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권
제 7장 소림(少林) 파문(破門)
-1
세월은 유수(流水)같이 흘러 일 년이 지났다.
그동안 현수와 천뢰선사는 자죽림 내의 불망헌에서 한 걸음도 밖
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들이 불망헌에서 무엇을 하는지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소림의 승려들은 자죽림을 지나치면서 모두 깊은 호기심을 느꼈지
만 아무도 감히 금지로 설정된 자죽림 속으로 들어갈 마음을 품지
못했다.
불망헌의 한 방안.
현수는 정좌하고 있었다. 그의 머리는 어느새 상당히 길게 자라
어깨까지 늘어져 있었고 입고 있는 승포도 낡을대로 낡아 먼지마
저 두껍게 앉아 있었다.
천뢰선사는 그의 맞은 편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
만이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현수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의 눈빛은 마치 물처럼 고요하기
만 했다. 그를 지켜보고 있던 천뢰선사의 백미가 꿈틀함과 동시에
횃불같은 눈에서는 이채가 번쩍 빛났다.
"현수, 깨달음이 있느냐?"
현수의 입술이 담담히 열렸다.
"있습니다."
"무엇이냐?"
"무(無)에서 유(有)를 발견한 듯 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천뢰선사의 얼굴에 기쁨이 어렸다.
"오! 장하다. 노납은 기쁘기 한량없구나."
그러나 곧 천뢰선사의 얼굴은 엄숙하게 굳어지더니 현수를 날카롭
게 쏘아보며 말했다.
"현수, 이제 너는 소림 칠십이종절예를 모두 터득했다. 그러나 한
가지 명심할 것이 있다."
"아미타불... 말씀하십시오. 사숙님."
"앞으로 소림의 칠십이종절예를 모두 익힌 사람은 너로서 끝나야
한다. 이 비법(秘法)은 영원히 그 누구에게도 전수할 수가 없다."
현수는 놀라며 물었다.
"어째서입니까?"
천뢰선사는 대답하지 않고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는 대
나무 탁자로 걸어가 찻주전자를 들더니 찻잔에 물을 따랐다. 그가
계속 따르자 잔이 넘치고 찻물은 바깥으로 흘렀다.
"아!"
현수는 그의 그런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내 깨달을 수 있었
다.
그는 고개를 숙이며 공손히 말했다.
"사숙님, 제자 비로소 사숙님의 뜻을 알겠습니다."
천뢰선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무엇이든 적당한 것이 좋다. 많으면 넘치고 강하면 부러
진다."
"으음."
"이것은 노납이 백수십 년을 살아오면서 느낀 진리다."
할 말을 모두 마친 듯 천뢰선사의 눈빛은 따뜻하게 변했다.
"현수, 너는 노납의 말을 이해했느냐?"
"네, 사숙님."
천뢰선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이제 노납의 모든 것을 배웠다. 이제 내일부터는 장경각(藏
經閣)으로 가서 천기사제(天機師弟)에게 배워라."
"사숙님?"
"천기사제는 소림사상 최고의 인재다. 그의 머리는 천하에서 가장
총명하여 한 번 본 것은 절대 잊지 않고 모두 기억한다. 그래서
그의 머리에는 소림 칠십이종절예는 물론 그 밖의 천팔백육십 종
의 무학이 모두 들어있다."
천뢰선사는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가 만약 무공을 익힐 체질이었다면 노납을 훨씬 능가했을 것이
다."
천뢰선사는 여전히 현수가 입을 다물고 있자 문득 너털웃음을 졌
다.
"허허허... 현수, 이제 너와 나는 헤어질 때다. 왜, 서운한가?"
"사숙님......."
"허허허... 이 녀석! 우리 차를 마실까?"
"사숙님......"
"껄껄... 자, 현수. 이 차는 노납이 끓인 것이니 맛 좀 보아라.
아마 네 솜씨보다 나을 것이다."
현수는 일어나서 죽탁으로 다가가 두 손으로 공손히 차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차맛을 도통 느낄 수가 없었다. 차맛을 느끼기에는
그의 서운한 감정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었다.
그가 차를 다 마시는 동안 천뢰선사는 그의 모습을 정이 넘치는
눈길로 보고 있었다. 그리고 현수가 찻잔을 내려놓았을 때 이미
그는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사숙님!'
현수의 가슴에는 형언키 어려울 정도로 뜨거운 정(情)이 일어나고
있었다.
장경각(藏經閣).
이곳은 역대 소림의 모든 불경(佛經)을 보관하는 곳으로 소림사에
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곳이었다. 장경각 내에는 막상 천축(天
竺)에서 온 불경의 진본보다도 더 많은 소림 무학의 비급(秘級)이
소장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장경각의 내부는 온통 서가(書架)로 이루어져 있었다.
물론 수십만 권에 달하는 불경들이 고풍을 풍겼으나, 특히 그것들
중 소림 천 년 동안 창조된 무공과 외부에서 흘러들어온 수많은
무공비급은 따로 보관되어 있었다.
더우기 그 누구도 모르는 사실이 있었으니 그것은 장경각 내에 정
종(正宗)이 아닌 사도(邪道)의 비급도 백여 권 이상 소장되어 있
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말하자면 그동안 소림에 의해 제거된 마두(魔頭)들의 비예
(秘藝)들이었다.
장경각 내의 한 선방(禪房).
그곳에 장경각주인 천기선사와 현수가 마주 앉아 있었다.
현수의 윤기 나는 머리칼은 길게 자라 단정히 묶여져 있었다.
그는 왜 머리를 다시 깎지 않는가? 그것은 바로 천심선사의 지시
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머리를 흰 띠로 묶자 현수의 영준한 용모는 마치 선인(仙人)을 방
불케 할 정도로 뛰어났다.
천기선사는 그와는 대조적으로 수척하고 쇠잔한 모습이었다.
그는 근래 들어 급격히 체력이 쇠퇴하여 완연히 병색(病色)이 돌
았으며 기실 기동조차 불편했다.
그는 자신이 직접 만든 바퀴 네 개가 달린 사륜거에 몸을 의지하
는 신세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천기선사는 주름살이 깊게 패인
얼굴에 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현수를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현수, 너의 몸에 현기가 서리는구나."
현수는 다만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고 천기선사는 반대로 고
개를 치켜들며 말했다.
"현수, 밖으로 나가보자."
"네, 사숙님."
현수는 비로소 대답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사륜거의 뒤로 돌아
가 조심스럽게 밀었다.
사륜거는 소리 없이 그가 미는 대로 선방을 빠져 나갔다.
눈(雪).
눈이 오고 있었다. 어느덧 겨울이었고 잿빛 하늘을 가득 메우며
탐스러운 눈송이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허어! 첫눈이 내리는구나."
천기선사는 하늘을 보며 감회 깊게 중얼거렸다.
현수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본시 눈(雪)을 좋아
하던 그였으나 그 눈은 그에게서 너무나 많은 것을 앗아 갔지 않
은가?
문득 천심선사가 물었다.
"현수, 올해 너의 나이가 몇이냐?"
"십팔 세이옵니다."
"흠, 올해만 넘기면 십구 세가 되겠군."
천심선사는 눈발을 맞으며 다시 물었다.
"현수, 너는 대사형이 왜 너를 노납에게 보냈는지 아느냐?"
현수는 공손히 대답했다.
"사부님께 가르침을 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천심선사의 주름진 얼굴에 웃음이 피어났다.
"허허허... 현수, 너는 이미 천뢰선사에게서 모든 것을 배웠다.
그런데 더 이상 무엇이 필요 하느냐?"
천심선사는 손을 내밀어 눈송이를 받으며 말했다.
"현재 너는 너무나 강하다. 너는 느끼지 못할지 모르지만 너의 모
습에서 풍기는 기운은 상대가 섬ㅉ해 할 정도로 강하다."
현수는 그 말에 흠칫했으나 이를 내색치는 않았다.
"현수, 사륜거를 밀어라."
천심선사의 말에 현수는 묵묵히 사륜거를 밀 뿐이었다.
쏟아지는 눈발 속으로 사륜거는 굴러가고 두 사람의 마음은 하나
로 합(合)해지고 있었다.
천기선사는 담담히 말했다.
"현수, 너는 이제 좀 약해질 필요가 있다."
현수는 의혹을 금치 못했다. 실상 그는 여태까지 강해지기 위하여
천 일의 가혹한 무공수련을 쌓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약해지라는 것은 대체 무슨 말인지.......
"천뢰사형이 강(剛)이라면 노납은 유(柔)다. 강유(剛柔)가 조화되
어야만 진정한 고수랄 수 있다."
천기선사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장경각에는 소림 칠십이종절예 외에도 수많은 무공이 있다. 그러
나 정작 너에게 필요한 것은 거의 없다."
천기선사는 허리를 숙여 땅에 쌓인 눈을 한 웅큼 집어 들더니 눈송
이를 뭉쳐 앞으로 휙 던졌다.
눈덩이는 겨우 일 장쯤 날아가다 힘없이 떨어졌다.
"쯧! 노납의 힘은 점점 쇠약해 가는군."
천기선사는 혀를 차더니 다시 말했다.
"장경각에 비장된 천팔백육십 종의 무학이 칠십이종절예보다 강하
다면 어찌 그것이 정종무학(正宗武學)이 되지 못했겠느냐?"
그의 말은 백번 지당한 말이었고 현수는 내심 수긍하며 귀를 기울
였다.
"노납이 너에게 가르칠 것은 천팔백육십 종의 무공 중 단 한 가지
뿐이다."
"음."
"그리고 그밖에는 네가 앞으로 해야할 일을 이루기 위한 준비일
뿐이다."
천기선사는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장경각의 뒤 뜰은 화원과 가산으로 꾸며져 있었다. 천기선사는 손
을 들어 가산의 한 모퉁이에 있는 바위를 가리켰는데 그것은 오장
(五丈)밖에 있었다.
"현수, 눈을 뭉쳐 던져 저 바위를 부숴 봐라."
현수는 의아했으나 곧 지시대로 머리를 숙여 눈을 한웅큼 집어 뭉
쳤다. 그리고 그는 가볍게 앞으로 던졌다.
눈은 소리 없이 날아가 바위 속에 매끈하게 박혔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눈이 단단하기 그지없는 바위 속에 소리도
없이 깊이 박히다니.......
천기선사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하다. 너의 무예는 지금 현 자(玄字) 항렬 중에서 제일 고강
하다."
그러나 천기선사는 이내 탄식하며 말했다.
"노납은 일 장 밖까지도 눈을 던지지 못했다. 너무도 늙고 쇠약해
졌다."
천기선사는 다시 어투를 환원하여 말했다.
"그러나 또한 저 바위를 부수려면 부술 수도 있다."
천기선사는 현수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어 그가 왼손으로 사륜거의 팔걸이 한 부분을 누르자 놀라운 일
이 벌어졌다.
파파파팟! 콰... 쾅...!
푸른 불꽃이 바위를 덮는가 싶은 순간, 폭발음과 함께 바위가 완
전히 가루가 되고 만 것이었다.
"아!"
현수는 크게 놀란 반면 천기선사는 담담히 말했다.
"노납이 너에게 가르칠 첫 번째는 바로 이 같은 기관학(機關學)과
노부가 평생을 연구한 다섯 가지 암기술(暗器術)이다."
천기선사의 눈이 기이한 빛을 띄어 갔다.
"무(武)란 힘(力)만 가지고 다루는 것이 아니다. 노납과 같이 힘
없는 자들도 단지 머리를 조금만 쓰면 힘 하나 들이지 않고 사람
을 해칠 수가 있다. 암기술(暗器術)은 비록 정종(正宗)이라 할 수
는 없지만 때에 따라서는 커다란 위력을 볼 수가 있으니 역시 익
혀두는 것이 유리할 것이다."
"네, 사숙님."
현수의 물처럼 고요하던 눈이 반짝 빛났다. 그의 감추어진 혜지가
노출된 것이었다.
그것을 느낀 천기선사는 만족한 듯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수, 앞은 노납이 직접 가꾼 화원이다. 화원 앞으로 세 걸음 나
가 봐라."
현수는 의아했으나 곧 지시대로 세 걸음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경악성을 내지르고 말았다.
"앗!"
갑자기 주위환경이 돌변한 것이었다. 그가 서 있는 곳은 놀랍게도
망망대해 한 가운데의 암초 위였다.
현수는 경악을 금치 못하는 한편 곧 느끼는 것이 있었다.
'기문진법(奇門陳法)에 걸렸구나!'
그는 우선 마음을 침착하게 가라앉혔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계산하여 자신이 조금 전 들어왔던 방향으로
나갔다.
그러나 주위 환경이 다시 변화를 일으켰다. 대해는 사라지고 처처
에 기암절봉(奇岩絶峯)이 솟아있는 심산유곡(深山幽谷)으로 변해
버린 것이었다.
'이럴 수가?'
현수가 아연실색하는 사이, 주위의 환영들이 모두 사라지며 천기
선사의 부드러운 말이 들렸다.
"너에게 두 번째로 가르칠 것은 바로 이 기문진학(奇門陳學)이 다."
현수는 돌아서며 감탄과 존경의 눈으로 천기선사를 바라보았다.
천기선사는 점점 더 탐스럽게 떨어져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담담히 말 했다.
"현수, 눈이 아름답구나. 조금만 더 나가보자."
현수는 다시 사륜거를 밀었고 퍼부어 내리는 눈발 속으로 두 사람은 나 아갔다.
"오백 년 전 소림의 이십일 대 장문인이신 광무사존(廣武師尊)께
서는 속가(俗家) 시절 당시 강호제일의 검객이셨다."
천기선사의 말이 계속 되었다.
"그 분은 이후 삭발하고 소림에 입문한 이후에도 계속 검을 통해
진리를 터득코자 하셨다."
현수는 두 눈에서 현기를 품어내며 천기선사의 말에 귀를 모았다.
눈발은 점점 더 굵어지고 있었다.
"그 후 장문인이 되시고 육십 년이 지난 후 광무사존께서는 열반
에 드시기 직전 후대에게 한 권의 검보(劍譜)를 남겨 놓으셨다."
천기선사는 손을 내밀어 눈송이를 받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검(劍)은 원래 소림의 정종무학이 아니다. 그래서 그 검
보는 장경각에 묻힌 채로 오백년간 햇빛을 보지 못한 채 지냈
다."
천기선사는 손바닥 위에서 녹아 물이 되는 눈송이를 내려 보며 말
을 계속했다.
"소림에서는 훨씬 이후에 달마삼검(達磨三劍)이 창안되어 유일한
정종검법으로써 칠십이종절예의 하나로 삼았을 뿐, 광무사존이 남
기신 검보는 완전히 잊혀져서 아무도 익히지 않았다. 만일 노납이
장경각 안의 수십만권에 달하는 불경과 무공비급을 모두 읽지 않았
다면 역시 영원히 찾지 못했을 것이다."
현수는 호기심이 크게 일어났다.
"그 검법은 어떤 것입니까?"
천기선사는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불영구검(佛影九劍)! 그것이 검법의 이름이다, 또한 그것은 실로
신비한 검법으로 만약 누군가 노납더러 불영검법을 칠십이종절예
에 포함시키라면 서슴없이 칠십이종절예중 두 번째 위치에 놓겠다."
현수가 크게 놀라는 것을 보며 천기선사는 다시 덧붙였다.
"바로 반야밀다대승신공의 다음에 말이다."
거기까지 이른 천기선사는 너털웃음을 웃었다.
"허허허... 소림의 폐쇄성 때문에 천고(千古)의 기학(奇學)이 오
백 년 동안 먼지 속에 버려진 것이야."
눈(雪), 눈이 더욱 심하게 쏟아졌다.
현수와 천기선사의 몸에는 눈이 상당히 쌓였고 천기선사는 심한
기침을 해댔다.
"쿨록! 쿨... 록!"
현수는 몹시 염려스러워진 듯 물었다.
"사숙님, 이만 안으로 들어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 말에 천기선사는 가슴을 쓸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수는 사륜거의 방향을 반대로 하여 밀고 갔다.
천기선사는 다시 입을 열었다.
"불영구검(佛影九劍)은 바로 네가 유일하게 배울 천팔백육십 종
무예 중 한 가지다."
천기선사의 기침은 끊이지 않았다.
"쿨... 럭! 그러나 그 분의 불영구검에도 일곱 군데의 헛점...
쿨... 럭... 이 있다."
"사숙님 기침이......."
"그 허점을 보완하면 불영구검은... 천하무적의 검법이 된다."
그 사이 사륜거는 장경각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눈은 이미 폭설(瀑雪)로 변해 소림사 전체를 은빛으로 덮고 있었
다.
마지막 겨울 (冬)의 추위는 기승을 부렸다.
대단한 추위가 눈보라와 함께 세차게 숭산(崇山)을 휩쓸었다.
소실봉 기슭의 한 바위 위에 한 명의 노승(老僧)이 우뚝 서 있었
다.
구순이 넘어 보이는 노승은 승포를 눈보라에 휘날리며 아까부터
계속 사방을 살피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자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그것은 한 마리의 비둘기가 들어있는 조그만 철책이었는데 노승은
곧바로 철책을 열었다.
푸르르르륵!
비둘기는 철책이 열리자마자 잽싸게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목에 작은 죽통(竹筒)을 매달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것은 바로 밀
서(密書)를 전하는 전서구였다.
비둘기가 눈보라 속으로 사라진 순간 노승은 입가에 야릇한 미소
를 지었다. 그리고 다시 주위를 잠깐 살피고는 번뜩 신형을 날려
사라졌다.
그런데 노승이 사라지자마자 다시 한 명이 바위 위에 나타났다.
그는 거의 백여 세에 가까운 또 다른 노승이었다.
특징이 있다면 그는 오른 소맷자락이 바람에 멋대로 펄럭이는 외
팔이었고 얼굴에 왼쪽 이마에서 오른쪽 뺨으로 긴 검상(劍傷)이
나 있어 섬뜩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었다.
이런 인상 때문에 그에게서는 도저히 불승다운 면모를 느낄 수가
없었다.
소림 계도원주(戒導院主) 현각대사(玄覺大師).
그는 바로 소림의 계율을 어기는 자에게 벌을 내리는 계도원을 담
당하는 현각대사로 소림에서 가장 냉정한 인물이었다.
원래 그는 과거 육십여 년 전 희대의 마두(魔頭)였으나 당시의 소
림 장문이었던 천심선사에게 감동을 받아 소림에 입문하게 된 인
물이었다.
현각대사는 노승이 사라진 곳을 응시하며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현우(玄羽)! 과연 대사부님의 추측이 맞았군."
현각대사는 하나 뿐인 왼팔을 들어 올렸는데, 놀랍게도 그의 손에
는 조금 전 눈보라를 뚫고 날아갔던 비둘기가 잡혀 있었다.
현각대사는 비둘기 목에 매달린 죽통을 떼어내며 냉막하게 중얼거
렸다.
"현우여, 그대는 아는가? 이 년(二年) 동안 단지 주인을 찾아내지
못했을 뿐, 그대가 띄워 보냈던 모든 전서구가 빈승의 손에 잡혔
음을......."
휙!
현각대사는 몸을 날려 소림사를 향해 사라졌다.
밤(夜).
칠흑 같은 밤이었다. 장경각(藏經閣)도 어둠에 묻혀 있었다.
휘익!
어둠을 뚫고 장경각으로 한 줄기 인영이 날아들었는데 그는 머리
서부터 발끝까지 흑의(黑衣)와 복면으로 감싼 자였다.
흑의복면인은 장경각 앞에 내려서자 잠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유령
같은 신법으로 장경각 안으로 스며 들었다.
그는 장경각의 구조를 매우 잘 아는 듯 했다.
도합 십팔 개의 서고로 된 장경각은 총 오 층이었으며 층마다 서
고가 있고 서고 안에는 종으로 서가(書架)가 설치되어 있었다.
휙! 휙!
흑의 복면인은 조금도 멈칫하는 기색없이 일 층부터 오 층까지 침
투해 올랐다.
오 층을 제외한 아래는 불경이 장서되어 있었으나 오 층의 중앙서
고에는 소림비전무공비서(少林秘傳武功秘書)가 배치되어 있었다.
흑의복면인은 마침내 무경고(武經庫)에 들어왔다.
무경고에는 고색 창연한 소림의 칠십이종절예를 수록한 비급과 그
밖에도 천팔백육십 종의 무학기서(武學奇書), 그리고 수천 권에
달하는 무서가 질서정연하게 꽂혀 있었다.
그러나 흑의복면인은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는 무경고의 서가를 그대로 지나쳐 계속 안 쪽으로 들어갔다.
하나의 혈오목(血烏木) 탁자 위.
그곳에 고색창연한 푸른색 옥갑(玉匣)이 놓여 있었다. 흑의복면인
은 옥갑을 뚫어져라 노려보며 조심스럽게 탁자로 다가갔다. 그의
손끝이 약간씩 떨리고 있었다.
그는 마음의 동요를 느끼는 듯 옥갑에 손을 대고 잠시 멈춰 있다
가 뚜껑을 열었다. 그 속에는 낡을대로 낡은 양피로 된 책자가 두
권 포개져 있는 것이 보였다.
'이것이 바로... 천 년 소림의 맥을 이어 온 역근경(易筋經)과 세
수경(洗髓經)이다!'
흑의복면인의 손 끝이 아까보다 더욱 눈에 띄게 떨렸으며 그의 복
면 사이로 노출된 두 눈에는 심한 갈등이 어렸다.
그러나 결국 결심한 듯 그는 옥갑 속에 든 두 권의 책자를 집었
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윽!'
그는 손 끝에 무형의 기운을 맞고는 떨어져 나갈 듯한 통증을 느
꼈다. 그는 불에 데인 듯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한 줄기 불호성이 그의 고막을 때렸다.
"아미타불......."
동시에 그의 앞에 마치 허공에서 나타난 듯 한 명의 청년이 내려
섰다. 놀랍게도 청년은 현수였다.
현수는 회색 승복을 입고 있었는데 이미 허리까지 자란 검고 윤기
나는 긴 머리칼을 단정히 묶고 있었다. 실로 비범한 신태가 흐르
는 신비한 모습이었다.
흑의복면인은 그를 보자 부르르 떨었다.
'현수!'
현수는 합장하며 낭랑하고 담담한 음성으로 물었다.
"아미타불... 시주께서는 누구신데 감히 금역(禁域)인 장경각에
침입한 것이오?"
흑의복면인의 눈빛에 초조함이 가득 어렸다. 그는 당황하여 내심
중얼거렸다.
'큰일이다! 이 녀석을 빨리 해치우지 않으면 곧 장경각을 지키는
오대수장승(五大守藏僧)이 들어온다!'
현수는 다시 추궁했다.
"시주는 어찌 답이 없으시오?"
"닥쳐라!"
흑의복면인은 낮게 외치고 나서 다짜고짜로 일 권(一拳)을 날렸
다. 현수는 흠칫 놀랐다.
"금강복호신권(金剛伏虎神拳)! 그대는 어찌 소림의 무공을 알고
있소?"
위---잉!
권풍이 현수의 어깨를 스쳤다.
"말이 많다!"
흑의복면인은 계속 권력을 날렸다.
금강복호신권.
이는 소림 칠십이종절예 중 하나로 소림의 제 십이 대 장문인이
창안했다. 그런데 그 위력은 너무도 패도적(覇道的)이어서 대성
(大成)하면 백 장(百丈) 밖의 바위를 박살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알려진 경지는 단지 사오 장 밖의 나무를 부러
뜨릴 정도의 위력이었다. 그 이유는 대성하기가 극히 힘들기 때문
이었다.
윙---! 윙---!
흑의복면인이 주먹을 뻗을 때마다 무서운 권풍이 뻗었다.
또한 흑의복면인은 내공(內功)이 정심하여 현수가 물흐르는 듯한
신법으로 피할라치면 빗나간 권력을 즉각적으로 쉽게 회수하기도
했다.
그것은 소란을 피워 장경각을 지키는 오대수장이 몰려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으며, 그로 미루어 흑의복면인의 금강복호신권
은 완숙의 경지에 이른 것이 분명했다.
윙! 윙----!
권풍 사이를 누비며 현수는 말했다.
"아미타불... 시주께서 계속 이렇게 나온다면 소승도 무례를 범하
겠소."
현수는 마침내 왼손을 칼날처럼 세워 흑의복면인을 찔러갔다.
"으윽! 천불인수(千佛刃手)!"
흑의복면인은 권세가 흩어지는 것을 느끼며 이번에는 급격히 초식
을 나한십팔장(羅漢十八掌)으로 바꾸었다.
휙! 팍! 팍! 팍!
복면인의 장력은 마치 도끼로 장작을 패듯 위력적이고 날카롭게
현수를 밀어부쳤다. 현수는 그만 깊은 의혹에 잠기고 말았다.
'이 자가 쓰는 무공은 모두 소림 칠십이종절예다. 도대체 누구이
길래?'
어느덧 두 사람의 공방전은 삼십여 초가 흘러갔다. 좁은 공간 속
에서 그들은 막상막하의 전세를 유지했는데 그야말로 갖가지 소림
의 절예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다만 흑의복면인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초조함을 금치 못했고
현수는 약간 뒤로 신형을 물리며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시주, 할 수 없이 소승은 실례를 범하겠소이다."
그는 양손을 합장하더니 그대로 앞으로 쭉 뻗었다.
슈---- 웅!
웅휘한 경기가 뻗었다.
"앗! 범자대비공(梵慈大悲功)! 네... 네가 그것까지?"
흑의복면인은 크게 놀란 듯 했다. 두 사람의 경력이 마주치며 폭
음을 냈다.
꽝---!
"우욱!"
흑의복면인은 엄청난 압력이 가슴을 치는 것을 느끼며 뒤로 주르
르 오 보(五步)나 물러났다. 그의 복면 입가가 금세 피로 젖었으
나 그는 눈에 살기를 띄더니 대뜸 양손을 치켜세웠다.
그러자 괴이하게도 그의 손은 청색 기운을 띄었다. 현수는 흠칫했
다.
'저것은 대체 무슨 무공이길래?'
흑의복면인은 쌍장을 뻗으며 음침하게 외쳤다.
"이 놈! 청강마라공(靑剛魔羅功)을 받아랏!"
현수는 결코 상대의 공격을 경시하지 않았다.
쏴아!
푸른색 장영(掌影)이 몰려오자 그는 전신에 반야밀다대승신공을
육 성(六成)까지 일으켜 장심(掌心)에 모으더니 즉시 일 장을 내
쳤다.
"으악!"
흑의복면인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튕겨 나갔다.
아무런 소리도, 형체도 없었다. 그럼에도 흑의복면인은 마치 환상
처럼 입에서 피를 뿜으며 그대로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세차게 몸을 벽에 부딪치며 바닥에 떨어진 그는 이내 몸을 축 늘
어뜨리고 말았다.
"아! 이... 이럴 수가!"
현수는 이 뜻밖의 광경에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반야밀다대승신공의 위력이 이렇게 강하다니! 단지 육 성 밖에는
펼치지 않았는데.......'
그는 자책을 느끼며 흑의복면인에게 다가가 상처를 살펴보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안색은 이내 창백하게 질리고 말았다.
"주, 죽었다!"
흑의복면인은 가슴이 박살나고 내장이 가루가 되어 즉사한 상태였
다. 현수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내, 내가... 살생(殺生)을 하다니......."
현수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떨리는 손으로 흑의인의 복면을 벗겨
보았다.
"앗! 현... 현우사형(玄羽師兄)!"
믿을 수 없게도 복면인은 현우였다.
"이, 이게 대체......."
현수는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느낌이 들 뿐이었다.
"아미타불......."
그의 등 뒤에서 창노한 불호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현수는
흠칫하여 뒤로 돌아섰다.
언제 당도했는지 사륜거에 단정히 앉은 천기선사와 계도원주인 현
각(玄閣), 그리고 장경각을 지키는 정 자(丁字) 돌림의 오대수장
승이 우뚝 서 있었다.
"사... 사숙님!"
현수는 천기선사의 발 아래 털썩 무릎을 꿇었다.
"아미타불......."
천기선사의 온통 주름진 얼굴은 고요하기만 했다. 그러나 현우의
시체를 보는 순간 그의 두 눈에는 고통이 배어나고 있었다.
"사숙님......."
현수는 거의 울부짖듯 머리를 바닥에 박았다. 비로소 천기선사가
입을 열었다.
"현수여,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그는 고개를 돌리며 다시 말했다.
"현각, 현우의 시신을 치워라."
"네, 사숙님!"
계도원주 현각은 공손히 답했고 오대수장승들이 즉시 앞으로 나가
현우의 시신을 들었다. 현각을 위시한 그들 오인은 굳은 표정으
로 시신을 메고 밖으로 사라졌다.
천기선사는 현수에게 침중하게 말했다.
"현수, 지금 곧 불심각(佛心閣)으로 가서 대사형을 뵈어라."
"사숙님......."
천기선사는 괴로운 듯 두 눈을 스르르 감았다.
"아미타불... 대소림에서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다니......."
천시선사는 사륜거를 돌려 밖으로 사라져 갔다.
'사숙님.......'
현수는 고개를 떨구었다.
불심각(佛心閣).
천심(天心), 천뢰(天雷), 천기(天機) 등 삼성승(三聖僧).
그들은 눈을 내려감은 채 나란히 불심각의 한 넓은 선전에 앉아
있었다.
분위기는 침중하기 이를 데 없었다. 벌써 시간이 한참 흘렀는데도
선전 안은 침묵만이 흐를 뿐이었다. 마침내 가운데 앉은 천심선사
가 먼저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현수, 네가 소림에 입문한 지 얼마나 되었느냐?"
현수는 공손히 대답했다.
"사 년 반이 되었습니다."
"아미타불......."
천심선사는 담담히 현수를 내려 보았다.
"현수, 한 가지 묻겠다. 불문오계(佛門五戒)와 소림십계(少林十
戒) 중 첫 번째가 무엇이냐?"
현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 살계(殺戒)이옵니다."
천심의 고요한 눈빛이 갑자기 흔들렸다.
"그렇다, 바로 살계다."
그는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부터 팔백 년 전 각원사존(覺遠師尊)께서 소림십계를 만들었
으나 그 중 몇 가지 계율은 강호무림과 깊은 관계가 있는 본문의
특성 때문에 종종 지켜지지 못했다."
현수는 고개를 푹 떨군 채 어찌할 바를 몰랐다.
"특히 마도(魔徒)가 창궐할 때에는 제마멸사(制魔滅邪), 항마참요
의 뜻으로 살계를 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소림십
계는 그 후 다소의 융통성을 지니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소림입
문(少林入文) 오 년 이내에만 살생을 금지시킨 것이다!"
현수의 몸이 중심을 잃을 듯 흔들렸다. 천심선사는 탄식하며 말했
다.
"그러나 현수, 그대는 그 오 년 안에 살계를 범했다."
'사부님.......'
"그러므로 노납으로선 한 가지 결정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
다."
그 말에 천뢰, 천기선사는 모두 안색이 굳어지며 감았던 눈을 떴
다. 그들의 눈은 안타까운 빛을 띄며 현수에게 향해졌다.
천심선사의 마지막 말이 떨어졌다.
"현수여! 너에게 오늘부로 소림파문(少林破門)을 명(命)한다."
현수는 또 한 번 몸을 부르르 떨며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천심은 강경하게 그를 거부했다.
"현수! 말하지 마라, 이것은 불존의 뜻이다. 비록 배신자 현우를
죽인 너의 살생이 정당한 것이라고는 하나 살생은 살생이다."
천심선사의 말에는 태산 같은 위엄이 있었다.
현수는 감히 항거할 수 없음을 느끼고 그만 고개를 다시 꺾고 말
았다.
"사부님......."
천심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현수, 네가 비록 파계(破戒)하여 영원히 소림제자가 될 수는 없
지만... 그러나 여기에는 뜻이 있느니라."
현수는 그 말이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천심선사는 물같이 고
요한 눈으로 현수를 자애스럽게 내려다보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
"현수, 이젠 노납이 모두 이야기해 주겠다."
현수는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귀를 기울였다.
"왜 너를 소림에 삭발 입문 시키면서도 머리에 계인을 박지 않았
으며 또 그 이후 머리가 길러졌을 때도 깎지 않게 했는지 아느냐?"
천심선사는 나직히 탄식했다.
"너는 애초부터 불문과 인연이 없는 몸이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그것을 말해주지 않은 이유는 너의 무공수련에 지장을 초래할까
봐서였고, 계인을 박지 않은 것은 바로 너를 무사히 환속시키기
위해서이다."
현수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나... 나를 환속시킬 예정이었다고? 그럼... 대사부님이 이 모든
일을 사전에 예측하고 안배하셨단 말인가?'
현수는 머릿 속이 온통 의문과 어지러운 회의로 가득 차고 말았고
천심선사는 그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한동안 자애스러운 눈길로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너를 소림에 입문시킨 이유는 노납이 머지않은 장래에 있을 무림
의 혈겁을 예측했기 때문이다. 노랍은 천혈성(天血星)과 오대마성
(五大魔星)의 창궐을 미리 대비해야만 했다."
"으음......."
"바로 너를 천혈성과 오대마성을 막을 인재로 키우려 했다면 알아
듣겠느냐?"
천심선사는 문득 몸을 일으켰다.
"현수, 일어나 노납을 따라 와라."
현수는 곧장 천심의 뒤를 따랐고 천심선사는 창가로 가 창문을 활
짝 열었다.
밤(夜). 밖은 캄캄한 심야였다.
"하늘을 보아라, 현수."
천심선사는 야공에 시선을 둔 채 말을 이었다.
"저 어두운 천공에 천혈성과 오대마성이 점점 진한 핏빛을 띄워
가고 있다."
그의 음성이 점차 침중해지고 있었다.
"실로 두려운 일이다. 수천 년 무림사에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엄
청난 대혈겁이 미구에 몰려들 것이다."
천심의 말에 현수는 가슴이 격탕했다.
캄캄한 밤하늘에 뜬 무수한 성좌(星座)들.......
현수는 그 중 어느 것이 천혈성과 오대마성인지는 알 수가 없었으
나 강한 의기(義氣)가 끓어오름을 느꼈다.
"현수."
"네, 사부님."
천심은 현수의 어깨를 잡았다.
"그런 이유로 노납은 너를 소림에 입문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제는 너에게 소림십계와 같은 구속을 주지 않기 위해서 너를 파문
(破門), 환속시키려는 것이다."
천심선사는 합장했다.
"아미타불... 무서운 살겁이... 끔찍한 혈하(血河)가 중원을 적실
것이다. 아미타불... 아아! 불존의 자비만 바랄 뿐......."
현수는 점점 더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현수, 너의 한 몸에 모든 것이 달려있다. 천혈성과 오대마성, 그
마의 저주를 막을 자는 오직 너 뿐이다. 아미타불......."
천심선사는 불호를 외우며 돌아섰다.
그러나 현수는 계속 창가에 서서 천공을 바라보고 있었고 잔잔한
물결처럼 고요하던 그의 눈속에서는 무섭도록 강렬한 빛이 솟아나
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