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 목표> 첫째, 동학의 등장배경과 시천주(侍天主), 인내천(人乃天), 후천개벽(後天開闢), 보국안민(輔國安民), 향야설위(向我設位), 물오동포(物吾同胞) 등 동학사상의 핵심개념을 구체적으로 이해한다.
둘째, 동학농민전쟁의 전체적인 전개 양상과 더불어 공주 각지의 동학농민전쟁 유적지를 현장 답사함으로써, 공주지역(특히 우금티) 전투의 전개양상을 구체적으로 이해한다.
셋째, 동학농민전쟁의 역사적 의미와 교훈은 무엇이며, 이를 어떻게 계승 발전시켜야할 것인가(기억 = 기념 = 역사화 전략)를 논의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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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학습주제
○ 1894년 동학농민전쟁 시기 공주 인근에서는 10월 24경부터 11월 11일까지 일본군과 농민군 사이에서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 11월 9일부터 11일 사이 농민군은 우금티를 돌파하기 위해 4,50차례 돌격전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회선포(카틀링식 기관총)까지 동원한 일본군의 화력앞에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일본군과 관군의 막강한 화력 앞에 ‘궁궁을을(弓弓乙乙)’을 새긴 부적도, ‘시천주 조화정(侍天主 造化定)’의 13자 주문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우금티 전투를 고비로 농민군 주력은 노성, 논산, 전주, 원평, 태인 등지를 거치면서 패주에 패주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의 강의 주제는 우금티 농민전쟁의 전개양상과 역사적 의미를 살핌과 동시에, 이를 어떻게 기억하고, 기념하고, 역사화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 보자.
○ 연암 박지원 선생은 연행 사절로 선임되어 압록강을 건너 북경을 향하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는 1천 2백리 요동벌을 마주대하곤 참으로 한바탕 울어볼 만한 곳(<好哭場>, 熱河日記)이라 말했다. 누군가 내게 한바탕 울어 볼만한 곳을 추천하라면 나는 서슴없이 우금티 마루를 추천하고 싶다. 억울하고 슬플 때만 우는 것이 아니다. 연암선생은 갓 태어난 어린아이의 울움을 새로운 하늘을 여는(開天) 울음이라 비유했다. 신동엽시인은 장시 금강(창작과 비평사)에서 먹구름장을 찢고 드러난 푸른 하늘을 보고도 울었다. 그동안 우리는 우금티에서 어떤 울음을 울었나(「이 산하에」 가사 및 노래 삽입)? 패배의 슬픔을 너무 과장한 건 아닐까? 우리는 우금티 마루에서 어떤 울음을 울어야 할 것인가?
○ 오늘 강의에서 특별히 강조하고자는 바는, 우리 고장에 소재한 우금티는, 반제 반봉건투쟁의 단순한 전쟁터가 아니라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을 판가리하는 대회전’, 아니 “19세기말 조선 땅에서 세계사 아니 ‘우주사적’(?)인 파라다임 쉬프트가 진전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일대 사건”(김용옥, (도올 心得) 東經大全)이 벌어진 곳이라는 점이다. 물론, 1994년 농민전쟁 100주년때 일부 뜻있는 시민들의 노력으로 우금티는 국가사적지(387호)가 되기는 했다. 하지만 현재 우금티에는 1973년 천도교측(敎領 崔德新)이 박정희에게 ‘품신(稟申)’, ‘앙청(仰請)’하여 ‘명예회장’과 ‘제자(題字)의 휘호(揮毫)’를 얻어 설립한 ‘동학혁명군 위령탑’, 그리고 공주지역 시민운동 단체인 ‘(사단법인) 동학농민전쟁 우금티 기념사업회’가 뜻을 모아 조성한 몇몇 조형물(목비와 장승, 흙담과 돌탑, 그리고 봉화대)만이 서 있을 뿐이다.
2. 학습 내용
1) <학습주제 1> 동학농민전쟁사 개관
■ <동학농민전쟁의 등장 배경과 전개양상>
○ 국가의 통치역량 상실과 관료의 부패 무능 → 양반 관료 및 지주 등 힘 있는 자들의 억압과 수탈 → 민중생활 피폐(인간다운 생활은 고사하고 생존조차 도모할수 없는 삶) → 자연재해(가뭄과 질병) 극성(사회적 통제의 상실과 재해) → 민중의 정치사회적 불만(세상에 대한 원망, 삶의 재미 의미 상실, 怨民 혹은 亂民化) 고조 → 민중 종교의 번성(현세 도피 혹은 지상천국 구현. 미륵, 정감, 동학, 정역 사상의 등장) → 민중들의 저항운동(소극적 저항, 적극적 저항) 전개 → 민중 억압 및 통제를 위한 비용 증대, 부패 관료들의 중간 횡령 등으로 인한 국가 재정 고갈. ☞ 민중생활의 피폐와 자연재해의 상관성 이해하기. 국가기구의 통치능력 상실 = 사회적 통제력 상실 → 자연재해 극성, 이때의 자연재해는 인재에 가깝다.
○ 조선왕조 지배권력과 외세의 야합 과정, 그 결과를 도식화하면 아래와 같다. 민중 봉기와 체제 위기 고조 → 부패무능한 통치권력(지배세력), 외세와의 야합(청국군 파병 요청,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과 청일전쟁, 작전권 이양) → 동학농민군 진압 → 국권 상실(가족간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깡패를 끌어들였다가 결국은 가족 모두가 핍박당한 꼴).
☞ 조선왕조 정부는 농민봉기가 발생했을때, 왜 청국군의 파병을 요청했을까? 청군 파병 요청으로 말미암아 뒤에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일본군 경복궁 점령과 청일전쟁(보호국화 시도)
☞ 일본의 조선침략과 청일전쟁(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의 해체), 왜 이런 일을 벌였을까? 명치정부의 지도자들의 征韓論, 양육강식의 제국주의 시대(적자생존론=사회진화론의 문제), 天下의 公道 실종.
■ <동학농민전쟁의 성격과 의미>
○ 1894년 동학난리는 부패 무능한 국가와 관료, 농민 수탈과 억압을 일삼았던 양반토호지주들에 저항한 농민들의 반봉건투쟁임과 동시에 일본 청국 등 외세에 저항한 농민들의 반외세운동이었다. 비록 실패하였으나, 농민군의 반봉건 반외세운동은 일제시기 민족해방운동의 효시적 사건이 되었다. 그리고 당시 농민군이 요구했던 국가권력의 민주화(民本), 신분해방과 토지개혁(民生) 요구 등은 곧바로, 혹은 시차를 두고 관철되었다. 이렇게 보면 농민전쟁은 실패한 전쟁이 아니라 성공한 전쟁이라 말할수도 있다.
○ 농민군의 정치사회적 요구(폐정개혁안, 격문 및 원정)를 통해, 당시 농민들의 꿈과 희망이 무엇이었는가를 살필수 있다. 반제 반봉건에 대한 요구, 소박한 듯이 보이나 모두 다 절실한 요구들이었다(동아시아 문화권 이상사회론 = 大同社會論).
<동학농민군의 폐정개혁안 12개조>
1. 동학교도는 정부와의 원한을 씻고 서정에 협력한다.
2. 탐관오리는 그 죄상을 조사하여 엄중히 처벌한다.
3. 횡포한 부호를 엄중히 처벌한다.
4. 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무리를 징벌한다.
5. 노비문서를 소각한다.
6. 7종의 천인차별을 개선하고, 백정이 쓰는 평량갓은 없앤다.
7. 젊어서 과부가 된 여성의 개가를 허용한다.
8. 무명의 잡다한 세금은 일체 거두지 않는다.
9. 관리채용에는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한다.
10. 일본(왜)과 통하는 자는 엄중히 징벌한다.
11. 공채든 사채든 기왕의 것은 모두 무효로 한다.
12. 토지는 균등히 나누어 경작한다.
<儒敎的 大同社會論>
대도(大道)가 행해지는 세상에서는 천하가 모두 만인의 것이다(大道之行也 天下爲公器). 현명한 이와 능력있는 이를 선출하여 관직을 맡겨 신뢰와 화목을 두텁게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의 부모만을 부모로 섬기지 않고, 자기의 자식만을 자식으로 여기지 않는다. 노인들은 편안히 여생을 보낼 곳이 있으며, 장성한 사람들에겐 일자리가 있고, 어린이에겐 모두 잘 성장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져 있다.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없는 부모, 폐인, 질병에 걸린 사람들은 모두 보호와 양육을 받는다. 남자는 모두 자기 직분이 있고 여자는 모두 자기 가정이 있다. 재화와 땅에 버려지는 것은 싫어하지만 반드시 자기만 사사로이 독점하려 하지 않으며, 힘이 자기로부터 나오지 않음을 부끄럽게 여기지만 자기만을 위해 힘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음모가 일어나지 않으며, 도적이나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니, 그래서 사람들은 바깥문을 잠그지 않는다. 이러한 사회를 대동사회라 한다(禮記의 <禮運>)
2) <학습주제2> 동학사상과 동학농민전쟁
○ ‘1894년 농민전쟁설’, 혹은 ‘갑오 농민전쟁설’은 1894년 봉기를 봉건제 말기 프랑스나 독일에서 전개된 농민전쟁에 비견되는 사건으로 보려는 견해들로서, 1894년 봉기와 동학사상(교단)의 관련성을 부정하거나 중요하지 않게 보려는 이들의 견해라 할수 있다. 하지만 동학사상과 교단은 1894년 사건의 전개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 1894년의 동학농민전쟁은 이 땅에서 나고 자란 민중들의 소중한 꿈과 희망이 무엇이었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당대적 삶의 양식과 의식, 혹은 당시의 사회관계나 질서에 대한 ‘전복적(해체적) 사유’가 돋보인다. 동학사상, 인내천(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사상), 특히 ‘天地人의 相生과 造化’이라는 화두를 제기하고 있다. 이런 사상은 우리시대(근대)의 무거운 짐임과 동시에 새로운 미래사회(개벽과 천지공사)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힘이라는 점에서,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다.
-. 반외세 반봉건(輔國安民, 斥攘斥倭)의 정신은 물론이고 세상에서 가장 힘없고 비천한 사람이 진정한 한울님이라는 사상(人乃天, 事人如天). 天地父母, 物吾同胞 등으로 상징되는 생태주의, 혹은 생명사상(김지하)은 우리 모두가 소중히 여겨야할 우리 나름의 전통이자 자산이라 할수 있다.
-. 吾道無爲而化矣 守其心正其氣 率其性受其敎 化出於自然之中也. “우리 도는 무위이화라. 그 마음을 지키고 그 기운을 바르게 하고, 한울님 성품을 거느리고 한울님의 가르침을 받으면, 자연한 가운데 조화가 저절로 이루어진다”.
-.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 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 主者 稱其尊而與父母同事者也. 造化者 無爲而化也. 定者 合其德定其心也.
○ 동학농민전쟁 시기의 ‘輔國論’(도울 보 = 기운 수레의 균형을 바로잡는다는 뜻, 일종의 국가 재건 혹은 혁신론)과 교과서의 ‘보국(保國, 報國)론’은 그 성격이 질적으로 다르다. 교과서처럼 “나라가 위태로울때 농민들도 나섰다, 무조건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국기에 대한 맹세’ 식 ‘保國論’이나 ‘報國論’을 토대로 동학농민전쟁의 역사를 서술하는 것은 일종의 역사왜곡이다.
3) <학습주제3> 동학농민전쟁의 역사적 의미와 교훈
○ 국정교과서는 동학농민운동의 역사적 의미로서, 민중이 주도한 최초의 반외세 반봉건투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물론 이런 해석이나 의미부여 가운데서도 배울 점이 많다. 하지만 오늘 내가 강조하고 싶은 동학농민전쟁의 교훈은 크게 보면 두가지다. 그 하나는 ① 역사 발전의 주체는 언제나 일하는 사람들이었라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② 난리를 피하려면 서로 나누는 문화가 발전해야 한다는 점 등이다.
1) 역사발전의 주체는 일하는 사람들이다.
○ 동학농민전쟁의 첫 번째 교훈은, 당시 국가나 관료들은 다 자기 목숨과 이익을 위해 허둥지둥했음에 반해, 국가로부터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했던 농민들이 오히려 국가(보국안민, 척양척왜)와 이웃(노비, 과부 해방)을 위해 목숨을 건 투쟁을 전개했다는 사실이다.
-. 이론적으로는 국가로부터 특권을 많이 부여받은 사람들이 더 애국적이어야 옳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많다. 구한말 국가를 팔아먹은 자들은 당시의 지배자들이었다(황실재산 유지, 작위와 은사금).
-. 당시 일본의 조선 진출을 반겼던 사람들은 없었을까? 당시 대지주들, 향리를 떠나 일본군 수비대가 존재했던 도시로 이주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 시대 모순(당시대의 문제점)을 가장 적나라하게 확인할수 있는 곳은 삶터, 그중에서 일터다. 요컨대, 일하는 사람들은 시대모순의 결절점에서 삶을 영위하던 시대모순의 담지자(체현자)이다. 어느 시대이던 늘 일하는 사람들이 역사발전의 주체이자 동력인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 현재 우리 삶을 규정하는 주요 힘(근대 = 자본주의의 힘)은 돈과 빽이다. 돈과 빽의 흐름이 가장 잘 보이는 곳이 ‘삶터’, 그 가운데서도 ‘일터’, 특히 시장이다.
-. 신자유주의와 한미자유무역협정(한미FTA) 문제에 대한 민중들의 비판적 주장과 반대, 겸허히 경청해야 한다. 국가의 공공성 수호(확대) 노력, 공적 권력의 시장 관리, 대책없이 폐기되어서는 안된다.
2) 난리는 무조건 없어야 한다. 난리를 피하려면 怨民이 없어야 하고, 怨民을 없애려면 서로 돕고 나누는 문화를 발전시켜야 한다
○ 1894년 농민봉기를 교과서는 ‘동학농민운동’이라 호명하고 있으나, 흔히 동학난리라 불리웠다. 한국 근현대사 과정에서 수시로 무수한 난리가 났었으나, 가장 큰 난리는 역시 동학난리와 6.25난리(動亂)이었다.
-. “매일 난리나 났으면 좋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민중들은 여기저기 모여서 말하되, 낫네 낫서 난리가 낫서, 에이 참 잘 되얏지 기냥 이대로 지내서야 백성이 한 사람이나 어디 남아 나겠나 하며 그날이 오기만을 기다리더라”(사발통문)
-. ‘동학난’이라는 호명(呼名), ‘官(지배층)의 언어’라는 선입견, 버려야 한다. 당시 민중들이 입에 달고 살던 말이, “난리났네 난리났서”, 혹은 “난리나 났으면 좋겠네”(亂離意識) 하는 말이었다.
○ 동학난리가 난 이유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다른 무엇보다도, 당시 민중들의 말세(末世)의식(= 난리의식)을 이해해야 한다. 난리는 무조건, 없어야 한다. 그리고 희망을 상실한 사람들(인간다운 삶의 좌절) = 寃民의 난민화, 난민화를 방지하려면 서로 돕고 나누는 문화가 형성되어야 한다.
-. 인간다운 삶이 유린되었을때, 인륜을 지킬수 없을때(예를들면, 노부모나 처자식이 굶고 병들어 죽는 것을 속절없이 지켜봐야 할때) 흔히 말세라 말한다. 말세에는 막 가는(사는) 사람들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 ‘난리’나 ‘반사회적인 투쟁’은 늘 모두에게 불행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돈도 빽도 없는 이들의 입장에서 볼때는 난리는 무조건 피하고 볼 일이었다. 반사회적인 폭동(作亂질)은 상생(相生)도 해원(解寃)도 아닌, 누구 말대로 ‘죽음의 굿판’(김지하)일 뿐이다.
○ 우금티 마루 위의 민중들은 결코 죽음의 굿판도 마다하지 않는 ‘막 가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사람이 곧 하늘인 세상을 만들려면, 상생과 해원의 뜻을 담은 나누는 문화, 달리 말하면 밥 한그릇에 만고의 진리가 고스란이 담겨있음을, 그것도 배워서 안 것이 아니라, 일과 삶을 통해 이미 몸으로 알고 실천했던 사람들이었다.
3) 동학의 전복적 사유에서 ‘탈근대의 길’, 혹은 ‘변혁의 주체와 목표에 대한 새로운 사유’(상상과 탐구)를 진전시켜야 한다.
○ 동학사상의 재조명(<모심과 살림 연구소>, 홈페이지 게시글 참조), 동학사상이나 전통사상(예를 들면 풍수사상 등)에서 김지하 류의 ‘생명사상’이나 ‘에콜로지적(생태주의) 요소’를 발견하려는 노력, 소중하다. ‘다른 길’, ‘새로운 길’을 찾고자 할 때 과거의 선택과 경험 비판적으로 성찰해야 한다.
4) <학습주제 4> 동학농민전쟁 기념사업의 방향과 방법
○ 첫째, “동학농민전쟁 기념사업은 단순한 위령(현창)사업이 아니라, 그 자체가 새로운 역사만들기 운동이 되야 한다”. 단순한 애국심을 고취하는 사업이 아니라, ‘민중투쟁의 역사적 상징이나 전통’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사업이 되어야 한다.
-. ‘역사만들기 운동’이란 역사(언어적으로 재현된 과거)를 소재로 한 일종의 ‘의사소통운동’, 좀 거창하게 말하면, 공동체 구성원들이 역사를 매개로 소통을 통해 공동의 꿈과 희망과 지향과 가치를 창조하는 운동이다.
-. 동학농민혁명 특별법 통과 이후 국가의 법률적 재정적 지원 가운데서 기념사업이 진행되면서, 동학농민전쟁의 역사를 이른바 ‘내셔널 히스토리’(국가민족사) 속에 뒤섞어 놓으려는 기도가 눈에 띄게 두드려져 보인다.
○ 둘째, “동학농민전쟁 기념사업은 그 자체가 기념(일)투쟁이 되어야 한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기념(일)투쟁은 역시 메이데이투쟁이다. 메이데이투쟁은 ‘오늘의 관점’ 또는 ‘민중의 관점’에서 왜곡되고 은폐되어온 민중투쟁의 역사를 새롭게 ‘해석(interpretation)’하고 ‘재현(representation)’하는 투쟁, 달리 말하면 새로운 ‘역사적 상징이나 전통’을 만들어가는 투쟁이다.
-. 총독부 경찰은 이른바 「사상운동경계력(思想運動警戒曆)」을 만들어 기념(일)투쟁을 막아보고자 했다. 일제시기 민족해방운동 주체들이 중시했던 기념일은, ‘3․1기념일’, 코민테른 창건기념일(3월 2일), 조선공산당 창립 기념일(4월 17일), 메이데이(5월 1일), ‘6․10만세기념일’, ‘국치(國恥)기념일’(8월 28일)’, 소비에트혁명기념일(11월 7일) 등이었다. 이런 날이 다가오면 운동 주체들은 기념 집회나 시위, 대자보나 격문 배포투쟁은 물론이고 민속놀이나 각종 경연대회, 소인극(素人劇)이나 노래공연, 집단노동이나 헌금투쟁 등을 전개하였다.
○ 셋째, 동학농민전쟁은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민중의 혁명이었으므로, 기념사업은 당연히 민중사적 과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 ‘과거의 힘’이라는 말이 있듯이, 동학농민전쟁의 역사는 쉽게 만들어낼수 없는 우리 모두의 소중한 역사자산이자 풍부한 민중적 상상력의 보고이다.
-. 동학농민전쟁이나 우금티전투의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살리려면 시대적 상황에 맞게, 농업․농민살리기운동, 지역․농촌살리기운동, 생태환경살리기 운동단체 등을 전개하고 있는 다양한 단체와 함께, 다양한 형식과 내용의 기념사업을 전개해야 한다. 왜냐하면 동학이나 동학농민전쟁은 위와같은 운동들의 역사적 씨앗이자 뿌리이자 밑거름이기 때문이다.
4. 맺음말
○ 동학농민전쟁 기념사업이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위한 일이 되게 하려면 기념사업은 당연히 공동체의 생존과 인간다운 삶에 기여하는 방향, 달리 말하면 우리 사회의 역사문화 역량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이런 기념사업이 되게 하려면, 동학농민전쟁 기념사업은 희생자들의 억울한 죽음 애도하는 단순한 ‘위령의 제의(祭儀)’가 되어서는 안된다.
○ 동학농민전쟁 기념사업은 동학농민군의 꿈과 희망, 그 패배와 죽음의 의미를 우리 모두 주체적으로 반추하는 행위, 달리 말하면, 역사 발전의 주체와 목표를 새롭게 반성하고 상상하는 새로운 ‘역사만들기’ 운동이자, ‘희망찾기’ 운동이 되어야 한다. 동학의 향아설위(向我設位)란 바로 이런 기념행위를 이르는 말일수도 있다. 이런 노력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질때, 11월 11일은 메이데이보다도 훨씬 더 값지고 의미있는 날이 될 수 있어야 한다.
○ 강의 모두에서도 밝혔듯이, ‘우금티 마루에 흐르던 소리없는 통곡’(「이 산하에」)과 호곡장 대목의 ‘갓난 아이의 하늘을 찢는(開天) 울음’은 그 수준과 차원이 다르다. “우금티 전투는 반제 반봉건 투쟁이었을 뿐만 아니라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을 판가리하는 전투였다는 것, 그러므로 우금티에서는 폭정과 압제의 장막 정도가 아니라 새로운 세상, 새로운 하늘을 열어젖히는 천지개벽의 큰 울음을 울어야 한다는 것”, 유념해야 한다. 우금티 위령제는 천지개혁을 염원하는 큰 울음판이 되어야 한다.
<참고자료: 동학농민전쟁 관련 사건 연표>
[1894년 이전]
<1892년 10월> 공주에서 충청감사에게 서인주 등 동학 지도자들이 ‘동학 교조 최제우의 신원’을 요구하는 소장을 올림(서학의 문제점과 일본 상인들의 부당한 상행위를 비판함)
<1892년 11월> 전북 삼례에서 전라감사에게 ‘동학교조 신원’ 제기
<1892년 12월> 충청도 전라도 동학도 1만7천명이 공주 부근에서 모여 동학의 공인과 탄압의 중지를 요구하며 집회를 개최함(공주취회).
<1893년 2월> 동학교도들이 광화문에서 3일간 복합(伏閤)상소운동을 벌였으나 조선 정부의 탄압을 받음.
<1893년 3월> 충청도 보은 취회(3월 11일부터 3월 20일 또는 4월 3일), 전라도 금구 취회(집회)를 열어 동학교조 신원과 척양척왜를 요구함(2만명 참가)
<1893년 11월> 전봉준 등 남접계 중심 인물, 사발통문 모의, 1893년 1년 동안 전국 각지에서 수십 차례 민란이 일어남
[1894년 주요사건]
<1월 10일> 고부농민봉기가 일어나 3월 13일까지 2달간 지속. 탄압으로 해산.
<3월 12일> 충청도 금산 농민봉기
<3월 14일> 공주 정안면 궁원(운궁리)에서 동학접주 임기준의 지도하에 7백여 명이 모여, 장기면 대교리(한다리)에서 개최된 儒會를 해산시킴(16일 궁원에 모였던 농민군이 이를 해산시킴). 이후 공주와 충청도에서 농민군들의 움직임이 지속적으로 나타남.
<3월 21일(20일)>, 전북 무장 동학농민군 4천명 봉기
<3월 25일> 백산 기포(전봉준을 대장으로 추대, 농민군 4대강령과 격문 발표)
<4월 6일> 충청도의 농민군이 진잠, 연산, 옥천, 공주 이인역 등에서 5-6천명씩 모임
<4월 7일> 공주 이인역에서 동학에 반대하는 보부상 4천명이 모여 집회
<4월 6일-7일> 동학농민군이 전라감영군에게 황토현에서 승리
<4월 8일> 충청도 청산에서 봉기한 동학농민군이 회덕 관아를 점령하고 무기를 탈취한 뒤 진잠으로 향함.
<4월 23일> 동학농민군이 장성 황룡촌에서 중앙군(경군)에게 승리
<4월 27일>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
<4월 28일> 조선정부 청나라에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해 병사를 청하기로 결정(일본은 4월 26일 조선 출병을 결정함)
<5월 8일> 전주화약, 동학농민군 전주성에서 철수함.
<6월 21일> 서울 용산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혼성여단이 경복궁을 점령함. 조선군대와 일본군 사이에 하루 종일 전투가 벌어짐.
<6월 23일> 일본이 청일 전쟁을 일으킴
<9월 10일> 전봉준군이 재봉기를 위해 삼례에 대도소를 설치. 여산현 점령.
<9월 18일> 최시형 청산에서 기포를 결정
<9월 말경> 전봉준군이 은진․논산에 이름
<10월 15일>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800여명)가 농민군 진압을 위해 세 부대로 나누어 남하함.
<10월 23-11월 11일> 북접군과 합세하여 공주 대회전(이인전투, 효포전투, 우금티전투) 전개, 농민군 패배
[1894년 공주전투 관련 사건]
<3월 14일> 공주 궁원에서 동학접주 임기준의 지도하에 7백여명이 모여, 대교리에서 유회를 해산시킴(16일 궁원에 모였던 농민군이 이를 해산함).
<4월 6일> 충청도의 농민군이 진잠, 연산, 옥천, 공주 이인역 등에서 5-6천명씩 모임
<4월 7일> 공주 이인에서 동학에 반대하는 보부상 4천명이 모여 집회
<7월 3일> 공주 이인에서 동학농민군이 집회
<7월 7일> 공주의 대교리(장기면), 공수원(우성면), 반송(이인면) 등에서 동학농민군 수백명이 돈과 곡식을 빼앗음.
<7월 12일> 공주의 동천점(우성면)에 동학도들이 ‘보국안민’과 ‘척화거의(斥化擧義)’를 주장하며 주둔함.
<8월 1일> 공주 유생 이유상은 건평(논산지역)에서 민준호가 유회(儒會)를 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함께 ‘토왜보국(討倭報國)’하자고 청했으나, 거절당하자 유회군 1백여 명을 이끌고 떠나감.
<8월 1일> 공주 궁원(弓院)에서 동학농민군 1만 여명이 모여 공주 부내로 들어와 유진(留陣)하려고 함
<8월 2일> 공주 궁원에서 취회했던 농민군 수천 명이 깃발을 들고, 창과 칼을 든 채 접주 임기준(任基準)의 지휘 아래 공주 부내로 진입함.
<8월 3일> 공주 부내의 농민군이 해산하여 공주부에서 10여리 혹은 30여리 떨어진 금강 근처에 유진함.
<8월 4일> 도인(道人) 7백 명이 공주에서 정산(定山) 평촌(坪村)을 거쳐 광암(廣岩, 광정리?)으로 진출함.
<8월 4일> 농민군 수천 명이 다시 공주 감영으로 모임
<10월 21일> 목천(천안) 세성산의 농민군이 관군(이두황군)에게 격파당함.
<10월 23일> 이인역에 진을 친 농민군이 일본군(스즈키 소위가 지휘하는 50여명)과 관군의 공격을 받음.
<10월 23일 밤-24일> 공주 북동쪽에 진을 친 북접 휘하의 옥천포 농민군이 관군(홍운섭군)에게 격파당함.
<10월 24일-25일> 오전, 공주 동쪽 능티고개(월성산 고개, 계룡면 신기리 효포초등학교 인근)를 넘기위해 농민군과 일군 관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임. 농민군이 경천 논산으로 퇴각함.
<11월 8일> 농민군이 다시 공주를 포위.
<11월 9일> 오전 농민군이 우금티를 넘기위해 일군․관군 연합군과 40-50차례 공방전을 벌임.
<11월 15일> 남북접 농민군, 논산 황화대에서 접전, 강경으로 후퇴함. 이후 토벌군(이규태, 이두황군)의 무자비한 소탕전(집단 학살)이 전개됨.
<11월 25일> 남북접 농민군, 원평 구미란 전투 패퇴(태인이동), 전봉준 휘하 주력 부대 해산.
<12월 2일> 전봉준, 전남 순창군 피로리에서 체포됨. 12월 11일 손화중 고창에서 체포됨.
첫댓글 동학난리에 대해 정말 체계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글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글을 읽으면서 공주에 대해 무한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ㄴ^!!
교수님께서 꼭 읽어보라고 하신 이유를 알 수 있었고 그동안 단순히 이름만 알고 있었던 우금치 사건의 더 깊은 면도 많이 알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동학농민운동에 대해서 표면적인부분만 보고 있었던것 같습니다. 과연 정말로 농민들이 난을 일으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우리가 왜 이 사건을 기념하고 기억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깊은 고민을 할 수 있는 강의였습니다
오늘 시험주제이기도 했고 저번 행사들과도 많은 관련이 있었기 때문인지 몰라도 정말 동학농민운동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배운 것 같습니다. 정말 자세히 더 알고 어떻게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지 다시 한 번 되새겨봐야겠다고 많이 느꼈습니다.
오늘 수업을 통해 교과서에서만 살짝 배우던 동학농민운동에 대해 더 깊게 알 수 있었습니다.
교과서에서 배운 동학농민운동의 의의와 교훈을 다시 한번 되새겼고, 또한 특히, 다르게 생각해서 동학농민운동이라는 '난리'가 어쩌면 일어나지 않는게 나앗을 수도 있다는 것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반외세 반봉건에만 치우쳐 배웠던 동학동민운동에 참 뜻을 알아갑니다. 난리는 없어야 한다는 말이 굉장히 인상깊게 남는 강의노트 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