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4년 10월 28일 영국 철학자 존 로크가 세상을 떠났다. 존 로크는 인간은 아무 것도 각인되지 아니한 백지 상태(타블라 라사)에서 태어나 경험을 통해 점진적으로 지식을 얻어간다는 경험론적 철학을 일으켰다.
또 그는 자연법에 근거해 시민의 권리를 침해하는 권력은 뒤집어 엎어야 한다는 저항권을 주장했다. 로크의 주장은 프랑스 혁명과 미국독립운동에 직접적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근대 자유주의의 시조'로 우러름을 받는 역사의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자연권과 저항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기는 커녕 그것을 억압하는 부당한 권력에 기생해 비인간적 부귀영화를 추구하는 자들이 한둘이 아니다. 서울대학교 일제잔재청산위원회(이하 서울대 청산위)가 2005년 4월 13일과 14일 개최한 친일 청산 강연회도 그런 일에 대한 반성을 보여주는 행사였다.
서울대 청산위는 그보다 전인 4월 7일 기자회견을 열어 학술 분야 이병도(전 문리대 교수), 문학 분야 정인섭(전 대우 교수), 음악 분야 현제명(초대 음대 학장), 김성태(전 음대 학장), 미술 분야 노수현(전 미대 교수), 장발(전 미대 학장), 장우성(전 미대 교수), 법조 및 정치 분야 백한성(경성 법학 전문학교 졸), 한태연(전 법대 교수), 민복기(경성제대 법학부 졸), 정운갑(경성제대 법문학부 졸), 함동석(경성제대 법문학부 졸) 등 12명을 친일인물로 발표했다. 그 중 예술 분야 7명의 주요 친일 행적은 아래와 같다.
이병도(1896∼1989) = 조선총독부 중추원 산하 '조선사 편수회' 활동, 식민사관 총서 '조선사' 간행 참여.
정인섭(1905∼1983) = 조선총독부 산하 어용문학단체 '조선문인협회' 발기 및 간사, 대동아전을 맞는 나의 결의 '국민문학'에 발표,
김성태(1910∼) = 친일 음악가들의 최대 어용 조직 '조선음악협회' 작곡부 위원, 국민총력조선연맹과 조선음악협회 등 일제 어용기관과 단체가 주최하는 정치적 연주회 활동.
현제명(1902∼1960) = 음악 보국 목적 '경성 후생 실내악단' 결성 및 이사장 역임, 징병 실시 야외 음악의 밤에서 '항공일본의 노래'와 '대일본의 노래' 부름.
노수현(1899∼1978) = 아동 잡지 '신시대'에 전시 체제 국민요강 선동 만화 그림, 중일전쟁 시기 황군 위문 부채그림 그려 조선총독부에 납부.
장발(1901∼2001) = '국민 총력 조선 연맹' 산하 '조선 미술가 협회' 평의원으로서 국방 기금 마련 전람회 개최.
장우성(1912∼) = 친일미술단체 '조선 미술 전람회' 참여. 총독부 정보과와 국민총력조선연맹이 후원한 '반도총후미술전람회'에 일본화부 추천작가로 참여.
친일 인물에 포함되어 있는 김성태가 박목월 노랫말에 곡을 붙인 <이별의 노래>가 있다. 6.25전쟁 중에 대구에서 작곡된 것으로 알려진 이 노래는 가곡이기는 하지만, 감상적感傷的이고 단순한 내용에 곡조도 대중가요와 유사해서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한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이별의 노래>에는 서사敍事가 없다. 사랑과 이별은 필연적으로 스토리텔링 구조를 가지는 사람 사이의 사건인데, <이별의 노래>는 원인 과정 결말 그 어떤 것도 없는 단선적 가사에 감상感傷만 넘친다. 그래서 '내용 없는 아름다움(김종삼 시 <북치는 소년>의 표현)'을 좋아하는 대중의 기호에 맞았고, 대중가요와 흡사한 인기를 누리게 된 것이다.
이별 노래라면 <황조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별의 노래>가 보여주는 단순한 대중성과 달리 간결의 미학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서사와 서정을 격조있게 형상화한 <황조가>를 읽어본다. 우리나라 이별 노래의 원조라 할 만한 <황조가>에는 아주 옛날 이야기가 담겨 있다.
유리왕은 왕비 송씨松氏가 죽은 후 화희禾姬와 치희雉姬 두 여인을 계실繼室로 맞았다. 두 여인은 늘 다투었다. 그러던 중인 어느 날(기원전 17년), 유리왕이 사냥을 간 틈에 화희에게 모욕을 당한 치희가 친정으로 가 버렸다. 그녀의 친정은 한漢나라였다.
사냥에서 돌아온 왕은 즉시 말을 달려 치희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화가 머리꼭대기까지 치민 그녀는 함께 궁으로 가자는 왕의 제안을 거부했다. 홀로 처량하게 돌아오던 왕은 나무 아래에 잠깐 머물러 지친 마음과 몸을 달래었다. 그때 꾀꼬리 두 마리가 짝을 지어 왕의 머리 위를 날아다녔다. 그 광경을 보고 왕이 넋두리를 하였다.
펄펄 나는 저 꾀꼬리 翩翩黃鳥
암수 서로 노니는데 雌雄相依
외로워라 이 내 몸은 念我之獨
뉘와 함께 돌아갈꼬 誰其與歸
치희는 중국 여인이었다. 따라서 그녀가 화희에게 당한 모욕은 개인적인 내용이 아니라 집단적, 종족적 차원이었을 듯하다. 토착 집단을 대표하는 화희 쪽 세력이 외래 집단의 상징인 치희를 몰아낸 형국이었다는 말이다.
유리왕이 치희와 이별하는 장면은 금관가야의 수로왕이 외래세력인 허황옥과 결혼하는 것에 견주면 정반대의 정치상황을 보여준다. 수로왕은 “신들의 집에 있는 딸들 중에서 가장 예쁜 처녀를 골라 대왕의 짝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하고 결혼을 권하는 신하들- 즉 토착집단의 요구를 물리친다.
그는 단호하게 큰소리를 친다. “내가 여기 온 것은 하늘의 명령에 따른 것이다. 나에게 짝을 지어 왕후를 삼게 하는 것도 역시 하늘의 명령이 있을 것이다.” 그 후 허황옥이 오자 그는 또 “나는 출생할 때부터 신성하였기 때문에 공주가 멀리서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소.” 하고 호탕한 웃음을 터뜨린다.
수로왕에 견줄 때, 유리왕에게는 치희를 다시 데려 올 힘이 없었다. 그는 일국의 왕이었지만 치희의 불만을 해소해 줄 능력이 없었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는 사랑도 상대의 바람을 이루어줄 수 있을 때 가능한데, 유리왕은 그것을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이는 수로부인과, 절벽의 꽃을 바라는 그녀의 청을 들어주는 견우노인 사이의 교감을 다룬 〈헌화가〉를 보면 안다. 그 노래가 긴 세월 동안 잊히지 않고 줄기차게 대중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인간의 그러한 심리를 절묘하게 노래했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인간 현실에는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도 많다. 이룰 수 없는 사랑 때문에 고통을 받는 사람들도 셀 수 없도록 많다.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을 읊조린 가장 오래된 노래 〈황조가〉가 반만년 역사를 두고 민족의 사랑을 받는 것도 그 때문이다.
유리왕이 살았던 환도성은 강물이 입구를 가로막고 있고, 평지에서 강을 넘으면 돌로 쌓은 성곽이 앞을 막아 주는데다, 나머지 삼면은 웅장한 산세가 천연의 포곡包谷山城(골짜기를 가운데에 두고 쌓은 산성)을 제공해주는 천혜의 요새이다.
그러나 통구하通溝河를 넘어 들어간 환도성에서 답사자들은 중국 동포 안내원의 “저기가 유리왕의 무덤과 궁성을 복원하는 자리입니다.”라는 말에 더 관심이 쏠린다. 안내원이 가리키는 자리는 국내성에서 10리쯤 되는 산속에 자리 잡은 환도성 유적 중에서도 가장 한복판 일대이다. 마치 유리왕이 거기 우뚝 선 채 멀리서 찾아온 답사자를 뜨겁게 바라보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아버지 주몽이 남겨준 부러진 칼을 들고 통구하 주변을 헤매었을 어린 유리, 나이가 들어서는 떠나버린 치희를 찾아 다시 이곳을 말 달렸을 유리왕, 지금은 영토를 모두 잃고 남의 나라 땅에 쓸쓸히 묻혀 지내는 유리왕이 눈에 밟히듯 아련히 떠오르는 까닭이다. 그는 지금도 〈황조가〉를 읊조리는 처지에 놓여 있구나.
그래서인가, 답사자들은 그곳에서 문득 유리왕을 위한 덕담이 하고 싶어진다. 〈황조가〉에 따라다니는 ‘한역되어 전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정시’라는 영예는 일부분 잘못이라고 말이다. 유리왕 당신의 실연은 비록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래도 당신의 삶은 21세기의 현대인들에 비해 훨씬 인간다운 풍모를 지녔다고, 그렇게 위로를 건네고 싶다.
유리왕은 결코 시를 짓지 않았다. 우리나라 농민들이 논밭 일을 하면서 흥얼흥얼 노동요를 불러왔듯이, 유리왕 역시 잃어버린 사랑을 노랫가락으로 토로했을 뿐이다. 얼마나 멋진가.
〈빈 집〉의 시인 기형도는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라고 썼지만, 유리왕은 사랑을 잃고 노래를 불렀다. 일상의 희로애락을 자작 즉흥 노래 대신 문자로 기록하면서 사람들은 메말라갔고, 이제는 점점 시로 쓰는 일조차도 사라져가는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다. 사랑을 잃고 노래를 부르는 유리왕의 삶이 어찌 부럽지 아니한가.
이 글은 현진건학교가 펴내는 월간 '빼앗긴 고향'에 수록하기 위해 쓴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투고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