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광기(太平广记)·신선(神仙)·왕자교(王子乔)』, 원문과 해석
王子乔者,周灵王太子也。好吹笙作凤凰鸣。游伊洛之间,道士浮丘公,接以上嵩山,三十余年。后求之于山,见桓良曰:“告我家,七月七日待我于缑氏山头。” 果乘白鹤,驻山岭。望之不到,举手谢时人,数日而去。后立祠于缑氏及嵩山。---『太平广记 · 神仙 · 王子乔)』
■ 해석:
왕자 교라는 사람은 주 영왕의 태자였다. 그는 생황을 불기 좋아하고 봉황이 우는 소리를 냈다. 윤수와 낙수 사이에서 노닐고 있었는데, 도사 부구공이 그를 데리고 숭산으로 올라가서 거기에서 30여 년을 지냈다. 나중에 사람들이 숭산으로 가서 그를 찾았는데, 왕자 교가 환량이라는 사람을 만나 말했다: "우리 집 사람들에게 알려 주게나, 7월 7일 그 날 구씨산 산꼭대기에서 나를 기다리라고." 그 날 보니 과연 왕자 교가 흰 학을 타고 구산의 산꼭대기에 서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을 바라보기만 할 뿐 내려오지 않고 손을 들어서 그 때 온 사람들에게 인사만 할 뿐이었고 며칠이 지나자 학을 타고 날아가 버렸다. 후세 사람들이 구씨산과 숭산에 그의 사당을 세웠다. --- 『태평광기·신선·왕자교』
■ 단어와 어구 풀이:
王子[wángzǐ]: 왕자/ 乔[Qiáo]: 교 (* 인명)/ 者[zhě]: 자, 사람/ 周灵王[Zhōu Língwáng]: 주나라 영왕/ 太子[tàizǐ]: 태자/ 也[yě]: …이다/ 好[hào]: 좋아하다/ 吹[chuī]: 불다/ 笙[shēng]: 생황/ 作[zuò]: 내다, 만들다/ 凤凰[fènghuáng]: 봉황 (* 전설상의 새 이름)/ 鸣[míng]: (새 등이) 울다, 울음/ 游[yóu]: 노닐다/ 伊洛[Yī Luò]: 이수(伊水)와 낙수(洛水) (* 모두 강 이름임)/ 之[zhī]: …의/ 间[jiān]: 사이/ 道士[dàoshì]: 도사/ 浮丘公[Fúqiūgōng]: 부구공 (* 인명)/ 接[jiē]: 만나다, 맞이하다/ 以[yǐ]: …하여, …해서(* 연사)/ 上[shàng]: 오르다/ 嵩山[Sōngshān]: 숭산 (* 하남성[河南省]에 있음)/ 三十余年[sān shí yú nián]: 30여 년/ 后[hòu]: 후에, 나중에/ 求[qiú]: 찾다/ 之[zhī]: 그 사람 (* 王子乔를 가리킴)/ 于[yú]: …에서 (* 개사)/ 山[shān]: 산 (* 여기서는 嵩山을 가리킴)/ 见[jiàn]: 보다/ 桓良[Huánliáng]: 환량 (* 인명)/ 曰[yuē]: 말하다/ 告[gào]: 알리다/ 我家[wǒjiā]: 우리 집, 우리 집 사람들/ 七月七日[qī yuè qī rì]: 7월 7일/ 待[dài]: 기다리다/ 我[sǒ]: 나(를)/ 于[yú]: …에서/ 缑氏山[Gōushìshān]: 구씨산 (* 하남성[河南省]에 있음)/ 头[tóu]: 꼭대기/ 果[guǒ]: 과연/ 乘[chéng]: 타다/ 白鹤[báihè]: 흰 학/ 驻[zhù]: 서다/ 山岭[shānlǐng]: 산꼭대기/ 望[wàng]: 바라보다/ 之[zhī]: 그들, 그 사람들/ 不[bù]: … 않다/ 到[dào]: 오다, 내려오다/ 举[jǔ]: 들어올리다/ 手[shǒu]: 손/ 谢[xiè]: 인사를 하다, 안부를 전하다/ 时人[shírén]: 그 때 그곳에 온 사람들/ 数日[shùrì]: 몇일, 며칠이 지나다/ 而[ér]: …하여, …해서 (* 연사)/ 去[qù]: 가 버리다/ 后[hòu]: 후에/ 立[lì]: 세우다/ 祠[cí]; 사당/ 于[yú]: …에/ 缑氏[Gōushì]: 구씨산/ 及[jí]: …와[과]/ 嵩山[Sōngshān]: 숭산
■ 작품 해설:
위의 왕자(王子) 교(乔)의 이야기는 『태평광기(太平广记) · 신선(神仙) · 왕자교(王子乔)』에 실려 있다. 『태평광기』는 송(宋)나라 초기에 편찬된 책인데, 이전에 민간에 전해 오는 많은 이야기를 한데 모아 놓은 거작이다. 수록된 글들은 대부분 귀신 · 신선 · 괴기에 관한 것으로, 송대(宋代)와 그 이전 당대(唐代)의 사상과 신앙을 반영하고 있다.
왕자 교는 주(周)나라 영왕(灵王)의 태자라는 고귀한 신분을 버리고 도사 부구공(浮丘公)을 따라 숭산(嵩山)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 태자가 실종되자 주나라 왕실에서는 대소란이 났지만 어디서도 그를 찾을 수가 없다. 생황을 불기 좋아했던 왕자 교는 세상을 버리고 깊은 산 속에서 부구공에게 도교의 술법을 배운다. 그는 30년 동안 음악을 즐기는 탈속(脱俗)한 생활을 하면서 산짐승 부리는 법을 배워서 학을 타고 하늘을 날 수도 있다. 그러던 중에 이따금 태자는 숭산에서 사람들 눈에 띄게 된다. 사람들은 그가 30년 전에 실종된 태자 교라는 것을 알아본다. 그래서 사람들은 숭산으로 들어가서 그를 찾는다. 마침내 환량이라는 사람이 태자를 발견했고, 태자는 그에게 7월 7일에 왕실 사람들을 구씨산으로 와서 자기를 보라고 한다. 그 날 사람들은 태자를 보기 위해 구씨산으로 올라간다. 멀리서 바라보지 과연 태자는 산꼭대기에서 학을 타고 서 있었다. 사람들이 태자에게 내려올 것을 간청했지만 태자는 내려 오지 않고 손을 들어서 그들에게 인사만 할 뿐이었다. 태자는 집안 사람들과 영원히 헤어지기 전에 마지막 아쉬운 작별 인사를 한 것이다. 아무리 신선이 되었다고 하지만 세속의 가족들과 영원히 헤어진다고 하는 것은 그에게도 매우 마음 아픈 일이었던지, 그는 며칠 동안이나 손을 흔들어 계속 이렇게 긴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태자는 학을 타고 하늘을 날아 이 세속을 영원히 떠나 버렸다. 그 후로 두번 다시 태자를 본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왕자 교를 위해 구씨산과 숭산에 사당을 세워 그를 추모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당대(唐代)와 그 이전에 도교(道教)가 민간에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당대에는 불교와 도교는 서로 경쟁 관계에 있었다. 도교의 교세는 불교를 결코 이길 수 없었지만 당대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었고, 민간에서 널리 신앙되고 있었다. 왕자 교라는 먼 주나라 시대의 태자를 빌려서 도교의 신비한 이야기를 지어낸 고대 중국인들의 상상력의 일면을 엿보게 하는 재미있는 판타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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