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적인 위빠사나 명상수행
Practical Vipassanā Meditational Exercises
by Mahāsī Sayāda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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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빠사나(Vipassanā)수행방법
위빠사나 혹은 통찰 수행은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정신적-신체적(물리적) 현상의 성격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말한다.
여기서 신체적(물리적) 현상이란 우리 주변에서 분명하게 지각된 사물이나 대상을 말한다. 우리가 지각하는 몸 전체란 한 덩어리의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정신적인 현상이란 의식작용이다. 이러한 물질과 정신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고 생각할 때마다 생겨남이 분명히 지각되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들을 관찰하여 매번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닿고, 생각할 때마다 이러한 사실을 ‘봄, 봄’, ‘들음, 들음’, ‘냄새, 냄새’, ‘맛, 맛’, ‘닿음, 닿음’, 또는 ‘생각, 생각’이라고 주시해야만 한다.
그러나 수행 초기에는 일어나는 모든 사실들을 주시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분명하고 쉽게 지각되는 것을 주시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호흡을 할 때마다 배가 일어나고 꺼지는 이 운동은 항상 분명하게 일어난다. 이것은 풍대(風大: Vayodhātu, 동적 요소)로 알려진 물질적인 특성이다. 누구나 이 움직임을 의식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것은 배를 유심히 관찰하는 마음으로부터 이루어진다. 숨을 들이쉬면 배가 불룩해지고 ‘일어남’이라고 마음속으로 주시하고, 배가 꺼질 때는 ‘사라짐’이라고 마음속으로 주시해야 한다. 만약 움직임이 분명하지 않아서 정신적으로 인지할 수 없으면 손바닥은 배에 대면된다.
숨 쉬는 법을 바꾸지는 말아야 한다. 천천히 혹은 빨리 하지 말아야 한다. 또는 너무 깊이 하려고 애써서도 안 된다. 숨쉬는 방법을 바꾸게 되면 쉽게 지친다. 꾸준히 평상시대로 호흡하면서 있는 그대로 배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만을 주시하면 된다. 주시할 때는 소리내어 말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한다.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당신이 뭐라고 이름짓고 말하든 상관없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알고, 느끼는 것이다. 배의 일어남을 주시할 때에도 움직임이 시작될 때부터 끝날 때까지 마치 눈으로 그것을 보듯이 주시해야 한다. 배가 꺼질 때에도 이와 같이 한다. 움직임이 일어남과 동시에 인식하는 방식으로 움직임이 일어나는 것을 주시한다. 움직임과 움직임에 대한 정신적인지는 마치 표적을 맞추려는 돌처럼 동시에 일어나야 한다. 배가 사라지는 움직임도 이와 같이 한다.
배 움직임을 보는 동안 마음이 다른 곳을 방황하게 되는 수가 많다. 이럴 때에 또한 ‘방황, 방황’이라고 마음속으로 말해야 한다. 한 번 혹은 두 번 주시되면 마음이 방황하는 게 멈춘다. 이렇게 되면 다시 배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습을 보는 것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만약 마음이 어느 곳으로든지 가면 ‘감, 감’이라고 주시하고, 머릿속으로 누군가를 만나면 ‘만남, 만남’이라고 주시한다. 그리고 난 다음 다시 배의 일어남, 사라짐으로 되돌아간다. 만약 누군가를 만나 이야기하는 상상을 할 경우 ‘말함, 말함’이라고 주시한다.
다시 말하면 어떠한 생각이나 회상이 일어나면 꼭 주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상하고 있으면 ‘상상’이라고 주시하고, 생각을 하고 있으면 ‘생각’이라고, 계획을 하고 있으면 ‘계획함’, 자극을 느끼면 ‘느낌’, 회상하고 있으면 ‘회상’, 행복하다고 느끼면 ‘행복’이라고, 싫증이 나면 ‘싫증’, 기쁘면 ‘기쁨’, 낙담하고 있으면 ‘낙담’이라고 마음속으로 주시한다. 이렇게 모든 의식행동을 인식하는 것을 심수관(心隨觀 : cittānupassanā) 이라고 한다.
이렇게 의식행동을 주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의식행동들을 한 사람 혹은 개인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상상하고, 생각하고, 계획하고, 아는 (지각하는) 것이 바로 ‘나’ 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한 개인이 있어 살고 생각해 온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개인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에 단지 계속적이고 연속적인 의식행동들만이 있을 뿐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의식행동들을 인지하고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의식행동이 매순간 일어날 때부터 주시해야 한다. 이렇게 주시하면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나서 다시 배의 일어남 사라짐을 주시하는 것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오랫동안 명상을 하고 앉아 있으면 뻣뻣한 느낌과 열기가 몸에서 일어날 것이다. 이것들 역시 신중하게 주시되어져야 한다. 아픔이나 지루함 역시 이와 같이 보아야 한다. 이러한 모든 감각들이 고수(苦受 : dukkhavedanā 불만족감)이며, 이것들을 인식하는 것은 수수관(受隨觀 : vedanānupassanā)이다. 이러한 감각들을 모두 다 인식하지 못하고 놓치는 경우 “나는 굳어있고, 열이 나고, 아프다. 좀 전에는 모든 것이 잘 되었는데 이제는 불쾌한 감각들 때문에 불편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감각’과 ‘나’를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이다. 실제로 개입되는 ‘나’란 없다. 단지 새로운 불쾌한 감각이 계속해서 꼬리를 물고 연속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마치 계속적이고 연속적으로 전기충격이 이어짐으로써 전등을 켜는 것과 같다. 매순간 몸에서 불쾌감이 계속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감각은 그것이 뻣뻣하거나, 덥거나, 아픔이 되었거나 간에 신중하고, 진지하게 주시되어야 한다. 실제 수행의 초기에는 이러한 감각이 강해져서 자세를 바꾸고 싶은 욕구를 초래할 수 있다. 이러한 욕구는 주시되어야만 하고, 이후에 수행자는 다시 뻣뻣함, 더움 등의 감각을 주시하는 것으로 되돌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