 결성하였다. 이종태 박사와 백일산 전 의원님이 고문으로 참가해 주셨고 다수의 당원들이 참가하여 새로운 정당 문화 설립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특히, 정치적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신성균 상임 이사님, 기병준 상임 이사님, 최민숙 상임 이사님, 장순영 상임 이사님, 김삼주 상임 이사님, 박명국 상임 이사님, 정동애 상임 이사님, 여정미 상임 이사님, 김영경 상임 이사님, 정성희 상임 이사님, 정희 상임 이사님, 고문현 상임 이사님, 김미경 상임 이사님, 정완기 상임 이사님, 임승분 상임 이사님, 송정우 사무총장님, 이미수 사무국장님께 감사의 말을 전한다. 실명을 공개하는 것은 위험부담이 있었으나 실질적 민주주의를 완성하기 위하여 노력하시는 분 들이라 그 분들의 노고를 기리기 위하여 이렇게 만천하에 공개한다. 이 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실질적 민주주의를 완성하기 위하여 음으로 양으로 노력하고 있다. 이런 민초들의 작은 노력이 모여 실질적 민주주의가 완성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가장 안따깝게 생각하는 것이 나의 가정이다. 20대에 같이 살았던 양원용 친구가 대학을 다니면서 만났던 제수씨와 갑자기 결혼을 하게 되었다. 졸지에 혼자가 된 나는 친구를 졸라 친구의 아내인 친구를 소개받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피아노에 컴플렉스가 있어 피아노 선생님과 결혼하는 것이 나의 작은 바램이었다. 드디어 피아노 선생님이었던 나의 아내를 만나게 된 것이다. 세상 물정을 몰랐던 아내는 무대포로 밀어부치는 내 성격에 그냥 끌려왔다. 그래서 두 번 만났을 때, 청혼하고 결혼하기로 결심했다. 워낙 내가 고등학교 졸업 이후 내 방식대로 삶을 살아서 그런지 우리 집안에서는 반대가 없었다. 그러나, 웬걸 막내딸인 아내 집안에서는 난리가 났다. 직업도 없고 정치한다고 하니 딸의 장래가 걱정된 것 같았다. 그래서, 장인 집에서 결정한 것이 무조건 반대였다. 그러나, 그냥 물러설 백종주는 아니었다. 아내 집 행사 때, 찾아가서 구박을 함에도 불구하고 구석에서 소주 3병을 마시고 왔다. 물론 아내는 부엌에서 혼자 울었다. 급기야 나의 성실성을 보이기 위하여 초중고 12년 개근 생활 기록부를 고향에 직접 내려가서 결혼 용도용으로 떼다 주었다. 그러자 나의 성실성과 아내 집안에 같은 핏줄인 백만규 동서가 있어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1995년 8월 31일 처음 아내를 만나 처음으로 처가댁에서 인정하여 1999년 1월 1일 날 처음으로 장인이 나를 불렀다. 내 딸과 결혼할 마음이 지금도 있냐는 장인의 질문에 바로 그 길로 결혼식장을 예약하고 그 해 음력 3월 3일 날로 결혼하게 되었다. 양가 댁에 결혼 비용으로 100만원씩 드렸는데, 결혼식 날 모두 축의금으로 돌려주어 0원으로 결혼하고 지금 잘 살고 있다. 0원으로 출발하여 아내에게 돈을 빌려 14평 은하수 한양 아파트를 대출을 안고 산 것이다. 알뜰한 아내 덕분에 지금은 관악 부영 아파트에서 잘 살고 있다. 아내를 만나고 아내와 결혼한 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축복이 된 것이다. 또한 사랑하는 아내와 나 사이에 태어난 백겸이가 있어 내가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겸손하게 세상을 살아라고 문중의 돌림자를 배제하고 외자로 겸이라고 지었다. 주로 밖에서 생활하다 보니 집안에 소홀한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아들 백겸이가 태어난 것이다. 백겸이가 태어나니까 아내의 관심이 분산 투자되어, 오직 나에게 관심을 둔 아내에게 배려를 못했던 내가 미안한 마음이 덜해서 좋았다. 더구나 아들은 아빠에게 소원이 아빠 손잡고 교회에 가는 것이라고 했다. 가족에게 해 준 것이 없어 무조건 그 소원을 들어 주었다. 그래서, 일요일에 의무적으로 남서울 평촌 교회를 갔는데, 지금은 내가 교회를 재촉해서 간다. 하나님을 아직까지는 느낄 수가 없지만 내 마음 속에 받아들이려고 노력 중이고 강신욱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해 많이 깨닫고 있다.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많은 교인들이 있어 아들 덕분에 나는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이처럼 아들과 아내는 내게 있어 가장 소중한 존재인 것이다.
이처럼 짤막하게 내가 살아온 길을 두서없이 적어보았다. 패기만으로는 세상을 살 수 없다. 지금까지 나의 삶이 치밀함과 절실함이 부족했다. 앞으로는 나의 삶을 치밀하고 계획성있게 살고 싶다. 교육 분야에서 25년간 일했으니 교육 분과 위원회에서 국회 의원으로 나라에 봉사하고 싶다. 그리고 나서 안양 시민에게 양해를 구하여 경기도 도지사에 도전해 보고 싶다. 그것이 성공하면 나와 가치관과 철학이 비슷한 분을 대통령을 만들어 그 분을 모시고 장관으로서 국가에 봉사하고 싶다. 국정 경험과 행정 경험을 쌓은 후에 당 대표에 도전한 다음 나의 꿈인 대통령에 도전해 보고 싶다. 나의 꿈이 비록 실현될 지는 모르지만 나의 노력 여부와 역사의 흐름에 맡길 수 밖에 없다. 내가 꼭 무엇이 되려는 입장보다 내가 이 나라를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다. 이제부터는 권력을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꿈꾸는 문화와 과학이 충만한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봉사하는 정치를 하고 싶다.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그런 사회를 만들고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기 위하여 살고 싶다. 두서없이 쓰다 보니 실명을 거론한 분은 너그럽게 양해를 구하고 실명을 거론해서는 안 될 분들은 실명을 거론하지 않았으니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조금만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고 나누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이 고난의 길이라 하더라도 훗날 역사가 발전하는데, 작은 기여를 하면 후회는 없다. 살아온 인생에 대하여 되돌아 보고 미래를 설계하는 나의 앞날에 독단보다는 사람의 향기가 배어나왔으면 한다.
행동하는 양심을 강조했던 고 김대중 대통령과 사람사는 세상을 꿈꾸었던 고 노무현 대통령처럼 살고 싶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행동하는 양심을 지닌 지성인으로 소외받는 사람들도 살 수 있는 사람다운 세상을 만들면서 살고 싶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평화 통일을 달성하기 위하여 노력하겠다. 탈북자들이 잘 정착하여 우리 국민으로 잘 살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만들겠다. 중, 러, 일, 미 4대국간의 긴밀한 외교 전략을 통하여 우리 나라 통일이 모든 나라에 이익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그러한 길을 달성하려면 문화 산업을 육성하여 한류 열풍을 확산시켜야 하고 뛰어난 IT 기술 발달로 우리 나라와 손을 잡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도록 과학 기술을 장려하겠다. 이렇게 문화 산업의 육성과 과학 기술의 발달이 종국에는 평화 통일을 촉진하는 매개체가 될 것이다. 우리 나라가 번창하는 첩경이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정치가 국민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도록 어릴 때부터 정당 문화를 생활화할 수 있도록 제도적 개선을 하겠다. 인터넷의 발달으로 전자 민주주의가 가능해졌으므로 직접 민주주의 즉, teledemocracy(전자 민주주의) 시대를 열어갈 것이다. 이런 목적을 가지고 체계적으로 치밀하게 준비할 것이다. 또한 남을 배려하고 나누고 섬기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모든 국민이 봉사하는 것이 일상화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나누는 문화가 서로 잘 살 수 있다는 인식하에 사회가 통합될 수 있도록 소통하는 정치, 통합하는 정치를 하고 싶다. 이런 것들이 정착되면 정치에서 물러나서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 다니면서 안철수 교수처럼 젊은 청소년들에게 사회적 멘토 역할을 하고 싶다. 청소년들에게 꿈을 전파하는 전도사로서 꿈이 희망이요, 꿈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청소년들에게 확신을 심어 주고 싶다. 기회가 되면 못 다 배운 공부를 더하여 정치학 박사가 되어 대학 강단에서 현실과 학문이 조화를 이룬 살아있는 강의를 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사랑스런 아내와 손잡고 여행을 다니면서 언론에 기고도 하고 소설도 쓰고고 철학서도 쓰면서 나오는 인세로 사회에 기부하는 삶을 살고 싶다. 빌 게이츠가 번 돈 만큼 인세를 받아 사회에 기부하고 싶다. 유행가 가사처럼 내가 살아갈 길에 대한 희망 사항을 생각나는 대로 기록해 보았다. 설사 내 희망 사항이 희망 사항으로 끝나더라도 내 아들에게 내 제자들에게 이 세상의 모든 이에게 결과와 상관없이 도전하는 삶은 언제나 기회요 아름답다는 것을 수학 공식처럼 증명해 보겠다.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위하여 오늘도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
이처럼 글로써 내가 살아온 길과 내가 살아갈 길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이 글이 나중에 내가 원칙을 버리지 않고 정도를 가는 정치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여러 사람 앞에서 다짐을 해 둘 목적으로 기록한다. 아무쪼록 혼자서는 아무 것도 이룩할 수 없기에 부족한 나를 많이 격려해 주고 지지해 주면 정직한 정치인으로 살 것을 다짐해 본다. 그리고 이 나라에 소통하는 정치인 정직한 정치인으로 원없이 살다간 정치인으로 남기를 희망한다.
사랑했었습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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