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고라니는 왜 뿔이 없는 것일까?
작은 냇가 두둑에서 왠 아낙이 쑥을 캔다. 나도 한 편에서 쑥을 캔다. 저편과 이편은 푸른색 울타리 망으로 경계가 나누어져 있다. 그런 쑥은 울타리를 경계로 운명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아낙은 봄나물로 쑥을 캐는 거고 나는 쑥대밭을 이룬 밭에 쑥을 잡초로 간주하여 캐는 것이다. 불과 저만치 거리인데 쑥의 운명이 다르다는 것이 묘한 기분을 만든다. 인생도 때와 상황에 따라 취급을 달리 받는다는 것을 나는 너무 잘 알고 있다. 필시 자기 운명대로 사는 거다. 문득 윤오영의 수필 ‘염소’ 란 글이 떠오른다.
<세 마리의 어린 염소는 오늘 저녁에 다 같이 돌아갔다가, 내일 아침에 다시 나오게 될 것인가. 혹은 그 중의 한 마리는 가다가 팔려서 껍질을 벗겨 솥속으로 들어가고, 두 마리만이 가게 될 것인가, 또는 어느 것이 팔리고, 어느 것이 남아서 외롭게 황혼의 거리를 타달거리고 갈 것인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염소 자신도, 끌고 가는 주인도, 아무도 모른다. 염소를 끌고 팔러 다니는 저 주인은, 또 지금 자기가 걸어가는 그 길을 알고 있는 것인가.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염소가 지나간 그 보도 위로 걸어오는 것이다.>
그런데 저 아낙과 나 사이에 가로 놓인 푸른 울타리는 그냥 땅 경계가 아니다. 요즘 시골에서 흔히 보는 고라니 침입을 막기 위한 1.5 미터 울타리로서 나도 내 땅에 태어난 식물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막아 세워 놓은 것이다. 작년 가을 4마리 고라니를 만났었다. 내 땅 위에 남겨 놓은 흔적을 보아 아마도 그동안 내 땅을 자기 집 안방으로 생각했던 게 분명한 놈들이다. 녀석들은 뭐야 저놈은? 하듯 쳐다보고는 도망도 안 갔다. 그 무렵 하늘에서는 까마귀가 시끄럽게 굴면서 저놈은 뭐야? 를 또 마찬가지로 하던 참이다. 녀석들로서는 분명 나는 이방인이었다. 며칠이 지나자 까마귀는 내 거주를 어쩔 수없이 용인한 듯 더는 시끄럽게 소리치지 않으며 이따금 ‘까악’ 소리와 함께 나를 지켜보았다. 나는 그때마다 녀석을 보며 우리 친구 하자! 하며 응수를 하곤 했다.
고라니도 처음 마주할 때 보다는 멀리 있었지만 곁을 떠난 것은 아니었다. 산속에서 바스락 소리가 나면 영락없는 고라니 4마리였다. 한겨울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이고 황량한 겨울 바람이 세차게 몰아쳐 농막의 정적을 공포로 휘감을 때 한적해서 좋다는 호기는 어느새 무서움으로 돌변하곤 한다. 그때 마주한 선명한 고라니 발자국으로부터 얻는 안도감은 또 다른 성질의 동질감이 있다. 삶이다. 녀석들 발자국은 그렇게 늘 저 아랫마을까지 이어지곤 했다. 녀석들 발자국을 살펴 보면 큰놈은 성큼성큼 걷고 어린놈은 폴짝폴짝 뛰는 게 분명했다. 아마도 어린놈은 새끼일 것이다. 저 밑에 도로까지 내려간 것을 보아서도 짐작이 가지만 엄동설한에 먹을 것 찾기가 만만치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동안 녀석들을 잊고 지냈다. 어느덧 3월, 늦가을에 심은 튤립 비올라가 싹이 돋고 화원서 사다 심은 펜지가 봄기운에 힘입어 막 솟아오르려던 그쯤이다. 오늘은 얼마나 컸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농막에 가면 문도 열기 전 제일 먼저 바라보는 앙증맞은 새싹들이다. 그런 녀석들이 하루아침에 모두 싹뚝 잘려있었다. 튤립은 굵은 꽃대는 물론 꽃까지도 몽땅 사라져 버린 것이다. 고라니가 갉아 먹은 흔적이 완연했다. 이틀이 지나자 아래쪽 화단도 온전하지 않았다. 인터넷에 고라니가 꽃을 먹는다는 이야기가 없어서 안심했는데 제대로 당한 것이다. 희한한 게 옆에 혹시나 하고 심은 방풍나물은 손도 안 댔다. 고라니를 어쩌든 대처해야 한다 싶었다. 고라니가 싫어하는 냄새가 살충제라 했다. 그래서 주변에 뿌렸는데 주말에 비 한 번 오면 그만 냄새가 사라져 살충제로는 감당이 안 된다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게 크레졸 비누액이다. 가격대비 괜찮기는 한데 매번 갈아 줘야 하는 고역이 따른다. 어쨌든 크레졸을 비치 해 놓은 후로는 고라니가 얼씬거리지 않았다. 하지만 향기로운 꽃 냄새를 맡기는 글러 먹은 형국이고 작은 PT병으로 인해 구김살이 느껴졌다. 그래서 생각 끝에 푸른 동물 망을 비싼 돈 들여 설치한 것이다.
이후 녀석은 산속에서 우리를 빤히 쳐다보며 서성거렸다. 작년까지만 해도 바로 내 땅이 그들의 먹이터이고 삶의 둥지였는데 참 아쉽게 되었다. 녀석이 도망 안 가고 그렇게 쳐다보는 것이 그런 아쉬움 때문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배고픔이다. 그러던 며칠 전 평소와 다른 녀석들의 외마디 울음소리가 산속에서 깊이 들려왔다. 여느 때 소리와는 사뭇 달랐다. 그리고 이어지는 개 짖는 소리, 고라니는 세계적으로 희귀종이라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많이 산다. 농가에서는 고라니가 큰 골칫거리임에 틀림이 없다. 누군가가 내게도 고라니를 잡을 포수를 소개해주겠다 했는데 나는 그러지는 못하겠다 싶었었다. 한 마리당 7만 원씩 현상금까지 걸린 고라니, 나는 이후 고라니를 내 땅 주변에서 보지 못했다. 혹시 그때 죽은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더라도 새끼 두 마리는 배고픔에 죽었을지도 모른다. 이 동네 산하도 점점 사람들이 몰려 집을 짓고 삶을 꾸리려 하는데 녀석들로서는 큰일이 아닐 수 없다. 저렇게 내몰리다가는 이내 멸종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나마 다행이라 할까. 고기 맛이 좋다 하면 아마도 바로 멸종 대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내 농막 근처에는 사슴 농장이 있다. 뿔이 제값을 하기 때문에 먹는 것은 아쉬움 없이 잘 먹고 있을 녀석들이다. 고라니는 생김도 사슴과 비슷하던데 차라리 뿔이라도 달고 살지 그랬냐 하는 생각이 든다. 멧돼지같이 포악하지도 않은 녀석이 순한 눈빛 하나로 이런 세상에서 버티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닐 것이다. 삶은 지독히 운명적이다. 어느 것이 팔리고, 어느 것이 남아서 외롭게 황혼의 거리를 타달거리고 갈 것인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염소 자신도, 끌고 가는 주인도, 아무도 모른다. 윤오영이 수필 염소에서 말한 그대로 나 역시도 그 말을 곱씹으며 오늘도 산속을 유심히 살핀다. 괘씸한 놈들이라 말 한 게 엊그제인데 까맣게 잊고 어느 참 녀석들이 떠난 자리가 그렇게 아쉽고 보고 싶어진다. 그래! 자기 운명대로 사는 거야. 그 말이 무슨 위안이라도 되는 양 나는 오늘도 괜한 운명 타령이다.
첫댓글 여긴 가끔 고라니 봐요. 긴 목에 순한 눈이 매력입니다.^^ 산비탈을 뛰어오르는 것을 보면 놀라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