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2장 35-53절 / 주님의 칼
35)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주머니와 신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가로되 없었나이다.
36)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주머니도 그리하고 검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37)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저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 감이니라.
38) 저희가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대답하시되 족하다 하시니라.
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40) 그 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
41)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42)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 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3)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
45)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을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46)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47)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 둘 중에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의 앞에 서서 와서
48)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49) 좌우가 그 될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검으로 치리이까 하고
50) 그 중에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편 귀를 떨어뜨린지라.
51)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52) 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군관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53)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오늘 본문의 말씀은 주님과 제자들의 삶에 뭔가 심상치 않은 전환의 때가 왔음을 느끼게 합니다. 전에는 제자들끼리 전도하러 내보내실 때에도 전대나 배낭이나 여벌 신발도 가지고 가지 말라 하시던 주님께서 “이제는 “전대도 갖고 배낭도 준비하라” 명하신 것입니다. 특히 놀라운 것은 칼을 지녀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도 겉옷을 팔아서라도 칼을 예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비상사태의 시기가 도래했다고 짐작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이에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아직까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제자들은 즉각적으로 말합니다.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제자들의 반응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반응일 수 있습니다. 주님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알지 못하면 주님의 말씀을 엉뚱한 방향으로 몰고 갈 수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주님께서 드디어 칼을 뽑으시는구나. 이제 우리가 무기를 들고 일어나 싸울 때가 되었음을 알리시는 거야” 여러분! 얼마나 큰 오해입니까?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칼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 오신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왜 칼을 준비하라고 하셨을까요?
첫 번째는 고난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36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주머니도 그리하고 검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칼을 준비하라는 말씀! 여기에 무슨 뜻이 숨겨져 있는 건가요?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라고 했을 때 “족하다”고 하셨습니다. 족하다고 했던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무장봉기나 무력저항을 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장봉기나 무력저항을 명하면서 칼 두 자루로 족하다고 여길 지도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의도는 이야기를 해봐야 소용이 없는 것을 아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기도하러가자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기도하고 싶으셨습니다. 고난 앞에서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기도하셨습니다. 얼마나 고뇌하며 기도하셨는지 땀이 물이 아닌 피가 떨어졌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잠만 자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대제사장과 로마군인들은 가룟 유다를 앞세워 주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그들을 본 베드로는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라는 말을 의지하며 칼을 들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잘랐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귀를 치료하시며 “이것까지 참어라”고 하시며 결코 무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왜 주님께서는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사라.”고 하시며 제자들 특히 베드로같은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셨을까요? 주님께서 말씀하신 의도는 세상에 전쟁을 선포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하나님의 때의 도래를 알리신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변화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고난과 죽음과 핍박과 시험의 때가 이제 곧 시작될 것임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지극히 견디기 어려운 일들이 닥칠 것이며 이에 단단히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주의시키고자 하신 것이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만큼 충격적이고 감내하기 힘든 일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주님의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제자 유다의 배신, 수제자 베드로의 부인, 나머지 제자들의 도망감 정말 그들에게 닥친 시험은 너무나 크고 무거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를 끝까지 생각하시고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칼은 육신의 도구로서의 칼이 아니라, 영혼은 지키는 영적 능력으로서의 칼이라는 사실이 분명해 졌습니다.
두 번째는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40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 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
주님께서는 고난에 대처하기 위해 칼을 사러 시장으로 가시거나 대장간을 가시지 않고 산으로 가셨습니다. 여러분들은 힘들면 무엇을 의지합니까? 우리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명문 프로야구 구단인 해태타이거즈의에서 4번 타자로 이름을 나린 이호성 선수가 모녀4명을 살해한 사건입니다. 그는 잘 나가는 선수였습니다. 그래서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리더쉽도 있어서 지금도 그를 따르는 후배 프로야구 선수가 많다고 합니다. 사업을 해서 돈도 많이 벌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업이 기울어지고 삶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그가 택한 선택은 칼이었습니다. 자신을 아프게 한 사람들을 향해 자신의 길을 방해한 사람들을 향해 그는 칼을 던졌습니다.
그 결과는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칼을 던지면 승리가 아니라 실패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신 주님께서는 고난을 대처하기 위해 기도의 칼을 드셨습니다.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셨던지 무픞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땀을 흘리며 기도하셨는데 땀이 땅에 떨어지는데 핏방울 같이 될 정도였습니다. 주님의 이 자세가 승리의 자세입니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킵니다. 기도하면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실패한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실패한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졸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기도를 신뢰해야 합니다. 기도하면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넉넉히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기도하는 성도가 되십시오. 그러면 주님의 마음을 아실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 내용이 상세하게 나옵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 주님의 연약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더 위로가 됩니다. 성경은 포장하지 않습니다. 있는 사실을 그대로 들어냅니다.
42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 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기도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기도였음을 눈여겨보고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내게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고 어떻게 해서든 피하고 싶은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시기를 구하는 기도, 바로 그것이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통과 치욕, 죽음의 공포, 그리고 그것들을 피하고 싶은 인간적 유혹에 맞서 비장하게 빼어 드신 칼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할 때 중요한 것이 무조건 많이 하고 크게 소리 지르며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진정으로 구하는 기도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실히 해합니다. 아무리 목 터지게 외치며 하루 종일 기도해도 그저 내 원대로 되기만을 구하는 기도는 참된 기도가 아니며, 비록 조용히 기도해도 짧게 기도해도 오직 하나님의 원대로 되기를 진정으로 간구하는 기도가 참 기도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 번째는 이것까지 참으라는 것입니다.
51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칼에 귀가 떨어진 종의 귀를 고치시면서 제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이것까지 참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칼은 베드로처럼 사람을 죽이는 시퍼런 칼이 아니라, 악을 선으로, 배신을 화해로, 고통을 치유로 갚으시는 사랑의 칼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붙잡혀 가시면서 희롱을 당하시고 매를 맞으시며 많은 말로 욕을 들으셨지만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비굴했기 때문이 아니라, 불리한 입장을 모면하시려 했던 것이 아니라,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다음날 공회에 모인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분명한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장 66-70절입니다.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그들이 다시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묻자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 주님께서는 분명하고 당당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대로 말하면 죽을 것이 뻔한 자리에서 당당히 진리를 밝히셨습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서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 내용이 누가복음 23장 2,3절, 누가복음 20장 19-26절에 나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는 저들의 비열한 행위 앞에서 어떠한 항변도 어떠한 탈출의 노력도, 어떠한 비류적인 발언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순종과 사랑과 희생만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께서는 바로 이런 분입니다. 주님께서는 칼을 빼어드렸습니다. 하지만 이 칼을 세상이 도저히 이해할 수도 알 수도 없는 칼이었습니다. 그 칼은 고난을 예고하신 칼이었고, 기도하는 칼이었고, 끝까지 참는 인내의 칼이었습니다.
주님의 칼을 잡고 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