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임무를 자신에게 부여한 의도는 아마도 자신이 무림을 제어하고, 황실의 숨겨진 힘이 되어 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그 뜻에 반(反)한다면 여지없이 토끼 사냥이 끝난 사냥개의 처지가 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주인을 맹신한 힘없는 개에 해당하는 일이니 나와는 관계없지. 주인이라 여기지도 않을뿐더러, 맹신하지도 않고, 결정적으로 그 누고도 범접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청년은 오른손을 뻗어 손바닥을 폈다. 청년의 검지에는 이국적인 문양의 반지가 장식되어 있다. 중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국적 문양의 검이 양의 머리를 십자로 꿰뚫고 있는 불긴한 문양이 새겨진 반지에서는 알 수 없는 서늘함이 느껴졌다.
유이리가 봤다면 얼굴이 파랗게 질릴 일이지만, 청년은 시선은 애정으로 가득 찼다. 자신에게 신비한 힘을 부여한 반지. 자신의 야망을 실현할 힘을 준 반지. 청년의 얼굴에는 불쾌감이 사라지고,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이 신비한 힘이 있는 이상, 도검 불침의 무한의 병사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힘을 가질 수 있다.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후후훗.”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청년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노인은 그런 청년을 바라보며 뻘쭉하니 서있는 흑운과 백운을 내보냈다. 주군의 표정이 밝아져 백운에 대한 처벌을 내리지 않아 다행이기는 하지만, 정작 자신은 피곤한 임무를 맡아 버렸다.
이번일이 끝나면 한동안 꼬리를 감출 것이지만, 위험의 여지를 남겨 놓는 것은 좋지 않다. 그렇다면 서쪽에서 흘러들어온 것처럼 위장을 하는 것이 최고. 준비하는 데 시간이 조금 오래 걸린다는 것이 단점이지만, 꼬리를 밟힐 염려가 없다.
“이를 위해서는…….”
생각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중얼거리던 노인은 화들짝 놀라며 입을 다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노인의 곁에는 흑운과 백운만이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방심해서는 곤란하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이 있듯이 언제 어디에 간자가 숨어 있을지는 누구도 모른다.
“휴가를 앞두고 야근이라니……. 주군께서도 이 노구(老軀)를 참으로 잘도 부려먹으시는군. 후후후. 가자. 앞으로 또 바빠질 것이다. 특히나 백운은 이번 일을 만회해야 하지 않겠느냐.”
구부정한 허리의 노인은 느릿느릿 지하에 있는 연구실로 향했다. 지금으로도 충분히 강하다고 생각되지만, 상대는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 아무리 완벽한 준비를 한다 해도 충분하다 할 수 없다.
“정말 괜찮겠나?”
“예. 걱정해주시는 것은 감사합니다만, 정말 괜찮습니다.”
당세보의 걱정스러운 말에 남궁상민은 괜찮다는 듯 짐짓 미소를 보였다.
삼일 전. 흑도 연합의 비밀병기라 생각되는 연강시의 습격, 그리고 그 전투과정에서 누군가 사용한 벽력탄에 의해 남궁세가의 소가주가 말려드는 사건이 발생했다.
지금은 남궁상민의 허리에 다소곳이 자리하고 있는 남궁상욱이 사용하던 은색의 수수한 검. 그 검이 폭발 현장에서 발견된 이상 만에 하나를 기대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친인의 죽음. 지난 삼일간 혼이 나간 듯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상민이었기에 당세보나 다른 일행의 걱정은 당연한 것이며, 또한 지금 역시 정상이라 판단하기에는 상민의 안색이나 다른 부분에 있어 문제점을 보이고 있다.
시체를 연상시키는 창백한 안색. 그런 주제에 짐짓 괜찮다는 미소를 띄고 있으니 보는 사람으로써는 답답하기 그지없다.
“형님은 무사하실 테니까요.”
“....”
상민의 단정적인 말에 당세보는 할말을 잊었다. 확실히 남궁상욱이 죽었다고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아무리 벽력탄이 폭발했다고는 하나, 시체까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상욱의 생존을 확신시켜주는 것 역시 아니다.
가장 확률이 높은 것은 벽력탄의 폭발에 휘말려 현애(懸崖) 아래로 떨어졌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까마득한 낭떠러지. 아무리 남궁상욱이 절정급 고수라 해도 그 정도의 높이에서 떨어져서는 생존을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상민이 힘겹게 잡고 있는 단 하나의 희망을 끊어버릴 만큼 당세보는 모질지 못했다.
“그리고 우선 본가로 돌아가서 사건 경위를 보고하고 대비책을 세워야지요. 특히나 외조부님의 경우 단신으로 뛰어나가실 우려가 있으니까요.”
무시무시한 상민의 말에 당세보와 곽명신은 등에서 식은땀을 흘렸다. 단신으로 흑도 무림을 향해 돌진하는 도왕 허상죽의 모습이 뇌리에 스쳤다. 상민은 농담 삼아 던진 말이지만 전혀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큰 문제였다.
“그리고 형님이 부재중이신 이상 그 빈자리를 채워야 하는 것은 차남의 당연한 의무지요. 뭐 그동안 형님께만 일을 떠넘겼던 업보인지도 모르겠네요. 후훗. 빨리 복귀하셔야 할 텐데 큰일이네요.”
자신의 형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남자.
무림일절의 무공을 지닌 검가 남궁세가의 차남으로 태어났음에도 상민이 권각술에 매진한 이유다. 남궁상욱이 가문의 일에 충실하며 무림에 명성을 떨칠 때 상민은 철저하게 어둠에서 또 다른 남궁세가의 힘을 만들어 갔다.
무림세가정도의 세력이라면 모든 것을 법과 원칙대로 처리할 수는 없다. 상민은 고지식한 우등생인 자신의 형이 그런 쪽에 약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철저하게 자신을 감추며 한발 뒤에서 세가를 살폈다.
그랬기에 상욱의 죽음을 더욱더 인정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남궁상민의 시선을 피한 당세보의 눈이 상민의 허리에 머물렀다. 남궁상욱이 사용하던 은색의 평범한 검. 그 검이 상민의 허리에 매달려 있다. 직접 손에 쥐어본 적이 없으니 단적으로 평가를 내릴 수는 없으나 당세보가 보기에는 수수한 외형이나 다른 모든 것들을 평가해 보아도 보검이라고 평가하기는 조금 어려운 감이 없지 않다.
상민은 검을 사용하지 않는다. 권각술에 매진했다고는 하나 검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과는 별개다. 오히려 어지간한 고수들 이상의 검을 익히고 있다. 아무리 권각술을 전문으로 했다고는 하나 절대 검가인 남궁세가의 차남이 검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상민은 검이 없다. 세가의 일에 전면으로 나서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
검황이나 현 남궁세가의 가주인 유운검(流雲劍) 남궁성현도 상민의 이런 의지를 알아차리고 이해해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런 상민의 허리에 검이 매달려 있다. 어떻게 본다면 그것은 상욱의 죽음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뒤를 잇겠다는 상민의 암묵적인 맹세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래. 네가 그동안 고생 좀 하겠구나.”
“뭐 고생이랄 것이 있겠습니까. 어차피 형님이 하시던 일이니까요. 대행업무라면 잠시 해본 적이 있습니다.”
“그래.”
“그건 그렇고 걱정이군요. 듣기로는 사천성 뿐 아니라 청해성에서도 흑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하던데요.”
서융(西戎)과 남만(南蠻)으로 도망쳐간 흑도 문파가 다시 움직인다면 필연적으로 사천성과 청해성은 백도무림의 최전방이 된다.
“걱정마라. 감히 사천당가를 습격했다가는 뼈도 남기지 않고 녹여 버릴 테니까.”
“후훗!”
당세보의 말에 상민은 웃어 얼버무렸다. 하지만 그 말 안에는 당세보의 심경변화가 담겨 있다. 흑도 무림에게 습격을 받아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은 사천당가. 모르긴 몰라도 이번에 섣불리 사천당가 앞에 나타났다가는 그 누구라도 멀쩡히 살아 돌아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 대신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동생 녀석을 잘 부탁한다.”
“맡겨 두세요.”
실종된 남궁상욱을 수색하기 위해 무당산을 뒤지는 동안 사천당가의 본가에서 당세보의 복귀 명령이 떨어졌다. 비상소집령. 사천성에서 이상기류가 느껴진다는 소문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에 당세보는 당화연을 남궁상민에게 맡겼다. 언제 전쟁터가 될지 모르는 본가(本家)보다는 천하제일가로 명성이 높은 남궁세가에 맡겨두는 것이 안전할 것이라는 판단이다. 하지만 그 외에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남궁상민의 움직임을 잡아놓는 족쇄의 역할.
지금은 괜찮아 보이기는 하지만, 아직 정상이라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당세보의 생각 같아서는 하남성에 있는 남궁세가의 본가에까지 배달해놓고 싶은 심정이지만 자신의 본가도 심상치가 않으니 그것이 불가능하기에 차선책을 사용하는 것이다.
자기 혼자라면 모르지만, 뭔가 짐을 떠맡게 된다면 책임감 때문에라도 허튼짓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이다. 위연린이나 이현진 역시 각자의 문파로 복귀해야 하는 상황에서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무당파에서 자인공주의 호위를 맡아 준다고 하였기에 성가신 짐 하나가 줄었다는 점이다.
“그럼 곽 형은 어쩔 거요?”
당세보가 모여 있는 일행 중에 곽명신에게 시선을 돌렸다.
“글쎄. 상민이 초대만 해준다면 남궁세가를 방문해보고 싶기는 한데. 도왕 어르신께 몇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것도 있고.”
“외조부님이라면 지금쯤 본가에 머무르고 계실 테니 상관이 없겠지요. 그렇게 하도록 하세요.”
곽면신은 상민을 따라 남궁세가를 방문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했고 상민은 별일 아니라는 듯 받아들였다.
“괜찮겠나?”
두서없는 당세보의 질문. 그러나 당세보의 시선이 곽명신에 향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대상자는 확실했고, 그 대상자 역시 충분히 이해했다.
곽명신은 어께를 으쓱해 보였다.
“어차피 문도라 해야 한손가락도 넘지 않고, 산속 깊숙이 처박혀 있으니 말려들려야 말려들 수도 없을 테고. 차라리 이대로 남궁세가로 가, 도왕 어르신께 한수 배우며 필요할 때 한손 거드는 것이 더 나을 게요. 그리고 걱정되는 것이 하나 있으니, 이래저래 좋은 일이지.”
곽명신의 대답을 당세보는 납득했다. 빙빙 돌려서 말했지만 결국은 상민이 걱정되니 그래도 운신의 여유가 있는 자신이 배달을 하겠다는 의미다. 생긴 것 답지 않게 마음씀씀이가 좋은 녀석이다.
“그래. 그럼 그 일은 잘 맡아주길 바라외다.”
“훗! 당 형이나 몸조심 하시오. 확실히 심상치 않은 감이 있으니.”
당세보와 곽명신은 서로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교환했다.
“상민 공자. 있소이까?”
방문 너머에서 누군가가 상민을 불렀다. 짐을 싸던 연이 쪼르르 달려가 문을 열어 객을 맞았다. 무당파의 장로인 현무도장이다. 지난 삼일간의 고초를 보여주듯 초췌한 몰골의 현무도장은 행낭을 싸는 상민에게 다가갔다.
“귀가를 하신다고요?”
현무도장이 상민을 대하는 태도가 예전과는 다르게 몇 단계 올라있다. 남궁세가의 차남이라고는 하지만 배분이 많이 떨어지는 단순한 무림후배에서 천하제일가 남궁세가의 후계자로 급상승한 상민의 지위를 대변했다.
“아무래도 우선은 본가로 귀환하는 것이 우선일 듯 합니다. 형님의 일이 걱정이 되지만, 무당파의 도사님들께서 최선을 다해 주시리라 믿으니 안심하고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문중회의에서 승인이 떨어져야 하겠지만, 가문에서 하나에서 두개까지의 대(隊)가 형님과 형수님의 수색을 지원하기위해 파견될 것이니 미리 양해를 구해도 되겠습니까?”
상민의 말은 예의바르기 그지없다. 예전까지의 활발하고, 틀에 박히지 않은 생활을 해오던 모습을 아는 자라면 자신의 눈과 귀를 의심할 정도다. 그 정도로 상민의 태도는 예의와 위엄이 어려 있다.
“물론이오. 최대한의 지원과 배려를 아끼지 않겠소.”
“감사합니다. 맹우인 무당파의 협력과 도움을 남궁세가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상민의 말에 떠뜸떠뜸 대답하던 현무도장은 상민의 마지막 말에 반색을 감추지 않았다. 남궁세가의 소가주가 무당파의 일에 말려들어 암살되었다는 것은 무당파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힌 거나 다름없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 남궁세가와의 관계가 틀어질 우려도 배제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남궁상민-남궁세가의 새로운 후계자-의 말은 무당파와 계속해서 좋은 관계를 이끌어 갈 것이고, 앞으로도 지속적인 협력을 주고받자는 의미나 다름없다.
현 무림의 혼란상황에서 무당파의 입장에서는 한숨을 돌렸다. 외부의 시선도 있으니 남궁세가가 바로 적의를 보이지는 않겠지만, 서로 불편한 관계가 되어서 도움이 될 것이 없다. 그런 상황에서 상민의 한마디는 가뭄속의 단비와 다를 것이 없다.
“걱정 마시오. 무당파는 무슨 일이 있어도 상욱공자를 찾아낼 것이오.”
현무도장은 강한 의지를 보였다. 다만 그의 말에 한 가지는 빠져있다. 그가 찾고자 하는 것은 상욱의 시신. 그러나 이를 당사자 앞에서 표현하는 우를 범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세상에는 해도 좋은 말과 해서는 안 될 말이 있는 법.
“감사합니다. 저는 현무도장님만 믿겠습니다.”
상민은 현무도장의 말에 깊은 감사를 표했다.
“그럼 빈도는 수색작업을 재개하러 돌아가겠소이다. 아무래도 배웅은 하지 못할 듯하니 이해해 주시구려.”
“물론입니다. 형님과 형수님의 일을 잘 부탁드립니다.”
“물론이외다. 그럼 살펴 가시오.”
용건을 마친 현무 도장은 서둘러 나갔다. 역시나 분위기가 침체되어 있다. 경험상 이런 곳에는 오래 있을 곳이 못 된다는 것도 이유지만, 남궁세가에 체면을 차리려면 남궁세가의 파견대가 도착하기 전에 빙옥소검왕의 시신을 수습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남궁상욱이 떨어졌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곳은 무당산에서도 험하기로 이름난 곳.
천혜의 자연은 그 누구도 그 절벽을 기어오르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며, 이를 바꿔 말하면 살아 있는 그 누구도 산채로 내려갈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을 과거의 일로 돌려야 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남궁상욱의 시신을 수습해야 했다.
찰랑찰랑.
휘이잉.
빠르게 벽을 타는 바람소리가 귀를 간질인다. 그리고 으슬으슬 떨리는 몸. 눈을 뜨고자 했지만 쉽지가 않다.
유이리는 손을 끌어와 겨드랑이로 가져왔다. 얼굴을 비롯한 상체에 압력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앞으로 엎드려있는 자세가 분명하다.
다행이 손은 제대로 움직인다.
자리에서 일어나 정신을 차리기 위해 노력했다. 멍한 시야 사이로 익숙치 않은 지형이 보인다.
옷은 물에 흠뻑 젖어 있다. 이러니 몸이 춥지 않을 수가 없다. 유이리는 양손으로 자신의 몸을 끌어안았다. 상황이 크게 개선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추위에 떨리는 몸을 조금은 진정되었다.
유이리는 자신이 왜 물에 빠진 생쥐가 되어 이곳에 쓰러져 있었는지를 고민했다.
그리고 이내 기억해 냈다.
지난밤에 벌어진 남궁상욱과 정체불명의 백의서생과의 사투. 백중세의 싸움이 남궁상욱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고, 승기를 손에 잡은 상황에서 백운이라는 이름의 백의서생은 이상한 도구를 사용했다.
구형의 물체. 겉으로 보기에는 별것 아닌 듯 보였지만, 당황하는 남궁상욱의 모습으로 미루어 볼 때, 위험한 물건이라는 것을 짐작케 했다.
유이리는 바로 방어계열의 권능을 준비했다. 보호의 방패(Shield)를 준비할까도 생각했지만, 심상치 않은 남궁상욱의 모습에 다 강력한 효력의 권능인 보호막(Barrier).
마법사의 최고급 보호주문인 역장(Force Field)에 버금가는 방어능력을 지닌 신의 권능. 한번 펼쳐지면 시전자가 정신을 집중하는 일정시간동안은 어떠한 물리적, 마법적 충격도 보호막의 권능을 뚫을 수 없다.
이 권능을 준비한 것은 정확한 판단이었다. 강한 섬광과 함께 거대한 폭풍이 일어나며 충격파가 날아왔다. 거진 불꽃폭풍(Fire Storm)에 버금가는 위력. 다만 한 가지, 유이리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면 바로 남궁상욱이다.
남궁상욱은 자신의 온몸을 던지며 유이리를 보호하려 했다. 거대한 권능을 준비하기 위해 평소보다 긴 기도를 올리던 유이리는 남궁상욱의 행동을 제지하지 못했다.
남궁상욱이 몸으로 덮치며 강한 충격을 받은 유이리는 정신력이 흐트러지며 기도문을 이어가지 못했다.
신성주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외부적, 또는 내부적인 요인으로 신성력이 깨어졌다 하더라도 시전자에게 반발작용에 의한 해를 입히지 않는다. 자연의 힘인 마나를 강제적으로 가공해서 구현하는 고대어 마법과는 다르게, 신성력은 신의 힘을 있는 그대로 끌어 쓰기에 고대어 마법에 비해 안정감이 보장된다. 그러나 아무리 안정감이 보장되는 신의 권능이라 하더라도 중간에 방해를 받으면 권능을 전개할 수 없다.
남궁상욱은 유이리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날렸으나 결과적으로는 유이리의 행동을 방해한 꼴이 되었다.
배리어는 전개되지 않았고, 백운이 던진 구슬이 일으킨 폭발의 힘은 아무런 제지도 없이 유이리와 남궁상욱을 덮쳤다. 그리고 그 충격으로 정신을 잃었다.
폭발당시 낭떠러지를 등지고 있던 상황. 아마도 그 아래 절벽으로 떨어졌고, 천운이 함께 하여 목숨을 건진 것을 판단되었다.
“가가? 가가는?”
상황파악을 한 유이리는 남궁상욱을 찾아 일어섰다. 기억이 완벽하지는 않아도 함께 폭발에 말려들었으니 함께 떨어졌을 테고, 그렇다면 근방에 있을 것이 분명하다.
“윽!”
유이리는 온몸이 몽둥이 찜질이라도 당한 듯 쑤셨다. 그러나 그냥 넋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인적이 드문 깊은 산골. 어떤 위험이 있을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서둘러 남궁상욱과 합류를 해야 한다. 휴식은 그 이후다.
다행이 멀지 않은 곳에서 남궁상욱을 찾아냈다. 자신이 쓰러져 있던 곳에서 하류로 약간 내려간 곳 바위에 걸려있다. 상체만 물가에 걸려 있고, 하반신은 물에 잠겨 있고 상욱의 주변으로는 온통 붉게 물들어있다.
“……!”
상욱에게 다가간 유이리는 남궁상욱의 상세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온몸에는 크고 작은 상처가 셀 수 없이 나있어 피로 물들었다. 입술은 파랗게 떠있고 안색은 창백한 것이 당장에라도 데미른이 마중을 나와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다. 특히나 심각한 부분은 오른팔로 뼈가 뒤틀린 채 갈가리 찢겨져 나갔다. 거기에 과다한 출혈로 이미 상당부분이 괴사상태로 들어가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아마도 자신을 지키기 위해 폭풍의 충격을 온몸으로 막아낸 영향. 유이리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유이리는 우선 상욱의 옷깃에 손을 틀어서 집어넣었다. 상욱의 체중을 악력만으로 끌어당겨야 하는데 정상적인 몸도 아닌 상황에서 사실상 불가능 하다. 그러나 옷깃에 손을 넣어 비틀어 잡으면 물에 젖은 옷깃은 손에 휘감겨 큰 힘을 주지 않아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악전고투.
악전고투 끝에 상욱의 몸을 물에서 꺼내는데 성공을 했지만, 아직 저승의 늪에서 건져낸 것은 아니다.
숨결이 약하기는 하지만 아직 걱정할 수준은 아니다. 무도로 단련된 강한 정신력이 생명의 끈을 굳게 잡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가게 되면 이마저도 장담할 수 없다.
우선 지혈을 서둘러야 한다. 상처가 깊은 부분을 얼마 되지는 않고, 그나마 몸을 감싸고 있는 옷이 상당한 지혈효과를 보였다고는 하지만 긴 시간 계속적으로 피를 흘렸기에 생명을 위협하는 수준이다.
이를 위해 가장 우선으로 지혈을 해야 하는 부분은 오른팔. 그러나 단순히 상처를 봉합하는 수준으로는 곤란하다. 이대로 상처만을 봉할 경우 오른팔을 영영 사용할 수 없다.
남궁상욱은 무인(武人). 검을 들어야 하는 팔을 잃는 것은 생명을 잃는 것과 진배없다. 남궁상욱의 생명은 물론이요, 무인으로써의 생명까지 구해야 한다.
유이리는 단검을 꺼내들고 상처에 엉겨 붙은 옷을 떼어냈다.
생각보다 상처는 더 위중했다. 부러진 뼈는 살을 찢고 튀어나왔고, 살점이 떨어져 나간 팔은 차라리 잘라내는 편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다. 자신의 모든 신성력을 동원하면 치료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완쾌시킬 필요는 없다. 우선은 급한 대로 괴사의 진행만 막는다면 이후 지속적인 신성력의 사용으로 치료가 가능하다.
“끄응…….”
“가가? 정신이 들어요?”
남궁상욱의 신음소리에 유이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신음을 한다는 것,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의식이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안심할 수는 없다. 아직은 괜찮지만,
이대로 다시 의식을 잃을 경우 생사를 장담할 수 없다.
“정신 차리세요. 의식을 놓아서는 안돼요.”
유이리는 상욱의 의식을 잡아놓기 위해 노력했다. 출혈 과다인 상황에서 의식을 잃으면 그대로 마제린을 뵙게 된다.
“유……매? 다행……이다.”
남궁상욱은 자신의 상세가 더 위중함에도 유이리를 더 걱정했다. 그리고 움직이는 왼팔을 들어 유이리의 뺨을 쓰다듬었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정신 차려요. 이대로 포기하면 다시는 가가를 보지 않을 거예요. 무슨 일이 있어도 의식을 놓으면 안돼요.”
유이리의 필사적인 외침에 상욱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둘러야 한다. 망설일 시간이 없다.
유이리는 단검으로 치마 자락을 찢어서 상욱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고통에 몸부림치다 자신의 혀를 깨물게 하면 곤란하다.
“가가는 제가 살려요. 어떤 일이 있어도 살려낼 겁니다.”
유이리는 단검에 성수를 뿌렸다. 불에 달궈 소독하는 것이 원안이겠지만,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그런 사치를 바랄 수는 없다. 하지만 성수를 뿌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는 힘들어도 소독 효과를 볼 수 있다.
“전능하신 마제린이여. 당신의 힘으로 움직임을 봉(封)하소서. 포박(Hold Person).”
상욱의 몸에 올라탄 유이리는 상욱의 몸에 포박의 권능을 행사했다. 치료도중 몸부림을 쳤다가는 더 큰 상처를 입힐 수 있다. 포박의 권능은 상욱의 몸을 마비시켰다.
포박의 권능이 행해졌음을 확인한 유이리는 상욱의 오른팔에 단검을 꽂았다. 그리고 뼈의 위치에 따라 길게 베어냈다.
“크윽!”
단검의 움직임에 따라 상욱의 입에서 고통의 신음이 흘러 나왔다.
팟!
유이리의 얼굴로 피가 튀어 올랐다. 그러나 유이리는 눈썹하나 꿈쩍이지 않고 계속했다.
살이 갈라진 틈으로 뼈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러 방향에서의 강한 힘을 받아 뼈가 부러지고 뒤틀린 상황. 우선은 뼈를 원래대로 맞춰야 한다. 접골에 대해서는 배웠지만 이렇게 뒤틀린 뼈는 처음이다. 하지만 기본은 같을 것이다.
유이리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상욱의 어께를 무릎으로 눌렀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다가 순간 호흡을 멈췄다.
뿌득! 뚜둑!
“끄으! 끄윽! 끄어!”
상욱의 팔에서 살벌한 소리가 들려오기를 몇 차례. 유이리는 땀을 닦아내며 상욱의 팔을 살폈다. 뼈의 위치는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유이리는 상욱의 안색을 살폈다. 고통스러운 듯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지만, 정신은 더욱 또렷해지는 듯 했다.
다행이랄지 불행이랄지.
원래대로라면 환자가 의식을 잃게 만들고 치료를 해야 하겠지만, 상욱은 이미 출혈과다인 상황이었기에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조금만 참으세요. 전능하신 마제린이여. 당신의 딸이 구합니다. 당신의 자상한 손길로 상처받은 이를 보다듬어 주소서. 상처의 치료(Cure Wounds).”
식은땀을 흘려대는 상욱을 달랜 유이리는 상처치료의 권능을 행했다. 다만 그 범위를 최소화 시켜 뼈에만 그 힘이 작용하도록 집중했다. 신성력은 이내 효과를 발휘하며 뼈를 연결시켰다.
지속적인 집중은 체력을 저하시킨다. 유이리의 얼굴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그러나 유이리는 힘의 사용을 멈추지 않았다.
“후~~.”
한 다경 정도 힘을 쏟아 붙자, 뼈는 완벽하게 들어붙었다. 유이리는 다시 심호흡을 하며 다음 치료를 위한 준비를 했다. 뼈가 완벽하게 연결된 것을 확인한 이상 다음 치료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다시 치료의 기도를 올림과 동시에 유이리의 손은 밝은 빛을 뿜었고, 팔에 난 상처는 점차 흔적만을 남겨나갔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뼈가 뒤틀릴 정도의 중상. 십중팔구는 근육은 물론이요, 신경에 이상이 생겼을 공산이 높다.
“전능하신 마제린께 구합니다. 당신의 권능으로 잃어버린 것을 원래대로 돌려놓으려 하오니, 전사에게 힘을 내리소서. 감각의 치료(Cure Sense).”
유이리의 손을 거쳐 상욱의 팔로 스며드는 빛. 다시 한동안 스며들어가던 빛이 멈춰 섰다. 신경의 연결역시 무사히 끝났다. 상처의 치료로 근육의 치료를, 감각의 치료로 신경의 치료를 끝냈으니, 팔의 치료는 끝났다고 해도 좋다. 다만 초반에는 익숙치 않은 느낌을 받겠지만, 금세 적응을 할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몸의 상처가 다 치료되고, 안정이 되자 상욱은 잠에 빠져들었다. 위험한 상태는 넘겼기에 유이리는 상세가 안정되는 것을 확인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지금 상황에서는 다시 상욱을 깨워 나갈 곳을 찾기란 요원하다. 결국 야외에서 밤을 지새워야 한다.
유이리는 피곤한 심신을 달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과도한 정신력의 사용으로 눈앞이 아찔하고, 현기증이 일었지만 지금 쓰러질 수는 없다. 서둘러 야영할 곳을 찾아 준비하지 않으면 얼어 죽을지도 모른다.
제아무리 여름이라고는 하지만 깊은 산속, 강한 바람, 흠뻑 젖은 옷. 악재가 될 요인은 차고도 넘친다.
하지만 역시 마제린은 언제나 곁에서 도움을 주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동굴을 찾았다. 안에는 야생동물이 서식하는 흔적은 없다. 최소한 바람은 막아주고 새벽이슬은 피할 수 있을 것 같다.
“전능하신 마제린이여. 당신의 딸이 청합니다. 당신의 권능으로 제가 할 수 없는 일을 도울 조력자를 보내시어 당신의 딸이 하고자 하는 일을 돕게 하소서. 대기의 하인(Aerial Servant).”
유이리는 남아있는 정신력을 짜내 가휴르를 소환했다.
유이리의 눈앞에 소환된 가휴르는 나타나기가 무섭게 특유의 수다를 떨어대려 했지만, 피곤에 절은 유이리의 안색에 알아서 스스로 입을 다물었다.
“가가를 이곳으로 옮겨주세요. 그리고 상처를 치료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잘못하면 터질 우려가 있으니 조금 조심해 주시고요.”
<그래. 그건 걱정마. 근데 유이리는 괜찮겠어? 안색이 힘들어 보이는데.>
“저는 괜찮아요. 일단 그 일부터 부탁드릴게요.”
<알았어. 금방 다녀 올 테니, 일단 쉬고 있으라고,>
가휴르가 유이리의 명에 따라 상욱을 나르러 가자 유이리는 마른풀을 뜯어냈다.
마른풀을 모아 바닥에 깔면 편안하다고는 하기 힘들어도 급한 대로 침상의 역할은 해준다. 적어도 맨땅보다는 났다.
남궁상욱을 옮겨놓은 가휴르에게 마른나무가지를 모아달라고 부탁을 하고, 한참을 고전한끝에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노숙준비를 갖췄다.
타오르는 모닥불과 포근해지는 동굴 안, 폭신한 마른풀로 만든 간이침상. 조금 전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사치라고까지 말해도 좋을 정도다.
<음. 그럼 밖은 내가 지켜줄 테니, 푹 쉬도록 해. 꺄르르르.>
만족한 듯 침상을 바라보는 유이리를 뒤로 하고 가휴르는 불침번을 자청하며 동굴 밖으로 나갔다. 소환자가 부탁한 일을 마쳤으니 언제든 돌아가도 되는 상황. 그러나 가휴르는 별다른 조치 없이도 하루 이상을 소환자의 곁에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해서 유이리의 보호에 들어갔다.
“고마워요. 가휴르.”
유이리는 가휴르의 호의에 감사하며 상욱의 상세를 살피기 위해 다가갔다. 조금 전 까지만 해도 안정되어 있었으니 별다른 문제는 없겠지만, 환자의 상세는 언제 어떻게 급변할지 모른다. 그리고 그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얼굴이 차고 푸석거리며, 호흡이 안정된 것이 아니라 정상에 비해 크게 감소했다.
거기에 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떠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체온저하로 인한 증상이다. 이대로 가만두었다가는 심장마비로 죽을 수도 있다.
출혈과다인 상태로 거의 반나절이 넘게 물에 빠져있었다. 몸에 부담이 걸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마른 옷으로 갈아입히고, 실내의 온도를 올려 체온을 보조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방도 아니고, 마른 옷가지도 없다. 그저 작은 모닥불만이 의지할 수 있을 뿐이다.
유이리는 일단 상욱의 옷가지를 벗겼다. 모닥불의 곁에 있으니 다소 젖은 속옷이라 하더라도 별다른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이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