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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예수님의 사람들 칼럼(710호)
속죄제의 피로 일 년에 한 번씩
(출 30:10-16)
"아론이 일 년에 한 번씩 이 향단 뿔을 위하여 속죄하되 속죄제의 피로 일 년에 한 번씩 대대로 속죄할지니라 이 제단은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하니라"(출 30:10).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1).
"너희는 영원히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 일곱째 달 곧 그 달 십일에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되 본토인이든지 너희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이든지 그리하라 이 날에 너희를 위하여 속죄하여 너희를 정결하게 하리니 너희의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레 16:29-30)
사순절 첫째주일을 맞이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에 대해 그 의미를 알고 은혜를 받자.
성경은 피를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선물인 생명을 상징하는 거룩한 액체로 취급하고 있다. 그 사상이 레위기 17:11의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에 가장 잘 표현되고 있다. 성경은 피를 마시거나 음식으로 사용하는 것을 금하였다(신 12:23).구약에서의 '피'는 히브리어로 '담'(dam)인데 360회나 쓰여졌다. 가장 일반적으로 피는 사람과 동물의 피를 말한다(창 9:6). 때로 피는 은유와 직유로 사용되어 '포도즙'(창 49:11)을 나타내는 데 쓰여졌고, '물이 붉어 피와 같음'(왕하 3:22)을 묘사하는 데 쓰여졌다.
'그러므로 핏소리가 하나님께 호소한다'(창 4:10)은 하나님께서 무죄한 자의 피흘림을 친히 아시고 그것을 절대 간과치 아니하신다는 뜻이다(시 37:12-15). 인간 생명은 하나님께서 수여하신 것으로 그분만이 홀로 좌우할 수 있다(창 9:5, 6). '그의 피를 그의 머리로 돌리라'라는 저주 공식구에서 볼 수 있듯이 살인죄를 의미하기도 했다(수 2:19, 겔 33:4). 따라서 인간이 타인의 생명을 해(害)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중요한 도전 행위이니 비록 인간측의 호소가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선 응당 이일에 대해 신원(神寃)하실 것이다(살전 4:6).
피는 제사의식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레위기 1- 7장은 희생 제사에 관해 기록했는데 번제(레 1:5 이하)와 화목제(레 3:2) 및 속건제(레 7:2) 등에서 피가 제단의 사면에 뿌려졌다. 속죄제를 드릴 때는 제사장이 수송아지의 피를 손가락에 찍어 성소 장(帳) 앞에서 일곱 번 뿌린 다음, 제단 뿔에 바르도록 했고, 수송아지의 나머지 피는 제단 밑에 전부 쏟도록 되어 있었다(레 4:5-7).
레위기 14장에 기록된 문둥병의 정결 예식에도 속건제 희생의 피가 사용되었고 제단도 피를 통해 성결케 했다(레 8:15). 또한 출애굽 사건(출 12:13)과 시내 산에서의 언약(출 24:5-8)도 피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 피로...바르고'(출 12:7) '피'는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희생 제사의 요체가 된다(레 17: 11). 따라서 이 의식은 이스라엘 집의 모든 생명이 대속의 은총으로 구원 받았음과 또한 그 생명이 하나님께 바쳐졌음을 상징하는 성별 의식이었다. 한편 죽음의 천사로 부터 피해를 막는 확실한 증표인 유월절 어린 양의 '피'는 곧 인류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보호하시고 생명을 얻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예표한다. 실로 '피흘림이 없이는 용서함도 없다'(히 9 : 22)는 것이 속죄의 대원칙이다. 한편 어린양의 피를 문에 바르는 이 의식은 첫번째 유월절에만 실시되었으며, 두번째 유월절부터는 양 잡는 일과 피 뿌리는 일이 성소와 성소의 제단에서 시행되었다. 그리고 어린 양의 피는 우슬초 다발에 적셔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려야 했다.
신약에서의 피는 헬라어 '하이마'(haima)로 신약성경에서 97회 사용되었다. 히브리서 21회, 요한계시록 19회가 사용되었다. '하이마'는 신약성경에서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첫째, '하이마'는 사람의 피를 나타내는 경우가 있는데, 단순히 문자적 의미 그대로 사용되기도 하고(막 5:25, 눅 13:1, 요 19:34 등), '흘린 피'라고 하는 비유적 의미로 쓰일 때도 있다(마 23:35). 또 사람의 피로써 '하이마'는 생명의 유지(요 1:13, 행 17:26)나 사람의 생명이 파괴되는 것을 비유적으로 나타낼 수 있다(롬 3:15, 히 12:4, 마 27:4, 24). 하나님의 입장에서 피는 사람의 존재 전체를 의미할 수 있는데, 이로써 모든 사람은 그 피에 대해 하나님께 탄원할 수 있고 반대로 그의 동료 인간들은 그 피에 대해 죄를 지을 수 있는 것이다(행 18:6, 행 20:26).
둘째, '하이마'는 간혹 '살'과 합쳐져서 '살과 피'라는 형태로 사용되기도 한다(6회). 이 표현은 피가 사람의 육신의 필수적인 부분이라는 점에서 사용되며, 사람이 죄와 사망의 종임을 뜻하고 있다. 또 이 표현은 사람의 약함과 덧없음을 부각시키기 위해 사용되기도 한다. 즉 사람은 살과 피를 가진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히 2:14 이하), 그 '살과 피'는 곧 타락의 상태를 보여 주는 징표이다. 따라서 살과 피로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없고(고전 15:50) 오직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마 16:17)에 의해서 가능하다.
셋째, '하이마'는 일반적인 동물의 피(행 15:20, 레 17장 참고)를 가리키기도 하고, 희생 제사에 사용된 동물의 피(히 9:7, 12 이하, 18-22, 25, 히 10:4, 히 11:28, 히 13:11)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런데 이 가운데 두 번째의 것은 그리스도의 피와 연결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피'(벧전 1:2), '예수의 피'(히 10:19, 요일 1:7), '그리스도의 피'(고전 10:16; 엡 2:13, 히 9:14), '주의 피'(고전 11:27), '어린양의 피'(계 7:14, 계 12:11) 등에 사용되었다. - 출처: 한국컴퓨터선교회-KCM사전>
1. 그리스도 구속 사역의 예표
1) 유월절 어린양(출 12:5; 요 1:29)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출 12:5).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2) 속죄제로 인한 생명의 속함(출 30:10,15,16)
"아론이 일 년에 한 번씩 이 향단 뿔을 위하여 속죄하되 속죄제의 피로 일 년에 한 번씩 대대로 속죄할지니라 이 제단은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하니라"(출 30:10)
3) 속죄일(레 16:30)
"너희는 영원히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 일곱째 달 곧 그 달 십일에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되 본토인이든지 너희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이든지 그리하라 이 날에 너희를 위하여 속죄하여 너희를 정결하게 하리니 너희의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레 16:29-30)
2. 구속의 목적
1) 우리를 속량하시기 위함(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2) 믿는 자를 의롭게 하시기 위함(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3)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케 하기 위함(엡 1:14)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4).
4) 우리를 주의 처소에 들어가게 하기 위함(출 15:13)
"주의 인자하심으로 주께서 구속하신 백성을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출 15:13).
결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았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설교 역사의 거성들의 남긴 공통점 - 정장복 총장
설교자로서의 특성
1. 그들은 모두 ‘긴박한 의식(sense of urgency)의 소유자들이다.
오래 참음을 삶의 기틀로 삼고 살아가는 설교자들이 예외적으로 화급하게 서두르는 문제가 하나 있다. 이것이 바로 설교에의 소명이다. 반드시 전해야만 하고, 더구나 시급히 선포해야 한다는 소명적 의식은 설교자에게 죽음의 위협보다도 더한 긴박한 의식을 심어 준다. 리차드 박스터는 죽음이 임박한 줄 알면서도 임종 사흘 전까지 말씀을 선포한 마틴 루터를 가리켜 말하기를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죽어가고 있는 사람으로서 선포한다”라고 말했다. 눈앞에 다가와 있는 죽음의 그림자 보다 더 촉박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구원의 말씀을 듣게 하는 일일 뿐이다.
그러므로 아담 클라크 같은 선포자도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다”면서 비장한 각오로 영국 땅을 샅샅이 누비는 일을 기쁘게 감당했다. 스탠리 존스가 소명의 응답으로 긴박하게 찾아간 인도 땅에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문화적 장식 속에서가 아니라 참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도록 피땀 흘려 설교를 행한 것도 이 의식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2. 진리를 전달하고자 하는 타고난 열정이 있다.
어려서부터 진리를 대하는 열정적 태도가 몸에 배어 있는 것이 바로 설교자의 특징이다. “진리를 어찌 외면할 수 있으며, 어찌 나 혼자의 것으로만 놓아둘 것인가?”하는 심정이 스스로를 말씀의 종으로 채찍질해 가도록 만든다.
일찍이 찰스 하든 스펄전은 열정적으로 평신도 설교자 운동에 가담하여 17세에 농촌교회의 설교자가 되었고, 20세 때는 런던의 뉴파크 스트리트 교회의 강단을 지키는 복음주의 설교자가 되었다. 조지 캠벨 모간은 불과 13세에 공식적 설교를 하기까지 누나와 인형들을 회중 삼아 연습하는 정열을 보여 주었고, 19세에 웨슬리안 학교의 교사 겸 설교자가 되었다. 그가 한때 여러 철학 사상을 순례하며 어두운 밤 같은 회의 시간을 보냈으나, 어릴 적의 열정이 그를 다시 설교자로 회복시켰고 결국 어두운 터널을 벗어나게 해 주었다.
3. 외로운 사명의 길을 걸어간 이들이다.
말씀의 선포나 그에 수반하는 행위가 정치적, 목회적, 그리고 가정적 위기를 초래하거나 반대를 받을 경우에도 외로운 개인주의의 길을 후회 없이 걸어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국가와 민족과 권력자들에게 개혁을 외쳐 말씀의 성취를 알리는 하나님의 나팔이 되겠다”면서 원치 않던 무력 항쟁을 국가 차원에서 시인하고 앞장섰던 존 낙스의 히브리 예언자적 격노라든지, 미국 의회의 목사로서 사회적 관심을 복음적 선포할 때 그를 비난하는 회중을 극복해 낸 피터 마샬의 용기가 귀중한 사례로 기억될 수 있다.
그리고 전혀 예기치 않은 날벼락처럼 아내가 세상을 떠난 날, 그 슬픔을 붙든 채 “인생의 죽음, 그 후는 어찌 될 것인가?”하는 불후의 대표적 설교를 써냈던 아더 존 고십의 불가피한 개인주의도 잊을 수 없다.
4. 계속적인 독서와 연구에 몸 바친 사람들이다.
한 편의 설교를 이루어 내기 위하여 몇 권의 책을 읽고 있는가? 지속적인 말씀의 준비를 위하여 조직적인 교육을 받고 있는가? 설교자는 이러한 물음에 대하여 인색함 없는 대답을 항상 예비하고 있어야 한다. 여기서의 독서는 오직 성경의 주석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폭넓은 분야의 관심이 뒤따라야 한다.
존 앨버트 브로더스는 의학, 정치학, 법학, 그리고 신학의 각 방면에 걸친 독서를 쉬지 않았으며, 그가 목회만을 위해 버지니아 대학의 교수직을 버린 후에도 늘 책 읽기에 골몰하였다. 설교자들은 매일 연구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존 웨슬리가 체계적인 교육을 행할 것을 주장한 끝에 킹스우드 학교를 세운 것은 유명한 일이다
5. 한결같이 불타는 전도의 역군이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회심하는 사람들이 그 곁에서 끊이지 않는 것을 보아야만 하는 사람들이 이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전에 노예 상인으로 악명이 높았던 존 뉴턴(J. Newton)은 자신이 회심한 후 올르니 지역의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로부터 시작한 전도를 늙어 눈이 멀고 귀가 막힐 때까지 그치지 않았다. 드와이트 무디(D. L. Moody)도 마찬가지이다. 주일학교 아동에서부터 남북전쟁의 자리에서 원한과 복수의 칼을 갈고 있는 사람들을 거쳐 영국 땅의 순회 전도에 이르도록 불타는 전도의 역군으로서 한평생을 살았다.
6. 자신의 약함을 성령의 도움을 받아 변화시켰다.
인간이기 때문에 그들도 취약한 부분과 결점이 없지 않다. 그렇지만 성령님의 도우심에 힘입어 이것들을 능히 극복해 내는 삶의 승리가 설교자들에게 반드시 나타난다. 루터는 개혁을 주도한 인물답게 거칠고 충동적인 성격의 소유자였고, 존 칼빈은 신경질적이며 소심하고 병약하기까지 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성령님의 도움을 간구하며 자신을 변화시켰다.
존 칼빈보다 더 병약했던 백스터는 언제든지 죽을 수 있는 몸이라고 진단받은 상태를 무한한 은혜라 일컬으며 이를 극복해 나아갔다. 비천한 신분이 문제인가? 감옥에 갇히는 시련이 문제인가? 존 번연(J. Bunyan)을 보라. 땜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땜장이의 직업을 가졌고, 허가 없는 설교를 행했다는 이유로 모진 옥고를 치르면서도 ‘천로역정’이라는 수작을 세상에 내놓았다.
가난이 문제인가? 교육을 받지 못한 약점이 문제인가? 무디를 보라. 그는 문법과 발음마저도 정확하지 못했던 한 구둣방의 점원에서 그 유명한 시카고 무디 성경학교 설립의 대역사를 이루어냈다.
7. 자연 속에 묻혀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했다.
설교자는 항상 자연 속에 묻히기를 좋아하며, 거기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한다. 자연에는 하나님의 숨결이 어려 드넓게 퍼져 있고 설교자는 심령을 열어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대면하려 할 때 에드워즈는 어김없이 노드앰턴 숲길로 나갔으며 무디는 미시간 호수를 찾아 그 호반에 앉았다.
웨슬리는 이렇게 외쳤다. “우주적인 하나님은 우주적인 공간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만 노래합니다. ‘찬양하라! 아버지께. 그의 창조의 음성에 헤아릴 수 없는 세계가 창조되었도다. 여호와여! 모든 만물을 아시는 주여. 아무도 주를 온전히 알지 못하나이다.”
8. 죽음과 같은 위기의 순간에 신앙이 성숙됐다.
설교자에게 죽음과 같은 위기의 순간들이 찾아올 때, 그 체험을 성장의 방편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뉴욕 허드슨 강변의 리버사이드 교회와 함께 유능한 설교자로 기억되는 해리 에머슨 포스딕(H. E. Fosdick)은 뜻하지 않은 신경질환으로 고통의 늪을 헤맨 경험이 있다. 한때 자살을 시도하리만큼 심각해진 그의 질병은 그 자신을 위태로운 경지까지 몰고 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포스딕은 다음과 같은 신앙의 경험을 고백하면서 위기를 극복한다.
“이 무서운 경험이 나의 목회를 준비하게 된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나는 내 의지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케 되었다.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했었던 나는 이제 완전히 패배했음을 깨닫고, 내 자신이나 내 외적 환경을 결코 수습할 수 없음도 깨닫게 되었다. 여기에서 나는 신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았던 것을 비로소 배웠다. 특히 나는 기도를 배웠다. 논리적인 기도보다는 큰 힘을 소유하신 분에게 필사적으로 구하는 그것을. 곧 하나님께서는 신학적인 어떤 위치보다 더 위대하시다는 것과 기도란 우리의 몸을 움직이는 에너지처럼 삶을 주장하는 영적인 힘이라는 것을 확실히 배우게 되었다.”
9. 고도의 민감성을 지녀, 회중의 아픔을 이해했다.
선포의 대상과 함께 깊이 공감하면서 그들이 아파할 때 함께 아파했다. 또한 그들보다 더욱 심각하게 깨달아서 그들이 미처 느끼지 못하는 것을 앞서 느끼는 고도의 민감성을 설교자들은 가지고 있다.
제임스 스튜어트(J. Stewart)는 인간의 고통에 대한 민감성을 소유하고 늘 설교를 통해 이를 표현하려 했다. 그러므로 그의 회중은 바로 이 설교자야말로 자신의 문제를 가장 잘 알고 이해해 줄 것으로 믿었다. 이 민감성은 또 설교자가 지닌 꿈으로 전달되기도 한다. 설교의 형식을 빌어 위대한 자유의 선언을 해낸 마틴 루터 킹(M. L. King)은 흑인 인권 회복 운동을 주도하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폭력이라는 민감한 문제의 표출을 ‘나에게는 한 꿈이 있습니다’란 감동적인 외침으로 이루어 냈다.
- 정장복 총장(한일장신대학교) - 2월 14일, 정장복 목사님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매주 11,000여 명의 회원님들에게 한 번씩 보내는 칼럼입니다.
서울 강서교회 김창환 목사(문지기) 드림
양천구 신정로 11길 63 강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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