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창1(정지용) - 1930년
1. 시 읽기
유리(琉璃)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肺血管)이 찢어진 채로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2. 시 혼자 살피기
(1) 제목 : 유리창 → 소재의 상징성 – 유리창을 통해서 바라보는 것은?
(2) 화자 : ‘나’라는 말이 직접 표면에 나타나지는 않으나 → 사실상 ‘나’
(3) 청자 : 없음(부분적으로 ‘너’가 존재함) → 독백적
(4) 대상 : 아이(의 죽음)
(5) 상황 : 밤에 화자는 유리창을 통해 죽은 아이의 모습을 떠올림
(6) 정서 : 그리움, 슬픔
(7) 말하고자 하는 바는? :죽은 아이(자식)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
(8) 표현 : 감각적 이미지의 활용, 감정의 절제, 역설
2. 유리창의 이중적 기능
⇨ 이런 이중적 속성 때문에 화자는 ‘외롭고 황홀한 심사’를 느낌
3. 작품 개관
(1) 갈래 : 자유시, 서정시
(2) 성격 : 회화적, 감각적,
(3) 제재 : 어린 자식의 죽음
(4) 주제 : 죽은 아이(자식)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
(5) 특징
1) 감정의 절제
2) 감각적 묘사와 비유를 통한 선명한 시각적 심상.
3) 역설적 표현
(6) 구성
1) 1∼3행 : 유리창에 비친 영상
2) 4∼6행 : 창 밖의 밤의 영상
3) 7∼8행 : 외롭고 황홀한 심사
4) 9~10행 : 죽은 아이의 영상과 상실의 슬픔
(7) 출전 : 『조선지광』89호(1930.1)
4.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어린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애절하고 슬픈 마음을 유리창을 매개로 하여 선명한 감각적 이미지로 노래한 작품이다. 1행~3행에서는 입김 자국에서 죽은 아이의 모습을 연상하고, 4행~6행에서는 죽은 어린 자식을 잃은 슬픈 마음을 역설적 표현으로 형상화하고 있고, 9행~12행에서는 절제되어 있던 슬픔을 감탄사를 사용하여 표출하면서 어린 자식에 대한 부모의 안타까움을 표현하고 있다. 이 시에서 유리창은 투명하기 때문에 죽은 아들의 환상을 볼 수 있게 해주는 매개체이다. 유리창은 투명해서 건너편의 물체를 볼 수 있지만 그 물체에 닿기 위해 손을 뻗으면 막혀 있기 때문에 그 물체에 손이 닿을 수는 없다. 시인은 유리창의 이러한 속성을 이용하여 화자의 정서를 표현하고 있다. 시인은 유리창의 이러한 속성을 이용하여 화자의 정서를 표현하고 있다. 유리창의 이런 양면성 때문에 환상으로 본 아들을 현실로 끌어들일 수 없어서 화자는 더 안타깝고 슬픈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즉 이 시에서 유리창은 환상과 현실을 매개하면서 다시 환상과 현실을 갈라놓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이 시의 핵심 이미지인 ‘물 먹은 별’은 볼 수 있지만, 그 별에 가 닿을 수 없는 것이다.
- 2013 인터넷 수능(문학) 중에서
5. 작가 소개
(1) 생애
1902년 5월 15일(음력) 충북 옥천군 옥천면 하계리 40번지에서 아버지 정태국과 어머니 정미하 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젊어서 중국에서 배운 한의술로 약재상을 경영하였으며, 그 덕택으로 어릴 때는 비교적 부유한 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어느 해 여름에 갑자기 밀어닥친 홍수로 집과 재산을 잃어버리고 한동안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아홉 살 때 인근의 옥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열세 살에 졸업하였다. 졸업하기 일 년 전에 충북 영동에 살던 송재숙과 혼례를 올렸다. 열일곱 살에 서울의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학교성적은 전체 수석을 할 정도로 좋았으며, 이때까지도 집안 형편이 그리 나아지지 않아서 교비장학생으로 학교를 다녔다. 같이 문학에 뜻을 둔 동급생 박팔양 등 8명이 모여서 ‘요람’ 동인을 결성하고 동인지 《요람》을 등사하여 10여 호까지 만들었다. 휘문고보 2학년 때 3 ․ 1운동이 일어나서 가을까지 수업을 받지 못했으며, 교내문제로 시작된 휘문사태의 주동으로 지목받아서 무기정학 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1919년 12월에 《서광》 창간호에 소설 「삼인」을 투고하여 실렸다. 1922년 휘문고보를 졸업한 뒤 1923년 4월에 일본 교토(京都)의 동지사대학(同志社大學)에 입학하였다. 그의 대학 학비는 휘문고보에서 부담했다고 한다.
대학에 다니면서 계속 시를 쓰다가 1926년부터 《학조》 창간호와 《신민》, 《문예시대》에 본격적으로 시를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조선지광》 등에 주로 시를 발표하였다. 1929년에 동지사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한 뒤 귀국하여 휘문고보의 영어과 교사가 되었다. 학생들 사이에서 시인으로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1930년 박용철, 김영랑, 이하윤 등과 ‘시문학’ 동인을 결성하고 《시문학》지를 발간하였다. 1933년에 이태준, 이무영, 유치진, 김기림, 조용만 등과 ‘구인회’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그해 6월부터 《가톨릭청년》의 편집을 맡았다. 1935년에 첫 시집 『정지용시집』을 발간하였다.
1939년에 이태준과 함께 《문장》의 편집과 독자추천시의 심사위원을 맡았다. 그의 손을 거쳐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 이한직, 박남수, 김종한 등의 신인들이 《문장》의 추천으로 등단하였다. 1941년에 두 번째 시집 『백록담』을 발간하였다. 해방 후 1945년 10월에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대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1946〜47년에 〈경향신문〉 주필을 맡아서 당시의 현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1948년에는 은거하여 서예를 하면서 지냈다. 1950년 전쟁이 일어나자 정치 보위대로 끌려가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정지용의 행방은 공식적인 기록과 자료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전쟁 후 정지용이 월북했다는 기사가 나오면서 한국 근대시문학사에서 그의 이름은 지워져야 했으며, 그의 가족들도 월북자의 가족으로 분류되어 많은 고통을 겪었다. 1988년 정부의 납 ․ 월북 문인에 대한 해금조치와 함께 정지용의 이름과 문학도 복권되었지만 그의 월북과 사망 대해서는 지금까지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남한에 살고 있는 정지용의 가족들은 그의 월북설이 허위기사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2005년 3월 11일 방영된 KBS 1TV ‘인물 현대사 : 시대에 갇힌 천재시인 ― 정지용’에서 정지용의 장남 정구관씨가 월북설이 어떻게 조작된 것인지를 실증자료를 들어서 밝히고 있다. 실제로 2001년 3차 이산가족 상봉 때 북한에 살던 정지용의 셋째아들이 상봉대상자에 아버지를 포함시킴으로써 그의 월북설에 대한 의혹을 더해주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한국 전쟁 때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있다가 평양감옥으로 이감된 후 1950년에 폭사(爆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