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十一章 英雄之行
본격적인 비무가 시작된 지 나흘이 흘렀다.
그 동안 천, 지, 일, 월 네 개 조의 결승 진출자들이 모두 가려졌다.
천자조는 혈우마검과 남궁욱이 조의 우승을 겨루게 되었고 지자조에선 무당의 정인도장과 순우대웅이, 일자조에서는 예상외로 철군악이 결승에 올라 사천당문 당가삼준(唐家三俊)의 하나인 당요(唐要)와 겨루게 되었다.
월자조에서는 신성처럼 등장한 학초명과 송난령이 만나게 되었다.
군웅들은 물론이요, 참관인으로 나온 고수들까지 함부로 승자를 점칠 수 없는 이변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드디어 여덟 명의 고수들만 남아 자웅을 겨루게 된 것이다.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될지 알 수 없었으나, 현재 남은 여덟 명이 최고의 고수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이들 중에서 단 한 명만이 우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후의 승자는 이전 대회의 우승자들처럼 온갖 칭송과 흠모의 대상이 되고 훗날에는 무림의 거목(巨木)으로 성장할 것이다.
누구나 원하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들 여덟 명의 고수는 최선을 다해 승자가 되려고 노력할 것이다.
당금 무림의 최고 후기지수를 뽑는 비룡승천대회는 점점 열기를 더해가고 있었다.
* * *
“하악……!”
아름다운 여인이 두 눈을 반쯤 감은 채 입에서 단내를 토해 내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백옥(白玉)처럼 하얀 피부에 삼단 같은 머릿결의 여인은 동체를 꿈틀거리며 사내를 더욱 깊이 받아들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월궁(月宮)의 항아(姮娥)보다 더 아름다운 얼굴과 요요(妖妖)한 몸매는 사내의 간장을 녹일 듯했고, 가볍게 찡그린 얼굴에는 요염하다 못해 사이(邪異)한 기운이 어려 있었다.
그러나 사내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전혀 서두름 없이, 여인이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더욱더 차근차근 여인을 정복해 갔다.
“제발……!”
견디다 못한 여인의 입에서 울음 같은 애원의 소리가 터져 나오자, 사내는 드디어 여인의 몸에 자신을 실었다.
“아음……!”
여인의 눈이 순간적으로 크게 떠졌다.
그리고 온몸을 산산이 부술 듯 밀려오는 쾌락.
여인은 울었다.
쾌락에 울었고,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의 손길에 미친 듯이 반응하는 자신의 몸뚱어리를 저주하며 울었다.
사내의 정력은 정녕 절륜했다. 여인이 서너 번 까무라치고 나서야 만족한 듯 움직임을 멈춘 것이다.
“너라는 계집은 정말 대단하다! 너를 얻은 것은 행운이야.”
사내는 말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손으로 여인의 구석구석을 애무했다.
“아……!”
여인의 입에서 다시 한 번 울음 같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사내는 여인의 찡그린 얼굴을 똑바로 주시하며 계속해서 손을 놀렸다.
“아, 제발……!”
여인은 다시 한 번 몸 속에서 꿈틀대는 욕망에 사지를 바르르 떨었다. 단전에서부터 시작된 물결은 몸 이곳저곳으로 퍼져 나가 그녀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구릿빛 상체에 절륜한 용모를 지니고 있는 사내는 그렇게 계속 여인을 애무했다.
“학……!”
사내의 손길에 지친 여인의 신음 소리가 실내에 가득 울려 퍼지고 있었다.
* * *
넓은 비무장이 수많은 인파로 가득 차 발 디딜 틈 하나 없었다.
수천 명이 넘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남궁욱은 비무대 위에 조용히 서 있었다.
그는 빛나는 눈길로 맞은편에 있는 혈우마검을 응시했다.
십 수 년간 고생한 보람을 찾을 수 있는 시간이 드디어 다가온 것이다.
이제 이 관문만 넘으면 아무도 그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상대가 비록 마도제일검이라 불리고 있었지만, 남궁욱은 자신이 있었다.
조부의 엄명으로 그가 익힌 무공 중 가장 강한 것은 여태껏 누구에게도 보여 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가 얼마나 강한지 보여 줄 수 있는 기회가 왔다.
누구도…… 그 누구도 내 검을 막지 못할 것이다.
남궁욱은 동자배불(童子拜佛)의 일식으로 혈우마검에게 경의를 표한 후, 아무 말 없이 검을 들었다.
혈우마검은 그저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
얼굴 가득 오만한 미소를 띤 채……
저 오만한 얼굴을 고통과 수치로 찡그리게 해주리라.
남궁욱은 무언가 알 수 없는 열기가 전신으로 치달음을 느끼며 세차게 검을 휘둘렀다.
“차압……!”
우우우……
용의 울부짖음 같은 소리가 터지며 남궁욱의 검이 환상처럼 혈우마검의 전신을 난도질해 들어갔다.
동시에 눈을 아찔하게 만들 만큼 강한 노을빛이 천지를 온통 물들였다. 남궁세가가 천하에 자랑하는 자소칠검(紫七劒)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혈우마검은 남궁욱이 예상보다 훨씬 강한 검기를 내뿜자 안색을 변화시키며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그는 마치 물고기가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듯 유유하기 짝이 없는 동작으로 그물 같은 검세를 쉽게 벗어날 수 있었다.
하나, 남궁욱은 이미 예상했는지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 없이 혈우마검을 바짝 따라붙으며 검을 휘둘렀다.
후우웅……
순간, 휘황찬란한 자색의 물결이 비무대를 가득 뒤덮기 시작했다. 자소칠검의 절초인 자하만천(紫霞滿天)이었다.
혈우마검은 상대의 검법이 생각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을 깨닫자 하는 수 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과우우……
그의 검에서 엄청난 소용돌이가 생기며 남궁욱의 검을 막았다. 일순,
꽈꽈꽝!
벼락 치는 듯한 소리가 터져 나오며 혈우마검과 남궁욱은 엄청난 압력이 전신을 압박해 오는 것을 느꼈다.
“우웃!”
“훗!”
그들은 별수 없이 뒤로 서너 걸음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처음 격돌에서 누구도 우세를 점하지 못했지만, 번쩍이는 눈으로 서로를 노려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힘차게 다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압!”
“이야압!”
남궁욱이 공격을 하면 혈우마검이 위태해 보였고, 반대로 혈우마검이 검을 휘두르면 남궁욱이 곧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예상을 뒤엎고 두 사람은 막상막하의 대결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오십 초가 지나자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남궁욱이 점점 자신감에 찬 표정을 짓는 데 반해 혈우마검의 얼굴은 완전히 일그러져 가는 것이 아닌가?
한 수 아래로 여겨 왔던 남궁욱이 전혀 손색없이 그와 겨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길 얼마일까?
“이얍!”
혈우마검이 돌연 대갈일성을 토하며 검을 기이하게 휘두르기 시작했다.
순간, 그의 검법이 이제까지와는 전혀 딴판으로 돌변하기 시작했다.
끼아아……
귀신이 호곡하는 듯한 소리와 함께 검에서 온통 검붉은 색의 검기가 번져 나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혈우마검의 검이 무서운 속도로 남궁욱의 정수리로 떨어져 내렸다.
이것이 바로 고금십대검법 중 하나인 삼절마검(三絶魔劒)이었다. 아수라(阿修羅)가 모든 힘을 쏟아 부어 만들었다는 고금절대(古今絶代)의 마공(魔功).
그것이 드디어 혈우마검의 손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드디어……!’
남궁욱은 눈을 더욱 빛내며 검을 종횡으로 마구 휘둘렀다.
언뜻 보면 당황해서 두서없이 휘두르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절대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검에서 그물 같은 검기가 퍼져 나와 혈우마검의 검을 막는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었다.
“엇……!”
혈우마검은 자신이 펼친 회심의 일검이 무위로 돌아가자 경악성을 토해 내며 다시 검을 기이하게 휘둘렀다.
끼이이이……
호곡 소리가 더욱 커지며 천하가 온통 피바다로 변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삼절마검의 절초인 귀호적상(鬼號赤翔)이었다.
하나, 남궁욱은 결코 서두르지 않고 침착하게 검을 휘둘렀다. 순간.
쓰아아……
그의 검세가 기이하게 변하며 혈우마검의 검기를 옭아맸다.
그러자 혈우마검이 펼친 강력한 검세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남궁욱이 펼친 검법이 무형의 막을 형성하면서 강력한 삼절마검의 검기를 막고 있는 것이다.
혈우마검의 입에서 경악인지 감탄인지 모를 소리가 터져 나다.왔
“번뇌삼검(煩惱三劒)이로구나!”
그렇다!
남궁욱이 펼친 검법은 고금십대검법 중 하나인 번뇌삼검이었다.
세상 모든 검법 중 가장 복잡한 변화를 내포하고 있어, 천부적인 재질이 없다면 익히기가 불가능하다고 알려진 검법!
그것이 남궁욱의 손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혈우마검은 남궁욱이 번뇌삼검을 펼치자 그를 경시하던 마음을 버리고 신중한 표정으로 검의 변화를 살피기 시작했다.
하나, 검법의 변화가 어찌나 많고 오묘하던지 한눈에 도저히 그 허실을 파악할 수 없었다.
‘일단 부딪쳐 보는 수밖에……’
혈우마검은 안색을 굳히며 초식을 귀호적상에서 혈광신겁(血光神劫)으로 바꾸었다.
구아아……
소름 끼치는 소리가 터져 나오며 그의 검에서 섬뜩한 혈광(血光)이 폭사되었다.
피처럼 붉은 혈광은 이내 노을처럼 퍼져 나가며 사방을 뒤덮기 시작했다.
남궁욱은 어마어마한 검기가 폭풍우처럼 몰려들자 입을 악 다문 채 검을 무려 서른여섯 번이나 상하좌우로 그어댔다.
쓰스스스……
마치 거미줄 같은 검기가 빽빽히 일어나며 혈우마검이 펼친 가공할 혈광에 부딪쳐 갔다.
이것이 바로 번뇌삼검 중에서도 가장 익히기가 까다롭다는 번뇌충천(煩惱衝天)이었다.
실로 눈 깜짝할 새에 두 개의 엄청난 검기가 허공에서 정면으로 충돌했다.
꽈꽈꽈꽈꽝!
비무대가 지진을 만난 듯 마구 흔들림과 동시에 누군가 신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우욱……!”
남궁욱이었다.
내상을 입었는지 입가에는 가느다란 혈선을 흘리고 있었으며 얼굴에는 온통 놀라운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남궁욱은 내심 가슴이 섬뜩해짐을 금치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번뇌삼검을 펼치고도 혈우마검에게 전혀 우세를 보이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이 내상을 입지 않았는가.
남궁욱으로서는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이었으나, 한가하게 놀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엄청난 격돌의 여파로 저만치 뒤로 물러났던 혈우마검이 검을 곧추세우며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기아아앙……
남궁욱이 황급히 고개를 들어 보니 시뻘겋게 변한 혈우마검의 검이 마치 유성 같은 속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남궁욱은 창망한 와중에도 눈을 부릅뜨며 피할 곳을 찾아보았지만, 도저히 빠져 나갈 구멍이 없었다.
‘어쩔 수 없다!’
남궁욱은 이를 악물며 검을 서서히 사선(斜線)으로 내리 그었다.
힘에 겨워 겨우 검을 움직이는 듯 아무 위력도 없어 보였지만, 자세히 보면 그의 검이 미미하게 떨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이 번뇌삼검의 최절초(最絶招)이자 만변(萬變)의 정화(精華)라는 일휘천경(一揮天驚)이었다. 단 한 번의 움직임에 모든 조화를 품고 있다는 개세(蓋世)의 검학(劒學).
그것이 남궁욱의 손에서 천 년 만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검의 움직임에 따라 실로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파파파팟!
초식이 채 반도 펼쳐지기 전에 혈우마검의 옷이 여기저기 터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가공스러운 무형(無形)의 검기 때문이었다.
혈우마검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검을 곧추세우고 있더니 온몸의 피부가 검기에 의해 갈라 터지기 시작해서야 비로소 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 그었다.
끼아아아……
고막을 찢을 듯한 귀곡성이 허공을 가득 메우며 시뻘겋다 못해 거무스름하게 보이는 검기가 일직선으로 남궁욱을 향해 날아갔다.
그 역시 삼절마검의 마지막 초식인 만귀출세(萬鬼出世)를 혼신의 힘으로 펼친 것이다.
두 사람이 펼친 엄청난 검기는 곧바로 허공에서 정면으로 충돌했다.
꽈르르르릉……
비무대가 마구 요동치며 엄청난 검풍(劒風)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으앗!”
“피해……!”
비무대 바로 아래는 구경하고 있던 군웅들이 허겁지겁 자리를 피하느라 완전히 북새통이 되어 버렸다.
하나, 너무도 엄청난 격돌의 여파로 인해 미처 피하지 못한 군웅들은 부상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부상을 돌볼 겨를도 없이 눈을 부릅뜨며 비무대 위를 쳐다보았다. 조그만 피륙의 상처보다는 싸움의 결과가 더욱 궁금했기 때문이다.
“아……!”
“으음……!”
비무대 위를 자세히 관찰하던 군웅들의 입에서 신음인지 탄성인지 모를 소리가 새어나왔다.
혈우마검은 옷이 갈가리 찢겨지고 여기저기 수많은 검상을 입었으나, 여전히 오만한 표정과 정광(精光)이 번쩍거리는 눈으로 정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남궁욱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단정히 묶여 있던 머리는 산발한 것처럼 풀어헤쳐져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고, 온몸은 자신이 내뿜은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더군다나 언제나 지혜의 빛으로 충만해 있던 두 눈은 백치의 그것처럼 흐려져 있었다.
누가 보아도 명백한 남궁욱의 패배였다.
남궁욱은 한동안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있더니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녕 나는 혈우마검을 능가할 수 없단 말인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는 그의 얼굴에는 말할 수 없는 죄책감과 자괴심이 묻어 있었다.
그것은 남궁세가 천년 역사 이래 숙원의 과제인 번뇌삼검을 대성(大成)하지 못한 죄책감과, 혈우마검에게 패하고 만 자신을 향한 자괴심이었다.
사실, 그는 번뇌삼검을 완벽하게 익히지 못했다.
번뇌삼검은 남궁세가의 일대조사(一代祖師)인 검성(劒聖) 남궁백(南宮伯)이 오랜 각고(覺苦) 끝에 창안한 검법으로, 인간의 머리와 몸으로는 대성하기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알려진 검예였다.
지난 천년 동안 남궁세가의 수많은 기재들이 번뇌삼검을 대성(大成)하기 위해 끝없이 도전했지만, 놀랍게도 단 두 명만이 겨우 일초식을 연마했을 뿐이었다.
그러던 중에 남궁욱이 번뇌삼검의 일초와 이초를 거의 완벽하게 익혀 낸 것이다.
남궁세가의 모든 인물들은 뛸 듯이 기뻐했다. 드디어 오랜 숙원이던 번뇌삼검을 대성할 인물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세가의 최고 어른이자 남궁욱의 조부이기도 한 남궁룡은 우선 이 일을 철저히 비밀로 했다.
고금십대검법의 하나인 번뇌삼검은 이미 오래 전에 절전(絶傳)된 것으로 소문이 나 있었는데, 그것을 대성(大成)할 인물이 나타난다면 누가 무슨 해코지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후부터 남궁욱은 무려 삼 년 이상 번뇌삼검의 마지막 초식인 일휘천경을 수련했으나, 도무지 완벽하게 익힐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일월장의 초청을 받아 이렇게 비무대회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혈우마검과 겨루게 되었지만, 결과는 보다시피 남궁욱의 완벽한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남궁욱이 익힌 번뇌삼검과 혈우마검이 익힌 삼절마검의 위력은 거의 대등했지만, 남궁욱은 혈우마검에 비해 검법의 성취도가 낮았기 때문에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쓸쓸한 표정으로 패배를 시인하는 남궁욱의 두 눈에는 알 수 없는 처량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내가 패했소.”
동시에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
“과연 혈우마검이다……!”
혈우마검은 환호를 들으며 비무대를 내려갔으나, 반대로 남궁욱은 쓰디쓴 패배의 아픔을 곱씹으며 조용히 군웅들 사이로 사라졌다.
혈우마검의 모습을 더욱 자세히 보기 위해 고개를 빼드는 사람은 많았지만, 남궁욱에게는 한 사람도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남궁욱은 미래 양양(洋洋)한 정도의 기재에서 가련한 패배자로 바뀐 것이다.
어느 정도 비무대가 정리되자 바로 지자조(地字組)의 결승이 이어졌다.
이번 대회로 인해 가장 유명해진 사람 중 하나인 무당의 정인도장과 타고난 힘과 극강(極强)한 외문기공(外門奇功)으로 인해 신력무적(神力無敵)이라 불리는 순우대웅의 일전이었다.
순우대웅은 비무대 위에 그린 듯 서 있는 정인도장을 보자 특유의 걸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명문 무당의 고제(高弟)인 정인도장과 이렇게 고하를 겨루게 되어 영광이오…… 부디 이 몸이 큰 망신을 당하지 않도록 자비를 베풀어 주기 바라오.”
엄살과 익살이 뒤섞인 순우대웅의 말에 정인도장이 빙긋 미소 지었다.
“무량수불…… 순우 시주의 명성은 이미 사해를 떨어 울릴 지경인데 미거한 이 몸이 어찌 상대가 되겠습니까? 그 말씀은 제가 해야 될 것 같군요.”
“하핫! 어쨌든 좋소이다. 자! 그럼 시작할까요?”
“무량수불……!”
정인도장과 순우대웅은 서로 정중히 인사를 한 후, 곧 자세를 가다듬었다.
정인도장은 별처럼 빛나는 눈으로 검을 곧추세운 채 순우대웅을 노려보았다. 과연 소문대로 전혀 빈틈이
없어 보였다.
일반적으로 힘이 좋고 외공에 능한 사람은 절묘한 초식보다는 힘을 위주로 싸우기 때문에 동작이 느린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순우대웅을 그렇게 생각했다가는 큰코다치기 십상이다.
그는 일반 내가(內家)고수들보다 오히려 몸이 빠른 편이었다.
동작이 느릴 거라 지레 짐작하고 그를 얕잡아 보았다가 낭패를 당한 고수가 어디 한둘이던가?
그것을 잘 아는 정인으로서는 순우대웅을 결코 쉽게 생각할 수 없었다. 그의 한 몸에 천년 사문(師門)의 명예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마음을 가라앉힌 정인도장은 서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쿠아앙!
천년 무당의 진산절예인 칠성검법(七星劒法)이 장강대하처럼 도도하게 흘러나왔다. 순우대웅은 미처 반
격할 겨를도 없이 몸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쏴아아……
날카로운 검기가 온몸을 스쳐 가며 완전히 피하지 못한 그의 소매를 갈랐다.
“핫!”
깜짝 놀란 순우대웅은 한소리 폭갈을 터뜨리며 쌍장(雙掌)을 휘둘렀다.
콰릉!
그의 양손에서 엄청난 경력이 뿜어져 나오며 정인도장의 칠성검법에 부딪쳐 갔다. 일순,
꽝!
폭음이 터지며 두 사람은 각각 서너 걸음씩 물러났으나,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시 상대를 향해 돌진했다.
순우대웅은 정인도장의 검법조예가 절고(絶高)함을 깨닫자 감히 태만치 못하고 자신의 최고절예인 둔천팔괘장(遁天八卦掌)을 펼치기 시작했다.
우우웅!
팽팽히 부풀어 오른 소맷자락에서 노도와 같은 경력(勁力)이 정인도장을 향해 뿜어져 나왔다.
정인도장은 이미 둔천팔괘장의 강력한 위력에 대해 알고 있는지 감히 맞받을 생각을 하지 못하고 역시 사문의 절예인 소천성신법(小天星身法)으로 이리저리 피하기만 했다.
그렇게 삼십 초가 흘렀다.
그 동안 순우대웅은 전력을 다해 정인도장에게 공격을 퍼부었지만, 전혀 성과를 얻지 못했다.
이러다가는 정인도장을 격퇴시키는 것이 아니라 공격을 하고 있는 그가 막대한 공력의 손실로 낭패를 볼 것 같았다.
순우대웅은 물론이고 정인도장 또한 둔천팔괘장의 장단점을 잘 알고 있었다.
둔천팔괘장은 그 위력이 막대한 강점은 있지만, 장법의 변화가 빠르지 못하고 공력의 손실이 큰 단점을 갖고 있었다.
순우대웅은 상대가 자신과 맞서지 않고 피하기만 하자 정인도장의 의도를 간파할 수 있었다.
‘이제 보니……!’
정인도장은 지구전으로 나가며 자신의 공력이 감퇴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순순히 상대의 뜻대로 해주어서는 안 되었다.
순우대웅은 눈을 빛냈다.
방법을 바꿔야 했다.
그는 전력으로 장력을 펼치는 대신 둔천팔괘장을 펼치는 척하며 허초를 구사하다가 기회가 닿으면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공력의 소모를 줄이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가 둔천팔괘장을 펼치는 척하려고 막 양손을 허공으로 휘둘렀을 때였다.
그때까지 멀찌감치 떨어져 피하기만 하던 정인도장이 돌연 번개같이 달려들며 검을 휘두르는 것이 아닌가!
우우우웅!
봉황의 울음소리 같은 검명이 터져 나오며 칠성검법의 정화가 폭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헉!”
깜짝 놀란 순우대웅이 사력을 다해 몸을 움직였지만, 완전히 피하지 못하고 이(二) 검(劒)을 맞고야 말았다.
카카캉!
쇳소리가 터져 나오며 철골동신(鐵骨銅身)보다 더 단단하다고 알려진 순우대웅의 몸에 깊은 검상이 생겼다.
순간, 순우대웅은 몸을 멈춰 세운 후 멍하니 자신의 상처를 내려다보았다.
행동을 보니 전혀 반격할 의지가 없는 사람 같았다.
언뜻 보기엔 심각할 정도의 상처는 아니어서 다시 비무를 해도 별 상관이 없어 보였는데, 순우대웅은 왠지 그냥 비무대 위에 서 있기만 했다.
그러자 군웅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왜 저러지?”
“글쎄, 상처가 깊은 것 같지는 않은데……”
하나, 순우대웅은 군웅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지 그저 얼빠진 표정으로 멍하니 자신의 상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
상처를 보고 있는 그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순우대웅은 이름이 별로 알려지지 않은 정인도장에게 허무하게 부상을 당했다는 사실보다도, 철나한신공(鐵羅漢神功)을 익혀 쇠보다 더 단단해진 자신의 몸에 깊은 상처가 생겼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 동안 생사(生死)를 건 격전을 수도 없이 치른 그였지만, 오늘처럼 철나한신공을 뚫고 자신의 몸에 이처럼 깊은 상처를 낸 사람은 만나지 못했었다.
순우대웅은 알고 있었다.
만약, 정인도장이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면 그는 절대 이렇게 멀쩡하게 서 있지 못했을 것이다. 단지 상처를 입는 정도가 아니라 심하면 목숨을 잃었을지도 몰랐다.
그는 목숨에 연연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미 승패가 뻔한 싸움을 물고 늘어질 만큼 치사하지도 않았다.
순우대웅은 한참 동안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더니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밝은 표정으로 정인도장을 응시했다.
“도장께서 마지막에 손속에 인정을 둔 점, 이 순우(淳宇) 모(某)는 영원히 잊지 않겠소…… 본인의 완벽한 패배요.”
“죄송합니다.”
“별말씀을…… 도장 같은 분과 겨루게 되어 이 순우 모는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언제고 다시 만나게 되면 적이 아니라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군요.”
“무량수불……! 순우 대협 같은 분과 망년지교를 맺을 수 있다는 건 정인의 복입니다.”
그 말을 들은 순우대웅은 웃음띤 얼굴로 비무대를 내려갔다. 그제서야 일의 내막을 어느 정도 알아차린 군웅들에게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와아아……!”
“멋진 싸움이다……!”
두 사람이 모두 비무대를 내려가자 철군악은 천천히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그의 차례가 돌아온 것이다.
철군악이 막 비무대 위로 올라갔을 때, 거의 동시에 한 사람이 대 위로 올라와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삼십이 조금 넘은 나이로 매부리코가 꽤나 음사(陰邪)한 느낌을 주는 인물이었는데, 두 눈에 은은한 녹광(綠光)이 감도는 것으로 보아 무슨 특이한 기공(奇功)을 연마한 것 같았다. 그가 바로 당가삼준의 하나인 당요(唐要)였다.
당가삼준의 둘째인 그는 심성이 잔혹하고 지나치게 자부심이 강했지만, 지닌 기재(器才)가 뛰어나 당문에서는 매우 중요시되는 인물이었다.
사실 당요가 절정고수들을 물리치고 비룡승천대회에서 승승장구한 것은 약간 의외였다. 사천당문(四川唐門)은 예전부터 암기와 독으로는 천하제일이었으나, 그 외 다른 무공은 그다지 강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당요는 은은하게 녹광이 감도는 눈으로 철군악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네가 어쩌다 운이 좋아 여기까지 올라왔다만, 본인을 만난 이상 네 잘난 운도 이제 끝이다.”
철군악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무심한 얼굴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당요는 철군악이 자신의 말에 아무 대꾸 없이 묵묵히 있자 속이 뒤틀렸는지 음산한 미소를 터뜨리며 다짜고짜 양손을 휘둘렀다.
“흐흐흐…… 건방진 놈!”
쉬이익!
날카로운 경기(勁氣)를 동반한 장영(掌影)이 철군악의 정면으로 몰려들었다.
철군악은 두 손을 늘어뜨린 채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 당요의 공격을 피하기 시작했다. 그의 움직임이 어찌나 빠르던지 당요가 펼친 장법은 철군악의 몸 근처에도 이르지 못했다.
당요는 상대가 자신의 공격을 너무도 간단하게 피하자 바짝 약이 올랐는지 양손을 거칠게 휘두르기 시
작했다.
위이잉!
공기가 요동치며 날카로운 장력이 사방으로 비산했으나, 당요는 여전히 철군악의 옷자락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이놈!”
눈이 뒤집힌 당요가 양손을 더욱 거칠게 휘둘렀지만, 그럴수록 철군악의 동작은 더욱 빨라졌다.
금세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한 사람은 피하기만 하고, 또 한 사람은 무작정 공격만 하는 것이다. 누가 본다면 꼭 서로 짜고 하는 짓 같았지만, 두 사람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하기만 했다.
무려 오십 초가 지났건만, 당요는 철군악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었다.
그의 얼굴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수세에 몰린 철군악보다 공격하는 당요가 더욱더 지쳐 보였다. 이대로 가다가는 너무도 허무하게 싸움이 끝나 버릴 것 같았다.
하나……
거친 숨을 씩씩 몰아쉬며 철군악을 공격하던 당요가 돌연 동작을 딱 멈추었다.
싸움을 하던 사람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다니, 아예 승부를 포기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절대 그것 때문은 아니었다.
당요는 동작을 멈추고 땀에 젖은 얼굴로 철군악을 노려보더니 갑자기 음산한 웃음을 터뜨렸다.
“으흐흐흐…… 쥐새끼 같은 놈! 그렇게 피하기만 하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는 새파랗게 이글거리는 눈으로 철군악을 노려보며 돌연 기이한 자세를 취했다.
눈을 반개한 채 양손을 모아 합장(合掌)을 했는데, 괴이하게도 포개진 두 손이 점차 녹색으로 물드는 것이었다.
동시에 엄청난 기세가 그의 주위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처음에 연한 녹색이던 양손은 점점 진해져 종내는 암록색으로 변했다. 바로 그 순간,
눈을 반개한 채 자신의 코끝만 내려다보던 당요가 벼락같은 호통을 내지르며 양손을 세차게 떨쳐 냈다.
“녹령사인(綠靈邪印)!”
동시에 암록색의 강기가 무지막지한 기세로 철군악의 전신을 덮쳐 왔다.
콰우우……
그 기세가 어찌나 대단하던지 마치 거대한 해일이 덮쳐 오는 것 같았지만, 철군악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무지막지한 장력이 막 그의 몸을 휘감으려 할 때, 드디어 철군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앗……!”
“저거……?”
중인들의 입에서 놀람에 찬 소리가 터져 나왔다.
철군악이 당요의 공격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장력의 정면으로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파라라라락!
옷자락이 미친 듯이 휘날리며 너무도 엄청난 압력에 숨이 다 막힐 정도였으나, 철군악은 전혀 개의치 않고 계속 당요에게 접근해 갔다.
“엇?”
당요는 철군악이 자신의 가공할 공세를 뚫고 다가올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는지 헛바람 빠지는 경악성을 토해 내며 얼른 뒤로 물러났다.
하나, 그는 강호에서 뼈대가 굵은 고수답게 몸을 빼는 와중에도 양손을 휘두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우와와앙……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강력한 녹색 물결이 다시 철군악의 정면으로 쇄도해 들어갔다.
철군악은 당요의 장력이 코앞에 이르자 그제서야 검을 좌우로 슬쩍 움직였다.
하나, 여전히 검집에서 검을 뽑지 않은 채였다.
쓰스스……
푸르스름한 검기가 허공 가득 일어나며 동시에 엄청난 흡인력이 당요의 움직임을 부자연스럽게 만들었다.
흡(吸)을 주된 요체로 삼는 흡천십이검 중에서도 흡인력이 가장 강한 포월청무(抱月靑霧)의 초식이었다.
당요는 마음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자, 피하는 것을 포기한 채 철군악의 검세를 정면으로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꽈꽈꽝……
엄청난 굉음과 함께 압력을 이기지 못한 당요의 입에서 거친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크윽……!”
당요는 온몸에 검상을 입은 채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철군악이 눈을 빛내며 허겁지겁 물러나기에 바쁜 당요에게 접근했다.
쓰스승……
보기에도 무지막지한 아홉 겹의 검기가 허공을 온통 뒤덮으며 당요에게 덮쳐 갔다.
흡천십이검 중 가장 위력이 강한 검파멸절(劒波滅絶)이었다.
“안 돼……!”
당요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내 양손을 휘둘렀지만, 그것은 한마디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허망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
꽈꽈꽝……
비무대가 엄청난 검기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질 듯 마구 요동치기 시작했다.
동시에 처절한 비명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으아아……!”
중인들은 놀란 얼굴로 비무대 위를 주시했다.
철군악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고, 그의 바로 앞에는 당요가 전신이 만신창이가 된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당요는 바닥에 널브러진 채 마치 벌레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흐으……!”
온몸에는 피를 잔뜩 뒤집어쓰고 있었고, 한 쪽 팔은 어깻죽지부터 잘려 나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아마도 팔이 잘려 나가는 순간 너무도 강력한 검기를 이기지 못하고 형체도 없이 산산조각 난 것 같았다.
꿈틀꿈틀!
한참 동안 바닥에서 꿈틀거리던 당요의 고개가 서서히 들렸다.
온통 피 묻은 얼굴로 철군악을 노려보는 그의 두 눈에는 원한의 불길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네, 네놈이 내 팔을 자르다니…… 이놈! 이, 이제부터 너는 한시도 두 다리를 뻗고 편히 자지 못할 것이다. 네, 네가 어디에 있든지 꼭 찾아내어 천배, 만 배 복수를 하고야 말겠다…… 크하하하하……”
한참 동안 철군악을 노려보며 광소를 터뜨리던 당요는 곧 혼절하고 말았다.
그가 기절하자마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청년 하나가 비무대 위로 올라와 그를 소중히 끌어안았다.
이제 스물이나 될까말까 한 청년이었는데, 언뜻 보기에도 쭉 뻗은 검미와 날카로운 눈매가 꽤나 범상치 않아 보였다.
그는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철군악을 노려보더니 당요를 품에 안고는 비무대를 내려가 이내 사람들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으음……!”
철군악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것은 당요를 너무 심하게 대한 것 같은 자책감이나 그를 노려보던 청년이 두려워서는 결코 아니었다.
단지, 앞으로 수많은 강적과 싸워야 할 그의 처지에서 또 다른 적을 만들었으니 그것이 불편하고 귀찮아서였다.
물론 언젠가는 그들과도 상대를 해야겠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철군악의 속내야 어쨌든 군웅들은 온갖 환호와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와아아아……!”
짝짝짝짝!
철군악은 그들이 환호를 하건 말건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비무대를 천천히 내려갔다.
하나, 그가 군웅들 사이로 사라지는 그 순간에도 박수는 끝날 줄을 모르고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당문의 기재라는 당요를 별 어려움 없이 중태에 빠뜨린 철군악의 엄청난 무공은 군웅들의 칭송을 받으며 아울러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과연 누가 이번 대회에서 우승을 할 것인가?
군웅들은 모두 이런 궁금증을 간직한 채, 철군악이 사라진 후 한참이 지나서야 다시 비무대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의 마지막 결전을 보기 위해서였다.
비무대 위에는 어느새 올라왔는지 학초명과 송난령이 서로 마주보며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반가워요! 송난령이라 합니다.”
결선 진출자 중 홍일점(紅一點)인 송난령이 밝은 얼굴로 인사를 하는 데 반해, 웬일인지 학초명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어두운 그림자가 어려 있었다.
“바, 반갑소이다. 학초명이라 하오.”
송난령은 학초명의 태도가 약간 이상쩍었으나 개의치 않고 검을 곧추세웠다.
“자, 그럼 시작할까요?”
그녀는 검을 앞으로 한 번 크게 휘둘러 원호를 그린 후 곧 숨을 가다듬었다.
이내 장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수유 같은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타앗!”
아리따운 여인에게서 나왔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호기로운 대갈일성과 함께 그녀의 검이 아름다운 빛무리를 토해 내기 시작했다.
꾸우우……
눈이 부실 만큼 찬란한 검광이 눈 깜짝할 사이에 허공 가득 퍼지며 빠른 속도로 학초명을 향해 짓쳐 들었다.
“엇……!”
이처럼 강한 검기가 여인의 손에서 펼쳐지리라고는 상상도 못 한 학초명은 경악성을 터뜨리며 급급히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악!
미처 완전히 피하지 못한 학초명의 소매가 날카로운 검기에 의해 거의 한 자나 잘려 나갔다.
그것을 본 송난령은 눈을 한층 빛내며 학초명에게 다시 삼(三) 검(劒)을 휘둘렀다.
쓰아악……
전보다 더욱 휘황찬란한 빛무리가 온통 허공을 뒤덮으며 학초명의 퇴로를 봉쇄하기 시작했다.
검법이 어찌나 절도가 있고 화려하던지 보는 이의 눈을 멀게 할 정도였다.
바로 고금십대검법 중 하나인 창연칠검(蒼衍七劒)이었다.
그녀는 일반적인 검법으로는 도저히 학초명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처음부터 창연칠검을 사용한 것이다.
한데, 기이한 것은 학초명의 행동이었다.
그는 엄청난 검기가 자신을 덮쳐 오는데도 싸울 생각이 없는지 뒤로 피하기만 했다.
반격은 전혀 하지 않고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신법을 총동원해 이리저리 피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는 것이다.
언뜻 보면 공격은 하지 못하고 수비만 할 줄 아는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천하의 기재인 송난령이 어찌 그런 사실을 모르겠는가?
그녀는 근 십 초가 넘어가도록 학초명이 전혀 반격을 하지 않고 피하기만 하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공격을 한층 완화시키며 학초명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
잠시 학초명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던 그녀의 아름다운 봉목(鳳目)에 기이한 빛이 떠올랐다.
학초명은 얼굴 가득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여전히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리 안목(眼目)이 얕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부상을 입었거나 겁이 나서 그러는 것이 아님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아……!”
순간, 송난령은 무언가 깨달아지는 게 있었다.
그녀는 돌연 움직임을 멈추더니 검을 검집에 꽂아 넣었다.
그녀의 갑작스런 행동에 좌중이 술렁거렸다.
“아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그러게 말이야. 한 사람은 처음부터 꽁무니에 불이 붙은 강아지처럼 피하기만 하고, 또 상대는 그것을 보고도 공격은 않고 같이 손을 놓다니……?”
사람들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는 것도 전혀 무리는 아니었다.
한참 신나게 구경을 하던 와중에 돌연 비무가 중단되었으니 황당하고 어이가 없을 만도 했다.
더군다나 검집에 검을 넣는 것은 싸움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여기저기에서 웅성대는 중인들의 귓가로 송난령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려 온 것은 그때였다.
“당신에게 한 가지 물어 볼 것이 있어요.”
송난령이 급작스레 공격을 멈추자 학초명은 한편으로는 당황스럽고 의아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신색을 진정시키며 대꾸했다.
“말씀하시오.”
“당신은 왜 반격할 생각도 없이 피하기만 했지요?”
“……!”
학초명이 난처한 기색으로 대꾸를 하지 못하자 송난령의 입에서 짤랑거리는 교소가 터져 나왔다.
“호호호호! 제가 한번 알아맞혀 볼까요?”
송난령은 짓궂은 표정으로 학초명을 응시했다.
“당신은 여자와는 싸우기 싫은 거예요. 그렇지 않은가요?”
학초명은 안절부절못하고 더듬거렸다.
“나, 나는 단지……”
“단지 뭐죠?”
잠시 난처한 얼굴로 송난령을 쳐다보던 학초명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단지…… 여자와 싸울 수 없기 때문이오. 당신은 어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공의 무 자도 모르던 백면서생이었소. 우연히 무공기서를 얻어 강호에 뛰어들기는 했지만…… 연약한 여인과 불필요한 싸움을 하고 싶지는 않소. 물론 나도 무림이 어떤 곳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알고 있소. 하나, 그렇다고 내키지 않는 싸움을 하면서까지 명성을 얻고 싶지는 않소.”
송난령은 별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학초명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녀의 앞에 있는 사람은 진정한 군자요, 대장부였다.
물론, 보는 시각에 따라 사람에 대한 평가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지만 송난령은 학초명이야말로 진정한 무인이라 생각했다.
‘이 사람은 진정한 군자다!’
그와 같은 사람이라면 모든 이의 칭송을 받지는 못할지라도, 최소한 수모나 손가락질은 받지 말아야 한다고 송난령은 생각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한 가지 결심을 굳혔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그녀의 입에서 실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오늘 비무는 제가 패했어요. 무인으로서도, 한 인간으로서도……”
그녀의 갑작스런 말에 모든 이가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놀란 것은 바로 학초명이었다.
“소저……!”
“아무 말 마세요. 저는 비록 무인이지만, 그 전에 사고(思考)를 갖고 있는 사람이에요.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당신처럼 사려 깊은 사람이 힘이 모든 것을 말하는 무림에 뛰어든 것은 분명 피치 못할 사정이 있기 때문일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과 싸우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패배자로 몰린다는 것은 불공평해요…… 당신은 어떨지 몰라도 저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어요.”
송난령은 말을 끝내자마자 학초명은 쳐다보지도 않고 휑 하니 비무대를 내려갔다.
학초명은 송난령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씁쓸한 고소를 지었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그는 승자가 되었고 송난령에게 적지 않은 은혜를 입었다.
은혜를 입은 이상 마땅히 갚아야 할 의무가 생긴 것이다.
송난령이 사라진 곳을 응시하는 그의 두 눈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 * *
화려하기 짝이 없는 방.
한쪽 구석에는 역시 화려한 침상이 놓여 있었는데, 그곳에 나이가 삼십 정도 돼보이는 청년이 아주 비참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었다.
청년은 꽤 심각한 부상을 입었는지 상처를 동여맨 붕대에서 조금씩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고, 한 쪽
팔은 어깻죽지부터 잘려 나가 매우 처참한 모습이었다.
청년은 당요였다.
“철군악이라……!”
지친 모습으로 잠든 당요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뇌까리는 인물이 있었다. 청수한 인상의 초로인이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전체적으로 음산한 느낌을 주는 인물이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옆에 있던 약관의 청년이 공손하게 말을 받았다.
비무대회에서 당요를 수습해 안고 갔던 그 청년이었다.
“예! 아버님. 놈은 단지 무공의 고하를 가리는 비무대회에서 둘째 형님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도 조금도 미안한 기색 없이 뻔뻔스런 얼굴로 오히려 형님을 조소하듯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이 년 전에 대정회(大正會)의 회주(會主)인 철단소를 없앨 때, 같이 다니던 애송이의 이름이 철군악이 아니었던가?”
“맞습니다. 그러나 동명이인(同名異人)인지 동일인(同一人)인지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흐음……!”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중년인이 문득 실소를 흘렸다.
“감히 당문의 사람을 건드리다니…… 허허!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놈이군.”
그는 음산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어찌 됐든 놈에게 본(本) 가(家)를 건드린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알려 줄 필요가 있겠군. 놈이 철단소와 같이 다니던 놈인지 아닌지는 상관없다. 동일인이라면 오히려 잘된 일이지…… 너는 속히 본가에 연락을 취해 오독(五毒)을 이리 불러라.”
“예! 아버님.”
청년이 고개를 숙인 후 밖으로 나가자 중년인은 다시 뭔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의 두 눈이 어두운 방안에서 괴기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야광충(夜光蟲)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