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 인테체인지’에 대한 小考
오산인터체인지가 생기게 된 것은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면서 생기게 된 명칭이다.
경부고속도로는 1968년 2월 1일 착공하여 1970년 7월 7일 완공하였다. 제일 처음 생긴 경인고속도로에 이어 우리나라 두 번째 고속도로다.
1970년 개통 당시 서울-부산 간 총길이 428km이었으며, 현재 49개의 인터체인지가 건설되었고, 휴게소는 서울 부산방향으로 각각 17개소 씩 운영되고 있다.
당시 고속도로를 건설하는데 연인원은 약 900만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총건설비는 약 429억원 소요되어 ㎞당 건설비가 1억 원 정도였다고 한다.
고속도로를 건설하면서 공사 도중 사고로 사망한 인원이 77명이라고 한다. 이들을 위한 위령탑이 옥천부근에 설치되었다. 이는 난 공사였던 옥천터널 작업과정에서 가장 희생이 많았음으로 이곳에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경부고속도로는 우리나라 역사상 단군 이래 가장 큰 토목공사였다고 하는 만큼 당시 근대화의 상징이자 경제개발의 꿈을 실현시킬 발판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선거공약으로 내건 의지로 이뤄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준공식에서 “가장 싼 값으로 가장 빨리 이룩한 대 예술작품”이라고 했다한다.
경부고속도로 개통으로 인해 우리나라는 일일 생활권으로 접어들었으며, 교통을 통한 물류혁명을 이루고, 농업생산에 기반을 둔 경제체계에서 중화학공업으로의 전환이 이뤄졌으며, 이를 기반으로 해외수출을 늘려 경제적 부흥을 이루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반면 이로 인해 빨리 빨리 문화가 국민 의식 속에 깊게 자리 잡아 어디서든 조급증으로 인한 부작용도 많이 나타났다. 예를 들면 삼풍백화점 붕괴와 성수대교 붕괴 사고는 그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이렇듯 경부고속도의 개통으로 우리 사회 전반에 미친 영향은 실로 크다고 할 수 있다.
내 고향은 용인시 남사면 원암리인데 우리 마을은 오산으로 5일장을 다니는 곳이다. 지역은 용인 이지만 안성과 평택에 인접한 곳으로 용인장과 평택, 안성장도 있지만 오래 전부터 오산장을 보는 생활권이었던 것 같다.
내 어린 시절 경부고속도로와 관련된 추억은 그리 많지 않지만 뚜렷이 남는 기억이 있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이전 확실한 연도는 잘 생각나지 않지만 아마 1968년이나 1969년쯤일 것 같다.
고속도로 공사가 한 참 진행되고 있을 때다. 장날이면 오산읍내에서 시골 원암리 까지 하루에 몇 번 다니는 승합버스를 이용해 장을 보러 나간다. 오일장날의 승합버스는 늘 만원이었고 그나마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를 놓치고 나면 삼십 리 신작로 길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아마 그 때도 많은 사람들이 오산장을 보러 갔다가 승합버스를 놓친 것 같다.
오산읍내에서 삼십 리 남사면 원암리 까지 가려면 지금의 원동 밀머리를 지나 나지막한 언덕을 넘어 청호리 길에 접어들어 LG전자가 자리 잡은 지나지 고개에 다다른다. 이곳에서부터 경부고속도로 공사구간이 나오는데 현재 고속도로 위치와 똑 같다.
한 여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낮에 저마다 장을 본 짐 꾸러미를 한보다리씩 어깨에 걸치고, 어떤 이는 머리에 이고 땀을 뻘뻘 흘리며 마치 피난민 행렬처럼 줄을 이어 신작로를 따라 걸어가야 했다.
조금이라고 집에 가는 길을 단축해 볼 요량으로 버스를 놓친 귀가 행렬은 구불구불 이어진 비포장도로 옆 일직선으로 곧게 공사를 하고 있는 고속도로 위로 올라섰다.
한 낮 태양이 머리위에서 이글거리는 지열에 먼지가 풀풀 올라오는 고속도로 공사 구간을 지나 집으로 돌아 온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리고 얼마 후 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그리고도 얼마나 시간이 지났나! 오산인터체인지를 통해 그 길을 따라 처음으로 경주로 수학여행을 간 것 같다.
그래 오늘은 고속도로가 있으면 필수적으로 함께 이어지는 인터체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함이다.
들고 나는 길 우리말은 ‘나들목’ 보통은 ‘인터체인지’라고 불리어진다.
여행을 시작하거나 어느 목적지를 향해 떠날 때 나들목을 통해 여행길을 시작한다. 그리고 여행을 마무리하고 돌아오는 길도 이 나들목을 통해 돌아 온다. 나들목은 시작과 마무리다.
우리네 인생살이도 이와 같을 것이다. 엄마 뱃속에서 시작하여 인생을 마무리하는 무덤까지의 과정에 나들목이 있기 마련다.
그러고 보면 ‘나들목’은 시공간을 모두 함께 포함하는 언어인 것 같다.
경부고속도로에는 오산인터체인지가 있다.
아마 경부고속도로 전 구간을 통해 인테체인지가 놓인 곳과 도시가 가장 인접한 곳이 오산인터체인지일 것이다. 이제는 급격한 도시의 팽창으로 인터체인지와 근접한 도시가 더 생겨났지만 적어도 처음 경부고속도로가 생길 무렵에는 그랬다.
그 오산 인터체인지를 통해 숱한 사연을 담고 드나들었을 수많은 이야기들이 시가 되었고 소설이 되었고 문학이 되었고 노래가 되었고 이제는 역사로 남기게 되었다.
아마 ‘오산인터체인지’란 언어로 처음 시를 쓴 시인이 조병화 시인이 아닌가 싶다.
그의 고향은 경기도 안성 이동면 어비리 저수지가 보이는 난실리 마을이다.
그러니까 오산인터체인지에서 보면 사십 리 길이다.
조병화 시인의 ‘오산인터체인지’ 전문을 소개한다.
오산(烏山) 인터체인지
-고향에로 가는 길-
자, 그럼
하는 손을, 짙은 안개가 잡는다.
넌 남으로 천리
난 동으로 사십 리
산을 넘는
저수지 마을
식지 않는 시간, 삭은 산천을 돈다.
등은, 덴마크의 여인처럼
푸른 눈 긴 다리
안개 속에 초조히
떨어져 있고
허허 들판
작별을 하면
말도 무용해진다.
어느새 이곳
자, 그럼
넌 남으로 천 리
난 동으로 사십 리.
* 1970년경에 들어서부터 우리나라엔 고속도로가 뚫리기 시작했습니다. 경인고속도로, 경부고속도로 계속해서 고속도로가 개통하기 시작했습니다. 1967년이었던가, 미국 뉴욕 P,E,N. 대회에 참석했을 때 나는 미국대륙을 고속버스로 동부로 북부로 남부로 서부로 한 50일간을 여행한 일이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는 비행기로, 샌프란시스코에서부터는 그레이하운드, 아니면 콘티넨탈 고속버스를 타고 우선 뉴욕대회장까지 가고 P,E,N.대회가 끝나고선 자유스럽게 실로 여행다운 여행을 지상으로 했습니다. 그 여행에서 얻은 시와 그림은 제15집[가을은 남은 거에](1966.12.10.) 실려 있습니다만, 나는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해서 아주 짧은 시간에 내 고향 난실리를 왕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오산까지, 오산에서는 동으로 40리 길을 들어가면 내 고향 난실리에 도달합니다.
고향, 나는 고향을 두 가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자연의 고향, 또 하나는 영혼의 고향, 인간은 누구나 이 두 가지 고향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겁니다. 죽어서 흙으로 가는 흙의 고향(자연), 죽어서 영혼이 찾아가는 영혼의 고향, 이 두 가지 고향 속에서 자연의 고향보다는 죽어서 찾아가는 영혼의 고향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다. 불교를 믿는 사람은 불교의 하늘에, 개신교를 믿는 사람은 개신교의 하늘에, 천주교를 믿는 사람은 천주교의 하늘에 그 고향이 있을 것이고 그 곳으로 잘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는 스님, 목사, 신부들이 있을 것이고, 나에겐 어머님이 나의 종교라, 나는 스스로 혼자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고 늘 다짐하고 있는 겁니다. 어머님을 생각하는 나의 굳은 신앙으로 그 어머님의 존재를 믿으면 믿을수록, 확실히 그 어머님으로 가는 길이 훤하게 보일 거라고. 1)
윗글은 조병화 시인이 ‘오산인터체인지’를 쓰고 나서 작품에 대한 소회를 밝힌 대목이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로 형상화하면서 인간의 유한성을 자각하면서 동시에 삶을 긍정하는 시세계를 담고 있다.
“허허 들판”에서 “작별을 하면/말도 무용해진다”면서, “어느 새 이 곳” 즉 죽음의 문턱으로 들어선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자, 그럼” 하면서 삶과의 작별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가 죽음을 ‘고향’으로 파악하고 있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따라서 고향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오산 인터체인지’의 상징성은 고향 즉 죽음의 세계로 담담히 가는 것이다. 인간의 고향이야말로 죽음의 집이며 어머니의 집임을 그는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넌 남으로 천 리/난 동으로 사십 리” 떨어진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시인은 인간 생명의 유한성을 담담하고도 선명하게 고백하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오산 인터체인지’라는 인생의 교차로에서 죽음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 죽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2)
또 다른 詩評을 하나 더 보기로 하자.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 보인다. 사랑이 갈라서는 것이 보인다. 맞잡았다 놓는 당신과 나의 손을 안개가 물컹물컹 잡아 쥔다. 안개를 두른 당신과 나의 행로에 대해 알 방도가 없다. 나는 동쪽으로 사십 리를 가지만, 당신은 남쪽으로 천리를 가야 한다. 내가 가야할 거리보다 당신이 가야할 거리가 까마득하게 더 멀다. 당신이 나를 떠나보내는 거리보다 내가 당신을 떠나보내는 거리가 훨씬 멀다. ‘자, 그럼’ 이라는 대목은 또 어떤가. 가슴이 아프다. ‘자, 그럼’ 이라는 표현에는 뒤편이 숨겨져 잇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에게 당신은 나에게 단호하듯 순응하는 듯 ‘자, 그럼’이라고 말하지만, 그 음색에는 애써 숨긴 슬픔의 기색이 역력하다. 3)
두 번째 ‘오산인터체인지’를 제목으로 시를 쓴 시인으로 오산 토박이 조석구시인의 ‘오산인터체인지’를 소개한다.
오산인터체인지
먼 여행이나 나들이에서
지친 나그네로 돌아올 때
독산성이나 무봉산이 보이면
옛 친구처럼 반갑고 기쁘다
나들목에 들어서면 하늘도 푸르고
안도의 한숨으로 바람마저 감미롭다
귀소본능인가 평온한 시가지는
나를 포근하게 감싸 안아 준다
활기찬 변화 행복도시 오산 |
흙으로부터의 긴 시간은
유년의 감자꽃 추억과
내 서러운 전설의 21페이지
따뜻한 저녁 불빛 남촌동
돌아갈 수 있는 집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터미널에서 내려 멜빵끈을 조이면
올제는 햇빛 쏟아지는 벌판
아침 이슬 내린 초원이려니
하늘 높이 날아라 아날로그의 우울이여
조석구 시인의 ‘오산인터체인지’ 전문이다.
오산을 고향으로 둔 시인은 오산의 지명을 자연스럽게 그리고 친근하게 시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먼 길에서 돌아 올 때 눈에 익은 풍경을 보게 되면 반가움이 앞선다. 그 풍경은 아마 나들목 쯤에서 보이는 풍경일 것이다. 먼 여행길에서 나들목에 들어서면 평소엔 아무 느낌이 없었던 풍경들이 얼마나 반갑고 편안함을 주었던가! 시인은 그 표현을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갑고 안도의 한숨까지 내 쉬게 되며, 불어오는 바람까지 감미롭다고 했다. 마치 첫사랑의 가슴 뛰는 설렘도 이런 기분일까!
나들목을 통해 돌아오는 고향은 평온한 곳이다. 모든 생명체는 귀소본능이 있다. 처음 시작했던 곳, 나를 잉태했던 곳, 그 근원을 찾아 다시 돌아 온 곳은 평온한 곳이다. 그리고 숙명같은 허허로움과 고독이 머무는 곳이 아닌가! 앞에서 조병화 시인이 고향을 찾는 것은 자연의 고향과 영혼의 고향을 찾는 것이라 했다. 그도 나들목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세 번째 ‘오산인터체인지’를 제목으로 시를 쓴 이가 있다. 그 또한 오산 토박이 서정택 시인이다. 그의 ‘오산인터체인지’를 소개한다.
서정택시인은 오산 두곡동에서 태어나 줄곳 오산에서 살았다. 2006년 [농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2013년 중앙시조대상 신인상을 수상했으며, 2016년 첫 시조집 [벗꽃의 국적]을 출간하기도 했다.
오산인터체인지
봄날의 햇살을 돌돌 감고 피는,
잉크 바랜 편지지 안으로 첨벙 빠져드는,
한통의 편지 같은 산수유 키스 자국
그대를 앞에 두면 입술이 얼얼하다
바퀴 닳은 마음은
어쩔 수 없음이 안타까워
굴곡진 길의 모퉁이를
미끄러지다 멈추겠지만 할 수 있다면
내 편지가 들어설 빨간 우체통은
산수유를 이별했던 모든 연인들에게
한갓진 톨게이트의 각별한 문이었으면 한다.
그 문은 고리가 떨어져 나간,
눈이 시린 별리처럼,
일련번호가 지워진 티켓처럼,
누군가에게 또, 버려질지 모르겠지만
그러하니 갈라진 고속도로보다는
일차선 만남 한 장이 철썩,
우표처럼,
오산인터체인지에도
붙었으면 좋겠다.
젊은 청춘의 사랑은 얼마나 가슴 설레고 뜨거운가! 또한 청춘의 사랑은 펄펄 끓는 열기만큼 냄비 속의 물처럼 이내 식어버리는 가벼움도 있다. 그러나 인생에 있어 몇 번의 인연의 고리가 있어 돌고 돌아 다시 만날 날이 오기도 한다. 나들목은 숱한 인연들이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길목이다. 그래서 시인은 하찮은 인연이라고 치부할지 모르는 그래서 또, 버려질지 모르지만 우표처럼 철석 나들목을 통해 그 인연이 붙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있다.
오산인터체인지가 생긴 이래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통해 들고 나며 우리 삶의 숱한 애환과 사연들이 이어진다. 아마 오산인터체인지가 있는 이상 이 과정은 계속될 것이다.
이렇게 한 주제를 가지고 여러 작가들이 시대를 이어가며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쓴 예로 중국 북송(北宋)의 이성(李成)에 의해 처음으로「소상팔경도」가 그려진 것을, 그 후 송적(宋迪)이 ‘소상팔경’을 그렸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초기부터 말기까지 줄 곳 유행했다. 이처럼 수백 년에 걸쳐 끊임없이 그려졌으며, 고려 명종은 문신들에게 소상팔경을 소재로 글을 짓게 하여, 이인로(李仁老), 이규보(李奎報), 진화(陳澕), 이제현(李齊賢) 등 여러 문인들이 소상팔경시를 남기고 있어 당시 인기 있는 주제였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한 주제를 가지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문화가 오래 전부터 이어왔음을 볼 수 있다.
이렇듯 ‘오산인터체인지’라는 주제로 여러 시인들이 시를 쓴다는 것은 나름 의미 있는 일이라 본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 주제를 가지고 더 많은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기를 나름 기대해본다.
1) 1971년 ‘조선일보 사람들’ A26면 참조
2) http://cafe.daum.net/ynsu/pyYH 시평 참조3)http://blog.daum.net/rheesang100/2542 -문태준 시평 중에서- 참조
첫댓글 '나들목' 참으로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우리 말이지요.
1968년 그때 6학년 학교 옆으로 도로가 만들어 지고 있었다
우리들은 도로가 일부분 만들어 진 곳에서 달리기를 마음껏 뛰었다
그때부터 우리나라가 제대로 만들어지고 있구나 생각하였다