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유미 유고특집 | 송유미를 그리다
이제는 추억으로 남은 그녀 송유미
정마린(시인, 배우)
광복동 골목 3층(춘심정) 구석으로 들어오는 여인, 예총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하러 왔다는 그녀, 그녀 옆에는 사진사(정애자)를 동행해서 왔다. 짙은 화장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색의 모자와 옷과 굽 높은 검은 신발, 그것이 그녀와의 첫 만남이었다. 날짜는 정확하게 기억을 할 수는 없지만 그 인연으로 그녀와 아주 친한(?) 자주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내가 하는 연극을 빠지지 않고 보아 주었다.
나는 연극배우, 그녀는 시인이며 기자였고 나의 언니 같은 친구였다. 그러나 살면서 한 번도 그녀의 집을 방문한 적이 없고 가족이 어떻게 되는 지도 모른다. 어렴풋이 아이가 있으나 혼자 산다는 느낌만 주었고 나이도 정확히 예기 해 준 적이 없었다. 아무에게도 그녀의 사생활을 알리고 싶지 않은 것이었는지 쉽게 묻기도 힘들었다. 단지 할아버지가 애국자이시며 문학을 하셨다는 얘기와 대학원 시절 문학전공얘기를 살짝 언급했었는데 시간이 많이 흐르다 보니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주위의 많은 지인들도 오히려 나에게 그녀의 나이와 현 상황을 묻기도 했다. 그만큼 자신을 포장하지는 않았지만 포장되어 있는 대상으로 호기심을 불러 오게 했다. 같이 남포동과 자갈치 시장을 다니고 다른 문학인들과 기자들도 만나고 나름 추억이 많은 것 같은데 특히 남아 있는 기억으로는 어느 날
“꿈에 선생님(김준오)이 보인다. 아무래도 산소를 잘 못 쓴 것 같다. 같이 산소에 한 번 가자.”
하여 버스를 타고 양산 어딘가의 산소를 찾았다. 검색을 하니 실로암이 뜬다. 내 기억에도 실로암이었다.
“자식들이 산소를 안 찾나봐. 나무가 묘 자리를 다 덮었네. 저러니 불편하다고 내 꿈에 보였구나”하며 안타까움을 내비췄다. 며칠을 걱정하며 다녀온 이후로는 선생님의 산소얘기를 하지 않은 것 같다.
또 어떤 날은 정영태 시인과 함께 햄릿에 나오는 오필리어 역의 얘기로 포장마차의 밤은 깊어 갔다. 송샘과 나와 오필리어 역을 두고 서로 경쟁심의 발동을 일으킨 것 같은 그러나 두 사람 다 오필리어 역에 어울리지 않는 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정영태 샘의 이야기는 밤을 새우게 했었다. 지금은 두 분 다 같은 곳에서 편안하게 햄릿 역을 하시고 경쟁자 없는 오필리어 역을 하면서 다시는 멀어지지 않는 무대를 펼치고 계시리라 생각한다.
나와의 인연으로(99년) 송샘은 이상복 선배가 연극 중 쓰러지면서 일어나지 못할 때 이상복 돕기 모금을 여러 번 하였는데 적극 참여하여 도와 주셨다. 그때 문학과 음악을 적절하게 섞어 공연을 하듯 하였는데 신경림 선생님도 오셔서 도와 주셨고 체육센터 오동석 총장님이 강당을 무료로 내어 주어 돕기 공연을 하기도 했다. 여러 번의 소소한 공연 이후 나는 지인들과 주위의 도움으로 이상복 돕기를 몇 년 하다가 이제는 나라에서 혜택이 많아 하지 않고 있다. 송샘을 비롯해 도와주신 분들 너무너무 감사드린다.
“송샘! 선배는 많이 좋아져서 열심히 운동하고 교회도 열심히 다니고 활발하고 긍정적으로 옷으며 잘 지내고 있어요. 이젠 걱정하지 마세요. 감사해요”
돕기 예기하다 보니 안기태 선생님 돕기 하던 일도 생각이 난다. 안샘이 신문사 퇴직하시며 크게 사기를 당하셨는지 형편이 어렵게 되었다.
“안샘이 형편이 많이 어려우신가 봐요. 우리 시화전을 합시다. 한 20명만 전시해서 기금을 마련 해 줍시다.”
이렇게 시작한 전시회가 20명이 아니라 50명이 넘었던 것 같다.
말하자면 샘이 아는 시인들을 대거 동원 시킨 샘이다. 시인들의 시에 그림은 안기태샘이 직접 그리고 액자를 만들어 kbs별관에서 전시를 하였다. 시들은 거의 본인들이 사가거나 지인들이 사주었고 나는 최우석 원장에게 다 맡겼다. 강매했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근데 좋은 일을 하고 아직도 서운 섭섭하게 안 풀린 게 송샘과 안샘 사이다. 여기서 시 제목을 말하면 어떨지 모르겠는데 ‘닭발’이라는 시에 그림을 닭발 그림을 그려 그 시인이 본인의 시를 사가지 않아 화근이 되었다.
“아니 닭발이라고 진짜 닭발을 그려 놓으면 어떻해요?”
“시 내용에 맞게 그린 건데 왜?”
“자기 거 안 사간다 하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하라고”
“고치시라고요.....”
두 분의 의견 차이가 팽팽하게 맞서다 보니 서로 만나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 중간에서 서로 오해를 풀고 만나게 하려고 여러 번 시도 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이런 일이 있기 전에는 세 사람이 만나서 해운대 철길 옆 전 집도 가고, 국밥집도 가고, 커피도 마셨는데 그 이후 나는 두 분을 따로 따로 만나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지금은 안샘과 삼겹살집, 송샘은 천상에서 지켜보고 계시겠죠.
특별하지 않는 날 샘을 만날 때는 해인정사에서 만나 삼배를 하고 법당에 앉아 이런 저런 대화를 하고(나의 얘기) 국밥 집 들러 밥 먹고 송샘의 특기 모아둔 포인트로 커피를 마시곤 했다.
참 그러고 보니 나의 시인 등단 얘기가 빠진 듯하다. 부산여전 문예창작과를 나왔지만 연극만 하다 보니 글쓰기는 소홀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시집살이 힘들어 습작을 하게 됐는데 그것을 컴퓨터에 모아 놓으니 10년 이라는 세월이 넘게 흘렀다.(그사이 춘심정 시절 배재경 시인이 시집을 많이 가져다 주어 너무 고마웠다.)
어느 날 수미산에서 노트에 수미산 별곡이라는 제목의 연작 습작 시 쓴 것을 송샘이 보게 되었다.
“잘 쓰네요. 등단해도 되겠다.”
“아녜요. 아직 어휘력이 부족해요”하며 거절했다.
그 후 또 몇 년이 지나 송샘의 소개로 《시인정신》을 통해 등단을 했고 다음 해에는 《현대시 문학》을 통해 등단을 또 거쳤다. 왜 다시 등단을 거쳤냐 하면
“심사위원들의 기준에 맞춰야 해서 고쳐야 해요. 좀 고치세요.”
“예? 고쳐요?”
한 달 간을 고치고 고쳐서 등단을 했다. 그래서 《현대문학》 등단 때는 별로 수정 없는 상태를 고집해서 등단을 했다. 당시 하도 많이 수정을 하니 타이프 쳐 주던 큰 아들이 “엄마, 처음 쓴 게 좋은데 왜 자꾸 고쳐?”하던 생각이 난다.
잘 쓰지는 못하지만, 아직까지 감동을 제대로 전달하지는 못하지만 송샘 덕분에 등단을 하여 시집이 두 권이나 되었다. 늘 좋은 글 쓰자 하면서 아직도 부족함이 많고 게으르다. 송샘은 같이 있다 새벽에 헤어져도 그 새벽 글을 쓰며 안부의 답장을 하고 밤을 새운다. 도대체 잠은 언제 자는 지 궁굼했다. 어떨 때 보면 이동 하는 순간 잠시 눈을 붙이는 것 같은...
수미산 할 때 어느 날
“나 가게에서 일 좀 하게 해줘. 내가 가게 문 일찍 열어 줄게.”
극단에서 연습 마치고 가게 문을 열면 늦은 시간이다. 단골손님들은 늘 짜증을 냈다. 하지만 본업을 저버릴 수 없는 노릇이고 시립 월급이 적어 4식구 살기가 어려워 가게를 차렸다. 송샘의 제안에 나는 아무 것도 묻지를 않고 받아 들였다. 단지 “지금 송샘의 사정이 많이 어렵구나”만 생각 하고 넘겼다. 그런데 어느 날 모 시인이 가게에 와서 주정을 부렸다.
“이00한테 허락도 없이 장사를 하면 돼?”
“이게 어디 와서 행패야?”
“왜 이샘 하락도 없이 하냐고”
“이 새끼가 죽을 라고 환장을 했나, 내가 왜 이00한테 허락을 받아?”
하면서 가게에서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문학하는 샘이 같이 가게를 하니 질투를 했는지 후배를 시켜 깽판을 치러 보낸 것이다. 이00이 가게를 할 때 송샘이 가서 설거지도 하고 많이 도와줬었는데 그 후 도와줘봐야 소용없는 일이 있었는지 그 집과 거리를 두고 있는 상태였다.
나는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일을 접하며 그 시인에게 화를 냈지만 송샘은 조용히 넘겼고 그 후로도 불평불만 없이 가게에만 신경을 쓰셨다.
가게에서 수입이 많이 나지는 않아 많은 도움은 못 드렸지만 6개월 넘게 같이 지냈다. 그 후 형편이 좀 좋아지셨는지 다시 샘의 일상으로 돌아가셨고 우린 예전과 같이 언니 동생 사이로 지냈다. 또 함께 수미산 이름으로 문학을 바탕으로 무대 공연도 두 번 했었다.
코로나 이후 얼굴 한 번 보고 싶어 해운대에서 전화를 하면 병원 가는 중이다, 집에 누가 왔다, 밖에 나왔다, 일찍 연락 주지, 하면서 만나지를 못했다. 서울로 이사 오면서도 얼굴을 못 보고 왔다. 그러나 카톡은 24시간 열려 있어 서로의 안부는 이모티콘과 함께 고속행이었다. 교통사고 이후 후유증으로 병원 다닌다더니 코로나의 후유증으로 하늘로 가실 줄 몰랐다. 처음 부고를 접하고 보이스피싱인 줄 알았다. 그러나 여기저기서 나에게 소식을 묻는 것을 알고 그제야 하늘나라로 가셨구나 하고 받아 들였다.
너무 일찍 인연을 끊어 낸 기분이다. 며칠 머리가 멍해서 무얼 어찌 해야 할지 몰랐다 잠도 오지 않았다. 90년대부터 이어온 끈이 하나 잘려 나갔다. 나의 메모지에 1. 그녀의 소임은 무엇이었을까, 2. 무엇이 시인을 더 외롭게 했을까, 3. 사랑하며 살며 인재는 만들었으나 말도 못하고 가슴만 타 들어 갔구나. 4. 시인으로 생존의 고개를 넘나들었다. 가 적혀 있다.
예술인으로 산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나는 월급쟁이었지만 어려웠다. 샘은 얼마나 더 어려웠을까. 그리고 그 한 길을 어찌 지나 왔을까?
가깝다 하는 나도 모르는 많은 구설이 돌아 다녔다. 이제는 자유로운 곳에서 편안하고 힘들지 않은, 고민 없는 시의 날개를 펼치고 계실 꺼라 믿으며 당신을 그리워합니다. 기억 뒤편에 접어둔 많은 추억들 이제는 퍼즐 맞추듯 그리울 때 펼쳐 보렵니다. 우리 이이들 걱정도 많이 하셨는데 잘 지내고 있고 손녀도 둘인 거 아시죠?
정마린
전 부산시립극단단원이자 영화배우로 영화 ‘수상한 이웃들’ 외 여러 편에 출연했다. 2010년 《시인정신》, 2011년 《현대시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꽃말은 흙이 되어』, 『달나라 꿈꾼지 오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