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장 새로 나타난 색광(色狂)
(1)
백영영은 십여 명의 검은 복면들에게 포위당해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치솟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해 울그락불그락했다.
"정말 겁을 상실한 놈들이군. 이곳이 어디라고 감히!"
검은 복면 중의 하나가 말했다.
"우리는 단지 천리무영 한 사람만 필요로 할 뿐 다른 의도는 전혀 없소. 넘겨주시오. 그리 해주신다면 조용히 물러갈 것을 약속드리겠소."
"한 번 없다면 없는 거야!"
백영영은 생각할 가치도 없다는 듯 차갑게 말을 잘랐다.
"그리고 누구 맘대로 조용히 물러가겠다는 거야? 이 신수궁이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갈 수 있는 그런 물렁한 집안으로 보이나?"
검은 복면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거침없이 대꾸했다.
"기어코 피를 보시겠다면 사양할 우리도 아니오만……."
백영영의 입술 사이로 부드득! 이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쥐새끼 같은 놈들! 아무리 무림이 어지럽기로서니 감히 신수궁에 칼을 들이밀 생각을 하다니! 그러고도 네놈들이 살길 바라느냐?"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함과 함께 앞쪽을 막아선 네 명을 향해 짓쳐 들어갔다.
쌍장을 교차시켜 앞으로 쭉 뻗어냈다.
콰콰콰콰!
불길 같은 한 줄기 강기가 가슴 앞으로 밀려들자 검은 복면들도 즉시 쌍장을 앞으로 내뻗었다.
"굳이 권주(勸酒)를 마다하니 벌주(罰酒)라도 드릴 수밖에!"
그들은 바로 장수옥을 꼼짝 못하게 했던 귀원포사.
네 사람의 여덟 개 손바닥과 백영영의 두 손바닥이 맞부딪쳤다.
콰꽝!
"어억!"
백영영은 서너 걸음이나 뒷걸음질을 친 반면 검은 복면인들은 발이 바닥을 뚫고 무릎까지 틀어박혔다.
허나 그것만으로도 대단했다.
놀랍게도 그들이 신수궁의 늙은 호랑이와 대등하게 일장을 교환한 것이다.
귀원포사는 즉시 일렬로 늘어서더니 앞 사람의 등에 장심을 갖다 댔다.
"우웃! 네놈들은 귀원포사! 일양파에서 온 놈들이더냐?"
복면 인영 중의 하나가 음산한 웃음을 흘렸다.
"크크크! 이미 물은 엎질러졌는데 이제 와서 그걸 따져 뭘 하시겠소?"
"서문화 이놈! 새파란 애송이가 무림맹주가 되더니 눈알이 뒤집혀도 단단히 뒤집혔구나!"
백영영은 극도의 분노에 휩싸여 두 발을 번쩍 들어 쾅! 굴렀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일양파의 쓰레기들을 보내다니! 네놈들을 모조리 잡아죽인 뒤 무림맹으로 가서 서문화 그놈의 멱을 따버리고 말겠다!"
등에 꽂은 불진을 뽑아 휘둘렀다.
쉐쉐쉐……엑!
불진에서 폭발하듯 광채가 뿜어져 나오며 폭풍우 속의 해일과 같은 엄청난 기세로 귀원포사를 덮쳤다.
귀원포사, 네 사람은 눈을 부릅떴다.
"방금 전의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위력이다! 모두 전력을!"
그 순간이었다.
"너희들이 막을 수 있는 힘이 아니다! 모두 물러서라!"
꽈르릉!
뽀얀 흙먼지 속에서 한 인영이 재빠르게 귀원포사 앞을 막아섰다.
"우웃!"
백영영은 멈칫했다.
쉐……엑!
떨어져 내리는 뽀얀 흙먼지 속에서 뭔가 빛을 발하며 그녀의 가슴을 향해 날아왔다.
백영영은 순간적으로 공격 방향을 바꿔 그 빛을 향해 불진을 쳐들었다.
챵!
그러나 그것은 튕겨 나가지 않고 불진을 휘휘 감아 버렸다.
어린아이 얼굴 만한 철구(鐵球)에 쇠사슬을 매단 무기, 낭아추였다.
스스스스!
자욱한 흙먼지가 흐려지면서 인영의 모습이 드러났다.
한 그루 곧게 자란 대나무를 연상시키는 삐쩍 마른 노인이었다.
"사정 좀 봐줘가면서 합시다, 누님!"
그는 씨익 웃었다.
"너, 너까지……."
백영영은 입을 쩍 벌렸다.
제천혈랑(制天血狼) 백충산(白沖山).
일양파의 문주이자 백영영의 친동생이었다.
두 남매는 남해 을미도(乙未島)에서 함께 자랐지만 사이는 그다지 원만하지 못했다. 누이와 동생의 성격은 완전히 정반대였고, 수련한 무공 역시 마찬가지였다. 백영영이 신수궁으로 시집을 온 이래 두 사람은 단 한 번도 얼굴을 맞댄 적이 없을 정도였다.
무림맹에서는 간악하게도 이런 사정을 이용해, 백중산을 보낸 것이리라.
"후후후! 오랜만에 만난 동생을 이런 식으로 대접해도 되는 거요? 누님!"
노인이 쇠사슬 잡은 손을 당기자 낭아추로 휘감긴 그녀의 불진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엉겁결에 손에 힘을 빼고 있었던 것이 불찰이었다.
허나 그 정도는 약과였다.
콰쾅!
사방 벽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우르르! 안으로 밀려드는 검은 복면들.
모두 무림맹 소속의 무사들이었다.
저마다 손에 검과 창, 곤(棍) 등을 꼬나 쥐고 안으로 들어오는 놈들의 숫자는 오십 명이 넘는 것 같았다. 그들 외에 밖에 있는 숫자까지 합한다면……
* * *
석비룡이 어둠 속으로 멀리 사라지는 모습을 운가려는 넋을 잃고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런데 이 어둠 속에서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는 또 다른 하나의 눈이 있었으니.
"정말 웃기지도 않는 계집이군!"
볼멘소리를 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칠채월화 벽소운이었다.
"어쩜 저럴 수가 있는 거지? 날 이용해 기껏 석비룡을 잡아오게 하더니 이젠 거꾸로 자기가 풀어 줘? 간단히 말해서 나는 철천지원수로 만들고 자기는 은인이 되어 그의 마음을 사로잡겠다, 이건가?"
생각하면 할수록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는 콧김을 씩씩 내뿜다가 갑자기 머쓱한 표정이 되었다.
"쳇 왜 이렇게 내가 열을 내는 거지? 어차피 내가 상관할 문제도 아닌데……."
그때였다.
콰아아! 쾅!
등 뒤에서 우레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벽소운은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다봤다.
"응? 저곳은 노부인의 거처인 것 같은데……."
안으로 들어가던 벽소운은 백영영의 처참한 몰골에 놀랐다.
이미 한 바탕 격전을 치르고 난 후인 듯 옷은 찢겨질 듯 너덜거렸으며 머리는 봉두난발(蓬頭亂髮)한 듯 헝클어져 있었다.
벽소운은 바로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안을 들여다봤다.
백영영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내가 늙긴 늙었어. 다른 사람도 아닌 네놈 따위에게 이런 수모를 다 겪다니!"
백충산은 실실 웃었다.
"아직도 늦지 않았소. 지금이라도 천리무영만 넘겨주신다면 백배 사죄하고 물러가리다."
몸이 늙으면 분노도 사그러드는 법. 더구나 친혈육이지 않은가. 그 정도는 양보할 수 있었다.
백영영은 고개를 젖히고 껄껄! 웃었다.
갑자기 웃음을 뚝 그치고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백충산을 쏘아보며 말했다.
"천리무영이 이곳에 있는 건 사실이다. 허나 그는 이미 신수궁의 사람!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절대로 넘겨줄 수 없다!"
"천리무영이 신수궁의 사람?"
"그는 내 손녀 가려의 사위가 될 사람, 그를 데려가려면 먼저 내 시체부터 밟아야 할 것이다!"
백충산은 몹시 곤란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 올렸다.
"자자, 이러지 맙시다. 누님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무림맹주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천리무영을 데려가겠다고 큰소리 친 내 체면이 뭐가 되겠소?"
백영영은 흥! 코웃음을 쳤다.
"미친놈! 남해 구석에 처박혀 신선놀음이나 할 일이지 그 나이에 뭘 얻어먹겠다고 서문화의 개가 되었더냐?"
백충산의 볼이 실룩거렸다.
"자꾸 이런 식으로 삐딱하게 나가실 거요?"
백영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천천히 앞으로 내밀었다.
"네놈은 어릴 때부터 버릇이 없었지. 오너라, 백충산! 오늘 네놈의 버르장머리를 단단히 뜯어 고쳐주마!"
백충산은 몸을 옆으로 돌리며 낭아추를 천천히 회전시켰다.
부웅! 붕!
"후회하지 마시오. 이건 누님이 선택하신 길이니!"
백영영은 한쪽 발을 앞으로 내밀며 강맹한 일장을 벼락같이 쳤다.
백충산은 연속으로 세 발짝 물러서며 공세를 피하더니 갑자기
이얍! 벽력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백영영의 목을 향해 광겁통천(曠劫通天)의 초식으로 낭아추의 철구를 날려 보냈다.
백영영은 두 손바닥으로 철구를 가볍게 쳐낸 다음, 몸을 옆으로 돌리며 한 발을 날려 백충산의 허리를 걷어찼다.
쉬익!
쉐쉐쉑!
장내는 그들이 맞부딪치며 일으키는 바람소리와 맹렬한 기세에 터질 것처럼 팽팽한 긴장감을 이루고 있었다.
순식간에 삼십여 합이 지났지만 승부는 쉽게 가려지지 않았다.
철커덩!
백충산은 갑자기 낭아추를 땅바닥에 내던지더니 두 손을 가슴 앞으로 모아 손으로 동그란 원을 만들었다. 동시에 그의 온몸에서 안개가 끼듯 붉은 운무가 자욱하게 뿜어져 나왔다.
백영영의 두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네놈이 궁유마공(弓流魔功)을?"
"애석하게도 누님은 너무 늦게 아셨소이다!"
츄아아아!
동그랗게 말은 원에서 붉은 한 줄기 강기가 백영영을 향해 섬전과 같이 빠른 속도로 날아왔다.
백영영은 전심 내력을 운기하여 신수궁 최고 절기인 뇌정낙영신장(雷霆洛影神掌)을 펼쳐 대응했다.
콰콰콰콰!
두 줄기 강기가 하나의 접점(接點)을 향해 맞부딪쳐갔다. 그 순간이었다. 백색 기류가 두 강기 사이에 끼어든 것은.
거의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다가왔기 때문에 그것을 본 사람은 백영영과 백충산 두 사람 뿐이다.
콰쾅!
세 종류의 강기가 부딪치며 마치 수백 개의 벽력탄이 폭발하듯 엄청난 굉음이 터지고 시꺼먼 연기가 뭉클 피어올랐다.
그 위력이 얼마나 굉장했는지, 천장은 완전히 날아가 커다란 구멍이 펑 뚫렸으며 사방에서 숨을 죽이며 구경하고 있던 검은 복면들은 벽을 뚫고 추풍낙엽처럼 날아가 담장이나 바위에 부딪쳐, 목숨을 잃은 자가 부지기수(不知其數)였다.
백색 기류의 정체는 나무 뒤에 숨어 있던 벽소운이었다.
그녀는 고개와 팔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
"궁유마공과 뇌정낙영신장을 한꺼번에 받았더니 오랜만에 몸이 풀리는 것 같은데……."
백충산은 어이가 없었다.
피곤죽이 되지 않고 사지 멀쩡하게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워 해야 하거늘……
"네년은 누구냐?"
"네년?"
벽소운의 눈썹 끝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그러나 곧 얼굴을 풀고 말했다.
"좋아. 모르고 하는 건 죄가 아니니까. 내 이름은 벽소운이라고 하는데 고명하신 일양파 문주님의 귀에까지 들어갔는지 모르겠네요."
백충산은 흠칫 놀랐다.
"칠채월화 벽소운?"
벽소운은 흐뭇한 듯 빙긋 미소를 지었다.
"좋아요. 남해 촌구석까지 내 이름이 알려졌군요."
백충산은 곧 암암리에 내공을 끌어올리며 말했다.
"네가 누구든 노부의 일에 간섭하면 용서하지 않는다!"
"소운, 물러서라!"
백영영은 방어할 자세도 취하지 않고 있는 벽소운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벽소운은 고맙다는 듯 고개를 끄떡했지만 여전히 아무 대비도 하지 않고 말했다.
"그만두세요. 백문주께선 지금 여기서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실 때가 아녜요. 왜냐하면 백문주께서 찾고 계신 천리무영은 이미 오래 전에 신수궁을 떠났으니까."
백충산은 피식 웃었다.
"그따위 거짓말을 내가 믿을 것 같으냐?"
그때 한 줄기 전음이 백충산의 귓속을 파고 들었다.
'칠채월화의 말은 사실입니다. 천리무영은 조금 전 신수궁를 떠난 게 확인되었습니다.'
"뭐. 뭐라고?"
백충산의 안색이 변했다.
그는 고개를 홱 돌리며 고함을 쳤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의 시선이 멎은 곳에는 검은 복면 하나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일단 귀원포사로 하여금 뒤를 붙였지만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속히 서두르셔야 할 것으로!"
"이런 병신 같은 새끼들! 도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백충산은 화가 나서 견딜 수 없다는 듯 바닥에 떨어뜨렸던 낭아추의 철구를 걷어찼다.
쉐엑!
철구는 쇠사슬을 꼬리처럼 매달고 일직선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퍽!
검은 복면의 머리통이 산산조각 나며 깨진 사금파리처럼 살점과 핏덩이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백영영은 신음소리를 내뱉았다.
"으으…… 잔인한 놈!"
백충산은 사나운 표정으로 백영영을 돌아봤다.
"알아두시오, 누님! 만약 일이 잘못되면 이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누님에게 묻게 될 거요!"
말을 마치자마자 발끝으로 바닥을 탁 차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백영영은 이를 부드득! 갈며 그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다.
"제발 다시 오너라, 백충산! 그땐 틀림없이 네 뼈와 살을 접수해 줄 테니!"
(2)
석비룡은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젠장할, 오늘밤은 천상 노숙(露宿)을 해야겠군. 이게 모두 뇌파극, 그놈 때문이야."
그는 오늘 하루 종일 까마귀를 쫓아다녔다. 보이는 족족 잡아 죽였으니, 아마 근방 오십 리 이내의 까마귀들은 거의 몰살했으리라.
"흠흠, 당분간은 까마귀 씨도 볼 수 없을 테니, 이놈도 좀 잠잠해지겠지."
이것이 오늘의 성과였다.
그는 천천히 걸으며 노숙할 장소를 보고 있는데, 문득 그의 눈에 불빛 한 점이 비쳤다.
멀리 백장(百丈)쯤 될까, 조그만 불빛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이런 산중에 인가(人家)라?"
석비룡은 씨익 웃으며 숨을 들이쉬었다.
무영비행술을 펼쳐 단숨에 불빛이 있는 방향으로 신형을 쏘아갔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불빛의 정체는 모닥불이었다.
모닥불 앞에는 거구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반장은 족히 될 것 같은 무척이나 넓은 등을 가진 사내는 앉은키만으로도 웬만한 사내의 키 정도는 되어 보이는 거인이었다. 무엇보다 특이한 것은 엄청난 머리 크기였다. 커다란 바위 하나가 그대로 목 위에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어흠!"
석비룡은 사내의 등 뒤로 다가가며 헛기침을 해 인기척을 냈지만, 사내는 무엇을 하는지 고개를 푹 숙인 채 돌아보지도 않았다.
"이것 보시오."
손을 내밀어 사내의 등을 툭 쳤다.
그제야 사내는 고개를 돌렸다.
바위처럼 큰 머리에 어울리게 코도, 눈도, 귀도, 입도 모두 보통사람의 그것 두세 개는 합칠 정도로 컸는데, 하관은 구레나룻으로 덮여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산적 두목 같은 얼굴의 사내는 석비룡을 쳐다보며 빙긋이, 순진한 웃음을 흘려냈다.
"지나가던 한객인데 짐이 되지 않는다면 잠시 실례해도 되겠소?"
석비룡은 약간 긴장하며 말했다.
이만한 사내라면 필히 범상한 인물은 아닐 것이라 예견하고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믄요. 길 떠나서 만나는 사람은 모두 식구라고 했는걸요. 앉으세요."
사내의 목소리는 의외로 순박했다. 마치 일평생 촌구석에서만 살아온 농부의 말투처럼……
"잠깐 실례하겠소이다."
천연덕스럽게 말하며 모닥불 앞에 주저앉았다.
사내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손을 놀리고 있었다.
'이 자식이 대체 무슨 재미있는 걸 하길래……?'
사내의 몸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죽 훑어 내려오다가 중간쯤에서 시선이 딱 멈췄다.
거구의 왼손바닥에 놓인 자수판과 오른손에 들린 바늘.
'이, 이건 뭐야?'
이 거구의 사내가 열중하고 있는 것은 태산 같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아낙네들이나 하는 자수 놓기였다. 다만 신기한 것은 바늘이 머리카락처럼 가늘었고, 실 역시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가늘었다는 점이다.
'저런 바늘과 실로 수를 놓으려면 완벽한 힘의 조절 없인 거의 불가능한 일!'
석비룡의 눈은 점점 커졌다.
'더구나 저 친구가 지금 뜨고 있는 무늬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정교한 작업이 필요한 만다라상이 아닌가? 기절초풍할 일이군. 저 코끼리 같은 사내가 저렇게 조그만 수판에 불가(佛家)의 모든 것이 그려진 만다라를 집어넣고 있다니!'
석비룡이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지만 사내는 전혀 시선을 못 느끼는 듯 뜨개질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가만! 예전에 한 번 들은 적이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둔한 무감각과 상상을 초월하는 경이적인 초감각을 동시에 지닌 이 시대 최고의 불가사의(不可思議), 무극탑신(無極塔身) 설고웅(雪高雄)! 그일지도……?'
석비룡은 허리춤에 꿰어놓았던 까마귀를 꺼냈다.
그가 때려잡은 수백 마리 가운데 몇 마리였다.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 솜씨 좋게 가죽을 벗겨나갔다. 그가 피비린내를 풍기면서 여섯 마리의 까마귀 껍질을 벗기는 동안 설고웅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바느질을 하는데 여념이 없을 뿐 다른 것에는 일체 신경도 쓰지 않았다.
석비룡은 나뭇가지에 까마귀 고기를 꽂아 모닥불 위에 올려놓았다.
탁탁!
모닥불에 마른 장작 몇 개를 집어넣자, 까마귀 고기는 기름기를 자르르 흘려내며 지글지글 구워졌다.
잠시 후 노릿노릿한 냄새가 구수하게 풍기는 것이, 냄새만 놓고 보자면 그 어떤 산해진미(山海珍味)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맛이라도 좀 보지 않겠소?"
석비룡이 고기가 꿰어진 나뭇가지 하나를 권했지만 설고웅은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저었다.
"난 바빠요. 이걸 다 완성해야……."
"뭐 싫으면 할 수 없고……."
그는 잘됐다는 듯 그 고기까지 자기 앞으로 당겨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입 안에 넣고 후루룩 훑은 다음 뼈다귀 몇 개를 툭툭 내뱉으면 끝이다.
아쉬운 대로 배를 채운 석비룡은 벌렁 뒤로 누워 팔베게를 하고 눈을 감았다. 하루종일 까마귀를 쫓아다니느라 심신이 피곤했던 것이다.
"으음, 가려!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있지? 아아! 나의 가려."
석비룡의 자는 모습은 한 마디로 가관이었다.
며칠 전 입 속에 다 넣었다, 놓쳐버린 운가려가 나타났는지 허공을 연신 끌어안기도 하고, 흙에다가 입술을 비벼대기도 했다.
무슨 사연이 있는 꿈을 꾸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렇게 한참 꿈 속을 헤매는데 천둥벽력 같은 소리가 그의 잠을 깨웠다.
"끝났다! 드디어 완성했다!"
웬만하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르게 잠에 푹 빠지는 석비룡이지만 골이 지끈지끈하게 질러대는 소리에는 눈을 뜨지 않고 배겨낼 수 없었다.
석비룡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대두아(大頭兒), 임마! 좀 조용히 못해!"
꿈 속에서 운가려의 꿈만 꾸지 않았다면 이렇게 성질을 내지 않았을 것이다.
간만에 설혜의 악몽에서 벗어나 운가려와 운우지락을 즐기는, 한참 달콤한 꿈에 젖어 있었는데……
이 대가리만 큰 자식이 기껏 완성해봐야 그 바느질 다 했다는 거 이외에 무엇이 더 있겠는가?
고작 그런 일로 달콤한 잠을 깨우다니, 화가 나지 않으면 석비룡이 아니다.
설고웅은 눈을 끔벅끔벅하며 물었다.
"대두아라니, 그게 무슨 뜻이죠?"
"뜻은 무슨 뜻? 대가리가 큰 놈이란 말이지."
설고웅은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말했다.
"우린 별로 친하지도 않고 나이도 나보다 많아보이지 않는데 왜 자꾸 나한테 반말을 하는 거죠?"
석비룡은 손을 훼훼 내저었다.
"이런 답답한 자식 같으니라구. 네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세월이 가면서 자동으로 처먹은 나이는 진짜 나이가 아냐.
모름지기 나이란 누가 과연 인생을 짧고 굵게 살았는가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며…… 어려운 말로는 정신적인 연령이라고 하고…… 그게 많으면 누구나 반말을 막 해도 되는 거고…… 어때? 이제 대충 이해가 가나? 대두아!"
설고웅은 화가 난 듯 살짝 얼굴을 붉혔다.
"날 자꾸 대두아, 대두아라고 부르지 말아요."
석비룡은 능글능글 웃으며 계속 시비를 걸었다.
"듣기도 좋고 부르기도 좋은데, 뭘 그래? 대두아!"
설고웅은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석비룡은 움찔했다.
일어서자 가뜩이나 큰 몸이 더욱 커 보이는 것이 석비룡은 그 앞에 대면 난장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대사부가 그랬어요. 내 머리는 덩치에 비해 그다지 큰 편이 아니기 때문에 나보고 머리가 크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혼을 내주라고요."
석비룡은 지지 않고 손가락 마디를 뚝뚝 분지르며 오만하게 말했다.
"그래서? 나하고 한 판 붙어보겠다 이거냐?"
이 자가 정말 무극탑신 설고웅인지 아닌지 알아볼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빠른 방법은 직접 싸워보는 것뿐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싫어요."
설고웅은 몸을 싹 돌려 걸어가는 것이 아닌가?
"어? 그냥 가?"
석비룡은 발을 한 번 굴러 휘익, 사내의 머리 위를 뛰어넘어 앞을 막아섰다.
"대사부가 널 대두아라고 부르는 놈은 혼내주랬다면서 그냥 가면 어떡해? 임마!"
"싫어요."
사내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매우 강해요. 그래서 당신과 싸우면 내가 피곤해져요. 나중에 내가 당신보다 훨씬 강해지면 그때 찾아와요."
이건 완전히 상식 밖이다.
세상에 이렇게 싸움을 피할 수 있다면 그 많은 은원관계가 생길 리 없다.
'이건 영특한 건지, 멍청한 건지 분간이 안 가는군.'
어찌됐든 석비룡으로서는 그를 그냥 놓치지 않겠다고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하지만 어떡하지? 난 널 보내줄 수 없는데 말이야."
설고웅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
"왜요?"
석비룡은 짐짓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크게 화가 난 표정을 지었다.
"대두아! 난 너를 만나기 위해서 무려 이 년 간이나 쇠신발이 닳도록 찾아다녔어. 그런데 천신만고 끝에 겨우 찾은 네놈을 이제와서 그냥 보낸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설고웅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날 왜 찾았는데요?"
"물론 네놈의 도움이 필요해서지."
설고웅은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둘째 사부가 그랬어요.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지 말고 누구도 도와주지 말라고요. 그리고 그것을 강요하는 자는 절대로 용서하지 말라고도 말했어요."
석비룡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놈의 둘째 사부는 사람도 아닌 모양이군. 요즘 세상에 독불장군이 어디 있다고 그 따위로 제자를 가르친 거야?"
설고웅의 얼굴은 아예 울상이 되어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제발 둘째 사부를 욕하지 말아요. 밥을 많이 못 먹게 한 것만 빼면 그 분은 내게 정말 잘해줬어요."
석비룡은 흥! 코웃음을 쳤다.
"내가 보기에 네놈의 사부들은 모두 먹통들이야!"
이번엔 좀 심했던 모양이다.
설고웅은 버럭 화를 냈다.
"사부님들을 욕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석비룡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오호라! 이놈의 약점을 알아냈다. 조금만 더 하면…….'
그는 일부러 큰 목소리로 외쳤다.
"모두 먹통이야. 큰 먹통! 작은 먹통! 사부들이 먹통이니까 너같은 먹통 제자를 키웠지! 내 말이 틀려, 맞어?"
"으으! 날 욕하는 건 참을 수 있어도 사부님들을 욕하는 건 참지 못해!"
설고웅은 커다란 손을 꽉 말아쥐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3)
"혼내 줄 거야!"
설고웅은 고함소리와 함께 무지막지한 기세로 석비룡을 향해 달려들면서 쌍권을 연거푸 퍼부었다.
거센 권풍은 몇 백 근이 넘는 그의 몸무게가 실려 무서운 위력을 지니고 뻗어나갔다.
그의 쌍권은 매우 민첩했고 정신을 흩뜨려놓을 듯 방향을 종잡을 수 없이 이리 저리 난잡하게 휘두르는 것 같았는데, 그러면서도 일권 일권이 예리하게 석비룡의 요혈을 노렸다.
석비룡은 꽃 사이를 노니는 나비같이 설고웅의 주먹을 한 치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피해내면서 속으로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설고웅의 무공은 극히 보기 드물게, 상승의 내공을 포함한 현묘한 수법인 것이다.
쉬지 않고 분주히 몸을 놀리며 입 역시 쉬지 않았다.
"네 사부들도 너 같은 머리 큰놈을 제자로 삼게 한 하늘을 무지하게 원망했을 거다."
콰콰콰쾅!
설고웅의 권풍에 휘말린 아름드리 거목(巨木)들이 수수깡 부서지듯 맥없이 쓰러져갔다.
석비룡은 잡힐 듯, 잡힐 듯 빠져나가며 계속 설고웅의 부아를 돋웠다.
"하기야 따지고 보면 하늘을 원망할 일도 아니지. 사부가 골통들이니 제자도 골통을 얻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이치지. 안 그래?"
설고웅의 눈에는 악독한 살기가 가득 찼다.
"개자식! 절대 용서 못해!"
설고웅은 품속에서 바느질 쌈지를 꺼냈다.
석비룡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 너 이런 상황에서도 바느질을 하려고……?"
설고웅은 쌈지를 뒤집어 솥뚜껑 같은 손바닥 위에 바늘을 쏟았다. 그리고 손바닥을 훽 뒤집었다.
"무성화우(無聲花雨)!"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란 수십 개의 바늘이 파공음조차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그러나 무서운 속도로 일시에 석비룡에게 날아왔다.
"맙소사! 이, 이것은 도대체가……!"
기이하게도 바늘은 그가 피할 수 있는 모든 방향을 차단했다.
석비룡은 꼼짝 없이 고슴도치처럼 변해 죽게 될 판이었다.
"무영비행술!"
순간, 석비룡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어?"
설고웅의 두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석비룡의 모습이 갑자기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닌가?
콰쾅!
표적을 잃은 바늘은 석비룡의 등 뒤에 있던 집채만 한 바위를 그대로 박살내 버렸다.
누가 믿을 것인가?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란 바늘이 쇠처럼 단단한 바위를 두부처럼 부서뜨리는 광경을!
석비룡의 목소리는 그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이 망할 놈의 대두아! 그런 걸 던지면, 던진다고 말을 해야지. 하마터면 염라대왕 앞으로 끌려갈 뻔했잖아."
설고웅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스스슥!
그제야 나타나는 석비룡의 신형.
설고웅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갑자기 바늘쌈지를 품속에 집어넣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할 판인데 왜 집어넣고 난리야?"
설고웅은 고개를 저었다.
"셋째 사부님이 그랬어요. 이 세상을 통틀어 무성화우를 피할 수 있는 건 전설의 무영비록에 나오는 무영비형술뿐이라고……."
"셋째 사부라니? 도대체 네놈의 사부는 몇 명이나 되길래?"
설고웅은 자신이 할 말만 했다.
"셋째 사부는 말했어요. 무영비행술을 익힌 사람은 나의 유일한 상극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을 만나면 둘 중의 한 가지 방법을 택해야 한다고요."
"그 중 하나는 삼십육계 줄행랑이겠지?"
설고웅은 머리를 흔들었다.
"아녜요. 무슨 수를 쓰던 그 사람을 죽이거나, 죽일 수 없으면 무조건 형제로 만들라고 했어요."
"이제 보니 네 셋째 사부는 무척 현명하신 분이구나!"
석비룡은 껄껄 호탕하게 웃으며 설고웅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가 잡기는 했지만 손 크기의 차이가 워낙 커, 마치 커다란 보자기에 손을 집어넣은 꼴이었다.
"좋아, 이제부터 우린 형제다. 내 말에 이의 없지?"
"그럼 누가 형이고 누가 아우가 되는 거죠?"
석비룡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대답했다.
"그거야 뻔하지. 지금 누가 반말을 하고 누가 존댓말을 하는 것쯤은 대번에 알 수 있겠지?"
"그, 그야…… 당신이 반말을 하고…… 내가 존댓말을……."
석비룡은 두 손을 짝 마주치며 방긋 웃었다.
"바로 그거야. 그러니까 더 이상 이 문제에 관한 한 언급을 삼가도록!"
설고웅은 한 순간 어리벙벙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체념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아요, 그 대신 저도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어떤?"
설고웅은 사뭇 비장한 표정이었다. 고개를 들어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제 둘째 사부님은 저 보고 자나 깨나 매일 수를 놓으라고 시켰어요. 그리고 난 한 번도 둘째 사부님의 명령을 어긴 적이 없어요."
석비룡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사부가 그로 하여금 바느질을 시킨 것은 설고웅만이 갖고 있는 경이적인 초감각을 살리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좋든 싫든 웃사람의 말에 순종하는 건 좋은 버릇이지. 그래서?"
"난 수판 하나를 완성하는데 대략 반 년이 걸렸고 매번 완성할 때마다 둘째 사부님은 언제나 나의 한 가지 부탁을 들어주셨어요."
설고웅의 큰 눈에서 눈물이 가득 고였다.
"하지만 이젠 아무도 나의 부탁을 들어 줄 사람이 없어요. 왜냐하면 둘째 사부님이 돌아가셨거든요."
석비룡은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걱정할 것 없어. 내가 둘째 사부 대신 네 부탁을 들어주면 되는 거냐?"
설고웅은 잽싸게 옷소매로 눈물을 훔치고는 석비룡을 쳐다봤다.
"내가 수판을 하나 완성할 때마다 그럴 수 있어요?"
석비룡은 껄껄 웃었다.
"뭐, 그 정도야…… 아무렴 형제지의까지 맺은 마당에 내가 무슨 소원인들 못 들어주겠냐!"
그는 큰 소리로 호언장담(豪言壯談)을 했지만……
* * *
아침 해가 떠오르자마자 두 사람은 홍등(紅燈)이 걸린 기루를 찾아 들어갔다.
방문을 열자 향긋한 지분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방 안에는 커다란 침대와 꽃을 수놓은 이불과 베개가 놓여 있었다. 설고웅은 익숙한 동작으로 침상 위에 턱 걸터앉았다.
그는 입이 귀 밑까지 찢어져라 웃으며 말했다.
"형님도 재미 좀 보실 거예요?"
석비룡이 그의 부탁을 들어준다고 약속한 후, 설고웅은 계속 헤픈 웃음을 흘려대고 있었다.
석비룡은 고개를 저었다.
"난 싫다. 너나 실컷 재미 보거라."
명색이 색광서생인 그가 욕구를 풀 곳이 없어 기루에서 재미를 봤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그 무슨 창피란 말인가?
잠시 후 등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며 곱게 단장한 여인 하나가 고개를 숙이고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녀의 의복은 몸에 착 달라붙어 신체의 굴곡이 완연히 드러나고 있었다.
"소녀 소홍(小紅)이라 합니다."
살짝 미소를 지으며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데 그 모습이 매우 음탕해 보였다.
설고웅은 엉덩이를 들썩들썩 거리며 여인의 얼굴과 석비룡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빨리 나가달라는 뜻이다.
석비룡은 으흠, 헛기침을 하고 쿵! 문을 닫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정원에 앉아 조용히 차 한 잔을 시켜 마시고 있었다.
'뭐, 대략 한 시진쯤이면 끝나겠지.'
결론만 얘기하자면 그의 이런 생각은 엄청난 오산(誤算)이었다.
소홍은 깜짝 놀랐다.
'세상에!'
그녀가 맞은 손님의 숫자가 일만은 못 되어도 일천은 채우고도 남는데 이처럼 큰 덩치의 사내를 본 적이 없었다.
흐흐흐!
설고웅은 침을 뚝뚝 흘리며 다가왔고, 소홍은 마른침을 삼키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과, 과연 이 남자와 일을 치른 후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소홍은 그의 손길을 피할 수 없었다.
설고웅은 그녀의 몸을 마치 공기 주머니를 들어 올리는 것처럼 덥석 들어 침상 위에 내려놓았다.
마치 그녀는 커다란 독수리에 잡힌 참새와 같았다.
파드득, 파드득
저항도 해보았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설고웅이 바지를 쑥 내리는 순간, 소홍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저, 저것은 인간의 것이 아니야. 마, 마구간에서나 볼 수 있는…….'
거대한 몸이 산사태처럼 소홍의 작은 몸 위를 덮쳤다.
소홍은 눈을 질끈 감으며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아우성을 치는 것은 소홍만이 아니다. 침대 역시 부서질 듯 삐걱거렸다.
그녀는 애처롭게 몸을 떨며 행위를 중지해 줄 것을 바라고 있었지만, 설고웅으로서도 그것만큼은 들어줄 수 없었다.
장장 육 개월 동안 오직 이 날만을 기대하며 뜨개질을 해왔지 않은가.
설고웅은 기대 어린 미소를 머금으며 허리를 힘껏 위로 퉁겨 올렸다.
"꺄아악!”
소홍은 배 째진 잉어처럼 퍼득거리며 조금이라도 물러서려고 애를 썼지만 설고웅은 집요하게 그녀의 몸을 공격해왔다.
"아흑! 너, 너무 커!"
소홍의 얼굴은 참담한 고통에 일그러졌다.
설고웅은 힘이 넘쳤다.
거의 매일 같이 숱한 남자들과 운우지락(雲雨之樂)으로 세월을 보낸 소홍이었지만 이처럼 열정적이다 못해 색(色)에 미친 남자는 본 적이 없었다.
"더는…… 못 견뎌…… 제, 제발!"
설고웅이 네 번째 덮쳐올 때, 소홍은 그만 좀 하라며 무릎을 꿇고 싹싹 빌기까지 했다.
그리고 다섯 번째, 소홍은 기절해 버렸다.
소홍이 업혀 나가고 금월(金月)이 안으로 들어왔다. 나름대로 체력에는 자신 있는 그녀였지만 열 번을 다 채우지 못하고 엉금엉금 기어 밖으로 빠져나와야 했다.
"사, 사람도 아니야!"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녹향(綠香), 은옥(銀玉) 등등……
기루에 있는 젊은 기녀들은 다 동원했고, 나중에는 현역에서 은퇴하고 주방으로 물러난 퇴기(退妓) 춘몽(春夢)이까지 불러들였다.
석비룡은 기루 주인에게 붙잡혀 시달리고 있었다.
한 시진이면 될 줄 알았던 것이 사흘이 지났다.
"저놈은 인간이 아녜요! 완전히 인간을 탈을 쓴 짐승이라구요!"
"어떻게 인간이 무려 사흘 동안이나 쉬지도, 먹지도 않고 오직 그 짓만 할 수 있겠어요? 안 그래요?"
"우리집 애들이 총동원된 것까진 좋아요. 하지만 들어가는 애들마다 모조리 망가뜨려버리면 전 뭘 가지고 장사하란 말예요? 난 망했어요! 완전히 망했다구요!"
이런 하소연을 들으면서도 한 마디 위로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위로를 받고 싶었다.
그녀의 입을 막기 위해 족히 기루 서너 채는 살 수 있는 은자를 쥐어주어야 했으니까.
'휴우! 앞으로 색광서생이라는 명호는 필히 저놈에게 물려주어야 하겠군.'
"아악! 악!"
여인들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땅이 꺼져라 푹푹 한숨만 내쉬었을 뿐이다.
<1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